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할 것이 없는 믿음
(고전1:1-9)
여러 해 전 성지를 순례하던 중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고린도 운하를 지나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의 발자취를 통해 깊은 감회에 젖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후 오십이 년에 마케도냐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였습니다(행18:1).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는데 그날 이후 그들 부부의 충성심은 대단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들을 천거한 것을 보면,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롬16:4)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잘못된 교사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지도자의 영향은 크지만 특히 영적인 지도자가 잘못되면 많은 사람이 실족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하였습니다.
1. 발신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1절).
여기서 바울이 본서의 저자라는데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으나 소스데네에 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십팔 장 십칠 절에서 보면 그는 유대교의 회당장으로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였는데 그때 갈리오 총독이 바울에 대해 국법을 어긴 일이 없으므로 재판하지 않겠다고 하자 소스데네는 헬라인들에게 구타당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여 바울과 함께했는지 궁금합니다. 다만 소스데네는 고린도에서 잘 알려진 회당장으로서 그의 개종이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수신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2절) 하였습니다.
1) 고린도 교회와
2) 동일한 믿음을 가진 모든 교회들입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의 진리이므로 어느 때, 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3. 바울의 감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4절).
목자로서는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대할 때 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줄 압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서3-4).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저는 새벽예배 1부, 2부를 통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갈급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심령에 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경성하여 은혜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5절).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변화를 보십시오.
1)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 오천 명이 가슴 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행4:13).
몇 해 전 구역을 맡은 어느 집사님 중에서 “목사님, 저는 배운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은혜가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을 잘한다”고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8-20).
2) 지식이 풍족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이 진리와 은혜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의 은혜는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6-7).
4. 책망할 것이 없는 믿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8절).
책망할 것이 없는 믿음, 그것은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은 교회는 서머니 교회와 빌리델비아 교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로부터 받는 칭찬이 곧 상급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에 힘쓰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까? 주님 앞에 설 때 “잘 했다” 칭찬 받기 위해서입니다.
바나바 사역자 훈련을 수료한 성도들이 모두 은혜를 받고 사십 일 작정기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4-36).
십팔 세기 미국 교회가 낳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라는 것처럼 오늘을 그렇게 살자.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을 하자. 이미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을 맛본 사람처럼 행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병상에 있을 때 가치 있다고 판단 될 그런 일을 지금 하도록 하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든지 내 임종의 순간에 이 일이 얼마나 가치 있다고 생각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도록 하자.”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복을 받을 사람이 복 받을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날이 영광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절). 아 멘
유일한 복음
고전 1:10-17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1) 분쟁의 문제(1:10-4:)
2) 도덕적인 문제(5:-7:)
3) 우상 제물에 관해서(8:-10:)
4) 집회 문제(10:-14:)
5) 부활의 문제(15:)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을”(7절) 보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충만할 때도 시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내게 임했는지 그 은혜를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1. 바울의 권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바울이 사도의 권위로서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값진 교훈이라 할지라도 권위를 무시하면 효력을 잃게 됩니다.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식이나, 스승의 권위를 무시하는 학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만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1-42).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이것이 마귀의 교만입니다. 마귀는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다 저주 받은 악령입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입니까? 유대광야에서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탄의 소리입니다. 마귀의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하였습니다.
우리는 백부장 고넬료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그때 고넬료의 가정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2. 분쟁의 요소
1) 나는 바울에게
그들은 바울을 통해 은혜받은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고린도 교회 일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는 고린도 교회 가면 초대 당회장으로 바울의 이름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나는 아볼로에게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한 유대인으로서 성경에 해박하고 언변이 뛰어난 학자입니다(행18:24-19:2).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자라면 아볼로는 물을 주며 가꾸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는 낳은 정, 기른 정 모두 귀중합니다. 사실 아볼로는 바울과 불화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지만, 그들을 두고 교회가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의 사랑을 더 받고 싶어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3) 나는 게바에게
고린도에 게바파가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중에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은혜받은 자들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베드로를 주님의 수제자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4) 나는 그리스도에게
한국 교회가 WCC 가입 문제로 예수교와 기독교로 분쟁하는 것을 보고 어느 선교사가 “한국에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두고 분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기현상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동일한 복음이라 할지라도 해석상 문제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진리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같은 복음을 믿으면서 교회와 교회끼리 시기와 질투로 양들을 병들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서 분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바울이 전한 복음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13절).
저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또 바울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을 수 있다면 제일 큰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만일 ‘제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한다면 또 한 사람의 이단이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조심스럽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3:17).
. 이것은 신앙의 대상을 그리스도가 아닌 바울에게 두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피가 골고다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과 동일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은 누구도 대속할 수 없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대속의 은혜를 받았고 또 이 복음은 자신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바울은 유일한 복음, 이 구원의 진리를 변질시키는 일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
A. P. 깁스는 말입니다.
“내가 철학을 전파하였더니 사람들은 칭찬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더니 사람들은 회개하였다”고 했습니다. 보는 자와 듣는 자,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복음!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교리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받을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모세와 같이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히11:26).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복인 줄 안다면 우리는 더 큰 영광에 이르도록 충성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인데, 얼마 전에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더니 당장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떨어져서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 나이에 수술을 받는단 말이요 나 수술하지 마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세상에서 내가 사는 날 동안 마음껏 봉사하고 살겠습니다.’ 하였더니 수술을 받지 않고도 좋아져서 지금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폴리갑과 익나타우스는 초대 교회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로 그들은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과 달리 대속의 죽음입니다.
1. 멸망하는 자들
진리의 진수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이 진리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2. 구원 얻는 자들
“십자가의 도가...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여러분! 능력 받기를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은혜받고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맡은 임무에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것이라면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멀리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어야 할 영생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빛을 남긴 자들이 어떠한 믿음의 사람들이며, 또 영원한 영광에 이른 자들이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모세가 출애굽의 거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무엇으로 그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까?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한 일 중에 값진 일이 있다면 양지 해성 교회를 개척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목요일 임재용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날 교회 부지 오백사십 여 평이 되는 땅을 계약하고 이제 그 땅에 평면 백이십 평으로 2층 교회를 건축하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건축헌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천만 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한 일은 삼 년 주기로 오늘까지 갑절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 교회는 안수집사와 장로도 없을 뿐 아니라 교인은 칠십여 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특별 새벽기도에 들어가 매일 4-50명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우리 교회도 새벽을 깨우는 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발발한 삼십 년 전쟁으로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이 년 후 어머니도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십사 년 만에 졸업하고 목회 사역을 하는데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자 아내와 자녀들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비극을 몰고 다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폴 게어하트입니다. 그는 찬송가 18장 ‘내 영혼아 곧 깨어’를 작사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주님께서는 오늘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지혜와 총명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9~20절).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지혜와 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만일 인간보다 뛰어난 총명을 다른 피조물에게 주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노예의 운명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인간이지만 어떤 사람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원시의 생활을 면치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를 얼마나 개발했는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삶이 윤택하고 환경이 좋아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게 되면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너진 바벨탑은 인간이 하나님께 도전하겠다는 도전장입니다. 오늘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남태평양 피지에 사는 원주민들은 기독교가 들어가기 전에는 식인종이었으나 지금은 98%가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
표적은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보고 또 친히 기록한 계명을 받았어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표적이 없어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마가 확신을 얻기 위해 증거를 구했던 것과는 달리 복음을 불신했기에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5.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
이것은 헬라인의 교만입니다. 본래 헬라에는 철인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많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철학이 인류사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의식하고 복음을 전했을 때는 기대했던 복음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오직 십자가의 도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의 복음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의 초창기에 있었던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단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쳤지만 일본 경찰들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전도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기 쉽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화려한 교회 건물과 다양한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능력이 살아서 역사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극도로 부패했을 때 교황은 “이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라는 염려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이 경건의 능력을 알았다면 겸손히 무릎 꿇고 성령의 도우심과 기름 부으심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2~25절). 아 멘
하나님의 부르심
고전 1:26-31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예정 섭리를 따라 선택받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의 택한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세상 사람은 선택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지요? 그 사람의 자질과 능력을 봅니다. 그리고 필요를 따라 선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거사를 이루셨습니다. 그것도 혈기 왕성한 젊을 때가 아닌 팔십 노구의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건강할 때 쓰지 않으시고 병들었을 때, 부유할 때가 아닌 가난할 때 부르시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똑똑한 자를 쓰지 않으시고 부족한 자를 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고 건강한 자, 부한 자, 똑똑한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죄인 된 근본과 무익함을 알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마음 아프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를 배역하는 일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한 말씀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2-14, 17-18).
과연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이는 고린도교회가 육체를 따라서 지혜 있고 능력 있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1. 지혜 있는 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지혜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힘을 과시하는 자를 곰같이 미련하다고 합니다. 곰이 얼마나 미련한가 보십시오. 사람이 곰을 잡기 위해서는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돌을 달아둔다고 합니다. 마침 곰이 그 길을 지나다가 돌이 머리에 부딪히면 그때부터 ‘나보다 더 힘센 놈은 없는데...’ 생각하고 계속 그 돌과 박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곰의 머리가 박살나서 쓰러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짐승이 미련할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짐승같이 어리석은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시대에 살았던 나발을 기억합니다. 하루는 그가 양털을 깎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먹을 것 얼마를 달라고 하니,
“이새의 아들은 누구며 다윗은 누구기에 내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겠느냐”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임금 상같이 차려 호의호식 하면서 사람을 알아볼 줄 몰랐습니다. 결국 그는 다윗의 소식을 접하자 석고 인생이 되어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삼상25:38). 이것이 미련한 인생의 말로입니다.
2. 능한 자
이는 높은 관직 곧 세상의 권세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권세는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권력을 잡고 싶어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선거철이 돌아오니 서로들 대통령 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모두가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될 뿐만 아니라 또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그의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국회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니 조국을 위해 봉사해 주십시오.” 하였을 때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고 사양하였고, 수상 자리를 물러난 벤구리온은 “이제 수상직을 사임하고 무엇을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땅콩 밭으로 갑니다. 수상을 할 사람은 많으나 땅콩 농사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땅콩 농장으로 행했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명예욕에만 들떠서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도 자인하는 정치인들의 거짓말들을 보십시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정치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말을 믿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놀란다” 고 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루시초프는 “정치인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공약을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그처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국민에게 숨겨야 하니까 자연히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이 다 다보이는데도 “나 그 사람 모르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일세.” 하다가 증거가 드러나면 “기억력이 어두어서 그랬다” “대가성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과연 언제부터 그렇게 후해져서 아무런 조건 없이 수천 수억을 주고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와 같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존중받는 지도자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힘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3. 문벌 좋은 자
세상 사람들은 가문 좋고, 학벌이 좋고 또 좋은 직장이 있으면 최고의 배우자로 생각합니다. 진정한 행복, 참된 만족이 거기 있을까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받아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권세 있는 자도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무익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들어 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4. 유일한 자랑
바울도 자랑한 때가 있었습니다.
1) 은혜받은 일에 대해 자랑하였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1-2).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이 놀라운 은혜를 십사 년 동안 감추어두었다가 이제야 간증하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노라’고 간증하고 싶은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간증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여 자기를 과시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2) 약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바울도 자기를 변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그들이 히브리 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 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고후11:16-18; 22-23).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약할 때 더 귀하게 쓰심으로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3) 주님을 자랑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있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후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웠던 사람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30-31) 아 멘
바울의 결심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절).
복음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또 누구를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말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귀한 달란트라 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
저와 가까이 사는 다른 교회 집사님이 있어서 한 번은 “새벽기도도 안 하는 서투른 집사라”고 했더니 깔깔대고 웃으면서 “예 목사님, 저는 나이롱 집사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방금 저보고 무슨 집사라고 했는지 그 말이 다시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여 웃음 지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 말과 지혜
복음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언어는 의사전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일반언어와 달리 복음은 듣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읽는 자가 복이요, 듣는 자들이 복이요, 지키는 자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삯꾼과 이리를 주의해야 합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헤치느니라”(요10:12).
2. 바울의 결심
바울은 일찍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란 엘리트였는데 그가 복음을 박해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진 후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플라톤이 없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할 수 없다면 바울이 없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본문에 있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바울이 이 차전도 여행 때 아덴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상대로 복음을 지혜와 지식에 의지하여 전했을 때는 구원의 결실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바울이 눈물 흘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눈물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줄 압니다.
1)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요.
2)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요.
3) 양을 이리중에 떼어 놓고 떠나야 되는 목자의 심정에서 일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신속한 응답이 있습니다. 계5:4에 보면 요한이 일곱 인으로 굳게 인봉된 책을 발견하고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서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를 찾지 못해 “크게 울었는데”.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5:5).
그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이 땅에 내려질 마지막 심판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굳게 인봉된 비밀도 열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섭리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면,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할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세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시체가 개들에게 먹힐 줄 알았다면 나봇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길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까? 눈물로 기도합시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바울의 결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받아 온 천하에 하나님의 영광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바울의 두려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
여기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1) 교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를 통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이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7-18).
내가 살아 온 길을 돌아보십시오.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그 은혜 감사하며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경건의 두려움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 장로, 집사 장립식과 권사 취임식을 가지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직분이 달라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링컨은 항상 “내가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죽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당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불순종한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경책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3) 사명자로서의 두려움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무슨 일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성도들이 실족하는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절).
만일 바울이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진리를 대적하고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무익한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이 있었다면 성도들이 믿음 위에 서서 열매 맺는 것이요, 가장 큰 자랑이 있었다면 주 안에서 있는 성도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우리도 바울같이 오직 내게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도록, 또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기로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지혜
고전 2:6-13
미국 컬럼비아대 총장이었던 니콜러스 머레이씨가 말한 세 부류의 사람입니다.
1) 자신과 세상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
이러한 사람은 숫자적으로는 적지만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존 웨슬리는 믿음의 사람 백 명을 구했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을 이끌어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 칠백 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2) 일을 그르치는 부류의 사람
토인비 교수도 몇 사람의 정신병자 때문에 온 인류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독재자, 사기꾼, 아첨하는 자, 이기주의자들이 그 부류라 하겠습니다.
3) 잘못된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사람
이러한 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여기서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진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해 언급하면서 복음은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말하기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잠8:11) 하였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았던 부와 귀와 영화는 덤으로 주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지혜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는 인간의 지혜요, 둘째는 마귀의 지혜요, 셋째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 인간의 지혜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혜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이 지혜로 만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TV 프로에서 ‘동물의 왕국’에 흥미를 느끼는 편입니다. 동물들은 거짓과 꾸밈이 없이 본능과 야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지만 진화론을 말하는 해설자의 말에는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어느 원숭이를 조상으로 섬기고 싶어서인지 알 수가 없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큰 복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이라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절).
얼마 전 군산 서광교회에 집회를 갔을 때 일입니다. 그 교회에 기도를 많이 한다고 알려진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 아들이 국내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집회할 때 고향에 내려와서 마지막 날 어머니와 함께 융숭하게 강사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그날 저녁 집회에 참석하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끝내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가수들은 자신을 초청해준 모임으로부터 받는 개런티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서 웬만해서는 초청에 쉽게 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마귀의 지혜
마귀는 영물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인간을 시험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또 마귀는 인간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배신자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
뿐만 아니라 수제자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유다나 베드로가 마귀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귀는 저주받은 악령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귀의 올무에 빠지면 마귀의 지체로 전락됩니다.
아프리카에는 사람을 해치는 악어를 비롯하여 육식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이 먹이를 사냥할 때 보면 잡아먹히는 동물은 죽을 때까지 먹이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다가 결국 잡히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잡히기까지는 살아나려고 하지만 맹수의 먹이가 되면 맹수의 지체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4:7-8).
3.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장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끊임없는 변론으로 자기를 변명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었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욥38:2-6).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한 욥의 고백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벤허를 출간한 저자 루이스 월리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가 되었고 미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으로서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임을 밝히기 위해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부터 메시아를 초능력적인 인물이라 하는 허구를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증명하려고 집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은 그의 친구가 들려준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 라고 하는 비판적인 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배경을 알기 위해 성경을 탐독하던 중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닫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소설의 주인공에게 나타내어 천팔백팔십 년에 벤허를 출간했는데, 그것이 천구백오십구 년 영화로 나와서 수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나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의 열매도 은혜로 맺어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6-7).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모든 지혜와 지식에까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0, 13절).
나는 비록 우매하고 무지하여 멸망하는 짐승 같다 할지라도 위로부터 임하는 지혜의 은혜를 힘입으면 뭇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힘입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신령한 잣대
고전 2:13-16
신령한 잣대 즉 믿음의 잣대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진리적인 측면에서 측정하는 잣대라 하겠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거리의 잣대는 미터요, 무게는 그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바르게 살 수 있는 영적인 잣대가 있어야 합니다.
1. 신령한 잣대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이 세상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청춘의 아름다움도 지나갑니다. 미국 헐리우드 배우들의 생활을 보면 그들만큼 인생을 즐기는데 익숙한 사람도 없을 줄 압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파티에 불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림으로는 천국 생활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런 환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그림자이므로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31:30).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벧전1:24).
지금 젊은 세대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이 스마트폰이 아닌가 생각듭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보니 관광버스 기사가 무선전화로 교신하는 것을 보고 과연 미국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 스마트폰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노동집약적 형태로 살아온 기성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꿈의 세계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문명이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해마다 늘어나 지금 OECD 하루 평균 자살율 11명에 비해 우리나라는 48명이나 되어 세계 일위가 되었습니다.
지난달도 대림동에 있는 아파트 28층 옥상에서 30대 남자 한 명과 10대 여학생 두 명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자들이라 합니다. 또 그들을 대구와 천안, 평택에 가서 자신의 승용차로 서울에까지 태워준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그렇게 허무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스스로 목숨을 스스로 버리도록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목숨이라도 진리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고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2.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챨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이 중생과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짐승이 천문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14절).
어떤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일까요? 물론 믿는 자는 영에 속한 자요, 불신자는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을 알고 있습니다. 에서는 형으로 태어났지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고 또 천상의 복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 권과 천상의 복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에서가 아버지의 섬기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그가 범한 잘못이 있다면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창25:32-33).
이것은 에서가 본능적인 욕구 곧 식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십일을 금식하신 주님은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었던 하와의 눈에 선악과가 어떻게 보였는지 보십시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 선악과를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4:7-8).
신령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자라면 한쪽은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한 바울의 생애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먹지도 입지도 않고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계실 동안은 물질을 초월하고 영의 양식만으로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주님께서는 육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은 보이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영의 소원을 따르는 자로서 영적인 눈 곧 소망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눈을 가졌으므로 육신의 것 또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심고 영원한 것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헌금 통계가 올라온 것을 보았더니 고등부 학생들이 건축헌금을 했는데 거기는 미국에 있는 이순복 전도사님의 딸 혜민이가 보낸 백 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손길을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 기도했습니다. 동일한 물질이지만 어떤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나 어떤 물질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복인지를 깨달았다면 우리도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지도자의 권위
어떤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어떠한 공동체든지 그 조직을 이끄는 데는 지도자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물론 탁월한 지도력이 중요하지만 지도자는 또 정직하고 깨끗하여 조직원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누구도 그에게 도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고 또 그 여인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다스리지 못해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진로하심으로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이 대적이 되었고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불행스러운 것은 우리나라도 정권 말기만 되면 재임기간 중에 저지른 부정으로 지도자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어 영적인 권위가 실추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초대교회는 경건의 능력이 사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2:4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행4:33-34).
베드로의 발 앞에 백부장 고넬료가 땅에 엎드려 절하게 된 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경건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마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바울이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를 통해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목자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15:29).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1).
복 받을 자에게 복이 임하고 징계 받을 자에게는 채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장성한 믿음
고전 3:1-9
혹자는 세 가지의 인생을 말을 합니다.
1) 거미와 같이 남의 약점을 악용하여 사는 사람
2) 개미와 같이 부지런하게 살지만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
3) 꿀벌과 같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교훈 삼고자 하는 것은 꿀벌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세 가지 인생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1 불신자
햇빛과 우로와 같은 일반적인 은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골고루 혜택을 입히므로 신앙과 불신앙 관계없이 생육과 번영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만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영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6-8).
거듭나지 못하면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혈육에 속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이유는 자력으로는 새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은 자만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2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
이는 분명히 불신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곡식은 자라야 열매를 맺고 믿음은 성숙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고린도 교회는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살펴보면,
1) 눈물이 많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입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시장에 간다고 하시기에 떨어지기 싫어 울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눈물이 많습니다. 이는 자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눈물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또 그때가 귀중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순수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2) 분별력이 부족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장성한 자의 양식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2절).
우리가 마땅히 성장해야 할 것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엡4:14) 입니다.
3) 지식이 부족합니다.
사람은 어린 시절을 거쳐서 장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학자요 박사라 할지라도 유치원 교사를 통해 지극히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어린 시절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대통령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니 학창 시절에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남긴 인물들 중에도 어릴 때는 평범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네 살까지 말을 못했고 일곱 살까지 글을 읽지 못했으며, 베토벤은 음악교사에게 작곡가가 될 가망성이 없다는 평을 받았고, 월트 디즈니는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또한 문호 톨스토이는 낙제생이었고, 아브라함 링컨은 블랙호크 전쟁에 사령관으로 있다가 졸병으로 퇴역하였으며, 윈스턴 처칠은 중학교 낙제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성장하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이고 싶다”는 저자 조현영 군은 중학교 삼학년 때 미국으로 가서 고등학교 영어 시험에 0점을 받고 저능아 열등생 아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여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전액 장학금으로 세계적인 명문대학 스탠포드를 졸업하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하였습니다.
믿음이 어린 고린도 교인들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3-4).
또 신앙은 연수로 성장하거나 직분만 있으면 저절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1) 기도 생활에 열심 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2) 봉사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0-11).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성령의 풍성한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성숙한 신앙의 사람
1)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는 재능대로 달란트의 분량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자의 임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5절).
동일한 전도자로 주의 일을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의 임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입장에서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이 목회에 무관했거나 아볼로가 씨 뿌리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회 분쟁은 믿음의 지도자를 통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자만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병충해로 실패할 수도 있고 천재지변으로도 실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7절).
이는 전도자의 수고가 무익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내 수고를 자랑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낮에는 달과 별을 볼 수 없지요. 그렇다고 그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밤이 되면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좌 앞에 둘러선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주 앞에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9-11).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께 돌리는 영광은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든지 거기 따라 상급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2-13).
우리 모두 충성된 대열에서 주 앞에 서는 날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공적대로 받는 영광
고전 3:10-15
우리는 모두 신령한 건축자로서 각자의 영적인 집을 짓고 있습니다. 왕조시대를 보면 왕들은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 유택을 짓고 또 관리인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심판 날 무슨 영광이 될까요? 애굽의 피라밋을 비롯하여 중국의 진시 왕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썩어질 것을 위해 지을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진리의 기초위에 세워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10절).
‘터를 닦아두매’ 이 터는 은혜와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11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찍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받은 교육은 그를 진리의 원수가 되어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교육이 중요하고 또 인간은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농부가 과목을 심어놓고 거름을 주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씨를 뿌리고 김을 매지 않아도 잡초밭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은 오월 오일 어린이 주일입니다. 또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른들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으로 살지만, 청소년들은 꿈과 이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이상과 꿈이 중요한 것은 그 꿈에 따라 장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팔백구 년 이월 십이일 미국 켄터키의 산골에서 아브라함 링컨이 태어나는 순간 미국은 흑인이 해방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은혜를 받던 순간 영국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진리 위에 바로 선 믿음의 사람, 꿈을 가진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과 마지막 날 재림의 약속입니다. 이 진리 위에 세워야 그 집이 견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
2. 좋은 재료를 써야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불에 탈 가연성 재료요, 하나는 불타지 않는 불가연성 재료입니다.
우리나라도 건축술이 발달 되기 전에는 기초가 약해서 높은 집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반반한 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단층집을 세웠을 뿐입니다. 지금 롯데에서 부산에 짓고 있는 빌딩이 104 층입니다. 그런 집을 나무나 풀로는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 보석과 나무나 풀, 짚은 가치적인 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삼십사 년 전에 제가 교회를 개척 할 때는 삼 일 만에 교회 지붕을 올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중랑천 둑에는 자고 나면 무허가 집들이 늘어나는 실정이었습니다. 또 같은 집일지라도 어떤 자재를 쓰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재개발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부실공사가 없을 뿐 아니라 불량재료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죽음에 직면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재물을 이렇게 많이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그렇다면 가장 작은 불량으로 만들어 오라”는 허락을 받아 금을 안고 천국 문을 노크했더니 문을 열어주면서 하시는 말씀, “이런 것은 여기서 길바닥에 까는 건데 왜 힘들게 가져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십시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19-21).
성령이 내 마음을 성전 삼고 거하심을 알았다면 여기에 부실 재료가 들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 새벽 예배 시간에 어느 분이 감사예물을 드렸는데 봉투에 ‘하나님, 내 마음 아시지요’ 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 연조가 귀하다 할지라도 감사를 잃으면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긴 믿음과 동일한 영광에 이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나무나 풀, 지푸라기 정성이 아닌 금과 은, 보석의 정성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곧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영적인 열매입니다.
3. 불로 시험하는 공적
새로운 약품을 개발하면 먼저 세계보건기구의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상품 역시 일정한 표준 규격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엄격한 심사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13절)
마지막 심판의 불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재물이라면 당연히 물질을 쌓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과 함께 물질도 사라질 것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벧후3:10-11).
어제 상을 당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분은 사십 대의 젊은 나이인데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셔야 할 병든 시어머니가 살아 있고 아내의 내조가 필요한 남편이 있고,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자식들이 있는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분은 비록 오래지 않은 세상을 살다가 갔을지라도 수고와 슬픔을 맛보고 떠났습니다. 감사한 일은 유족들에게 신앙생활 잘하도록 당부하고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저버리면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
과연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취사선택의 자유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포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부끄러운 구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15절).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이는 물론 심판 때 받는 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불같은 시험이 닥칠 때 과연 내 믿음이 어떠한가를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의 시험에서도 그 믿음이 사라지지 아니하였고, 다니엘은 사자굴의 시험에서도 그 믿음이 요동하지 않았으며, 스데반은 돌무덤 세례를 받을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을 발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시험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공적이 불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날에 공적이 불타버릴 자들도 면류관 받을 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이 사라진 자들에게는 ‘해를 받으리니’ 하였는데 이 말씀은 “그가 벌과금을 물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심판 날에 불타버릴 것이라면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진리의 업적만을 남기는 믿음의 부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보석 같은 믿음
고전 3:10-15
지난 성탄절, 저는 예년과 다름없이 평소에 저를 아는 여러분들을 통해 성탄 카드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함께 교회를 섬기던 교역자들도 있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평안하신지요?
제 목회에 첫 스승이신 두 분을 잊지 못합니다.
건강은 어떠신지 염려가 되네요.
부디 건강하셔서 꼭 과업을 이루도록 기도합니다.
000 전도사
유 목사님, 사모님!
즐거운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옆에서 가까이 계실 때에도 훌륭하고 존경이 갔는데 떠나고 이제 생각하니 정말 대단하신 목사님과 사모님이란 생각이 들고 한없이 크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그때 더 열심히 섬기지 못한 것이 늘 후회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부모님처럼 생각하며 늘 사랑하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하면서... 000 목사 부부
제가 사십 대 때에는 누가 존경한다는 말을하면 내 나이 육십이 지나면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칭찬이 저에게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또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 반석 같은 믿음
집을 지을 때 중요한 것이 기초공사입니다. 여러 해 전에 무너져 내린 서대문 와우 아파트 사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건물이 오래갈 수 없듯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토요일마다 나가서 전도하는 전도특공대의 보고를 받을 때 종종 ‘오늘은 어느 장로님 집을 찾아서 전도했는데 장로님이라는 직임이 참으로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교회도 안 나갈 뿐 아니라 술에 중독이 되었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무슨 연유로 교회를 등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신앙토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는 이 든든한 반석을 외면하고 모래 위에 집을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원불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우리 모두 반석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보석 같은 믿음
몇 해 전 미국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 홍현숙 집사님의 막내 사위가 목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또 출근하는 회사도 있었는데 저를 위해 삼 일간 휴가를 내어 이곳저곳 다니면서 좋은 구경을 많이 시켜주었습니다. 하루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밑에서 색다른 음식도 먹고 여러 가지 놀이기구도 구경도 하면서 부둣가에 이르렀는데 거기 진주조개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 조개 안에 진주가 있으니 하나 골라 보십시오.” 하기에 하나 골랐더니 그 안에 콩알만 한 흑진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주로 반지를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려 했는데 어느 날 그 진주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보석은 귀중합니다. 값진 보물은 많아서 근심될 이유가 없습니다. 쓰레기 오물이 많으면 집이 추해지는데 보물이 많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물 같은 사람인지 오물 같은 사람인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누가 평가할까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은 보물같이 존귀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은 오물 같은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재물이나 권세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 아니라 의가 없는 자라도 상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이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영원하고 참된 보화가 무엇일까요? 그 보화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를 깨닫는 자가 복이요, 이 보배를 소유한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또 참된 보배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어떤 사람이 보배입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아니라 나사로요,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린 여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행한 대로 받는 상급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12-13).
우리는 지난 십이월 이십육일 이란에서 일어난 진도 6.3의 대지진의 참상을 화면으로 보았습니다. 인구 약 십만 명의 도시가 순식간에 무너져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의 숫자만 해도 오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옥이 따로 없고 종말적인 심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진흙 성채 ‘아르게 밤’(밤의 성채)이라는 문화유산도 무너져 흙먼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쌓은 바벨탑입니다.
오늘 나의 믿음과 정성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불의 시험대를 통과하고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진실한 보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에 이를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2-23).
희망찬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보석 같은 믿음으로 생명책에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남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성전
고전 3:16-23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제가 자부를 보고 나니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 얼마나 좋으세요” 하는데 사실 저는 세상에 대해서는 뭐가 좋고 안 좋은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난 어버이 날 아침에 자부가 저의 집사람과 저에게 각각 봉투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얘야, 이게 뭐냐?” 했더니 “하나는 아버님 용돈이고요 하나는 편지입니다.” 하는데 “얘들이 돈도 없을 텐데 무슨 봉투를...” 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자식이 넉넉하게 잘 살아가면서도 부모 섬길 줄 모른다면 섭섭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언젠가 권사님들과 함께 장금환집사님의 사업장을 심방했는데 예배를 드린 후 그 집사님이 좋은 음식점으로 가서 대접하는 것을 보고 “우리 자식들은 이런 것을 몰라” 하시는데 마음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시므로 어려운 중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복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집사람은 힘든 줄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늘까지 목회의 길을 걸어오도록 붙들어 주신 은혜의 두 손길이 있는데 하나는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요, 또 하나는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사역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또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받는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1.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
“인간에게는 몇 평의 땅이 필요할까?” 이는 톨스토이 원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돈 많은 부자가 광고를 냈는데, “누구든지 내 땅을 돌아오는 자는 그 땅을 거저 주겠다. 조건이 있다면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왔고 그중 한 사람은 기회를 놓칠세라 자기도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그 땅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없이 펼쳐지는 벌판을 보며 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고 싶은 생각에 넓은 지역을 돌고 돌다가 어느덧 서산에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보고 그때야 서둘러 돌아왔지만 결국 목표지점 얼마를 앞두고 죽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땅을 파고 그 시체를 묻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세평 땅이면 족한데 그처럼 욕심을 부리다니.”
매년 우리나라에 공원묘지로 잠식되는 땅이 여의도 보다 넓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제는 법을 개정하여 개인묘지나 공원묘지 할 것 없이 매장하고 삼십 년이 지나면 화장을 하고 다시 오백만 원을 더 내면 십오 년을 연장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육십 세 이하는 호흡이 멈추고 15시간 시신의 각 기관과 장부를 적출 하면 오십 명에서 육십 명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육십 세가 지나도 의학도의 실습 재료가 되고 마지막에는 화장을 해 준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 장례식 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남기는 좋은 일로 생각이 됩니다.
인생 노정이 고달픈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본향을 따로 두고 있는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이르기 전에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 이르기 전에는 죄악이 관영한 땅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들의 기업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기업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히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육신의 소욕에 치우치지 말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앞에 섰을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시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네 말과 같이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6-37) 하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요 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영원한 천국 우리의 본향입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 청년들이 바자회를 열어 국내외로 복음 전할 사명을 가지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흐뭇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목사님, 00권찰이 죽었답니다.”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울고 웃다가 또 눈물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인생이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두 집이나 초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본토 친척 아비 집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았던 바울은 그 이름이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2. 주의 집을 사랑하는 자의 복
여자가 임신하면 몸가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옛 어른들은 임신부는, 앉을 때는 바로 앉아야 하고, 음식과 보는 눈, 듣는 귀, 심지어 마음가짐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태교인데 이것은 중요한 교육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은 성령께서 성전 삼고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마땅히 행실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7절).
침팬지의 DNA는 97% 인간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원숭이가 사람이 되어 산에서 내려왔다는 기록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보십시오. 오히려 99%가 동일하다 할지라도 나머지 1%로 인해 그 속에는 짐승이 사람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짐승과 같이 육체뿐이라면 진화론자들의 이론이 합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만 아니라 영적인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뿐이라면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흙을 원소로 창조되었으므로 죽을 때에도 동일하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존귀함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있기 때문이요 또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으로 제물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창숙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전신에 퍼진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임신도 못하고 병세는 더해져서 피아노 건반도 치지 못하고, 가사일도 못하는 고통을 당했는데, 하루는 꿈에 목사에게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건강은 회복되고 임신을 한 몸으로 출산하는 그 날까지 토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하다가 첫 아이를 낳고, 또 둘째 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렐루야!
3. 참된 지혜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지혜로 맹수나 코끼리를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영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18-20).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경배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주님의 은총을 힘입은 성도들은 경건 생활에 더욱 힘쓰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주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구할 것은 충성
고전 4:1-5
성경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석같이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의 눈을 가진 자라야 보화를 알게 되고, 또 그 보화의 가치를 아는 자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
천국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밭에 감추인 이 보화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나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보화를 소유하여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보화가 무엇일까요?
1) 대속의 진리가 보화입니다.
빌라도는 주님께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셨을 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7-38) 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배를 채운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을 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하셨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천주교에 다니는 동생에게 “천주교는 이단이야”라고 했더니 “내가 천주교에 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며 야속하게 생각하더라고 했습니다.
불교계 큰 스님으로 칭함을 받는 진제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참 부처님은 오신 바도 없고 가신 바도 없습니다. 자기의 참모습을 알면 부처요, 모르면 범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모른 채 허상을 찾아다니는 겁니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길이 수행에 있다는 불교의 철학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거듭나는 진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수행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사유함을 받아야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보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계1:3)고 하였습니다. 진리와 무관한 것이면 미혹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 외에는 어떤 것도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콤 머거리지(Malcom Muggeridge)는 말하기를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면 네 번째 유혹은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프라임 타임(Prime Time)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만일 거기 참된 만족이 있었다면 연예인들이 마약이나 환각제에 빠저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1. 전도자의 신분
1)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우리가 만일 죄에 매여 종살이한다면 우리는 마귀의 노예로 전락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나 바울”이라는 용어는 바울 서신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전도자는 진리의 멍에 아래 있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게 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8-10).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절). 이 비밀은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주님께서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한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려주시고 장래에 될 일을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갔다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다니엘은 느브갓네살왕이 꾼 꿈을 해몽하였으며,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을 책망하였습니다.
2. 충성을 따라 간구하는 기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그런데 구하고 찾아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요 또 회개가 없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 사울과 다윗을 통해 얻을 교훈이 많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자기의 체면을 중시하여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의 책망이 있을 때 즉시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울은 버림을 받았으나 다윗은 은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사59:11-12). 충성된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절).
충성된 믿음으로 올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즐겨 응답해 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맡은 본분과 사명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LA에 있는 은혜 한인교회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 장로님 한 분이 사천만 $을 헌금하여 삼십육 에이커 되는 로케트 건전지 본사 사옥을 삼천오백만 $에 인수하고 거기에 천오백 만$을 들여 수리를 했는데, 미국에 있는 교민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에서 가장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또 헬리콥터를 구입하여 심방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늘 보고를 여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바울의 겸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충성이라면 또 기뻐하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3절).
여기서 바울의 경건 생활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4-5).
우리 모두 영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보화를 찾았다면 충성된 믿음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주님을 따르는 길
고전 4:6-13
바울은 복음으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는 길이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그가 받은 고난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육 세기경에 영국 선교사 콜롬바가 열두 명의 동료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그곳에는 Picts라고 하는 난폭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그 섬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콜롬바는 배에서 내린 다음 무거운 돌을 그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일행은 묻기를 “Picts가 공격해 오면 도망해야 하는데 배에다 돌을 싣다니요?” 하였을 때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의지할 것은 배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하며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1. 지도자의 자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6절).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본이 되도록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많고 허물 있는 자일지라도 진리의 증인으로 들어 쓰십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어떤 본을 보였는지 보십시오.
1) 진리의 교훈으로 본을 보였습니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6절).
그런데 교만한 자들은 스스로를 높이고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왜곡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4:19-20) 하였습니다.
2) 겸손과 화목의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겸손하였다면 아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높아지기를 위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도 높은 자리를 탐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교훈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바울과 아볼로는 높아지기 위해서 다투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서로 시기하고 비방한 일도 없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이렇게 바울과 아볼로는 겸손하였고 화목의 덕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사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두 가지 자랑
사람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이것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긍지와 자부심을 살리는 원동력입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어버리면 인간답게 살아야 할 가치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천구백구십이 년 일본 고베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선진국 시민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생명과 재산을 잃고도 무질서나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도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1) 인간의 자랑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7절).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들어 쌓을 것이 없도록 되니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18-20).
어리석은 부자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1) 하나님이 그의 의식 속에 없었다는 것이요,
2) 내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3) 영혼을 위한 대비가 없었고,
4) 이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돼지나 곰 같은 짐승을 보고 미련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은 이성 없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진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50:22).
다른 사람에 비해 내게 있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로 자랑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진정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복음의 능력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 열매 맺기를 사모하십시오. 영원한 재산은 오직 하늘나라에 쌓인 업적임을 안다면 주의 일에 더욱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덟 살에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핍박이 심했던지 어린 마음에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서도 목사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귀에 음악 같도다 예수 복된 예수
아 귀하다 그의 이름 갈보리산 어린 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 복된 예수”
3. 스스로 왕 노릇 하는 자들
누구를 막론하고 자만심이 문제입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8절).
그런 자는 제멋에 살아가는 자들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을 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난주일 제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혼자 간직하기에는 아까워 소개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실은 지난 어버이 주일에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정들이 생겨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스승이시기보다는 어버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닮고서도 짐승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던 저와 저의 가정을 오늘까지 해산하는 수고로 낳으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꼴을 먹으며 점차로 사람의 모습을 회복하기까지 목사님의 끊임없는 권면과 눈물의 기도로 인함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부모들이 계시지만 제게는 저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이 가장 훌륭하신 것처럼 영혼에 있어서 저와 저의 가정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목사님과 사모님이 저희에게 가장 훌륭한 부모님이십니다.
저희의 부족함과 허물을 목사님께서 대신 회개하시며 그들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서 중보하신 많은 날들로 인해 완고하고 패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힘입어 감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지고 계신 짐을 함께 지지 못하고 또 저에게는 향유 담은 옥합도 없지만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밤마다 문 열어 놓고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심정으로 오늘까지 수고하신 그 눈물의 씨앗에 대해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줄 믿습니다. 얼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누렇게 익은 곡식밭에 앉아 계셨는데 그 벼의 낱알이 콩알 같이 굵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라지는 하나도 없는 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곡식을 따서 목사님께 드리니 그것을 받아 기쁘게 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요즈음 교회의 일들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키우신 저희들이 목사님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영육 간에 더욱 강건하게 하시어서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팔십 세에 부름을 받아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도록 임무를 받은 모세와 같이 동일한 은혜와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저희 모두는 목사님과 사모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은혜 입은 양 드림
사모하는 심령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날 줄 믿습니다.
4. 주님을 따르는 길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절).
여러분! 흉악범과 강도를 위한 고급 호텔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런 자를 위해서는 담벼락을 높게 쌓은 형무소가 있을 뿐입니다. 전도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11-13).
이것은 어느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걸어간 길이 아닌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주님을 따른 전도자 바울이 걸어간 길이요, 앞서간 전도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깨달을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이 진리를 깨닫고 십자가의 길, 바로 걸어 기약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바울의 고난
고전 4:9-13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온다면 구원받기를 위해서 또는 복 받기를 위해서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는 일반사람들이 자랑하는 부귀와 영화,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네번이나 결혼을 하고 또 많은 재산은 가졌으나 번민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알콜 중독에 자살로 생을 마쳤는가 하면 문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모파상도 사십이 세에 자살을 시도하고 사십삼 세에 정신이상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없는 자들의 종말입니다.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받을 고난의 십자가를 거두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므로 영원한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우리가 고난이 주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면 어떠한 믿음의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마땅할지를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1. 고난의 원인
천국에는 불행의 씨앗인 눈물과 이별,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많은 남녀가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팔백사십 쌍이 결혼하는데 그 중 삼백구십팔 쌍이 이혼하고 돌아선다고 합니다. 금고에 구멍을 뚫다가 붙잡힌 자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질문에 “장사 밑천 마련하여 잘 살아보려고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자는 “외국으로 나가서 멋지게 살고 싶어서”라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지요.
평화를 열망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도 자살 테러 공격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 설립된 UN이 건재하지만, 여전히 지구상에 일어나는 전쟁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 이러한 불행이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축출될 때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죄의 보응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을 기대할 수 없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고난의 성격
1) 죄의 보응으로 받는 고난
죄의 보응으로 받는 고난은 한 마디로 불행이요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이 내게 미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 사울의 집 족속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며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그런데 그 전쟁에 반역자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승리하여 다시 요단을 건너려 했을 때 또 시므이가 다윗 앞에 나타났습니다. 엎드려 고하기를,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삼하19:19-20).
그때 다윗이 스루야의 말을 따랐다면 시므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지만 다윗은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삼하19:23) 하고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질은 죄는 사유의 은혜를 힘입기 전에는 올무가 되어 생명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등장하자 부왕 다윗의 유언을 따라 시므이를 불러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왕상2:36)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종들이 가드로 도망간 일로 인해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복 받을 사람은 복 받을 일을 하고 저주 받을 자는 저주 받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영광된 대열에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모두가 복 받을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애매한 고난
사람이 사는 동안 욥과 같이 까닭 없이 닥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2:19-20) 하였습니다.
뉴욕에 있는 튜윈 빌딩을 충돌한 비행기 테러 사건을 보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저런 바보 같은 조종사가 있느냐”고 화를 냈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조차 예고 없이 닥친 테러사건을 방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엄마 나 죽을 것 같아. 나 두려워”
“여보, 아이들 잘 부탁해! 사랑해” 라는 마지막 말들을 남기고 순식간에 그들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생명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지요. 그러나 각기 믿음 여하에 따라 사후의 세계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일어난 일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것을 자신에게 팔기를 요구하자 나봇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산은 지키기로 서약하였으므로 아합 왕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마음에 근심하여 식사도 거르는 것을 보고 왕후 이세벨은 비류 두 사람을 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며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일이 있었습니다(왕상21:7-16).
나봇 처럼 우리도 때로는 애매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주님께서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4; 17).
해비타트(Habitat) 운동의 창시자 밀라드 훌러(Millard Full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으나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고, 또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 린다(Linda)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라는 쪽지를 남긴 채 가출해 버리자 여기서 충격을 받아 모든 재산을 복지 재단에 기증하고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가서 삼 년 동안 봉사하고 돌아와서 이 운동을 시작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지금까지 주택 십만 채를 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여기에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무더운 여름에 못질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것도 귀중한 일이요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이 일도 그처럼 보람을 느낀다”고 하여 모두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팔십 세 된 노인이 재산이 많으므로 오래 살고 싶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네 재산 전부를 바치겠다고 했으면 이천 년을 살게 해 주었을 텐데 절반만 바치겠다고 했으니 나도 절반을 잘라 천년을 더 살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부자는 일천 년을 더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이제 내가 천 년을 살게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따지기를 "왜 천년을 더 살게 해 주신다고 하시고 하루 만에 이렇게 부르셨습니까?” 하였더니 “너는 성경을 알지도 못하느냐 성경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허무에 그치는 것임을 분별했다면 오늘을 후회 없이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선을 위한 고난은 그 자체가 영광임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3. 주님을 위한 고난
주님을 위한 고난은 성도로서 하늘의 상급이 기약된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절) 하였습니다.
사형수들이 인권을 내세우며 자유를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자기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먼저 사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런 잘못 없이 고난을 당했지만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것이 더 큰 영광인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0-13).
바울이 자신은 불행하고 다른 사람은 행복해 보여 이런 말을 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십자가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을 도리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안일하게 살지 못함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신앙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십시오.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쓴 바울의 이름이 하늘에 별과 같이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면류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영광임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그날에 받을 상급을 위해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징계와 사랑
고전 4:14-21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월드컵(Word cup) 경기가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백 년 만에 올 수 있는 기회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경기를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감사한 일은 동족상잔의 피를 흘렸던 이 땅에서 세계인의 축제를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시적인 흥분상태로 스쳐 가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 국민이 영원한 구원의 기쁨으로 승화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 참된 영광
이 영광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영광과는 달리 진리 안에서 누리는 영광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10-11).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며 누구를 더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을 등지면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만족이 없고 주님과 함께하면 세상 것을 다 잃어도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고 떠났던 야곱은 천상의 복과 장자의 권을 가졌으므로 돌아올 때는 두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사도 없이 왕 노릇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이 어떤 것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기회를 잃지 말고 더욱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2. 스승과 아비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이것이 전도자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스승과 아비’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군사부 일체”라 하여 임금과 스승, 부모님은 동일하게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구분을 한다면 스승은 교육적인 면에서 존중해야 하고, 부모는 존재적 면에서 그러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이므로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역하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또한 큰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목회 한지 어느덧 2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주례하여 시집 장가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또 결혼시킬 나이가 되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중에 어리고 철없기 그지없던 강 집사가 새집을 지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삼 남매를 두고 젊은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 집사님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로는 특별한 재주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녀들이 잘 자라서 어머니께 효도하는 것을 보면 역시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잘 섬기고 효도하는 가정에 복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복 받을 믿음의 유산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
3. 믿음의 아들
바울의 생애에 무엇보다 큰 자랑은 디모데를 얻게 된 일인 줄 압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 내 수족과 같이 전적으로 순종하며 믿음을 지킨 아들이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고,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눅10:2)고 하셨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바로 쓸 줄 알았다는데 있습니다.
카네기 묘비에는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볼 줄 알았고 그를 활용할 줄 알았던 세기의 거인 여기 잠들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아끼고 신뢰하였는지 보십시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7절).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의논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 통찰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상담을 원할 때는 해결할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유명한 의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충성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충성된 사람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하였습니다.
디모데의 충성심을 보십시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19-22).
하늘나라 면류관은 충성하는 자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충성된 대열에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서 천국은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영의 세계 곧 진리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성찬과 근본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찬 예식은 우리에게 참된 양식 곧 영생의 양식을 주시지만 세상 잔치는 육체의 양식입니다. 지금도 북한에는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양과잉으로 체중이 늘어나서 아이들이 성인병에 들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체중은 늘었으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우리는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음식을 찾지 말고 일하기 위해 음식을 찾는 사람이 되고, 물질을 선용하여 복음 사역에 이바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2) 경건의 능력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18-20).
주님의 교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여 권세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서울 시장을 하겠다고 출마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분입니다. 요셉과 같은 정치인이 나와서 나라가 복을 받고 우상을 좇는 풍속을 기독교 문화로 변화시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이름뿐인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경건의 능력을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5. 징계와 사랑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21절).
사랑보다 징계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사랑받을 사람이 사랑받을 행동을 안 하면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할지라도 사랑받을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받을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18:25-27).
여러분!
어떠한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은혜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완고하여 회개를 모르는 자들이라면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요 회개하여 사유의 은총을 힘입고, 돌아온 탕자와 같이 내 아버지 집에서 충성하는 자들은 그날에 영광이 넘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 주시는 주님 앞에서 겸손한 믿음으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권징의 필요성
고전 5:1-13
여수에서 이십팔세 된 가정부가 AIDS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일 년 반이 넘도록 사창가를 출입하면서 남자들과 관계하여 감염시켰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놀라운 충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보건 당국이 단속을 하지만 완벽하게 차단하기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AIDS에 걸리면 육신에 그치지 않고 영혼까지 병들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과 번영의 복을 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27-31) 하셨습니다.
이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을 탈선하면 행복은 불행으로, 기쁨은 고통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또 백전백승의 용장이었으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일로, 집안에서 피 흘리는 보응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여자를 좋아했던 다윗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1:3-4).
삼손도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을 받았으나 딤나에서 만난 불레셋 여자 들릴라를 사랑하다가 두 눈을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하는 운명에 처했던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음탕하고 더러운 죄악은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4, 16).
1. 고린도 교회의 음행사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1절).
여기에 ‘취하였다’는 말은 계모와 음행한 일이나 아내로 삼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아내를 아들이 범했다면, 이는 자기를 낳은 어미를 취하거나 아버지와 살았던 여인이든지, 또 그런 일은 아버지가 살아 있든지 죽었든지 마찬가지로 죄악입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 장자가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한 일로 장자의 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침상에 올랐었도다”(창49:3-4).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범죄한 인간이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8:3) 하셨을 때 감히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자는 의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하고 책망했을 때 즉시 회개하였지만, 사울은 회개가 없었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2. 권징의 필요성
권징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이 들면 어떻게 하지요? 가벼운 증상이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은 수술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죄가 없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죄를 범하고도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2절).
교만이 들어가면 회개할 기회도 잃게 됩니다. 이로 인해 경건의 능력을 잃고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오염시키는 죄악에 대해 엄한 징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3-5).
여기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 는 것은 제명 출교에 해당하는 극형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같이 사도들에게 이러한 권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또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에 대해 회개가 없어도 구원받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 이 말씀은 사랑하기 때문에 까닭 없이 징계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죄를 지을 때 징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징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 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1:24-25).
3. 누룩 없는 떡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6-8).
누룩은 적은 량이 들어가서 부풀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두 가지 누룩에 대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1) 묵은 누룩
이는 유대인의 잘못된 교훈입니다.
유의할 것은 율법이 잘못되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랑하는 율법주의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진리일지라도 율법주의는 진리를 역행하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에 구원받을 자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는 율법주의는 결코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2)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이것은 세속화 현상을 의미합니다. 세속화 현상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또 어디든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보금자리에도 들어와서 가정을 깨뜨리고, 신성한 교회에 들어와서 화목을 깨뜨립니다.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이것은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마귀의 올무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4. 사귈 자와 삼갈 자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9-10).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업을 할 때는 고객에게 ‘당신은 죄인이요 아니요’하고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업을 하든지 죄인과 의인을 가려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코카콜라는 지구상에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북한과 쿠바 뿐이라 하지만 이제는 북한에도 들어갈 정도로 세계적인 상품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만드는 자동차나 전자제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적으로 으뜸을 차지하는 상품이 있어서 많은 나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육체 가운데 거하는 동안 세상에 속한 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은 동지가 있고, 정적이 있어서 서로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더욱 중요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절).
개와 돼지라면 진주도 빛을 잃지요. 그리스도 밖에서야 그럴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삼갈 자와 사귈 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13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 받은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잃지 말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교회 안의 분쟁
고전 6:1-11
World cup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여 십육 강에서 조 1위로 올라가고 보니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여기서 머물지 말고 이제 이탈리아도 이기고 팔 강과 사 강을 거쳐 개최국 일본과 결승전에 올라가서 최후 승리는 우리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한껏 살려준 히딩크 감독과 우리 선수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고향이요, 또 천국을 상징하는 그림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요단강을 건넌 다음 날부터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땀 흘려 수고하고 일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성 싸움에서는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참패의 쓰라림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믿음을 가졌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땅 위에 세워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의 방주요 생수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지상교회는 마귀의 도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허리띠를 동이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1. 성도간의 분쟁
교회 안에서의 발생하는 분쟁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는 항상 화목을 깨뜨립니다. 마귀가 사울에게 들어가자 사울이 번민하여 충신 다윗을 죽이려 하였던 것같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번민과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또 가정이나 교회에 들어오면 불화가 일어납니다. 마귀는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에 서로 물고 먹다가 멸망하도록 조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육신의 생각에 치우침으로 인해서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다스려야 합니다. 진리는 육신의 생각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전적으로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서 화목이 깨어질 때 마귀가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2.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
간혹 교회나 노회, 또는 총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세상 법정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어느 쪽이 승소하든지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어떤 사회나 국가든지 국민의 안정된 생활과 질서를 위해서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함과 같이 세상 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시험하는 자들이 주님께 찾아와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여부를 물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12:17).
국세는 국민의 의무요, 성물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세상 법은 사람이 만들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의해 제정된 법은 변경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법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충신 다니엘을 미워하던 간신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삼십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국가의 통치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말에 왕은 어인을 찍었습니다.
그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을 체포하여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법은 변개 할 수 없습니다.”(단6:15) 하고 법대로 시행하기를 요구하므로 다리오는 왕으로서도 다니엘을 보호하지 못하고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 사이에 폐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제나 오늘 또 영원불변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성도의 권세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2절).
성도에게는 이처럼 특권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세상 법에 의뢰한다는 것은 진리를 세속의 심판대에 올려놓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고 하여 모두가 그리스도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사소한 문제로 다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문제를 교회의 치리를 무시하고 세상 사람에게 맡길 수 없지요. 인간의 법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2:26-27).
이 권세는 천사에게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후사 곧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섬기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3절).
하나님의 영광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5-7).
4.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9절).
소망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천국이 그처럼 영광스러워도 홍포 입은 부자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인이 어떤 자들인지 보십시오.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9-10).
한 마디로 불의한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불의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천국에 죄악이 용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도 죄수를 수감 할 교도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죄인이 없기에 영광과 존귀만이 영원하고 또 영원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여기에 나열된 죄악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줄 압니다. 분명한 것은 ‘불의한 자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 용서받은 죄인
용서받은 죄인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복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1서5:16-17).
우리는 본래 이방 죄인으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성령도 알지 못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유의 은총을 입어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어진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일에 부자 되어 천국 곳간을 채우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령의 전
고전 6:12-20
작은 축구공 하나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World cup) 경기를 개최한 것도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축구 강국들을 무너뜨리고 연일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선수들이 패배했다면 개최국이라는 명분만으로는 이렇게 기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육 강에 들기를 그처럼 염원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사 강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머물 것이 아니라 금주 화요일 상암 경기장에서 준결승을 거쳐 마지막 일본에서 열리는 결승전에서도 우승을 할 수 있도록 뜨거운 성원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수들이 상상을 뛰어넘는 기량에 기적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것은 곧 전국을 붉게 물들인 국민들의 응원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성도들의 승리를 위해 구름 같이 둘러싼 우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세 가지 비결입니다.
1)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처럼 용맹을 떨치던 여호수아 군대도 성물을 훔친 아간으로 인해 아이성에서 참패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야 합니다.
2)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내하지 않고 성사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5:7-8).
3)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만 보았을 때는 물 위로 걸을 수 있었으나 성난 물결을 보고 의심했을 때는 물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역경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가는 길에 장애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능력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화제를 돌려 이제 다른 문제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1. 자유와 건덕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2절).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다스릴 다른 피조물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창1:28).
그런데 잊어서 안 될 것은 인간에게는 만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코끼리를 보십시오. 그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종일 먹는 것에만 매달리면서도 내일을 위해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피조물에게 자연 훼손의 책임을 묻지 않고 인간에게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권리와 의무는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2. 사람과 음식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13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배는 위장(코일리아)을 의미합니다.
맹수들의 눈에는 초식동물이 먹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식동물들의 눈에는 푸른 초원이 먹이로 보일 것입니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흙에서 영양을 섭취하며 자라납니다.
그런데 동식물을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먹는 것으로 보이지요. 물론 여기는 나라마다 내려오는 음식 문화에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령에 따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좋아하던 음식도 먹을 수 없는 날이 오는 것은, 하나님이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허무로 끝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에 있는데 어떤 분이 찾아왔습니다. 대단히 노기를 띈 목소리로 자기 아내가 교회에 헌금한 것을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연유는 남편 대우를 해주지 않고 교회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한 달에 생활비를 얼마나 드리느냐고 물었더니 복덕방에 나갈 때는 생활비를 주었지만 지금은 나이 많아 나가지 못해서 주는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돈을 교회에 그렇게 많이 바쳤겠느냐고 하면서 정 그렇게 의심이 간다면 교회를 함께 나와 보십시오 그러면 아실 것입니다. 했더니 나는 교회에 안나옵니다. 옛날부터 교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하면서 이제 내가 사는 집을 팔아 그 돈으로 요양원에 들어가 편히 살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나오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측은히 여기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향락에 빠져드는 것이 죄가 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5절).
우리는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령의 열매 맺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성령의 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9-20).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해주신 놀라운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가를 지불한 주님의 소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물건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나를 사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내게 건강이 있습니까? 주님을 기쁘게 섬기십시오.
내게 지혜가 있습니까? 지혜를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내게 물질이 있습니까? 물질을 주신 주님을 섬기십시오.
내가 죄에 매여 종살이 할 때는 마귀의 기뻐하는 일을 했을지라도 이제는 은혜로 사는 몸, 내 마음을 성전 삼고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심을 알았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9-22).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자는 하늘의 영광을 땅에서 맛보고 누리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영광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부의 도리
고전 7:1-16
오늘로 월드컵(World cup) 경기는 끝나고 전국을 붉게 물들인 흥분의 불도가니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국민의 기대 이상으로 실력이 향상되어 사 강에 오르게 한 히딩크 감독과 선수 전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머물 수 없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 선수들에게 승리를 빼앗긴 나라에서는 제 삼국에서 다시 경기하자는 신청서가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도전정신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해에서는 군사 분계선을 넘어온 북한 군함들의 선제공격으로 네 명이 전사하고 한 명 실종에 십구 명이 부상을 입고 또 함정도 침몰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햇빛정책으로 통일을 앞당기려는 우리의 꿈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여자는 남자 없이 자녀를 둘 수 없고 남자는 여자 없이 행복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1. 가정의 유래
에덴동산은 꿈의 동산이면서도 엄연한 현실로서 아담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기이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1) 가정이 없었기 때문이며,
2) 행복이 무엇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잠든 시간에 갈비뼈를 취해 만든 여자를 아담에게 보이셨을 때 반응을 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아담이 그처럼 기뻐했던 하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아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기쁨이 더 컸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이유를 ‘남자의 원소는 흙인데 여자의 원소는 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실 남자는 근육을 자랑하지만 여자는 가냘픈 것을 무기로 삼지요. 체력을 자랑하는 남자는 여자 없이 가정을 꾸려가기 어려운데, 여자는 거뜬히 해내는 것을 보면 여자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결혼의 조건
1) 돕는 배필을 찾아야 합니다.
서양 격언에 “결혼 전에는 두 눈을 뜨고 결혼 후에는 한 눈만 뜨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줍니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돕는 배필이 아니라 바라는 배필이 되기가 쉽습니다. 미국의 역대 퍼스트 레이디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여성으로 엘리너 루즈벨트를 말합니다. 그녀는 항상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녀에 대해 순탄하고 결핍이 없는 가정에서 성장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열살 때 고아가 되어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때와 청년의 때를 외로움 가운데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마음을 잃지 않았으며,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서도 비관적인 언어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죽었을 때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 다섯이 있다.”고 하면서 슬픔에 빠져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말년에 남편 루즈벨트가 관절염으로 ‘휠체어 인생’이 되었을 때 루즈벨트는 아내에게 “불구인 나를 아직도 사랑하오?” 하였더니 “내가 당신의 다리만 사랑했나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결혼 초에 저의 아내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여성이 갖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과연 나는 남자이기에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능력을 갖추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더니 너무도 부족함이 많아 스스로 놀랐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결혼은 완전한 사람이기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만나는 것입니다. 두 손을 가락지로 끼울 때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같이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들 약점을 내 장점으로 보완해 나갈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줄 믿습니다.
3. 부부의 의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1-2).
바울은 독신을 주장하거나, 결혼을 죄악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은 주를 위해 세상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하였으므로 거기에 결혼문제도 포함되었을 뿐입니다. 또 그는 인간이 절제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통해 남자나 여자 모두가 상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3-4).
이렇게 부부는 한 몸인 줄 알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지식을 따라’ 라는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5절).
며칠 전 제가 택시 탈 일이 있어서 차를 타고 보니 백발노인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연세가 높도록 일을 하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아니요 도리어 용돈을 벌게 되니 더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놀면 누가 용돈을 주겠습니까? 자식이 있어도 자식에게 가지 않고 우리 노인네 부부만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는데 그분은 금년에 팔십이 세입니다.” 하면서 “저는 아직 건강합니다. 그런데 내 아내가 나와 잠자리하는 것을 거절하기에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외도를 합니다. 그런데 돈이 많이 듭니다.” 하는데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마귀의 올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8-9).
4. 이혼 문제
이탈리아에는 법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결혼과 불가능한 결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평생을 함께 살기로 서약을 하고도 이혼율은 점점 더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황산성 변호사가 목사 남편에게 교회에서 결혼 주례하지 말라고 권유를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편이 주례한 그 사람이 몇 년이 지나면 이혼하게 해 달라고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혼의 조건이 있습니다.
1) 모세의 율법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24:1).
그런데 본래 율법 정신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
2) 그리스도의 복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5-6).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3) 바울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13-15).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보금자리를 복되게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책임입니다. 다만 신앙이 용납되지 않는 극한 상황이라면 신앙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세상 것은 지나가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이 복 받은 가정이요,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정이 영원한 영광에 이를 자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부부의 도리를 깨뜨리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고전 7:17-24
저의 소년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제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고 전기도 없어서 석유 등불 아래서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가려면 8km를 걸어야 했고, 고등학교는 배를 타고 통영까지 12km를 가야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마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때 저의 이웃에 고등학교 다니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교복을 입고 다니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좋았던지 그 집으로 자주 가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기에 이런 때는 내가 여자라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여자 친구는 자유롭게 갈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는 남자는 여자로, 여자는 남자로 성전환을 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기사를 보았는데 미국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 곁을 몇 년간 떨어져 있는 동안 아버지는 어머니로, 어머니는 아버지로 변해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도 없게 되어 ‘아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남자나 여자, 흑인이나 백인 모두 불만이 있을 수 없고, 또 외부적인 조건으로 후회할 이유는 없을 줄 압니다. 헬렌 켈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살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은혜가 임하면 병든 것이 감사로 변할 것이요, 가난한 상태에서 은혜를 받는다면 마찬가지로 지족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7-18).
할례의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는 무관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지라도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5).
심지어 바울도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16:1-3).
1. 할례의 유래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증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9-13).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얻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11).
또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이삭과 함께 유업을 나눌 수 없었으므로 아브라함에게 쫓아내라 하였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몸에 있는 표시가 우리를 의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2:13) 하였습니다.
2. 할례의 효험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18-19).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바울이,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갈2:3-4) 하였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
이처럼 할례뿐만 아니라 오늘의 성찬과 세례, 또 우리가 올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례의식이 메마르고 건조한 종교행사에 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는 세리와 창기의 기도를 들으신 이유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용이 결여된 예배는 형식에 그칠 뿐입니다. 신앙의 연조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예배로 향기를 풍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고 사유의 은총을 맛본 자만이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참된 자유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20-21).
옛날에는 돈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날 때부터 노예의 멍에를 운명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탄식하기를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렘2:14) 탄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으므로 죄악의 멍에 아래 매여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3-24).
그런데 스스로는 자유자로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죄에 매여 종살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그러므로 옛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나도 너를 정죄하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돈이라는 독약에 대한 글을 인용합니다.
“어느 날 사탄이 열 개의 병을 들고 한 청년을 찾아와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이 있고 한 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 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청년이 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유혹하는 사탄의 간청에 넘어가 ‘열병 중에 딱 한 병인데...’ 하며 떨리는 손으로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청년은 돈을 많이 받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이번에는 아홉 개 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안하였고 청년은 그렇게 하여 큰돈을 손에 넣게 되었으나 그때부터 방탕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알콜 중독, 마약중독으로 허물어져 가면서 계속하여 사탄을 불러대어 남은 것을 들이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두려움도 사라져버리고 마지막 남은 두 병을 앞에 두고 ‘돈벼락이냐, 죽음이냐’ 하며 마지막 승부를 거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또 마셨는데 이미 세월은 흘러 청춘은 사라지고 노년이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끝까지 살아나고야 말았어! 이제 어서 돈을 내놔라.” 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어쩔 줄 모르는 노인에게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병을 마시면서 “후후,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지. 그러나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어! 너는 돈이란 종이에 얽매여 살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버렸으니 이제까지 받은 돈의 대가를 지금부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고통과 함께 지불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은 충직한 하인도 될 수 있고 나쁜 폭군도 될 수 있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돈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침묵하게 됩니다. 돈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면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늦게야 알게 될 것입니다.
칼 매닝거는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리고 무한한 가능성과 창의력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열등의식, 죄책감, 부정적 의식구조는 내 속에 있는 숨은 보화를 영원히 매장시키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죄에 매였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일어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 새로운 멍에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5:13).
사랑이 강건하여 목숨도 불사하였던 전도자 바울 같이 우리도 주 앞에 서는 날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임박한 환난을 대비한 신앙
고전 7:25-40
바울은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로되 주를 위해서라면 결혼하지 않는 것도 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결혼을 하면 그날부터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매이게 되어 가정이라는 멍에 아래서 살아야 하므로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나누이게 되지만 결혼하지 않은 자는 주님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특별한 사명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1-12).
그러므로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고 주님께 헌신할 수 있다면 이는 더 잘하는 것이라’ 이는 때가 임박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1. 처녀에 대한 교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5-26).
사실 세상에서 꽃다운 청춘시절에 결혼이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풀의 이슬같이 순식간에 지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33-34).
우리는 때와 시기를 바로 알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며 향락을 일삼다가 순식간에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박한 환난을 대비하는 믿음으로 주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 하셨습니다. 유다 말년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렘16:1-4).
저는 지난 수요일 의정부에 있는 한 노인 전문병원에 성도 한 분이 입원하고 있어서 문병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은 주로 치매성 노인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는데 병실에 들어서자 백발노인들만 병실에 있는 것을 보고 ‘늙지 말아야지’ 하는 자극을 받았습니다. 우리 늙지 맙시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누구도 세월의 흘러감을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겉 사람이지 속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썩어질 육체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영원함을 알았다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가정을 이룬 자들에게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7-28).
사실 남녀가 결혼하면 좋은 것이 많지요.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제가 결혼하기 전에 관심을 끌었던 구절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떤 것이 행복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세 가지 부부형태입니다.
1) 돕는 배필로 살아가는 부부
이는 두말 할 여지없이 이상형의 부부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돕는 배필로 살아갈 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사실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은 남자는 잃어버린 갈비뼈를 찾는 것이요 여자는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기대하는 부부
이런 가정은 서로들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부입니다. 사실 부부이기에 바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완벽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모자라는 부분을 내가 보완해 나간다면 거기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리게 될 줄 압니다.
“남편을 왕과 같이 받드는 여자가 왕후와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3) 체념하고 살아가는 부부
여기에 해당되는 숫자가 생각보다 많을 줄 압니다. 요즘은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여자도 맞바람 피는 세상이라 합니다. 평생을 해로하며 살기로 서약한 결혼이 죽을 때까지는 고사하고 신혼여행 길에서 돌아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부지간에는 너무 예민해지는 것도 건강상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정신박약이나 정신질환자에게는 어떠한 암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허물은 덮어 주고 사랑하며 사는 데 있는 줄 압니다.
3. 신앙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29-31).
무슨 말씀일까요? 그림자 같이 사라져가는 세상 것에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요 또 옅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동양과 서양은 감정 표현에도 차이가 많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합니다. 물론 부부 관계라면 무슨 표현인들 허물할 이유가 없겠지만, 우리는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니 표현을 잘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경건 생활에 도움이 될 줄 압니다.
2)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울어야 할 일이 있으면 우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야 할 일일지라도 절망적인 슬픔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울어야 할 일이 있을 때 한나와 같이 기도하면 은혜받을 계기가 될 줄 믿습니다.
3)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구원의 기쁨을 세상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면 은혜 안에서 누리는 기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옅은 감정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줄 압니다.
4)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멸시합니다.
5)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유는 세상의 행적이 속히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나를 위해 사치하고 교만해진다면 이것은 죄가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모든 것이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다할지라도 하늘나라에 쌓인 보화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도 새롭게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세상 것은 그림자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마지막 때 택함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욕되게 하지 말고 성령의 열매 맺어 천국 곳간을 채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지식과 사랑
고전 8:1-13
바울은 한 통의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던 여러 문제를 다루는 중에 본문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음식 문화에 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또 같은 나라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무엇이든지 잘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려서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음식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 생활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8절).
바울이 또 로마서에서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1-3).
1. 우상의 제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먹을 것이 풍족하여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쌀밥이 그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한 추억이 있기에 오늘이 행복함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배고픈 줄을 모르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에 대한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지난주 중등부와 고등부 수련회를 은혜중에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수고한 교역자들에게 “이번에 아이들에게 금식기도를 시켰는가?” 물었더니 대답이 시원찮은 것을 보면 먹을 것이 넉넉해서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부임한 초기에만 해도 수련회를 나가면 금식을 시켰는데 그럴 때면 체격 좋은 아이들이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더 은혜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상 제물에 대해서 저는 어릴 때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큰집에는 제사를 많이 지냈는데 그때는 왜 밤중이 되어야 제사를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날이 돌아오면 아무리 잠이 와도 자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사가 끝나고 그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우상을 열심히 섬겼는지 쌀을 씻어 먼저 조상 앞에 올려놓으면 고인이 왔다는 증거로 그 쌀에 손가락 표시를 해 놓는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이 지금은 예수를 믿고 권사가 되고 아들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이 제사 음식이니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잘 먹었는데 배탈 나는 일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2. 지식과 사랑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절).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본능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므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짐승도 훈련을 시키면 달라지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반복된 행동으로 인해 인지된 단순한 것일 뿐 인간과 같은 고등교육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원숭이의 지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원숭이를 위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한 나라를 보셨습니까? 그러나 인간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교육을 받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로는 문명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하신 말씀은 교육의 필요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인간이지만 어떤 사람은 우주를 개발하는데 어떤 사람은 원시인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신체적인 구조가 달라서가 아니라 두뇌 계발 여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이 무궁무진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개발해야 할 능력을 갖추어야 활용할 수 있듯이 진리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 보화를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위해서 성경을 깊이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씀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성경의 교훈대로 네 자신이 교훈을 얻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
미국 트루먼 전 대통령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대통령 탄생을 기념하여 도서관을 건립하였는데 개관식에서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때 한 아이가 대통령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통령 아저씨는 우리같이 어릴 때 반장을 했어요?”
“아니다. 나는 너희만 할 때 아주 볼품이 없었단다. 운동도 못하고 안경을 벗으면 책도 보지 못했단다.”
“그러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어요?”
“나는 매일같이 성경을 읽었어. 그리고 내 뒤에서 밀어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믿었단다. 특히 빌립보서 4장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을 읽고 또 그대로 밀고 나갔단다.” 라는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진리의 지식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인간적인 교만 곧 자기 자랑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지식보다 사랑의 기반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면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2-3).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3. 믿음과 절제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절).
오래 믿었다는 성도들 중에서도 과거에 우상을 섬겼던 습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직분이 있어도 악령을 접한 사울과 같이 신접한 자에게 물으러 다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영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9-12).
매사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신앙이 연약한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튼튼한 콘크리트일지라도 굳어지기 전에는 고양이가 지나가도 발자국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수 있었으나 건덕을 위해서는 절제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13절).
나의 자유가 믿음 약한 자에게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말과 행동 모두가 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풍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도의 권세
고전 9:1-16
팔 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관해 언급하고 이제 본 장에서는 사도의 권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종으로서의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떠한 자세로 생명과 구원 사역에 임하였는지를 상고하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사도의 자격
사도의 직분은 계승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가 될 수 있는 기준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 중에서 복음 사역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입니다. 초대 교회는 배신자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를 세울 때 이 기준을 적용하여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1-2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1절).
혹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는 말씀을 들어 그가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함께했던 것으로 보는 자들도 있으나 일반적인 지지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견해는 다메섹 도상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천국 성곽의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계21:12)와 함께 열두 기초 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거기에 바울과 맛디아 누구의 이름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계21:14).
그러나 각기 받을 상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을 줄 압니다. 버가모 교회에 편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충성을 다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니라”(2절).
여기서 언급하는 다른 사람은 누구일까요?
1) 교회 밖에 있는 자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대할 때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도울 사명이 있을 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성직자로 알아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장례식을 집례하고 나면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수고했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과 목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강단에서 말씀 전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목사이기에 큰 교회 작은 교회 가리지 않고 아무 교회나 찾아가서 허락 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사역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강단에는 아무나 세워서 말씀을 전하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음식은 한 끼만 먹어도 배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2. 사도의 권세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3절).
여기서 발명이라는 말은 답변, 또는 변호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살고자 할 때 진리의 영을 알지도 또 받지도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핍박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 권을 두고 힐문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바울의 변명한 것입니다.
1) 가정을 이룰 자유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5절).
개신교와 천주교 간에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성직에 관해 살펴보면 천주교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제도적으로 결혼할 수 없지만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들이 결혼 할수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제도와 풍속이 아무리 귀중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만든 제도는 성경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성직자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 동산에서 혼자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혼자 있을 때 마귀는 더 쉽게 접근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하였습니다.
2) 일을 안 할 수 있는 자유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6절).
바울은 바나바와 이 차전도 여행길에 마가의 동행 여부를 두고 심히 다투어 서로 헤어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손수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복음사역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3) 사도로서 받을 마땅한 대우
어제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조수미양이 하루 공연하는데 십만 불(1억 2천만원) 받는 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또 골프 선수 박세리양은 출전할 때 상표 부착의 대가로 삼십억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편의 광고에 출연하고 받는 광고료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유명하고 존귀한 사람인데 그가 먹고 마시는 일로 허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주님께서 당하신 박해요 고난이기에 바울은 이런 일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죽은 영혼,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을 보고도 요한은 금식하였는데 너희 스승은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떠한 시련이 닥칠지라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변명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4절).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7-9).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3-14).
세상에는 권세가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거짓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세가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겸손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1-12)
이것이 바로 신령한 열매 곧 영혼을 구원하는 영생의 농사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부자 되어 영생을 유업으로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주님께만 돌리는 영광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되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15-16).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 그처럼 어렵고 힘들지라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이 은사는 맡은 본분과 사명에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명자가 맡긴 임무를 게을리 하면 책임이 돌아오지만 충성하면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어떠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옳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 사역을 위해 내게 보장된 권리도 포기하는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충성을 다짐하여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고전 9:17-27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과 함께 마땅한 권리를 말하면서도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이것이 충직한 사명자의 의식입니다. 직업의식과 사명 의식의 차이를 보면, 직업의식에서라면 마땅한 대가를 따르지만 사명 의식은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감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17절).
이 임무는 바울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행해야 할 복음의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바울이 받을 상급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18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상급을 보십시오.
1) 값없이 전하는 복음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당부하신 말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직업의식으로 복음 사역에 이바지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나았으니 또 구원을 받았으니 마땅히 대가를 지불 해야 한다.’ 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감사할 일은 이런 믿음으로 복음을 전했기에 하나님께서 항상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2) 보장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세상에는 없는 권세도 있는 것같이 행세하다가 부끄러움 당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의 정권대사로 당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가 전하는 복음이 말로만 아닌 성령과 능력과 확신으로 선포되고, 기도할 때는 즉시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바울의 처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금년 십이월이 되면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대통령 후보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국민은 또 선거 열풍에 휘말릴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엄격하게 검증을 거치고, 정당한 정책 대결을 펼쳐야 할 텐데, 대안 없는 비난 공세나 상대방의 약점만을 들춰내는 저급한 정치형태로 일관한다면, 어느 정당이든 국민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의 처세를 보십시오.
1)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목숨도 포기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어제 일간지 사회면에서 감동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은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강태원씨로 이분은 월남하여 팔십 평생에 모은 재산 이백칠십억 원을 불우 이웃에 사용해 달라고 내어놓았습니다. 그 분에게도 일남 사녀의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는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시켜 아파트 한 채만 사주면 됐지 더 이상주면 자식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난해에도 백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충북 청원군 꽃동네 사회복지대학에 기증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선친이 평양 지주로 있으면서 백만 평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며 유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지금까지는 내가 모으는 재미로 살았으나 이제는 돈을 뜻있게 쓰는 재미로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어떤 사람은 성도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힘들어 나는 목사 사모가 될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나는 반드시 교역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기 사명 의식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압니다.
2) 유대인들과 같이 된 바울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절).
여기서 유대인들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인데 강조형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혈통의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으로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요 열심당원으로는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혈통과 율법을 초월하여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은 그들을 구원코자 함이라 하였습니다.
3) 이방인들과 같이 된 바울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절).
성도들은 율법을 초월하여 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은혜의 사슬이라는 더 엄격한 멍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사슬에 매인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4) 약한 자들과 같이 된 바울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22-23).
‘복음에 참예하고자’ 바울은 인간적인 관계를 폭넓게 하기 위해서 약한 자들과 함께하며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처세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사명 의식에서였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친구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서로 관계가 좋을 때이지 싫으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명 의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좋은 친구 나쁜 친구, 약한 친구 강한 친구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찾아갔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에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거론하며 냉수 한 그릇까지도 대접하기를 거절하였으나 오실 메시아임을 알고 나서 어떻게 변했습니까? 물동이를 버리고 도성으로 뛰어가 외칠 수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았던 간다게 여왕의 내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빌립이 유대 광야로 가게 되었던 것이 은혜였다면 구스의 내시가 흔연히 자기 나라로 가게 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모든 것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도 이 은혜 힘입고 하나님 영광의 크게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경기자의 자세
경기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절).
연습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가 본선에서 이기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맡은 본분과 사명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찬양대원들도 연습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사들과 남녀 전도회,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기약된 영광의 대열에서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절제해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절제는 경기장의 룰과 같아서 마땅히 성도들이 지켜야 합니다. 정과 욕을 다스리기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3) 목표를 이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6-27).
마라톤 선수가 42km를 달리고 마지막 코스를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최후까지 향방을 잃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 되어 오늘도 내일도 충성을 다짐하여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선줄로 아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13
우리는 구 장에서 전도자의 자세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기자와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할 뿐 아니라, 목표가 분명해야 하고 또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거울로 삼아 ‘선 줄로 아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1. 진리를 아는 지식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1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교황과 사제들이 해석해서 전해주는 성경의 내용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또 마리아 우상을 비롯하여 각가지로 조각한 우상을 세워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하였습니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또 영생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는 부흥되었으나 죄악이 관영할 때는 영감이 사라지고 심판이 임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사울이 블레셋 군대로 인해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는 꿈이나 우림,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아니하시므로 결국 신접한 여인을 찾았는데 역시 아무런 해결책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삼상28:6-19).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교회가 부흥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사회가 변화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과연 죄악을 소멸하는 불같은 말씀, 강퍅한 심령을 깨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 삼천 명, 오천 명이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진리가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선포될 수 있도록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교훈
우리는 흘러간 역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전과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오늘을 바로 살게 하는 지침이 될 줄 압니다. 주말 드라마에 나온 ‘고려 왕건’, ‘제국의 아침’ 같은 것은 단순한 오락물과 달리 등장하는 인물들의 영욕의 세월과 그 마지막을 통해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는 비교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감의 잣대로 기록된 글과 인간적인 잣대에 의한 기록으로서 이것이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 역사를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성경에서는 구원의 진리 곧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4).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구름과 바다를 통과한 세례
이는 출애굽한 자들이 홍해를 지나고 또 낮에 보호받은 구름으로 이것을 합동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개개인의 신앙고백이 없어도 본문에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만민이 구원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개개인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유아세례일 경우에는 그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신령한 식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먹었던 만나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령한 만나는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9).
우리는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바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바울이 만나를 신령한 양식이라 한 것은 만나가 지닌 상징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음료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신령한 반석과 그리스도, 이도 역시 상징적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 상징적인 진리를 영적인 양식으로 소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가진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면 신령한 양식 곧 진리의 말씀도 사람의 소리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지 못할 자들은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이는 진리에 불순종하는 다수를 기뻐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3. 광야에서 희생된 이스라엘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성도 여러분! 이제 신령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허물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자신의 눈에 든 들보를 발견하고 먼저 그것부터 뽑아야 하겠습니다.
1) 금송아지 우상
“그들의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7절).
하나님의 종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시간에 산하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헌화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모세의 기도로 지연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세의 심정을 헤아렸다면 사십 일 까지 함께 금식하며 때를 기다렸어야 마땅 할 것이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믿는다고 하면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금송아지 우상은 없습니까? 탐욕의 우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2) 음란 죄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8절).
오늘날 안방에까지 들어온 음란 퇴폐 문화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베드신이 나오면 흉내만 내었는데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 윤리가 무너지면 모든 것은 다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면 소돔 고모라와 같은 멸망 길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원망하는 죄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9-10).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원망하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감사하며 사는 곳이 천국이라면 원망하며 사는 곳은 지옥입니다. 우리가 지옥 생활을 그리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을 조장하는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1-12).
우리가 결코 자만할 수 없는 것은 끊임없이 역사하는 마귀의 올무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유타주에서 사는 브라이언 하이스씨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7월 어느 날 윗집에서 수도가 터져 자기가 사는 집이 물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양수기를 빌리러 가려고 자동차로 왔을 때 자동차 바퀴가 터져서 급히 갈아 끼워야 했고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집으로 들어가서 전화기를 들었는데 전기쇼크로 충격을 받아 전화기가 박살이 나면서 쓰러지게 되었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자동차를 누가 훔쳐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연료가 조금 밖에 없었기에 도둑이 버리고 간 차를 길가에서 발견하여 주유소까지 밀고가야 하였고 그날 밤에는 대학 모임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 앞으로 갑자기 날아든 돌을 피하려다가 심하게 다쳐 병원에 가서 꿰맬 수는 있었으나 집에 와서는 물에 젖은 카페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는 말 “누군가 내가 죽기를 원하는데 계속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야.” 감사할 일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우리 모두 믿음으로 승리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고전 10:14-33 자
지금 우리는 전국을 뒤집어 놓은 십오 호 태풍 루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여러분들이 정성을 다해 모은 수재의연금은 즉시 총회로 송금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더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1. 우상숭배와 예배
신은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여기는 종교 일반론자 즉 모든 종교는 같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지난 8월 29일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강당에서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한신대 교수 김경재 원장과 미국인 현각 스님이 강연을 하였는데 요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각 스님은 말하기를 “내 믿음에만 집착하고 남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종교적 폭력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자비와 같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도대체 그 진리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느냐고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그런 의문을 갖고 영적 방황을 했으며 책도 수없이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선 수행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맞추어 김경재 목사는 “왜 종교간에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는가, ‘자기 붓 대롱으로 본 하늘만이 진짜요, 자기만이 하늘을 모두 본 자라고 우기는 배타적 독선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종교가 더 좋은 진리 체계를 가졌는가를 따지는 ‘정교 경쟁’이 아니라 어느 종교가 더 많은 자유 정의 평화 봉사 운동에 복무하는가를 따지는 ‘정행 경쟁’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화목과 질서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종교는 왜 필요합니까? 인간에게는 어떠한 이념과 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각 스님은 가톨릭에 몸담고 있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불교에 입문하여 깨달은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진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요. 김경재 목사는 ‘진리보다 행위’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종교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일치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일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진리를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평화는 비진리와 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14, 20-21).
2. 자유와 덕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3-24).
기독교의 정신, 또 실천강령이 이 구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구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 이룩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난여름 우리 청년들이 땀 흘리고 돌아온 사역지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청년회 모든 분들께와 교우님들께 언제나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오래 오래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람들과 일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떠나갔지만 남아있는 우리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떠난 후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오래 정들었던 사람이 떠난 것처럼 허탈했습니다. 마음에 작은 고동이 울린 감동이었습니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앞에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사랑뿐임을 다시 한번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청년회 여러분!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 봅시다.
‘주님! 그들이 무엇을 원합니까? 건강, 지혜, 주님을 닮은 고상한 인격, 부자입니까? 주님! 다 채워주십시오.’
일 년 동안 사역 자금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한꺼번에 다 쏟아 놓고 가셨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하루쯤 쉬려고 계획했는데 계곡에서 발이나 담그고 가셨는지요?
그 교회 성도들을 보면 목사님을 알 수 있다던데, 유목사님, 오목사님, 부장집사님, 전도사님 참 감사합니다.
밥하시느라 고생하신 권사님, 집사님, 궂은일 도맡아 하던 청년들, 현관 공사 때문에 세 번씩이나 오셨던 장집사님, 특별히 이발, 미용 하셨던 자매님, 아프던 손과 목은 어떠하신지요? 이름들을 잘 몰라 미안합니다. 임00 회장님, 박00 팀장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다 건강하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사역이었습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강명애 사모 드림
이 편지는 우리에게 참된 가치와 그림자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것이 내게 있어 영원히 자랑할 수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이 그림자에 속한 것인지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그 기도를 즐겨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자원보다 큰 보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을 이용하면 무엇이든지 필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명이 발전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은 물질적인 세계에 국한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로 받는 복은 영 육 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십육 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일로 청지기의 직분을 박탈하려 했을 때 계약서를 위조한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인의 것으로 사후를 대비했다는데 있습니다. 만물의 주인은 내가 아닌 조물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셨다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문호 톨스토이는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쌓여 있으면 악취가 나지만 뿌려지면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주셨다. 하나는 받는 손이고, 하나는 주는 손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33절). .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딤전6:18-19).
3. 나의 양심과 다른 사람의 양심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25-27).
사실 무엇이든지 묻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믿음이라면 이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음식은 음식일 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0-31).
다만 우상을 인정하면서 제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서 불신가족으로 인해 조상의 제사에 함께 참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적인 믿음으로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제사하는 것이 참된 효도가 아님을 알았다면 속히 극복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지라도 내 믿음의 잣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주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28-29).
무슨 말씀일까요? 내 신앙이 아무리 성숙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신앙 잣대로 보지 말고 상대방의 신앙 잣대로 보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가족과 함께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밖에서 손님을 접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예의를 잃지 않고 먼저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시킨다면 이는 마치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황새와 여우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족일지라도 나이 많은 어른이나 병든 사람, 아이들이 있을 경우에도 배려를 해야 합니다.
이같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이 생각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앉는 자리를 두고 다툼을 일삼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양보하고 상대편을 위하는 미덕을 가져야 하는데... 또 부담 없이 주고받은 이야기이지만 실족하는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 멘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16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사무엘은 백성 앞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고 하였을 때 백성들은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삼상12:3-4).
우리나라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인물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는 많은데 과연 인격을 존중받을 수 있는 교사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주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을 교육한 과정을 살펴보면 지식 교육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교육이었습니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울의 믿음을 보십시오. 이는 결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이거나 교만해서가 아닙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이렇게 전진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또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5-16).
안일과 나태, 방심은 자신에게뿐 아니라 누구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사명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1. 바울의 칭찬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2절).
본문에서 바울이 무엇을 칭찬하고 있습니까?
1) 바울을 기억한 일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했습니다. 양이 목자를 등지고 세상과 가까이 한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을 줄 압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4:10).
여러해 전에 있었던 지옥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속히 목사님을 불러 달라.”라는 말을 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문도 닫기고 말았습니다. 그때 병원 응급실에 가서 손을 얹고 기도하는 시간 환자가 정신이 돌아와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남편 강신조 집사님이 한 말입니다.
“목사님! 지집사는 목사님만 찾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모하는 믿음이 없으면 목사를 찾을 이유가 없지요.
여러분은 새벽 예배 1부, 2부를 자유롭게 참예할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사명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립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2) 유전을 지킨 일로 인해서였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이 지킨 장로의 유전이 아니라 새로운 유전, 곧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지키는 유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유교와 불교가 어느 때부터입니까? 교주의 탄생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천 년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전부터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창조의 근본과 또 영원의 문제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사분의 일이 기독교인이라 하지만 아직도 국가에서 어떠한 행사를 가질 때는 우상을 섬기는 의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상을 섬기는 풍속이 속히 청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경건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창조의 질서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3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연 세계나 인간사회 할 것 없이 조화와 질서가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이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빛과 어둠, 윗물과 아랫물, 육지와 바다,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인간을 조화롭게 창조하심으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저는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할 줄 모릅니다. 어떤 그림은 제가 보기에는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그려놓은 것 같은데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아는 자의 눈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남녀 간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나 ‘여자가 쓰지 않고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지니라”(8-10)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천사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우리의 예배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를 뜻하다는 것입니다. 또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남녀의 구별과 질서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15절).
3. 창조의 목적
“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
기억할 것은 남녀의 관계는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오래 사는지 수명을 비교해 보십시오. 통계학상으로 보면 6-7년을 여자가 더 오래 삽니다. 뿐만 아니라 부부는 일반적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4-5년 연상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십 년을 빨리 죽는 다는 계산입니다. 여성도들에게 당부드립니다. 나보다 십 년 먼저 돌아가실 남자를 측은히 여기십시오. 또 남자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부부는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아침마당을 시청하였는데 장애를 가진 부인을 둔 젊은 부부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랑은 “베푸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행복은 “책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여덟 살 된 꼬마가 십 년 위의 색시를 맞아 장가를 갔는데 신랑노릇도 못하면서 색시를 여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어른들이 집을 비운 시간을 틈타 신랑을 덜렁 들어 지붕 위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부모님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얘, 너 왜 지붕에 올라갔느냐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하고 걱정하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부인이 야단맞을 것 같아서 “색시야,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 하였더니 어머니는 보기가 너무도 불안했던지 “아무거나 따서 속히 내려오라”고 했는데 그날 밤 꼬마 신랑 하는 말 “색시는 오늘 내가 한마디만 뻥긋했으면 죽을 뻔했지?”했더니 그날부터 자기를 믿어준 꼬마 신랑이 고마워 잘 모시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현명한 자는 발밑에서 행복을 키운다”(제임스 오펜하임)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5여전도회에서 장애인들을 찾아 봉사하는 중에 많은 은혜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할 때 거기서 맛보는 보람일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 가운데 자신이 누릴 복은 생수와 같아서 갈한 영혼을 해갈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내 몸에서, 또 부부가 합심하여 그리스도 예수만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빛이요 소금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따라 그의 믿음과 삶을 본받아 오늘도 그리스도 향기를 가득히 풍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찬의 참된 의미
고전 11:17-34
교회마다 성찬 예식에서 많이 인용되는 성경은 바로 본문 말씀이 될 줄 압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유월절 절기가 돌아오면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 그리고 양을 잡아서 절기를 지켰는데 여기에 희생된 양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으므로 다시는 율법을 좇아 올리는 그림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7:27-28).
1. 칭찬받지 못할 일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7절).
여기서 우리는 칭찬받지 못할 일로 인한 부끄러움과 칭찬받는 일로 인한 복이 어떠함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마땅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 하며 칭찬받을 일에 게을러서 안 될 것입니다. 이번에 2여전도회에서는 강릉에서 화재로 교회와 사택을 잃은 이동우 전도사님을 도와드렸고 권사회에서는 한 교회를 선정하여 도우려고 하다가 여기저기 도와야 할 교회가 많아서 임원들이 앞장서서 서로들 힘을 모아 세 교회를 돕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역사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에 대해 칭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분쟁입니다.
저는 오늘까지 화목한 가운데서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교회는 남전도회를 두지 않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당회를 조직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러한 조직이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 있어 주님의 일을 하는데 공동체를 통해 얻어지는 힘과 정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종이 한 장이면 아무런 힘을 받을 수 없으나 그것이 책이 되면 힘을 받게 됩니다. 이같이 선한 일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역을 위해서는 모두 하나 된 가운데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칭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분쟁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18-19).
진리는 다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의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빛을 남긴 위인들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낙담시켰던 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팔백오십 명이 아니라 엘리야와 함께하시므로 엘리야를 통해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금주 토요일 팔월 한가위 명절을 맞게 됩니다. 예년 같지 않아서 금년에는 더욱 우울하게 보내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명절이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덕담을 나누며 기쁨을 함께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가 항상 기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 분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가화 만사성’이라는 말과 같이 화목한 가정이 복을 받게 됩니다. 성도들은 우상숭배 하는 데 가담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탐욕에 있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20-21).
초대 교회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절기를 함께 나누셨으므로 떡과 잔은 식사를 대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찬 예식에서 얼마나 배부르게 먹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의미를 알고 참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2절).
사람이 탐욕에 빠져들면 알지 못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해 그렇게 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4-7).
은혜를 받은 자, 오랜 신앙 연조를 가진 자, 직분이 있는 자들일수록 더욱 경건 생활에 힘씀고 자신을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2. 성찬의 의미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3-26).
성찬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학설이 있지만 지금 그것을 논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먹는 그 떡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살을 기념하는 것이며, 내가 마시는 그 잔은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한다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은 무리가 주님을 찾았을 때 무리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6:51).
무리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고 심지어 제자들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0, 63).
이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성찬의 참된 의미는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생명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성찬을 욕되게 하는 죄
1)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무서운 죄악은 성역을 세속화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축출되었고, 다른 불로 여호와 앞에 드렸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민26:61).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27절).
2)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죄가 됩니다.
아무리 주릴지라도 삼가야 할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찬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입교 문답을 하고 본인의 신앙을 고백한 한 후에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8-29).
주의 성찬을 범한 자가 받은 징벌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30-32).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몸,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34).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