추천사
꾸준히 묵상하고 연구한 결정적 작품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제 아더. P. 스탠리는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말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끊임없는 계속이다. 잠언에서 율법으로, 율법에서 교리로, 교리에서 위안의 말씀 등으로 연속의 연속이다. 결국 다함이 없는 무진장의 교리와 교훈과 명령과 축복과 지혜와 지식의 광맥이요, 보화의 대해이다."라고 하였다.
로마서는 성경의 핵심적 진리를 다룬 바울 서신 중의 하나이면서, 바울 서신 열세 권 중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심오한 교리 서신이기도 하다.
금번에 유중근 목사님께서 그동안 꾸준히 묵상하고, 연구한 결정적 작품으로 로마서 강해서인 <복음의 빚진 자>를 출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여 마지 않는다.
교리를 다룬 설교가 흔히 건조하고 딱딱하기 쉬운 난점이 있음에도, 본 강해서는 알기 쉽고 간결하게 본문을 해석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본서가 평신도 뿐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로마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하면서 추천하는 바이다.
총신대학교 전 총장, 성복교회 담임 김의환 박사
하늘의 소리, 신령한 양식
기독교가 설교의 종교이기에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만 청중을 향해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성경에 충실해야 하는 동시에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 하는, 땅의 옷을 입고 땅의 언어로 청중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금번 로마서 강해의 <복음의 빚진 자>를 발간하신 유중근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면서 진실한 그의 인격과 삶을 반영시킨 설교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성 목장에서 주일 강단을 통하여 매주 선포된 시리즈로 로마서 강해 설교는 한 주일도 빠짐없이 유중근 목사님의 진액과 눈물을 쏟은 산고 끝에 탄생시킨 옥고들이다. 하늘의 소리, 이 신령한 양식이 해성 목장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하는 신앙인들에게도 같이 나누는 꼴이 되어, 개인과 공동체에 영혼의 푸르름이 더하기를 기대하며 본 설교집을 추천하는 바이다.
특별히 어느 때보다 말씀의 부흥이 요구되는 시대에 본서를 읽는 독자들의 말씀의 본질, 신앙의 본질,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는 동기부여가 되기 바라며, 초대교회의 순교적 신앙과 복음의 위대함에 대한 각성운동이 일어나는 촉매제가 되기를 아울러 소망한다.
성서대학교 교수 교육학 박사 오윤선
머리말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
도처에 넘치는 죄로 인하여 감각이 무디어져서 이에 대한 진실한 회개가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때로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아간이나 가룟 유다같이 "나는 죄를 범했다!"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를 느끼고, 통찰하고 회개하여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하신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심령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무어는 "영혼 깊이 느껴지는 참회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죄인만이 알 수 있는 죄 사함에 대한 최초의 기쁨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언약은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이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해성 목장에서 선포된 말씀을 정리하여 로마서 강해를 출간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날이 있기까지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함께 나누며 누리게 해주신 성도들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추천의 글을 써 주신 은사 김의환 박사님과 오윤선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 교정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이 책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은 등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독자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해성 목양실에서 유중근 목사
목차
▣ 추천의 글/김의환 박사 5
▣ 추천의 글/오윤선 박사 6
▣ 머리말 7
▣ 로마서 1:1-7 바울의 문안 인사 12
▣ 로마서 1:8-17 복음의 능력 20
▣ 로마서 1:18-32 인간의 죄상 27
▣ 로마서 2:1-5 판단하는 죄 36
▣ 로마서 2:6-16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43
▣ 로마서 3:12-18 의인은 없나니 51
▣ 로마서 3:19-31 율법과 복음 60
▣ 로마서 4:1-12 품삯과 은혜 67
▣ 로마서 4:13-25 온전한 믿음 75
▣ 로마서 5:12-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83
▣ 로마서 6:1-11 그리스도와 함께 받은 세계 89
▣ 로마서 7:1-17 율법이 죄냐 97
▣ 로마서 8:1-11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104
▣ 로마서 8:12-17 양자의 영 113
▣ 로마서 8:18-26 피조물들의 소원 122
▣ 로마서 8:28-30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130
▣ 로마서 8:31-39 영원한 승리 138
▣ 로마서 9:1-5 바울의 근심 145
▣ 로마서 9:6-18 하나님의 예정 섭리 151
▣ 로마서 9:22-33 시온의 반석 157
▣ 로마서 10:1-15 아름다운 발길 166
▣ 로마서 10:16-21 하나님의 교육 방법 174
▣ 로마서 11:1-12 이스라엘의 실족과 이방의 구원 180
▣ 로마서 11:13-24 자긍하지 말라 187
▣ 로마서 11:25-3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192
▣ 로마서 12:1-2 영적 예배 202
▣ 로마서 12:3-13 성령의 은사 209
▣ 로마서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217
▣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 224
▣ 로마서 13:8-10 사랑의 빚 231
▣ 로마서 13:11-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238
▣ 로마서 14:1-6 음식과 믿음 246
▣ 로마서 14:7-8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253
▣ 로마서 14:13-23 하나님의 나라 259
▣ 로마서 15:1-13 연약한 자를 담당하고 266
▣ 로마서 15:14-21 바울의 자랑 274
▣ 로마서 15:22-33 바울의 기도 부탁 282
▣ 로마서 16:1-16 믿음의 사람들 289
▣ 로마서 16:17-27 선한 데 지혜로운 자 296
로마서1:1~7
바울의 문안인사
로마서는 전도자 바울의 최대 역작으로 갈라디아서와 함께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교리서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로마서 전체의 통일성과 일관성으로 보아 바울의 저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이단, 즉 에비온파,(이방인 기독교인도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고 마태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는 인정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와 엔크라타이스파(염세주의를 추종하므로 육식, 음주, 혼인 등을 금하고 외경을 믿음)는 로마서의 교리가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바울의 저작설을 부인했습니다.
로마서의 기록 시기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했던 당시로 고린도에서 AD 57 년경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로마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감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일 로마서가 없었다면 어거스틴이 회개할 수 있었겠으며, 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칼빈은 "성경은 로마서에 비쳐 볼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고, 루터는 "로마서는 신약 성경의 중심부요,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의 관장이었던 필립은 "세계를 다 준다 해도 대영 박물관은 바꾸지 않겠지만, 만일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로마서가 한 장만이라도 있다면 이 박물관과 바꾸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로마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보화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1. 로마 교회의 설립 경위
언제 누구를 통해서 로마에 복음이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카톨릭의 견해
베드로에 의해 로마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나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보아서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즉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우스 통치 제 9-10년에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행15:6-7), 그 당시 로마에 갔다는 언급이 없으며, AD 60 년경에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했다거나 로마에 베드로가 있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행28:14-15).
더불어 로마서 십육 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인데,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로마 교회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2) 오순절에 은혜 받은 성도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는 견해
오순절에 은혜받은 성도들 중에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행 2:10)이 있었다는 말씀으로 보아 그들이 은혜받고 돌아가서 성령의 불씨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은 백부장 고넬료도 그 후에 로마로 귀대하여 이 복음 사역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와 전도자들을 매질했던 간수가 빌립보 교회에 초석이 되었듯이 로마 교회도 그렇게 은혜받은 성도들이 한 알의 밀이 되어 구원의 결실을 맺게 된 줄 압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때에 이미 로마에 있는 교회가 세계 각처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8절). 거기는 가이사 황제의 집안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빌4:22).
2. 본서의 특징
로마서는 바울 서신중에서도 대서신이요, 갈라디아서와 더불어 기독교의 초석이 되는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는 교리'입니다. 물론 로마서가 신학 전반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에는 에베소서에 있는 교회론이나, 골로새서의 그리스도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같이 말세론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편, 12장에서 16장까지는 실천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진리는 바울의 창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룩된 구원의 복음인데 그것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교리화 시킨 것입니다. 이 진리의 보화가 카톨릭에 의해 유린을 당하다가 종교개혁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는 이신득의의 교리에 대해서는 투쟁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을 방지하고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바울은 본래 히브리 이름으로는 사울인데,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후 로마식으로 바뀌어 바울(작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주장을 따라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는 자기를 예수의 종 바울이라 칭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종'(δουλοs)이라는 말은 '자유가 없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유가 없는 노예의 신분이라면 이는 불행입니다. 체첸 공화국이 러시아 군에 대항하여 피를 흘리면서도 항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들의 주권을 간섭받지 않겠다는 곧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에서입니다.
자유는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자유를 던져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 곧 노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누구의 멍에 아래 있느냐'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을 때 일본은 우리를 어떻게 하였습니까? 황국 신민으로 일본 제국을 위해 싸우자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누릴 기업이 없었듯이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일로는 우리가 주권을 회복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멍에 아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들어가 순종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멍에 아래 새로 지음을 받은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절).
진리의 멍에 아래 자신을 드린 일로 바울은 사도 곧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임명을 받은 것입니다. 국가의 불림을 받아도 영광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불림을 받아 천국 일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너무도 당당하고 위엄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할 때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제사장이 되었으나, 사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받은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경건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또한 그 영광은 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총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4. 미리 예언된 복음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고 축출될 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라고 말씀하신 이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메시야는 인간과 근본을 달리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으나 오신 메시야를 자기 백성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불행이었다면, 오늘 메시아를 알지 못해 복음을 외면하는 것은 인류의 불행입니다.
구원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각이 열려서 이 진리를 바로 알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주님은 다윗의 혈통에서 오시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4절).
이 말씀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로서 믿음의 확증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5. 그로 말미암아 누리는 은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5절).
과연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모인 무리들에게 충만하였고, 성령과 함께 권능을 받은 이 무리들로 인하여 생명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나를 도구로 들어 쓰시기를 기뻐하실 때 거역하지 마십시오. 받은 은사를 땅에 묻어 녹슬게 하지 마십시오. 경성 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어 영력을 소멸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기회를 잃지 말고 주님께 헌신하십시오.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5절).
누가 사울을 진리의 증인되게 하셨습니까?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내게 임한 주님의 은총을 감사드리십시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절).
6. 문안 인사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절).
주의 진리는 어느 지역이나 시간, 또 특정 인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론 대상과 지역에 기인하고 있으나 이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성도'(aγιοι)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으나(신33:3), 신약에서는 신자에 적용되는 말씀으로(행9:13) 이는 '하나님께 바친 자' 또는 '구별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은혜'는 헬라인의 인사요, '평강'은 유대인의 인사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빌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 멘 -
로마서1:8~17
복음의 능력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절).
놀라운 사실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로 인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순절 사건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13:31).
겨자씨는 다른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거기에 새들이 서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장 과정입니다. 우리는 구원 사역과 생명 사역에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에 매여 종살이하지 않고 진리의 멍에 아래 살게 됨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1. 바울의 기도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절).
충성된 종의 기도, 이는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모세의 기도 팔이 올라갈 때 여호수아 군대가 승리하였고, 내려올 때 패배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중요성, 곧 기도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
사무엘의 기도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외적이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든든한 방패와 간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의 팔이 왜 내려오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아론과 훌처럼 기도의 사명자로서 믿음을 같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며 공동목표를 지향해 나가는 진리의 역군들입니다.
하늘나라 상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할지라도 믿음 여하에 따라 일어나는 역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신학생들이 교회를 개척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데 그들을 양육할 목회자의 손길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족한 사람에게도 흑룡강성 모신학교에 와서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신학생 곧 목회자를 한 사람 키우는데는 한 달에 삼만 원이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절).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증명하고 로마에 이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불타는 사명감에서 올린 기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우리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기도하므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복음의 장애물
자연의 세계에 약육강식이 있듯이, 인간사회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의 CIA 제임스 울시 국장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거대한 붉은 용 한 마리를 잡으면 평화가 영구히 깃들 줄 믿고 싸워 왔지만 그것이 죽고 나니 세계 각처에서 독사들이 서로 물고 찢고 싸움을 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어떠한 이념이나 철학에 의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그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학 문명이 발전하면 가능할까요? 여전히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우리의 본향은 세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원을 사모하는 인생의 꿈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을까요? 오직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이것이 영생의 진리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그처럼 원했던 이유는 이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0-11절).
사실 바울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찾아가기를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롬15:20). 그러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어디든지 또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 성령을 받게 했던 일(행8:14-17)은 사도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능률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중복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3절).
물론 바울이 몇 번이나 로마에 가고자 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의 불타는 소망은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위한 바울의 집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
그럴지라도 그런 장애가 전도자의 길을 계속해서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천 년 전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고 거듭난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불타는 사명감이 그처럼 큰일을 할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전히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뿐이라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복음 사역에는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3. 불타는 사명 의식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란 언어적인 대조로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언어권과 그 밖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요,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는 교양의 대조로서 모든 이방인을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믿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명 의식입니다. 모든 생명에 대해 빚진 자라는 말은 바울이 모든 사람을 대했다는 것이나 어떠한 영향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직 그가 받은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복음이요, 그가 받은 사명이 모든 인류를 상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십시오. 전도자 바울이 받은 영광이 시들지 않는 것은 이 복음 사역을 위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 믿음과 사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둠 속에서 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죄인 중에 하나로 생을 마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남긴 복음은 우리가 믿는 복음으로, 이 복음은 그가 받은 사명과 믿음을 따라 오늘도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만 부여된 사명인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을 존귀하게 하신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위대한 사명을 가진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가 있다면 복음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을 통해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4. 복음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인류의 소망을 무엇으로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생명의 복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보십시오.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참화 속에 피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고 없이 닥치는 재난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불행을 벗어날 길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참된 평안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품을 찾으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얼마 전에 "목사님이 한 번만 기도해주시면 제가 살아날 수 있겠는데…" 하고 외로운 병실에서 투병하는 어느 성도의 이야기를 듣고 상계동에 있는 백병원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코에는 산소 호흡기를 끼고 수술 부위에도 호스를 끼우고 있었습니다. 수술 후 경과가 나빠져서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예배를 드린 후 혈압과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그날로 산소 호흡기와 호스를 뽑고 죽을 먹고 또 밥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이 복음은 내게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도 바울같이 만인에게 이 복음 증언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1:18~32
인간의 죄상
바울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상을 논하고 있는데, 여기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언급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이 말씀이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죄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추악한 죄악을 성령의 조명으로 밝혀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식별할 수 없듯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는 세속에 빠져들어 죄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징계로(레10:1; 민16:33), 또는 이방인들이 범죄 한 일로 말미암아 나타났고(렘1:11-17; 겔36:5), 신약에서는 불의에 대한 심판이 종말적인 심판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마3:7;살전1:10;계6:16).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절).
심판받을 죄악이 무엇입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행위입니다. 인간으로서 준행해야 할 본연의 임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므로 주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일본 고오베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또 도시가 무너져 내린 일로 "일본은 회개해야 한다."고 일본인 요시다 목사가 한국에 와서 기도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1) 인간 속에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는 인간을 제외하고 그 무엇에도 진리의 지식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의식도 인간 외에는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타락하므로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절).
2)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연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3-4).
여러분! 작은 눈으로 광활한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이 우주보다 큰 줄로 잘못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미미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일월 십 일 미 항공우주국(NASA)이 고리 모양으로 된 은하계의 사진을 공개했는데, 우주 속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지구에서 오억 광년이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주는 광활합니다. 그러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해보셨습니까? 또 우주에서 일어나는 은하계의 충돌 사건이 지구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지구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절).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그것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알게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3) 인간의 범죄로 어두워진 지식
우리는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누리는 문화적인 혜택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영감이 아니고는 알 수 없으므로 거기서 진화론과 무신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1-22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망한 죄악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2. 하나님께서 사람을 포기하시는 이유
포기는 징계보다 더 무서운 형벌입니다. 사람도 기대할 가치가 없어지면 포기해 보리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8).
하나님의 징계가 어떤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고하게 사람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의사들이 환자를 대할 때 작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종합병원으로 보냅니다. 그렇다고 종합병원에 가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므로 이미 치료받을 시기를 잃어버린 환자라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같이 하나님도 동일하게 처리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4-25절).
3. 하나님께서 포기해버린 상태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절).
이십 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불행을 가져다 준 것 중 하나가 AIDS라는 병입니다. 암이 무섭다 할지라도 전염되지 않는데 그 병은 놀라울 정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원인으로는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므로 발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한 대로 받는 보응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절).
하나님께서 내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1)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29절).
이것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받은 저주입니다. 아무리 분별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오물 쓰레기를 보물로 여기지 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이런 오물 쓰레기로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모든 불의는 일반적으로 부정과 불공평을 총괄하는 말로서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추악, 이에 앞서 간음이 삽입된 사본도 있습니다. 추악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악질입니다.
탐욕,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입니다. 세상은 끝없는 욕망으로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악의, 추악이 외적인 악이라면 악의는 내적인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29절).
시기는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죄악의 요소입니다.
포퍼(Pope)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덕성들이 임종의 순간까지 싸워도 오직 죽음 외에는 시기심을 정복할 자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기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탐심이라는 자와 시기라는 자를 불러 "너희는 무엇이든지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한 자에게 그것을 주고 다음 청구하는 자에게는 갑절을 주리라" 하였더니 탐심이라는 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가만히 있었는데, 시기라는 자가 탐심이라는 자의 두 눈을 잃게 하기 위해서 "내 눈을 하나만 뽑아 주시오"하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시기는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살인은 무고히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지만, 자기 생명을 해치는 것도 살인입니다. 이천 년 전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는 육백 년 동안 검술 경연대회를 열어 살인을 일삼는 일들이 있었는가 하면 암살, 독살, 노예들을 죽이는 일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콘스탄틴 대제 때에 와서야 없어졌습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아끼고 사랑하고, 위해주어야 할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분쟁은 쳐서 넘어뜨린다, 또는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버린다 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사기는 본래 물고기에게 던지는 미끼를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거짓말로 인간을 실족시킨 마귀의 술책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둠에서 종살이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자기가 놓은 올무에 자기 스스로 걸려드는 행동을 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13).
악독이 가득한 자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오해하거나 악의로 받아들이는 간악한 자들입니다.
3)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 능욕, 교만, 자랑하는 자" 입니다.
수군수군하는 자 교활한 방법으로 악한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독사보다 더 악독하다”(박윤선 박사 주석)고 했습니다.
비방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험담과 중상모략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반대로써 그런 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아십니까? 죄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빠질 때 하나님은 그 죄를 따라 심판을 내리십니다. 능욕하는 자는 면전에서 사람을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근로자를 학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9).
교만한 자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우월감에 사로잡힌 자요, 자랑하는 자는 교만과 관련되어 남을 멸시하고, 자기를 과시하는 자입니다.
4)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하고, 배약하고, 무정하며, 무자비한 자" 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악한 자로서 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악을 모의하는 자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 부모공경은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입니다. 또한 불효자는 돌로 쳐 죽이라(신21:18-21)고 하였습니다. 나이 들고 연약해진 부모를 짐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땅에서 잘되고 복을 받는 길이 효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매한 자는 사리분별이 없는 어리석음을 의미합니다.
배약하는 자는 계약에 진실하지 못한 자, 곧 배반자입니다. 주의 장막에 유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시15:4) 하였습니다.
무정한 자는 혈육에 대한 애정이 없는 자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도 제 새끼를 아는데,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자비한 자는 남의 불행에 대한 무관심, 곧 동정심이 결여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절).
무서운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린 쓰레기 인생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극형을 면하지 못할 죄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다'고 부추긴다 하였습니다.
지존파 두목이 감옥에서 한 말은 끔찍한 살인자들을 향해 "과연 내 동생답다"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는 어느 부분에 허물이 있든지 범죄한 인생은 회개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할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심판받을 죄 가운데 살면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자신을 조명하는 이 시간 핑계나 변명에 급급하지 말고 엎드려 회개합시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혹 물로서 날 씻든지, 혹 불로서 태우든지"
우리 모두 예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아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2:1~5
판단하는 죄
바울은 로마서 이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삼장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깨뜨리고 율법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이지만 아브라함의 혈통과 하나님의 약속을 혼동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는 혈통에 차등이 없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죄
유대인의 죄상이라 하여 이방인과 다를 바 없으나 유대인은 이방인에 비해 받은 은혜가 많은 만큼 그리스도 예수를 배역한 행위는 더 큰 죄가 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과오를 보십시오. 그들은 민족적 우월감에 있었습니다. 물론 자존심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진 자가 의인이 아니라 지키는 자가 의인입니다.
일본 고베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해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살려 슬기롭게 대처하여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일본의 매스컴도 우리나라에서 보도된 것을 인용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더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본받고 배울 바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발생하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또 이성을 잃은 행동으로 공중질서를 파괴하는 일도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 할 줄 압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불행을 디딤돌로 삼는 지혜입니다. 금물이라면 우월감에서 오는 자만심입니다.
이차 대전의 전범국 독일과 일본을 보십시오. 구라파에서는 게르만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만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일본은 황국 신민이라는 우월감으로 그처럼 많은 인명과 재산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교만으로 연합국에 의해 패전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꺾일 줄을 모르니 대단한 민족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긍지와 자부심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택받은 민족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는 복을 받았으나, 진리를 등지고 죄를 지을 때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이스라엘이 불레셋 군에 참패하여 장정 삼만이 전사하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법궤는 원수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삼상 4:10-11).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있다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계명을 실천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면 복이요, 거역하면 죄가 되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안전한가요?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 없이 죄를 지어도 심판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깨닫는 것이 복이요, 지키는 것이 복이 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때 정죄하던 무리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모두 떠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귀하고 주님 앞에서 받은 직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 맺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정죄하지는 않았습니까? 진실한 회개로 사유의 은총을 힘입기 소원합니다.
2. 사랑의 권면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낳다”(참27:5).
사랑의 권면이라면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삼가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투표하여 세운 국가 최고의 통수권자로서 국민은 대통령을 존중하여야 하고 또 민족의 자긍심을 지켜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안녕과 질서는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3. 주의 인자를 멸시하는 죄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절).
'멸시하였다'는 것은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왜곡하고 남용하므로 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리는 복을 당연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성에 의인 한 사람을 찾으시던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심판을 하셨는데 그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을 당하리라 하느니라"(렘5:12-13).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였으나 진실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한량없이 임하는 은혜라고 언제나 그럴 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주의 인자가 아니고는 내가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복종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또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억제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래도록 관용하십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회개하고 감사드려야 마땅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리어 멸시하였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데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이런 것이 심판받을 무서운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현상을 말세의 징조로 경고하였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3:3-4) 하였습니다.
4. 회개를 모르는 자들이 받을 심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절).
무서운 일입니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는 이성 없는 짐승보다 우매하고 무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짓는 죄악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이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회개를 모르는 완악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마지막까지 사무엘에게 왕위를 내게서 옮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도 회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받은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즉시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땅에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람 앞에서 당하는 수치는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는 무서워 할 줄 몰랐습니다. 완고한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보십시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3).
결국 사울은 악령에게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절).
덕을 쌓아야 복이 되지요. 하늘에 보화를 쌓을 줄 모르고 썩어질 것에 종살이를 하였다면 기회를 잃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심방을 하고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집주인이 과거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그동안 음식점이 잘되어 오 층짜리 빌딩을 구입했더니 아들들이 그 집을 탐내어 재산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질이 중요할지라도 사람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 되면 물질은 폭군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6·25 후 짧은 기간에 많은 발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치와 향락을 따라 늘어나는 소비 풍조는 선진국을 앞서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9).
주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선한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돼지가 도토리는 주워 먹으면서 도토리나무가 귀한 줄을 모르는 것같이 죄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면서도 하나님은 생각지 않는다."(Starke).
은혜의 배역자가 되지 맙시다. 아직도 회개를 모르는 완고한 마음이 있습니까?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의 은총을 힘입기 소원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눈에 들보를 뽑은 후에 밝은 눈으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뽑아 줍시다.
진정 주의 인내와 긍휼로 사유의 은총을 입었다면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2:6~16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절).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와 배치되는 것이라 하여 문제를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가들이 말한 것을 보면,
1) 복음이 없는 사람의 운명을 말한다.
2) 복음이 아닌 율법의 해설이다.
3) 일반적인 하나님의 법칙을 말한 것이다.
4)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의 일을 말한다.
찰스 핫지(Charles Hadge)는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해설하는 것이고 복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목적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1. 행한 대로 받는 보응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유의해야 할 것은 선한 행위 때문에 조건부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선한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아니하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5-10).
행위가 조건으로 제시될 때 보상은 갚아야 할 빚이 되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더욱 충성을 다짐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 영생 얻을 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절).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선한 뜻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이번에 사랑의 봉사단을 인솔하여 태국 산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배 장로님은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 이중 통역을 하는데도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희생을 감수할 때 더 크게 힘입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까? 영광과 존귀, 또 썩지 아니함을 따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행동, 또는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영생임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2) 심판받을 자
낮과 밤이 분명하듯 천국과 지옥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낮과 밤은 행복과 불행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어 안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주 아래 떨어진다고 하였습니까?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8절).
세계 어느 나라를 보든지 큰 차이는 없겠습니다마는 우리나라의 정당정치는 국가 발전을 위해 좀 더 잘할 수는 하는 기대가 간절합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정권을 잡으려는 의욕이 당연하다 할지라도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국민을 멍들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가 국가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도 노사 파업과 학생들의 데모가 없어지고 국민 모두가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 일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니라 교회가 담당해야 할 분야입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잘못된 사이비 집단들이요, 또 진리를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보십시오. 그러한 자들은 불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무교회주의 자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교회를 등지고 불의를 따르는 일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노와 분으로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9절).
환난은 '내려 누르다'는 뜻이요, 곤고는 '고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여 심판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복종하여 구원의 은총을 힘입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유대인과 헬라인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9-10절).
바울은 환난과 곤고 뿐 아니라 영광과 존귀, 평강의 복도 유대인과 헬라인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대인과 헬라인에게만 적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이 약속을 받았고 율법과 복음도 그 백성으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먼저 태어났다는 일로 나중 태어난 자를 돌보아 주는 것이 형제의 도리라면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대열에 앞장서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믿음의 역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따라 취하심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11절).
여기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 닮기를 원하신다면 달리 바랄 것은 없을 줄 압니다.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는 주저하지 마십시오. 더 큰 영광에 이르도록 충성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율법을 가진 자와 지키는 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엄히 말하면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만 지켜야 할 의무 조항이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인류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여기서 율법 없이 범죄 하였다는 말씀은 계명을 알지 못하고 범한 죄를 의미합니다. 세상 법은 어느 때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까? 시행령이 선포되는 그 시간부터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교통질서를 위해 버스 전용 차선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 안전띠 착용을 비롯하여 주정차의 법규도 시행되므로 차를 가지신 분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재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런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의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공의는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고도 불이행하면 심판을 받게 되고, 모르고 범한 죄도 여전히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어떤 사람이 자신을 속이는 자인지 아십니까? 세속에 물들어 경건의 능력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성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히4:12).
그런데도 마음이 강퍅하여 반응이 없다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 오천 명 거꾸러진 사건은 말씀의 능력 앞에 꺼꾸러진 회개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력을 잃고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4. 양심의 법과 의문의 법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떠한 길이 있는 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이방인의 양심을 운운한 것은 유대인의 잘못된 율법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선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딤전1:19, 3:9). 그러나 이것은 믿음 안에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죄책감에 번민하고 밤잠을 설치는 일이 없으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범죄한 다윗을 보십시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32:3).
문제는 화인을 맞은 양심입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그러한 양심을 가리켜 "더러워진 양심"(고전8:7)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이 마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이 말씀 역시 복음 외에 영생 얻을 길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욥의 경건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은 일과 백부장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나라에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은혜 받을 자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복을 받을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17-21절).
만일 과학도가 자기도 믿을 수 없는 학설을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한다면 그것은 속임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가 영생에 대한 교육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1-23절).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참으로 무서운 죄악이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25절).
우리가 받은 복이 귀한 줄 알았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이 능력을 잃지 않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29절).
우리 모두 마음에 할례를 받아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3:12~18
의인은 없나니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논한 다음, 이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논하기 전에 몇 가지 문답 형식으로 유대인의 죄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심판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2) 유대인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지하겠는가?
3)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면 심판할 이유가 무엇인가? 입니다.
1. 세 가지 답변
1)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심판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으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롬9:4-5).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는 '신임을 받았다' '신뢰한다'는 의미로서 사도행전7:38: 히브리서5:12; 베드로전서4:11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명백한 특권이며 또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우월감에 젖어서 모든 사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저버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 됨을 감사드리고, 영생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증인 된 임무를 바로 이행해야 합니다.
2) 유대인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지하겠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3절).
이는 선택받은 유대인 중에서 일부가 믿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조상들이 맺은 언약에 의하여 구원받을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범죄하면 이방인들과 동일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무슨 효력이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으므로 단언하기를,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4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이 잘못되어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저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실족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구원을 하기에 부족하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음을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한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므로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 심판을 받는 것이 부당한가?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5절).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 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부당하냐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필요악의 존재가 있는가 하면 필요 선의 존재도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하나님께는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홀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이 말씀은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상반된 어법으로 역설적인 효과를 살리려는 것인데 팔 절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8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 것이 사실이나(5:20),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6:1-2).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떠한 미명하에서도 죄를 수단으로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하다" 이것은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당과 이념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죽이는 것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치하합니다. 그러므로 공산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동도 가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론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다면 반드시 수단도 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죄 아래 있는 인생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육신은 모두가 동일함과 같이 죄인 된 본질도 동일합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죄인 된 근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의인은 없나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
그렇다면 성경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6:9).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하였는데 그들도 죄인인가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본질상 죄인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아도 목사님의 기도는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좀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도 죄인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하였은즉 우리 모두가 멸망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불신자들과 차이가 있다면 성도는 사유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그 은혜가 중요합니다.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가 죄인이로되 사유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이 의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깨닫는 자도 없고'
깨닫는다는 말은 지혜가 있어서 진리를 터득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경건과 도덕적인 자각을 의미합니다. 그런 지각이 없는 자는 우매하고 무지하여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0-31).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오늘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연적인 현상으로 평범하게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유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남미 콜롬비아에서는 진도 6.5의 지진으로 사망이 37명, 부상 230명이었으며, 일본 고베에서는 진도 7.2의 지진으로 5,246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2만6천8백여 명에 이르며 재산 피해는 무려 13조 엔에 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의 두 배가 된다고 합니다. 1995년 1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진도 6.6의 지진으로 32명이 죽고 300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으며, 1993년 9월 30일 인도에서는 진도 6.4의 지진으로 3만여 명의 사망과 실종자를 내고 한 개의 시와 7개 마을이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화산 폭발과 홍수, 가뭄으로 인한 피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종말적인 경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려고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없으니 이는 진리를 아는 지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7:11).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런 자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합니다. 빛과 어둠을 각기 좋아하는 자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이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들어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0-21).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절).
3. 타락한 상태
1)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중국인들의 무덤을 보면 죽은 자의 영혼이 출입할 수 있도록 봉분 전면에 문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쥐들이 출입하지나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면 그 속에서 무슨 냄새를 풍길까요?
일전에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자매에게 어느 청년이 꽃다발을 선물했는데 참으로 고마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향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사무실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그처럼 향기로운 꽃은 마음을 밝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어디에서, 누구를 대하거나 어두운 표정들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린 무덤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풍기는 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가나안 땅에서 나는 꿀을 맛볼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에는 가짜 꿀이 없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그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존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 무역 기구에 가입이 되었으므로 신용을 잃어도 문제려니와 기술이 뒤져도 경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방법이 국제 사회에서 통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창조적인 기술 개발과 함께 성실과 근면, 정직으로 신뢰도를 높여서 국제 사회에 뒤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의 자원 곧 영적인 자원을 개발하여 열국의 제사장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
3)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독사의 독은 신경을 마비시키고 생명까지 빼앗아 갑니다. 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말로 호리는 음녀의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7:21-23).
4) '그 밭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무슨 일이든지 생존에 따른 올바른 수단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일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직업에는 청부살인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런 자의 발길은 피 흘리는데 빠를 뿐 아니라 완전 범죄를 꾸미는 자들입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6-17절).
그처럼 죄 값으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면,
"주홍같이 붉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될"(사1:18)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직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으로 영원한 존귀의 복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3:19~31
율법과 복음
율법은 불의와 죄악을 밝히고 또 정죄합니다. 그것이 중요함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숲속의 나무가 곧게 보이지만 먹줄을 쳐보면 어디가 구부러졌는지 알게 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율법의 잣대에 비춰질 때 비로소 허물과 죄로 죽을 인생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S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십 년 전에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가장 못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로운 줄 알았을 때는 허영에 빠져 죄의 종살이를 하였으나 못난 사람임을 깨달았을 때는 주님의 긍휼을 힘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회를 잃기 전에 율법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율법의 역할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19절).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은 주석가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1)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기록된 율법이요, 이방인에게는 양심의 법(2:15)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모세의 오경을 가리키며 여기에 해당하는 자는 유대인이다.
3)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범죄한 인생이라면 이방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법을 어기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또 누구든지 법에 따라 다스리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될 때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선포하신 이유는 의인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19절).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2. 복음
1)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에 어떠한 오류나 약점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7:14).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은 의로운데 그 법에 비춰질 때 내 죄가 드러나서 심판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씁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건강한 줄 알고 있었는데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보니 악성 종양이 전신에 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의사를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무서운 중병을 앓고 있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방책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2)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은 유대인을 의식하여 복음을 증언하면서 예수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해 오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모세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선지자들을 인정한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바로 깨달았다면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복음의 역할
1) 차별이 없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절).
율법은 이방과 선민이라는 장벽이 있었으나 복음은 그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차별이 없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복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의에 이를 수 있는 은혜를 두고 말씀한 것입니다. 구원받을 기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자유 자나 매인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9-30절).
2) 복음 안에서 무너진 죄의 장벽
복음 안에서 회복은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의 회복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절).
여러분! 천국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을까요? 불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하나 되면 마음속에 천국이 이뤄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죄를 간과한 복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절).
'간과'는 대충 넘기거나 예사로 넘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의의 심판으로 멸망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지은 죄를 소홀히 여기거나 등한히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변하시나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절).
크게 감사드려야 할 일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용납될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범죄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용납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믿음의 법으로 얻는 구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 큰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주님보다 자기의 공적을 앞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립시다. 우리가 예수의 지체로 쓰임 받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절).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을 '우리가 결혼하노라'고 한 번역본도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믿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또 결론이었습니다.
이제는 의가 없고 공로가 없을지라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죄 많은 인생이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에 이를 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5. 복음은 율법의 완성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진리를 잘못 받아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천지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이라면 율법에 저촉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믿음을 어떻게 구분해야 옳을까요? 바울이 본래 가졌던 의의 개념은 율법을 따라 완벽주의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 하였습니다.
그처럼 율법에 철저하던 사람이 변화를 받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처럼 자랑하던 율법에 더이상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 외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같이 포기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초월하여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믿음, 이것이 성숙한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 맺는 믿음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풍성해지는 비결을 보십시오. 율법은 내가 지켜야 의에 이를지라도 성령의 열매는 은혜로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곧 내가 아닌 예수로 사는 믿음입니다.
또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갈5:22-23). 이것은 율법의 차원이 아닌 은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지만 믿음의 법, 성령의 법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4:1~12
품삯과 은혜
바울은 로마서 삼 장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교리를 설명한 다음(3:21-31), 사장에 와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 복음을 배격한다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배격하면 이는 선민의 뿌리를 부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그러한 믿음의 열조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의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1-2절).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절).
여기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말씀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의 근거가 될 수 없다.
2)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3)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율법이 아닌 다른 통로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아브라함이 그의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근거를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가 행위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2. 칭의의 은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절).
1) 품삯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불법 체류하여 일하고 있는 외국 근로자들로 인한 문제가 종종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약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고용을 했으면 임금은 당연히 지불해야 합니다. 일을 하고도 임금을 못 받는 경우는 노예가 아니면 전쟁 포로일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중국의 만리장성은 노예제도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 풀려 마귀에게 종살이를 하면 아무리 혹사를 당한다 할지라도 영생의 보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감사드릴 일은 의가 없는 자일지라도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골고다에서 숨질 때 구원받은 강도를 보십시오. 그에게 선행이 있어야 낙원에 이를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말씀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를 자랑하던 바리새인은 어둠에 떨어졌으나 자랑할 것이 없어 눈물짓던 세리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사랑하시므로 대가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장에서 거래하는 물건은 대가를 지불 해야 내 것이 되지만 사랑의 선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선물이 귀중합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분별 없이 받으면 그것이 올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의 집으로 뜻밖의 전화가 왔었는데,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목사님, 저를 위해기도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기에 이른 시간인 줄 알면서도 전화를 올렸습니다. 제가 000입니다. 이번에 무소속으로 서울 시장에 입후보를 합니다. 지방자치 단체장은 중립을 지켜야하므로 제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평소에 저를 잘 알아서 그런 전화를 주었다면 더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 그분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큰 뜻을 품고 일하겠다고 해서 "고맙습니다. 저도 기억하겠으니 열심히 뛰도록 하십시오"하고 전화를 끓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돈을 쓰지 않는 선거 풍토가 정착되어야 하겠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무엇을 바라고 모여드는 추한 광경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더욱 주의를 기해야 할 것은 마귀가 주는 선물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그로 인해 가룟 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매사를 부정적인 눈으로 보고 비판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진리를 위해 투자하십시오. 진리를 소유하기 위한 일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또 기회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의 차이를 보십시오. 생각이 다르므로 보는 눈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장미꽃을 보고 기뻐하는데 실패하는 사람은 가시를 보고 불평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악조건 속에서 기회를 찾지만 실패하는 사람은 좋은 여권 중에서 악조건만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하고 불평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나 같은 죄인이 무엇이기에 생명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까?'하고 눈물로 감사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풍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나서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는 생명 사역의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맹인 선교사 죠지 마테슨의 기도입니다.
"주여, 주께서 제게 주신 고통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저는 기쁨에 대해서는 수천 번 감사했으나 고통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고통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상받을 수 있는 세계만을 기대했습니다. 이제 역경을 견딤으로써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고 고통의 눈물이 곧 기쁨의 단비가 되게 하소서."
3. 사유의 은혜를 받는 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6-8절).
바울은 먼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의가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다음에는 성군 다윗이 말씀한 시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복된 자라 하였습니까? 불법을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불법은 죄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죄가 없는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충신 우리아까지 죽게 했던 살인자였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원 골수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책망한 말씀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12:10-12).
그러한 죄가 다윗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옥에도 티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허물은 허물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유의 은혜입니다.
마귀가 다윗을 정죄하지 못할 이유는 주께서 그 죄를 사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이 은혜가 귀중합니다. 사유의 은총을 힘입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1) 대속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속죄 제사를 드려 사유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제사가 아닌 그림자이므로, 진정으로 사유함을 받으려면 대속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2)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양심의 뉘우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뉘우침은 가룟 유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인간 양심의 잣대가 아닌, 진리의 잣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다윗과 같이 불법을 사함 받고 죄의 가림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인의 반열에 서게 할 줄 믿습니다.
4. 이방과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
구원의 은총은 할례나 인간의 공적 또는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면서 구원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통을 자랑할 것이 없을 줄 압니다. 할례의 유래는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유의할 것은 그것이 약속의 아들 이삭과 함께 세워진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아들 이삭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참 이스라엘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칭의가 할례받기 전이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
이유는 율법이 명하는 것으로는 누구든지 행위로 온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직 은혜로 나 된 몸,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4:13~25
온전한 믿음
바울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진리가 신약 시대에만 아니라 율법 시대에도 동일함을 조상 아브라함을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마다 구원 관을 달리하고 있다는 세대 주의자들의 오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세대 주의자들은 율법 이전 시대는 양심으로 구원을,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복음 시대에는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1.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
1) 가나안 땅의 언약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창12:7).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사 갈대아의 우르에서 떠나라 하시고, 가나안에 이르자 그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약속은 선택받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 외에는 역사상 누구에게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으로 많은 부와 권세를 누렸으나, 그 땅에서는 누릴 기업이 없었으므로 장차 애굽을 떠날 때 자기 해골을 가나안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하였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으로 그렇게 광활하거나 기름진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이므로 진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우되 각각 어떻게 세울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2-15).
2) 자손의 언약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 세였으며, 그 아내 사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1-2).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그 후 십 년을 기다려도 무자한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어서 후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곧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유로 들어 율법과 복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2-24).
이렇게 자손의 언약이 몸종의 소생 이스마엘에게 있지 아니하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이삭에게 있었던 것같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썩어질 씨로 난 육신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벧전 1:23) 새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종의 소생이 주인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므로 여종과 그 아들을 축출했던 것처럼(창21:9-10)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생각은 육신을 거스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절).
3) 자손의 복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7).
우리나라에 제일 많은 성씨가 김씨, 이씨, 박씨인 줄 압니다. 그런데 같은 성씨일지라도 본이 다르고, 파가 다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하나인데 숫자가 늘어나면서 성씨를 달리 쓰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이 어느 민족을 무대로 삼아 기록된 말씀입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우리 민족의 발자취에서도 이렇게 특별계시의 영감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은혜를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내리신 경고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주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일지라도 사모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믿음으로 그와 그의 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4)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국한된 복이 아니라 열국 만민에게도 주어진 복이요, 은혜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과학의 세계는 먼저 개발하면 문화 혜택을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어떠한 특정 인물들에게만 혜택을 누리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19-22절).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시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또 그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일이므로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하겠고 그보다 큰일도 하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살아계신 주님은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능력 때문에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제물보다 그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나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온전한 믿음
온전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확신 곧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믿음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윤리나 도덕이 불필요 합니다. 대속의 은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피를 흘릴 이유가 없겠으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대속의 제물이 있어야 하고 온전한 믿음 곧 영생이 보장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감사드릴 일은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절).
그렇다고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15절).
이 말씀은 율법이 있기 전에는 정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전이라도 공의의 심판은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
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건은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죄인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침묵을 지키시고 제사장에게 넘기신 하나님, 제사장은 빌라도에게, 빌라도는 십자가에 넘겨 고난 받게 하셨으나 주님은 무덤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닌 살아계신 주님, 대속의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지키는 일에 어떠한 장애가 있습니까? 극복하십시오. 주님께서 내 사정을 아시고 지금도 나와 같이 하십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 아멘 -
로마서 5:12~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로마서 오 장 일절에서 십일 절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또 십이 절부터 팔 장까지는 성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이드 죤스 박사는 로마서 오 장만 가지고 26시간을 강해하고, 그것으로 책 한 권을 출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또 성경에서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그것이 십자가의 진수요, 영원한 진리입니다.
1. 율법이 선포된 목적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기억할 일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불의는 불의요, 죄는 여전히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이전 시대에 살았던 가인은 동생을 죽인 살인죄로 일생을 번민에 쫓기게 되었고, 소년을 죽인 라멕도 그랬습니다(창4:24).
세상 법은 선포되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하나, 하나님의 공의는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효력을 발생합니다. 또 인간이 만든 법은 완전할 수 없으므로 시대 따라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해방 이후 몇 번이나 변경이 되었습니까? 그렇다고 지금은 완벽할가요? 그렇지 못하므로 오늘도 여전히 여의도에서는 '대통령 중심제' '내각제' 하며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에 실린 한국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사입니다. "암살 한 분, 망명 한 분, 교도소행 두 분, 쿠데타로 하야 두 분, 그리고 자살 한 분" 부끄러운 기사입니다.
다니엘을 죽이려고 모함하던 무리들을 생각해봅시다. 다리오 왕에게 어인을 찍게 하고, 다니엘을 적발하여 죽이려고 하였을 때 다리오는 그가 왕일지라도 다니엘을 살려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단 6:15).
그런데 그 법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 사이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법대로라면 다니엘은 죽었어야 했고 다니엘을 정죄한 무리들은 살았어야 할 일이나 결과는 정반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주 선진화를 이룬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변경이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미국의 민주화는 법이 완벽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제 삼대 대통령 제퍼슨은 상·하 양원 제도에서 오는 폐단을 발견하고도 고치려하지 않고 "여기에 문제가 많을지라도 커피에 들어가는 크림과 같아서 넣어야 제맛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등소평 주석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구상에는 어떤 이념도 개혁이 불필요할 정도로 완전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법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념입니다. 법은 어떠한 이념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념은 진리가 아니기에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 죄인 된 사실을 일깨워주는 율법
율법이 선포된 것은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이 죄와 사망의 길에 있는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데 있었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13-14절).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해도 심판은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법정에서도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묵인하고 넘어갈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절).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시 더 많은 은혜를 힘입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올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무지로 인해 짓는 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고범죄는 회개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원 골수 관절을 찔러 쪼개어 살피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3. 죄 많은 곳에 더 많은 은혜
여기서 강조된 '은혜'는 하늘나라 상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율법을 따라 양과 소를 제물로 드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축출된 후에는 상황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대속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는 범죄의 상태에 따라서 차등이 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오십 데나리온만 갚으면 되지만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라면 사백오십 데나리온으로는 완전한 탕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많다"(20절)는 말씀은 죄인 된 자로서는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더 두려워하고, 더 많이 감사하고, 더 충성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돌이킨 후에 또 범죄한 일로 더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가 알지 못했을 때 진리를 대적했던 죄악을 주님께서 사유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일평생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복종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자금성, 또 십삼 능과 서태후의 여름 별장, 진시 왕능을 보면 중국 역사에서 왕과 노예는 있었어도 백성은 없었다는 느낌이 들지요. 우리는 죄악에 매여 종살이하는 것이 인간의 불행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였습니다.
"나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고…" 모두가 잘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를 바로 깨달았다면 그런 것을 과시할 것이 아니라 더 겸비한 마음으로 눈물로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빚진 죄인입니다. 물질로 빚진 자는 물질로 갚아야 하고, 은혜로 빚진 자는 은혜로 갚아야 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우리 모두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으로만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합력하여 유익된 은혜
우리는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죄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죄든지 그 죄의 대가가 충분히 지불되었으므로 자유를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탕자의 방탕 생활을 사모하거나 돼지의 쥐엄 열매를 그리워할 이유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탕자는 그처럼 불행했던 과거 때문에 형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진실한 행복을 찾게 되었습니다.
과거가 어두웠던 것만큼 오늘은 더 밝아졌고 과거가 불행했던 것만큼 오늘은 더 큰 행복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방탕의 추억이 수치와 욕이 아닌, 아버지 품에서의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0-21). - 아멘 -
로마서 6:1~11
그리스도와 함께 받은 세례
바울은 오 장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Justification)를 언급하고 이제부터는 성화의 교리(Sanctification)를 논하고 있습니다.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성화는 점진적인 것으로 변화와 성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그 이름이 생명록에 올라가게 될지라도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앙의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믿음의 고백대로 산다면 이는 살아있는 성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 전에는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우리도 바울같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 속에서 전진하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1. 거듭난 믿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1절).
이 말씀이 연관되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2) 죄와 은혜에 관해서 하신 말씀(5:21),
3)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5:16),
4)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3:8),
이상의 예들은 오 장까지 기록된 모든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변론을 펼쳐나가려는 시도인 줄 압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2절).
원문으로는 결코 아니라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우리가 죄악의 뿌리에서 자라지 않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효력이 상실된 법이라면 저촉을 받을 이유가 없지요.
저가 중국 연변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에 저를 안내했던 0집사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집단 농장제도가 실시될 때는 우리가 군대식으로 일을 하고 양식은 배급을 받았으나 여름이 되면 양식이 다 떨어지고 말았는데 팔십년대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토지를 농부들에게 나눠준 다음부터는 양식이 남아돌고 생활도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선교사들의 활동은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
아래서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무너진 교회가 재건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 7:1).
남편 있는 여인은 아내의 도리를 지켜야 하나,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의 멍에에서 벗어날 때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2. 세례의 의의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절).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날 밤 분부하신 성례입니다(마28: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으로써 예수의 새 언약 곧 대속의 은혜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면,
1) 잠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4절).
여기서 바울은 물속에 잠기는 의식을 통하여 세례 받는 관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의도하는 목적은 세례를 받을 때 신앙고백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장사되므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될까요? 진리의 진수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왜 우리가 흠모해야 할까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2) 씻는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1).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사유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3) 충만하게 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
이는 주의 이름으로 받을 성령의 세례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는 말씀은 세례와 함께 임하는 주의 권능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도 고쳐주십니다. 저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인 우리 교회 M집사님이 본인의 건강이 나빠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의사가 병이 들면 누가 치료를 해주지"하고 농담을 하였지만 의사라고 병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신장이 안 좋아 휴가를 얻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출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고 심방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주의 권세와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4) 예수와 연합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예수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리십시오. 나에게 비록 의가 없고, 공로가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임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절).
이제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됨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3. 칭의와 성화
칭의가 중생과 관계되어 있다면 성화는 성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로 거듭남과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예수와 연합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여행 때 둘째 주일을 계림에 있는 중국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강대상 뒤에 임마누엘을 중국말로 "以馬內利", 또 영어로 "God be with us"라는 글귀를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우리는 한국에서 온 목사들이요, 또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여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다녀가고, 중국에서는 리펑 총리가 서울에 왔던 일과, 장쩌민 주석도 오리라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은 복음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우리가 중국 땅에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과거에는 그들이 우리 민족의 원수였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같이 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그러나 동일한 은혜를 힘입었다 할지라도 성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경건 생활에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의 인격을 닮아 가는데 육신의 생각대로 치우치면 영이 병들고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취업 중인 외국 근로자들은 이 년간 벌어 본국에 돌아가면 집을 사고 자동차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해마다 임금 투쟁을 연례 행사같이 하면서 저축은 늘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소비 풍조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실을 갖추지 못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이 병들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임무에 따라 진리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예수의 지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절).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온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두 가지 의지로 인한 갈등 때문에 번민하였습니다. 의의 병기로 주님께 헌신하십시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
5. 부활의 소망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8-9).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스릴 법이 세상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망도 그를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자유하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예수의 지신 십자가는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한 것이므로 믿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은혜로 사는 몸 이제 어떻게 살아야 옳을지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취사선택의 자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1-22절).
우리가 은혜를 힘입은 사람으로 불원간 주님 앞에 설 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 원한 맺힌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물질이 부족하다고 믿음까지 작은 사람이 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창조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뜻 이룩한 후에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7:1~17
율법이 죄냐?
로마서 칠장을 두고 해석이 구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본 장을 바울이 개종하기 전으로 보는가 하면 새롭게 된 후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어렵게 해석할 이유가 없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본 장의 대의는 고통받는 죄인에게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이미 상고한 말씀을 되새겨 보면 일 장부터 삼 장까지는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롭게 됨을 받을 수 없다 하고, 삼 장 이십일 절에서 사장에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됨을 말씀하였습니다. 오장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들어온 원죄를 해결하는 방법과 육 장에서는 성도들이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었으나 그 자유는 방종을 뜻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평안과 소망을 얻으리라 기대했으나 율법은 그들에게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과 부활의 진리입니다.
1. 부부의 비유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1절).
아무리 엄한 법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를 체벌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명예는 손상시킬 수 있겠지요. 율법도 사람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부부 관계에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2절).
이 말씀에 대해서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사람은 아내, 율법은 전 남편, 예수는 새로운 남편.
2) 옛 사람은 아내, 죄악의 욕심은 남편, 죄는 그 자녀.
이런 것은 성경을 어지럽게 하는 잘못된 해석으로 생각됩니다. 성경에는 진리를 비유로 전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어떠한 비유의 말씀이든지 그 의도하는 바를 바로 찾아 진리의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남편과 아내가 부부로서 살다가 한쪽이 죽으면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죄가 되지 않음과 같이, 우리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려면 정과 욕을 죽이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4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2. 율법이 죄냐
지금까지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므로 그것을 잘못 이해하면 율법의 무용론이나 폐지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그런 뜻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심판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불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과 율법은 이질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예수의 탄생이 성경대로요, 예수의 고난이 성경대로요, 예수의 부활과 승천 또 재림의 약속 모두가 구약에서 예언된 진리로서 예수는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잘못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율법은 멸망 받을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진리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
인간 무지로 짓는 죄가 얼마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알고 섬기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한 문제는 세상 법으로는 다루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8절).
이는 ① '죄가 기회를 이용한다.' ② '법이 없으면 죄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내 속에서 기회를 탄다' 즉 기회를 이용한다는 말씀은, 내 속에 계명이 없을 때 즉 어둠에 속해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우상이 우상인 줄 모를 때 마귀가 우상을 섬기게 하고, 죄악을 죄악으로 알지 못할 때 인간으로 죄의 올가미에 빠뜨려 패망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절).
또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8절).
이 말씀은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정죄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세상 법은 없어지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공의의 법은 영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혼돈과 공허로 어둠의 세상으로 전락 될 것입니다. 천지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살피시고, 주석 같은 발로 심판하실 때 불의와 죄악에 속한 자들은 미혹하는 악령과 함께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은 율법입니다. 이는 율법으로 그의 백성을 멸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그런데 문제는 범죄한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2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절).
4. 갈등 속에서 번민하는 인생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이 말씀은 믿음의 사람 곧 속 사람이 승인하거나 원해서 행동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속 사람의 소원과 의도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의롭게 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이 경건 생활의 필수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불의와 죄악으로 끊임없는 갈등과 번민이 따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럴까요?
페르시아의 아라스페스는 자기를 변명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똑같은 일을 원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영혼이 있어서 선한 영혼이 이길 때는 선한 일을 하게 되고, 악한 영혼이 이길 때는 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에픽테투스는 "죄를 범하는 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행한 것이다. 바울은 아마 그러한 구절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본문을 쓸 때 이러한 구절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비드는 "욕심은 하나의 일을 충동하지만 정신은 다른 곳으로 기울어진다. 나는 선을 보며 그것을 승인하지만 잘못된 것을 좇아가는구나" 하였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절).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밝힌 것입니다. 마귀는 범죄한 인간을 더 큰 올무에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백해야 할 것은, '주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만 따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게 해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5. 승리의 복음
인생은 자력으로는 사망의 권세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이것이 사망의 권세 아래서 몸부림치고 있는 인생의 절규요. 모든 사람이 당하는 번민과 고통입니다. 인생의 철학은 숙명론을 말하고, 잘못된 종교는 속임수로 일관합니다. 이것은 많은 재물과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진시 왕은 만리장성을 쌓고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러 동남동녀를 풀었어도 해결하지 못하였고, 알렉산더는 천하를 정복하고도 이름 모를 벌레에 물려서 단명하였습니다. 오직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우리도 영으로는 성령의 도를 좇고, 육신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따라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영생의 은혜가 강물같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 아멘 -
로마서 8:1~11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로마서 팔장은 가장 은혜롭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필립. J. 스페너는 "성서를 하나의 지환으로 비유할 때 로마서는 보석이요, 그 중에서도 팔장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이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범죄한 인생에게 율법은 참된 평안과 소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제 본장에서는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복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제별로 살펴보면,
1) 복음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생명과 구원의 은총을 베푼다(1-13절).
2) 복음은 우리를 양자의 관계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14-17절).
3) 복음은 죄로 인해 환난 중에 있는 영혼들에게 성별된 은혜와 소망을 준다(18-25절).
4) 복음은 성령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26-27절).
5) 복음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28-30절).
6)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고, 의롭게 하며 승리하게 한다(31-39절).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며 또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용납할 수 없으므로 죄인에게 내리는 심판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첫날부터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하셨으나 인간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세계도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되었는데 만물로 인해서는 하나님께서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자연은 인간을 위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만물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나 인간을 위해서는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생명과 성령의 법
이 법은 믿음의 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면 기뻐할 수 있겠으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마9:13).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돌에 맞아 죽었어야 마땅하나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율법이 효력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서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낙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 행위로 받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입니다.
2) 죄와 사망의 법
이 법은 불의와 죄 가운데 있는 자를 다스리는 공의의 법 곧 율법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다 법이 있습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근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 관광객이 피살된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교포가 상점에서 물건을 팔다가 괴한이 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감시 카메라에 잡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괴한들은 이성도, 양심도 없을까요? 세상에는 그러한 죄인들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입니다. 법은 양민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다스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은 의인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다스리기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2. 연약한 육신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3절).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아야 하리라'는 다짐을 하지만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연약함으로 인해서입니다. 의지가 약한 데도 문제는 있겠으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썩어질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군 다윗이 범죄한 것은 육신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서요,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은 그들에게만 있는 약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7-8).
방심하지 마십시오. 뭇 성도 접전하는데 나만 평안히 누워서 천국 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3-4절).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졌으되 죄는 없으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고, 양손과 발에는 대못을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나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입니다. 그로 인해 죄인을 다스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너무도 살기가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더해만 가고 있으니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스마일 공장이 있는데 직원들이 스트레스가 쌓이면 나와서 젊은 신사를 무조건 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때릴 때마다 그 신사가 절을 하면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는데 때리지 않으면 절을 하지 않기에 이상히 여겼는데 그것은 사람이 아닌 로봇이었다는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의 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만이 받는 줄 생각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될 줄 믿습니다.
3. 두 가지 생각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사모하고,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절).
자유 의지가 인간에게 주어진 이상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1)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존재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인생 로정을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 품이 고향이요, 태어난 곳이 고향인 줄 알았으나 살다 보면 부모도, 고향도 뒤에 두고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 때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혹사를 당했던 이유는 애굽에서는 그들이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고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러나 삼 일 길을 넘기지 못해 그 기쁨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할 때 그들은 약속의 땅을 앞두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을 그리워한 것은 고달픈 여정에도 문제가 있었으나 소망의 눈이 어두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으신다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모든 것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 삼고 인내하십시오. 불원간 우리는 영원한 본향 천국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2) 육신을 입고 있는 문제
은혜를 받은 사람, 즉 거듭난 사람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연약한 육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하는데 외모를 바꿀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다스리십시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인도네시아의 세레베스 섬에는 원숭이를 잡아 관람객들에게 파는데 원숭이 잡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익은 호박에 작은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낸 다음 거기에 절반쯤 쌀을 채워 기둥에 매달아 두면 원숭이는 그 쌀을 먹으려고 손을 넣어 한주먹 쥐는데, 쥔 손이 빠지지 못하므로 잡게 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요. 미련한 것이 짐승이라고 하지만 짐승보다 더 어리석은 인간이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차라리 짐승이라면 내세의 심판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이 짐승 구실을 못했다고 심판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인간은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무서운 올무에 빠져들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7-8절).
4. 그리스도의 사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가 육신으로 인해 죄를 짓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여기는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
같은 계란이지만 수정란과 무정란은 다릅니다. 수정란은 병아리가 되지만 무정란은 부화가 되지 않는 것같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10절).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내게서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요,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 함을 얻었다는 선포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10절)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살았다면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산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다시는 죽음이 없는 것과 같이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자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 아멘 -
로마서 8:12~17
양자의 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먼저 남녀를 만들어 가정을 이루게 해주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가정을 통해 행복을 누리고 또한 생육과 번영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중요시하고 자신이 누릴 행복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1. 복음의 빚진 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절).
사람이 사는 동안 남에게 빚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물질로는 빚진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더 큰 사랑의 부채를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부모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를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조물주 하나님과 함께 내 존재에 있어서는 제 이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은혜를 잊지 말고 공경해야 합니다.
어느 때든 불효자가 있었습니다마는 오늘 우리들의 주변을 볼 때 더욱 심각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부모는 자식을 잘 양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지만,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여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보람이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고 잘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라면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중국 여행 때 천진에서 만난 E사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를 공부시켜 준 양부모가 미국 사람인데 제가 "돈을 벌어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하였더니 그분들은 "네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그것이 우리에 대한 보답이란다."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그런 보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밝아질 것입니다.
2) 스승의 은혜
제가 어렸을 때에는 졸업식 때 스승의 사랑이 아쉬워서 작별의 눈물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어 쓸쓸해집니다. 바울이 없는 디모데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나에게도 없어서 안 될 은사의 사랑은 무엇보다 귀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3) 이웃의 은혜
인류의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문명 이전의 시대에는 가족 단위와 씨족, 또는 부족의 사회를 이루었으나 산업 사회를 이룬 오늘에는 이익 집단의 구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큰 회사가 설립되면 그 회사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게 됩니다. 거대한 미국 사회에도 지역마다 특수 산업이 있어 거기 따라 그 지역 경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에는 지구촌이라 하여 모두가 도움을 주고받는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니 우리가 여기 어떻게 대처하여 살아야 옳은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대구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은 일은 가슴 아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책임 의식, 장인 정신을 바로 가졌다면 이러한 부실 공사는 사라질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하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실하고 근면한 이웃이 있으므로 우리가 평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무익한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 은혜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육신에 져서 육신으로 보답해야 할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이 구원받은 영생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속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날마다 충성을 다짐해야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생명과 구원의 빚을 갚기 위해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절).
이러한 믿음을 가졌다면 진리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에 매여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생명의 빚을 거역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무관한 삶을 살아야 함과 같이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가 되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든지 즐겨 순종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종의 영과 양자의 영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이 말씀은 헬라어로 '정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므로 마땅히 다스려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본문은 황금 문자로 씌어졌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있다는 유대인의 생각과는 달리,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참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절).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의 영과 아들의 영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어둠에 속한 자들 모두가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그런 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므로 열심은 있었으나 마귀의 종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악령을 받으면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되고 구원의 기쁨 대신 심판의 공포와 불안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일로 악령이 덮쳐 마음에 평화를 잃고 번민에 시달던 것과 같이 됩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자기의 행위를 후회 하면서도 돌이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령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므로 염치와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수치심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짐승들이 사나워서 심판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 때문이요, 노아 때 물 심판도 그러했다면 종말적인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양자는 혈육으로는 관계가 없는 사람을 입양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는 양자가 양부의 가산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까지 상속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서 태어나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녀인 양자로 택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절).
아빠는 아람어요, 아버지는 그리스어입니다. 시리아 역에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느니라"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다른 언어로 반복한 이유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는 주님의 기도에서(막14:36; 갈4:6), 하나님을 향한 깊은 관계와 간절한 부르짖음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절).
얼마나 든든한 보장입니까? 초등교사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4:3).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3:25).
은사를 사모합시다. 나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믿음의 은사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능력을,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지혜를 구하십시오. 풍성히 주실 줄을 믿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후사로 받게 될 하늘나라의 상속권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절).
자녀는 상속권을 합법적으로 보장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를 잘 만나 잘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태어나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삼만 원이면 가난한 나라 아이들에게는 한 달 양식이 된다고 하니 어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성령 안에서 샘솟는 기쁨과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낙원입니다. 세상에서도 구원받은 기쁨이 그처럼 귀한데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이것은 꿈에 나타난 환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그 실상이요 증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영광의 이르는 길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절).
땅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릴 영광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행복으로 또 역경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경이 닥쳐도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라면 영광의 길임을 믿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가 발한 것은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 영광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십자가를 등진 사람에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최후의 심판권을 행사하는 분이 마귀요. 사단이라면 우리는 마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고난이냐가 중요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절).
주님과 무관한 고난이라면 헛될 뿐이요 목숨을 바쳐도 무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더 클 줄 믿습니다.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기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8:18~26
피조물들의 소원
우리가 심판대에 설 때 받을 상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 곧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영광 받기를 기뻐하시든지 즐겨 순종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1. 피조물의 소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절).
'고대하는 바' '아포카라도키아'(αποκαραδοκια)라는 말은 목을 길게 빼고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를 가리킬 뿐 아니라 심한 걱정과 열렬한 소원을 의미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피조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
1)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
2) 희개하지 않은 사람,
3) 유대인,
4) 이방인,
5) 비이성적인 피조물
마지막 해설이 지배적임을 밝혀 둡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왕국이 완성될 때를 고대하며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땅이 저주에서 풀려나고 하등 동물들도 어떠한 압박과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육일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저주 아래 들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탄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피조물의 탄식
"파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절).
이것은 특이한 발견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니면 자연이 더러워질 이유가 없지요.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는 태고의 신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때문에 자연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이제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금수강산이라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마시는 물까지 외국에서 사들여 오는 형편이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석유 왕국 중동에서 물값이 기름보다 비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가" 하고 믿어지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떠습니까? 산수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치와 향락 업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 국토가 황량한 광야인데 갈릴리 호수에서 끌어올린 물로 지상 낙원으로 이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염된 것이 어디 물뿐이겠습니까? 토질도 오염되고, 공기도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음식도 마음 놓고 먹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예레미야의 탄식입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렘12:4).
2) 성도들의 탄식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절).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여기서 사용된 원어 '아파르케'(απαρχη)는 추수의 처음 열매와 처음 거두어들인 부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신26:2; 출23:19),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소망이 있으므로 향락을 목적으로 살아가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죄악의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므로 박해를 받을지라도 천국의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령의 탄식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성령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탄식하십니다. 성령을 기쁘게 하십시오. 능력의 도구로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악한 일은 마귀의 일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든지 그 뜻을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우리 모두 능력 받아 풍성한 열매 맺기를 소원합니다.
2. 영광과 자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19-20).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맡겨 그것을 관리하고 주관하게 하셨으므로 만물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을 받을 때는 그 복이 자연에도 미치고, 사람이 저주를 받을 때는 그 영향이 자연에도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자연을 사랑하십시오. 복된 세계가 펼쳐질 줄 믿습니다.
자연이 말이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연은 진실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 떼를 보고 "소가 행복해 보임은 어찜일까?" 라는 일기도 썼습니다. 땅도 인간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습니다. 이삭이 복을 받으니 당대에 백배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황폐하게 하면 화를 입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1-22).
'영광의 자유' 귀하지 않습니까? 자연이 바라는 영광의 자유란 짐승이 짐승으로서 주권을 행사하고, 대지가 대지로서 권리행사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다른 피조물도 만족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면 만물이 기뻐하고, 사람이 저주를 받으면 만물이 누릴 영광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의 가치와 부여된 책임이 그렇게도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본연의 임무를 배역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가는 곳에는 새들이 노래하고 맹수가 양같이 순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받을 때 오늘도 만물이 함께 기뻐하고 영광 돌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3. 소망 중에 인내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절).
세상에서 누리는 복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신의 몸에서 해방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절).
시리아 역에는 "우리가 소망을 통하여 살았으므로," 또 아라비아 역에는 "우리가 소망을 통하여 보존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소망의 닻줄은 환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붙들어 줍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늘나라 영광을 위해서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 할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소망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의 눈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믿음을 가졌으나 그 눈을 못 가진 열 정탐꾼과 그를 따른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말세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차지도 덮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믿음의 부자가 되고, 선한 행실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소망의 안약을 사서 발라 하늘나라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들으십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만물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십니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 중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영혼의 탄식 소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를 힘입기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8:28~30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심을 말씀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들어갑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1:3-14과 함께 예정론의 쌍벽을 이루는데, 여기서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확신시키고 하나님의 예정과 그의 부르심,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은 후 영광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별로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알거니와"(28절) 라는 말씀은 26절에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는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이성적 지식이나 경험적 지식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저는 성가대원 중에서 연습한 것을 차 안에서도 틀어 놓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찬양의 은혜는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
세상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단호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은혜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진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를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욱 뜨거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소원합니다. 바울의 남긴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의 사랑이 강권하므로 헌신한 생애입니다. 영광에 이르는 길은 오늘도 우리에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충성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
충성된 사람은 나를 불러 주시고 일꾼 삼으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요, 그 뜻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세상 사람들 처럼 먹고 살다가 생을 마치는 그것일까요? 허무한데 매여서 종살이하는 것이 나의 전부라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모두가 허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또 하나님의 뜻은 선택받은 사람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는 것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짐승은 짐승으로 살다가 죽으면 족하지요.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중에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그 뜻을 준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실패도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이올린 하나로 미국 헐리우드 한 복판에서 상하이 나이트클럽을 운영하여 벼락같이 돈을 모았다가 바닥까지 떨어진 후 변화 받고 거듭난 전 KBS 관현악단 지휘자 김광수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욕망의 뒤안길에는 참담한 실패와 허무의 늪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던 안타까운 현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았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황성주 박사의 특강을 들으면서 '저런 분은 인생 실패의 쓴잔을 모르리라' 생각했는데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간증을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인생에게 있어서 실패와 좌절은 원해서 맛보는 게 아닙니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지체 말고 돌아서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생명을 투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과거만 돌아보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주님께서 그 상처를 더 훌륭한 조각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고,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것이 눈물로 통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환경, 복 받은 사람이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7-18).
집을 나간 탕자는 회개하고 돌아왔으나, 장자가 아버지의 참사랑을 몰랐다면 그것이 더 큰 불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배역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줄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아들을 본받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믿음까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이십일 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천 년 전 구유에서 탄생하신 구주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어린 나귀가 아닌, 제트 비행기를 타고 온 세상을 다닌다고 주님보다 높아진 줄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전히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으로 영광 받으실 구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자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우상은 스포츠맨이나 영화배우들입니다. 그래서 인기 있는 인물이 등장하면 오빠 부대가 열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인류에게 소망을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마약과 환각제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문화에 뒤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영혼을 잃게 되니 그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순한 낭만이라면 정죄할 이유가 없겠으나 낭만주의는 죄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향락을 꿈꾸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고, 주님께서 세속의 권력을 탐했다면 우리도 거기에 집착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고,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을 때는 조용한 장소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주님은 지금도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같이하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이 말씀에서 기억해야 할 두 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1) 동일 본질의 구원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는 육신이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은 영화로운 몸으로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들지 않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에 있던 자가 먼저 부활하고, 살아있는 우리는 홀연히 변화하는데 그날에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모두가 청춘으로 새롭게 되고 다시는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몸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2) 조물주와 피조물의 차이
천국에는 예수와 동일 본질의 영생을 얻었다고 하여 인격과 개성에 차이가 없는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름과 같이 천국에서 누릴 영광도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1:8) 하였으나 주님을 가리켜 증언할 때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 성령님의 영광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경배받으시기 합당한 조물주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이십사 장로들과 흰옷 입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살아계신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5. 믿음의 성장 단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처야 합니다.
1) 선택의 은혜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이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복중에서부터 선택받은 야곱은 장자권과 천상의 복이 귀한 줄 알았으나 에서는 몰랐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샀으나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진리를 파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 삼십에 주님을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사고 팔지 마십시오. 육신의 소욕에 치우치면 구원의 기쁨을 잃게 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과 맞지 않게 가룟 유다가 찬송을 잃었다면 장자권을 잃은 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복을 잃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2) 칭의의 믿음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30절). 칭의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노아와 욥,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그 믿음으로 의에 이른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3) 영화의 믿음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절).
영화는 천국에서 누릴 영광입니다. 고달픈 나그네 노정을 마치면 우리는 본향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영화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욕심을 부려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충성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는 상급입니다.
보이는 것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라면 인내하십시오. 우리 모두 그 믿음 굳게 붙들고 최후에 승리하여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8:31~39
영원한 승리
본문에서 상고할 말씀은 성도가 누릴 영원한 승리와 영원한 영광입니다. 기뻐할 것은 승리가 기약된 싸움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본향이 하늘에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싸워서 가나안을 정복했던 여호수아 군대와 같이, 오늘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자에게 이 영광이 돌아오게 됨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절).
이 말씀은 지금까지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의 보장에 대해 더이상 언급할 여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바울은 여기서 '만일'이라는 가정사를 사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확신하는 믿음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
최후의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은 또 다른 한 편으로 죄를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9-11).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간음한 그 여인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정죄 받을 허물이 사라졌으나 정죄하던 무리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죄하던 무리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했으나 여인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온갖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미국 LA에 있는 레돈도 비치에서 자연생 돌고래가 수영객들과 어우러져 수영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야생 조류들을 보면서 상상의 세계가 현실로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남서부 지역은 비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식물이라고는 대부분 사막에서 견딜 수 있는 선인장 종류들입니다. 그런데 멕시코 국경도시 샌디애고에 있는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 들렀다가 LA로 가는 길에 산꼭대기까지 푸르른 숲을 발견하고 마치 기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오렌지 나무였는데 거기는 산꼭대기에 물탱크를 만들고 나무마다 호스를 통해 물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죄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악한 자가 해치지 못하게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놀라우신 주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절).
주님의 보장을 보십시오.
1)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닌 모든 허물을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입니다.
2) 나를 위해 살아나신 주님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34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생애가 아무리 귀하고, 그의 죽음이 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살아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헛되어 우리는 여전히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7-20).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을 믿으신다면 그 영광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34절).
이제 그는 세세에 누릴 능력과 권세를 한 몸에 지니시고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다시는 빌라도의 법정에 서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를 정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4)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지금도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하심을 믿으십시오. 또 하늘나라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 쉬지 않고 간구하사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았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2. 사랑의 시험대
지금까지 언급한 말씀에 비해 본문은 다른 방향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마음 깊이 새겨 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도 왜 나를 사랑하는지 물어봤더니, "I don't know."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또 어디에도 기고하지 말아 달라는 약속을 받고 나서 저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편지를 한 통 주었는데 저는 그에게 약속해 놓고 이렇게 다 말해 버리니 믿을 사람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지 궁금하지요. 기행문에서 다루었는데 초등학교 오학년에 다니는 큰 누님의 손녀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게 해주시는지 보십시오. 시련을
통해서입니다.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양평 모래사장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아이들이 얕은 곳에서 수영을 하지 않고 깊은 곳으로 가기에 단속하려다가 제가 익사할 뻔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수영을 조금 익혔기에 흐르는 강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깊은 곳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거센 물결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물속에 잠겨있는 갈대가 있어서 그것을 붙들고 간신히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머리가 아팠던지 지금까지 그처럼 아팠던 기억은 없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무엇에 쓰시렵니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드려야 할 일은 아무리 불같은 시련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요, 또 피할 길을 예비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5-36).
3. 영원한 승리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우리의 승리는 체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영력에 있습니다. 체력이 강해도 호흡이 멎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정신력이 강해도 육신을 잃으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영력은 육신을 초월할 뿐 아니라 영원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
저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숙독하고 컴퓨터에 저장했습니다. 칼빈은 목숨 걸고 카톨릭의 모든 불의와 세속화 문제를 드러내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이제 우리는 의심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사망이나'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나"(38절) 이것은 사망보다 더 무서운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우리의 믿음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마약 범죄와 에이즈 환자가 가장 많은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던 천구백오십 년 대에는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이 교회를 나갔는데 지금은 1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부흥하던 교회가 지금은 어떻습니까? 천구백구십삼 년도부터는 내리막을 걷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사업에 부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원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아멘-
로마서 9:1~5
바울의 근심
팔 장까지 언급한 말씀에 비해 본문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울이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의식해서인 줄 압니다. 그동안 바울이 각 장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장벽이 없어졌다고 말씀하고 이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대속의 은혜를 힘입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오장에서 하나님의 계획, 육 장과 칠장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해결할 수 없는 죄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정복한 사실과 팔 장에서는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 있어서 유대인들로서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이요, 다음은 유대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반론을 의식하고 구장에서는 자기도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논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진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이 그의 진실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1-2절).
중요한 것은 바울의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요, 그의 인치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면에서 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집회를 했을 때 일입니다. 거기서 목회하는 윤상철 목사님이 어떻게 말을 하였는지 성도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날 식사한 집은 그 교회 안수 집사로 미국 IBM회사에 근무하고, 부인 집사는 세탁소 일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하니 자랑스럽지요. 나는 그분에게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배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2. 바울의 근심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2절).
물론 이 말씀은 바울이 절망적인 슬픔에 빠져 구원의 기쁨을 잃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 큰 근심과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근심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을 받은 사람은 다 근심하였고, 심지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도 탄식하며 슬퍼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이 있는 자라면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을 대할 때 결코 태연하게 대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저는 부부가 복음 사역을 위해 중국에 들어간 선교사를 통해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종교 정책에 대해 얼마나 감시가 심한지 그들은 교회 출석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가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총살을 당했는가 하면, 또 지도자 세미나에서 공안 당국에 의해 검거되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나는 일도 있었고, 한 곳에서는 오십여 명의 지하 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오백 명이 동원되어 모두 잡아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홍콩에 살면서 신분을 감추고 성경을 보급하며 조심스럽게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도 선교사들끼리는 손바닥에 고기 모양을 그려서 신분을 알리기도 하고, 작은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서로를 알리고, 또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외국인들의 선교 활동이 제약을 받으므로 선교사들은 본토인들을 활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내외는 좋은 이웃을 주셔서 많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저의 처제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축출 명령이 내려졌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그동안 은밀하게 성경을 읽으며 복음을 가르치던 영혼들이 이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웃을 때 울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명이 있는 자로서 진리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담당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습니까? 바울은 주의 사랑이 강권할 때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보배임을 알았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바울의 소원
진실한 애국 애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애굽에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한 모세의 결단, 총독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왕 앞에 나갔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애국심은 생명록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받은 바울의 소원 역시 그의 혈통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게서 버림을 당할지라도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지옥에 던져질까요? 그럴 수 없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깊은 진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을 감수했다 할지라도 그 희생이 그리스도의 대속과 동일한 효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히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동족이 구원받는 길이라면 죽는 것도 불사하였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이스라엘의 특권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5절).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1-22).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특별계시의 통로로 선택받은 백성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영생의 진리가 어느 민족에게 임했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사람이 제정한 법과 질서로 세워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으로 택정하시고 그들에게 제사와 언약을 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택받은 조상 밑에서 그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이요,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그들의 족보를 통해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5절).
그처럼 복을 받은 민족이 유대인들인데 그들이 복음을 등지고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다만 감사드릴 일은 유대인들이 버린 메시아를 우리가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이 놀라운 은혜가 영원토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9:6~18
하나님의 예정 섭리
복음을 배역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인해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당했던 바울과 같이 동일한 복음의 증인으로서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하나님의 언약
이스라엘의 불신을 그처럼 마음 아프게 생각하던 바울은 하나님의 더 깊은 섭리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말씀과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버렸을지라도 개별적으로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2. 혈육에 속한 자와 약속에 속한 자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6-7절).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에게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여기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1) 은혜는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다.
2) 주의 은혜는 온 세상에 미친다.
3)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7).
미국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종차별입니다. 기이한 현상은 가난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미국 법에는 보호자가 실직하거나 없을 때는 아이들의 양육비를 정부에서 제공하고 교육도 무료로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흥미 있는 현상은 유색인이 백인들의 마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집값이 떨어지므로 백인들은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숫자가 많은 층이 선거에도 이길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흑인 대통령이 종종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해 백인들은 유색인들에 대해서 사회복지 혜택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몇몇 큰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교회가 LA에 있는 Crenshaw Christian Center입니다. 그 교회는 장충 체육관처럼 돔으로 건축되었는데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물이었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를 9시부터 시작하여 한시간 정도 찬양을 하고, 다음에는 헌금 시간을 갖는데 모두가 헌금 봉투를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담임 목사가 설교를 하고 나면 모든 순서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유색인이어서 성도 95%가 흑인과 멕시코인이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은혜받는 자리에 혈통의 우열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예정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0-11절).
이 말씀은 칼빈의 예정 교리를 확실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과 선택받는 일이 어떤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물론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선행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은혜는 어떠한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이는 선택하신 분의 뜻과 그 목적에 따라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① 선택하신 분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② 예수 그리드도로 말미암아서, ③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엡1:5).
기억할 것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3절).
물론 여기에 이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대로 갚아주리라"(계22:12).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우리의 구원이 어떠한 공적에 따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하였습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롬4:14).
이는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감사드린 두 가지 은혜를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지난 수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가 보니 꽃다발이 있기에 집사람에게 "여보, 이건 웬 꽃다발이요. 누가 가지고 왔소?" 물었더니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것 0집사가 가지고 왔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하는데 그때야 비로소 ‘금년에도 가족 생일을 잊어버리고 넘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가정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이라면 오늘을 바쁘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 은혜요, 또 허무한데 매여 종살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신 은혜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공적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기회를 잃지 말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영광에 이를 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이는 동일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데 주의 긍휼과 심판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절).
우리가 만일 바로의 입장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극히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줄 압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은혜가 귀중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귄한이 없느냐 "(롬9:19-21).
기억해야 할 것은 불의한 자들은 마음을 더 강퍅하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보면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심판이 누구로 인해서였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메데, 바사와 헬라, 로마를 비롯하여 이차 대전의 전범국 독일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황을 신으로 받들던 일본의 교만이 어떻게 거꾸러졌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로 그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7절).
그럴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으시고 구원받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이미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 소식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구원의 이 손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오늘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아멘-
로마서 9:22~33
시온의 반석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은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이스라엘 민족을 통로로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의 섭리도 있습니다.
1) 메시야를 대망하던 민족이 오신 메시야를 배역한 일
2)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진 일
이로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보장이 되었다면(롬10:12), 이제는 유대인으로서의 선택의 특권이 폐지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첫 번째 문제를 그들이 받을 종국적 구원이란 믿음에서 해석을 하고, 두 번째 문제는 전 인류를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대조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문제(롬1:18-32, 2:1-29)를 비롯하여 구원론(롬1:16)과 역사관(롬9:-11:)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2:9-10).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란 특수성을 고수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두고 바울을 비판할 수는 없을 줄 압니다.
1. 이방과 선민의 장벽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22절).
이 말씀은 앞절에 이어서 토기장이의 뜻에 따라 천히 쓰는 그릇 중에서 바로와 같이 적절한 때에 심판을 내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한 편으로는 그의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23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각을 첨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악장 아삽을 비롯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런 문제로 많은 번민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는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이요, 다음에는 그 뜻을 준행하므로 영생을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절).
바울이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원칙을 언급해 왔으나 이제는 이방인과 선민의 구분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그 영광의 부요함에 이를 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두 가정이 상을 당했는데 한 분은 팔십이 지났으나 한 분은 삼십 대입니다. 한 가지 감사드릴 일은 두 분이 모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공적이나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 합니다. 또 여기는 연령에 관계가 없습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자기들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엄마가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하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수원 창훈대교회 한명수 목사님이 원자력 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을 때 문병 와서 간절히 기도해주신 분 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열매 맺을 계절이 아닌데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므로 저주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마21:19). 언제든지 주님께서 원하실 때는 계절과 관계 없이 맺은 열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지금 우리의 노정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또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어떤 분은 밤낮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하나님! 제가 세상을 떠날 때는 잠자는 중에 주님 품에 안기게 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는데 하루는 아무런 말이 없이 앉아만 있기에 흔들어 보았더니 숨졌더라고 합니다. 세상에 잘 태어나는 것도 복이요, 잘 사는 것도 복이지만 그보다 더 큰 복이 있다면 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7:1-2).
우리는 그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오늘을 바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2-13).
저는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외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많은 감화를 받았는데, 그중에 될 수 있으면 선교지에 있는 영혼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더 많이 전달해 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이었습니다.
LA에서 멕시코에 선교를 하는 황 선교사에게 어떤 장로님이 선교용으로 자동차를 사주었는데 그 차에 교민들의 손길을 통해 들어온 옷가지와 신발 등 구호물자를 얼마나 많이 실었던지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엄청난 액수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멕시코 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 언어를 익혔는데 이제는 멕시코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국 길림성 돈화시 한당향 처소 교회를 세운 일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은 교회 건물을 완공하고, 내부 장식과 의자만 들여놓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도 손님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5-26절).
2. 남은 자 구원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7절).
바울은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많은 무리가 쫓겨나고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주석을 보면,
1)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
2)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야 할 어떤 의무나 약속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3)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일부나 전부를 원하신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역할 때 약속된 구원과 모든 특권을 단절시키는 것도 정당하다.
혹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는 숫자가 채워지는 그 날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구원이 완성되리라고 합니다(롬11:26).
그러나 그 말씀은 바울이 자기 민족에 대한 소망이요, 또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또 여기는 이방인의 '충만'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숫자적으로 모든 인류가 아닌 땅끝까지 전하여질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문제로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신학자들이 우리나라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 일로 특별한 사명이 있는 줄 아는데 그것은 역사를 모르는 근시안적인 태도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쾌했던 것은 제가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본 사람이었다면 동의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마지막 때 선교적 차원에서 특이한 사명을 지녔다고 믿으면 잘못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 말씀이 내게 임하고, 우리 민족에게 임하여 땅끝까지 증인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7절).
남은 자가 누구일까요? 환난 중에 인내한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늘나라 열매 맺는 백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3. 시온의 반석
불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딪히는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을 행위보다 앞세운데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행위는 그림자같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구원받을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오늘 우리에게는 영생의 복음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구원의 반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절). - 아멘 -
로마서 10:1~15
아름다운 발길
바울은 구장에서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절).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는 자는 살아났으나 보지 않는 자는 다 죽은 것같이 끝까지 복음을 외면하면 달리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1. 바울의 소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절).
'형제들아' 이 호칭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는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등지고 박해하였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마음 깊이 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유대인이 메시아를 영접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가시같이 비쳐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불타는 사명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2절).
한때는 바울도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엄한 바리새파에 속했고 복음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왜 그처럼 진리를 대적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 아니라면 매사에 열심을 다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열심은 성공의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농부는 농사짓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는 수확할 때 드러납니다. 그러나 열심에는 반드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보다 좁은 영토와 더 열악한 환경 조건인데도 해마다 십억 불이 넘는 농산물을 수출하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농기술의 개발입니다.
옛날에는 농사짓는 일은 배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는 생산성에 따라 경제력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라마다 과학 영농이 아니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념 대립이 없으니까 마음의 허리띠를 풀어 놓고 한가하게 살아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회 감사를 통해 지적된 사항 중에서 대학별 교수들의 연구 논문이 과학기술원, 포항공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은 그런대로 발표한 논문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몇 년 동안 논문 한 편도 쓰지 않는 교수들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교수가 자기 논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 열의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인적 자원이 아무리 많아도 기술적인 자원을 개발하지 못하면 여전히 경쟁력에서 뒤진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더욱더 경성하고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의 지식입니다. 세상 지식이 아무리 귀해도 그 지식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교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허물이 있었다면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에 어떠한 약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그들의 열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열심을 다하는 것은 복 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교만입니다. 유대인의 교만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절).
이는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의의 근거로 내세우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의 공로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있다면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교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율법과 복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절).
율법과 복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을 진리와 비 진리로 구분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잘못되어 복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으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의 복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침'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완성하거나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눅22:37; 요13:1).
어떤 사람들은 '마침'이라는 말을 마땅히 실천해야 할 계명으로서 주님께서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 완성하셨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혹은 주님께서 도덕적인 율법을 완전히 이루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므로 이룰 수 없었던 의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5절).
이렇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지켜야 의에 이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절).
여기서 또 기독교의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인간을 찾아 오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여기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킬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베푸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6절).
하늘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11:7-8).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7절).
음부에 내려가려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음부는 하늘나라와 대조를 이루는 곳입니다. 하늘나라가 높은 반면 음부는 깊고, 하늘나라가 밝은 반면 음부는 어두운 곳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은 나를 위해 음부에 내려가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복음은 불가능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8절).
오직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은혜의 선물이므로 어떠한 조건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절).
사실 멀리 있는 것은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땅끝까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저는 멕시코에 있는 인디오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병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기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시므로 우리의 눈과 귀가 열리고 깨닫는 심령이 열리게 됨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절).
3. 전도자의 사명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1-13절).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으나 복음은 그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믿을 기회를 보장해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전도자에게 부여된 임무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이렇게 놀라운 은혜가 온 세상에 충만하지만 아직도 이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국정을 맡은 공무원이 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면 국회에서 그 책임을 묻는데, 영적인 문제는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17).
새 가족들을 심방하는 중에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갔는데 심방 대원들이 "그 할머니는 막차를 놓치지 않고 타신 분이라 정말 복을 많이 받았어요."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내막을 물었더니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새로 나온 가정에 초상이 났는데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전도폭발 훈련을 받은 분들이 병상에 가서 복음을 제시하여 받아들이게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 가정이 또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시기 소원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 모두 이 복된 소식 전하고, 주님 앞에 설 때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3-15절). - 아멘 -
로마서 10:16~21
하나님의 교육 방법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에 대해 어떤 사람은 영접하여 복을 받는가 하면, 외면하여 구원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도자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맡은 사명에 불 충성하는 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으므로 오직 복종하는 믿음으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두 가지 계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요, 계시의 종교로서, 명상에 잠겨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고 타락하여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신학적으로 계시의 통로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하나는 일반계시오, 다른 하나는 특별계시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할 것은 계시의 필요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서 인간이 없으면 특별계시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양자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결합시킨다면 시간 여행은 가능할 것 같다."고 하여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실로 꿈같은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런 날이 온다면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만나야지요.
저는 그다음에 아브라함과 바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요, 또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목숨까지 버렸으므로 그의 믿음을 본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믿는 시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런 것은 공상 소설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감사드릴 일은 우리가 이용할 믿음의 캡슐을 타면 다른 에너지가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은 영생의 진리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짐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특별계시로 성경을 주셨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1:19).
2. 믿음의 단계
복음을 전해도 모두가 열매 맺는 것은 아닙니다.
"주여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16절).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 믿었습니까? 오히려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그는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어느 때 누구를 통해 열매 맺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모두가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행28:24).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일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건너가서 자색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일로 기뻐하고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중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갈급한 영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3. 핑계하지 못할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8절).
이 말씀은 시편19: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의지 표현이므로 그의 지으신 만물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 계시를 구원의 진리인 복음과 동일한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일반 계시를 통하여도 창조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여기서 소리라는 말은 현악기를 통하여 나오는 음율이나 음성을 의미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복음의 메시지가 만방에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AD 57 년 경에 쓰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수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로마, 아라비아, 지중해의 여러 섬들에 두루 전파되었습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행26:26).
4.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는 전도 방법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19절).
이 말씀은 신명기32:21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를 격발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들어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며 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리라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들을 시기가 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자식을 양육하는 부모의 심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성 아닌 자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미련한 백성으로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역시 동일한 이방인으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방을 권고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은혜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농장에서 일한 품꾼들에게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주인은 동등하게 품삯을 배분해 주셨습니다.
2) 은혜를 배역하면 은혜의 손길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이방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20절).
이는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물론 우리가 기도나 회개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우리는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므로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21절).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이라도 열매 맺지 않으면 꺾이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1:1~12
이스라엘의 실족과 이방의 구원
바울은 로마서 구장에서 구원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예정섭리를 논하고 십 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반론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의식해서 십일 장에서 몇 가지 사실을 예로 들어 변증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모든 유대인들을 버리셨다
2)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타락했을 당시 남은 자를 보호했던 것처럼 오늘도 남은 자들을 보호하고 계신다.
3) 오늘의 현상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지리라는 성경이 이루어졌다.
4) 그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
5) 지금이라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막을 내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구인적인 사랑이라" 즉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은혜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인내로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1. 유기와 선택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요 베냐민 지파라"(1절).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면 바울 같은 전도자가 나올 수 없지요. 바울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임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귀하게 여깁니다. 특히 소속된 지파의 이름을 지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과 버리시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7-8절).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토기장이와 질그릇에 대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허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멸망 받을 자들이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는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선택할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30:15-16).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셨지만 아담이 불순종하여 에덴에서 축출된 것처럼, 율법을 지키라 명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에덴에서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으므로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조장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선택과 유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예정으로써 만세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9-10절).
2. 하나님의 특별 은총
또 바울은 유대인들의 반론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2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말씀은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대부분 버림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 있습니다. 더욱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또 바울은 엘리야 당시에 있었던 다른 사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3-5).
이는 열왕기상 19:10에 있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의미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명한 엘리야는 바알 신을 섬기던 제사장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처단하므로 다시는 이 나라에 우상이 발붙이지 못할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이세벨을 통해 더 무서운 박해가 몰아닥쳐 주의 제단을 모두 헐고,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을 죽이고, 엘리야도 죽이려고 뒤쫓고 있으므로 나만 남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4절).
한 민족 중에서 칠천이라면 작은 숫자이지요. 그러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므로 그로 인해 엘리야 당시도 같은 의미에서 상당한 숫자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바울은 엘리야 때와 같이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일이요,
2) 경건한 고독으로 진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요,
3) 구원받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구원받을 성도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힘입은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절).
3. 이스라엘의 실족과 이방의 부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복음은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권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먼저 임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이방을 일깨워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알고 섬겼다면 그들은 영원히 열국의 제사장 민족으로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야를 배역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므로 생명과 구원 사역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절).
'세상의 풍성함'은 소유의 풍부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버린 복음이 이방인을 구원받게 하시므로 바울은 그 일을 유대인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 복음으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일로 이방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은 더욱 왕성하였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만이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모르드개를 미워한 나머지 모르드개 뿐 아니라 메데, 바사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음모하다가 결국에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워둔 장대에 자기가 달리고, 또 그의 열 아들들과 유대인을 미워하던 원수들까지 죽이는 것을 보고,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8:17)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여기에 안주하지 맙시다. 우리는 제이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할 무거운 사명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과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은혜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11:13~24
자긍하지 말라
바울은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실족하므로 복음이 이방에 전파된 것을 말씀하면서 그렇다고 이방인들이 자긍하지 못하도록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감람나무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교만은 주의해야 합니다. 교만이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보십시오.
1) 감사를 잃게 됩니다.
2) 은혜를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됩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3) 진리의 원수로 전락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우리는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은 누구에게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킬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하루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고난 받으실 일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초막을 짓는 것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막9:6).
1. 이방인의 사도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절).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2).
바울은 맡은 직분에 철저한 사명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명 의식이 있었기에 그처럼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오늘 우리가 은혜 받는 이 말씀을 누가 기록하였습니까? 바울입니다. 사명의식은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성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명자로서 교만은 금물이나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큰 상을 받습니다.
링컨은 "자기의 임무를 자랑하는 자를 나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십시오. 주홍같이 붉은 죄를 대속해 주시고 내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주신 은혜를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불의에 매여 종살이하지 아니하고 의의 병기로 일꾼 삼아 주신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과 세상의 화목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절).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을 이방이 받아들이므로 이방이 도리어 하나님과 연합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는 원인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축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이방을 들어 징계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범죄 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그처럼 귀중함은 하나님과 원수된 장벽을 무너뜨리고 화목하게 하는 일(고후5:18)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화목이라는 말은 속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를 통해 복음이 선포될 때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절).
이 말씀에 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을 인용합니다.
1) 유대인의 회개로 말미암은 이방 세계의 영적 부흥을 말한다.
2)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축복이다.
3) 전 인류의 회개를 말한다.
4) 마지막 날에 있을 유대인들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탕자를 맞이하듯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로서,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줄 압니다. 이 기쁨은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누구든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미칠 기쁨입니다(딤후4:8).
3. 두 가지 비유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겸손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처음 익은 곡식'은 따로 떼어 하나님께 바칠 것으로, 구별한 곡식 또는 열매의 첫 수확입니다. 유대인들은 수확할 때 처음 것을 고운 가루를 내어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민15:19-21). 그러므로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4:3, 5).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4:4)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물에 관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첫 수확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내게 있는 모두가 성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내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로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내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로 바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 복은 땅에서 그치는 복이 아니라 영생의 복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순종할 때에, 그들을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들을 돕는 손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복을 주셨습니다. 더욱 감사드릴 일은 그 복이 하늘에도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재산은 누구의 것입니까?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아직도 성물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거나 아까워서 구별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물질이 내 것이요, 생명도 내 것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아도 영생 복을 누릴 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기의 소유로만 있을 때는 천국의 보화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로 바뀔 때 믿음의 부자가 되고 하늘나라의 쌓이는 보화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본문에서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거룩한 뿌리를 믿음의 열조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가 꺾어진 것은 가지된 이스라엘이 농부 되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기억하십시오. 꺾어진 원가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희도 자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인 근본을 알았다면 교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17-20).
성도의 자긍심이 교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는 공포나 전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경성 그리고 경건 된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교만하여 버림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여유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경박한 졸부들이 외국에 나가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다닌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떨며 그 앞에서 복종합시다.
은혜로 사는 몸 그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열매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11:25~3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인 바가 된 성도들은 이제 옛 종자가 아닌 새 열매를 맺게 됨을 감사드리고, 여기에 자만하지 말고 더 풍성히 맺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깊은 비밀의 섭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의 충만과 이스라엘의 구원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25절).
'비밀'이라는 말은 본래 감추어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많이 쓰는 용어로서 그의 서신에 22회, 공관복음에서 3회(마13:11; 막4:11; 눅8:10), 계시록에 4회(1:20; 10:7; 17:5,7)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신비(마13:11). 숨은 뜻(계1:20), 비밀의 목적(살후2:7) 등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인간에게 있는 약점 중의 하나가 낮은 자리에서 높아지면 자기의 근본을 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바로 알면 엎드려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 여기에 대해서는 이방인의 전체로 보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많은 숫자로 보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 낱말 자체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수를 가리키며, 또 그 수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는 숫자로 보아야 합니다. 십이 절의 말씀대로 유대인의 충만한 숫자와 이방인이 충만해지는 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드디어 막을 내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온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교회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구원을 주장하는 바울의 사상을 보아 전체적인 구원으로 볼 수는 없을 줄 압니다. 바울이 인용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 말씀은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돌이키시겠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스라엘 중에서도 회개와 무관한 사유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구원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원수 된 자'라는 말은 '사랑을 입은 자'와 반대입니다. 선택받은 면에서는 약속의 후예들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는 하나님의 원수로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훌륭한 조상을 두고도 진리의 원수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경종으로 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이스라엘이 심판받은 역사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절)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베푸시는 은사에 있어서 후회하거나 변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며 그가 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변경하거나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절).
'가두어 두다'라는 말은 본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나 군대에 포위되어 성에 갇힌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또 복음서에는 그물 안에 있는 고기를 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눅5:6).
이는 그들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갈라디아 3:22에 보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불신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율법 아래 있게 하신 것은 인생을 멸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죄를 선언하시므로 구세주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2-23).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요,
2)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이나 시련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요,
3)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은 영원히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원어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부요함을 각각 들어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앞서 '깊도다'라는 말은 감탄사로 성경에서 측량할 수 없이 크고 넓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씀입니다.
'지혜'는 최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의 방편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잠언서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하나님의 품으신 계획과 목적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이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의 지혜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 인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과학의 힘을 빌려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 시상은 노벨 재단에서 부여하는 상인 줄 압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기능 올림픽에서는 계속 금메달을 획득하고, 체육 올림픽에서도 뒤지지를 않는데 두뇌 올림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벨 물리학상은 아직 한 사람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민족 자존심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석학들의 꿈을 살려주고 있는 노벨재단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인류 평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폭약이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어 수많은 인명을 죽이는 것을 보고 폭약으로 모은 재산을 모두 바쳐서 인류의 평화와 사회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시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대인이 버림을 받았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했을 때는 복음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이방의 사도로 택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진리를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미리 아는 지식이요, 전부를 아는 지식입니다.
1) 하나님은 심오한 통찰력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또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가장 알맞은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3)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일로 땅끝까지 복음이 퍼질 줄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박해 속에서 퍼져나간 복음의 역사입니다.
또 '부요'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성하여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심을 의미하고, 복음을 통하여 죄악으로 물든 인간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주의 은혜와 긍휼은 참으로 놀랍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의 죄를 사유해주시고 하늘의 소망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된 이 참된 평안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4-35).
이 말씀은 욥기41:11에 나오는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는 말씀에서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누가 먼저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께서 갚아야 할 의무를 가지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엎드려 그 이름에 함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만물의 시작과 끝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교회 나눔선교회에서 바자회를 열어 그 돈으로 다섯 사람이 개안 수술을 받아 광명을 찾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천만금보다 더 귀한 보배가 될 줄 압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 물질이 예수의 이름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 그 이상의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임을 알아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11:1-2).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오늘이라도 부르시면 하루만 더 있다 가겠다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떠나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세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은혜를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12:1~2
영적 예배
바울은 11장까지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십이 장부터는 실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와 실천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교리는 의식에 그치고 바른 교리에 입각하지 않는 실천은 불건전한 행위로 전락 될 것입니다.
1. 자비의 권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하나님의 자비에 올바르게 감동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Bengel).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나 곡식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제물이 열납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정성이 담긴 예물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합당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3-5).
문제는 회개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3-14).
'거룩한 산 제사'는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리는 제사입니다. 제사하는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거룩한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율법에는 제물이 짐승일 경우에는 흠 없는 것으로 드리게 하였고, 곡식은 처음 익은 것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깨달아야 할 것은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 뿌리는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 때문이요,
2)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열국의 제사장 민족으로 복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선택을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 큰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십시오. 바벨론이 망한 후 고레스로 하여금 전국에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을 때 그들이 고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마땅히 그의 기뻐하시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일 보다 자기를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3-6).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생활은 모두가 은혜로 살고 은혜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생활입니다. 학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난주 우리 곁을 떠난 김영철 할아버지는 해마다 성탄이 돌아오면 "목사님, 특송이 있습니다"하고 쪽지를 올려서 악보도 없이 독창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이 어떠한 일에도 요동할 줄 모르는 복된 신앙을 가졌던 분이라 생각됩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시기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저의 주변에서 저를 보는 사람들은 마치 오늘을 살고 끝날 것같이 일한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일할 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에 오늘 할 일은 반드시 마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수천억을 모은들 무슨 만족이 있으며, 또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던가요? 도리어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를 잃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학 1:9).
진실한 복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1:8).
2. 영적 예배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예배에 해당한 단어는 본래 하나님께 돌리는 경배와 공경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형식적인 예배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리아 역에는 "너희가 너희 몸을 영적인 예배로 드리기 위하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강요나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2) 자기의 소유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 인정해야 합니다.
3)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어떤 예배가 영적 예배일까요?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와 사유의 은총을 힘입고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절).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생존에 문제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믿음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2절).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헛된 세상의 쾌락을 좇지 말고 진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술 소비량이 국가의 년간 예산 사분의 일이 된다고 합니다. 담배 소비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가 국민 건강을 비롯하여 미치는 악영향을 생각하면 그 피해액은 말할 수가 없을 줄 압니다. 세속을 삼가하고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 아멘 -
로마서 12:3~13
성령의 은사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부여된 임무 역시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각 지체마다 임무가 다른 것처럼 성도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사명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추측 속에 가장 유력한 여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한 콜린 파월의 결단에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본분을 따라 자기의 위치에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겸손한 믿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것'과 '믿음의 분량'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데서 과오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 하거나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을 생각하여 크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며, 위대함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는 어떠한 재능과 부, 또는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장점을 과신하여 교만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달란트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았다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라' 문자적으로는 '건전하고 지혜롭게 행하도록 생각하라'는 뜻으로서 이는 지혜롭고, 건전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스스로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진 사람은 건전하고 신중히 행동하며 겸손의 덕을 세우게 됩니다.
2. 지체의 임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절).
이 말씀은 고전12:4-31, 엡4:25에도 있습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
여러 지체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한 인격을 구성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지체는 한 사람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몸 된 교회의 지체된 우리의 임무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재능과 지식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체 중에서도 눈의 임무가 다르고, 팔과 다리의 임무가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움직이는 이유는 머리로부터 신경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봉사하도록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몸에서 눈이 없으면 발이 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같이, 귀나 손을 비롯한 다른 지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 모두의 임무가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누구도 소외되는 인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부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3)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기준으로 형제를 비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은사의 다양성
성령은 같은데 은사는 다양합니다(고전12:4).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재능을 은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교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말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을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할 것이니라”(출36:1).
물론 본문에서는 성도들에게 주신 영적인 은혜를 의미합니다. 유의할 것은 성도들이 받는 은사가 각각 차이가 있다는 것과 그 은사에 따라 임무가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 의식을 망각한 사람은 그 은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예언의 은사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절).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은사이면서 또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 알게 하는 은혜입니다. 선지자라는 이름은 구약에서와 달리 신약에서는 교사들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행13:1),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행15:32),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행21:10).
그러나 오늘날은 사도의 직분처럼 선지자 직분은 없으나 선지자의 영감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2) 섬기는 은사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7절).
이 말씀은 여러 가지 봉사를 의미합니다. 아직도 은사라 하면 신비한 사역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은사 중에 두 번째가 섬기는 은사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모든 봉사자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행6:1; 11:29; 고전16:15; 고후11:8).
'집사'라는 말은 구제를 담당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물질을 준비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섬기는 은사를 외면하고 다른 은사만을 기대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누가 높으냐고 자리다툼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하시며 섬김의 도를 몸소 실천해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 섬기는 손길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가르치는 은사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7절).
이는 말씀을 가르치고 지식을 전달하는 사명입니다. 성경에는 교사들을 선지자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행13:1; 고전12:28-29; 엡4:11).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고전3:6)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교사의 임무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린 유치원생을 비롯하여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교사들이 있는가 하면 청·장년을 교육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모두가 진리를 교육하여 영혼을 양육하는 은사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교사의 임무를 맡은 자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부지런하여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4) 위로의 은사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8절).
이는 이론으로 교육하는 차원을 지나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권고하는 임무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시험에 빠진 자들을 건져주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덕망이 높은 권사들이 하는 일들이 되겠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는 중에 특히 어려운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손길이 귀중합니다.
5) 구제의 은사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8절).
한 때는 '떡고물'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지금은 '비자금'이라는 말이 매스컴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제의 은사는 물질로 봉사하는 은혜입니다. 특히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물질이 은혜 되게 쓰임을 받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물질에 인색하면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서 내려주십니다. 구제는 낭비가 아닙니다. 없어질 것으로 심고 없어지지 않는 것을 수확하는 영적인 농사입니다. 농부는 가을에 수확할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좋은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영적인 농사에 한가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기회는 속히 지나갑니다.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영육의 풍성한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6) 다스리는 은사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8절).
이는 양육과 함께 돌보고 관리하는 임무입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5:13-14).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주 앞에서 충성된 믿음으로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7) 긍휼의 은사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8절).
칼빈은 말하기를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병든 자나 가난한 자, 그리고 노인들을 돌보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고통당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느껴질 뿐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일이 자신에게 기쁨이 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어느 것 한 가지인들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능히 감당할 뿐 아니라 더 큰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천국임을 믿으신다면 열매 맺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0-11절). - 아멘 -
로마서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불교계의 큰스님이라 불리는 서암씨의 회고록에는 "도가 본시 없는데 내가 무엇을 깨쳤겠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막연한 믿음이 아닌 확실한 믿음 곧 증거 있는 믿음이요, 기독교의 윤리는 소극적인 윤리가 아닌 적극적인 윤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는 일반적인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자비, 공자의 도덕 모두가 귀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할 대속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성도의 실천 강령
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소망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소망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무능한 자를 능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닻줄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믿음과 소망은 동일한 은혜로서 믿음이 아래서 밭쳐 주는 은혜라면 소망은 위에서 끌어 주는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첫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했던 둘째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실패한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들을 보았으나 승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소망은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헬렌 켈러와 같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그처럼 불굴의 의지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젊음이나 건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2) 환난 중에 인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습니다.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무엇으로 가립니까? 바람입니다. 성도에게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 때 신앙의 진실 여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 방법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고달픈 인생 여정에서 남달리 많은 고난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다윗은 시련 중에도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하였고(시119:164),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3) 기도에 항상 힘쓰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이 기도일 줄 압니다. 기도는 우리를 무장시키는 성령의 도구입니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장을 해제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어릴 때부터 흉악한 귀신 들린 자를 고치기 위해 밤을 새우며 힘을 썼으나 능히 고치지 못했는데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쫓아내심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8-29).
K J 성경에는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부족을 깨달았습니까? 기도합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번민과 고통 중에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믿음의 기도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4)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
불신자들과 은혜받은 성도들의 생활에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자들은 자기를 위해 쌓아두고도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는데 은혜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을 위해 사는 데도 자족과 감사가 넘치니 신기한 일이지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성도는 물질이 없어도 무방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부질없는 근심에 빠져들 필요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하면 형통한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한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받은 달란트를 따라 몸을 드려 헌신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물질로 공급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에 한가한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 은혜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이것이 곧 땅에서 맛보는 천국의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도 간에 동고동락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절).
성도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12:26).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 전체에 확대해 나갈 뿐 아니라 주의 영광을 높이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짐을 서로 나눠질 줄 아는 형제애를 가리킵니다. "기쁨은 나누면 갑절로 늘어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가 제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이요, 당부한 말씀 역시 하나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요17:11).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16절).
성도 간에 화목이 깨어지는 이유는 높은 데 마음을 두고 남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멸망할까 조심하라."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낮은 자리 곧 겸손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3. 완전한 승리
1)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유사 이래 세상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처럼 평화를 염원하는데 피 흘리는 일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두가 이념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으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우방으로 변하는 것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물리적인 힘으로 다스리고 있으나 진리의 세계는 영적인 힘으로 다스림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전쟁에 참패하면 재산과 영토, 생명을 잃게 되지만 영적인 전쟁에서 참패하면 마귀의 노예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랑의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너희 복수심을 친절과 자비심으로 이기라 그것이 원수에게 그의 과실에 대한 부끄러움과 슬픔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존 스토트).
이를 두고 기독교의 윤리는 실현 불가능한 약자의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승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원수를 도와주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서 실천하셨고 또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절).
여기서 왜 원수 갚는 것을 우리에게는 허용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도 동일한 죄인으로서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죄인이 아니라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성도는 남을 축복할 특권을 부여받았으나 심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면 (홀로 코스트) 대학살 박물관이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 양편으로 늘어선 나무의 팻말에는 유대인들을 살려준 의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은혜를 기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불로 증오심을 불태울 때 죄에 매인 영혼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으로 악의 화전을 깨뜨리고 영원한 승리 얻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
성도들은 모두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국적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의 국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우리의 본향이 따로 있다고 해서 현실 세계를 무시하거나 도피 행각을 펼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있으므로 내일이 있는 것같이 현실이 있으므로 내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1. 권세의 필요성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먼저 세속의 정부와 성도의 의무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정부 상태나 무질서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2) 관원은 하나님의 손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어기는 자들은 처벌을 받게 됩니다.
3) 하나님의 권위는 관원의 권위보다 우월합니다.
관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법을 제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4) 종교를 관장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관원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다만 국가는 종교를 인정하고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5) 모든 사람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나라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6) 관리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하거나 강압적으로 성도들을 굴복하게 할 권리가 없습니다.
양심은 강요를 받아서는 안 되고, 신앙에 있어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5절).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특수한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사회생활의 원리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세속의 법에 저항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정부에서 우상숭배를 강요하거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명령을 내려 법이 양심의 권리에 위배 될 때입니다. 바울이 주의를 기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우상숭배를 거역하기보다 정당한 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1절).
여기에서 권세는 지배자들과 나라의 통치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굴복하라는 것은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 가면 후진국 사람들도 줄을 설 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진화의 척도는 준법정신에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이때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슬기롭게 극복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절).
이것이 성도가 권세에 순복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의 국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권세를 가진 자들이 그 직책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부정한 방법으로 권세를 획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속의 문제에 깊이 관여해서 안 될 것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절).
2. 권세와 의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3절).
그러나 세상에는 악한 관원들이 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면 법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관원을 세운 목적은 의를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9-10).
이런 일은 엄하게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절).
미국 동부에 있는 필라델피아 Brumall이라는 지역은 수풀 속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 단지입니다. 사슴과 토끼가 함께 뛰놀고, 부엉이와 산새들이 노래하는 이상적인 세계라는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비가 흔하고 사계절이 뚜렷하여 우리나라 기후와 크게 차이는 없다고 하나 어디를 가든지 맑고 산뜻한 분위기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교포들이 그곳으로 이민을 가면 먼저 소개한다는 아름다운 공원 Longwood Garden이 있는데, 그 공원은 Poerre S. du Pont라는 프랑스계 미국인의 저택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모은 재산을 교육 사업과 병원, 소방 업무 등 다양한 사회사업에 헌납하고, 살던 집은 정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을 모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처럼 물질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물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누구일까요?
한때는 가장 힘이 있었던 사람들이 교도소로 행하는 것을 보고 권력의 힘이 그것뿐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권력도 의를 잃으면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절).
3. 국세와 성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6절).
우리는 마땅히 국법에 순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세금을 내어야 합니다. 로마인들은 식민지로부터 공세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문제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울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절).
세금을 국세와 공세로 구분하고 있는데, 공세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 또는 부동산이나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을 뜻하고, 국세는 세관을 통해 부과되는 것으로 수입 또는 수출할 때의 세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육 일 전쟁에 아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 것은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느 기자가 말한 것을 보면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스라엘 학생과 아랍 학생이 동시에 결석을 했는데, 알고 보니 이스라엘 학생은 자진해서 전쟁터에 나갔고, 애굽 학생은 소집 영장이 오기 전에 숨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힘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요? 정신력에 있습니다. 국가 기강이 바로 선 나라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한다면 공직을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국의 시민으로 선택받은 성도들은 죄의 멍에에서 해방을 받은 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월요일 저녁에 저의 집에 어느 분이 전화 상담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십일조는 다 해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는 교인입니까?" 하였더니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데 가끔 한 번씩 새벽기도를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믿어집니까?" 하였더니 "그렇다면 십일조를 잘하시는 장로님은 왜 그렇게 부자로 살지를 못합니까?" 하기에 "진실한 복은 신앙의 안목으로 보아야합니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여러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가 열국의 제사장 민족으로 등장하기까지 힘 있게 전진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3:8~10
사랑의 빚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사람이 사는 동안 빚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안습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부득불 남에게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게을러 빚을 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제 불능의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1) 게을러서 가난해진 사람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24:33-3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2) 낭비벽이 심해서 가난해진 사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가난해서 짓는 죄보다 풍요로운 가운데서 짓는 죄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도들은 당연히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기보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1. 두 가지 부채
부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갚을 수 있는 부채가 있는 반면에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있습니다.
1) 물질의 부채
물질은 갚을 수 있는 부채입니다. 약속하고 거래를 했다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지 간에 물질 거래는 특히 조심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자녀를 볼모로 잡히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빚을 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므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윤현 성도의 미담입니다. 그분은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꽃동네 고아원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이 밝혀진 것도 마지막 남긴 유언에서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묻지 말고 병원에 기증하라"는 말을 듣고 자식들이 장지도 마련해 놓았으니 그럴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내 눈을 비롯해서 필요한 장기라도 그렇게 해 달라"고 하다가 그것마저 어렵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내게 용돈이 얼마 남아 있는데 이제는 내가 줄 수가 없으니까 너희들이 그 돈을 꽃동네 고아원에 전달해 달라"고 해서 그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질은 잘못 쓰면 죄가 되지만 옳게 쓰면 영광이 됩니다.
그분은 눈을 감을 때까지 당신이 세례받은 날짜도 잊지 않고 자식들에게 말해주면서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할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2) 사랑의 부채
사랑은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부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무거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빚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옳을까요? 그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더 많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두 눈을 실명하고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일리노이 대학에 교수로, 장애인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된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은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주어진 장애를 통해서 주의 뜻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된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2. 사랑과 율법
1) 간음하지 말라.
본문에서는 십계명을 전부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과 대조하여 율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가정을 통해서 생육과 번영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사랑과 행복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깨지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입니다.
가정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가정을 복되게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살인하지 말라.
살인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생명을 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라 내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모님 앞에서 제일 큰 불효는 자기 몸을 함부로 해치는 행위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남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는 죄악은 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살려주신 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우리는 계명을 어겨 살인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생명 구원에 앞장서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도둑질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는 누구나 땀 흘리고 수고하면 노력한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정당한 방법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값을 지불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농부가 땀 흘려 지은 것을 깜쪽같이 훔치는 도둑이 있는가 하면, 남의 집에 들어가서 강도짓을 하는 불한당도 있습니다. 엄히 다스려야 할 죄악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는 공산주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기 짝이 없는데 그 이유는 공평하게 만든다는 미명하에 있는 자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선의의 경쟁이 없어지고 노력도 하지 않아서 모두가 가난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의 열매는 기뻐하시나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념의 멍에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4) 탐내지 말라.
아이들의 심리를 보면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은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의 혈통이라 본성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 보면 구매 충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어떤 상품보다 기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은 한가한 두뇌를 가진 게으른 자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지만 근면하여 땀 흘리는 자에게는 넉넉한 보상을 안겨 줍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요, 어떤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일까요? 모두가 자기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탐욕이 아닌 남을 돕고 살려는 정신이 살아있는 사회입니다.
3. 사랑은 율법의 완성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8-10).
완성이라는 말은 충족 또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소극적인 계명이라면 사랑은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모든 부정과 죄악을 막아 줍니다.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자유 할 수 없으나 사랑 아래 거하는 자는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네기의 말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능력은 얼마든지 샘처럼 솟아 나온다. 사랑은 인간의 전인격에 활력을 주는 에너지가 되어 우리들의 모든 행동을 통해 그 찬란한 빛을 발산시킨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일에 대해, 동포인 인류에 대해서 정열을 불태운다. 그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오래 살며 건강을 유지할 것이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 묻지 않으시고 이웃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12:9).
일하고 싶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 아멘 -
로마서 13:11~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본문에서 교훈하고 있는 말씀은,
1) 구원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깊은 확신.
2) 이웃과의 교제에 있어서 올바른 생활.
1. 때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11절).
'시기’는 '카이로스(Kairos)', '의미가 있는 시간’ 즉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시간의 가치와 빠름을 깨닫고 생의 목적을 상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연세가 아직 육십이 안 되었는데 일하러 가면 나오지 못하게 해서 할 일이 없어졌다고 걱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내게 있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 줄로 생각하십니까? 세월은 신속히 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김동길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사십이 지나면 스피드가 빨라져서 1,2,3,4를 알아듣기 어렵게 지나가고 오십이 지나면 5, 10으로 넘어가 버리고 육십이 지나면 십 년은 바로 건너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다음은 달변 날변이라는 말이 또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
"잠은 죽음의 이웃이며 죄인들의 어리석음과 무감각에 대한 상징이다. 죄와 무지에 빠질수록 영적인 일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는 무감각하게 된다"(알버트 반즈).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세속의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안일과 방심의 잠에서도 깨어나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1)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
2) 박해에서 벗어나는 것,
3) 복음의 빛과 지식이 증가하여 처음 믿을 때보다 그들의 의무가 분명하게 된 상태 등입니다.
"너희는 하늘나라를 향하여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 너희는 영광의 세계를 향하여 서둘러 행진한다. 우리에게 날마다 빛의 왕국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빛과 영광의 세계를 위하여 더욱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알버트 반즈).
또 '가까워진 구원'은 주님의 재림과 개인적인 종말을 동시에 뜻하고 있습니다.
2.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방심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비무장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빛의 갑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6:11-17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의미합니다. 빛의 갑옷은 성도들의 완벽한 방어 무기이면서 또한 공격의 무기입니다. 무장된 한 사람이면 비무장 천 명, 만 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진시왕의 무덤이 있는 중국 서안에 가면 유명한 역사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전쟁의 영웅들이 싸울 때 입었던 갑옷과 창칼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옛날의 장군들은 신체가 골리앗같이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완벽한 갑옷이요, 무기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한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없으나 영적인 무기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무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영적인 무장으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삼손은 블레셋 무장 군인 일천 명을 거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밤이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죄악과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살전5:5). 또 '밤이 깊다'는 말은 '잘리어 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더욱 짧아져서 끝이 가까워졌다는 말씀입니다.
나이를 속일 수가 없어서 흰머리가 나오면 얼마 동안은 보기 싫어 뽑다가 점점 많아지면 염색을 하는데 그렇다고 젊어지던가요?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집사님, 정기적인 건강 진단은 받으십니까?" 물었더니, "목사님, 제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입니다. 병이란 병은 다 지니고 있는데 진단받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치료가 되지 않는데요." 했습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시점에 있든지 과거는 벌써 잘리어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이 말씀은 어느 때 누구를 대한다 할지라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1) 어둠의 일을 벗어버려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 영광을 유업으로 받으려면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 던집시다. 거기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목사님, 교회를 나오다 보니 이제는 꼼짝을 못하게 매인 것 같아요. 얼마나 처신하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 생활을 벗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어둠에 속한 일들을 보십시오.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자행됩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금세는 있을지라도 영생의 소망은 없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단호하게 척결하십시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욘1:6).
2)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
방탕은 난잡한 삶을 의미합니다. 향락과 사치, 무질서한 생활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술 취하고 방탕하면 길을 가도 바로 걷지를 못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아이들과 술 취한 사람입니다. 또 교통법규에도 음주 운전자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 술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노아가 포도주를 마신 일로 잠을 자다 자식들에게 수치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23:31-35).
또 술은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TV 프로에서 가장 흥미 있게 보는 것이 동물의 왕국입니다. 자연 세계는 언제 보아도 거짓과 꾸밈이 없이 본능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봅니다. 그런데 야성에 매력을 가지면서도 코브라 같은 뱀이 나오면 마귀를 연상해서 그런지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코브라가 먹이 사냥을 할 때 보면 알아채지 못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번개같이 물어 전신이 마비되면 삼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술 취한 돼지를 보았는데 사람이 술 찌꺼기를 먹였더니 돼지도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고 했습니다.
무서운 것은 술에도 독이 있어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지고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걸음도 비틀거리고, 혀도 꼬부라지게 되지요. 그런데도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마약에 중독된 자가 환각 상태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것같이 술 취한 인생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3)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
추잡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술 취하고 이성을 잃으면 그 다음에는 음란과 호색이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4)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쟁투라는 말은 다툼, 분쟁, 논쟁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기’라는 말은 어떠한 열정과 관계되는 말로 잘못된 죄악들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매여 누구를 위한 열심이냐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 위해 얼마나 열심을 보였습니까? 그는 밤중에도 원수 무리들과 내통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악용되는 열심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늘날 생존경쟁이 전쟁을 방불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면 방법을 개선해나가야 할 줄 압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단정히'라는 말씀은 깨끗하고 반듯한 태도로서 빛의 자녀답게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빛 가운데서 주변을 의식할 때는 단정하지만 어둠에 있을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지금까지 정욕에 매여 살지는 않았습니까? 벗어 던지십시오. 죄악에 매여 종살이하였습니까?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여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4:1~6
음식과 믿음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조카의 집에서 지내다 보니 자기들이 먹고 지내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촌, 무슨 음식을 좋아합니까?"하고 묻기에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내일 아침에 생선 시장에 갑시다."해서 조카사위와 함께 우리나라 노량진 시장 같은 곳에 가서 이것저것 먹음직한 생선을 약 십만 원어치를 샀는데 얼마나 많은지, 미주 총회 신학교 학장과 교수들을 청해서 대접을 하고, 또 다른 손님을 청해서 대접을 했는데도 한 주간을 계속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하는 식당이라 할지라도 그 식당에 계속 가게 되지 않는 이유는 입맛이 변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변덕을 부리기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는 좋아 보이던 것이 저녁에 싫증이 납니다. 물론 사람이 사는 데는 적절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1. 정하여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땀 흘리고 고생하는 것도 먹는 문제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해도 먹어야 할 음식이 있고 삼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으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있어서 정한 것은 먹을 수 있으나 부정한 음식은 금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생명과와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과가 많았는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후에는 정결한 것보다 부정한 것이 더 많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정결한 것을 취할 때 임하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에 보면 정결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나 부정한 것은 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거룩하므로 부정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드릴 일은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에게 허락하신 정결한 것이 넉넉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백성들을 가난하게 함이 아니라 풍성하고 존귀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복음 안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엄격히 따지면 믿음 안에서는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정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도 용납되는 것과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남의 집에 가서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채식을 좋아하는 분이 있고,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산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런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는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이 짧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 얻을 믿음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에 관한 믿음은 구원받는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주의 이름으로라면 잘 먹는 자가 복이지만 잘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구원받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식물이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다만 믿음이 있는 자도 삼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1) 우상의 제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8:4-7).
믿음이 큰 사람에게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 앞에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곳곳마다 교회라기 보다는 불당 같은 분위기를 느낄 정도로 수많은 우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실족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0-12).
2) 덕스럽지 못할 때
성도들은 덕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업적, 즉 기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나의 자유가 남에게 근심이 될 때는 삼가는 것이 덕이 됩니다. 바울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일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근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믿음 약한 사람에게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자랑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일은 없었습니까?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복 주셨으니 잘못될 것이 없다고 하겠으나 겸비의 덕은 더 귀중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3-4절).
3. 날짜와 믿음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절).
하루 24시간 중에 어느 시간을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약속이 있는 시간, 또는 분주하게 일해야 하는 시간, 어떤 사람은 하루해가 저물고 조용히 쉬는 시간이나 음식을 먹고 즐기는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시간이든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할 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날이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복할 여지 없이 주님의 날이 될 줄 압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님의 날을 귀하게 여긴다면 성일을 엄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이날에 경배와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일만 귀중하고 다른 날은 귀하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주님께 드려야 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모든 날은 동일하게 중요한 날이 될 줄 믿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절).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대치동에 있는 00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후두암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육 개월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막다른 골목에서 "이번만 살려주시면 덤으로 사는 인생 주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하고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올렸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그 말 처음 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기겁하며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온 과거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데 "이번만, 이번만" 하면서 올린 기도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마다 그렇게 기도를 올렸으나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또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사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이는 암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얼마 전 새벽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사무실에 나와 있는데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잘못 걸려온 전화이겠지’ 하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L집사의 목소리였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새벽에" 하였더니 "목사님, 여기가 병원인데요 우리 딸이 지금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갑니다. 아직 날짜도 남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가 위험해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십시오. 아기는 딸이라고 하는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신장이 나빠서 입원했다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목청껏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순산을 하고, 또 딸이 아닌 아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도 않고 퇴원을 하였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아멘-
로마서 14:7~8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올림픽을 보면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한 백육십칠 개국 중에서 아직 동메달 하나도 따지 못한 나라가 3/4이 넘는 것을 볼 때 한결 긍지와 자부심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나라는 중국같이 넓은 영토에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도 아니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처럼 여러인종들이 섞여 이루어진 나라가 아닌 단일 민족으로서 우리같이 우수한 성적을 올린 나라가 없는 줄 압니다. 특히 미국이나 캐나다를 비롯한 나라들은 대부분 흑인 선수들을 내세워 획득한 메달임을 생각할 때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기량을 하나로 묶어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면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이 될 줄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
태능 선수촌에서 피나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주일에는 빠짐없이 우리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선수가 금메달을 딴 후에 기자들이 승리한 소감을 물었을 때 숨을 몰아쉬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도 고마워서 전보를 띄웠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승리하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리는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이 불신자들에게 어떠한 감동을 주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잘못 생각하면 신앙이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궁극적인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올림픽 금메달 딸 수 있도록 구해도 응답받을 믿음이 없는 것은 받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맡은 임무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재능을 받아, 또 무슨 임무를 맡았든지 그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의식입니다. 사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자기 조국과 민족을 대표하여 출전하므로 당연히 조국의 긍지를 살려야 할 사명을 지니고 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인류 앞에서 더 중요한 영적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중요한 만큼 돌아오는 영광도 지극함을 믿습니다.
2. 금과 은의 영광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3:12-13).
우리는 올림픽에서 메달 하나 따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모양을 갖추었어도 금, 은, 동메달의 차이는 너무도 큽니다. 동메달이 많아도 은메달 서열을 앞서지 못하고, 은메달이 많아도 금메달 서열을 앞서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영광도 각기 맺은 열매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섰을 때 동메달 선수도 감격하고 금메달 선수는 더 감격하여 눈물을 보이는데 은메달 선수는 그런 감격을 보이기는 고사하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볼 때 무엇 때문에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했을 텐데…'
사실 은메달과 금메달의 실력 차이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동메달 점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결승에 올랐기에 금메달을 목에 거는 일까지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날의 대진 운이 나빠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오늘날 공정한 심판을 위해 컴퓨터가 동원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심판은 더 철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누가 주의 일에 눈가림만 하는 사람이며, 누가 목숨을 다하여 충성하는 사람인지 아십니다. 금메달에 목표를 두고 땀 흘리는 사람의 기량이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기량과 동일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영광을 얻는 데도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이 어찌 한가한 중에 받으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세상 영광을 위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은메달에 만족하지 말고 금메달의 영광을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미 해군 제독 Richever씨가 새로 부임한 젊은 장교를 면접할 때 한 말입니다.
"그대는 해군 사관학교 졸업 시 석차가 어떠했는가?"
"820명 중 59등을 했습니다."
"그 성적이 그대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꼭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Why not the best?" 이 말이 그때부터 그 젊은 해군 장교에게 도전을 준 좌우명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입니다.
여러분! 의의 면류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은메달이 아닌 최고의 영광을 획득할 수 있는 좌우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충성’입니다. 이 말이 어려워서 기억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충성된 제물 되어 최고의 영광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폐 일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곧 내게 있어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시고 죄를 속량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국의 머리가 되게 하시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내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철장 권세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높임을 받기에 앞서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의 도를 실천하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로 분별하여 그 뜻을 이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성도가 복을 받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열국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흥망성쇠에 왜 그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셨을까요? 주님의 영광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사27:7),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더 중요하게 여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큰 복을 받으시기 소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7-8절).
우리 모두 충성된 믿음으로 큰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4:13~23
하나님의 나라
바울이 로마서 십사 장에서 음식에 관한 문제를 다룬 이유는 음식으로 인해 형제를 판단할 뿐 아니라 신앙에도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의에 이르게 하거나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생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1. 형제 앞에 장애를 두지 말라
십사 장 일절 이하에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어야 하는 자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에 대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으면 죄가 될 이유는 없을지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는 행위는 죄가 됩니다. 주님께서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하신 형제를 우리가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3절).
우리는 뇌물에 눈이 어두워서 주의 백성을 실족하게 했던 발람의 망령된 행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민25: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2. 속된 것과 정결한 것
모세의 율법에는 정하고 부정한 식물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습니다(레11장).
안식교에서는 지금도 율법에 따라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의 그림자라 하였습니다(골2:17).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 함을 얻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의 기준이 달라진 것같이 성별의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절).
'속되다'는 말은 '거룩하다'의 반대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받으면 속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음식을 두고 구원 문제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음식이 우리를 성별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음식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은혜가 음식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어떠한 믿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식물로 인해 형제가 실족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무서운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5-16절).
3.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요, 또 가야 할 본향입니다. 행복은 달리 생각하면 불만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가득한 불만을 품고 살면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가 없어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는 너무도 많지요. 우선 슬픔과 고통이 없어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되므로 인해서입니다. 하늘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주림이 없고, 헐벗음도 없습니다. 전쟁으로 피 흘리는 일도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입시 지옥도, 부실시공이나 재개발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은혜와 진리 그리고 영광만이 충만한 나라입니다. 해와 달이 필요 없고, 또 어떠한 해함이나 상함도 없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므로 모두가 만족하고 기쁨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을 꿈꾼다 할지라도 하늘나라는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것은 여전히 꿈이요, 참 만족을 주지 못할지라도 하늘나라는 꿈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누리는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드릴 일은 이 땅에서도 그러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7-18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는데 '하늘나라에서는 식도락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술도 담배도 없고 여자와도 즐길 수 없다면 나는 그러한 하늘나라보다 차라리 지옥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옥이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지옥이라 할 수 없지요. 이 땅에서도 죄수에게는 자유가 박탈되고 형벌이 지옥 불못에서 격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잘 먹고 못 먹는다고 별것이 있던가요. 그렇다고 잘 먹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합니다. 일을 많이 하므로 에너지 지출이 많은 사람이라면 많이 먹어야 하고, 에너지 지출이 적은 사람은 적게 먹어도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음식에 부끄럽지 않도록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19-20절).
바울은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이라면 일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피차에 덕이 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성령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구원의 기쁨이 강물같이 넘쳐날 줄 믿습니다.
4. 복된 믿음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절).
'네게 있는 믿음은' 이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가 가진 바 그 믿음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정하게 하는 확고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스스로 약하게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약한 자를 이해하고 도와줄 필요는 있을지라도 믿음 약한 자와 같이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23절).
영국 신학자 리챠드 세실의 말입니다.
"믿음은 모든 악을 우리에게 선한 것으로 바꾸어주고 모든 선한 것을 좀 더 선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불신앙은 모든 선한 것을 악으로 바꾸어 주고 모든 악한 것을 더욱 악하게 만든다. 믿음은 비록 창을 흔들어대도 웃어버리나 불신앙은 나뭇잎이 흔들려도 떤다. 불신앙은 굶어 죽게 하나 믿음은 기근에서도 음식을 찾게 하고 광야에도 상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위험한 때에 '믿음'은 말하기를 '나에게는 위대한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말한다. 외부의 힘이 죽어버리면 믿음은 약속 위에 쉰다. 큰 슬픔 중 믿음은 모든 환난에서 아픔을 끌어내고 모든 고통에서 괴로움을 가려낸다."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23절).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더욱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5:1~13
연약한 자를 담당하고
사람마다 신앙의 차이는 있게 마련입니다. 본문 말씀은 십사 장에 이어 음식에 관해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부작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석가들 중에는 이 문제를 유대인 개종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으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1. 강한 자가 해야 할 일
1) 연약한 자를 담당해야 함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절).
바울은 자기를 강한 자 편에 두고 있다는 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나를 죄 중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
기회를 잃지 말고 모두가 일어나서 사망의 사슬에 매여 있는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앞길에 왕벌을 보내어 원수와 대적을 무찌르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앞길에 권능의 손길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전쟁으로 겪는 비극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싸워야하는 것은 전쟁에서 참패하면 모두를 잃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전쟁에서 패배하면 더 큰 비극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마귀와 싸워서 승리해야 할 뿐 아니라 사망의 결박에 매여 있는 형제를 건져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형제의 약점을 담당해주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했을 때는 복이요,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을 했을 때는 저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또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았다면 복 받을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등지고 주님을 따르며 십자가를 질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을 바라보았기에 사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을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숨도 불사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29, 40-41).
지존파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소름끼쳤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악마의 화신으로 등장하여 살인을 일삼았던 그들이 죽기 전에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1995.11.3일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 예배를 담당했던 문장식 목사는 말하기를,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가장 은혜로운 시간으로 거기는 사형장이 아니라 하나님 만나는 성스러운 자리로 믿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악하던 그들이 예수를 믿고 난 후 순한 양처럼 변한 모습을 지켜보았던 교도관 중에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한 전날 밤 숙직했던 사람까지 참석하여 감격해하는 순간들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일주일을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 대부분이 금식을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모두 나눠주고 두목은 자기의 신발에 성경 구절을 써서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더욱 감명을 주는 것은 그들이 남긴 유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너무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가족들도 예수를 믿어 천국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 이러한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할렐루야!"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때 인간 도살장으로 사용하였던 전남 영광에 있는 그 집에 지금은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시들지 않는 영광을 누리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절).
여기서 이웃이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해 넓은 의미의 이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선과 덕이라면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유서를 남기고 수락산에 올라가 자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까지 사랑이 메마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어두운 그늘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절).
이것이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미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절).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잘못과 실수를 즉시 벌하지 않으시며 은혜의 손길로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안위가 아니라면 죄지은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어거스틴은 그 질문에 "한 사람도 살아날 사람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모두가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합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6-7).
3. 그리스도의 할례와 이방인의 소망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8-9).
그리스도의 할례와 이방인의 구원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할례는 선택받은 백성들로서 육체에 나타낸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게 하고, 어린아이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사 이방인과 선민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밖의 사람은 날 때부터 이방인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릴 일은,
1)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기 때문이요,
2) 주님께서는 율법에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10-12).
우리는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불림을 받은 천국 일꾼이요, 십자가의 정병들입니다. 비장한 각오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 때 우리가 천국 확산 운동의 일원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가 영원한 승리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15:14~21
바울의 자랑
본문에서부터 십육 장까지를 주석가 가뎃(Godet)은 "로마서는 한 편지에 간직되어 있는 교리적이며 실천적 논문인 것은 이미 말하였다. 이 논문은 이제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다시 시작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디스만(Deissmann)은 "로마서를 교리편과 실천편으로 나눈다면 그 중요한 부분들은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결론은 완전히 사적인 분위기이다. 강단에 서서 학술 강연을 마친 강사가 강단에서 내려와 친지를 만나 정담을 나누는 광경과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로마서를 쓴 이유를 밝혀 그들에 대한 신뢰를 말하고, 십육 장에서는 문안 인사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1.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
1) 선함과 지식이 가득하였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14절). 선함과 지식은 신앙의 성숙을 말해주는 이 대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의 믿음이 모두가 일치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중에서도 맺는 결실을 기뻐 받아 주십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선함과 지식이 가득한 믿음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권면이 있었습니다.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절).
천국 확산 운동과 구역별 섬김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를 강권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입안에서 무엇이 돋아나는 것 같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서 "전도폭발 운동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시작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우리 모두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바울의 소명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15절).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원문에는 '기억을 더듬어서 너희들로 하여금 생각나게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가 지식과 바르게 행하려는 의도를 충분히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대략 너희에게 썼다'는 말씀 역시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곳저곳에 이미 언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1) 이방인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일꾼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16절).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부여받은 사명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1:5).
이로 인해 바울의 생애는 소명 의식에 불타는 삶이었고, 향방 없이 방황하는 삶이 아니라 목적을 두고 달리는 삶이었으므로 그의 마지막은 영광스러운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소명 의식이 없이는 인간 된 도리를 이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내게 분부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믿고 순종하여 주의 뜻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복음의 제사장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16절).
구약 시대에 제사장의 임무는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해서는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한 제사장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엄히 따져 제사장 제도는 성전시대에 성직으로, 교회 시대에는 계승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우리를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3. 복음의 제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만하게 하려 하심이라"(16절).
반드시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구약 시대에는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제사 제도가 소나 양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흘린 피로 우리의 제사를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믿음의 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은 죽어야 되는 것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죄악의 사람, 곧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바울이 무엇으로 제물을 삼아 거룩함에 이른다고 하였습니까? 우리의 몸입니다. 율법으로는 짐승의 피가 대속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는 몸으로 제사를 드려 대속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습니다.
3. 바울의 자랑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17절).
'자랑하는 것이' 영어로는 '영광'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또 찬양과 감사, 기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오직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약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18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엄청나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바울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로되 그에게서 나타난 역사는 모두가 신적인 역사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또 축복입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때에 그의 입을 통하여 나타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닌 영감으로 넘치는 진리의 말씀이 되고, 그가 옮기는 발걸음에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절)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모두가 성령으로 일어나는 역사임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할지라도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주의 뜻을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5.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9절).
일루리곤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서북 편으로 이태리, 독일, 마게도냐 접경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멕섹,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그리고 그리스의 모든 섬들과 데살로니가와 마게도냐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광활한 지역을 또 그렇게 강퍅한 자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곧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성령으로 전하는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구되어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믿음과 사명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20절).
이는 믿는 자들에게는 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선교적인 차원에서입니다. 믿는 자에게 양육의 은혜는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가 세워진 곳을 위해 계속 기도하였고 또 신실한 사역자를 보내어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확산 운동을 위한 역군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대열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고, 우리의 사명 마치는 그날 의의 면류관 받아 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로마서 15:22~33
마지막 기도 부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했으나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로마는 국제적인 수도로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할 때 거기서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꿈은 인간적인 욕망에서가 아니라 오직 선교에 불타는 사명에서였고, 또한 그의 믿음에서였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의 믿음대로 로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응답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믿음 여하에 따라 역사가 달라집니다. 크게 믿으면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작은 믿음이라면 작은 역사가 일어나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바울의 열망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22-23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바울은 서두부터 여러 번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지금까지는 길이 막혔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1:13).
그 길이 어떻게 막혔는지 알기는 어려우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시아나 비두니아로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던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 전해야 할 복음 사역이 더 다급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고, 또 한 편으로는 사단이 못 가게 길을 막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어떠한 장애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우리도 이렇게 굳은 결단과 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맡겨주신 달란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 중에는 교회 건축하기를 소원하여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위해서는 전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 어떤 가정은 "온 가족이 예수님 닮도록 살게 해 주옵소서"라는 소원도 있습니다. 모든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2. 마게도냐 교회가 맺은 열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25-26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 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난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면 물질이 많아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물질로 마음이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반드시 물질이 넉넉해야 좋은 일 할 수 있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일평생 복 받을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일은 성령의 열매는 물질로 맺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복된 일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을 내려 주셨는데 열매 맺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모두가 선한 일에 부자 되기를 바랍니다. 또 귀한 사실은 하나님의 공평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8:13-14).
모든 인류가 평화를 원하는데도 분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공의가 무너진 일로 인해서입니다. 이상 기류가 발생하면 태풍이 일어나고, 고요한 바다가 풍랑이 일어나듯 인간 세상도 공의가 무너지면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북한 동포를 생각해야 될 때입니다. 지금 북한에는 국민은 주려있는데 전쟁 무기 만드는 일에는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굶주림에 지쳐서 견디다 못해 탈출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외교관들도 귀순해 옵니다. 독일인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는데, 우리라고 휴전선을 허물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절).
"기록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5).
모두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로되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3. 종의 특권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이것이 주의 종들에게 허락하신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기근이 들어도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대접한 일로(왕상17:13) 기근을 면할 수가 있었고, 이삭은 아들에게 "내가 그것을 먹고 네게 복을 빌게 하라"(창 27:4)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복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바울의 기도 부탁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절).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가 펼치고 있는 천국 확산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손과 발이 움직이고 말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심을 체험한 줄 압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침묵하게 하지 마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안식일에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부탁한 기도입니다.
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31절).
바울이 가는 곳마다 가장 심한 박해는 그의 동족 유대인으로부터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박해가 두려워서 기도를 부탁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죽음이 두려웠다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있다면 어떠한 박해에서도 주의 복음이 담대하게 전해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만하게 하고"(31절).
이 말씀은 구제가 구제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루살렘 교회에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3)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절).
모든 일이 기도로 되는 줄 알았다면 우리는 기도에 게으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승리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 후에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마서 16:1~16
믿음의 사람들
우리는 본 장에서 바울이 문안하라고 소개하는 많은 사람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모두 초대 교회의 복음 사역에 충성한 일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십일 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구약 시대에 진리의 맥을 이어준 자들이라면, 본문에 등장하는 성도들은 기독교를 세계화하는데 바울 사도와 함께 기초를 놓은 일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걸어간 발자취일지라도 진리를 위해 바쳐진 생애라면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으셔야 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철학가나, 어느 종파나, 법률이나, 교훈 등이 기독교 신앙만큼 선하다고 높임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헬라인들로서 주석가들에 의하면 그들은 헬라에서 살았으나 생업을 위하여 로마에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고린도와 헬라의 다른 지역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자들도 있습니다.
해산하는 데는 고통이 따르지만 새 생명으로 인해 얻는 기쁨은 더 큰 것같이 복음의 열매는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1. 겐그레아 교회 일꾼 뵈뵈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1절).
바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낯선 사람에게 소개장을 써서 보낸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 다른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고후3:1; 행18:21).
본문에서 제일 먼저 뵈뵈의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녀가 로마서를 전달했거나 아니면 본 서신을 로마에 전해준 자들과 함께 동행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로마서에 뵈뵈의 이름이 먼저 오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러한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뵈뵈로서는 크게 기뻐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뵈뵈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그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 하였습니다.
이는 주의 몸 된 교회에서 믿음의 어머니로서 보호자 역할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겐그레아에 있을 때 일찍 하나님께 서원한 일로 머리를 깎았던 일(행18:18)이 있었습니다. 그 때 뵈뵈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나눌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칼렙 C 콜턴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과 몸을 분리할 수 없음 같이 믿음과 행함은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에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요소이다. 믿음은 종교의 영혼이요, 행함은 종교의 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
2. 브리스가와 아굴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절).
바울과 함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전도 행적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행18:2,26; 고전16:19)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로마에서 살다가 황제 글라우디오(A.D. 41-54)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추방할 때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막 만드는 업이 같으므로 바울과 함께 일하면서 복음 사역에 이바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 부부의 신앙에 대해서는 이미 로마에 있었을 때로 보는 설과 바울을 만난 후로 보는 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쁘게 한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같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목숨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4절).
충성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된 믿음이 그들 부부를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진 삶은 하나도 헛된 일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숨을 바쳐도 후회되지 않을 삶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른들은 몰라요" 부모를 근심하게 하는 학생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도 부모가 될 텐데 그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순교자가 받는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일어난 성령의 사역에는 이렇게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4절).
3. 에배네도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5절).
에배네도는 마가나 누가, 디모데와 같이 바울의 전도 행적에 달리 나타난 일이 없으나 바울의 기억에서 지워질 수 없는 보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처음 익은 열매는 성물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것입니다(출 23:19). 그러고 보면 에배네도는 참으로 귀중한 결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마리아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누구인지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더 깊이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도들을 도왔던 그의 수고가 생명록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6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어떠한 수고보다 더 헌신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를 위한 많은 봉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요, 은혜로운 교회입니까? 숨은 봉사자가 있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 열매 맺는 교회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은 봉사의 열매가 풍성해야 합니다.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있는 것까지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허무에 매여서 종살이를 한다면 모든 수고가 불행일 뿐이나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수고는 많을수록 더 큰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7절).
로마서 구 장 삼 절에서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른 사람은 그러한 명칭으로 부르지 않다가 십일절에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고 부탁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바울의 먼 친척일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인해 바울과 함께 갇히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사도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았고,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신앙의 뿌리를 비롯하여 줄기와 결실, 어느 것 하나 빠질 데 없는 신앙의 일꾼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에 얼마나 동참했습니까?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하였습니다.
이 고난의 흔적이 주 앞에서 내가 받을 면류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도 주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5. 암블리아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8절).
암블리아에 대해서는 바울도 자세한 소개를 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으로 충분하다면 그 역시 교회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명함이 가득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 중에는 실속이 없는 사람도 없잖아 있는데 정작 유명한 사람이라면 명함 없이도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르바노와 스다구를 비롯한 모든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3절).
이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그의 어머니이고, 상징적인 의미로는 나의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루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로 보기도 합니다(막15:21).
모두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님을 섬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생명과 구원을 안겨준 복음의 초석이 되었다면 시대적인 종말에 불림을 받은 우리들은 무르익은 곡식들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마9:36-38).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진리의 대열에서 봉사할 자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입이 둔한 자도 근심할 것 없습니다. 가난한 자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기회를 잃지 말고 증인 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 아멘 -
로마서 16:17~27
선한 데 지혜로운 자
음식은 일생을 먹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접할 때마다 그 오묘하고 깊은 진리의 맛을 바로 깨닫고 소화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영적인 소화 기능이 왕성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1. 분쟁에 휘말리지 말라.
어느 때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는 분쟁을 일으키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려고 그토록 애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실족하는 것을 보면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초대 교회도 시험이 있었는데 물론 성격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그중에는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고린도 교회가 분쟁을 일삼았던 원인을 보면 영적인 미성숙으로 말미암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1-4).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거기는 복음을 변절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하리라 하였습니다.
진리를 변질시키는 죄는 어떠한 죄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에서도 뱀의 시험이 있었던 것같이 지상 교회는 언제든지 마귀가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절).
그러한 자들은 삯꾼이요, 이리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를 보십시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절).
무서운 일입니다. 또 그런 자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요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2.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19절) 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일 장 팔 절에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언제나 보배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6-8).
지금 우리는 소리도 없고 빛도 없이 그러면서도 왕성하게 천국을 확산하는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때가 임박하므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원자력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자 대기하고 있는 환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간호하는 보호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러다 보니 과거에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웃집 할머니도 만나서 전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천국을 이 땅에 건설하는 일이요, 또 하늘나라를 땅끝까지 확장시키는 일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은 신령한 영토는 국경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맙시다. 지상 나라는 피 흘리는 전쟁으로 확장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복음으로 확장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비무장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원수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영적인 무장 곧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절).
'선한 데 지혜롭고'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용장이 지장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한 사업에 지혜롭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한 데는 미련하라'
만일 악한 데에 지혜로우면 어떻게 될까요? 악한 일에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하고 죄짓는 일에 전문가가 된다면 그는 사탄의 종이지요.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사탄은 참소자, 비방자, 원수,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올무를 조심해야 합니다.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과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에덴에서 축출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감사드릴 일은 주님께서 원수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절).
3. 문안 인사
본 장의 서두에서는 로마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곧 로마 교회 성도들이 문안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본문 말씀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하는 인사입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21-23).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요, 동역자로서 로마서를 기록할 때 동거하였을 뿐 아니라 고린도를 떠날 때에도 동행하였습니다(행20:2-4).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중에는 고린도후서를 비롯하여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빌레몬서 등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과 함께 송신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가 바울과 함께 따뜻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식주인 가이오는 바울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자기 집에서 대접한 사람입니다. 이는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개방하여 성도들을 환대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 중에서도 그렇게 봉사하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분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복을 받아야 복된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복을 받아 선한 업적에 부자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든지 주저하지 말고 헌신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감취었던 보화
이십오 절 이하의 말씀은 이제 로마서의 결론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송영과 기원입니다. 여기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보화라는 것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25-26절).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한 복음이라야 참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변절시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책망한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진실한 보화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은 황금 보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물질을 생명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보화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26절).
그리스도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입니다(요1:45).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기 전에는 우리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살았던 자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곧 우리가 믿는 복음이 만민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요, 또 만민이 믿고 구원받아야 할 복음입니다. 이제 로마서의 대장정도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6-27절).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