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
요1:1-8
요한복음은 제 4복음, 또는 독수리 복음이라 하는데 이는 계4:7에 나오는 네 생물을 복음서에 비유한 것으로 초대교회 교부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살로메와 세베대의 아들로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마리아를 부탁하신 일 때문에(요19:26-27) 마리아의 임종 때까지 십오 년간 모셨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에베소에는 성모상과 함께 여러 가지 유적들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을 제사 복음이라 하는데 이는 세 복음은 공통관점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요한복음은 다른 차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또 요한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는 첫째로 그리스도는 조물주 하나님이시오, 둘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1. 태초의 의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절).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과 연관되는 것으로 '시작'을 의미합니다. 창세기가 우주 만물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영적인 기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창세기의 태초는 창조의 시작을 기점으로 두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영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의미는 "태초에 말씀이 지음을 받았느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 시작과 끝이 없듯이 그리스도 역시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창세 전’이라는 이 말씀이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를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것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영생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마1:23).
2. 말씀과 하나님과의 관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등 되심과 동질이심을 밝히면서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이라 하신 이유를 살펴보면 오리겐(Origen)은 "그가 성부의 비밀을 계시하기 때문이라" 하였고, 칼빈(Calvin)은 "성부의 영원하신 뜻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성삼위 하나님으로 영화로운 인격적 교제를 이루고 계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한 진리입니다.
3. 말씀의 창조 사역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본문을 창세기 일 장에 있는 창조 사역과 대조해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 3-4).
이렇게 창조의 역사는 육 일 만에 완성이 되었습니다(창1:31).
유의할 점은 분문 말씀과 창세기 일 장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관계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요한복음에는 아들이 창조하신 역사로 나와 있습니다(요1:3).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시키시는 일을 하고 나면 "그래, 어른 입이 아이들의 일이란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있을 텐데 그렇게 하고 나니 얼마나 좋으냐?" 하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일은 제가 했을지라도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근본적인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이심으로 창조의 사역도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이룩하신 사실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대속과 구원 사역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4. 생명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즉 생명과 빛은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등진 삶은 빛이 없는 어둠이요, 영원한 절망일 뿐입니다.
성도들이 상계동 백병원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병들어 입원했는데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에 울음을 터뜨리며 감동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녔다가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변화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들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병든 사람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희귀성이 있는 찾으므로 그 값이 올라갑니다.
교회마다 "어서 오십시오" 하니까 복음이 외면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기회는 한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또 우리는 값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경건 생활이 세상의 빛이 되고, 인류의 소망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평범한 인물로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은혜 받는 역사는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손길로 나타나서 성령의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5. 세례 요한의 임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6-7).
세례 요한이 탄생한 경위를 보면, 그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 아들로서, 사가랴는 본래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시간에 주의 사자를 통해 계시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성령 받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네 살짜리 아이가 집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찬송하고 성경을 펴놓고 소리를 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잠꼬대를 하면서도 주님을 찾는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지요.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말썽부리기로 유명한 개구쟁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니 내가 쩔쩔매네" 하더니 그 후로는 놀라울 정도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어른보다 아이들이 속히 은혜 받는 것은 순수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복중에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주 앞에 큰 자가 되리라"(눅1:15)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2) 나실인으로 구별을 받았습니다.
이는 민수기6:1-8에 있는 말씀으로 특별히 삼손과 요한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1:15-16).
과연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혜성같이 등장하여,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3:4)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의 임무를 다하고, 분봉 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 관계를 책망한 일로 투옥되어 그 길로 순교의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어떠한 표적이나 기사를 행한 일이 없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8절).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
그런데 주님께서 요한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
여기서 우리는 위대함의 비결을 깨닫고 또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6. 자기 땅과 자기 백성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9-11).
이사야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1:2)고 외쳤습니다. 다만 감사드릴 일은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을 살펴봅시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
"혈통과 육정" 이는 모두 썩어질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혈과 육" 여기는 부자나 권세 있는 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요,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벧전1:23).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영원토록 구원의 기쁨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영광을 보지 못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같이 오늘도 빛으로 오신 주님 곧 은혜와 진리로 오신 주님을 알지 못해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아지고 듣는 귀가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나 독생 성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내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우리 모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와 능력, 영생의 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34
유대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살아가던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보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율법 의식과 전통에 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성례는 할례와 유월절이었으나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성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1:19-23).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5-27).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
"불과 성령" 이는 율법 시대의 막을 내리고 복음의 새 시대 즉 메시야로 인한 은혜의 시대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1. 대속의 양으로 오신 예수
이원론자들은 태초에 하나님과 물질이 공존하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할 수 없으므로 물질은 악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므로 빛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상은 영토를 의미하는 것보다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물론 자연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다만 자연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일로 저주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에 미치는 저주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오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이 말씀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신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의 제물로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양의 제물을 비롯하여(출29:39),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7), 또 양을 잡아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레4:32).
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로 인해 죄의 사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그림자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10:1).
그러므로 이제는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영원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므로 그로 인해 우리가 온전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내 뒤에 오는 사람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절).
요한은 주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났으나 예수님을 나보다 앞섰다고 증언한 것은 태초부터 계신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앞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7-10).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상석에 앉기를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하였습니다. 이렇게 추상같은 책망 속에서도 그들이 반발하지 못한 것은 요한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를 가려내는 것도 복음입니다.
우리는 양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해 양의 우리를 넘어오는 자들을 색출하고 척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다운 회개 없이는 사유의 은총을 힘입을 수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복음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까? 이것이 사유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요한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경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 33) 이 말씀은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생모 엘리사벳을 친족이라(눅1:36) 밝히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말은 그들이 "가까운 인척 관계"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물론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예수님은 나사렛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아느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가 오실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3-5).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왜 전도가 필요합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시험이 들면 실족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을 때 무리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만 아니라 왕 중의 왕이요, 세세에 왕으로 만민을 다스릴 왕이십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그런데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5-57).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요한이 메시야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3-34).
지금도 성령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우리 모두 은혜와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요한의 임무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외친 말씀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마3:3) 하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고, 요단강에서는,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4절).
요한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광야에서 자연인으로 살다가 때가 이르러 진리를 증언하고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그처럼 복되게 한 결정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요인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진리와 무관한 삶이라면 허무에 그칠 뿐이요, 진리를 역행하는 삶은 수치와 욕이 되고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시대적인 사명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내게 있어 무엇을 요구하며 기뻐하시든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식 있는 여인이 모성애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의 열매를 맺을 때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에는 양이 사람의 숫자보다 많은데 독수리가 토끼나 양의 새끼를 사냥할 때는 먼저 눈을 뽑아 먹은 후 서서히 뜯어 먹는다고 합니다. 하루는 공중을 돌던 독수리가 번개같이 지상을 향해 내려오기에 농부가 급히 갔더니 거기는 새끼 양이 아닌 어미 양이 두 눈을 잃고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는데 그 품에는 새끼 양이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이 죄인을 살리려 피 흘리셨습니까?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받아주시옵소서' 아 멘
5. 요한의 겸손
사람에게는 선의의 경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승부욕에만 집착하여 규정을 어긴다면 그것은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재미 교포 두 사람이 함께 구입한 복권이 당첨되었는데 억이십육억짜리였습니다. 절반으로 나누어도 십삼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서로 독차지하기 위해 양편 모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차라리 당첨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인간과 차원을 달리하신 분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런데도 마귀가 사람을 어떻게 유혹하는지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까 하노라" 하면서 에덴에서 사용했던 그 술책으로 오늘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렇게 마귀의 시험에 빠져들면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서 "내가 재림주"라는 망령된 소리를 하는가 하면 매사에 은혜의 길을 막고 불만을 품게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의 겸손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
이로인해 요한의 위치가 낮아진 것이 아니라 더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지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주님께로 가는 일이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형 교회 붐이 일어나 천명 미만의 교회는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대형 교회가 인위적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많이 모이는 교회에만 성령이 같이 하고 작은 교회에는 진리가 없는 줄로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한 두 사람이 모인 중에도 같이 계십니다. 라오디게야 교회보다 서머나 교회가 더 부요하고 칭찬받은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영광은 주님께서 받으시고 멸시와 천대는 내게로 돌리소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의 덕을 살려 더 큰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어떠한 영광받기를 기뻐하시든지 순종합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아멘 -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요1:35-42
주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을 보면 복음서에 따라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마4:18-22)과 마가복음(막1:16-20)은 동일하고, 누가복음(눅5:1-11)에는 기적으로 고기를 잡은 사건이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주님을 따르다가 그의 형제 시몬을 인도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달리 보는 사람도 있고 동일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1. 세례 요한의 증언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5-36).
세례 요한이 메시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증언한 것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실 때부터였습니다(28절).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속죄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청중들 앞에서 메시아를 전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 앞에서도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언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절).
인간은 누구나 명예심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형설의 공'이라는 말은 이미 지나간 옛말이 되었으나 성공을 위해 쏟아붓는 정열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는 것이 남들보다 더 부지런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면 그것을 정죄할 이유가 없지요. 위대한 과학자, 예술인, 정치가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그 꿈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불교계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폭력배까지 동원한 사실이 밝혀지므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아집과 분열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기독교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시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삶과 죽음을 한 연장선에 올려놓은 사건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한 전환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활로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과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진리도 하나입니다. 분열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분열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은 발전소에서 거대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합니다. 성도도 사랑으로 뭉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과 같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증언하며,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게 된 제자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메시아를 증언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이 청지기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8-39).
평범한 질문이요, 대답인 것 같으나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운명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주님께서 그때 거한 처소가 어떤 곳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의식해서 별다른 처소를 준비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참된 신앙이 우리의 목적이라면 환경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은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진리는 강단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인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3. 안드레의 전도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40절).
여기에 또 다른 한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입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41절).
유의할 것은 그때 안드레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먼저 알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안드레가 그리스도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거나, 어떤 신비의 체험이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선택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5-66).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우리가 불타는 사명감에서 복음을 증언하여도 열매 맺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럴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난 체험과 깨달은 진리를 증언할 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서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신앙의 안목에서라면 바울이 입으로만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기에 넉넉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떠한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 복음은 죽은 복음입니다. 나와 무관한 복음이 아닌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메시아를 증언하므로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4. 베드로가 받은 복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절).
베드로가 받은 이 말씀은 일반적인 은혜가 아니라 특수한 은혜요, 사명자로서 받을 은혜입니다. 그런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은혜가 아니요, 또 욕심을 부린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이렇게 은혜받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인 줄 알았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지 아십니까? 예언의 영감이 임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예언은 조심 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은혜가 선지자들과 함께하신 동일한 은혜일지라도 기록된 성경을 떠나 새로운 영감이나 계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복음이 없기 때문이요, 구원받을 특별계시는 성경 육십육 권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5-19).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
안드레가 전한 복음은 시몬을 게바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땅끝까지 증인되어 주님의 영광 드러내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요2:1-11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객들 중에는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갈릴리 가나에서 구입한 포도주와, 요단강 물을 가져 와서 성례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정성이야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사실은 그 물보다 귀중한 것은 은혜의 생수입니다.
1. 모자란 포도주
옛날이나 지금이나 잔칫날은 손님이 많습니다. 또 손님이 많다는 것은 주인으로서는 기뻐할 일이지요. 그에 대비하여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지만 모자라면 난처하지요. 오늘 같으면 대형 음식점이나 전문적으로 이런 일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어서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은 한정이 있으므로 수요가 많으면 모자라게 마련입니다. 물가의 오르내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1절).
그 집은 마리아와 가까운 친척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2절).
그때는 열두 제자보다 갈릴리에서 함께한 네 제자로 보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절)
우리나라로는 잔칫집에 술이나 음료수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몰려드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3-4).
여기서 유의할 것은,
1) "여자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요 오직 주님만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여기서 성모 마리아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카톨릭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4절).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세상 문제요 구원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혼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일로 해결책을 구했는데 예수님은 다른 의미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때가"라는 말씀은 "작정된 시간"으로 메시아로서 영광을 받으실 때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재림으로 인해 성도들과 이루어질 영원한 혼인 기약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밧모섬에 요한에게 "이 때" 곧 기약이 이르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6-8).
그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 준비 넉넉히 하여 신랑 되신 주님 맞이해야 합니다.
또 모자라는 포도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물질로는 충족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사회는 풍요 속에 영적인 빈곤이 있고, 궁핍한 사회에는 궁핍으로 여전히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은혜요, 초대 교회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잔치는 항상 넉넉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절).
마리아는 주님께서 모자라는 포도주를 능히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귀중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거역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요2:6).
"유대인들의 정결예식을 따라" 이 말씀은 일반적인 관습에 의하여 손과 발을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돌 항아리 여섯에 의미를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항아리 숫자에 진리적인 의미를 두신 것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구까지 물을 채웠던 하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내게 어떻게 임하든지 순종하여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요2:8).
어느 순간에 물이 포도주로 변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지만,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해서 포도주 대신 물을 떠다 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면 그 말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또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므로 그대로 하였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 나의 손과 발은 평소와 달리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쓰임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4. 질 좋은 포도주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 2:9-10).
물론 하인들이 그로 인해 진리의 비밀을 다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는지 그 것은 몰라도 물을 길어다 부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인간의 공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요. 단지 그들에게 있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하인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기적을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 가장 잘 들어납니다. 약함은 가장 실제적으로 그분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입니다.” (John Stott)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무용지물이었고, 존재악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존귀한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게 마련이고, 사람도 나이 들면 늙어집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세계는 영원토록 새로운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어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었듯이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어느새 물은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권능과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주님
요2:12-25
주님께서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 되게 하신 후에,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다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12절) 이라고 했는데 그 형제들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① 요셉 전처의 소생으로 예수님의 이복형제들
② 알패오와 성모 마리아 동생의 자녀들
③ 예수님의 친동생
천주교를 제외한 개신교의 입장은 세 번째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13:54-56) 하였습니다.
1.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주님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13절).
주님께서 공생애에 접어들어 첫 번째로 지키게 되는 유월절입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강보에 싸인 아기 때와 12세 때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기록되었으나 매년 절기를 지켰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도 유월절을 세 번 지켰다는 주장(요2:13; 6:4; 11:55)과 네 번 지켰다는 주장(눅6:1; 마 12:1)이 있습니다.
2.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주님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3-16).
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의식중에 발생하고 있는 세속화 현상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에 엄격하였습니까? 그런데도 그처럼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면(눅19:46) 제사인들 상달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구라파에서는 나라에서 종교 세금을 부과하여 성직자들에게 국가 공무원들같이 월급을 지불합니다. 그로인해 어떤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종교 의식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고, 모든 것이 형식에 그치므로 갈급한 영혼들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므로 양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적인 풍요 속에 영혼이 병들어 죽어간다면 그것을 사회적인 발전이 있다고 해서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해지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3. 성전이 시장으로 전락된 이유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14절).
주석가들은 그런 현상을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뇌물을 먹고 눈을 감아준 일로 인해 성전 안에서 그런 일이 자행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타성에 젖어들면 죄악을 죄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이 동물들의 생태를 연구할 때 가까운 위치에서 카메라에 담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위장막을 쳐 놓고 그 안에서 몇날 며칠을 지내다 보면 새들은 위장막인 줄 모르고 놀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만 내 놓고 마음대로 찍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혼살림을 차릴 때는 매일 매일 털고 쓸고 닦아 집안에 먼지 앉을 틈이 없지요. 그런데 아들, 딸 낳고 살다보면 일하기가 힘이 들고, 새 물건들은 낡아지고, 손이 닫지 않는 곳에는 먼지가 쌓이게 마련입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연세가 높아지면 집안은 골동품 시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골동품으로 변하니 생활환경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 해전 미국에 갔을 때 산호제에 있는 동창 목사님댁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가서 목회를 하는데 아들,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욕실을 보니 새 세면기는 잘 보관해 두고 흠이 있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본인들은 그런 것에 불편을 안 느껴도 간혹 자녀들이 찾아오면 이것저것 낡은 것은 내버리기 바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저의 집 사정도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활이야 검소해서 나쁠 것이 없겠으나 영이 세속화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는 과정을 비유하면 낙타가 처음에는 밖이 추우니 머리만 들여놓자고 사정하다가 허락을 하면 발도 들여 놓자고 하고, 또 용납하면 이제는 그 큰 몸체가 다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유혹은 단호하게 물리치십시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릴 때부터 매년 돌아오는 절기는 철저하게 지키도록 교육을 받았으므로 절기 때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이윤을 얻게 되므로 성직자들이 방치하는 가운데 결국은 성소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잘못된 일을 누가 바로 잡았습니까? 타성에 젖어들고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자들은 할 수가 없었으나 주님께서 척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변화를 받기 전에는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어느 성도를 통해 "목사님, 제가 예배 시간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는데 이제는 졸음 마귀가 뚝 떨어졌어요. 목사님의 설교가 어떻게나 잘 들리는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어요."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병마의 고통으로 지불한 댓가가 있었기에 주님의 은혜를 더 귀하게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모두가 타성을 깨뜨리고 변화를 받아 마음속 천국을 이루는 은혜를 힘입기를 바랍니다.
4. 의의 등장은 불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옳습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의 심판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심판이 이유 없이 가해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경성해야 합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죄인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이 불의를 용납하고 죄도 묵인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회개를 모르는 죄인들은 주님 오시는 날 산과 언덕에 자신을 숨겨도 어린 양의 진노를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의 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시키고 강도의 굴혈로 만든 일은 용납할 수 없는 큰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건한 생활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히 지켜 나가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모두가 몸으로 제물 삼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5.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절).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맡은 본분과 사명을 따라 희생을 각오하고 실천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위해 얼마나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일이 인간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좌우된다면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청결하게 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6. 이 성전을 헐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못하고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믿음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믿음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신다면 복 받을 일을 하셔야 합니다. 은혜받기를 원하신다면 은혜받을 일을 하십시오. 하늘나라 상 받기를 원하신다면 충성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19-20).
이처럼 대화가 막혔는데 어떻게 진리가 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생의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여전히 육신의 말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르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무슨 말씀일까요? 주님의 복음이 주님께서 부활전에는 방언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 깨닫는 지각이 열려졌다고 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다시 말씀드리면 오순절 성령 강림 역사가 일어난 후에 이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주의 진리가 방언으로 들리지는 않습니까? 은혜를 받으셔야 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오늘 우리의 진리입니다. 세상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할 수 있었다면 이는 영원한 진리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소유했다는 증거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의의 불검을 높이 들고 우리도 세속과 타성을 척결하고 주의 전을 청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중생의 진리
요3:14-21
요3:1절 이하에는 밤에 주님을 찾아온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관한 진리를 말씀한 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밤에 찾아왔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5-7).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던 일로 더 깊은 영적인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하신 말씀입니다.
1. 모세의 놋뱀과 예수님의 십자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14절).
민수기 21:4-9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습니다. 여러분, 역경에 처할 때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21:4-5).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그것이 그렇게 하찮은 것입니까?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먹었으나 영양실조로 쓰러진 자 없었고 옷도 해어지지 아니하고 발도 부릎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사를 몰랐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때 그들이 무어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또 애굽에 내린 열 재앙 가운데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였을 때는,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로 인해 불뱀이 나와서 사람을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가 엎드려 기도하므로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시고 불뱀에 물린 자들이 놋뱀을 보는 순간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유대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 말씀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단 것같이 인자도 십자가에 달려야 하리니’ 여기서 모세의 놋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공통점은 모두 높이 들렸다(저주를 뜻함)는 것이요, 차이점은 하나는 상징적인 진리이지만 그리스도는 실체이며, 놋뱀을 보는 자는 불뱀의 독이 사라져서 육신이 살아났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형과 상징이 실체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구약 시대에 일어난 그 사건을 통해 바른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요절이요, 일명 "작은 복음"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1)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어떠한 성인군자도 근본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2) 믿음으로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금욕적인 생활이나 명상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1-8).
3) 영생의 종교입니다.
철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철학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임한 진리는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 가운데 살면 세상에서도 형통과 번영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것은 그림자일 뿐이요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아닙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그림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누릴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잘 살아갈 때 영생의 소망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밝은 낮에는 별들이 가려지지만 캄캄한 밤이 되면 소망의 별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만민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복음은 혈통이나 국경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6:15).
그러므로 복음은 만민에게 증언되어야 할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의 율법을 의식할 것 없고, 아브라함의 혈통을 자랑할 것 없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천국 시민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평하신 주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2:5).
이렇게 가난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병든 사람도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건강할 때보다 주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 모두가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게 됩니다. 이제는 복음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또한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온 세상에 전파된 복음으로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아십니까?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랑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성체에 못 박히사 피 흘려주신 사랑이요,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찾아 오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엎드려 감사드리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3. 믿는 자의 구원과 불신자의 심판
1) 믿는 자의 구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18절).
심판이 무엇입니까? 법정용어로는 "사건을 심리하여 판결하는 것"이요, 경기용어로는 "규정을 유지시키고 승패를 가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심판은 영생을 얻을 자와 영벌을 받을 자를 가리는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고,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듯이 구분하여 징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구별이 악인에게는 심판이로되 구원받는 성도에게는 영생에 이르는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불신자의 심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이것은 종말적인 심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우주 종말적인 심판을 부인하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믿는 자의 구원이 성령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면 불신자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가올 영광의 날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은혜받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과 같이 불신자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심판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빛을 등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어둠이 이미 임한 것입니다. 밝은 낮에도 눈이 없으면 어둠이요, 빛을 등지면 그늘입니다.
빛의 혜택을 입으려면 어둠에서 깨어나야 함같이 어둠의 삶을 청산하고 빛의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의 생활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막연한 기대 속에 살아갈지라도 영생의 소망은 없는 것입니다. 장차 받을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기에도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못 박은 악인들이 자기들의 소행을 알았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심판은 빛 앞에서 불의가 드러나는 그 자체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 아멘 -
수가성 우물가에서
요4:1-9
요한복음 1:43에 이어 주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행하시는 제2차 노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것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인성
주님은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다가,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6절).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논쟁입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만 주장하므로 십자가의 고난마저 의미를 잃게 하였으므로 결국 니케아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신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곤한 몸을 입으시고 수가성 우물을 찾으신 주님께서는 오늘은 진리의 성령으로 오셔서 갈한 영혼들을 해갈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야곱의 우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5-6).
이스라엘 족장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우물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도 기록상으로는 달리 근거가 없으나 오랜 전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 우물은 나블루스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천육구십칠 년도 조사에서는 깊이가 32m에 물 깊이는 5m인데 천팔백사십일 년에 다시 조사했을 때는 깊이가 23m였다고 합니다.
3. 주님과 만난 여인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7절).
이는 그 여인에게 있어서 일상적인 생활이었으므로 물을 구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오고 갔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날이 자신의 운명을 바꾼 중요한 날이 된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회를 우연으로 간주하고 또 재수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어느 특정 인물에게 국한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가 다른 것뿐이요, 복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동등하게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만 그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입니다.
"목사님, 우리 구역 식구 가정에 아기가 아파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저녁 시간인데 그러자고 약속을 하고 갔더니 마침 남편 되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 급히 차를 타고 어디로 가려고 했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였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심방 오셨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는 집사님의 성화에 발길을 돌이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알고 보니 일부러 피하다가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복 받을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4. 사마리아 여인의 편견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7-8).
마침 피곤하고 목마른 시간이라 주님께서는 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유의할 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30년 동안이나 복쪽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던 주님을 향해 어떻게 이런 말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1-52).
물론 사마리아 여인과 주고받은 대화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된 줄 압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의 잘못된 편견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은 중대한 과오를 낳을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보고 느낀 것입니다.
[낙지는 낙지로 보여야지]
사람마다 외모가 다름같이 취향도, 구미도 가지가지다.
본래 내게는 입맛을 가리지 않고 산다는 것이 큰 복이라 생각된다.
고생하던 옛날을 생각하면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음식도 선입관이 영향을 미친다.
빨판이 쩍쩍 붙는 낙지를 보고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는 양
질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나에게 낙지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묻는다면
먹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은데,,,.
주님의 전도 방법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회개하고 나를 믿으라 내가 곧 메시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평범한 대화로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먼저 그 여인의 잘못된 편견을 바로 잡고 마음 밭을 경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건에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전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돌짝 밭, 길가 밭, 가시떨기라면 열매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짝 밭은 돌을 제하고, 길가라면 개간을 하고, 가시떨기는 가시를 제해야 하지요. 그 후에 알곡을 뿌려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수확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물론 주님께서 유대인이라는 어떤 표식이 몸에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행하는 그 일정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편견을 버리고 지극히 작은 소자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성도되기를 소원합니다.
5. 하나님의 선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생각해 보면 물이 문제가 아니지요, 누가 누구에게 구해야 할 입장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명이 있기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사명 때문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디든지 또 누구에게든지 찾아갑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도 귀하기에 찾아가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요4:10)
지금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왜 몰랐을까요?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의심의 안개를 걷어 버리십시오. 잘못된 선입관념도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히 가까워 지금 이 자리에, 또 내 마음 속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여인의 간구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1-12).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선한 목자와 양의 대화요, 죄인과 구주의 대화입니다. 여기에서 아쉬운 것은 아직도 주님과 진정한 대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에 속한 것인데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그 여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은 대화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세속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입니다. 우리가 생수의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의 생활을 계속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곧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앞길은 생명과 영광에 이를 줄 믿습니다.
7. 네 남편을 불러오라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16).
사마리아 여인으로서는 뜻밖의 일로서 그것은 감추고 싶은 수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는 인간적인 가면에서 벗어나 주님과 진실한 대화를 찾게 됩니다. 진리는 외식을 배격합니다. 죄인이 스스로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 진실이 싹틀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4:17).
이 말은 일반사람이 들었다면 그가 처녀이거나 과부로 들릴 수 있으나 사실은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를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4:17-18).
여기서 그 여인의 태도는 돌변하게 됩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의 숨겨둔 과거를 거울같이 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비로소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4:19).
이제 주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또 여기서 복음의 접촉점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올가미로 삼을지라도 주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를 영생 길로 인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 참된 제사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
주님께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차등을 두는 것은 혈통이 아닌 진리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곧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한 메시아의 구원으로, 이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3).
진리를 알지 못한 경건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제사도 의식에 치우칠 뿐입니다. 진리를 알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요, 또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4:25-26).
그 순간 사마리아 여인의 눈과 귀는 번쩍하고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단순한 유대인의 한 남자가 아닌 나를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외모가 달라져서 그럴까요? 변한 것이 있다면 그 여인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외쳤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이 여인의 외침 소리에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9-30).
수가성 우물가에서 일어난 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입니다. 오늘 이 큰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요4:39-42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도성이 순식간에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증인은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아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중요한 것은 죄가 많은 사람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렇다고 은혜를 더 받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고범죄 곧 알고 짓는 죄가 되므로 회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또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1. 다섯 남편을 두었던 여자
하나님께서는 육 일동안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지으신 후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또 여자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은 꾸미지 않아도 예쁘지요. 그런데 연인이 생기면 더 예뻐지는데, 남녀의 만남으로 행복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에 대한 노래입니다.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아4:12-16).
그런데 잘못된 만남은 불행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성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을 깨뜨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것을 그림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통해서는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어떤 여인을 보았는데 저의 눈에도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세 번째 결혼했는데 씨 다른 세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굴 값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4:18).
그녀는 지금까지 행복을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찾다 보니 다섯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지금 있는 남자도 남의 남의 남자이니 대단한 여자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거기에 행복이 있었을까요? 수치요 불행일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죄 많은 여인을 주님께서 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복 일로서 한 사람을 암흑에서 광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비천에서 존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화시켜주신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결코 우연이나 요행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죄 많은 자를 찾으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우리 모두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사유의 은혜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2.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
사람은 역경과 도탄이 닥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좌절하고 낙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디딤돌로 삼아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믿음의 사람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메시아를 알게 되었고 또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4:25).
이것이 메시아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신앙이요, 주님께서 그 신앙 받아주셨습니다.
이는 빈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일과 같이 너무도 극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너무도 귀중하였기에 주님께서 제자들이 음식을 권유했을 때 그것을 삼가시면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2-34) 하셨습니다.
여러분! 한 생명을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주님의 공생애 삼 년에 죄 많은 한 여인이 변화 받은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생명과 구원의 역사는 학벌과 재물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혜받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예수님을 증언하는 믿음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5-38).
무슨 말씀일까요? 이스라엘 나라는 보리 파종을 시월 중순에 하고, 사월 중순에서 오월 말에 수확하게 되므로 그때는 십이월 중순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이므로 십이월에서 이월 사이에 비가 오는데 식물들은 그때 생기를 얻어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푸르른 벌판을 보시며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자연 그 자체일 뿐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눈에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신앙의 안목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 사명에 불타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이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 밖에서 이미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전도자의 역할
2) 동일한 복음의 사역자라 할지라도 바울과 아볼로같이 임무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학설입니다. 그 외에도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① 뿌리는 자는 구약의 선지자요, 거두는 자는 주님이시다. ② 구약의 밭에 주님께서 뿌린 씨를 제자들과 주의 종들이 거둔다. ③ 무명 전도자들을 통해 뿌려진 씨앗을 다른 사람이 수확한다는 설입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는 이스라엘이나 이방 할 것 없이 메시아가 오신 사실을 전해야 할 기회가 오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먼 장래에 임하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메시아가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여전히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힘입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에게도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는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계절과는 관계없이 지금 구원이 임했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8-29).
주님 만난 여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넉넉했습니다. 이는 고기배속에서 살아난 요나가 니느웨 도성을 향해 외쳤던 소리와도 같았고 이른 새벽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한 목소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평범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의 전도는 사마리아 도성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 여인과 같이 변화와 축복을 받아 복음의 증인 되기를 소원합니다.
4. 더 큰 확신을 얻은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께 나아왔던 무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므로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면서 말씀을 전하므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1-42).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유대인들은 삼 년 동안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사마리아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이 귀중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전해야 할 임무요, 사명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러한 일꾼을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6-38).
여러분! 분발합시다.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1:6).
지금은 깨어나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힌다고 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지 말고 모두가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가 제이의 사마리아 여인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켜 전 세계와 인류 앞에 빛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두 번째 표적
요4:46-54
주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4:4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고향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① 갈릴리 지방 ② 나사렛을 포함한 남부 갈릴리 ③ 유대 지방 등입니다.
예수님이 나신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요,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이고, 정착하신 곳은 북부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이므로 그와 같은 추측이 모두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학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향을 갈릴리로 생각하고 그곳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유대 땅에서는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귀중함을 깨달고 은혜를 사욕의 도구로 생각하지 말고 거룩한 봉사와 헌신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아들의 병을 고침 받은 신하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6절).
혹자는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를 누가복음 7:1-10에 나오는 백부장으로 보기도 하나 내용을 보면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헤롯의 청지기 구사(눅8:3)로 말하기도 하고,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판관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2. 표적과 기사로 인한 믿음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는 34km의 거리입니다.
죽게 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않고 먼 길을 직접 왔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능히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귀중합니다. 또 그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호 비오스'라는 관사가 있으므로 독자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이 말씀은 죽어가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왕의 신하에게만 아니라 모든 갈릴리 인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표적 없이도 믿었으나 갈릴리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표적으로 인하여 믿는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믿는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허한 상태에서 믿기란 어렵지요. 그런데 문제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1-4).
표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 표적입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2).
중요한 것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표적은 시각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 거기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3. 믿음으로 일어난 역사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49-53).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인의 병을 위해 주님께 간청하였던 백부장의 믿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장소에 있어서는 백부장은 갈릴리 가버나움이었고(눅 7:1), 왕의 신하는 가나에서였으며, 백부장은 로마의 군대 장교인 반면에 본문에 있는 사람은 왕의 신하였으며,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으로 죽어가던 사람이었고(마 8:6) 왕의 신하의 아들은 열병으로 죽기 직전이었습니다(47;52).
치유 받은 동기는 두 사람 모두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역사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백부장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7-8) 하였고,
왕의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하였습니다.
주석가 벵겔(Bengel)은 "이 탄원자의 약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예수께서 꼭 오셔야 될 줄을 믿은 것이며, 또 하나는 죽은 후에라도 살리실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수넴 여인이 아이가 죽었을 때 선지자에게 찾아가서 그 사정을 이야기하므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명하기를,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왕하4:29)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하시가 엘리사의 명한대로 했어도 아이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왕하4:31).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넴 여인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왕하 4:30).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믿음이 보배입니다.
유럽의 섬나라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도버 해협에 해저 터널을 뚫어서 세 시간이면 런던과 파리를 왕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세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했던 것과는 다르지요. 홍해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라면 도버 해협에 뚫린 터널은 인간이 만든 것이요, 과학적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므로 하고자 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섭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2-3).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주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간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시공을 초월하시는 능력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0-53).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유대인들의 시간은 해 뜰 때 시작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지금 시간으로는 오후 한시입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이제는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일지라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점점 꿈같은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것을 기계가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인간 지능을 대체할 컴퓨터도 등장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괴물들이 직접 등장하고 있으니 인간이 기계를 제어할 수 없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우려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영생의 진리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발전된 의학으로 영혼을 해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 과학이 이처럼 발전하였어도 인간이 우주 공간을 다 정복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인간이 광속(光速)으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론대로 광속 여행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수억 광년을 캡슐에서 인간의 수명이 지탱할 수 있을까요? 캡슐 안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위에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그의 총명은 한이 없으십니다. 또한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미국의 우주인 고든 쿠퍼(Gordon Cooper)소령이 천구백육십삼 년 오월 이십일 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 중 자기가 우주 캡슐 안에서 지구 궤도를 열아홉 번째 회전할 때 지상의 사령탑에 보낸 기도문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 순간에 저를 포함하여 이 일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이 기도를 드립니다. 제게 이 비행을 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특전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놀랍고 황홀한 광경을 보게 됨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다 훌륭한 크리스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사람이 다투고 싸우기보다 돕고 일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옵시고, 우리가 끊임없는 연구와 발전을 통해 새로운 과학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옵소서. 또 우리 가족들에게도 인내와 용기를 주옵시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구하는 것은 항상 그치지 않아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사정에 따라 응답해주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54절).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는 표적이라면 우리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삼십팔 년 된 병자
요5:1-16
주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신 후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베데스다 못가에서 안식일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가 하나님께 돌리기 위함이요 다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곧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0-12).
그러므로 안식일은 한가하게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와 복음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영적인 사역을 해야 합니다.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 일동안 육신의 일을 하고 칠일에는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날에 복을 주사 누리게 하셨습니다. 복은 욕심을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땀 흘리고 수고해도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생의 종말이 실패로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27:1-2에 보면 '헛되다'는 말씀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우리는 허공을 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진리를 위해 살고, 영생의 유업을 이어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유대인의 명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절).
이 절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① 부림절(3월) ②유월절(4월) ③ 오순절(5월) ④ 나팔절 혹은 속죄일(10월) ⑤ 장막절(10월) ⑥ 수전절(12월) 등입니다.
그중에 어느 절기로 보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 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유월절이 세 번 나와 있으므로(2:13; 6:4; 11:55) 유월절 이 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3월에 지키는 부림절로 보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세 차례 유월절, 오순절(맥추절), 장막절(수장절)을 큰 절기로 삼아 예루살렘에서 지켰던 것을 보아 이 세 절기 중에 하나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절기를 아는 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2. 베데스다 못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2절).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병자를 낫게 하는 치유의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외에도 '행랑의 집' '감탄의 집'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기념 교회가 있는데 출입문에는 성경 본문이 여러 나라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천이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4절).
이것은 신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그러한 치유의 효과를 지닌 샘이나 온천이 많을 뿐 아니라 전설을 담고 있는 약수도 많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못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고침을 받았다는 설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고 또 어느 때까지 내려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삼절 하반절에서 사절 말씀은 고대의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주석가 헨드릭슨은 "이 문구에 대한 사본의 증언이 약한 사실을 보아서 물의 움직임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은 저자 요한의 소신이나 성령의 교훈이 아니라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만든 놋뱀을 이스라엘이 우상시 한 것같이 베데스다 못에서 일어났다는 사건도 지나치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3. 삼십팔 년 된 병자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절).
그 사람의 나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투병 생활 삼십팔 년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동안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어디인들 안 갔겠으며 무슨 일인들 안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라면 베데스다 못에까지 왔지만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모두가 병든 자들로서 남의 사정을 생각해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십팔 년이 아니라 거기서 생을 마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병든 자의 서러움은 병들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욱이 살아날 기력을 잃은 채 죽을 시간을 기다리는 상태라면 더 비참할 것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큰 불행은 죽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상계동에 있는 한나 양로원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들의 평균 연령이 팔십이 세로 연세도 높지만 그보다 보호자도 없이 생계가 막연한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행복자"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있어도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여생을 보내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 모두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거기 들어오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안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한나원에 들어오면 신앙생활을 안 할 수 없게 되어있었습니다. 신앙이 작은 복으로 생각되십니까? 천만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영생의 복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귀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달을 때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불가피합니다. 또 그로 인해 공포와 불안에 쫓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죽어가는 심령이 있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4. 주님의 치유 방법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그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큰 소원이 있을 수 없지요.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내 사정을 헤아려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손길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다 할지라도 사람의 위로와 동정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마8:17).
구원의 주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 사람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인간적인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이는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먼저 들여보내주소서 라는 호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만일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믿음이 아닌 인간의 말이었다면 그 말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희롱하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서른여덟 해나 병들어 고생하던 그 사람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억할 일은 그 사람이 이유 없이 고생한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병든자를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병들어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유의 은총과 함께 강건해지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5. 안식일과 병 고치는 문제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참뜻을 망각하고 외식주의로 전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총 삼십구조 이백삼십사 항에 달하는 법칙을 제정해 놓았는데 그중 육조 일 항에 "누구든지 안식일에 공중 장소에서 개인주택으로 물건을 운반하는 자는 그가 부주의하였으므로 그의 죄로 인해 제사를 드릴 것이요, 만일 고의로 했으면 그 몸을 쪼개고 돌로 칠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병자를 상에 누인 채 운반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병상 침대만 운반하는 것은 노동의 죄로서 금했던 것입니다. 물론 안식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므로 엄히 준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의 의미와 그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참된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에 있다면 안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요, 대속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을지라도 믿음으로는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가려서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어가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는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도리어 안식일을 범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
유대인들의 위선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병이 나아서 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면 무엇이 옳다는 말일까요?
그 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을 박해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죽이려 하였을 뿐 아니라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6-18).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7). 위선과 외식주의 자들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믿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은혜와 구원의 종교입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병 나은 사람에게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1) 그 사람이 지금까지 고생한 것은 당연한 죄의 보응이요,
2) 다시 죄를 범하면 더 심한 보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사는 자임을 알았다면 주의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육신이 연약하여 고생하는 성도로부터 "목사님, 제 몸이 이렇게 안 좋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라는 표시이니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 일이 있습니다. 전도자 바울에게도 일평생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바라는 은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를 소원하십니까? 주님의 손길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로 불만을 해소할 수 없어서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연한 보응이요,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명심하십시오. 우리 모두 영원토록 은혜 가운데서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 멘 -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요5:17-23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 일로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했다고 박해하자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므로 내가 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폭탄적인 발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육일의 사역을 마치신 후 제 칠 일에 안식하셨고 또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주셔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으니 그날을 지켜야 마땅하나 유대인들은 외식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의할 일은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므로 안식의 필요성을 따라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영과 육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나 체력의 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 곧 영원한 안식은 구원이 완성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8-10).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일 장에서 육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장에서는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사역이 요한복음에서는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3).
이는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사역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는 단순히 피조물을 관리 보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생명사역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을 구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순종하여 제물이 되심으로 대속의 은총을 완성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이룩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손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구원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일이 어느 때까지인지 아십니까? 마지막 심판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구 종말까지라는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일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통해 우주만물의 운행을 주관하십니다. 그 일이 중요하나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은 우리를 대속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구원 사역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아야 할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주의 사역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외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안식일에 병자를 구원하는 일과 귀신들린 자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주님께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일의 젊은 신학자 본 훼퍼의 말입니다. "은혜를 값싸게 받으려는 것이 교회의 원수다. 은혜가 비싼 이유는 하나님이 아들을 댓가로 희생한 것이기 때문이요, 우리를 비싸게 사셨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 모두 진리의 대열에서 생명과 구원 사역에 더욱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주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절).
여기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토록 미워하고 또 죽이고자 한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그 첫째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일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독생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1-3).
진리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4-38).
그런데 유대인들이 나타난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의 교만으로 예수님을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요8:48-49).
여러분! 예수님을 감히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다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천하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경배하면 모두를 주겠노라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마음을 낮추시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엎드려 경배드리고 그 이름에 합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3. 하나님과 아들이 동등한 이유
1) 근본이 동일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2:5-6).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으나 하나님과 근본이 동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조물주이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이 진리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허물진 자들이요,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구주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0-21).
2) 심판권이 동일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절).
이 말씀을 깊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개인적인 심판이나 종말적인 심판이 모두 아들 되신 그리스도에게 일임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는 구원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지만 전 세계에 항공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입국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탈출한 북한 벌목공을 비롯하여 공산 치하에서 견디다 못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선을 넘어 온 사람들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핏줄이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색출하여 형벌을 가해야 하는 간첩들도 있습니다.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영생은 주님 품에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서 5:12).
3) 영광이 동등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절).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이요,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유대인들을 따를 자가 있을까요?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이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그러한 믿음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받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선지자의 예언에는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이 믿음을 가졌는가 하면 아브라함과, 다윗도 가졌습니다. 메시아의 언약은 너무도 중요하므로 이스라엘의 소망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귀의 아비요 자식으로 전락 된 이유를 보십시오. 오신 메시아를 불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뿐 아니라 아직도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수하는 율법이 과연 올바른 믿음을 따라 지키는 것이라 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은 구원의 진리와 무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도덕군자가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씀이 있으면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있다고 하겠으나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며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보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면서 성전 모퉁이에 눈물짓고 회개하는 세리나 창기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대속의 은총을 힘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위선의 가면을 던져버린 바울을 보십시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데, 그처럼 큰 죄가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은 보혈의 능력으로 사유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할 줄 모르는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의는 위선일 뿐입니다. 주님과 관계없는 율법은 마귀의 올무가 될 뿐이요, 주님과 무관한 구원은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절).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생명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에덴에서 축출된 죄인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유해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이 사역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한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두가 불타는 사명감으로 생명 사역에 동참하시기 소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사역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영력이 솟아오를 줄 믿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사명을 따라 전도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사명자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소멸하지 마십시오. 기회를 져버리면 무서운 책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 어떠한 장애가 있습니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있습니까? 소망의 눈으로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충성된 믿음으로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과 함께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경기도 광명시에 가면 경향탕이라는 온천이 있습니다. 온천 주인은 경향 교회의 권사인데 하나님의 일을 주업으로, 자기의 일은 부업으로 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중 사우나를 하기 위해 땅을 구입해서 지하수를 개발하던 중 질 좋은 유황천을 발견하여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돈 많은 부자들이 많지만 그 권사님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부자라면 수전노에 불과할 뿐 물질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TV를 비롯한 신문 사설과 사회면에는 한 패륜아가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를 마흔 번이나 칼로 찔러 죽이고, 기름을 부어 불태운 사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또 이유 없이 대학생이 남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모두가 이성을 잃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청지기의 신분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생명과 구원 사역에 충성을 다하여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두 가지 부활
요5:25-29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일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둘째는 그 심판에 따라 영원히 그렇게 존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말하면 뇌기능이 정지되고 심장과 호흡이 멈춘 상태로서 그때부터 생명 세포는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육체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은 내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세를 의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대비책도 세울 수가 없지만, 인간은 내세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합니다.
1. 죽음의 문제
죽음을 도피처로 착각하고 심지어 도박하는 있는데 그들은 사후에 있을 심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죽음이요, 가장 불행한 일도 죽음입니다. 또 죽음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죽음의 종류
1) 영적인 죽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러한 엄명에도 불구하고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른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 축출되고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죽음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비진리를 진리로 위장하고 접근하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약점을 알고 있으므로 오늘도 동일한 술책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해지려는 꿈을 통해서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교만이라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상과 꿈은 크게 가지되 죄인 된 근본을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도리를 저버리지 말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
죽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축출되었으나 육신의 생명이 있을 때까지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명이 귀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지막으로는 독생 성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사는 기간이 사유의 은총과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천구백팔십팔 년 미국 전 대통령 조지 부시의 선거 위원장이었던 '리 앳 워터'씨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살았는데, 그는 천구백구십 년에 뇌암 진단을 받고 일 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삼십팔 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투병 중에 하나님을 찾은 후 지금까지 허황되게 살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죽기 한 달 전에 라이프지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보다 나은 부귀와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옳습니다. 빈손으로 온 인생,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그날은 그처럼 요란하던 세상도 고요에 잠길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입니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6-8).
인생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귀중합니다. 허무에 매여 종살이하다가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구원받을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지금도 진리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의 은총을 힘입기 소원합니다.
3) 영원한 죽음
영원한 죽음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불신하므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받는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사후에는 기회가 다시없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오직 무서운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천국이 영원함과 같이 지옥도 영원합니다. 천국의 영광이 극한 것같이 지옥의 형벌도 극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여러분! 저주받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영벌 받아 마땅한 죄인 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귀중함을 알았다면 주님 앞에 엎드려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2 심판하는 권세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6-27).
주님께서 부여받은 심판권은 절대적인 권세로서 영원한 권세입니다. 국제 협약에 의해 정치적인 망명을 허용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허용하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동독 공산주의 독재자 호네커는 동·서독을 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소련으로 망명을 하였다가 소련이 붕괴되므로 다시 체코로 가서 팔십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그가 독일에 있었다면 법정 재판을 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는 도피 행각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심판은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영원한 비밀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죽은 지 이십 년이 된 해골에서 DNA를 추출하여 사람을 찾아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2-14).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27절).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그의 낮아지심과 죽기까지의 복종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과 화목 제물로 연합을 이루시며, 죄인에게 주의 이름으로 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믿는 자는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지만, 불신자는 영원한 불못입니다.
3. 두 가지 부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
심판권을 행하시는 주님은 생명과 사망 모두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명하실 때는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막5:41)는 말씀에 죽었던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눅7:14) 하실 때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상여에서 일어났고,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하실 때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일어나 나왔습니다.
또 주님은 죽은 자들을 둘째 심판에 세우십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 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주님의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어. 그 앞에서 만물이 복종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마8:27).
성난 파도를 잠재웠을 때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유의할 것은 주님의 음성에 두 가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생명의 부활
육신으로 받는 은혜와, 부활하여 누리는 영광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육신으로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받는 은혜요, 부활의 세계는 완전한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생명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는 가장 큰 영광의 날이 됩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생명의 부활로 그 영광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은 선한 열매 맺게 되는 그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있기 전에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험적인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의지, 곧 그리스도의 인격이 형성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거기서 새로운 삶이 펼쳐지고 주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만 맺어집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성령의 열매는 자신의 의지나 결단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맺는 것입니다. 또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열매 맺는 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불꽃 같은 눈앞에서 핑계나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은혜로 살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진실한 믿음이요, 충성된 믿음이라면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질 줄 믿습니다. 모두가 선한 사업에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열매는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병든 심령을 위로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무익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은 천국에 쌓이는 보화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면 더욱 충성을 다짐해야 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헌신하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제물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자는 주님 오시는 그날에 면류관이 더욱 빛날 줄 믿습니다.
2) 사망의 부활
악인도 부활합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생명과 사망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악인은 존재의 악이요 불행이므로 그날에는 살아온 과거를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세상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존재로 살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빛의 자녀들보다 더 유명한 인물일 수도 있고,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잘살았던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한 자연의 혜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특별 은총, 곧 구원의 복음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교만하여 복음을 멸시하고 살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 월등히 많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멸망 받을 인생들을 보시고 이 땅에 인생 지으심을 한탄하사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한 심판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므로 영원한 심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큰 물의를 빚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마약 범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인이 되기 위해 그런 것이 필요하고,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할까요? 스스로 자멸에 이를 뿐입니다. 또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자들 중에도 그런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보는데 그 이유는 인기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의 말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연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님에게 불친절한 데 있었다. 생활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동성연애자로 창조하셨다. 동성연애는 당신에게 주신 은사이다. 그로 인해 결혼한 남녀들은 이혼을 하고, 자식들을 버리고 동성연애 파트너를 찾도록 하라."
뿐만 아니라 오늘에는 에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체족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세상에서 참된 이상과 진실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직 진리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아 멘 -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
요5:39-47
현대는 PR 시대입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신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야 하므로, 엄청난 광고비를 투자하여 PR을 합니다. 특히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 더 예민한 것 같습니다. 이는 인기도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 또 어떻게 알려지고,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이유를 보면, 그들은 예수가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왔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헤롯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49-52).
이렇게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5-36).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37-38).
이렇게 주님께서 메시아임을 증언하셨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못했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더 큰 불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이 진리의 원수로 전락되었다는 것입니다.
1. 영생의 진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
여기서 말씀하시는 성경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성경은 영생의 진리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고전이 있고, 철학, 과학, 역사, 문학, 교양서적들을 비롯하여 각기 전문분야를 다루는 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에 출간하는 책만 읽는데도 백칠 년이 걸린다고 하니 엄청난 불량이지요. 사람은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됩니다.
"사람이 삼일만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난다"(안창호)고 했습니다. 그처럼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세상의 지식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과학도들이 외치는 진리나 철학도가 외치는 진리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영생의 진리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역사와 철학이 있습니다. 또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우리는 선지, 예언서를 통해서 깊은 영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지상에서 성경만큼 많이 출간되고 보급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세계 언어 1/3정도는 번역에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아직도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복음의 풍년이 들어 권태증에 빠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도 중에는 보리 비빔밥을 잘하는 분이 있어서 제가 한 번씩 먹습니다. 사오십 년 전에는 쌀밥 구경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보리밥만 먹던 때에는 쌀밥 먹기를 그렇게 소원했기에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이 되면 쌀밥을 먹을 수 있어서 매일 생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리밥 구경하기가 옛날에 쌀밥 구경하는 것같이 되고 보니, 이제는 보리밥이 도리어 건강식으로 찾는 별미가 되었습니다.
진리의 권태증을 주의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항상 풍족할 줄 생각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같이 내일을 준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감의 말씀이 숨겨지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사무엘이 어릴 때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범죄한 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는 눈이 밝아져서 은혜와 진리 충만하시기 소원합니다.
2. 성경과 메시아
‘성경을 연구한다’는 의미는 보석을 찾는 광부들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고, 새끼 잃은 사자가 사냥꾼을 추적하여 헤매는 뜻으로도 해석하며, 또 냄새를 따라 사냥감을 추적하는 사냥개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더 깊이 상고하여 영생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진리는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찾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접근하였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주님을 보는 눈이 가려진 이유는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이렇게 성경을 일깨워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지각이 열려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증언하는 말씀이요,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요,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역사요, 모든 서신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그리스도의 편지요, 계시록은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씀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를 알고, 성경을 통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3. 모세율법의 정죄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절).
이 말씀은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하신(34절) 말씀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는 그처럼 기뻐하신 주님께서 왜 사람의 증언을 취하지 않으시고 또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리라 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바로 알았다면 당연히 주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절). 유대인들은 이렇게 율법을 내세우면서도 비진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이 말씀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를 통하여" 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요 10:4)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45절).
이는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심판권은 주님께서 행하시는데 공의의 율법으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등지는 일은 심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인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공공의 적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절).
성경을 진리로 믿으신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진리의 지식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 아멘 -
남은 조각을 거두라
요6:1-1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4절).
오병이어의 기적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있었던 일로서, 사복음서에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마14:13-21; 막6:30-44; 눅9:10-17; 요6:1-13).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2절).
복음서의 기록으로는 그때가 예수님의 주변에 최대의 군중이 모인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표적이라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또 사람은 인위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을 때에 배후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육신의 욕심에서라면 이방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욕심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할 때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될 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1. 갈릴리 바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1절).
이스라엘의 유일한 젖줄인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여러 이름을 살펴보면, ① 긴네렛 해변(민34:11) ② 게네사렛 호수(눅5:1), 이것은 포로에서 귀환한 후 불려진 이름입니다. 그 후 유대인들에게는 갈릴리 바다로 불렸고, 그 지방을 갈릴리 지방이라 했습니다. ③ 디베랴 호수(본문과 요21:1),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의 황제 디베랴를 기념하기 위해 호수 서편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한 데서 생긴 것이라 합니다.
2. 빌립을 시험하신 주님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5-6).
마귀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축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시험은 물리쳐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하나님 왜 이렇게 시험이 많습니까?"하고 몸부림을 치는 일도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내가져야 할 십자가라면 인내해야 합니다. 불원간 더 큰 영광이 임할 줄 믿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그 당시 한 데나리온은 품꾼이 받는 하루의 품삯입니다(마 20:9). 그러고 보면 이백 데나리온은 상당한 액수인데도 무리를 먹이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백 데나리온 정도면 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일은 오백 데나리온이라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목회할 때 교회의 재정을 맡은 집사님이 흑백 TV를 구입하여 식구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즐기는 것을 보고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때 비하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가졌는데도 만족을 모르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 4:13).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찾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러시아 벌목공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루에 17-18 시간씩 일을 하면서도 한 달에 우리 돈으로 약 이만 원 정도 밖에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남한으로 탈출 온 그들을 우리는 따뜻한 동포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북한에 비해 지금 우리의 환경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한데도 만족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전히 임금 투쟁과 노사파업은 그칠 줄 모르고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사치와 향락, 퇴폐문화가 더해 가는 실정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실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마다 이방을 채찍으로 징계했던 것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빌립의 방식대로라면 우리나라도 당연히 핵무기를 생산하여 북한과 대치해야겠으나 핵무기로는 우리가 참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의 은혜로 해결 받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3. 안드레의 제안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한 소년이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내놓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군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내어놓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콩 하나면 절반씩 나눠 먹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 물고기 두 마리는 작은 생선이요, 보리떡은 가난한 서민들의 양식이라 하니 그것을 누구에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마14:15-18).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안드레와 빌립은 해결할 수 없었지만 주님은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도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4.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10절).
이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숫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축사하실 때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11절).
주목할 것은,
1)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일어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줄 믿습니다.
2)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원대로" 얼마나 벅찬 은혜입니까? 우리들도 마음에 품은 소원이 다 있을 줄 압니다. 그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 (윌리암 케리)
내 수중에 있을 때는 오병이어에 불과하지만 주님께서 축사하신 후에는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앞장서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12-13).
은혜의 잔치는 항상 넉넉합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마다 버려지는 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그 믿음 때문에 귀신에게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홍포 입은 부잣집에서 버려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주의 복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정에서도 음식 찌꺼기라고 함부로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고 받은 음식을 왜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합니까? 이는 복을 욕되게 하는 죄악입니다. 교회에서 음식을 드시는 분들은 더욱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복을 복인 줄 모르고 대하면 복이 내게서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은혜로 사는 몸,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무리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절).
이는 실로 귀중한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안식일에 병 고침을 보고 율법을 범했다고 하였으나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다급한 사정이 있는 무리들은 주님을 찾았고 그로 인해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
옳습니다. 이는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고 군중들은 그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그들은 세속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3-5).
유의할 것은 세속의 왕국과 진리의 왕국은 근본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이 중요하듯 경제 여건이 중요하지만 경제 발전으로 진리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하나님의 나라는 건축업자나 설계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룩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부정이나 부패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섬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민생 문제 해결해 주시는 지도자로만 생각한다면 오늘도 나를 떠나서 산으로 향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썩어질 양식은 영생과 무관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성도 되어 땅 위에 진리의 나라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두 가지 일
요6:22-30
우리는 본문에서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무리를 외면하고 산으로 올라가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를 구분할 줄 알고, 진정한 복이 무엇이며 또 성공의 척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기적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16-18).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마14:22).
이렇게 제자들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주님께서는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만일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그 호수를 건넜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선한 목자 주님께서 양들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 풍랑 일어난 갈릴리 바다
갈릴리 바다는 해저 200m가 되는 낮은 호수이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있기 때문에 밤이 되면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탓던 배는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그때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유령이라"(마14:26)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이 풍랑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서 겪는 거친 세파의 시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역경이 있을 때에 낙심하지 말 것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음성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 사건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자는 물 위로 걸으신 것이 아니라 언덕 위로 걸어 오셨는데 달빛에 그림자가 비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십여리 쯤 갔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그림자가 어떻게 비쳐질 수 있으며,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물 위로 뛰어내린 것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던 일과 주님의 손길에 의해 건짐을 받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은혜를 힘입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불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이성의 눈이 아닌 믿음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배는 곳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면 가는 길이 형통할 줄 믿습니다.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젊은 여인이 임신 중에 병이 들어 청량리에 있는 성 바오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허파에 물이 고여 삼 일을 넘길 수가 없다는 진단이 내려 급히 심방을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산모가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그 영혼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 했는데, 놀라운 일은 그 순간에 "딸아! 안심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온 후에 그 환자는 즉시 깨어나서 산소 호흡기를 떼고 밤이 새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죽을 때가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했으나 삼 일 후에 건강을 회복하여 자기 발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도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마14:27).
3) 물에 빠진 베드로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이 시간 우리는 이천 년 전에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에 '만일'이라는 말은 마귀가 시험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메시아를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자 즉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실제적 사건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
그때 베드로가 책망을 들은 것은 물 위로 뛰어내린 일로 인해서가 아니라 의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뛰어내렸다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지요.
성도 중에 마음이 우울하여 항상 걱정하는 분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옛날 병이 다시 재발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기도하십시오."
"목사님! 처음에는 기도하라는 말씀이 그렇게 듣기가 싫었는데, 이제는 그 말씀이 싫지 않네요."
"싫게 들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믿음이 작은 자는 성난 풍랑을 보지만 믿음이 큰 사람은 풍랑 속에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란 풍파가 일어날 때 "이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갑니다" 찬송하며 주님께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같이 풍파를 보고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풍랑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주님과 함께하는 길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라도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21절).
이 말씀을 기적으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빨리" 즉 "오래지 않아서"라는 의미입니다. 순식간이라는 말이 아니라, 순탄하게 갈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곧 싹이 나오나"(마13:5)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막4:17).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소원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찬430)
2. 가버나움으로 찾아온 무리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24-25).
어찌 보면 그들은 대단한 열성분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보셨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있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주님을 찾아온 그 무리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바로 따르는 길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배불리 먹었던 자들이요, 또 그로 인해 주님을 찾아온 무리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무리를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그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았고, 그 떡을 배불리 먹었으나 영생의 양식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합당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시내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와 같이 오늘도 그렇게 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바로 알고 영생의 양식을 찾았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주님은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썩어질 일과 영생의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주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영생이 아니므로 돌아온 사마리아 문둥이에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주님을 찾는 발길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찾는 발길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두 가지 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27절).
'두 가지 일' 즉 하나는 썩을 양식을 위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영생의 양식을 위하는 일이므로 영생의 양식 얻기를 원한다면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때 무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들은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일'은 원어에 단수로 되어있으나 무리가 말한 것은 복수입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의식에서 생각하였으나 주님은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육신의 일이요 하나는 영의 일이며, 하나는 썩어질 일이요 하나는 영생의 일입니다. 육신의 일은 이것저것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또 끝이 없으나 영의 일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이 한 가지 일로 세상에 오셨고 생을 마쳤습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도다”(요7:21).
기억하십시오.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랑하던 부자 청년은 한 가지 부족하여 영생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막10:21).
전도를 하다 보면 "나는 바빠서 예수를 못 믿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못 믿을 정도로 바쁘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며, 거기서 얻는 소득은 또 무엇일까요? 결국은 썩어지고 없어질 육신의 일일 뿐입니다.
이렇게 헛된 삶을 위해서 영광된 삶을 외면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No time for GOD" 하나님을 위한 시간이 없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시사 주간지에 실린 표지 기사입니다. 이를 요약하면, ① 물질적 풍요 속에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요, ② 문명의 발달로 인해 종교적 신비에 대한 흥미가 상실되었다는 것이며 ③ 교회에 나가 예배드릴 시간적인 여유가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주님을 찾아온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과연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절).
영생의 참된 양식과 음료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생의 양식과 참된 음료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이 영생의 양식, 참된 음료가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요셉의 아들
요한복음 6:38-46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메시아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메시아로서 가장 큰 표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요1:14). 그런데 임마누엘의 주님을 보고도 영의 눈이 어두워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올바른 신앙의 안목을 가졌다면 유대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요셉의 아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교만에서였던 것입니다.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불의와 죄악을 따라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교만한 자는 주님께 경배를 하지 않았으나 겸손한 자는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1. 주님이 오신 목적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8-39).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면서 지위와 영광도 동등합니다. 그런데 성자이신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복종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본인이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고 가족이 나오는 분의 수연 예배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은 집사요, 자녀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도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물었습니다.
"저를 청한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지요. 본인이 쾌히 승락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겠습니다."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 생각하고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생명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정성과 눈물의 기도가 필요함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주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죄인 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 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운운하는 것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마귀의 자식으로 저주받은 까닭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메시아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천구백구십사 년 유월 십이 일 미국 뉴욕에 있는 킨스 공동묘지에는 검정색 모자를 쓰고 정장을 한 유대인들이 각국에서 모여들었는데 구십이 세에 돌아간 유대교 칠 대 랍비 메나킴 멘델 슈니어슨의 장례식을 위해서였습니다. 또 그날에 거리에 나와 과일과 맥주를 들면서 축제를 열었는데 이는 랍비 슈니어슨이 살아있을 때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였으므로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승천했으니 부활하여 자신들을 이끌고 이스라엘에 입성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코란경을 가지고 있는 회교나, 유교, 불교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독선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종교다원주의 모더니즘이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독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생 얻을 진리는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그러므로 구원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2. 영적인 구원과 영생의 부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40절).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이 본문에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39,40,44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두 가지의 구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영적인 구원
이는 예수를 믿을 때에 땅에서 얻게 되는 중생의 은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중생의 은혜가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생명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때 얻게 되는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우편 강도에게 하신 말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이것은 이천 년 전 골고다에 못 박힌 강도만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2) 영생의 부활
이는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시기와 형태가 중요합니다.
부활의 시기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날을 본문에서는 "마지막 날"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일곱 번 반복하고, 마태복음 10:15에는 "심판의 날", 고린도후서 1:14에는 "주 예수의 날", 요한계시록 6:17에는 "큰 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세속의 역사는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데(계21:1), 그날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날이요,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는 날로서 악인은 영벌을 받게 되고 의인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또 부활의 형태가 중요합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계적으로 톱뉴스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S권사님으로부터 아들 K집사가 육 년을 고생하던 다리가 사십 일 새벽기도 후 안수기도를 받을 때 은혜 받고 방언이 터지면서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경성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육체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어질 것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같이 우리도 홀연히 변화를 받아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될 줄 믿습니다(시103:5; 고전15:52).
3. 유대인들의 불신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1-42).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보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사람을 외모를 보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이 왜 그리스도를 불신했습니까? 예수님을 외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게 인간적인 허물이나 약점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안목으로 사람을 알고 또 피차에 존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영생을 얻을 자격
1)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이끄시는 자는 어떤 악인도 믿지 않을 수 없다"(어거스틴).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지까지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칼빈).
"나는 나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 나의 주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지만 성령이 복음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믿는다…그리고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자들을 일으키사 예수를 믿는 나와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루터)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기의 공로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
이사야 54:13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와 유사한 말씀을 미가서4:1-4에서와 예레미야31:34에도 있습니다.
성도의 가정을 심방 할 때 마음이 뜨거웠던 일이 있었는데, 십사 년 전에 제가 축호 방문 전도로 열매 맺은 가정입니다. 딸만 일곱으로 그때는 불교신자였는데, 지금은 멀리 시집간 한 가정을 제외하고 모두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은 성령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인간의 무지로 마음이 완악해져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불신한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주님의 때
요7:1-13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을 때, 제가 임진강을 건너 500m 전방에 철책을 두고 있는 최전방 부대를 위문한 일이 있었는데 저녁 식사 때에 부대장이 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해성 교회가 과연 영력이 큰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인데요?"
"해성 교회가 전방부대에 온다고 하니 김일성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으니, 다음에 오실 때는 김정일이 또 죽을 것 같습니다." 농담인 것 같아도 믿음 있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1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였던 것은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5:18)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죄가 되지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그런데도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의식하여 유대로 가기를 거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불가피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감수해야 할 때가 있고 피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정하신 뜻을 다 이루시기까지 삼 년 동안 복음을 전하시고 그 후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바울도 밤중에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피한 때가 있었는가 하면, 죽음을 불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때와 시기를 바로 알고 주님의 뜻을 이룩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초막절의 유래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2절).
성경에 있는 유대인의 절기와 이방인들의 절기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에서 명한 절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절기이지만, 이방인의 절기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므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에는 조상에게 제사하는데 돌아가신 조상이 신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범신론 자가 있는가 하면 하늘의 천체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초막절은 '천막'과 '세운다'는 말의 합성어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지냈던 일을 기억하여 티스리(양력 10월)15-22일까지 팔 일간 무성한 잎을 지닌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감람나무 가지를 가지고 초막을 지어 거기 거하면서 지킨 절기입니다(느 8:15).
그때는 수확기로서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장절로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며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었지만,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억하여 초막에 거하면서 인내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 비해 우리나라의 복음 역사는 이제 한 세기를 넘어섰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신 구원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8·15 광복은 유월절에 비할 수 있고, 6·25는 초막절에 비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게 하였고, 우리는 미국을 통해 구호물자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겪은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기도하고, 열국의 제사장 나라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형제들의 권유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3-5).
이는 형제들이 예수를 유대로 가서 세속의 나라 이루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자리다툼을 하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3. 주님의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절).
여기서 생각할 것은 "주님의 때" 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때를 중요시합니다. 때가 이르러 세상에 오셨고, 공생애도 때가 이르러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때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그 일입니다. 또 때가 이르러 부활 승천하시고 때가 이르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때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때와 주님의 때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십시오. 너희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인간이 일할 수있는 기회, 즉 주님의 뜻을 준행할 수있는 기회가 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기뻐하시든지 그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그것이 내가 맡은 사명이요 또 내가 받을 상급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자 "우리 옷을 임자에게 돌려주자" 하면서 옷을 벗어 그 사람에게 입혀 주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우리가 누구의 옷을 빌려왔습니까?" 하니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께 빌려 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자가 임자요, 필요한 자가 주인이다. 만일 가져야 할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도둑이 되지만, 우리는 임자에게 돌려주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모두가 풍성히 열매 맺어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4.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는 이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절).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반드시 화평을 도모하되 불의와 타협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9).
주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 줄을 끊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았습니까? 십자가를 바로 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5. 유대로 올라가신 주님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8-10).
주님께서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과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하신 말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
1) 아직 올라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후에 간다는 뜻이다.
2) 그 순간까지는 성부의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 후 명령을 받고 가셨다.
3) 그때 올라가는 순례자의 대열과는 같이 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4) 유대인처럼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5) 아버지께서 예수의 마음을 변경시켰다.
6) 아직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모두 의미는 있겠으나 그중에 여섯 번째가 가까운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세상 사람들의 평가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2-13).
예수를 악평하여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리스도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 자 역시도 구원 받을 믿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행하는 일을 보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7. 예수의 교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4-15).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학벌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주님을 가르친 스승이 없는데 유대인들이 놀란 이유는 그의 교훈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주님의 교훈이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6-18).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나, 불을 토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사람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즐겨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니고데모의 변호
요7:45-52
이집트의 영자 신문 이집션 가제트지 천구백구십사 년 칠월 십일자 보도에 "신의 죽음"이라는 특별 기고입니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 하던 김일성이 통일이 되기 전에 지구상의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저세상으로 갔다…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북한의 무신론자들에게 영존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각심과 경외심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고집하는 북한이 그의 아들 김정일의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신이라면 죽을 수가 없고 죽어서도 안 되지요. 이집트의 피라밋 안에는 바로의 미이라가 잠들어 있으나 그리스도를 장사지낸 무덤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을 다녀온 어느 목사의 이야기인데 "중국에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얼마나 뜨거운지 찬양하는 시간이 보통 한 시간이었고, 교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면 세례받는 숫자가 보통 천오백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인구 오천만이 넘는 일개 성에 목사 열 사람이 안 된다고 하니 얼마나 영혼이 갈급할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줄 압니다. 이는 혹한 설이 물러가면서 만물들이 생기를 되찾아 소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왜정 시대와 6·25의 참상을 겪을 때는 교회마다 회개의 눈물이 있었고, 은혜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으나 오늘은 어떻습니까? 타성에 젖어 들어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책망 받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이 마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 선지자 요엘의 말씀대로 우리는 영적인 변화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배운 일이 없으면서도 그의 교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나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 것은 교만하여 예수님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요8:46). 위선과 교만은 무서운 죄가 됩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교권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을 무리 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같이 그들이 오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표적을 보지 못해 못 믿었을까요? 오히려 그들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는 것을 보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요12:10).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23절).
2. 예수의 출신 배경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2절).
이는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그들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식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이는 헤롯 앞에서 그들이 증거한 사실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4-6).
그런데 그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27절).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는 하늘의 징조와 천사들의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알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27절).
이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1-42).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로서 이 진리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8-29).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아는 것과 주님께서 아시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 그 이상을 알지 못했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고 또 그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곧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요10:38)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주님 가시는 곳에 이르지 못할 자들
그들은 한마디로 불행한 자들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34-36).
복음을 전할 때 안타까운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데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에게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같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사람들이 가는 길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가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의 진리를 믿으십니까? 이 진리 안에서 영생의 기쁨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4. 니고데모의 변호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5-49).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비해 아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예수를 달리 보았으나 아래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설득될 자가 아니지요.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유대인 중에는 1% 정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그들은 유대인들에게서 배교자로 낙인 찍혀 박해를 당한다고 합니다. 주님 당시에도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등장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주님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0-51).
물론 니고데모의 말이 그들을 설득하기는 불가능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주님을 위해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례식을 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이는 주님을 위해서 출교뿐 아니라 순교도 각오한 믿음이었습니다. 감사드릴 일은 주님을 위하여 바친 정성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진리를 변호하며 또 증언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8:1-11
전 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제15회 월드컵 축구는 브라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국민의 성원과 기대에 보답하려고 사력을 다했으나 십육 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 축구에서 느낀 것은 우리 선수들이 경기할 때는 국민이 그처럼 열광했는데, 외국 선수들끼리 경기를 펼칠 때는 그런 열기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결승전인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경기는 연장전까지도 득점 없어 승부차기에서 3:2로 브라질에 승리가 돌아가자 브라질 선수들과 그 나라 국민들은 온통 축제의 물결에 휩싸였는데, 패배한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우리도 저런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도 승패에 따라 이처럼 국민의 사기와 자존심에 엄청난 영향이 미치는데 영적인 전쟁은 비교할 수 없는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라 생명과 구원이 달려있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두고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로 죽을 죄인을 살려내는 승리의 한판입니다.
1.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요7:53-8:1).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고 안 하고 무방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기도 없이는 영적인 무장을 갖출 수 없고 영적인 무장 없이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7-18).
오늘도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기약된 무한 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
전능하신 주님이신데 기도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생애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바위산으로 예루살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안일과 타성에 젖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명을 가지고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즐겨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 중에는 결혼 후 십 년 동안에 이삭과 같이 백배의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꿈을 가진 사람이니 천 배의 복도 받으리라 믿습니다. 충성을 따라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여 믿음의 부자, 선한 사업에 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3-5).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현행범입니다. 그런데 왜 여인만 끌고 왔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판결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올무에 걸려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주님께 시험하고, 이제는 유대인을 앞세워 올무에 빠져들게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절).
그때에 주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 했으면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간음한 여자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렇다면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시면서 어떻게 간음한 여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사유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3. 땅에 글을 쓰신 주님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6절).
주님께서 글을 쓰셨다는 것은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땅에 쓰신 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야비함에 대한 서글픔을 기록했다.
2)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몸짓이었다.
3)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자들의 죄목을 기록했다. 추측할 수 있다면 세 번째가 가장 성경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이 말씀은 너희 중에 간음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극형에 처할 때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고 그 후에 청중이 심판하게 했는데, 이는 증인이 사실 여부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주님 앞에서 숨겨진 죄들이 양심에 소리쳐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8-9).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독기 서린 눈으로 정죄하던 무리가 어디로 갔을까요? 결국 그 자리에는 간음한 여인과 주님만이 남았습니다.
주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고 왔던 무리를 누가 사라지게 하였습니까?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피해서 떠날 것이 아니라 엎드려 회개하고 사유의 은혜를 힘입어야 옳지요. 그런데 그들은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도 사유함을 받으면 의인이요, 지은 죄가 작아도 그대로 있으면 죄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하였으나 주님은 우리를 허물과 죄악에서 사유할 권세가 있는 구세주이십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약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죄의 빛 흉악하나 희게 되리라
주홍 빛 같은 네 죄 주홍 빛 같은 네 죄
눈과 같이 희겠네 눈과 같이 희겠네"(찬255장)
4.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10-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정죄하던 무리들이 물러갔다고 해서 그 여인의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을 신판하시는 주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심으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은밀한 죄일지라도 사유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사유의 은총을 베푸실 때 죄에서 벗어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우리는 목이 곧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므로 끊임없는 유혹과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의 허리띠를 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옛 생활을 청산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았다면 이제는 영의 생각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여러분! 옛 생활을 청산하십시오. 아직도 미련이 있다면 그것이 내게 올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미끼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었습니까? 이제는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빛이요, 소금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펼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진리의 지식
요8:12-20
한 방울의 물이 이렇게까지 귀한 줄을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부에서 가뭄 대책을 수립하여 농민들을 돕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니 문제입니다. 기상 이변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심상찮은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도는 홍수로, 동남아와 호주는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빼앗아 간 재앙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지각이 있어야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
마지막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경종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회개하고 더욱 경성해야 하겠습니다.
1. 두 가지 빛
빛은 중요합니다.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암흑천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따뜻한 열이 있어 생명을 소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여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 공허와 혼돈이 사라지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빛은 중요합니다.
빛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한다면 하나는 자연 세계의 빛이요, 하나는 진리의 빛입니다.
1) 유형의 빛
고대 인류가 살았던 생활환경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 문명일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자연을 개발하는 능력입니다.
빛이 무한한 에너지원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개발하는 힘이 지혜입니다.
2) 진리의 빛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이 빛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렇게 빛 되신 주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영원한 어둠 곧 지옥입니다. 이 빛이 우리에게 비칠 때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진리의 빛은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두 가지 길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절).
주님께서는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시지만 인생은 모르기 때문에 철인들이 이것을 해결하려고 수천 년을 노력했어도 내린 결론은 모른다 입니다.
한 길은 진리의 길이요, 한 길은 육체의 길입니다. 우리가 어느 길로 가든지 선택은 자신에게 있으므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다면 후손에게 죄의 보응을 물려주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참상은 유례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신 메시아를 배역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보응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살아있어서 주후 칠십 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도피한 무리들이 맛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자살로 막을 내리면서 엘레아지르벤 야이르가 남긴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겁쟁이든 용기 있는 사람이든 예외가 없다. 우리가 그들의 노예가 되는 치욕을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의 아내들이 능욕을 당하고, 우리 자식들이 노예 생활할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지금 우리 손에는 칼이 있고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영광스럽게 죽음을 선택하자. 서둘러야 한다. 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넘겨주지 말고 목숨을 끊은 시체를 넘겨주자. 영원한 명예는 우리들의 것이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적군들로부터 받아내려고 했던 항복의 기쁨은 사라져버렸고,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뿌리 내려져 있는 귀품과 꿋꿋한 덕을 기렸으며, 거룩한 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로마군에 있어서 이 싸움의 승리는 빈껍데기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지만 남긴 흔적은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이성 없는 짐승의 길,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진리의 길, 영생의 길을 걷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절).
3. 공평한 판단과 율법적 증언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5-16).
유대인의 격언에 "홀로 판단하지 말라. 한 분 밖에는 홀로 판단할 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외에는 홀로 판단을 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라는 말씀에 대해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육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2) 지금은 판단하지 않는다.
3) 홀로 판단하지 않는다.
4) 그의 오신 목적이 구원하려는 것이니 판단하지 않으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판단한다는 주장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판단은 공평할 뿐 아니라 율법적으로 어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17-18).
사람의 증언도 성립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증언에 잘못이 있을 수가 없지요.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평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의롭다 인정하는 사람은 의인이요, 주님께서 정죄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의인이며, 어떤 사람이 죄인일까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유의 은총을 힘입은 사람은 의인이요,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자는 위선자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만인의 죄를 대속하여 피 흘려주셨으므로 이제는 지옥 갈 염려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마귀의 올무를 조심하십시오. 대속의 은혜가 강물같이 흘러도 그 피를 믿지 않으면 사유의 은총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절).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죄를 범했으나 회개함으로 사유함을 받았는데 사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맹세코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통해 회개하여 수제자가 되었으나, 가룟 유다는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진리로 오신 주님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하고 사유의 은총을 힘입기 소원합니다.
4. 진리를 아는 지식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절).
이는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논하는 자들로서는 그리스도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거리를 멀리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물론 요셉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요셉의 혈통에서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됩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 짓는 잣대가 은혜에 있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것도 은혜에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2)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 이상하다 하겠으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11).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갔지만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긴 어리석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방이 섬기는 바알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다가 멸망 받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머리에 붙이고 오늘도 통곡의 벽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여전히 이천 년 전에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완고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무너질 줄 모르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으냐?" 이는 "네 아버지가 누구냐"하는 것보다 더 수준이 낮은 질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하나님 운운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없는 지식은 구원과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이 진리의 지식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임을 믿는다면 지금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 자로서 땅끝까지 전하는 일꾼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참 자유
요8:29-47
주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요,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실 때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십시오.
1.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는 직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1) 믿음이 확고해야합니다.
삼 년 동안 주님을 따르는 제자 중에 많은 기적과 권능을 접하고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 가룟 유다는 주님을 은 삼십에 내주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서원한 성물의 일부를 숨겨두었다가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제자라면 확고한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2)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31절)
참 제자는 스승의 교훈뿐만 아니라 그 정신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안에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하는도다"(37절).
메시아를 대망하던 그들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를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37절).
이는 듣는 귀가 열리지 않았다는 이유도 되겠으나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비진리로 배격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 모두 진리 안에 거하여 응답받는 기도로 더 큰 은혜 힘입기 소원합니다.
2. 참된 자유
자유는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고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된 가운데서 주권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와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근간에 제 삼국을 통해 넘어오는 북한의 귀순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숫자가 많아질 것에 대비하여 수용 능력에 따른 대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휴전선을 넘으면 죽을 자가 살아날 뿐 아니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자유일 뿐 죄에서 해방된 자유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한 사람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노예다"(쿠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자유는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1) 진리를 깨달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1-32).
이는 어떠한 이념이나 정치체제에서가 아닙니다. 오직 주의 진리가 참된 자유를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독수리의 자유가 마음껏 창공을 날 수있는 것이고, 맹수의 자유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사냥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영생을 염원하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자유는 사망에서 해방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누가 줄 수가 있습니까?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면서 또 율법을 초월한 영의 사람이므로 진리 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값없이 주셨는데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이 곧 불행입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43절).
2) 죄를 다스릴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34-35).
사람이 죄를 범하면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처럼 죄의 포승줄이 우리를 결박하여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죄의 멍에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망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멍에 아래 있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편은 흑암과 사망으로 끌려가는 멍에요, 한 편은 빛 가운데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멍에입니다. 은혜의 멍에 아래 있는 성도에게는 그 멍에가 영광에 이르게 하지만, 죄의 멍에 아래 있는 자들은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올무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절).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그 조상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앗수르를 비롯하여 강대국에 매여 종살이하였고, 지금도 로마의 치세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두고 그 말을 하였을지라도 메시아를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마귀에게 결박되어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타협하여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용납해서 안 됩니다. 엄하게 다스리십시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3. 아브라함의 행사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38-39).
유의할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과 약속의 후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할지라도 혈통만 이어받은 후손이라면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21:12).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유대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노벨상을 많이 받고, 경제적인 여력이 뛰어나고, 교육 열의가 좋다는 것일까요? 그런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행사" 그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0절).
아브라함은 범사에 믿음으로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행사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절).
말은 옳게 하면서 행동은 마귀의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2절).
4. 마귀의 행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44절).
마귀의 근본과 본색을 여기서 다 밝히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은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를 대적하고 인간을 타락시켰는데,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보십시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요, 진리에 서지 못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마귀는 위장하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는 저주받은 영으로서 구원을 운운하나 진리가 없으므로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44절).
무슨 말씀입니까? 거짓말은 근본이 마귀에게 있으므로 마귀는 무슨 말을 할지라도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말세의 복음이다" "내가 받은 계시다" 하며 모든 은사에 전매특허를 받은 것같이 행사하는 것은 다 주의해야 할 이단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거짓일 뿐입니다.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 있는 영생의 자유입니다.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마귀의 화전을 소멸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아브라함보다 크신 예수님
요8:48-59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복을 받게 되므로(창12:3),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아브라함이 복 받은 사람으로서, 또 믿음의 조상으로서 누리는 영광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에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53절).
만일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말하는 요셉의 아들로 그쳤다면 아브라함보다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비교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7:28)고 하셨으나 요한에 대해서는,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1:8) 하였습니다.
1. 주님을 무시하는 유대인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5-47).
유대인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마땅하나 도리어 마음이 교만하여 주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절).
여기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이라" 한 것은 이방 혼혈족을 의미합니다. 또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네 말은 진리가 아니라는 부정입니다. 과연 귀신 들린 자의 소리라면 들을 이유가 없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49절).
여러분! 인간이 감히 주님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교만입니다. 두려운 일이지요. 주님은 왕 중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무시했던 것은 마귀의 교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교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구원받을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인자로 오신 주님, 지금도 소자의 모습으로 내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백부장 고넬료 같이 엎드려 경배하고, 세리장 삭개오 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2. 영생의 진리
인생에게 영생의 진리같이 귀중한 것이 있을까요?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우주의 신비는 밝힐 수 있어도 죽음은 여전히 정복할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technology(과학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다니엘 벨)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
이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기상천외 즉 상식 밖의 엉뚱한 소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2-53).
유대인들이 주님과 변론할 때 사용한 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으로 영원한 진리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문제는 율법은 공의의 진리이므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므로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복음으로 무덤 속에서 잠자던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가 영원함같이 거듭난 생명도 영원합니다.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주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4-56).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택함을 받은 백성이요, 약속의 후손입니다. 그의 열조들은 믿음을 지켰고,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진실한 믿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참된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요?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신 메시아를 불신하고 배격하므로 이것은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요, 진리의 원수로 마귀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7-58).
아브라함은 역사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지만 주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조물주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때에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까? 독자 이삭을 바치므로 여호와 이레의 기적을 보았을 때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0-13).
거기서 아브라함은 영의 눈이 밝아져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극적인 상황이요,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 성도들도 동일한 은혜와 영원한 영광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때가 아직 낮이매
요9:1-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절).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한 일로 주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 하고 고침을 받기 위해 소리친 바디매오와는 달리 침묵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 사람의 맹인된 원인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그러한 질문은 누구도 대답할 수 없지요. 그러나 주님은 대답 뿐 아니라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팔 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였느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1. 제자들의 질문
아이들과 나들이를 하다 보면 물어보는 것을 대답하기가 바쁘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물어보는 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 물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박식하다 할지라도 질문하는 대로 완벽하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공자도 제자가 사후의 세계에 관해 물었을 때 "내가 금세의 일도 알 수 없거늘 어찌 사후의 일을 알 수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어떠한 질문에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과 같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모든 재앙은 인과응보로 죄의 결과라는 것이 유대인의 견해였습니다. 또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불교 철학과 같이 영혼의 윤회설을 믿었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까지는 누구도 그 문제를 대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상담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가장 이상적인 상담은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기 전에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므로 내담자 자력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정답과 함께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셨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 아뢰라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찬송가 365장)
2. 예수님의 답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이 말씀은 맹인이나 그의 부모가 무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맹인으로 태어난 그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모든 맹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죄값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섭리 안에서 보면, 그는 맹인으로서 그동안 견디기 어려웠던 암흑의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메시아로 인해 "맹인이 고침을 받으리라"는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사35:5, 마11:5).
그러므로 우리도 오신 메시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11:4).
3. 빛 되신 주님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여기서 일할 수 있는 낮과 일할 수 없는 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삶과 죽음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죽으면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일하는 기쁨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땀 흘리고 일할 때 식욕이 살아나고 수고의 보상은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근면하기로 정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근로정신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노사파업으로 권리 행사만 주장하지 말고, 주인 의식을 가지고 근면과 성실로 세계적으로 성장시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하고 싶어도 건강이 따르지 못해서 애태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은 머물러주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세계적인 꿈을 품고 일할 때 세계에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전문가가 될 줄 믿습니다. 에디슨은 "나의 처세 신조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독일 정치가 비스 마르크는 "내가 청소년들에게 충고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의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더 일하라. 끝내 일하라"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절).
무슨 말씀일까요? 빛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생명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특별히 복음 사역에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은 허무에 그치지만 주님의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헛된 일이요 어떤 일이 참된 일일까요?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15:58).
홍포입은 부자는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쌓았으나 음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성경은 물질을 죄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재물에 노예가 되지 말고 맡겨주신 달란트를 갑절로 남겨 선한 사업에 부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바울의 말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4.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말씀만 하셔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을 이용하신 것은 진리적인 교훈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맹인의 눈이 밝아진 것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어두운 눈이 밝아졌다면 동일한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그런 방법을 성경에는 반복적으로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동일한 믿음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일 믿음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였다면 그것은 진흙을 발랐다가 씻은 것으로 끝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맹인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실로암 못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역시 주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때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우리 모두 말씀에 순종하여 더 큰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5.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심사하였으나 죽일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풀어주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7)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내세워 안식일에 병을 고친 사건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
안식일 곧 주일을 지키는 목적은,
1)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업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육신의 일이 아닌 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외식에 치우친 유대인들의 주장은 안식일에는 치유의 은혜를 받지 말고 병석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요, 그의 인자하심은 한이 없으므로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 주십니다. 또 우리에게 재앙이 아닌 평안을 주시기 기뻐하십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친구 목사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그 친구의 하는 말이 "우리나라는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경향이 너무도 많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도 미국에서 교통표시를 잘못보고 법규를 위반한 일이 있었는데 고액의 벌금과 또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고 난 후부터는 철저하게 법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사회에 법이 필요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안정된 생활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소행을 보십시오. 그들이 계명을 옳게 지켰습니까? 그랬다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요9:18-19).
그 부모의 대답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
내 자식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어쩌면 이런 대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27절).
그렇지만 눈을 뜬 당사자는 당당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듯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1-33).
눈을 뜬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무슨 증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교만한 유대인들은 언어 폭력을 쓰며, “네가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하고 쫓아내었습니다.
6. 다시 만나신 예수님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당한 일이 있습니까? 스데반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유대인들의 폭력으로 쫓겨난 사람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5-38).
이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여러분! 복음 때문에 고난 받으신 일이 있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 너무도 무서운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오신 메시아로 말미암아 보게 되었는데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0-41).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황혼이 짙어가고 있습니다. 심판의 밤이 이르기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여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선한 목자
요10:1-15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라고 선포하신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① 내가 곧 생명의 떡(요6:35), ② 나는 세상의 빛(요8:12), ③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11:25), ④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 ⑤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5), "나는 양의 문"(7절), "나는 선한 목자"(14절)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유로 하신 목적은, ① 불신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② 택한 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1. 양의 문이 되신 주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어떤 자가 절도며 강도입니까? 절도는 남의 재산이나 물건을 주인 모르게 훔치는 자요, 강도는 협박과 공갈로 재물을 강탈하는 자입니다. 절도도 나쁘지만 강도는 사람을 해칠 수 있으므로 법정에서는 더 엄하게 다스립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흉악범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운운하는 자가 있습니까? 이는 마귀의 함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없는 복음은 거짓이요 진리가 아닙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단순히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이나 신약은 동일한 진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입니다(갈3:2).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3:11, 합2:4, 롬1:17).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롬4:3).
진리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다만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고, 신약시대에는 오신 메시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차이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절).
나보다 먼저 온 자,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절도요 강도는 메시아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로서 어느 때든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를 주의해야 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2.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11-12).
이 말씀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입니다.
1) 양의 우리 : 교회, 양의 문 : 그리스도, 양 : 신자, 목자 : 목사
2) 양의 우리 : 교회, 양의 문 : 하나님, 양 : 신자, 목자 : 그리스도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선한 목자 예수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양들의 안전과 진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한 목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양들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므로 때를 따라 돕는 양식을 제공해주십니다. 다윗이 지은 목자의 노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여기에 여호와 대신 김일성을 넣어 '김일성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지만 남북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보장이 된다면 어느 체제를 더 많이 희망할 것 같습니까? 아마도 6·25때 남으로 피난하던 광경이 또 다시 펼쳐질 줄로 생각됩니다. 만일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이 국민에게 보다나은 삶을 제공해주었다면 쿠바인들이 상어 떼가 우글거리는 죽음의 바다 카리브 해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가는 어떻습니까? 현수막을 보면 과연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인지 민주주의 국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박 홍 서강대 총장에게 고백한 어느 학생의 편지에서 매년마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포섭하여 철저하게 의식화 교육을 시킨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신앙의 선배들이 나서서 진리의 교육을 그처럼 시켰다면 이 시대를 밝혀 줄 선구자들이 되었을 텐데, 잘못 빠져들어 불행하게 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참된 안식은 주님의 품에서만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23:3).
이는 공산주의가 말하는 떡으로가 아닙니다. 오직 살아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생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통해 받으실 영광을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대속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사망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떤 자일까요?
세 가지 사람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사망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자,
2) 정신 질환자,
3) 사망을 다스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사망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그때는 미성숙기이므로 죽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 이상자로 마귀의 사슬에 매여 있는 자라면 불행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불신 사회를 살펴보십시오.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이 어떻습니까?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견디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매년 늘어나는 술과 담배의 소비량이 얼마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런 것이 반드시 살아가는데 필요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쌀은 술이나 담배에 비하면 너무도 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한 사람이 먹는 쌀값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오백 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술과 담배의 소비량은 얼마입니까?
이제 우리나라도 지방 자치제에 들어갔는데 애연가들이 내는 담배 세금만 해도 지방 세금 전체를 능가할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엄청난 금액입니까? 당국에서는 술과 담배 소비가 늘어나야 세금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국민의 정신과 육체가 병들어 가는데 세금만 운운해서 되겠습니까? 중국이 과거에 아편 중독으로 망했다면 술과 담배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이 사회도 문제는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 모두 진리로 해방되어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기 소원합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2-3).
3.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비유에는 문지기와 절도, 강도, 삯꾼과 이리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자가 출입할 때 문을 열고 닫는 문지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양들에게 해를 끼치는 대상입니다. 삯꾼도 역시 양을 위해 고용된 사람인데 양이 위험에 처할 때는 자기가 살기 위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비록 목장을 책임지고 일을 하지만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삯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직임을 맡았습니까? 충성하십시오. 우리 모두 목자장 주님께서 오실 때 잘했다 칭찬 듣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희생을 각오하고 양을 지킨다는 말씀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양으로서 불가피한 희생을 목자가 대신하고 양을 살려낸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이 반드시 이리로 인해서만 죽음의 재난을 당하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생에게 왜 죽음이 왔습니까?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자청하여 받아들일 자 누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음을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그런데 그 죽음을 주님께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요19:30)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죄 값을 대신 지불했다는 말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주님께서 오늘도 진리의 보혜사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의 양된 것을 감사드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온갖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감사드리십시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주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시련과 연단이 있을지라도 인내와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인내의 은혜는 주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게 하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은 소망의 눈을 밝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선한 목자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영광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
요10:22-4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3,6).
이는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주님께 와서 유혹하던 마귀의 소리입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골고다에서 함께 못 박힌 한편 강도의 소리요,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23:37).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의 소리입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10:24).
여기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하였으므로 어떠한 대답으로도 믿지 않을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5-26).
1. 수전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22절).
수전절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주전 백육십칠 년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 번제단 위에 돼지를 잡아 제물을 드리고 그 피를 성전에 뿌린 일로, 삼 년 후 주전 백육십사 년에 유다스 마카비우스(Judas Maccabius)가 성전을 복구하고 정결하게 하는 제사를 올린데서 시작된 절기입니다. 수전절의 예식은 팔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용감했던 희생자들을 소개하고 시편과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수전절은 양력으로는 십이월 십오일, 유대 달력으로는 기슬르 월 이십오 일에 시작되었습니다.
2. 외모로 취한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주님을 멸시한 이유는 그가 갈릴리 출신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오실 메시아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할 수 없는 능력과 이적이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그들도 들었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메시아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할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저주를 선포하면서까지 부인하였습니다(요7:49).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의 권세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여 열국에 떨칠 영향력을 기대했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4-5).
밤낮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엎드려 주 앞에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교만하여 메시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하이오 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농부의 집에 어느 날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서 일자리를 구하기에 마침 일손이 부족한 때라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난 후에 그 소년이 주인의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주인은 소년을 내쫓았습니다. 그로부터 삼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농장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가 소년이 두고 간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그 소년의 본명이 바로 제임스 A 가필드(1831-1881)라는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고용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장차 대통령이 될 인물인 줄 알았다면 농장 주인이 그처럼 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믿음을 따라 사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양과 염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6-27).
이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과 염소의 구분입니다. 누가 이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자입니다. 사실 목자가 오기까지는 어떤 사람이 양이며, 염소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염소가 양인 줄 착각하고 있다면 이도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육신의 생각을 다스리고 진리에 순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염소들의 기질이 어떤지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일에 예수님보다 자신을 내세우기 기뻐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주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양들에게 명하는 진리의 교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0-11).
4. 삼위일체의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주변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은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사 이천 년 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론은 보내시는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아들과 위로부터 임하신 성령에 관한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29-30).
이로 인해 유대인들의 감정이 극에 달하여 돌로 치려 하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
여기서 우리는 어느 것이 진리요, 또 비진리인지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주님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소행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의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은혜를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구주를 영접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5.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5-26).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7-38).
"나무는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행위의 열매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시와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악인에게서 선을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과연 그 일이 무엇일까요?
1)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어떤 구제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입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
유의할 것은 아무리 큰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무관하면 구원과 무관한 일이요,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믿음으로 행하면 생명록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2) 모든 병마와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마8:16).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이라면 의사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병을 잘 다스리는 의사가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의사는 의술로 치유하지만 믿음으로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의 법칙을 허락하셨고 이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자연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생명과 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사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지만 주님께서는 질고와 병마를 친히 담당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하던 그들은이 진리의 원수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복음과 무관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여 대속의 은혜와 영생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요11:1-16
주님의 공생애 삼년 동안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받은 가정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들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사로의 집을 찾았고 또 거기서 유숙하신 것을 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살아난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 타당한 이유로는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나사로가 살아 있었으므로, 또 그가 있을 때 부활 사건을 기록하게 되면 유대인들로부터 더 많은 박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베다니
베다니는 감람산 동편 경사진 곳에 있는 마을로서 그곳 주민은 천 명 정도이고, 예루살렘에서는 약 3km의 거리입니다. 또 여리고로 향하는 길목으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했던 벳바게는 베다니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베다니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는데 그들을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베다니는 주님의 사랑하는 나사로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마을이요,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로 인해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 지시니"(눅24:50-51).
지금 베다니 마을에는 나사로의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2. 병든 나사로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질병과 죽음인데 그것이 죄의 보응입니다. 여기는 자범죄와 원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보응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허물진 죄인이 사유함을 받게 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행이 행복으로, 사망이 생명으로 변화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미화한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고통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어 보기에 나쁘다. 고통을 괴로움이나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보면 실들은 형태와 색채의 조화로 아름답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무질서를 넘어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일전에 자신의 용모에 대해 비관하여 자살로 막을 내린 어느 소녀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보고 과연 그 길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회의 가치 기준은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약점을 통해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전 수상 골다 메이어(1978-1989)는 십이 년 동안 백혈병과 투병하면서 이스라엘의 연립내각을 이끌고 중동 평화를 위해 큰일을 이룩한 여장부입니다. 그는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했고, 공부를 하여 나의 약함이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병든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일이 불행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복이 오늘도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3. 이틀을 더 유하신 주님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사랑의 호소력은 어떤 것보다 더 크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기간에 자기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
누구를 막론하고 대책이 없을 때는 조급해지기 마련입니다. 산모는 통증을 못 이겨 몸부림을 치는데 숙련된 의사는 태연합니다. 이는 산고를 겪어야 출산이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6-7).
주님께서 그렇게 다급한 상황을 알면서도 왜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셔야 했던 이유는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고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
주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병든 자가 회복되는 것보다 무덤에서 살아나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또 제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믿음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1).
4.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낮은 동적인 시간이고 밤은 정적인 시간입니다. 밤과 낮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사람이 잠잘 때 자지 않고 쉬는 시간에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생산이 늘어날 것 같지만 오래지 않아 무력증에 빠져들어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일할 시간에 일하지 않고 놀고, 잠자기만 즐긴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체력이 탄력을 잃지 않고 의욕을 살려 나가려면 동적인 시간과 정적인 시간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중에 한 가지는 자기가 하는 일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내가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잃고 또 게으름에 있을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은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21:25).
젊을 때 일해야 하고, 또 건강할 때 일해야 합니다. 보다 밝은 내일을 보장받기 원하십니까? 힘써 일하십시오. 특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9절).
그 당시 이스라엘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십이 등분으로 시간을 정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일할 수 있을 때에는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더 밝은 내일은 오늘 땀 흘리고 수고한 자들에게 돌아오는 보상이요,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귀한 줄 알았다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역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5. 잠든 나사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났겠나이다"(11-12).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시니"(14-15).
어떤 의사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1-22).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들입니다. 또 그동안 주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일들을 눈으로 보았고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사후 약방문이 되었으니 그 슬픔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 믿음에 예수님은 족하다 않으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3-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에 마르다는 화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고 또 거기서 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실 때 마르다의 대답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믿음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잊지 아니하도다”(갈3: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11:40).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1-44).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고, 하나님의 영광은 땅 위에 넘쳤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극적인 상황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은혜로 사는 몸 마음껏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 모두 주님 오시는 그날에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요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절)
베다니는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사무실에서 설교를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받으니 "목사님, 사택에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시기에 혹시나 하고 교회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추석인데 사무실에 계십니까?" J집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예! 바쁜 일이 있어서 이렇게 나왔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저희 아이가 아파서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려고요. 감기로 기침을 하더니 결국은 폐렴이 되었어요. 몸에 열이 많은데 치료를 받아도 낫지를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목사가 병명을 묻는 것은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금하기에 물었던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믿음의 손길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연휴라 모든 사람이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 가지 더하게 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서든지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는 즐겨 헌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주님을 위한 잔치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2절).
은혜를 힘입은 자들이 주님을 섬기는 자리였으므로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분당으로 이사를 한 B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에 심방을 좀 와 주십시오. 바쁘신 줄 알지만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하기에 "예, 가겠습니다."하고 그날 성도들과 함께 심방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가락시장에 가서 이렇게 사왔습니다" 하는데,
‘죄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주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십니까?’ 십자가가 힘들고 어려워서 몸부림을 치다가도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2. 옥합을 깨뜨리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절).
그 향유의 원산지는 인도로 식물에서 채집한 것인데 지극히 값진 향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값진 향유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아까울 것이 없지요.
"좋은 향수 냄새는 침실에서 식당으로 퍼져가고 좋은 이름은 세상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전하여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은 인간일까, 악마일까, 이름 붙여 말하기조차 끔찍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계속해서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린다고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인간이기에 인간답게 살지 못하면 거기에 따른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 "죽고 싶다" "더 죽이고 죽어야 하는데…" "부자들을 혐오한다." 모두가 이성을 잃은 소리지요. 그도 어머니의 품에서 미소지으며 자랄 때는 사랑스러운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떠한 변명을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만이 저주의 자식으로 전락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그자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마귀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악령에게 붙잡혀 종살이하였던 전과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구원시켜 주었으며 성도라는 거룩한 새이름을 주셨습니까?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탕자가 효자 되고, 버림받은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그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같이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려 향기 풍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가룟 유다의 비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4-6).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마귀의 교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다른 제자들까지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8-10).
가룟 유다는 양심에 화인 맞아서 성물을 도둑질하였고 또 훔치기 위해서였는데 마귀의 바이러스가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일생일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거룩한 봉사로 열매 맺는 일에 시험 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물건이라도 제 용도에 따라 쓰임을 받았다면 족할 것입니다. 과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은 당연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은 허비요, 낭비라고 하면 그것을 참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2).
가룟 유다의 눈에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돈만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정성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그것도 부족해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돈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죄 많은 여인에게서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을 받으시고 영원한 존귀와 영광의 복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
그것은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진리에 새겨졌고,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복음과 함께 영원토록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마귀의 시험을 조심하십시오.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성령이 기뻐하실 때에 즐겨 헌신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구제
구제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주님께 드리는 복이 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5-40).
유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외면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가 항상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단 한 번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또 항상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성도들의 손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의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부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기억할 일은 모든 기관이 모체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 여 전도회가 교회 안에 있는 지체요, 모든 교육 기관을 비롯하여 위원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몸된 교회에 향기를 풍기는 손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가까이하는 것은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복음 사역이 왕성하도록 하는 것이요, 교회에 충성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가룟 유다와 같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이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욕되게 하지 말고 거룩한 예물로 향기 풍기는 손길이 됩시다. 우리 모두 주의 날에 영광이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요12:12-19
주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극과 극을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두가 배부를 때는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하였는데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는 말씀에 모두가 사라져버렸는가 하면,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의 부은 애찬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있었고, 나사로가 부활한 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는가 하면, 그 일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왕 중의 왕이신 주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그 길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주님
주님은 세속의 나라가 아닌 진리의 나라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받은 영광은 진리의 영광입니다. 그 사건은 공관복음(마21:2; 막11:2; 눅19:30)에 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1-3).
예로부터 중동 지역에는 나귀 또는 약대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을 타는 것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를 타는 것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뿐만 아니라 겸손을 의미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2.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주님께 돌린 영광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종려나무
종려나무는 기쁨과 승리의 상징으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인들도 사용했습니다. 그 나무는 따뜻한 지역에 많으며 팔레스타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특히 여리고와 엔게디 지방에서 잘 자라므로 그로 인해 여리고를 ‘종려나무 도시'라고도 했습니다. 종려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맺으며 쾌적한 그늘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꿀이 나오는데 애굽과 아라비아, 바사 주민들은 대부분 그 열매를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2) 호산나
히브리어로는 '호시아나', 헬라어로는 '호산나'입니다. 이는 원래 하나님께 드리는 히브리어 기원으로서 "오! 구원하소서" "지금 구원하소서" "내가 비노니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뜻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는 메시아께 간구하는 기도요, 찬양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일로 주님을 더 미워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는 신성을 모독하는 무서운 죄가 됩니다. 초대 교회 때 바나바와 바울이 이적행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허메와 쓰스"라 하여 그 앞에 제사를 지내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신의 영광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신성시하는 교만이므로 전도자들은 옷을 찢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헤롯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십시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0-23).
하나님은 그의 받으실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또 그의 영광에 도전하는 자는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받으므로 신성모독이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찬양을 그치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39-40).
무슨 말씀일까요? 그들이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돌들이 대신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찬양은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은혜인지 알았다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이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허블 망원경으로 유성이 목성과 충돌하는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것이 지구에서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서운 재앙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기에 구경거리도 될 수 있고 재앙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모두가 자연 현상일 뿐이지요. 그렇게 인생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까? 영광 받으실 주님께 경배드리시기 바랍니다.
3. 제자들이 깨달은 진리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절).
무슨 말씀일까요? 이는 삼 년 동안 주님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교육과 양육을 받았으나 오순절 이전에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아야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명상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입니다. 고행을 통해서 해탈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0).
이 은혜가 귀중합니다. 모세가 어떻게 창조의 비밀을 알 수 있었을까요? 조상들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상이 육일 창조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노아 이전 족보와 생활을 과연 유전으로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특별계시로 모두가 영감으로 받은 은혜입니다. 바로가 꾼 꿈을 요셉이 어떻게 해몽할 수 있었으며,
느브갓네살이 꾼 꿈을 다니엘이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영감의 은혜입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받은 은혜는 더욱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성령의 도구로서 충성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4. 표적 때문에 믿는 믿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7-18). 신앙에 표적이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막16:17).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바울은 일평생 이 믿음으로 그렇게 큰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믿는 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원수들이 비상을 걸었지만 믿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큰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5. 허사를 도모하는 자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19절).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11:9).
주님께 영광 돌리는 군중들의 외침 소리는 하늘과 땅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 광경을 본 원수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행위인지 적어도 그 순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군중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날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패하는 인생일까요?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리와 무관하다면 모든 것은 실패로 전락될 것입니다. 허무에 매여 종살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주 앞에 서는 날 의의 면류관 받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영광을 얻을 때
요12:20-33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20절).
원문에는 "약간의 헬라인들"이라고 되어 있고, 시리아 역에는 "일부 이방인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습니다.
1) 헬라에 살면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2) 헬라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
사도행전에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를 비롯하여(행8:27), 백부장 고넬료(행10:1)와,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행17:4)이 있습니다. 그러한 예를 보아 구원은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을 찾아온 헬라인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20-21).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11:9)하고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귀중합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는 주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집으로 영접하여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어느 날 영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워필드가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신앙적으로 도움을 준 손길이 있었는데 헌팅 턴 여사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잃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구하시기 위해서요" 그 말에 자극을 받은 워필드는 그 순간을 잃지 않고 주님께 간구하여 일생을 주님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2. 영광을 얻을 때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2-23).
먼저 생각할 것은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때"라는 것은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시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
시간은 무한할지라도 기한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연말을 맞게 됩니다. 이것은 한 해가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새해가 오지 않던가요?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전1:5-6).
자연은 여상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변함없이 흘러가는 자연 속에서 때와 기한을 정하면 거기는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관찰해보십시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있을지라도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의와 낙담에 처해있는 자들이라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밟으며 처량한 생각을 품게 되지만, 식물은 알차게 겨울 채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오면 사람들은 자연을 즐깁니다. 그러한 시간에도 식물들은 봉접을 불러들여 열매 맺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계절이 바뀌기 전에 기회를 잃지 않고 대처해 나가야 생존과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밤이 가고 해가 뜨면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희망의 새날이 오는 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내일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세속적인 영광이 아니라 구원 사역의 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져야 할 십자가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부활로 영광의 입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
여기서 두 가지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가 새싹을 내지 못하면 그대로 썩어지지만, 새싹을 내면 많은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희생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줄 알았다면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이 고난에 동참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절).
3. 천국에 들어갈 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존귀를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찾았으나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찾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직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를 힘입게 됩니다.
카네기 캘리언이 말입니다.
"실패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구원의 일부이다."
그 이유는,
1) 사람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준다.
2) 인생의 목표와 올바른 인생관을 재점검할 기회를 얻게 해준다.
3) 우리의 삶에 속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4) 예수의 십자가가 주는 심오한 의미를 배울 수 있다.
5) 인간성을 되찾아 주고 실패의 인정과 수용으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자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십자가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절).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거룩한 희생의 길, 곧 죽음의 길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최후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간구하신 주님의 기도에 유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기도가 곧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로 응답을 받은 것같이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에 하늘의 영광이 땅에 넘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일 때에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하나님의 응답은 과거에도 영광스럽게 하였지만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모든 사역들을 의미합니다.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이는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께 부활의 영광과 모든 권세를 안겨주신 영광입니다(빌2:10-11).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5. 하늘의 음성을 알지 못한 무리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29절).
하나님은 천둥소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출9:28; 삼하22:14; 시29:3), 천사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히2:2, 갈3:19).
또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진 사울에게도 말씀하셨는데 함께 있던 무리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말을 이성 없는 짐승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인 지각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으나 알지 못했고, 느부갓네살과 벨사살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30절).
여기서 우리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을 때 침묵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절).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마귀의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의 부활은 사망 권세의 심판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2절).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은 이방과 선민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만민에게 구원 길을 열어 주신 복음입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과연 십자가는 고난의 극치요, 영광의 절정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이 우리의 십자가와 영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이사야의 예언
요12:35-50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34-35).
이렇게 주님께서는 임박한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일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8:12).
여기서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힘입을 은혜를 살펴보면,
1)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절)
자연 세계는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그리스도가 곧 빛이요, 마귀는 어둠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면 마귀의 노예가 되어 멸망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오대양 사건을 비롯하여 천구백칠십팔 년 미국의 사교집단인 인민사원 교도들이 남미 가이아나에서 벌인 구백이십삼 명의 집단 자살 사건과 또 스위스와 캐나다에서 일어난 종말론 신봉자들의 집단 자살 사건이 마귀의 올무에 빠져든 자들의 종말입니다.
2) 빛이 없으면 생의 목표를 알게 됩니다.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35절).
아이들은 길을 잃으면 방향감각이 없으므로 엉뚱한 곳에 가서 헤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장성한 사람도 진리를 등지면 영적인 고아요, 길 잃은 나그네로서 인생 여정을 잃게 됩니다.
3) 빛의 아들이 됩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절).
빛 되신 주님을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 우리도 빛의 아들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을 의의 반열에 세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1. 숨으신 주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6절).
주님께서는 전에도 성전에서 진리를 강론하시다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므로 숨어 나가신 때가 있었습니다
(요8:59).
그때 베다니로 가셨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21:37) 하였습니다.
불행이 있다면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메시아를 배척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없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입니다. 가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데 Y집사님이 꽃꽂이를 하기 위해 꽃을 사서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심하게 기침을 하기에 "집사님, 감기 들었네." 했더니 "목사님, 날씨가 변덕을 부리면 이렇게 기침을 합니다. 비염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걱정이 없어요." 하기에 어떤 비법이 있는 줄 알고 "어떻게 하는데요?"하고 물었더니 "저는 목사님께 기도만 받으면 나으니까요"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믿음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이사야의 예언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절).
표적이 무엇입니까?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혀주는 표적을 원했지만 정작 표적을 보고는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39-40).
여기서 잘못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같이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유대인들을 완고하게 하셨다"(롬11:11)고 하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시기 나게 하여 돌아오게 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버린 복음이 이방인을 복 받게 하였는데, 이스라엘이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방인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게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믿고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등졌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축출한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이 말씀을 부분적으로 보면 하와를 유혹하던 뱀의 말이 사실인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하였기 때문입니다. 뱀의 말에서 숨겨진 올무를 보십시오.
1)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신뢰하고 따르게 하는 궤휼이요
2) 피조물이 조물주와 같아지려는 도전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같아져서 완전에 이른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를 이탈한 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인생을 에덴에서 축출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유함을 받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줄 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라 하여 누구에게나 생명과를 허용하는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옛사람 곧 육의 사람이 죽지 않고는 새사람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통회로 거듭나서 진리를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밝아지기를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절)
여기서 '관리'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은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입법과 사법을 행사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시키기로 이미 결의해 놓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자식이 눈을 뜨게 되었어도 그 부모는 담대하게 예수를 증언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요9:21).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절).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바로 깨달았다면 출교를 당하는 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된 이후 출교가 두려워서 침묵을 지키지 않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어떠한 장애가 있습니까?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극복하십시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지금 우리나라는 ¼이 기독교인이요,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요직에 수많은 교인들이 있는데도 사회 풍토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천이백만 성도들이 책임을 느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닷물에는 염분이 2.8%만 있어도 오염을 방지하는데 25%의 염분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맛 잃은 소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지 마십시오. 주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합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4. 올바른 믿음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외쳐 선포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요10:30)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비길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벨리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인간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자들이 일치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무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열국의 제사장 민족으로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찾으십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주님께서 담당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염려하는 분이 계십니까? 나를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을 더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우리가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충성할 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의 대열에서 주의 뜻을 이룩하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서로 발을 씻기라
요13:1-20
유월절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멍에에서 해방 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서(출12장), 아빕월 또는 니산월이라고 부르는 정월 15~21일까지 칠일 동안 지켰습니다(출12:15-20; 23:15).
유월절을 지키는 절차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물이 섞인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간단한 감사의 기도와 함께 손을 씻은 다음 음식을 차리는 순서로 이어졌는데, 그 음식은 쓴 나물, 무교병, 어린 양의 고기, 대추, 무화과, 마른 포도, 식초 그리고 야채와 나물을 조금 취하여 감사를 드린 후에 그것을 먹고, 두 번째 포도주 잔을 들고 잔치를 주재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유월절의 기원과 유래를 설명하고, 시편113편과 114편을 반복하여 읽고 기도를 드린 후에 다시 손을 씻고 그 후에 식사를 하며, 세 번째 포도주 잔을 들고(고전10:16), 마지막 헤어지려고 할 때 또 한 잔을 마시는데, 그때는 시편115, 116, 117, 118편을 반복하여 읽었다고 합니다.
1. 주님의 사랑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최후의 순간까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배신자 가룟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래 사람들과 함께 검과 몽둥이, 횃불을 들고 왔을 때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4-9).
2)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이 사랑을 믿으십니까? 지금도 함께 계시고 영원토록 같이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마귀의 올무에 빠져든 가룟 유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2절).
무섭고도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 큰아들과 초등학교 동기인데, 그 사람이 알콜 중독이 되어서 마침내 가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이들도 있는데 매일 술만 마신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하기 그지없으나 본인이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대책을 세우기가 막막했습니다.
"부인은 교회를 나옵니까?"
"아니요, 교회 간다고 하면 남편이 그냥 두지 않아서 못나옵니다"라고 하기에, 그러면 이번 주일 전도팀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겠으니 미리 부인에게 부탁하여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불행한 일은 우리들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 땀 흘려야 마땅한데 불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귀의 올무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말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화인을 맞아 은 삼십에 그리스도를 넘겨주면서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마26:20-25).
마귀의 화인을 맞으면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절).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
이 말씀은 주의 손에 맡겨진 권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마28:18),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을 의식하는 말씀입니다.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러시아를 다녀 온 K양을 만나 그곳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꼭 한번 다녀오십시오. 특히 레닌그라드에는 볼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물가가 오르는지 물건을 사서 돌아서면 값이 또 달라지더라"고 했습니다. 자유의 대가가 이렇게 높은가를 알았다면 사고의식이 달라져야 하고, 생활방법도 변해야 하지요.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대기업에서 만들어내는 상품들이 소비자들을 속이고 기한이 지난 식품을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가 하면 세균 오염, 중금속 오염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천직 의식을 가지고 맡은 임무에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2) 하나님께로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게 수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생명보험 가입자가 죽은 후에 유족에게 지불되었던 보험금이 이제는 살아있을 때 지불하는 상품으로 새롭게 나왔다고 합니다. 수명을 육 개월 남겨두고 그 보험금을 타게 되면 어떻게 쓸지 궁금합니다. 여기는 인간의 가치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줄 압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기를 알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4-5).
"너희는 겸손한 마음으로 피차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만으로도 족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여 산 교훈을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발을 씻어주는 일은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손길이 누구의 손길이며 어떤 마음에서인가에 따라서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는 속죄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다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회가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섬김의 도"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인 줄 아십니까?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베드로의 욕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6절).
이는 당연한 말입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을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은 격식에 맞지 않고 예절에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절).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깨닫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섬김의 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은혜를 받아야만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다시 사양합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베드로가 다시 요구합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9-10).
이 말씀에 대해 혹자는 유월절 만찬을 먹기 전에 목욕하는 관습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하나 성경에는 유월절 만찬을 먹기 전에 목욕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만찬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있었습니다마는(마15:2; 막7:3-4). 이 말씀은 내적인 정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10-11).
기억할 것은 이미 목욕한 숫자에 가룟 유다가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진리를 불신한 증거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
오직 주의 은혜와 진리로 정결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발을 씻으신 섬김의 교훈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12-14).
어떤 사람들은 이 교훈이 종교적 의식을 새롭게 제정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만찬이나 세례 의식처럼 종교적인 의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직 겸손과 섬김의 도를 실천에 옮기도록 하신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김같이, 피차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자가 받을 복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다시 주님의 교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7).
여러분! 진심으로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순종할 때 존귀한 복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앞에서 존귀와 영광을 함께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길과 진리와 생명
요14:6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주님께서 시험하는 마귀에게 한 말씀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줄 알게 하여 멸망의 길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무너졌으나 한반도에는 아직도 유물 공산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통이요,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던지는 미끼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는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짐승과 달리 영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여기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조상에게 제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가 내세 의식과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칠 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애굽의 피라밋은 언젠가는 인생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부활 사상이 모든 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은 밥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로 만족을 누릴 수가 있다면 오늘같이 풍요로운 세상에 불행이 없어야 마땅하지요. 옛날에는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는데 지금은 얼마나 풍요로워졌습니까?
눈부신 과학문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삼사십 년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상상하지 못할 세상이 펼쳐질 텐데 연세 높은 것이 아깝다 생각 들지는 않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인생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물질로 대신할 수 없는 공백이 있기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가정이 없고, 부모가 없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살고, 언제 죽든지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한강 물을 이제는 물고기조차 살 수 없도록 오염시킨 주범이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땅을 병들게 하고 대기를 오염시켜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든 범인이 누구입니까? 역시 인간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인간이 아닌 다른 만물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만물을 돌보고 잘 지켜야 합니다. 또 인간이 인간답게 살 때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짐승같이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연은 자연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자연 상태 그대로가 좋을지라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본분을 저버리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유인원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생긴 것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인간의 흉내를 잘 냅니다. 그로 인해 진화론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원숭이 세계에서 신앙의 행위를 발견했다는 것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조상이 죽으면 인간과 같이 제사를 운운한다든지 아니면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해서 무덤을 만드는 행위를 보셨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지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가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메뚜기가 내년 일을 알 수 없듯이 짐승은 내세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영혼 없는 짐승같이 간주해도 무방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영혼의 욕구가 충족되기 전에는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영혼은 밥과 떡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이지요. 흙에서 취한 육체는 흙에서 나온 양식을 먹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영혼은 위에서 왔기에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 양식이 영생의 진리 곧 말씀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요,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죄지은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4).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아무도 멸망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서49-10).
또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해와 달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저절로 있었다고 합니다. 또 우주 천체는 대폭발로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우주는 누가 창조했을까요?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한 해답은 오직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알게 됩니다.
1. 그리스도는 길이십니다.
인생은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이 길은 가고 싶어서 가고, 가기 싫다고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연세가 높은 어른들은 주름살이 깊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주름이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먼 길을 걸어왔다는 고생의 표시입니다. 젊을 때는 힘든 일도 운동이 되었는데 연세가 높아지면 멍이 들게 되지요.
옛날에는 효의 도를 인간 교육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오늘에는 모두가 자기중심의 삶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늙고 싶어서 늙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월이 머물러주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간은 이 순간에도 흘러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과 늙는다는 문제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들었기에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달려야합니다. 그렇다고 향방도 없이 달려서 우승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 경기에도 규칙이 있어서 그 법을 지켜야 우승할 수 있는 것같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구원받는 길은 장수에 있는 것이 아니요, 부귀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길이요"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가야 할 영생의 길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내가 진리요
이천 년 전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주님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하셨을 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진리를 모르고 사람을 다스렸던 것같이 오늘도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일까요?
1) 진리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물론 학교나 학원을 지칭하여 진리의 전당이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물리학이나 철학, 그 이상입니다. 이는 세상 학문을 터득하여 인생 문제가 해결되고 또 영생의 관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진리는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염치와 정절은 물론이거니와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또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양심의 기틀이 있어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지켜져야 할 덕목이지만 그렇다고 영생의 진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진리는 철학이 아닙니다.
철학은 인생 문제를 논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색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일 뿐이요, 해결의 열쇠는 따로 있습니다. 철학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디를 가고 있으며, 그 종착역은 어디이며,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 철인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젊은이들이 사회적인 부조리를 고발하는 일에 목숨을 던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공산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목숨을 던져야 할 가치가 될까요? 진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곧 진리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3. 내가 생명이라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 믿음으로 나사로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영생은 마귀의 올무일 뿐입니다. 사후의 세계를 믿으십니까? 그날을 대비하여 오늘을 사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가 허무로 돌아가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아직도 길을 잃고 방황합니까?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허무에 매여서 종살이하지 말고 진리의 지각이 열려지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영생의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가정과 앞길에 하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영원한 처소
요14:1-14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위치상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하시고(31절), 15장에서 17장까지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14장에서 16장을 다락방 강화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삼 년 동안 가족을 작별하고 따랐는데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고 하니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근심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떨쳐버릴 수 없는 문제일 줄 압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부활 때 다시 만나자"
성수대교 붕괴로 잃어버린 딸의 장례식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실신하면서 남긴 이 말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머슨은 "당신이 무서워하는 것에 대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공포는 확실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근심과 불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절).
명령법으로는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라틴역을 제외한 모든 고대 역본들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때 "국민 여러분! 이 보통 사람을 믿어 주십시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고 만족스럽게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믿는 것이므로 남의 인격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근복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요 신이 아니므로 인간의 말은 불완전하나, 오직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2. 영원한 약속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혹자는 이 말씀을 온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에 확신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에 대한 보장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구에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 믿음의 보장은 영생의 은혜입니다. 이 약속을 의심 없이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인치는 역사가 일어남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마귀의 세력을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대속하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14:28).
유의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미완성의 천국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확장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완전한 처소이므로 불완전한 부분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면 대속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육 일 동안에 이룩하신 창조 사역을 보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고 안식하셨는데 순식간에 잘못된 것은 해와 달과 별들이 궤도를 이탈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사역에서 미완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의와 죄악에 매여 있는 인간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완전하고, 또 영원합니다.
천국은 창조의 시작과 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불원간 주님께서 오실 때에 충실한 알곡으로 영광중에 주님을 맞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4-6).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한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삼 년 동안 가르치신 진리의 교훈을 바로 깨달았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듣는 귀가 중요하고, 보는 눈이 중요함과 같이 깨닫는 지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도마의 질문에 더 깊은 진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1) 내가 길이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이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2) 내가 진리요
그리스도는 진리로서 또 진리를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실이지요. 그대로를 나타내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훈과 생활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완벽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이 오실 주님을 예언하신 말씀이라면 그리스도는 오신 주님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18).
3) 내가 생명이요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요, 주인이십니다. 그는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즉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기억할 것은 이 진리는 유일성과 불변성,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길" 여기는 다른 길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내가 진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내가 생명"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생명은 선악과로 인하여 저주 아래 떨어졌으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다스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은혜를 힘입을 때 영생을 얻게 됩니다.
4. 빌립의 요구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이 말씀은 삼 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 하였습니다.
도마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일로 주님이 가시는 길을 질문한 것같이 빌립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빌립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셔서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천사가 있었습니다(창 18:22-33). 그러나 하나님은 참 신이시니 인간이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는 순간이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안으로 보려고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와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여기서 "이렇게 오래"라는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생명과 구원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셨으나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메시아를 대망하던 유대인들이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어둠에 속한 자들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역사를 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절).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일을 시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은혜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고, 나는 무익하다 할지라도 주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 되어서 살아계신 주님의 영광을 땅끝까지 펼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다른 보혜사
요14:12-21
지난 목요일 다비다 여전도회에서 개최한 경로잔치는 참으로 보람된 일로 생각됩니다. 성도들이 기쁘게 봉사하는 일로 인해 목사는 인사받기에 분주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음식을 드시고 나갈 때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목사님, 은혜 많이 받고 갑니다."하고 답례도 했습니다. 어쩐지 그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라는 마음이 들지 않고 모두가 주님 찾아온 성도들 같이 여겨짐은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줄 압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전통을 살려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봉사하는 분들이 은혜 가운데서 수고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목사님, 여전도회 회비가 많지 못한데 경로잔치를 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예산도 자체로 해결하도록 해보십시오." 했는데 그 말에 순종하였더니 풍성하게 잔치를 하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크게 감사드릴 일은 모든 사람이 힘입게 된 봉사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우리 모두 선한 일에 힘쓰고 선한 사업에 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성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에게 잠시 떠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모두가 근심에 젖어 드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절) 하셨습니다.
1. 성령의 인격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동등합니다. 또한 성령은 지성과 감정, 의지의 구분이 뚜렷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요14:26), 우리가 주의 뜻을 배반하고 등질 때에는 우리의 대적이 되어 심판을 내리시고
(사63:10), 또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행16:7).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시면 주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서울대 병원에 문병한 일이 있는데 "목사님, 이제 퇴원하면 신앙생활 철저히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는 누구나 다짐할 수 있는 결심인 줄 압니다. 은혜가 귀한 줄 알았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여 주의 뜻을 이루고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명칭
성령에 대해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성신, 또는 성령입니다. 그 말이 헬라어로는 '피라클레토스' 곧 대언 자, 중재 자, 상담 자, 돕는 자, 위로 자, 옹호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사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의 새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3. 성령의 사역
1)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이 고백이 은혜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신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죄로 인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속한 일을 벗고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력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술에 중독되었는데 자기 행동이 얼마나 미웠던지 "목사님, 제가 한 번만 더 술을 입에 대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이요?" "개지요. 정말 술은 입에 안 댈 겁니다. 맹세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보면 또 술을 먹고 그 말을 반복하고, 그러다가 생을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기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 입문할지라도 은혜의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은혜의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갖가지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우리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어떤 은사를 주시는지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8-11).
모두가 적소 적기에 알맞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은혜입니까?
이 선물을 묻어두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할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바로 왕의 천병만마가 추격할 때 막다른 골목에 처한 모세는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출14:16).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닷물이 물러가고 육지같이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또 보십시오. 바닷물이 육지같이 나누어질 정도의 강풍이라면 사람인들 그 앞에서 어떻게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바람이 미치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심을 믿으십니까?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 은혜 내려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3) 삶의 차원과 임무를 달리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어둠의 세상이요, 장차 멸망할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를 가도 슬픔과 고통,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땅에서도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아무리 세상이 좋다 하여도 천국과는 비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세상에도 천국 영광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은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명감은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를 보십시오.
① 진리를 대적하는 교만입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③ 선교적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
의사의 자격증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군인에게 들려진 총과 칼은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서요, 성도에게 허락된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4) 언약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우리에게 임한 주의 성령은 믿음의 보장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장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이 시간에도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이 진리의 성령이 영원토록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요14:22-27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는 구정 명절과 팔월 한가위, 다음에는 제 생일날이 제일 기다려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평소에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서 고생했던 일들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입맛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너무 흔한 음식이라 그런지 먹는 즐거움을 옛날처럼 느끼지 못하고 명절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여유만 있으면 다른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마음껏 독서를 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인생의 연륜이 높아가는 분들이라면 별 차이가 없을 줄 압니다.
1. 선한 목자와 양
제자들은 양을 위하여 목자를 희생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므로 근심하였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 문제로 근심할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것같이 항상 기적의 떡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시므로 염려할 것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주님과 동행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실 줄 믿습니다. 다윗이 곰과 사자와 싸워서 양을 지켰던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2. 제자들의 근심
제자들은 가룟 유다의 반역과 베드로의 부인, 그리고 주님과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는 보혜사 성령이 아직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여 성령의 열매 맺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개척 교회에 다니는 총각이 은혜를 받고 결혼 비용으로 준비해두었던 천만 원을 감사예물로 드렸더니, 그 신앙에 감동된 아가씨가 시집오겠다고 하여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은행원이라 이천만 원씩 융자를 받고, 또 아가씨는 더 많은 결혼 비용을 준비해 놓아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빌립의 계산법으로는 기적이 이백데나리온이 부족했으나 오병이어의 역사로 일어난 믿음의 역사는 모두가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에는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을 믿으니 그와 같이 나를 믿으라.
②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③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자연히 나를 믿게 된다.
④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는 해석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혹자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맨션을 지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주의해야 할 일은 천국은 미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믿음의 준비가 미완성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은 "내 아버지 집은 영혼의 순결함과 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신화"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신화가 아닙니다. 천국은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요 또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천국 시민은 완전 상태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말입니다. "천당에도 사람들의 불완전성이 용납되는가? 그럴 수 없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영화로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단번에 죽으심으로 그들을 완성하셨다. 그것이 우리 영혼에게 무궁한 위로와 안식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3. 보혜사의 언약
보혜사 성령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언약입니다. 우리는 보혜사의 언약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의 진리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5-26).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지금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한 변화와 진리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오순절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나는 주를 모른다, 나는 그와 상관이 없다고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그처럼 담대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돌무덤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을 천사와 같이 빛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원수를 향해 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이제 옛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산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행하신 복음 사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5)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하였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이 보장되고, 성령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평안의 선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이 평안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미국에는 끊임없는 총기 사건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강도와 절도, 흉악범 사건으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흉악범들은 평안할까요? 그들은 더 불안할 뿐입니다. 밤낮 여론의 화살을 받으며 잠 못 이루는 당국자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어디에도 참 평안이 없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요? 구원의 은혜로 천국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로 가난하게 생계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땅값이 금값으로 오르게 되자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어 두 아들에게는 큰 아파트를 사 주고 자기는 남은 땅을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의 밭에 버려진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으려고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죽은 후에 보니 베개 안에 적지 않은 현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제이 쿨드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평안은 허망한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안을 보십시오. 돈이 없어도, 건강을 잃어도, 심지어 내 모든 것을 원수에게 빼앗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성령의 은혜보다 더 귀한 보물이 있을 수가 없으며, 진리 안에서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세상 것은 그림자요 모두가 눈요기에 그치지만 주님 주시는 평안은 영원합니다. 오늘 이 선물 받기를 원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고 헛된 것을 비우십시오. 육신의 사욕과 정욕을 청산하시고, 진리의 보혜사 성령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강물 같은 평안이 넘치고 새로운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이 은혜가 우리 민족, 또 땅끝까지 미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열매 맺는 교회
요15:1-4
나무가 성장해야 열매를 맺는 것같이 신앙이 성장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1-2)
1. 열매의 종류
1) 좋은 종자와 나쁜 열매
이를 또 참포도와 들포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연생태계에서는 무슨 종자를 심든지 그대로 결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포도원 노래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5:1-4).
2) 사망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
나쁜 열매가 세속화로 진리를 변질시킨 것을 말한다면, 사망의 열매는 육신이 죄의 종으로 말미암아 맺는 열매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우리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생애에서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멍에 아래 있는지 자신을 살펴서 죄에서는 해방되고 의의 멍에 아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좋은 열매 맺을 수 있는 사람
지금은 과학적인 영농 방법이 아니고는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을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유능한 인력들이 농촌을 외면하는데 이스라엘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감사드릴 일은 복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인해 복음의 중심지는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이스탄불로,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러시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구라파로 들어간 복음은 청교도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와 우리나라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생명과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우리에게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맡겨주신 사명인 줄 알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열국에 증인 될 사명 자의 임무를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당연히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이는 진리 안에 거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2)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젊음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허랑방탕하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물질은 중요합니다. 그럴지라도 재물이 허영과 사치, 향락을 조장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 없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희생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4-25).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요 부활의 진리입니다. 어떤 분이 위대한 사람이요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 진리가 믿어집니까? 기회를 잃지 말고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좋은 열매
1) 회개에 합당한 열매
이 열매는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찾아 돌이키게 된 일이 그렇게도 중요함을 알았다면 우리는 죄악의 세상에 얽매였던 모든 문제를 청산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9).
하나님의 명하신 계명을 깨뜨린 행위가 죄악이라면 마땅히 하여야 할 본분을 불이행한 것 또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은 죄와 또한 부지중에 지은 죄 모두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용서받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기도의 열매
기도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교회요, 기도가 잠든 교회라면 죽은 교회입니다. 또 기도는 신앙의 원동력입니다. 우리 모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주의 손길에 붙들림 받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방심은 금물입니다. 의심하므로 두 마음을 품는 일이 죄악이라면 나태와 방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원한을 품고 간구하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물밀듯이 임할 줄 믿습니다.
3) 봉사의 열매
이 열매는 몸으로 맺는 결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충성하여 많은 열매를 맺되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9-11).
폐 일언하고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이 복 받은 분임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4) 전도의 열매
이 열매는 천국에서 받을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의인 아흔아홉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전도는 하면 좋고 안 해도 무방하고 그렇게 생각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죄인을 방치하여 지옥에 떨어졌을 때에는 그 피 값을 전도자에게서 찾겠다고 하였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내가 빚진 자"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충성하고 있습니까? 잘못된 타성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경성하시기 바랍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변명하지 마시고 자기를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맺은 결실 그대로 보고하면 족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의 반열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포도나무 비유
요15:1-8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입니다. 몇 년 전에 황금빛 들판을 지나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집사람에게 "여보, 나 여기서 벼를 좀 베어주고 갈 테니 당신은 여기서 구경 좀 하시구려!" 하고 땀을 씻는 농부에게 낫을 빌려 얼마만큼 베었는데 너무도 힘이 들어서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은 농부들의 수고를 알지 못하기에 음식 귀한 줄을 모르고 먹다가 버리는 것이 많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
주님께서는 영생의 진리를 일깨워 주시려고 철학이나 과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시고 평범하게 자연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사5:1-7; 시80:8-16; 욜1:7; 렘2:21; 겔19:10).
이 비유는 가지가 뿌리를 통해 수액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듯이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로 열매 맺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농장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다른 천체와 달리 하나님의 농장입니다. 아무리 농사짓기가 힘들다 할지라도 농부의 마음은 더 많은 농토를 소유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광활한 지평선 위에 펼쳐지는 농장을 보고 "우리 조상들도 그런 곳에 가서 자릴 잡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릴 일은 진리의 농사 곧 영의 농사는 영토가 있어야 짓는 것이 아니므로 땅이 좁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토가 넓어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특별 계시인 성경으로 말미암아서라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태어난 거제도가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큰 섬이라 하지만 칠십년대 까지만 해도 어디에 있는 섬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나 그곳에서 대통령이 나온 후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2:6).
무슨 말씀일까요? 베들레헴이 유대 나라에서 큰 고을이 아닐지라도 그곳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구주가 나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셨는지 아십니까? 지구라는 농장에서 인간 농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심도 인간을 위해서요,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육지의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식물이 좋아하는 거름을 주어야 하고 식물을 해치는 병해충은 막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농장을 살찌우기 위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지구라는 하나님의 농장을 더욱 기름지게 해야 합니다.
또 한편 하나님의 농장이 영적으로는 마음 밭이 되므로 전도자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바울의 영향력이 오늘까지도 살아서 역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불타는 영감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설교할 수 없다고 하여 강단을 잃은 다음,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친 요한 웨슬레의 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독재나 폭군들같이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지 않았어도 그 영향력은 인류 역사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사람으로 구원 사역에 더 크게 이바지하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2. 열매 맺는 비결
포도나무 가지 된 우리가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농장에 심긴 포도나무는 관상목이 아니라 우량종 극상품 포도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품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진액을 받았습니까? 은혜의 열매를 맺으시기 소원합니다. 식물은 거름을 주는 대로 수확을 많이 내는데, 은혜받은 성도는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기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
2)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절)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셨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므로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었으므로 은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성도가 성도의 구실을 하지 못하면 교회에서 제명해 버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종말적인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또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겔15:6-8).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제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어요. 그 때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더 잘 믿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을 거두시기 전에 열매 맺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 받을 믿음을 가지십시오. 주님께서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소원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을 풍족히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5-7).
죄인 된 근본을 알았다면 겸비한 마음으로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상달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사 59:1-2).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마음을 비우시고 죄악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이유
품질 좋은 열매를 많이 수확하는 것이 농부의 소원이라면 하나님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마땅히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농장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브라함은 독자를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순종하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서 주님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생애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무엇일까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귀중함을 알았다면 더 큰 영광 드러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여제자 다비다의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생활을 그대로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무엇을 명하든지 복종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육신의 정욕을 다스려야 합니다. 법궤를 메고 벳세메스로 향하던 두 암소는 송아지의 울음소리에도, 좌우에 있는 먹이의 유혹에도 치우치지 않았으며 채찍질하는 사람이 없어도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이성 없는 짐승도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목적지로 갔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리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 장로 교단에서 유명한 윌버 채프만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뉴욕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본래 술주정꾼으로, 하루는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당신의 아들이 마차에 치어 병원에서 죽어가니 속히 가보라고 하여 병원으로 갔는데, 숨져가는 아들이 내 손을 잡고 '아빠, 이번에는 아빠를 안 놓칠래요. 아빠가 나를 천국에서 만나주셔야 해요'하고 눈을 감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술을 끓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간증입니다. 그 어린 생명은 숨지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아버지를 구원해내었습니다.
세상을 어둡게만 보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물결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라면 어떠한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주저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위대한 결단으로 하나님의 농장을 풍년들게 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아멘-
내가 떠나가는 것이
요16:1-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1절). 이 말씀은 14장에서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15:24).
이는 유대인들이 정죄 받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메시아의 행적을 보고도 불신하고 도리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7-38).
1.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주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절).
만일 그리스도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보다 더 불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구원받을 길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행적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일언반구 구명운동도 없이 복음 사역에만 이바지하는 주님께 한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였을 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4-6).
과연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어 구원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2. 잘못된 믿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2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악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15:22-23).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 기본적인 양심
2) 공익정신
3) 사상과 이념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죽인 일로 영생의 진리와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3절).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 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절).
3. 고난의 복음을 말하지 않은 이유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절).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복음 사역의 초기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사역 초기에도 고난의 복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5:10-12; 10:17).
다만 그들이 당할 시련의 원인과 목적에 대하여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죽음과 부활, 승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또 이 문제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한꺼번에 이 모든 사실들을 알리실 필요가 없었던 것은 주님이 그들과 삼 년 이상을 함께 계셨으므로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가르쳐 주실 충분한 기회가 있었으며, 또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때 충분히 밝히시므로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은 주님이 앞서가시며 재난의 압박감을 담당하고 계셨으므로 주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보다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곧 주님이 죽으신 후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과 같은 일이다(7절). 성령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치신다. 이제 주님이 그들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그들 앞에 닥칠 일들을 충분히 알려주시고, 성령이 오셔서 주님이 계시는 동안에 하셨던 일을 하시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할 문제는 신앙의 성장도에 따라서 복음의 깊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곧 고난의 복음은 복음의 진수요, 절정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이 고난의 복음은 장성한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여러분! 아직도 눈을 즐겁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고난의 복음을 소화할 수 있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4.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고난이 고난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불행이지요.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곧 부활의 복음이요, 승천의 복음이요, 보혜사 성령강림의 복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절).
여기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이 오실 목적과 그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해주십니다.
죄인을 대속하신 분은 그리스도요, 영원한 목자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 말씀이 곧 보혜사 성령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성령이 기뻐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진리의 지식을 온전하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삼 년 동안 주도 되고 선생도 되어 제자들의 말을 씻기시면서 천국 복음을 가르쳤으나 제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우리들 중에 누가 크냐"하고 자리다툼을 벌렸는가 하면, 가룟 유다 같은 배신자도 나오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흩어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이 임하므로 진리의 지식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2-13).
3)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해주십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켜 땅끝까지 진리의 증인 되게 해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보혜사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1:8).
이는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변하는지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나를 도구로 삼으실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이는 신적인 권위로 진리를 증언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의 외침 소리에 삼천 명, 오천 명이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바울은 땅끝까지 진리의 증인으로서 모든 생명에 대해 내가 빚진자라 하여 불타는 사명감에서 순교를 각오한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4)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11).
성령의 은사 받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때 모든 은사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은혜 충만, 진리 충만하여 십자가를 바로 지고 의의 면류관 받아 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중보 기도
요17:1-12
본 장은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올리신 중보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관해서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 적이 없었다."(Melanchthon)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권위를 주는 인장이다."(Calvin)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의 풍성한 것은 측량할 수 없다"(Luter)
"이는 성경의 말씀 중 가장 쉽고 뜻이 깊은 한 장이다"(Bengel).
이렇게 주님께서 올린 이 기도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사(요13:1), 그중 하나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기도에서 특징을 찾는다면 그 효험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아닌 택한 자들을 위한 기도요 또 하나 되기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1. 기도의 중요성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이미 예정된 일이므로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주권 행사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필요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하시고자 원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2-3).
이렇게 전능하신 주님이신데 주님의 공생애를 보면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신 것은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겨 주신 교훈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일을 평범하게 생각하면 평범할 뿐이나 진리적인 의미를 깨달을 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생명의 교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1) 기도로 영력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막9:22-26).
이렇게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반응을 보였고 축출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8-29).
악령은 권력이나 돈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요. 기도는 왕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에스더와 같이 기도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여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몽하였고, 또 "칠십 년이 차면 돌아오리라"(렘29:10)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밤이 옵니다. 이같이 인간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따라 움직여지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 구원받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감사와 찬양을 잃게 됩니다.
감사와 찬양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는 무신론자로 전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
여기서 예수의 근본과 그 영광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예수의 근본은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2:6).
주님은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실 뿐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를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6-58).
2)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등합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5절).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으로 그 영광은 동등합니다. 특히 육신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신 일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은총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3. 영생의 지식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이 말씀은 이방인의 다신론적 신관에 비해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유대교인들을 비롯하여 회교도나 소시니언주의자들도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씀은 이성적 이해가 아니라 인격적인 이해와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머리나 가슴의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결합되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진리를 바로 앎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택한 자를 위한 기도
본 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올린 중보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멸망 받을 죄인들을 위함이 아닌 믿고 순종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서입니다. 유의할 것은 주님께서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은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절).
대제사장으로서 이 기도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효험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주님의 기도는 베드로를 실족하지 않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수제자가 되게 하였느나 주께서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한 일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로 전락하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
멸망 받는 일을 하나님의 예정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 받지 않고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할지라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데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약입니다. 심지어 시중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중에 항정신성 의약품이 있는데, 그것을 다량으로 복용하여 환각에 빠져드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일을 시켜서 합니까?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자들을 환영하고 맞아 줄 나라는 없을 줄 압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절).
택한 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 되기를 위하는 기도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성도가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일이 왜 그처럼 귀중한지 아십니까?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와 혈색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입니다. 물론 구분은 있을지라도 차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교회는 진리 안에서 하나입니다. 분쟁을 일삼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이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전1:13).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2) 악에 빠지지 않도록 올린 기도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에게서 뇌물을 받고 제공해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칼을 휘두르는 용병술이 아니라 미인계 작전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을 죽였습니다(민25:1,9).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절).
우리는 세속화를 방지하고 맡은 본분을 다하는 그 날까지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서 자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영원히 효험이 있어 오늘도 나를 악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승리자로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빌라도의 법정
요한복음 18:1-1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절).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 기도를 마친 후에 기드론 시내를 지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편 골짜기를 흘러 사해로 들어가는데, 지금은 물 없는 계곡으로 감람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고대 교부들 중에는 이 동산을 에덴동산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이 타락하였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주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 되기를 소원합니다.
1. 가룟 유다도 알던 곳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2절).
겟세마네 동산은 초행이 아닌 '가끔 모이시는 곳'이라 하신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면 거기 가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교훈하신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가룟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 누구를 막론하고 비밀이 노출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십칠 세의 영국 소년이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소의 비밀을 컴퓨터 통신을 통해 외국에 빼돌렸다는 기사를 보고 보안이 그렇게까지 허술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의 비밀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공개된 비밀입니다. 마귀에게 약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8-9).
그 비밀이 무엇일까요?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할 진리의 보화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보화를 발견했습니까? 아직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보화를 소유하지 못했다면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경건의 비밀을 악용하여 진리를 파는 망령된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헌신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꾼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배신자의 입맞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16:20; 고후13:11).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살전5:26).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벧전5:14).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배신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27:6).
가룟 유다는 배신의 입맞춤으로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았습니다. 유다같이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야 합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3절).
그 당시 군대는 라틴어로 육백 명의 숫자 'cohors'라는 설과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manipulus' 곧 이백 명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바울을 체포했을 때도 천부장이 말 이백사십 필, 보병 칠백육십 명을 동원한 사실(행 21:31)을 보아 그때에도 상당한 숫자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마26:48-49).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역사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나 배신자 가룟 유다는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3. 메시아의 표적
한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예수를 잡으려는 자리에서도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표적이 있었습니다(눅22:52).
1) 땅에 엎드러진 원수들
이 사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심리적인 해석으로 장엄하신 인격 앞에 놀라서 엎드러졌다.
2) 말씀의 능력 앞에 엎드러졌다.
칼빈(Calvin)은 그리스도께서 내로라하시는 말씀에 엎드러진 것은 이사야 십일 장 사 절에 나오는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위엄 앞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2) 말고의 귀를 붙여주신 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절).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
"칼을 칼집에 꽂으라"(11절),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22:51).
그 때 말고의 귀가 아닌 팔다리를 잘랐어도 주님께서 붙혀 주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나타내신 일에 비하면 이는 작은 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원수까지도 가리지 않으시고 선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의 능력이 내게 임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여 그 뜻을 준행해야 합니다.
하루는 어느 집사님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조카가 주일부터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아도, 약을 써도 낫지를 않습니다. 몸이 불덩이같이 열이 오르고 있습니다. 전화로 기도 좀 해주십시오." 하면서 바꿔주는데 훌쩍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화기를 대고 기도를 올린 다음 "이제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줄 믿으라"하고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교회를 나왔습니다. 몸이 어떠하냐고 물었더니 "이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4. 하나도 잃지 않으시는 주님
믿었던 사람이 기대를 저버릴 때 아픈 마음은 더합니다. 감사할 일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8절).
고난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시고, 우리에게는 대속과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베드로의 용기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성격이 급했습니다. 그는 모두가 주의 곁을 떠나도 자기만은 주님을 따를 것과 또 죽기까지 변하지 않을 것도 다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로라" 하실 때 원수가 엎드러짐을 보고 용기를 발휘한 줄 압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그의 연약함이 여지없이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15-17).
여기에 다른 제자는 요한입니다(요13:23).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는 설과 베드로처럼 질문을 받지 않았다 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5-27).
마태복음에는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마26:74) 하였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행적에서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많이 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새사람이 되어 후일에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6.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주님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29-30).
이렇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행악자"라 하였으나 주님의 생애를 보면 선한 일 외에 누구에게도 악한 일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요18:31).
이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예수를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정죄할 법이 없었으므로,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못하였노라"(38절)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 없이 죄인이 받을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여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의 반열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이 구원의 진리가 우리들에게 뿐 아니라 온 세상에 퍼지도록 모두가 분발하여 진리의 증인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위에서 임하는 권세
요19:1-12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하면서도 예수를 채찍질하고,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3절) 희롱하였습니다.
이 저주와 고통은 죄인 된 내가 받을 형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1. 그리스도에게 씌운 죄목
1) 신성을 모독한 죄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0-33).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죄는 레위기 24:16과 신명기 13:1-5에 있는 말씀을 적용한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유대인들로부터 그토록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난이 두려워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하였다면 그것이 거짓말이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여야 할 정도로 미워한 이유는, '우리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3-44).
2) 백성을 미혹한 자(눅23:2)
이는 주님께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려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근거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목은 로마의 행정관들에게 자극을 주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설명에 의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치안 방해와 폭동을 일으키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더욱이 주님께는 많은 무리들이 따라 다녔기 때문에 그것이 폭동과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보이기가 쉬웠으나 그도 역시 무고일 뿐입니다.
3)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 자(눅23:2)
이것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기 위해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했을 때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하셨습니다.
이는 정해진 국세는 나라에 바치고 성물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국법에 따라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국민은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물은 어떻습니까? 성물에 관한 문제는 국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국가에서 재산을 압류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성물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물 때문에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모든 것이 내 것인데 왜 십분의 일을 떼어야 하는지 아까운 생각이 들지요. 마치 아이들이 부모가 사다 준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는 것과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하고 철이들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효도하는 마음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될 때 부모는 재산과 생업을 자식에게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나 됨이 주님의 은혜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로소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의 권세와 능력이 내게 임하게 됩니다. 진실로 은혜를 받기를 원하신다면 헌신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2. 빌라도의 권세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8절).
그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인해서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무죄한 자를 죽이도록 허용한다면 벌을 받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마27:19).
빌라도는 주님의 무죄와 유대인들의 계획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 심문을 하였으나 주님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침묵을 생각해보면,
1) 이미 주님께서 말씀한 바 있었기 때문이요(요18:36-37),
2) 진리에 관해서는 말씀을 하여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3)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0-11).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의 권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역사의 운행자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누가 바로를 애굽의 왕으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느브갓네살을 바벨론의 왕으로 세웠습니까?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권세자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오. 교만이 들어가서 헤롯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의하십시오. 인간이 높아져도 인간 이상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낮아져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닌 그대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왜 교만하게 되는 것은 첫째는 인생의 근본을 알지 못해서요, 다음은 자기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누구와 비교하여 교만해지거나 비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신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3. 인민재판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절).
이 말씀은 빌라도의 무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소리치는 유대인들과 비교하여 그 경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절). 이것이 곧 인민재판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과오를 살펴보면,
1) 예수를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은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불러 놓고 호통을 쳐도 지역구 시민들 앞에서는 머리를 숙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분이 국가 정책을 입안하고 공무원들을 감독하는 위치이지만 지역구민이 뽑아주지 않으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에 꿈을 가진 자라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국회의원을 누가 선출합니까? 지역 국민입니다. 국민이 뽑아주지 않으면 학벌이 높아도 될 수 없고, 돈이 많아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육신의 생각으로 치우치면 영원히 죽고 진리를 따르면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유혹이 있을지라도 혈육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진정 역사적인 안목을 가졌다면 진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진리를 위한 불이익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2) 자기를 왕이라 하므로 가이사를 반역하였다.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처럼 투쟁하던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지로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고 있는 맛사다 요새에는 주후 칠십 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엘리에젤 장군이 삼백 명을 거느리고 삼 년 먹을 양식을 저장하고 천수를 받아 마시면서 이 년 동안 로마의 실바 장군에 항거하다가 자살로 끝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학살당한 육백 만에 이르는 생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에는 꺼질 줄 모르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데, 거기에 새겨 있는 글귀입니다.
"이러한 참상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또 다른 추방을 초래할 것이며,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치욕을 보상받는 길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왕조가 무너진 BC 586년부터 AD 1948년까지 2,500년이 넘도록 나라 없이 살아온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민이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것을 기뻐할 이유가 없었으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바라바를 풀어주기 원했던 것같이 이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제로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절하고 스스로 이방의 종으로 살겠다는 주장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여러분! 지금 어떠한 멍에 아래 있습니까? 죄의 멍에는 꺾어 버리십시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
"위에서 임하는 권세", 빌라도는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겼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그 뜻에 합당하게 쓰임을 받아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나를 만지지 말라
요20:1-18
그동안 요한복음을 상고하는 가운데 이제 그리스도 생애의 절정인 수난과 부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이시므로 그의 말씀이 진리요, 그의 생애가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도 진리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을 듣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는 지각이 밝아지기를 소원합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신 거룩한 생애
1) 성탄의 진리
사람은 모두 부정모혈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존재하게 되지만 주님은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첫 번 성탄 때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군 천사의 노래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이 거룩한 성탄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 그 앞에 예물드리고, 엎드려 경배하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2) 고난의 진리
악인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보응일 뿐 달리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범죄한 자들이 받을 고통을 대신 담당하신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죄인이 구원받을 대속의 진리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3) 죽음의 진리
만일 사람이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래지 않아 세상은 포화상태를 이루어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자연공원은 동물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동물들에게는 낙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육식동물들도 함께 있어서 과잉 증가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늘어나는 초식 동물들로 인해 초원은 사막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병마를 근절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살 설계도를 꾸밀 것이 아니라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결실입니다.
저는 병원에 가지 않고 건강을 잘 유지하다가 주님 앞에 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료보험 제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가난한 서민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가슴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전국에 있는 교량들을 점검하였는데 수많은 곳에서 붕괴의 위험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공사에 문제가 있다고도 하겠으나 늘어난 교통량과 중량을 견디지 못한 데도 있습니다. 강철도 몸살을 견디지 못하는데 인체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건강에 주의하십시오. 내구연한이 되었다면 철거하는 것은 당연한 것같이, 사람도 할 일을 다 했다면 세상을 떠나는 날은 영광이 될 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보배로움은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4) 부활의 진리
인생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부활의 소망입니다.
부활 사상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이집트의 피라밋도 부활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떠나서는 우리가 생명 부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를 위한 영생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나와 무관하다면 부활의 진리도 무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음부에 떨어진 홍포 입은 부자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더 큰 고통만 안겨 줄 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와 무관하게 넘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영생의 유업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2. 주님의 시신을 모신 손길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시신을 모시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입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회원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요19:38).
물론 그들의 역량으로 예수를 대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요19:38).
그때에 함께 등장한 인물이 니고데모입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향유를 부은 손길이 복된 것 같이 시신을 위해 쏟는 정성이 복되어 그들의 정성이 생명록에 기록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무덤을,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숨겼던 것도 이제는 당당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이 밝혀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미칠 불이익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귀중한 것은, 이적과 권능을 행사할 때나, 무덤 문을 여시고 영광중에 나타나신 주님이 아닌 차디찬 시신을 안장하기 위해서 드린 정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빈 무덤을 찾은 발길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절).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받은 후 값진 향유를 주님께 부은 여인입니다. 공관 복음에는 그 때에 다른 여인들도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목도한 사람들 중에는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제사장들의 뇌물을 받고 거짓말을 퍼뜨린 장본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군병들은 부활의 사건을 접하고도 믿지를 않았는데 우리는 보지 않고 믿게 해주신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9).
새벽에 빈 무덤을 찾았던 성도들의 발길에 대해 웨스트 콧이 정리한 것입니다.
① 새벽 5시 :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 등이 무덤을 향해 출발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도착하고 즉시 되돌아가서 베드로에게 고했다(요20:1).
② 5시 30분 : 다른 여인들이 도착하였고, 그때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마28:5; 막16:5).
③ 6시 : 요안나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할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았다(눅24:1-4).
④ 6시 30분 :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이르러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간 다음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셨다(요20:3-13).
⑤ 7시 :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고(요20:14-18), 다른 여인들에게도 보이셨다(마28:9).
⑥ 오후 4시-6시 : 엠마오로 향하던 두 청년에게 나타나셨다(막16:12; 눅24:13-31).
⑦ 8시 :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36; 막16:14; 요20:19).
본문에서 유의할 것은 빈 무덤을 보고 되돌아간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20:9).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26).
그들은 주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다가 성경을 깨우쳐 주실 때 비로소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지각이 열릴 때 부활하신 주님, 영광의 주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나를 만지지 말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여러분! 소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6절).
선한 목자 주님과 사랑하는 그의 양이 만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 슬퍼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누워있는 시신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으니 얼마나 극적인 광경입니까? 이 영광스러운 은혜가 주님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음성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17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하셨고, 다른 여인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28:9) 하였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주석가들의 견해입니다.
① 마리아가 본 것이 영체인지, 육체인지 확인하기 위해 만지려 했으므로
② 영광스러운 몸이 더러워질까 해서,
③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인간적인 영화에 머물지 않기 위해,
④ 성령 안에서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만진다'는 말은 원어로 '비끌어 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극적인 그 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있습니다. “I don know how can do love you” “나는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17절).
이 말씀은 여기가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복된 소식이 있을까요? 그리스도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지체하지 맙시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할 임무는 마리아에게만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명하시는 주님의 분부입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인간적인 생각은 던져버리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오늘은 지구촌 시대입니다. 전 세계의 움직임을 안방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은 보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은 보지 못하고 구원의 손길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복된 발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9
오늘로 요한복음 강해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요한복음이 담고 있는 진리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곡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도 요리하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영양을 달리 섭취할 수 있듯이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부스러기 은혜로도 족한 줄 알고 주의 긍휼을 사모하던 여인에게 은혜 베푸신 주님은 오늘도 동일합니다.
1.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복음서에 담긴 내용은 그리스도의 행적을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보면,
1)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불신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나사렛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 기록된 대로 오실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사시다가 죽으셨으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모르기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¼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나 아직도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일 출퇴근 시간이면 북새통을 이루는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로 그렇게 바삐 오고 갈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지요. 사는 날 동안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람은 내일 종말을 맞는다 할지라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생의 길이 열려 있는데도 그 길을 등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10:28).
불행의 요인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가난이나 질병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밝혀주는 것이 복음이요,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2)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단이 등장할 때 다른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귀신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귀신이 참 목자가 아니므로 양들을 유린하기 위해서입니다.
삯군과 이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양들을 살렸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새로운 복음" 운운하면서 양들을 유린하고 있으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목자가 있을 수 없듯이 주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를 기다릴 이유도 믿을 대상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 족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1:16-17).
형통한 복을 누리십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곤고가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품에 안겨서 영생 복락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2.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2-3).
베드로가 믿음이 사라져서 갈릴리로 돌아간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접한 후에 고기 잡으러 가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서 평안을 전하고 분부하시기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28:10)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빈 그물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 잡으러 갔던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1)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절).
이는 마치 삼 년 전 주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를 연상하게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처음에는 고기의 수를 밝히지 않았는데 본문에는 밝히고 처음에는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하는 고백이 있었으나 본문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 말씀에 의해 일어난 기적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5-6).
처음 만났을 때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하셨는데 본문에는 "배 오른편에 던지라" 고 하셨습니다. 물론 배 오른편과 깊은 곳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명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과 질서를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무익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음식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2-13).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1-43).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계셨을 때와 달리 음식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확신을 위해서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은 전과 달리 주님을 어떻게 따르고 섬겨야 할지 한동안은 혼동이 있었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는 상태에서도 갑자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고 또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시므로 시공을 초월하신 부활의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6-39).
이제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영화로운 몸인데 제자들은 여전히 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음식을 드셨습니다.
3. 베드로에게 분부하신 말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주님은 "게바" 곧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하신데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이 말씀은 남성이 아닌 중성으로서 '이것들'이라는 말씀으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배와 기구, 잡힌 고기, 모두가 다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또 이 질문은 마지막 만찬에서 그가 맹세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아가파오”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필레오” 하나이다 했습니다. 두 번째도 “아가파오”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고 세 번째는 주님께서 “필레오”로 물으셨고 베드로도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다시 베푸신 은혜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내게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의 분부를 들으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지금도 나의 손길이 필요한 주님의 양들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시기 소원합니다.
4. 베드로의 최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8-19).
여기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순교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수제자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섭리로 그가 받을 면류관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터툴리안이 베드로의 순교를 처음으로 전하고 오리겐이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베드로는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후에 죽었다는 설과, 또 주후 64년 7월에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는 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그림자 같고 베틀의 북과 같이 지나갑니다.
여러분! 하나뿐인 생명을 어떻게 사시렵니까?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교사들은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모두를 복음 위해 이 땅에 바치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되 순교자의 영광은 영원토록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순교를 다짐하고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