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강해설교

사도행전

주님만 주님만 2022. 3. 16. 17:33

추천의 글

 

설교는 설교자의 생명이요, 기도의 연장이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생명적인 관계없이 설교할 수 없고, 기도 없이

설교할 수 없다. 동시에 바른 신앙이 없이 설교할 수 없다. 바른 신앙에 따라 바른 설교가 생기고, 바른 설교자에 따라 바른 설교가 가능하다.

설교는 단순한 연설과 다르고 웅변과 다르다. 설교는 주어진 말씀을 풀이하여 그 교훈을 삶의 현실 속에 적용시키는 교육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유중근 목사는 꾸준히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 그동안 여러 권의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이번에는 사도행전을 다루어 강해 설교집을 내놓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사도들을 움직여 세계 선교의 과업을 감당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본 강해서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도 함께 역사하여 세계복음화의 촉진제가 되는 결실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앞서 낸 책들이 교계에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듯이 이 강해서도 교계에 큰 유익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성 한인 교회 김의환 목사

 

권두언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교회마다 부르짖는 구호인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구호나 어떠한 모양보다 경건의 능력에 있는 줄 압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일은 인위적인 방법이나 혁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로 인해

비잔틴 문화가 시작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는 엄격히 구별해야 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세속의 나라가 아닌 진리의 세계를 위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주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을 통해 일시에 삼천 명, 오천 명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키고, 귀신을 물리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복음이 120년 사에 일천만이 넘는 신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세속화 현상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잃어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로마 교황청에 풍요가 넘칠 때 "이제는 '금과 은은 없으나' 하던 베드로 시대는 지나갔다"는 교황의 말을 듣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 폐하여! 옳습니다. 그렇기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던 시대도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성령의 감동을 능가할 보배는 없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왕하2:14) 부르짖던 엘리사와 같이 "베드로의 하나님, 지금은 바울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니이까?"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은혜의 역사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행전 강해 설교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교정에 애쓰고 수고한 손길들과 희생적인 기도로 뒷받침을 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추천사를 써주신 김의환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이 세계적인 선교의 사명을 띄고 사역하는 한국 교회에 한 알의 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자 유중근

 


복음의 시작

본문: 행1:1-11

 

우리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복음의 시작과 함께 일어난 성령의 역사 곧 은혜의 사역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천 년의 세월 속에서도 달라질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초대 교회와 함께 임한 성령의 사역은 오늘도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1. 사도행전의 저자

사도행전은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의 서두에 동일한 인물 곧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양편 모두 그에게 바쳐진 것으로 보아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과 동일 인물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가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골4:14; 몬1:24; 딤후4:11)에 헬라인으로서 의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누가가 태어난 곳이 시리아 안디옥이라 하고, 램시(Ramsay)는 사도행전에서 빌립보의 지역을 생생히 묘사한 것을 보아 빌립보와 연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의학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 의사인 누가의 저작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입니다.

 

2. 사도행전의 주제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이는 사도행전의 주제가 누가복음과 연관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증언한 복음의 발자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선포했던 것같이(행10:37-38), 제자들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 사역이요, 또한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땅끝까지 퍼져나가는 복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감사할 일은 우리가 이 대열에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닌, 은혜와 진리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복음이 땅끝까지 퍼지고 만민들이 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될 때에 주의 영광은 온 세상에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의 사역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또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에서 이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님께서 나타나신 사건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사십일이라는 기록은 본문에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3절).

 

부활하신 후에 하신 사역의 특징

1)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이것이 귀중합니다. 주님의 생애를 다섯 부분으로 구분해 보면,

a. 기다림의 기간(탄생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을 때까지 삼십 년)

b. 광야 사십일의 시험 기간(시련과 영적인 준비)

c. 공생애 삼 년(실천)

d. 무덤 속 삼 일(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침묵)

e. 부활 후 사십일(확인, 증거, 결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임무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재림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일관성입니다. 상황과 시간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눅16:19-29)에서 홍포 입은 부자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음부에 떨어진 후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나사로를 보내어 지상에 있는 다섯 형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어서 지금이라도 믿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문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보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와 선지자들을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표적 보여주기를 구하던 유대인들이 무덤에서 살아나온 나사로를 보고 믿었습니까?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1:10-11).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신 일도 동일한 복음이요. 보혜사 성령의 사역도 같은 복음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2) 주의 나라를 교훈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현된 천국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는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은 어떠한 곳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은,

a.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의 능력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A Sphere of Saving Power).

b. 의의 영역입니다(A Sphere of Righteousness). 곧 불의가 용납될 수 없는 곳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c. 모두가 만족하게 복을 누리는 곳입니다(A State of Blessedness).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중요한 것은 천국 영광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끝가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3) 재림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구원 사역은 완성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불원간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날에 받을 영광을 위해서 충성하십시오. 신실한 약속 붙들고 인내하십시오. 내가 받을 상급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지상 최대의 날, 우리 모두 상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4. 마지막 분부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4-5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입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

아직도 제자들은 세속의 왕국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신한국 창조'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오늘, 육백 년 수도 서울의 역사에서 역대 시장들 중에는 결재를 한 건도 하지 못하고 육 일 만에 물러나는 시장이 있었는가 하면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해 정의 실현에 앞장서야 할 사람에게 불의가 있다면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 것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말은 되겠지요.

우리는 썩어질 것, 없어질 것, 욕된 것을 투자하여 영광된 것을 수확하는 진리의 역군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를 누린다면 나쁠 것이 없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하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7절).

역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에덴에서 선악과로 범죄하게한 마귀의 궤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날을 알게 되리라" 이것은 마귀의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아들도 천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절).

진리의 증인 역시 성령이 주인이 되고, 나는 종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에 복종하십시오. 충직한 청지기 바울과 같이 우리도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요, 많이 수고함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의 시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라면 마지막 때 불림을 받은 우리들은 이제 성령으로 열매 맺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복음의 사역

행1:4-8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성령에 붙잡혀 복음 사역에 이바지한 전도의 행적입니다. 주님의 구속 사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심으로 완성이 되었으나 만인을 구원할 이 복음을 증언하는 임무는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펼쳐질 복음의 사역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탄생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는 구원의 섭리를 생각해 본다면 신약과 구약이라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율법은 이방과 선민의 벽을 만들어 놓았으나, 복음은 이 벽을 무너뜨리고, 만민에게 선포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뜻에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구약시대라 하여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진리인 줄 믿어야 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유의할 일은 유대인이라 해서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어도 용납되고 이방인만 죄를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 죄를 범할 때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이방과 선민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죄의 율법을 인생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까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감사할 일은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므로 복음을 등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같이 주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삭개오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대속의 은혜를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1. 주님의 분부

주님께서 삼 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복음을 전하신 행적을 살펴보면 너무도 미미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경우에는 오천 명, 사천 명이 운집하였고, 또 복음과 함께 권능을 행사하여 수많은 사람을 병마에서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 년 동안 따르던 제자들과 소수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얼마나 남았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약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까지입니다. 그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가 이르기까지는 주님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보십시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2-14).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삼 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하였고 또 부활 승천하시는 것을 목도했기에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분부가 내려진 곳이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는 곳입니다. 생수의 원천이요, 은혜의 동산입니다.

저는 지난주 성도 중에 상을 당한 분이 있어 장례식 주례를 하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고인이 일평생 우상만을 섬기다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 불림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생명과 구원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분부를 기억하고 기도합시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영광의 날이 돌아올 줄 믿습니다.

 

2. 주님의 약속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

여기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5절)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원을 찾고, 목마른 사람은 샘을 찾듯이 내 영이 갈급할 때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모든 문제는 성령이 임할 때 함께 해결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안에는 온갖 좋은 것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무엇으로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힘입은 바울은 어떠한 환경도 극복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의 권한

주님의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달리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축출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비유로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것이 재림의 날짜입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7절).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은 탈선으로 마귀의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라도 자기의 위치를 이탈할 때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유6절).

최초의 불행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사탄의 교만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비밀 즉,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우리가 받을 구원에 관계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물어보기 전에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오늘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국이 이렇게까지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나를 천국으로 부르신다면 천천히 가고파서 애쓰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때가 이르기 전에 빨리 가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맡긴 임무를 마치고 주님 앞에 서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혹자는 지금은 종말적인 복음만 필요한 때라고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오신다는 약속을 망각하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날에 받을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4. 성령과 능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8절).

말세를 대비한 성도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줄 압니다. 주의 사역에 임할 일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절).

‘땅끝까지 내 증인’ 이 말씀은 인간적인 생각에서라면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또 기뻐하시는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더 큰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땅끝까지 주의 복음 증언하는데 내 생명 제물 되도록 기도합시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지각이 열리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입을 열어 복음을 증언할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성도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내놓고 주님을 섬김으로 그들 중에 가난한 자들이 없어지고, 날마다 믿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땅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 큰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유다는 제 곳으로 갔나이다

행1:12-26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운명이 결정됩니다. 가룟 유다의 선택과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역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1. 기도에 전념하는 제자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막8:31) 말씀하므로 베드로가 항변하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하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과연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재림의 약속과 함께 마지막 분부를 남기신 다음 그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시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3-14).

기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를 따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

특별 기도는 일반 기도와 달리 기간을 정하고 특별한 기도의 제목을 따라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은 단순하지만 응답은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쏟으면서 올린 기도는 십자가를 두고 올린 기도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2. 성령의 계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 임하기를 믿고 기도하는 무리들은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15절)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된 가룟 유다에 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20절).

여기서 유의할 것은 다윗이 당한 고난이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과 연관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와 대적들을 의식해서 올린 기도가 곧 예수님께 닥칠 예언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제가 사우나에 갔는데 누가 와서 등을 밀어 주기에 돌아보았더니 이재행 성도였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꿈에서도 건강해진 제 모습이 보여집니다"라고 하기에 은혜로 다시 태어났으니 간증문을 써오라고 했더니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표현력이 없고, 또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썼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쓴 간증입니다.

"저는 이 병이 들기 전에 토목공사 일을 했습니다. 1992.8.1 휴가를 얻어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사람과 다음날 피서를 떠나기로 의논하고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알, 두 알, 계속 먹어도 두통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약국에 가서 술을 먹어 이렇게 머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조제를 해주어 약을 먹었는데 혀가 굳어지면서 말이 안 되고 입이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제된 약이 잘못된 줄 알고 다 토해내 버리고 그 밤을 지낸 다음, 병원에 가서 진찰이나 받아보고 피서를 떠나는것이 좋을 것 같아 가까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일시적인 약 중독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면서 주사를 주고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괜찮으리라 안심하고 그 길로 피서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서를 가던 중에 다시 손과 발이 마비되고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가족에게 오늘 밤을 넘기기가 힘들다면서 곧 죽을 것이니 장례식 준비를 하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은 무사히 넘어갔으나 대, 소변을 받아내며 한 달을 지낸 다음 진찰한 결과는 뇌경색 중풍이라 하였습니다. 설마, 내가? 그러한 병은 나이 드신 분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이십구 세의 나이, 장가를 일찍 가서 아이들은 다섯 살, 세 살, 거기다 평생을 이런 몸으로 누워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처럼 싫어하던 예수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병원에 와서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나도 하나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에는 기도를 받는 환자가 그렇게도 부러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나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후에 병원 안에 있는 교회에 가서 서투른 기도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하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이라 퇴원하였는데 마침 한 집에 살고 있는 김경숙 성도를 통해 해성교회를 알게 되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교회에 나왔고, 그날 목사님은 '형제가 병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신앙생활을 잘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던 몸이었지만 이제는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십리라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성교회를 알게 하시고, 아니 해성교회를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몰랐다면 살았을지, 죽었을지... 아마 살았다 해도 매일 집에 누워서 한숨만 내쉬며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었을 텐데... 이제 저는 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할레루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가룟 유다의 최후

세상에는 불행을 디딤돌로 삼아 행복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은 복을 알지 못해 불행하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열두 사도의 자리가 얼마나 귀합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열두 진주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고,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계 21:12-14).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 영광을 다 잃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7절).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았던 에서와 같이, 유다는 은 삼십에 주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그 망령된 자의 결과를 보십시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18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막14:21).

물질 때문에 진리를 팔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어디든지,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감수하십시오. 우리는 썩어질 것과 없어질 것, 욕된 것을 투자하여 진리를 사는 천국 시민입니다. 이 보배를 잃지 마십시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

그보다 더 값진 보배가 없음을 알았다면 이 진리를 소유하고 또 진리 위해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19절).

하늘나라 기초석에 녹명 될 자가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역사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우리는 이 둘 사이에 놓여있는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19-20).

 

4. 제비 뽑아 사도된 맛디아

가룟 유다로 인해 공석이 된 사도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우게 되었는데 거기는 일정한 기준을 두었습니다.

1) 삼년 동안 주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21-22절).

2) 제비로 뽑았습니다.

제비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파별로 기업을 배분하였고,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울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지금 총회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선거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3)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4-26절).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가룟 유다의 최후와 맛디아의 영광,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죄의 보응이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육체의 길을 걷지 말고 진리의 길, 영생의 길을 걸어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행2:1-13

 

사도행전의 복음사역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의 사건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포되는 이 복음이 온 세계에 퍼진 것을 보면 주님 오실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천군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영광중에 주님 맞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때와 기한

시간은 부단히 흘러갑니다. 의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이 없으며 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와 기한이라고 하면 성격이 달라집니다. 만물들은 때를 따라 변화를 가져오고, 또 생육과 번영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때와 기한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패는 기회 곧 "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을 살펴보면,

① 선행된 시간(과거) ② 동시를 가리키는 시간(현재) ③ 다가오는 시간(미래)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2:1)

이 말씀은 현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십 일인데 주님께서 "열흘 후에 성령이 임하리니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믿음의 준비를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를 마친 후, 귀염둥이 아이가 유행하는 독감으로 고생을 하여 목사에게 기도를 받았는데 다음 날 심방을 가는 길에 "목사님, 우리 아이가 언제 아팠던가 할 정도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저도 기도 받을 것을 잘못했어요. 사실 저도 몸이 안 좋거든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1:7).

이것은 제자들이 무관심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할 본분을 다하여 그날을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행2:1).

무슨 말씀일까요?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정해진 그날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오늘도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 충만, 진리 충만, 능력이 충만하여 복음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난 징조

징조는 어디까지나 징조일 뿐 징조가 성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징조는 동일한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1)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절).

성령은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편재성입니다. 요리문답에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신이시니 안 계신 곳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장소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성령이 시공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언제, 어디에, 또 누구에게든지 받을 준비가 되면 역사하십니다.

2)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절).

혹자는 이 은혜를 방언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혀가 아닌 타오르는 불꽃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바다와 요단이 물러가며 산들과 작은 산들이 어린양같이 뛰놀던 것같이(시114:4-5) 성령이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 성령의 은사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4절)고 했습니다. 유의할 일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와 성령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방언만이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이므로 바울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가운데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4-7).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는 보면 어린아이와 같았으므로 분쟁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3:1-2)

은사의 다양성을 보십시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6).

여기서 무엇이 여러 가지이며, 또 무엇이 하나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도 중요하나 하나가 더 중요함은 모든 것이 하나, 즉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사라면 주 안에서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누구에게 유익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다음에는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자에게 유익이며, 또 신앙생활에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지 말고 은혜의 빚진 자로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 각기 맡은 사명을 따라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4. 복음의 증인들과 구원받은 청중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5절).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 내시의 경건을 주님께서 받으시고, 백부장 고넬료의 경건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각국에서 모여든 이 무리들 에게도 성령으로 증언하는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다(41절)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때 나타난 성령의 은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1) 복음을 전하는 입이 열렸습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6-8절).

여기에 대한 주석가들의 말은 "그때 듣는 자들의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각국의 방언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은 언어 장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모두 전도 폭발 훈련을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될 줄 압니다. 그러나 훈련받기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묻는다면 복음에 대한 사명감이 새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된 자와 한가한 사람이 받을 상급은 동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분발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모두가 입이 열려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복음을 듣는 귀가 열려졌습니다.

제자들이 각국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들었던 무리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듣는 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듣기 위해 히브리 방언을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할렐루야, 아멘과 같은 전문적인 용어는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의 말과 글로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5. 의혹하며 조롱하는 무리들

밭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복음을 받아들여 복을 받는 성도와 거역하는 죄인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는데 의심하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자이며, 어떤 사람이 불행한 자입니까? 구원받을 기회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면 외면하고 등을 보이는 자는 불행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구원의 은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손길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내게 임하든지 복음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5-16).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가 임했던 것같이 오늘 이 자리에도 주의 성령은 역사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입이 열리고, 듣는 귀가 열리고, 깨닫는 지각이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 부르심을 받은 충직한 청지기로서 주의 사역에 충성하여 의의 면류관 받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베드로의 설교

행2:14-21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아홉 번 있습니다(1:16-22, 2:14-36, 3:15-26, 4:8-12, 5:29-32, 8:20-25, 10:34-43, 11:5-7, 15:7-11).

물론 이보다 더 많은 복음 선포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그의 설교가 특별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본문에 있는 설교는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담대한 믿음

바울의 성격은, 예리하고 민첩한 반면에 베드로는 혈기 많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주님의 칭찬을 듣는 일도 남달랐고 책망받은 일도 그랬습니다. 또한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나 세 번이나 맹세코 부인하였던 약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순절 사건으로 일어난 역사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심약하고 비굴했던 옛사람이 아니라 사자와 같이 당당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4절).

성령의 불길로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진리를 비방하는 무리를 향해 담대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면 우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을 때, 20일 동안 특별 기도에 참석한 K집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놀랄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담당 의사는 제 나이가 오십 대만 되어도 이런 말을 안할텐데 아직 삼십 대 젊은 나이이니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권유해 왔습니다. 그나마도 이 병은 확실히 치료되는 약이 없으니 입원하여 경과를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음성은 떨리는 목소리였고 눈물에 잠긴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우리 모두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요엘의 예언

사실 그때 베드로는 청중들을 위한 설교를 준비했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모르고 비방하므로 이것은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 요엘을 통한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증언하였습니다.

1) 말세의 의미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6-18).

여기서 유의할 것은 말세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분명히 말세인데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말세 또는 종말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쓰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이를 잘못 해석하므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일들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세에"라는 말은 '끝 날들에'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하는 말세는 메시아가 오시기 직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2:2; 미4:1).

기독교에서는 이 말세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곧 종말적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주님께서도 종말적인 복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사도들도 임박한 종말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종말적인 복음의 중요성은 종말 의식을 통해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곧 종말적인 복음이요, 중생의 복음이 종말적인 복음입니다. 이것이 곧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요, 정과 욕을 죽여야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의 역사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비방하던 자들이, 이제는 성령이 역사함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17절).

이는 히브리 표현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의 영을 보내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17절).

모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8절). 이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진 말씀이요, 또 복음의 사역과 함께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3) 심판의 징조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9-20절).

이는 마태복음 24:29에 있는 말씀입니다. 진리적인 안목이 아니고는 깨닫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를 가리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De Wette), 또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현상으로(Holtzmann, 박윤선) 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초월하여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발생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영화로운 날" 대신에 "무서운 날"이라 하였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불의한 자들의 심판을 받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으므로, 지상 최대의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이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부끄러움 당하지 아니하고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다윗의 예언

지금까지 베드로는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을 무리들에게 전한 다음 이제는 조상 다윗의 예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유의할 것은 복음의 정통성입니다. 복음은 뿌리와 줄기, 열매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뿌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세의 율법 곧 구약입니다.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1:46).

이것이 나다나엘의 선입관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다윗이 섬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불신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9-32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면서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은 스스로 그들의 역사를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34-35절).

이제 베드로가 성령으로 증언하는 복음은 마지막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전도자의 진실한 소원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동기가 어떻게 되었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무리가 복되고, 이 말씀을 듣는 모두가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6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널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배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았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8절).

너무도 귀중한 은혜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의 복음은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 영광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하나님의 구원 섭리

행2:22-36

 

본문 말씀은 오순절 이후 은혜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의 안목으로 본다면 이는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이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1. 율법 이전의 시대

율법 이전의 시대에는 구전에 의한 믿음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믿음과 구원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부모의 신앙으로 자식이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식의 믿음으로 부모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아브라함 때까지 경건한 노아를 비롯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아벨 등 의의 반열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른 자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경건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2. 율법 시대

율법으로 이방과 선민이 구별되었을 뿐 아니라 율법을 따라 성소에서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유의할 것은 모세를 통해 선포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정죄하고 심판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약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락한 인생이 죄에 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이방과 선민의 차별이 없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2-13).

 

3. 복음 시대

복음 시대에 와서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이 아닌 신자와 불신자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구약 시대에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과 신약 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연결을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전과 교회는 천국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구약 시대의 성전은 지정된 장소와 율법의 가르침 속에서 의식적인 제사로 드려지는 그림자인 반면, 교회는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체가 됩니다. 이것은 물론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상교회는 전투적인 교회로 불완전한 상태이나 천상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완전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0-24).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신으로 등장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신 참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는 진리를 찾아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상달되는 제사를 위해 율법적인 의식을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면 어디든지 족하고 보혈의 공로라면 언제든지 사유함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은혜 시대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목자를 기다릴 이유가 없고 주 밖에서는 소망도 없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우리는 영원토록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삼 년이나 양육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보십시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던 자들이요, 또 주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목도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죽는 데까지도 주님과 동행하기로 다짐하던 베드로마저 비천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약점이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5-26).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전도자라 할지라도 주님보다 훌륭하다면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도 목자를 칠 때, 양들이 흩어지고 말았으나 오순절 후에는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주님보다 더 훌륭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보혜사 성령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갈급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지각이 열리고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질 줄을 믿습니다.

 

5. 은혜받은 성도의 생활

어떤 때에는 은혜가 충만할 때 주님께서 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공이 없는 병사에게 훈장을 줄 수 없듯이 하늘나라 상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받은 성도는,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우리 모두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절).

이러한 기도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부터 올렸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마르다는 여기에 순종하였고 죽은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은혜받은 성도는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기도 줄이 막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매일 매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메마른 자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병든 자도 기도하고, 믿음이 약한 자도 기도하십시오. 충성된 믿음으로 기도하고, 더 큰 사명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올린 야곱의 기도, 원대한 사명감에서 부르짖은 다니엘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봉사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절).

이런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땅에 숨긴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더 귀중한 보배를 소유했으므로 이제는 썩어지고, 없어지고, 욕된 것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분한 재산과 소유는 분명히 물질이었으나 이 물질이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진리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15:42-43) 하였습니다.

4)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절).

모두가 은혜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받은 심령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가정도 천국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3-25).

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5) 전도의 꿈이 있었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하늘과 땅이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오순절에 성령 받은 무리는 백이십 명 정도, 개척교회의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이천 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백이십 명을 통해 시작된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적이며 역사적인 종교로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사명이 있습니까? 주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줄을 믿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 모두 이 능력 힘입어 주님께 큰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이상적인 교회

행2:37-47

 

오순절 성령 강림은 지상교회의 탄생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은 성령으로 세워진 이상적인 교회 상, 곧 지상에 이룩된 천국이라 하겠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영감으로 받은 성전의 설계도에 따라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것같이, 초대 교회는 지상교회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비교해 보면 지상교회는 전투적인 교회로 불완전한 교회요, 천상교회는 완전한 교회 곧 승리한 교회입니다.

 

1.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교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절).

이는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가 사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7-9).

이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기록된 진리 곧 로고스가 있는가 하면, 지금도 역사하시는 레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 곧 영감의 말씀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선지자의 예언으로 기록된 진리로서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물론 주의 말씀이 항상 책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병들고, 가난하고, 좌절과 낙심에 빠진 사람에게는 위로와 소망, 또 새 힘을 줍니다.

의사가 진단을 바로 해야 처방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치료받기를 거절한다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국 LA. 오렌지 장로 교회에서 집회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기도 받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기도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기도를 받고, 또 자녀들도 모두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대학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말하기를, "엄마, 이상해요. 강사 목사님이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까요?"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어떻게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성령은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치유의 은혜를 베푸셔서 병도 치료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7-8).

 

2.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는 교통사고를 보면 사람이 살았다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순식간에 변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절).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애태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얼마나 귀중한 은혜입니까? 율법은 할례와 유월절 양으로 언약을 세웠으나 복음은 세례와 성찬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율법으로는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대인들도 구원받을 수가 없었으나 복음은 만민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절).

성령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령은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보증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0-41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요, 엄청난 역사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3.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절).

이제는 누구도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할 수 없게 된 것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믿음의 증거는 이렇게도 귀합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사도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곧 나와 내 가정이 구원받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았으므로 한 말씀도 땅에 떨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교제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교제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교제(사귐) (fellowship, 고후6:14, 갈2:9)

은혜받은 성도는 서로 깊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역을 비롯해서 여러 부서와 교육기관과 조직이 있습니다.

특히 남녀 전도회를 통해서 활발한 교제가 이루어짐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2) 협력 (association, 빌2:1)

상부상조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협력은 신앙을 떠나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상생과 상극을 이루는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원수가 누구며 협력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지 깨달았다면 성도지 간에 서로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3) 헌금 (contribution, 고후9:13, 롬15:26)

생활이 넉넉지 못한데도 원인은 있겠으나 대개 성도들의 교제에는 헌금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떠한 단체나 조직이든지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경비가 필요합니다. 사실 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나 많아도 문제가 되고 적어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하였습니다.

돈이 많아도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기뻐하는 재물이라면 욕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

모두가 은혜 충만, 진리 충만, 물질 충만이었습니다.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그렇다면 누구의 것일까요?

"은혜로 받은 것 은혜로 드렸으니 모두가 주님의 것이로소이다" 이 믿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믿음입니까?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행4:34-35).

이를 가리켜 초대 교회 공산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유물 공산주의와 은혜 가운데서 나누는 봉사 생활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공산 종주국인 소련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것을 우리는 목도 했습니다.

공산주의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허구에 그칠 뿐이지만 은혜로 이루어지는 공평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농부가 밭을 갈다가 숨은 보화를 발견하고 재산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이 물질을 심고 진리의 보화를 거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초대 교회와 같이 은혜와 진리, 물질적인 풍요의 복을 함께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4. 구원받는 숫자가 더해 가는 교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6-47).

이것이 땅에 이루어진 천국생활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두가 은혜로 사는 몸, 순교의 정신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배와 그물도 버리고 주님과 함께하던 제자들이 이제는 성령의 역사로 수천 명의 헌신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려움도 사라지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오직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높이 드러나고 이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기를 원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 아멘 -


우리를 보라

행3:1-10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는데 이 일 외에도 사도들을 통해서 많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행2:43).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방법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1. 정해진 기도 시간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제 삼시, 여섯 시, 아홉 시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는 대단한 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횟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올리느냐가 중요하고, 또 응답받는 기도가 더욱 중요합니다.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고, 이로 인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 그 기도는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다니엘은 더 존귀한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귀중합니다. 사무엘도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은 모두가 기도의 사람이요, 또 위대한 업적은 기도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규칙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심각한 문제라면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수시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두 번 기도하여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메고 온 앉은뱅이

저는 토요일이 되면 사우나에서 아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어린 아들과 함께하고, 저는 아버님을 모시고 사우나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스스로 자립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어릴 때는 어려서 못하지요. 또한 성장할 때에는 배운다고 못합니다. 장성하여도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역시 천차만별이지요. 거기다 쉬는 시간,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 또 병들고 약해서 치료를 받는 시간, 그러다 보면 인생은 황혼기에 이르게 되니 과연 베틀의 북과 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력이 있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이것만이 내게 있어 가장 값진 업적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으므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앉은뱅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선한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3-4).

날마다 그 자리에서 구걸하던 이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도움을 구하는 일에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멸시와 천대도 익혀졌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절).

여기서 사도들과 앉은뱅이는 각기 다른 눈으로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앉은뱅이의 운명을 측은히 여겼으나 앉은뱅이는 물질적인 동정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라 하여 구원받는 일이나 병 낫기를 원하는 마음이야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미 체념하고 이것이 자기의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에게 옅은 동정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명감이 있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명 의식이 있는 자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내게 있어 이러한 능력이 없다 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각기 받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떻게 쓰임을 받든지 주의 손길을 대신하여 봉사하면 족할 것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손길과 발길이 주님의 이름으로 쓰임을 받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모두가 달란트대로 마음을 같이 하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귀한 선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6-8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일은 마치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사건과도 비길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주의 종들은 당연히 물질을 초월해야 하지만 물질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물질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2).

이것은 물질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불편에 비해 복음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4:15-16).

왜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계속해서 행하지 않은 줄 아십니까?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할지라도 오직 봉사하는 손길을 통해 열매 맺기를 원해서였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7-18).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6절).

전도자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 있다면 복음이요, 권능이 있다면 역시 복음입니다.

전도자에게 복음이 없다면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하겠으나 문제는 주의 복음이 살아서 역사할 때 이러한 권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누가 베드로와 요한을 그처럼 담대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은과 금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사도들은 앉은뱅이의 요구대로 물질 구제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제와 동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손길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4. 하나님께 영광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절).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으나 사도들은 자기들의 경건이나 능력에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들의 기쁨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 믿음으로 전도자 바울이 존귀한 사람이 되었다면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을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10절).

그때 베드로가 청중들을 향하여 외친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이렇게 어떠한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자신을 낮추고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그 믿음이 보배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이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삼아 쓰실 때에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충직한 증인으로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일에 앞장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완전히 낫게 하였다

행3:12-26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은 참으로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더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1. 전도자의 자세

차세대 항공기로 우리나라의 국방을 담당할 F16 전투기가 훈련 도중 원인 모르게 연이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기종에 문제가 있었어도 문제려니와 조종사의 실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항공기 한 대 값이 적어도 수백억을 한다니 그 피해가 엄청날 줄로 생각됩니다. 부여받은 임무가 중요할수록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특히 진리의 도구로 쓰임 받는 전도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우리가 믿고 전하는 이 복음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해서 문제가 따른다면 이는 전적으로 전도자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자기의 위치를 지킨 사도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1절)

그때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말할 것도 없고 군중들도 베드로와 요한을 평범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으나 사도들은 자기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느 때에 위기를 맞게 되는지 아십니까? 힘든 시련에 빠지게 되었을 때와 또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했을 때보다 높아졌을 때 자기를 지키는 일이 열배는 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만일 그때 청중들이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이 기적을 보고도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정상이 아니지요. 사도들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 무리들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못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주님께만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복음 전할 기회를 선용한 사도들

전도자로서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일에는 어떠한 이유나 핑계도 있어서 안 될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말을 소개합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나는 사만 이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실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시기에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린 종자가 싹이 나고 잘 자라 수확기에 많은 결실을 얻게 되면 다행이지만 쭉정이로 변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뿌려야 합니다. 이렇게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땅이 양식을 제공해 줍니다. 농부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복음 전할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중풍에서 살아난 이재행성도는 이제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게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13절).

여기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약의 진리와 무관하거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

이것이 곧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복음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다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3절).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요, 나사렛 이단을 뿌리 뽑는 것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한 나사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14-15절).

진실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진리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면서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 떠난 위선의 말을 쓰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로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목도한 무리들도 증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 일로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줄 압니다. 법적인 용어로 '심증'과 '물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이 틀림없을지라도 심증만으로는 법적 구속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물증이 있으면 변명의 여지없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밝히는 데는 반드시 물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확실한 증인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하십시오. 영적인 체험을 가졌습니까?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주의 이름으로 일어난 기적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완전히 낫게"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입니다. 이는 신체의 전 부분, 즉 신체의 모든 부분이 완전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기적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과거 공화당 시절에 중앙정보부라 하면 권력이 막강하여 국민 모두가 공포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의 아들이 정보부장의 비서로 있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단속을 하는데 그 장로님이 하는 일은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막강한 사람이나 대통령의 직함으로도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없지만 주님의 이름으로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고 또 응답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 앞에서는 귀신이 물러갑니다. 또한 영생의 은혜를 힘입고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얼마나 귀중한 은혜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한 증거입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

유대교가 기독교의 뿌리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라신을 섬기는 마호멧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라'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그들은 구약의 정통성을 저버린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귀에 음악 같으니 예수 복된 예수

♪아 귀하다 그의 이름 갈보리 산의 어린 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 복된 예수

 

3. 고난의 복음으로 일어난 기적

기억해야 할 것은 죄는 알고 짓든지 모르고 짓든지 형벌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범했다면 몰랐다는 것으로는 이유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무고히 사람을 죽이고도 살인죄인 줄 알지 못했다면 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죄의 댓가는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17절).

이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덮어 나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알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랬다고 할지라도 오늘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지상 왕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는 세속의 왕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과학 문명도 시날 평지에 쌓아 올린 바벨탑은 될지라도 천국은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과학 문명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할 때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유대인들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8절)

그러므로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처럼 몸부림을 쳤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예수님께 힘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것은 하나님의 뜻에 조력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는 그들이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이유를 든다면

1) 메시야를 불신하고 배역하였기 때문이요,

2) 필요악의 도구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9:17).

이 일로 바로는 영광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26:24).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될지라도 필요악의 존재로 전락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사유의 복음으로 일어난 기적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절).

감사드릴 일은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은 사유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진리의 원수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해당됩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어떻게 사유함을 얻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보혈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회개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다만 회개할 기회를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것이 우리의 죄를 도말시켜 주시는 복음입니다. 사유함을 받은 죄는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이제는 마귀의 정죄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절).

비로소 무거운 멍에에서 해방을 받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이 사유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5. 재림의 복음으로 일어날 기적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20절).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초림하신 주님께서는 내 죄를 사하시고, 재림하시는 주님은 죄와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도록 때가 이르면 다시 오십니다. 주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 우리 모두 영광 가운데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 아멘 -


어느 것이 옳은가

행 4:1-22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자, 제사장들과 성전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일어나서 사도들을 결박하고 또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면 성령이 충만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어떻게 사도들을 대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 빛의 역사와 어둠의 역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며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그때 주님은 40일 동안 광야로 나가서 금식하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삼 년 육 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일 때 "불로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 하고,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단판의 대결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명하고 바알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마음은 더 강퍅해져서 엘리야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므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생각하면 빛 앞에서 어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둠이 왕 노릇하므로 성령의 역사가 왕성하면 마귀의 역사도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진리를 싫어하는 자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1-2절).

마땅히 복음을 앞장서서 선포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진리의 길을 막고 도리어 박해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싫어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1) 어둠에 속한 자들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20).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한때는 문명의 발상지로서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들이 허무하게 사라져간 흔적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이는 불의와 죄악으로 정신적인 문명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떨며 범죄하지 말고 빛에 속하여 진리에 순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비진리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는 불신자를 의미하는 것보다는 신앙을 가지고도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는 신앙의 탈을 쓴 비진리가 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넘긴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요, 제사장들입니다. 주의 복음을 싫어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처럼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오신 메시아를 미워하였을까요? 비진리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었고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 같은 모순이 있을까요?

그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고, 율법은 있었으나 복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바로 알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닌, 나사렛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소자로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의 원수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마귀와 가까이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만들고 다음에는 불신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진리는 비진리로, 마귀의 소리 곧 비진리를 진리로 믿게 합니다.

미국에서 다윗파 사교 집단의 교주 코레쉬의 방화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단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천구백팔십 년대부터 육육육 숫자풀이로 지구 종말이 왔다고 떠들던 종말론 자였습니다. 그동안 부인을 십팔 명이나 거느리고 엽색 행각을 해왔는데도, 그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결국 불타서 죽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아직도 미국에 이러한 단체들이 칠백 개나 있다고 합니다.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3. 복음의 권세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6-7절).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8-10절).

얼마나 당당합니까?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경우와 비교해 보십시오. 한 편은 종교적인 배경을 가졌고 한 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공문으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없으나 성령의 능력은 일으켰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해 박해하고 대적하는 원수 무리의 반열에 서지 않고, 믿음과 순종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전도자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10:35).

 

4.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머릿돌을 버린 자는 누구이며, 버려진 머릿돌을 모퉁이 돌로 삼아 새집을 지은 분은 누구일까요?

지금부터 사천 년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예정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것은 진리의 기초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있는 피사의 사탑은 어느 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초가 약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기초가 완벽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의 많은 민족 중에서도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보면 다른 민족은 자연 발생한 민족이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의해 탄생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바울의 고백대로 모든 인류 앞에 생명의 빚을 진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중대한 사명과 임무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교라는 민족 종교로 전락하여 오늘까지 이방과 선민이라는 구약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능하신 하나님을 유대민족에 국한된 신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초를 잘못 놓았기 때문이요, 모퉁이의 머릿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인류 앞에 영생의 소망을 주는 나라가 아닌 진리의 원수로 전락하였습니다.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새집을 지으셨는데 그 집이 곧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명수 강물이 유대 예루살렘이 아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흘러 나와서 세계 만민의 영혼을 소성하게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5.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쌀통에서 쌀이, 물통에서 물이 나오듯, 전도자들의 입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증언하는 전도자들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고 또 담대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이는 스스럼없이, 막히지 아니하고, 더욱 담대히, 라는 의미입니다. 또 유의할 것은 사도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잘못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은 세상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그들과 함께 하는 성령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의 증인 되기를 소원합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사도들을 위협하고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외친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관원들은 백성들로 인하여 그들을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한 후 놓아 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능력 받아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땅에 이루어진 천국

행4:23-30

 

지상 천국은 가능한지? 그리고 이루어진다면 그곳은 어디이며 또한 천국 생활은 어떠할지? 이러한 질문은 인류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일일 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모델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스위스의 몽블랑 등정을 하고 황홀경에 빠져 과연 천국이 여기보다 좋을까 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눈요기일 뿐이요, 인간이 기대하는 소원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에 있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높이가 1612피트(약 496m)나 되는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리본폭포(Ribbon Fall)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폭포들이 아홉 개나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도 왜 그런지 그런 곳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어려울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주일에 섬길 교회도 없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진정으로 만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어떠한 그림 속에서가 아닌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풀려난 사도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23절).

그때 사도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인데, 사도들이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또 다시 오실 메시아로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증언하니 그것을 진리로 인정한다면 역사가 뒤집히는데 그대로 둘 수 없지요. 그러나 진실을 뒤집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하나 같이 전쟁과 슬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요, 치열한 국제 경쟁 사회에서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입니다. 소련을 비롯한 동 구라파에서 공산 체제가 무너질 때 드디어 자유가 보장되는 새날이 밝아오는 줄 알았는데 불행스럽게도 민족 분규가 그칠 줄을 모르고, 그로 인해 국가 경제는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에게 사상과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옛날이 좋았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들이 공공연히 나오기도 합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진리는 결박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진정한 자유자 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하셨습니다.

몸은 가두어도 진리는 가둘 수 없으므로 바울은 감옥에서 옥중 서신을 남겼습니다. 무덤 문을 터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억제할 수 없어서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으나 사도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 하고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은혜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2. 일심으로 올린 기도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24-26절).

외부적인 박해는 더욱 내부적인 단결을 가져오고 합심하여 기도하게 하여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힘입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 때문에 닥치는 시험이라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기도하여 더 큰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박해 속에서 더 힘 있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올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1)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29절).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다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위협하고 풀어 주었는데 그들은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러한 기도는 적극적인 믿음에서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올린 기도입니다. 내 힘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는 세상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외부적인 박해를 두렵게 생각하여 믿음이 위축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순절의 사건은 광신자들의 불장난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성도들은 담대했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있을 때는 불같이 일어나고, 사자같은 시험이 있을 때는 사자같이 담대하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자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행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얼마나 든든한 보장입니까? 이 자원을 묻어두지 마십시오. 충성을 따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목적 삼고 기도합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증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30절).

그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로 소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고 권능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사도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고도 복음을 증언할 때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와의 접전에서 거룩한 긴장은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증언되었다고 했습니다(살전1:5).

우리 모두 더욱 분발하고 경성하여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의 응답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절).

이 대목은 중요합니다. 그 무리들은 오순절에 은혜받은 성도들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우리는 반복적인 기도,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은혜 역시 날마다 충만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은혜를 항상 새롭게 또 충만하게 힘입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내 마음대로 받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보사부 장관으로부터 효녀상을 받은 분이 우리 성가대에 있습니다. 그의 지극한 효심을 보면 대통령상을 받아도 마땅할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국민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있는 일이라면 당연지사이므로 하등 기뻐할 일이 못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대상이 엄선될 뿐 아니라 또 그것은 시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 은혜의 선물을 주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요, 주의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메마른 자가 있습니까? 연료 없는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듯이 은혜가 메마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그 품에는 온갖 보화가 다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은혜의 성령이 더욱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4. 땅에 이루어진 천국

땅에 이루어진 천국은 성도가 바라는 최고의 꿈이요, 이상 세계입니다. 감사한 일은 진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천국은 허상이 아닌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땅에 이루어지는 천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불신자들이 말하는 유토피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에 이루어진 천국은 어떤 상태일까요? 그곳은 불신과 불만이 없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곳이요, 거룩한 헌신과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그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은혜를 힘입은 이후부터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좋아져서일까요? 도리어 환란과 박해 중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제 물건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다면 누구의 소유란 말입니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복된 믿음입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때 많은 무리들 중에는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경제적인 논리로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앙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에는 기브츠(협동 농장)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이스라엘에서는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민족의 독특성과 강인함에서 얻어지는 것일 뿐 초대 교회 생활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 하면 기브츠 운동이 협동정신의 소산이라면 초대 교회 생활은 성령 안에서 이룩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여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먹어도 주님을 위해서, 입어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죽어도 주님만을 위해서였으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맛볼 수 있는 구원의 은혜, 이는 받는 자밖에는 알 수 없는 비밀의 은혜입니다.

이제 이 영적인 증거와 체험이 있는 사람은 환란과 박해가 닥쳐도 기뻐할 수 있고 또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초대 교회로 돌아갑시다. 세월은 변해도 진리는 영원합니다. 과거에 은혜를 받았습니까? 또다시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할 일이 있으므로 우리는 더욱 충만한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세대가 악하므로 주의 능력이 갑절로 임하기를 기도했던 엘리사와 같이 우리도 능력 받아 주님 앞에 서는 날 의의 면류관 받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하나님의 심판

행5:1-11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탄생된 교회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유대인들로 인한 불같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의 열의는 더욱 불타올라 구원받는 성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삼천 명 또 오천 명, 드디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 저주받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외부적인 시험도 주의해야 하지만 내부적인 시험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사도행전 4:32-37까지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교회로 아름다운 헌신과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이라 하는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습니다. 그 은혜가 중요합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만일 그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님께 서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주받는 일은 없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 헌신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언제든지 또 무엇이든지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 순종하십시오.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헌신하여 성모가 되었고, 바울은 헌신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존귀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열매 맺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쳤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축복과 저주로 나타납습니다. 이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닌 물질로 인한 시험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고 네게 있는 모든 소유를 바쳐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 할 수가 없지요.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없듯이 진리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육신의 양식은 될지라도 영생의 양식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 받을 육신의 생각에서 돌아서서 영의 생각을 따라 생명과 평강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축복과 저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1-2절).

아나니아는 성물을 도둑질하였고 삽비라는 이에 동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물질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물질이라도 취해서 복이 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욕이 되는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물욕에 치우칠 때 영혼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얼마만 가져가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2절).

생각해 보면 그런 정도의 결단도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때 강제 수단을 동원해서 물질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랬다면 믿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내게 임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거역하거나 소멸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복 받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기억할 것은 생명과 성령의 역사는 거룩한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그때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28, 38).

마리아의 헌신으로 도성 인신의 새 역사는 이루게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주의 뜻을 거역했거나 마리아의 헌신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차질을 빚었을까요? 기회를 잃으면 그들이 주의 영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3-14).

에스더의 결단은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에 육신의 생각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영광의 문턱에서 어둠으로 떨어진 이유를 알았다면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죄가 무엇입니까?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죄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죄는 성령을 거역하고 소멸하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주님께서 죄인 된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거룩한 헌신으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성령을 속인 죄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너무도 놀라운 충격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 마음속의 사탄을 볼 수 있었으나 아나니아 부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은 삼십에 메시아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악한 일을 할 때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에게 예고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마귀가 역사할 때는 육신의 욕구를 충동하여 멸망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진리의 멍에 아래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4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 관리권이 보장되어 있을 때 선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누구를 막론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자가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국민들도 당대에 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성숙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살다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는 자들도 있지만 이는 영혼 없는 짐승에게 해당 되는 말이지요. 사람은 남기는 업적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

사탄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그는 땅 값 일부를 바치는 것마저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탄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다스려야 합니다.

성도 중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얼마 되지 않아 거액의 헌금을 작정하고 절반은 했는데 절반은 하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다가 기회를 얻어 나머지를 한 다음 열 배의 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대책 없이 요구하시는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누릴 영광이요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19:30-31).

 

4. 삽비라가 받은 저주

전도자를 박해하고 죽이는 원수들은 즉각적인 심판이 없었는데 성물에 관한 죄는 즉시 심판을 내렸습니다. 혼이 떠나므로 죽은 아나니아를 젊은 사람들이 장사지내고, 세 시간쯤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나타났습니다. 저주의 죽음이라 누구도 위로하고 슬퍼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교회의 초석을 내려놓는 자리에 불의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던 도르가의 죽음과는 대조가 되는 죽음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8절).

부부가 의논하고 저지른 일이므로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부는 같으니까 산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저주받을 일까지 같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수넴 여인같이 가정을 복 받게 하는 현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망령된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멸망으로 빠지게 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은혜 가운데서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기 소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9-10).

마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각본도 연극도 아닌 사실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충격 요법이나 고성으로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한 번의 회개할 기회도 없이 죽게 한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지은 죄가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에게요, 저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였다는 것입니다. 성물에 대한 죄가 이렇게 무서움을 알았다면 마귀의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사탄을 물리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5. 더욱 견고해지는 믿음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이는 신앙의 뿌리가 더욱 깊어짐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생명과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진리에 바로 서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은 성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나를 통해 영광받기를 기뻐하실 때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결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된 것, 없어질 것, 썩어질 것을 심고 영원한 것을 수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

행 5:12-32

 

하나님은 불의와 죄악을 소탕하고 의와 진리의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탄의 올무에 빠져서 성물을 숨긴 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되자, 그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므로 교회는 질서를 잡고 사도들의 권위도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3-14).

 

1. 복음으로 나타난 표적과 기사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절).

권위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영적인 권위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비주의는 잘못이지만 성령의 은사를 힘입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복음과 함께 많은 기사와 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은사보다 진리 위에 서서 주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신의 위엄과 능력으로 역사할 때는 사람들이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려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기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므로 은사는 복음을 증언하는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 그림자를 통해서 일어난 역사

병든 자들의 심정을 건강한 자들이 헤아리기 어렵지요. 병든 자들은 사도들의 그림자를 통 해서라도 병 낫기를 갈망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5-16).

바울은 손수건을 통해서도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베드로가 ‘나는 그림자를 통해서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하고 자신을 과시하므로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도 병에서 나음 받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따라 주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지난 월요일 밤에 M집사님 내외가 우리 집에 왔기에 반갑게 맞아 찾아온 용건을 물었더니 부인되는 Y집사님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지금 제가 목사님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까?" 하기에 "왜요?" 하니 "목사님, 제 귀를 열어주셔서 잘 듣게 되어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이렇게라도 뵙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바쁘신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쪽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한다고 기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일은 평소에 회사에서 근무할 때 사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또박또박 들린다고 합니다. 물론 설교도 잘 들리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2) 모여든 무리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면서도 은혜는 선택적으로 내린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손이 하나님의 손길을 대신할 수는 없지요. 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으나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으로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작은 믿음을 가지면 작게 역사하고 큰 믿음을 가지면 큰 역사가 일어나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6절)

여기는 선택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힘입은 치유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은 모든 질고와 병마에서 고침을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시기하는 무리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고, 또 은혜가 많은 곳에 시험이 있습니다.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7-18절).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자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복음을 박해하는 그들을 마귀로 간주할 수가 있느냐 묻는다면 그들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박해하는 이유를 보면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이 교만으로 전락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니 그들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사도들이 믿고 전하는 복음이 과연 축출해야 할 사교 집단이라면 은혜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뭇 심령들이 회개하므로 은혜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그것이 문제이지요.

시험에 들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은혜와 진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박해를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1) 스스로 자고하지 않게 하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신적인 위엄과 능력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탈선을 막기 위해 섭리하십니다. 평생을 찌르는 가시로 바울이 기도할 때 받은 응답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바울도 사람이요, 육체를 가졌기에 약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찌르는 가시가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2)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2-23).

제가 어릴 때에는 주의 종들을 천사와 같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서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경우에는 너무도 힘들 때는 잠시라도 멍에를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환란의 길이요, 박해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그래도 기뻐할 것은 이 길이 주님 가신 길이요, 주님이 받으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 더 큰 은혜를 힘입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19-20절).

베드로가 옥에서 건짐을 받은 기적의 체험은 십이 장에도 있습니다. ‘원수들이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매질할 때는 왜 방치해 두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할 것은 잠시 받는 환란보다 주의 은혜는 너무도 크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병들고 가난한 것은 자랑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귀중합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한가할 때 능력 받아 역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모두가 불같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받은 은혜입니다.

나에게만 왜 이렇게 가혹한 시련이 닥치는가 걱정을 하십니까? 내게 임하는 은혜는 더 귀중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회개를 모르는 무리들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절).

아무리 마음이 강퍅하다 할지라도 분명히 옥에 가둔 사람이 다시 성전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했다면 이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경위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하고 소리쳤던 때가 언제인데 이제는 그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한다고 그 허물을 벗을 수가 있을까요? 오히려 성령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죄를 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기회를 잃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옳지요.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과연 엎드려 회개한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과거에 지은 죄를 변명하려 하지 말고 회개하여 사유의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4. 사도들의 증언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얼마나 담대한 믿음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0-31절).

비록 짧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핵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조상의 하나님이라면 유대인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 불행입니다.

이렇게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둔하여져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우리는 보고, 듣고, 깨달아 땅끝까지 증인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가말리엘의 변호

행5:33-42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29-31절).

그때 그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하였습니다.

‘크게 노하여’라는 말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크게 분노할 때와 동일한 용어입니다(행7:54). 극히 강한 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태어날 때부터 완악한 마음을 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거친 세파에 시달려 살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악해지는 것은 종교적인 배경을 두고 있을 때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야고보를 죽인 자들이 다른 사도들인들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이처럼 복음을 박해하게 된 이유는,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소행이 이 진리의 원수요, 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공회원 중에서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변호하고 그들의 분노를 진압하였습니다.

 

1. 덕망 높은 교법사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절).

가말리엘은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 중의 하나로, 랍비 중에서도 선택된 7인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공회에서도 유력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는 그의 발언으로 공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의 전통을 엄수하였고,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도 비교할 자가 없어 '율법의 영광'이란 별명까지 붙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매사에 신중했던 사람으로 격한 감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이성의 판단을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35절).

인간의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사실 그들은 정치적인 문제보다도 종교적인 문제가 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할 때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열국 중에 제사장 민족으로 꽃을 피웠으나 우상을 섬기고 죄에 빠질 때는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당면한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에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는 일보다 하나님께 바로 서는 일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지덕을 겸비한 인격자로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하였습니다. 물론 그때 그가 개종하여 사도들을 변호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로 사도들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가말리엘이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매사에 덕을 쌓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가말리엘의 변호

가말리엘은 자신의 논리를 피력하기 위해 두 가지 전례를 들고 있습니다.

1) 드다의 사건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36절).

요세프스에 의하면 "드다는 자칭 선지자라 하고 요단강 가에서 백성들을 모아 자기가 명령을 하면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호수아 때처럼 마른 땅으로 건널 수 있다고 선동하다가 로마 총독 파두스가 기마병을 보내어 일당을 진멸하고 드다는 목 베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2) 유다의 사건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37절).

이 사람은 '가말라 유다'라고도 하고 '갈릴리 유다'로도 불리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수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 때 하나님의 백성은 오로지 여호와에게만 제물을 바치고 이방의 통치자에게는 납세할 수 없다고 반항을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잘못된 이단으로 유혹하는 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비진리는 시간이라는 시금석이 밝혀줍니다. 기억하십시오. 비진리에 빠져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3) 사람이 대적할 수 없는 일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이천 년대는 과연 지구가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할지라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찾으시면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함이 내게 복이요, 구원이요, 또한 지혜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개종한 사유를 변명한 간증입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3-14).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이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린다면 고통이 더할 뿐입니다. 교법사 가말리엘의 지혜를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릴 수 있겠으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멸이요 심판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1-4).

 

3. 주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을 기뻐한 제자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0-41절).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사도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사도들도 육신을 가진 사람이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였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1).

믿음의 갑옷으로 무장하십시오. 이 갑옷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될 줄을 믿습니다. 또한 사도들이 기뻐하였던 것은 하늘나라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예비 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은 누구에게 기약된 것일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받은 성도들에게 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4. 더욱 불타는 복음의 열기

복음은 요원의 불길같이 박해 속에서 싹이 나고, 성장하고, 또 줄기차게 뻗어나가 오늘에 와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신자와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도 회교권과 일부 공산권에서 공식적으로는 복음 사역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나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들이 종교 자유와 선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세속화 현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영력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었던 것같이, 오늘도 이런 현상들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타성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 바울과 같이 우리도 자신을 다스리기에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일평생 바울을 깨어 있게 한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부적으로는 박해요, 내부적으로는 찌르는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이를 극복하기에 넉넉하였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절).

이 큰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덕과 은혜

행 6:1-6

 

마귀의 계략은 끝이 없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 역사가 일어난 후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들로 구원받는 숫자가 더해지자 마귀는 제사장들을 충동하여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성물로 시험하고, 또 구제와 봉사하는 일로 교회 안에서 화목을 깨뜨리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원망하는 일은 사소한 일로 알고 방치하면 그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짐을 나누어지고 마귀의 올무를 물리쳐야 합니다.

 

1. 크게 늘어난 성도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1절).

"그 때에" 이는 오순절 이후입니다. 또 '제자'라는 용어도 훈련받은 일꾼이 아닌 일반 성도를 두고 지칭한 것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줄 압니다. 이것이 곧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구원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급격히 늘어나는 성도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어떻게 신앙 무장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 손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받는 인적 자원을 바로 흡수할 어떠한 조직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조직이라 하는 것은 마치 학생이 늘어나면 이를 수용할 교실과 교사가 있어야 하고, 환자가 늘어나면 병실과 의사가 있어야 함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서울 인구가 천만입니다. 여기에 위성도시까지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됩니다. 만일 이렇게 많은 사람을 통제할 법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불행입니다.

선, 후진국을 구별하는 가장 큰 척도는 준법정신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준법정신은 국민의 기본적인 행동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인데 거기에 따른 도로망과 교통질서가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가 또한 미국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자동차 수출을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늘어난 차로 인해 교통지옥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숫자로 세계 일이 위인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고, 세계 오십 대 교회 중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인데도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과 사회질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기독교가 책임을 져야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개척교회 나가는 것은 짐스러워서 큰 교회에서 손님 교인으로 예배만 참석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믿음에서라면 나무랄 수 없겠으나 교회는 난민 수용소가 아닌, 천국 건설에 이바지할 일꾼을 양성하므로 숫자에 연연하기보다 열매 맺는 교인을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구제와 원망

좋은 일을 하는데 원망이 있다면 문제지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하니"(1절).

그 당시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는 모두 유대인의 혈통과 연관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초대 교회 성도 역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출발한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라면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요, 히브리파 유대인은 본국에 남아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의식적으로 히브리파 과부들만 구제하고 헬라파 과부들은 외면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늘어난 성도들을 사도들이 골고루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이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은 히브리파 과부들은 먹고 마시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굶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사역에 힘쓰리라"(2-4).

이는 사도들이 구제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겨를도 없이 구제만 일삼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은혜받은 후 자기의 재산을 제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으므로 사도들이 그것을 관리했습니다. 다만 물질 구제가 귀중할지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구제 사업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의 소리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물론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지엽적인 문제요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니다. 우리 모두 섬기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일곱 집사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절).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a. 성경의 성수

b. 일곱 영의 선물

c. 예루살렘의 일곱 행정 구역

d. 삼 인의 히브리인, 삼 인의 이방인, 일인의 개종자

e. 그 당시 약 칠천 명 교인의 대표자

f. 칠일의 봉사

g. 실제적 필요에 의한 숫자

특별한 해석보다는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숫자를 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이후 어느 교회에서도 이 숫자에 맞추어 세우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봉사할 직분자는 신앙과 인격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제비뽑아 세운 집사의 기준입니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

교회는 신령한 조직체이므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직분을 세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개중에는 어떤 사람에게 중직을 맡기면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위험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 직분을 세웠습니다. 바울이 일생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가 되어 진리의 업적을 남겼듯이 오늘 우리들도 성령 충만으로 맡은 임무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상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

성령의 지혜는 우리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지혜가 중요합니다. 자연을 개발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면 영적인 세계는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 때문에 일본에 대한 좋은 감정을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성실성, 근면성은 배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의 은혜가 내게 임하면 단순한 기쁨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요, 주를 위한 헌신과 봉사가 기쁨이요, 죽음도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풍성한 결실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칭찬 듣는 사람

생각해 보면 남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고 살기도 어려운데, 칭찬 듣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너 나 할 것 없이 칭찬에는 인색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쉽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이 칭찬을 듣고, 못 듣는 것은 맡은 임무에 충성과 불충성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즐겨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사도들의 임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사역에 힘쓰리라"(4절).

사도들의 직책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계승하는 임무입니다. 교회의 탄생으로 세움을 받은 직분은 구약 시대 성직 제도와는 달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직분은 레위 지파와 아론의 계열에서 맡았으나, 교회 안에서는 혈통과는 관계없이 성령으로 기름 부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 합당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특히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에도 충만하여 복음 사역과 함께 교회 안에서의 일도 주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리라" 했을까요? 인간은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누구를 편애해서 구제를 하였으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다루기에 무리가 되었듯이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 물질로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임무입니다. 영적인 사역이 메마르지 않도록 충성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모든 지체는 각기 제 기능 따라 움직일 때 몸을 지탱하게 될 뿐 아니라 마음의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원망할 일이 있습니까? 감사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위력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평과 감사에 달려있는 줄 압니다.

데이비드 소퍼는 "수감된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감옥은 수도원으로 승화될 것이고 수도사가 불평의 마음을 가질 때 수도원은 감옥으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고 형제를 내 몸같이 돌보는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쁨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천사와 같은 얼굴

행6:7-15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에 빠지는 일로 화목이 깨어짐을 보고 사도들은 즉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세웠는데, 그중에 활동이 두드러진 사람이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과 빌립 집사입니다.

그들은 봉사의 직임을 맡고 또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앞장설 만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한 일로 공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같이 광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받은 영광이요 또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증언하는 자들이 받을 영광입니다.

 

1. 점점 왕성해 가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모진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왕성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의 역사 곧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0-32).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인해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제는 사도와 전도자들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모세의 율법만 있고 복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뻐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불림을 받아 이방도 손님도 아닌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엡2:19).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무슨 말씀일까요? 이는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복음 사역에 충성하므로 열매가 풍성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직장에서나 병원에서나 어디서든지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명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성령의 능력 앞에 제사장들이 엎드러졌습니다. 아직 그들이 공회 앞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밤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또 사도들이 박해를 받을 때 변호하였던 가말리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역사는 성령 받은 성도들로 말미암아 왕성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이처럼 박해를 무릅쓰고 시련을 극복하고 줄기차게 뻗어나간 이 복음은 세계를 돌고 돌아 우리에게도 오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충성하여 하늘나라 확장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스데반을 통해 일어난 역사

주님의 은혜가 불필요하여 거절할 분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을 주님께서 들어 쓰실까요? 복음에 충직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절).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들어 쓰시기 합당한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십시오. 나는 무익할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 교회 여전도사님과 성도들이 병원에 입원한 성도가 있어서 문병했을 때 마침 다른 병실에 있는 어린 환자가 있어 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울면서 병든 자식을 위해 매달리는 것을 보고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기도하면 병든 자식이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 제발 목사님이 한 번만 와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병원의 의사는 약이 있어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약이 없어도 고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능하게, 강하게, 또 온전하게 하셔서 주님의 영광 드러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3. 무익한 변론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9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복음을 위한 변증은 불가피할지라도 끝없는 변론에 휘말리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라면 변론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변론을 위한 변론은 무익한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주관대로 고집을 부린다면 설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은 변론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믿음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변론은 삼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3-4).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0절).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그들이 당하지 못할 진리를 선포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은 더 완악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11-12절).

스데반은 더욱 담대하여 성령의 불검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1-53).

스데반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에 있고,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예언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귀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더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3-14절).

여기서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증인들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진리는 세상 법정에서 밝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하였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지각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소원합니다.

 

4. 광채 띤 얼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5절).

원수 앞에 서 있는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지금 곧 돌을 들어 죽일 자들입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사자 같은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들의 듣는 귀가 닫친 것같이, 눈이 어두워 스데반의 얼굴에서 발하는 광채를 보지 못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그들의 눈에는 스데반이 죽어도 마땅할 반역자로 비쳤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영광이 얼마나 귀한지 아십니까? 이는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 영광과 비길 수 없는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누릴 자가 누구일까요?

1) 주를 앙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34:5). 이것이 순교자들이 누리는 영광이요, 기도하는 사람이 누리는 영광이요, 주의 긍휼을 힘입은 사람이 누릴 영광입니다. 주의 은혜로 누리는 영광, 그 기쁨은 영원토록 시들지 않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미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남의 양을 도둑질하면 이마에 Sheep Thief(양도둑)이라는 머리자를 따서 S.T 라는 화인을 찍기로 하였는데, 결국 두 사람이 걸려들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그 마을을 떠나 이사를 하고, 한 사람은 남아서 그때부터 궂은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앞장을 서서 다 하므로 그 후로는 양을 잃는 일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세대가 바뀌어 S.T 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인 맞은 어른을 존중하여 Saint(성자)로 호칭을 하였다고 합니다.

2) 하늘나라 면류관을 기약 받은 사람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목에 걸 때 선수들은 감격에 벅차서 눈물을 보입니다. 하지만 표정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기쁨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의의 면류관(딤후 4:8), 시들지 않는 면류관(벧전 5:4), 모두가 동일한 영광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드디어 스데반은 영의 눈이 밝아져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원수들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원수 앞에서 천사와 같이 광채 띤 스데반의 모습,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습니까? 광채 띤 그 얼굴의 보십시오. 이 영광은 무덤에 있는 비석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칭찬 듣는 사람,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 그의 생애는 모두가 보배로 충만하였고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으니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스데반과 같이 살고 또 주를 위해 목숨 바쳐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스데반의 설교

행6:10-15

 

초대 교회의 경전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 곧 구약이었습니다. 또 사도들이 보고 듣고 생생히 체험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순절의 성령 체험은 능력 있는 복음을 증언하게 해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신구약의 경전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라는 점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증언에서 신구약의 관계를 특히 유의해야 할 줄 압니다.

 

1. 지혜와 성령으로 전하는 복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0절).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당할 자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한 것이 인간의 강한 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를 보십시오. 평소에는 그가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으나 오순절 사건 이후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능력의 말씀 앞에 모두가 거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성령 충만, 지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스데반을 박해한 이유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부정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모세와 하나님을 훼방한다고 하여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종교 재판 곧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고소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허물 것이라

2) 모세가 전해 준 계명을 변개하려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전을 부정하고 모세의 율법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중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중요합니다. 또 율법에 의해 이룩된 것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림자는 실체가 등장하면 그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진정한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7:48).

뿐만 아니라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이는 사십육 년 동안에 지은 헤롯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없는 이스라엘 역사라면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이 선택받은 의미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주의로 인해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역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2) 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가감이 허용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13: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선택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라고 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또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모세의 율법이 잘못되었거나 솔로몬의 성전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사의 처방이 정확하여도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효력이 없는 것같이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법은 신령하나 나는 죄 가운데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모세의 계명에 결함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불이행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라면 당연하지만 진리를 잘못 해석하고 따를 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에서 떠나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신앙은 전통이 중요합니다. 건실한 교단인가를 먼저 확인하고 하나님 기뻐하는 교회에 몸을 담아 충성하는 것이 복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탈을 쓴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가장 정통적인 배경을 지닌 자가 쭉정이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계명을 준행하였다면 주님같이 잘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으로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율법의 정죄를 받아야 했을까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한 사람이 있었던가요? 오히려 구약을 배경으로 하여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스데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깨뜨린 일이 없으며 솔로몬의 성전을 잘못이라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성전 제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체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바로 깨닫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영광에 이를 줄 믿습니다.

 

3. 스데반의 설교

1) 아브라함의 약속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한 죄목은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증언한 말씀은 그들이 자랑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언급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를 그렇게 잘 알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조명으로 증언한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고소한 자들에게 “너희들이 이스라엘의 뿌리인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고 그에게 세운 언약으로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5 이하에 보면 이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열두 조상의 혈통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한 것은 ‘할례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열두 조상에게 행하므로 이는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언약의 혈통’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2) 출애굽 사건

또 모세의 등장과 그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겠으나, 특별히 스데반을 고소하는 것이 모세를 부정한다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등장한 배경을 보면 "사십 년이 차매"(7:30)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7:35 이하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부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통치자 곧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행7:35-36).

스데반은 모세와 율법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밝히 증언하였습니다.

 

4. 절정의 말씀

이렇게 모세에 대해 역사적인 사건을 밝히 증언하는 스데반을 그들은 모세를 부인하고 계명을 거역한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여기서 자신을 변명하여 혐의를 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박해하는 이 복음을 증언하는 전도자로서 목이 곧고 패역한 조상과 같이 지금도 진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행7:39-41).

과연 누가 심판받아 마땅할 죄인이요 우매한 백성입니까? 광야에서 쓰러진 그들의 조상이요, 오늘도 이 진리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타성을 조심하십시오. 잘못된 고정관념도 탈피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조를 자랑하면서도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1-53).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요, 성령의 책망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완고하여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7:54).

결국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이므로 그들이 회개할 최후의 기회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전도자 스데반의 외침 소리는 거기서 조용히 막을 내렸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8-60).

순교자의 피는 살아 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과 같이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최후의 증언

행7:1-10

 

내게 있어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이고, 또 무슨 말을 남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말씀은 집사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남긴 최후의 증언입니다. 이는 집사의 설교로는 성경에 유일할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 있는 모든 설교 중에서도 가장 긴 설교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1)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요셉에 이르기까지의 족장들의 역사

2) 율법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3)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와 성전에 관한 말씀

4) 마지막 경고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1. 변증의 기회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4).

이 잘못된 증인들의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냐"(1절) 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하던 술책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법정의 판정이 진리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법정에서는 판사, 검사 모두 공정한 입장에서 사실을 밝히고 벌을 내리든지 벌금을 물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판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보십시오. 로마의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이세는 1992.10.31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파문당한 갈릴레오를 삼백오십구 년 만에 복권시킴으로 당시 종교재판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천오백십팔 년, 마린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면시켰던 잘못도 마땅히 시인해야 마땅합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은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짓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이나 성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었다면 이는 스데반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거짓 증언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를 빌라도의 법정 에 서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은 변명의 기회에 침묵하셨는데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령의 조명으로 밝혀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셨는데, 스데반은 조상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임을 증언하였습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경건의 능을 잃고 타성에 젖어들어 안 될 것입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의 일순간까지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이귀분 집사님의 남편 되시는 김경길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네. 그러시다면 내일이 주일인데 12:00에 교회로 오시면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뵈올 수 있겠습니다." 했더니 지난 주일에 오셨습니다. 단독 면담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돌아가신 이귀분 집사님 묘비명과 제사상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천국 가신 분은 제사가 필요 없으니 제사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했더니 "그래서 우리 이귀분 집사 상에는 생전에 교회에 가지고 다니던 성경, 찬송을 그려왔습니다."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잘했습니다. 거기에 제물을 차리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김선생님도 교회에 나와서 이 집사님의 자리를 채우십시오." 하고 보냈습니다. 지금부터 십삼 년 전의 일입니다. 사택이 지금 세워진 교회 자리에 있었는데 허물어져가는 집이었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소낙비가 내려 천정이 무너지는 바람에 자다가 흙탕물을 덮어썼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이귀분 집사님이 교회에 처음 나올 때인데 그 광경을 보고,

"목사님, 제가 얼마를 드리겠으니 사택을 옮기도록 하십시오." 해서 이층집으로 옮겼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숨은 정성이 지금은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이 된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이 확실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때 의의 면류관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율법과 성전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서라면 성전은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이 중요한 것만큼 솔로몬의 성전도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에게만 국한된 진리는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영육이 복을 받고, 또 성전을 중심으로 주님을 잘 섬기면 누구든지 동일하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먼저 유월절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로 인해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같이,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 자들은 재난을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억할 것은 그러한 구원은 영생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48절).

그렇다면 어디에 계신다는 말씀일까요? 분명히 하나님은 시내산에 강림하셨고, 솔로몬의 성전에 임하셨습니다. 또 솔로몬이 헌당하는 기도를 마친 후에는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여 감히 들어갈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를 어떠한 틀 속에 묶어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정된 공간에 제약시켜서는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유대 땅에만 제약시켜 놓았습니까? 유대인들이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진리대로 복종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잘못이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교만으로 전락 되어 진리를 배역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바로 준행하였다면 마땅히 메시아를 영접해야 옳지요. 성전을 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구원의 기쁨을 그들이 먼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을 자랑하던 그들은 주후 칠십 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욕으로 바꾸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책망

집사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들 앞에서도 담대히 진리를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는 제사장들의 질문에는 상관도 하지 않고, 그 민족이 걸어온 역사를 나열했습니다. 스데반이 증언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율법학자나 제사장일지라도 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증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서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누구를 거슬렸어요? 성령입니다. 조상이 성령을 거슬려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고, 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심판을 받았다면 오늘도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느니라”(마12:32).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스데반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유의하십시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제사장들과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지식은 많았으나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이고 또 복음 전하는 전도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곧 진리의 탈을 쓴 십자가의 원수요, 진리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2-53).

그들이 듣기 좋은 말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멸망 받을 죄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저는 이 강단에서 사랑이 강물같이 솟아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은 물을 오염시키는 죄악의 요소를 방치하면 그 물은 아무도 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사유의 은혜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4절).

그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의 설교에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엎드러졌던 군중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에 찔리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것이 불치의 증상이 아니라면 주님 앞에 고백하여 사유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받지 못할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회개하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은혜의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드디어 천국이 스데반의 눈앞에 열려졌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스데반은 그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최대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자들은 그 영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드러나고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집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이 은혜가 그립지 않습니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확실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믿어지지 않지만 영의 눈이 밝아지면 보게 될 줄 믿습니다.

궁금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 은혜에 어떠한 댓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 그것은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은혜의 귀중함을 알았다면 그 귀한 보배를 간직할 믿음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다음 모든 것을 배설물로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가고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진리를 대적하여 사람을 죽인 자들과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자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순교자의 영광은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절).

유대인들이 율법주의로 전락하여 진리를 대적하였다면 로마의 가톨릭은 세속화로 성모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9-60절).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에서 두 가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2)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과연 주님의 은혜로 최후를 장식한 영광의 순간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처럼 생을 마친 순교자 스데반의 증언은 참된 진리요, 마지막 올린 기도는 원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누릴 영광은 영생의 면류관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해 목숨 바쳐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이방으로 확산된 복음의 역사

행8:1-8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감사한 일은 외부적으로 닥치는 시험이 더 할수록 복음은 더욱 왕성하게 퍼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서라면 순교자가 났으니 위축되게 마련이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순교자는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2, 제3의 스데반이 등장하여 복음을 더욱 담대히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독재자, 폭군은 살아있을 때 영향력을 행사하나 순교자는 이렇게 죽어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1. 복음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

우리가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지라도 사람은 성령이 될 수 없듯이, 복음을 박해하는 자도 마찬가지로 사탄이 아닌 사탄의 도구로 전락 되는 것입니다. 다만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사람은 영생의 소망과 하늘나라 상급이 있으나 사탄의 도구로 전락이 되면 영벌을 받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자신의 하는 일에 상 받을 것을 알 수 있으나, 마귀의 일꾼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3절).

잘못된 신앙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십시오. 사람을 죽였으나 죄책감도 없이 여전히 복음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2-3).

사울은 나사렛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파괴하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를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모세가 상반이 될 수 없듯이 복음과 율법 역시 같은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율법이 비진리라 비판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연약함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주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 불행스러운 일은 아직도 이 은혜를 외면하고 박해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울같이 잘못된 신앙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굴하지 말고 더욱 담대한 믿음으로 대처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사마리아에 전파된 복음의 역사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절).

그들은 박해 속에서 흩어졌으나 모두가 성령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사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환란을 당할 때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은 박해가 심할수록 신앙의 뿌리는 더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을 죽인 자들이 다른 사람인들 못 죽이겠습니까? 얼마든지 죽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목숨과 바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4-6절).

과연 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믿음의 용장들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7-8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는 의학이 발달 된 오늘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증거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복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하시고 또 영광 받으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3. 마술사 시몬의 요구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9절).

마술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마귀의 술수 곧 속임수입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마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행동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입니다. 시몬의 행위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증합니까?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10절).

이것이 마귀의 교만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영광 받을 자리에 자기를 올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탈선을 방지하고 겸손하여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겸손과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이는 마귀의 술책임을 깨닫고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기 바랍니다. 사람이 언제 시험에 드는지 보십시오. 자신이 높은 사람인 줄 알고 교만해질 때입니다. 스스로 높여 백성을 속이던 시몬도 빌립을 만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13절).

놀랄 일이지요. 이는 아무리 살펴봐도 마술로 하는 자신의 속임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거듭나지는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의 품성이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그러한 사람도 교회에서 봉사를 할 수 있고, 신앙 연조에 따라 직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틀 위에 교회가 세워지면 자신의 불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도 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있는 자들은 진리 위에 서서 신앙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18-19절).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흥정하는 행위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증합니까? 과거에 마술을 부릴 때 하던 습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일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사실 주님 앞에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사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사유함을 받았다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사유함을 받았다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시몬 같이 성령을 사욕의 도구로 삼으려는 생각은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0-21, 23절).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은혜를 욕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나를 구원해 주신 이 은혜의 보화를 어찌 물욕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까? 발람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곧 썩어질 것과 없어지고 욕된 것을 진리를 위해 투자하여 영생을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역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14-16절).

이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주석가들의 견해도 다양합니다. 과연 사도들이 오기 전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빌립을 통해 일어난 권능의 역사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1)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2) 능력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런 것이 중생으로 간주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으로 변화 받은 증거가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사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안수를 통해서만 성령 받는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빌립을 통해서 증언하신 것 외에 사도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고 또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함으로 성령이 충만하여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 빌립의 순종과 내시의 경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절).

우리는 주의 사자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서 지시했는지 알기가 어려우나 중요한 것은 빌립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물론 이러한 은혜는 아무에게나 또 어느 때든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영감을 통해 나타나고 또 믿음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때 빌립은 즉시 순종하고 그곳을 향했습니다. 마침 목적지에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7-28절).

에디오피아는 에집트 남쪽 나일강 상류 지방으로, 구스 족속(사 11:11) 곧 검은 피부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 나라는 구약에서 스바라 불리고,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이래(왕상 10:1-10) 유대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신약에서는 그 내시의 회개 이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왕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이행할 사람이기에 빌립을 급하게 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이 빌립에게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29-31절).

모두가 극적으로 이루어진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그에게 접근하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빌립의 지도를 요청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곧 은혜의 상통입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도 자주장사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빌립이 이사야 오십삼 장에 있는 말씀을 풀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물이 있는 곳에서 세례를 받으므로 주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절).

이 대목 역시 어떤 주석에는 엘리야를 지상에서 옮겨가신 초능력의 역사로 옮겼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빌립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나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하였습니다.

빌립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 그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내시는 수가성 우물가 여인과 같은 심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시가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는 거듭난 감격이요, 불타는 사명감이요,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입니다. 결국 빌립의 전도는 구스의 내시를 변화시키고 내시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자기 백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역사요,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곧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영혼을 살리고 또 박해 속에서도 퍼져나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원하실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40절).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택한 나의 그릇

행9:1-22

 

사람이 기회를 붙들고 잃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성공과 실패의 향방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있음을 깨닫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1. 복음을 대적한 사울

인생에게 있어서 일생에 가장 귀중한 시간이 있다면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1-2절).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교에 있어서는 충직한 일꾼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옥에 가두고 또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마저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그처럼 당당했던 이유를 보십시오.

1)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줄 앎이요

2) 제사장들의 공문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혹자는 사울이 주님 앞에 불림을 받은 결정적인 원인이 이처럼 열렬히 박해한 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박해한 행동 대원보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에 앞장서야 옳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는 말씀 역시 찬 것을 진리의 원수요 대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더운 것이 은혜라면 찬 것도 은혜요, 더운 것이 진리라면 찬 것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은 죄악이로되 모세의 율법은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박해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율법을 사수하기 위한다는 명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울의 그 열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은 복음과 상반되는 다른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주의로 전락한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진리를 욕되게 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주님을 만난 사울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중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요,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계시므로 죄인들은 그 영광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까이할 수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빛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시며(요일1:5), 부활의 영광이시고(고전15:8)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4-5절).

이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오에(행 22:6), 또 동행자도 있는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왜 사울에게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개심의 기회를 주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식은 달라도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동일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대상을 가려서 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리가 없지요. 물론 사울과 같이 나타나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방법을 이용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개별적으로 섭리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별적인 인격이 아니라면 같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각기 형편과 사정을 따라서 다양하게 구원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그때 사울은 그처럼 미워하던 원수의 음성을 듣게 되었으므로 그가 과연 진리를 위한다면, "당신이 예수냐? 나와 대결하자! 나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믿는다. 그런데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 누구이기에 내 길을 막느냐?"고 반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주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 엎드러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울은 그 순간이 최후의 심판대가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와 긍휼이 한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4, 16-18).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크신 은혜에 감복되지 아니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그 자리에 거꾸러졌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관, 역사관, 신앙관, 우주관, 모두가 백팔십도 변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변화는 그 개인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역사를 바로 잡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인류 앞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울이 받은 은혜가 오늘 우리의 은혜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8-9절)

사울에게 있어서는 그 삼일이 너무도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잃어버린 시력이 문제 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영의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육신의 눈으로 진리를 대적하며 살아왔던 잘못을 가슴 치며 통회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식음을 전폐하고 주님의 긍휼에 감사드렸습니다. 이제 그의 여생을 육신의 눈을 잃고 그대로 산다 해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은 은혜로 사는 목숨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 마땅할 죄인을 살려주시고 또 진리의 증인 삼으리라는 약속까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먼 후일 그는 그날을 회상하며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4-15).

이제 바울이 암흑 속에서 삼일동안 받은 변화가 우리의 변화가 되고 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소원합니다.

 

4. 경건한 아나니아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10-12).

이는 아나니아의 경건 생활이 어떠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기도하여 눈을 뜨게 하는 은혜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실 아나니아로서는 충격적인 계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라는 그 청년이 기독교를 박해하여 성도들을 죽이고 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옥에 가두기 위해 제사장들의 공문을 받아 그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 중요한 비밀을 알게 해주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예정섭리요

2)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을 이유도 없었으려니와 도리어 아나니아를 비롯한 경건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 가두고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로서 그의 생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사울을 붙드심으로 이제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절).

베드로의 순교를 말씀하신 주님께서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고난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아니면 고난을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도 은혜요,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에는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하셨습니다(마5:11-12). 복음의 진수가 십자가에 있음을 알았다면 십자가를 회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더 큰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5. 증인으로 등장하는 사울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17-20).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사울의 눈을 밝게 한 후에는 아나니아의 행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지만 아나니아를 통해 기도 받고 눈이 밝아진 사울은 임금과 이방인과, 유대인들, 그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만큼 아나니아의 역할은 중요한 것입니다.

사울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이제는 진리의 증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이것이 기적의 은혜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22절).

확신과 체험이 있는 믿음 앞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에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우리도 사울같이 변화를 받아 목숨을 다해 복음 사역에 앞장서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베드로의 전도 행적

행9:32-43

 

사도행전 9:32부터 11:18까지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요, 사도인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 가이사랴 지방으로 다니면서 복음 사역에 이바지한 전도 행적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점이 많고 비겁하였던 갈릴리의 어부 시몬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담고 있는 도르가의 선행이 있는데 모두가 성령의 열매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확산 되는 복음의 역사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2절).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심해지자 사도들 외에는 각 곳으로 흩어졌다고 하였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복음의 역사는 확산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전도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찾아가야 하며 또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주의 성령이 강권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전도의 범위입니다.

1) 전도의 범위는 땅끝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물었을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 믿음 여하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세계를 향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 믿음의 결실을 얻을 때까지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의 씨는 한번 뿌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뿌려진 씨앗이 잘못되어 길가에 떨어진다면 새들이 먹어버립니다. 돌짝밭이라면 즉시 말라버리고, 가시떨기는 결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자들에게는 복음이 무의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요, 모든 생명에 대해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3)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세상일은 은퇴가 있지만 복음 사역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년 세 높으신 어른들은 내 몸 움직이는데도 불편이 많을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일은 성도들이 "목사님은 아프시면 안돼요" 하는데 저는 기도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는 아플 겨를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달려갈 길 역시도 할 일이 남아있는 동안은 주님께서 붙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명의식입니다. 모세가 백이십 세가 되도록 산 것이 그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면 우리도 사명 때문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증인되는 것입니다. 사실 맹목적인 삶이라면 오래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한마디로 고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처럼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애니아를 일으킨 역사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행9:32절).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하룻길로 욥바 동방 17km 지점에 있습니다. 그곳은 팔레스틴 중앙 고지의 비옥한 지대로서 성도들의 집회 장소로 적합하였으며 지금도 '룻' 이라는 작은 촌락이 있습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지 여덟 해라"(33절).

중풍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고생하다 죽게 되는 중병입니다. "애니아" 그 이름은 "칭찬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대로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싶어도 육신이 병이 들어 남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가 왔는데 베드로를 통해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손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팔 년 동안 누워있던 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34절).

제가 만기제대를 하고 중랑천 철거민 촌에서 개척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성도를 통해 자기가 아는 사람이 빙판에 넘어져 척추를 다쳐서 전신이 마비되어 식물인간으로 일곱 달째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그 주일 자기 발로 걸어서 교회를 나오고 또 교회를 건축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셨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렸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35절).

이와 같은 역사가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도르가의 선행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욥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로서 예루살렘에서 60km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에는 신시가지로 발전하여 이스라엘 최대의 도시인 텔아비브(Tel Aviv)라 합니다.

마침 거기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살고 있었는데 다비다는 히브리 이름이고, 도르가는 헬라 이름으로 수리아 지방에서 많이 불리었던 여성들의 이름입니다. 그렇게 흔한 이름 중에서도 욥바에 사는 도르가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그의 무덤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그가 남긴 믿음의 업적으로 인해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버리고 영국에 협조한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의하였을 때 물레를 돌리는 가난한 인도인 일억 오천만 모두가 잘 살아가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로 나라를 팔아먹고 재산을 남긴 자들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1:4).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를 보십시오. 그가 살았을 때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존중을 받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디서나 없어서는 안 될 보배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를 위해서 모은 것은 무익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업적은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뽕잎 먹은 누에는 비단을 남기는데 인간이 인간 구실을 못한다면 두려운 일입니다. 기회를 잃지 말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도르가의 선행이 그 이름을 얼마나 빛나게 하는지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절).

선행은 살아있을 때에도 영광이요 사후에도 영광입니다. 어찌 보면 성도들이 적은 돈으로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 부자들은 멸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자의 많은 물질보다 믿음의 손길을 통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행과 구제, 이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십니까? 그것이 곧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를 응답해주심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 마음껏 기도하여 선한 사업이 부요케 되는 복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4. 다시 살아난 도르가

도르가가 병들어 죽었을 때 슬퍼하던 자들이 마침 룻다에 베드로가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을 하였는데 그때 그들이 베드로를 통해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에서 오게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절).

이런 일을 의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뇌는 이십억이 넘는 세포로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는 십 분만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도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살아났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42절).

팔 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애니아로 인해 룻다의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였는가 하면,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일로 구원받은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경건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초대 교회와 같이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분발하고 경성하여 일어납시다. 주께서 나를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모두 큰 소리로 화답하고 헌신합시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적의 은혜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고넬료의 경건

행10:1-16

 

오순절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삼천 명, 오천 명이 가슴 치며 회개하고 또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 죽은 자도 살아났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사는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가이사랴에 있는 이달리아대의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특이한 현상이라면 베드로와 고넬료 모두 환상과 계시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자의 발길은 자의적으로 행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손길이 배후에서 섭리하고 계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가정

사람은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이유를 복을 못 받게 하는 죄와 유혹이 많고 인간은 연약하여 쉽게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를 보십시오. 그 사람이라고 경건생활에 장애가 없었겠습니까? 점령군의 신분으로 유대인의 하나님을 섬기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신앙생활에 힘썼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고넬료가 받은 복을 보십시오.

1) 전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고넬료가 어떻게, 누구를 통해,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경건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의 신분으로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 복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부리지만 고넬료 가정 같은 경건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청년은 "목사님 우리 어머니 신앙생활 잘하게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당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사님 우리 남편과 자식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인생 여정에 곡절은 있게 마련입니다마는 그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겸손하게 주님을 섬길 때는 형통과 번영의 복을 누렸으나 교만해지면 하나님께서 여지없이 징계하여 낮추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때는 '세상에서 그렇게 복을 받은 가정이 있을까?' 하고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살았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던 자식이 갑자기 백혈병으로 죽고 또 잘 돌아가던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여 하루아침에 어렵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과연 행복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있을까요? 고넬료의 가정을 보십시오.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는 두말 할 여지없이 복을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경건한 가정으로 주님의 은총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2)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이는 경건 생활의 한 요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하루는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백부장이 그 종을 구원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장로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4-5).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이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눅7:9).

선행의 열매, 이는 하늘에 쌓이는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선한 사업에 부자 되어 의의 면류관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이는 고넬료의 경건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만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7). 또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 것을 악한 재판관과 원한 맺힌 과부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눅18:1).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여러분!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계십니까? 더욱 분발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는 것이 죄가 됨을 알았다면 우리는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P집사님이 얼마 전에 담석증으로 고생하여 함께 기도한 일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수술을 받아야 할 증상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회복되었으니 기도할 일이 끝난 줄 알고 마음을 풀어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이 믿음이 귀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 되기를 소원합니다.

 

2. 고넬료에게 나타난 환상

사실 고넬료는 지금까지의 경건 생활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족하다 하지 않으시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빌립을 통해 복음을 받은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움을 알았다면 영적인 상태도 마찬가지로 성장이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기준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이요, 우리의 목표는 성령으로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받을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받을 사람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3-4절).

놀라운 은혜입니다. 또 기억할 일은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많이 할수록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5-6절).

생생한 계시입니다. 사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같이 천사를 통해 주의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베드로를 청하라 하셨는지 궁금하지요. 감사해야 할 것은 복음 전할 임무를 천사가 아니라 전도자 곧 먼저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임무는 천사가 흠모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이 전도자가 증언하는 복음과 함께 성령이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각은 제 육시더라"(9절).

가이사랴에서 그곳까지는 50km정도의 거리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는 시간인데 마침 시장하여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10-11절).

비몽사몽간에 베드로는 이렇게 신비한 광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12-13절).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없었다면 이상 중에 펼쳐지는 광경으로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보자기가 네 귀에 매여서 내려왔다 하여 네 숫자에 의미를 살리기도 합니다.

1) 동서남북으로부터 오는 전 세계 인류를 가리킨다.

2) 네 복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자기 안에 있는 부정한 짐승들입니다. 이러한 일이 동일하게 세 번이나 반복되어졌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14절).

베드로의 이 거절을 주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가 율법에 명시된 대로 오늘까지 그가 지켜온 생활이 옳은 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롬3:21).

다시 말씀드리면 율법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는 용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방과 선민의 벽을 넘을 수 없으나 복음으로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들려온 음성입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절).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 그것이 귀중합니다. 물론 보자기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상징물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역시 복음도 유대인에게만 전하여야 할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던 율법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4.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와서 노크하고 있었습니다.

1) 순응해야 할 하나님의 뜻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19-20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복종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이제야 하늘로부터 내려온 보자기의 내용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1-22절).

그때 베드로는 즉시 그들을 영접하여 유숙하고 다음 날 그들과 동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깨달았을 때는 절대복종하여 그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고넬료의 태도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4-25절).

손님을 공손하게 맞아들여 접대할 줄 아는 것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공손이 지나치면 도리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는 지나친 것이나 아첨이 아니라 그의 진실이었습니다. 법궤 앞에서 다윗의 춤이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께 한 것이었다면 고넬료 역시 베드로에게 엎드린 것은 상관의 계급장 때문이 아닌 신적인 권위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위엄과 권위를 발견할 때 은혜의 문이 열려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28-29절).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따라 베드로를 자기 집에 오게 한 것같이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편 모두 하나님께 복종하는 믿음으로 함께 모인 자리였기에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영광이 충만하였습니다.

3)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난 역사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께 있나이다"(행10:33).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

② 그리스도의 등장과 복음사역

③ 유대인들로 인한 십자가의 고난과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을 증거하고 결론으로 하신 말씀은,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43절)고 하였습니다.

34-43절까지 아홉 절의 복음이 전부입니다. 복음을 간략하게 전했을 뿐인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법정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7-29).

고넬료의 가정에는 베드로의 적은 말씀에도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4-46절).

지금도 성령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같이 경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여 주의 은혜 크게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을 말씀

행11:1-18

 

세계 어느 나라든지 그 민족 고유의 전통과 풍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과 풍속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상의 풍속이라면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밝은 내일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불변의 진리 안에서 끊임없는 개혁이 지속될 때 원하는바 이상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1. 할례자들의 힐난

예루살렘 교회가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 함을 들었을 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사마리아 여러 촌에서 복음을 증언하게 하였으나(행8:14-25) 가이사랴에서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러지 않고 도리어 비난하였습니다.

"네가 무할레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절).

지구상에 유대인들같이 자존심이 강한 민족은 없을 줄 압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목숨을 잃어도 민족정신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문화는 체면문화라고 합니다. 체면 때문에 냉수를 먹고도 이 쑤신다는 말까지 합니다. 사실 체면이 무턱대로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를 힐난한 것은 그들 자신이 복음과 무관하거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주의 사고 의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피장 시몬의 집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환상을 접했을 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행 10:14) 하였습니다.

사실 평소에 몸에 익힌 습성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고쳐야 할 문제인 줄 알면서도 습관화되면 잘 고치지 못하지요. 베드로는 유대인의 비난이 있을 때는 변명을 하였으나 후일에 또 이러한 문제로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1-13).

그들이 은혜를 모르거나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 외식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명한 대로 따를지라도 복음과 무관하면 형식이요,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의식이라도 은혜와 무관하면 외식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경건이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베드로의 해명

사실 복음이 아니라면 변명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가 아닌 진리의 문제이므로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1)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

행11:5-15절까지는 10장에 나오는 사건을 그대로 반복해서 옮겨놓은 말씀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6절에 나오는 '들짐승'이라는 말이 10:12에는 없고, 12절에 '여섯 형제'라는 숫자가 10:23에는 밝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14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올 때부터 그처럼 겸비한 태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구원받을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했던 것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아무리 영계가 밝은 사람이라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요, 주님이 들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은 무익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한 것같이 다른 전도자들도 동일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이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령이 베드로만 도구로 삼으셨거나 또 베드로를 통해서만 항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영감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내려주신 구원의 복음입니다. 오늘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물세례와 성령 세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도다"(16절).

이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입니다(행1:5).

중요한 것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에서 나온 성례가 아니라 신약 곧 복음 시대의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을지라도 세례는 받아야 합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율법을 바로 깨달았다면 율법적인 모든 예식은 헛되지 아니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진리의 원수로 전락 된 것같이, 오늘 복음 시대에 시행하는 세례와 성찬 예식도 의식으로 그치면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의 복음이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닌 줄을 알았다면 우리도 거듭나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과 함께 성령이 임했던 것같이 우리도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3.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였습니다. 노예의 신분이 지금은 없어졌으므로 '종'이라는 용어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으므로 내가 임금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규정된 법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다만 의무와 권리는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주한 독일 상공회의소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한국은 독일과 달리 돈 봉투가 통하는 나라이며 돈 봉투를 은밀하게 건네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담은 기생집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이렇게 실추시키고도 국민을 위한 공복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윗물 맑기 운동이 일시적인 현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뀔지라도 청문회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 대신, 법질서가 수립되어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그럴 수가 없지요. 과연 주의 신실한 청지기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 뜻을 이루어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범죄하고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멸망 받을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더욱 귀한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은혜의 손길은 아무리 장애가 많을지라도 그 계획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차별도 없습니다. 이방과 선민이라는 말을 지칭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율법 아래서 진정한 의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죄인입니다(롬 3:10).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이라는 장벽이 존재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면 율법은 이스라엘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도 기생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과 같은 믿음이라면 차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차별화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는 주님의 은혜는 깊고 오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옳습니다. 땅끝까지 이 복음 증언하는 것이 전도자의 임무요, 또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두 가지 회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절).

'생명 얻는 회개' 이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과거를 후회하고 새 삶을 다짐하는 자들이 많으나 불행스럽게도 영생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회개가 생명에 이르고 어떤 회개가 이르지 못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근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사람이 근심을 모르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낙원에서 사는 생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낙원이 아니므로 근심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복음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근심이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으로 오는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므로 사유함을 얻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믿음 밖의 근심으로서 밝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심은 아무리 하여도 사유의 복음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생명을 얻는 회개'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복음에 이르는 회개요, 지난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 받아 새사람이 되는 회개입니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 이 진리가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심같이 오늘 우리와 우리 가정을 구원하는 복음이 될 줄을 믿습니다. - 아멘 -


하나님의 구원

행12:1-17

 

스데반의 순교로 사도들 외에는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각 곳으로 흩어져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므로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헤롯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어 군사를 풀어 굳게 지키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원해 내었습니다. 그런 일은 성경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베드로에게는 두 번(행5:19) 있었는데 이는 베드로를 통해서 이룩하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1. 헤롯의 박해

신약에는 동명이인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다섯 명의 헤롯이 있습니다.

1) 헤롯왕(B.C.37-A.D.4)

그는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학살했던 장본인입니다(마2:16-18). 그는 열 명의 아내를 거느렸고 그중 다섯이 자녀를 낳았는데 자녀들 간에 반목과 불륜의 관계가 많았다고 합니다.

2) 헤롯 아켈라오(A.D.4-6)

헤롯 대왕의 넷째 부인인 사마리아 여인의 소생으로 아비의 대를 이었으나(마2:22)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 헤롯 안티파스(B.C.4-A.D.34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

아켈라오의 동복동생으로 제수인 헤로디아를 빼앗고 그를 책망했던 세례 요한을 목 베인 자입니다(마14:1-14).

4) 헤롯 아그립바 1세(A.D.37-44)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아리스토 블루스의 아들이며 헤로디아의 동복 오라비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인물로서 그 자녀로는 아그립바 2세 버니게(행 25:13), 드루실라(행 24::24) 등이 있습니다.

5) 헤롯 아그립바 2세(A.D.49-100)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송사를 맡았던 자입니다(행26:28).

그런데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무슨 이유로 야고보를 죽이고 또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헤롯 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세웠듯이 헤롯 아그립바 1세 역시 정치적인 야심으로 보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Knowing).

물론 사도들은 세속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권력은 불의를 다스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며 사회에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폭군들이 등장하여 권한을 남용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마땅히 국민 된 도리와 질서를 지켜야 하지만 세속에 빠져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구출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야고보를 죽인 후 거기에 그치지 아니하고 베드로도 죽이기 위해 옥에 가두고 군사를 풀어 넷씩 네 패로 나누어 밤낮 빈틈없이 지키게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무교절 곧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죽이는 일을 연기한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기적의 손길로 베드로를 건져내었습니다.

베드로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면,

1)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절).

물론 야고보를 위해서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베드로는 살려내어 주의 사역에 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육신의 죽음을 초월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2) 천사를 동원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베드로를 구출해 낸 것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기적입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6절).

궁금한 문제는 왜 주의 사자를 등장시켜 원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구출하는 일에만 주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이 헤롯의 문 앞에 다가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 전도자를 죽이고 박해했던 죄상은 백보좌 앞에서 낱낱이 들어나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7절).

베드로도 얼마 동안 꿈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자연의 질서를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진리요, 법칙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연의 법칙이 무신론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함께 대전 엑스포장에 있는 창조 과학관 개관 예배에 초청을 받아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미국을 비롯한 소련과 일본, 호주 등지에서 창조 과학회 책임을 맡고 있는 학자들이 참석하여 세미나도 하였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창조 육일의 역사와 노아 홍수 사건을 담은 스크린을 볼 수 있었고, 또 진열장에 있는 화석들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는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지구의 연령에 따라 오래된 화석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과 무신론자들이 반박할 수 없는 창조의 역사가 화석에서 증명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천만 년 전 박쥐의 화석이 오늘의 박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숭이 두개골로 발견된 것은 그대로 오늘의 원숭이요, 사람의 두개골은 오늘 사람의 두개골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진화론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지를 물에서 두 번 솟아오르게 하셨는데 창조 삼일 과 노아 홍수 때입니다. 미국 그랜드 캐년은 육지가 물에서 융기된 역사를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거기는 일정 이하의 지층에는 화석이 없는데 이것이 창조 삼일에는 아직 물고기를 창조하시기 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창조 과학회 회장으로 있는 김영길 박사의 말입니다.

"과학은 올바른 신앙 위에서 출발할 때 생명력 있는 과학이 될 수 있습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적 가치관 위에 과학이 세워진다면 과학은 인류에게 더 큰 좌절과 고통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알만한 것이 우주 속에 충만하여도 불신자들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8-9절).

신기한 일의 연속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출옥을 의심한 성도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 없이 믿을지라도 주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10절).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절).

유의할 것은 천사가 베드로를 밖으로 인도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라면 계속 함께하여서 방패와 인도자가 되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왜 모습을 감추었을까요? 천사는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도마에게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이르러 대문을 두드릴 때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너무 기뻐 문을 미쳐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15절).

왜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못 믿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 기도하던 자들이요, 또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지금 그들의 눈앞에 베드로를 보여주었으나 야고보를 잃은 충격과 상처가 너무도 컸으므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16절).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17절).

하나님께서 그처럼 기적의 손길로 함께 해 주셨는데 그때 원수 앞에 베드로가 자신의 모습을 보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담대함이 지혜를 동반하지 않을 때는 만용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정적인 시기를 위해서는 매사를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4. 목숨 잃은 파수꾼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18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죽이려고 지키던 사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처럼 엄격한 법령을 그들이 알고 있었으므로 파수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손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1-4).

결국 파수꾼들은 베드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19절).

 

5. 헤롯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21절)

지금도 북한에는 김일성 세습 체제가 내리는 교시는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구상 어느 지역을 한번 가리키면 그곳에는 지진이 일어나 심판을 받는다고 허무맹랑한 말을 합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2-23절).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 하셨도다”(시7:12).

"내가 곧 국가다"라고 하던 폭군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로마의 황제 세베루스 (A.D.306-307)는 "내가 곧 세상"이라 하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임종시에 "나는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고 탄식하면서 자기 유골이 담길 항아리를 보고

"조그만한 항아리여, 너는 이 세상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미약한 존재였던 한 사람의 뼈를 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다가 수치를 당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6. 점점 흥왕해가는 하나님의 말씀

이와 같이 복음은 환난 중에서 뿌리를 내리고 박해 속에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시험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순교를 각오한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변해도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자, 또 대적하는 나라는 무너져도 복음은 점점 흥왕하여 갔습니다.

이 복음과 함께 우리도 영원한 승리의 역군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내가 불러 시키는 일

행13:1-12

 

우리의 광복절과 이스라엘의 유월절을 대조하여 진리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자연의 운행 질서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자 없으므로 이와 같은 비교가 일반 계시적인 면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나 성경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이방인의 해방을 특별계시의 차원에서 볼 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속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조상이 걸어온 발자취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모든 인류의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로 온전히 이루어지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1.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12장까지를 일명 베드로 행전이라 한다면 13-28장까지는 바울 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편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고, 후편은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신 분들은 수없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사명 받은 전도자들로 인해 복음은 만방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복음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이 피신하여 세운 교회로서(행11:19), 예루살렘에 흉년이 있을 때 안디옥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행11:27-30).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일 년간 머무르며 큰 무리를 가르치는 동안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1:25-26).

안디옥 교회는,

1) 금식하며 기도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절).

여기에 나온 이름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크게 활약했던 인물들은 없으나 그들을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인물들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는 사람 곧 은혜를 힘입은 사람이 주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킨 자들이요 또한 적극적인 믿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순절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어떤 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일까요? 안디옥 교회같이 충직하고 믿음이 큰 성도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오늘도 함께 있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분발하고 경성하고 깨어서 기도합시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믿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의 지시에 순응한 교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로 지혜와 능력, 영광이 동등함을 믿습니다. 이는 기독교회의 기본 교리입니다. 주변에는 이 기본 교리에서 이탈한 이단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어떠한 은사나 감화력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불길 같은 은혜가 내게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어떠한 은사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떠나 얼마 동안 해외에 나갔던 사람이 돌아올 때는 가족들에게 줄 여러 가지 선물을 사 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격보다 사랑의 선물이므로 모두가 귀중합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가족들에게 돌아온 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보다 보혜사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나마나욧에서는 하루 종일 옷을 벗고 예언을 하였으나 성령과는 무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절).

이렇게 금식하고 기도하던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또 그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3절).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뜨게 하실 때에도,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이 은혜가 귀중합니다.

이 은혜의 손길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영광 받기를 기뻐하시든지 주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지혜 있는 총독 서기오 바울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의 삼대 도시 중 하나로 중동과 소아시아 중간에 있습니다. 오늘에는 세계적인 선교 조직망을 가지고 있는 예수전도단이 그곳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 사는 주민은 헬라인과 터키인으로 그들 사이에 분규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먼저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들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시 섬을 가로질러 100km 떨어진 바보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라 하는 박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이러한 마술사를 좋아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7절).

그가 전도자의 말을 듣고자 한 것은 본래부터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술사 바예수와 같은 마술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중요합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8절).

엘루마는 아라비아어로 '지혜 있는 자' 라는 뜻이며 '박수'와 같은 의미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로 미혹하여 멸망으로 빠지게 하고 오늘도 진리를 대적합니다. 어둠에 속한 자는 마귀의 말을 믿을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자는 진리에 순응합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3. 바울의 저주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9절).

여기서부터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순위가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고, 제이차 전도 여행 때부터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의 전도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바울은 기독교사에 있어서 초석을 놓은 기둥 같은 일꾼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이유를 알기가 어려우나 라틴어로 바울은 '작다'(고전 15:9)라는 의미임을 보아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바울은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향해서 저주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0-11절).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당했던 일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사울은 알지 못해 진리를 대적했다면 박수는 이질적인 존재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도 박수는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엘루마에게 왜 영영 어두워져서 앞을 보지 못하리라 하지 않고 '얼마 동안'이라고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내린 저주로 인해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나타났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2절).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의 원수와 대적을 심판하므로 더 큰 영광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주의 복음이 신적인 권위로 증언되므로 열매 맺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4. 되돌아간 요한

"살라마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5절).

이 요한은 마가 요한입니다(15:37). 문제는 요한이 전도자로서 본연의 임무를 이행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복음 사역에 타격을 된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그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행 15:37-41).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그렇다면 요한이 왜 되돌아갔을까요? 여기는 여러 가지의 추측이 있습니다.

① 안디옥에서 출발할 때 구브로 전도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② 바나바의 생질로 바나바가 지도적 입장을 잃은 데 대한 불만으로

③ 아직 청소년으로 가족을 못 잊어서

④ 바울이 이방인과 회식하는 자유적 태도에 동조할 수 없어서

⑤ 과격한 전도 여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⑥ 바울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해서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주님께 불림을 받은 일꾼이라면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후일에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마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9-11).

마가는 순간적인 과오를 크게 뉘우치고 그것을 분발의 계기로 삼은 줄 압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우리는 그 일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고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 일념으로 주님을 섬긴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도니라"(딤후4:7-8).

우리 모두 주님의 일에 더욱 충성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내 마음에 합한 사람

행13:13-23

 

세상을 사는 동안 친분이 두터워서 마음의 거리를 가까이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삶이라면 그렇게 살기 마련이나 생의 여정에서 남기는 흔적은 중요합니다.

얼마 전 이귀분 집사님의 바깥어른으로부터 "이번에 우리 교회 교육관을 건축하는데 고인을 기념할만한 무엇을 남겼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마침 값진 비품을 들여놓아 감사를 드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고인이 천국에 가신 후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1. 안식일에 회당을 찾는 전도자의 발길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아 이방인을 위해 일생을 바친 전도자 바울의 발길을 살펴보면, 어디로 가든지 먼저 찾은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항상 구원의 우선순위는 유대인에게 두고 또 애정을 쏟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회당의 유래는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라(박윤선)하나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을 때, 지역마다 율법을 가르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회당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15절).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습니다. 물론 회당장은 아직 전도자의 신분과 목적, 또 백성에게 전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줄 압니다.

 

2. 바울이 전한 복음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16절).

바나바보다 앞서서 복음을 증언하기 시작한 일은 구브로에서도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복음 사역은 인기주의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원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을 시기하는 무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있을 때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바울을 시기하여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 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5-18).

진실한 전도자라면 덕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절).

불타는 사명감에서 외치는 바울의 설교는 메마른 영혼들을 일깨우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 간이라"(17-19절).

율법이라면 누구의 추종도 불허할 바울이기에 거침없이 역사를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가진 성경은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설명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일한 말씀이라도 어떠한 시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듯이 이스라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증언하는 말씀은 평소에 회당장들을 통해서 들을 때와 다른 것은, 그 말씀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증언한 복음에서 두 가지 진리를 살펴보면,

1)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2)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롬1:16-17)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였고, 또 상대방이 누구든지 가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진리를 누구나 인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시험하던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여 시험했습니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물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20-22절).

이 말씀은 사도행전 칠장에서 스데반이 증언한 내용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묘한 것이 있다면 스데반이 증언할 때는 사울이 듣고 그곳에서 그의 죽음을 당연히 여겼는데 이제는 자기가 이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스데반은 광야 생활을 길게 전하고 솔로몬의 성전에 대해 언급한 후 복음을 전하였으나 바울은 요약된 내용으로 나열한 후 다윗에 이르러,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절) 하였습니다.

동일한 면은 성령으로 증언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내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두말 할 여지없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먼저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했을까요? 사울은 때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와 사울의 교만, 불순종으로 버림을 받았으나 다윗은 유다 지파로서(창49:10) 어릴 때부터 믿음을 지키고 작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22절).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일은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왕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탄생하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2:16).

이것이 영생의 복음이고 또 세례 요한이 증언한 복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25).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알지 못해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응하게 하였습니다. 약속을 받고도 진리의 원수로 전락한 행위,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이 반열에 서서 주의 뜻을 이룩하는 은혜를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4. 두 가지 반응

1) 믿고 구원받은 무리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42절).

목회자들의 가장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일 줄 압니다. 왜냐하면 주일마다 갈급한 영혼들을 은혜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세 신학대학원 김중기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교수들은 전공 분야가 정해져 있고 또 대상이 바뀌므로 한번 준비한 내용으로 평생토록 반복 교육이 가능하나 목사는 평생 교육이므로 같은 내용을 반복할 수 없으니 어렵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훌륭하게 준비하여도 은혜가 없으면 영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42, 44절).

2) 시기하고 박해한 무리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5절).

같은 태양인데 엿은 녹고 떡은 굳어집니다. 같은 말씀에 은혜받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시기하고 비방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그 성에서 내 쫒았습니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1-52절).

이렇게 진리를 박대한 자들에게는 전도자의 발에 묻은 먼지가 심판대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오늘 세계를 향해 뻗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그 뜻을 준행하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천국 가는 노정

행14:19-28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일로 온 성이 듣고 기쁨이 충만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 전도자들을 더욱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그 길로 이고니온에 이르러 두 사도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14:1).

놀라운 사실은 박해 속에서도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이 유대인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이방인에게는 조물주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오, 예수는 구세주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을 보고 믿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자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엡2:8).

또 은혜의 역사가 더할수록 마귀의 시험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하면 복음의 역사가 왕성해 감에 따라 마귀의 역사도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 아니라면 전도자가 박해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미워하며 박해했을까요? 이는 하나님과 우상,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이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1.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하므로 그곳을 피해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 전도에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디모데의 개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전도로 디모데가 회개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딤전1:2, 18, 딤후1:2, 2:1).

바울이 두 번째 그곳을 방문했을 때(행16:1) 디모데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그때부터 바울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도의 결실은 귀중합니다. 바울이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1)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과 동일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수제자 베드로를 들어 쓰신 하나님은 바울도 들어 쓰셨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9-10절).

얼마 전 이수익 집사님의 아들이 폐가 나빠진 줄도 모르고 계속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은 청량리 동산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사진을 찍어보니 심각한 증상이라 하여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애타는 마음은 ‘목사님이 한 번만 기도해주시면 내 아들의 병이 낫겠다’는 간절한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즉시 문병하여 기도를 했는데, 그때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제 손이 뜨거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그 후 다시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이가 깨끗하게 나아서 담당 의사가 놀랐다고 합니다. 물론 아이도 바로 퇴원을 하였습니다.

2) 허매와 쓰스의 신당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 하고 그들을 위해 즉시 신당에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박해하던 유대인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방 사람들입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인간 나사렛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여 복음을 외면하는 유대인도 잘못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고 신성만을 주장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전도자들이 스스로를 신격시 하여 일어난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12-13).

만일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그것을 절제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그들은 사람의 말이 아닌 신의 소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들은 그 말을 듣자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절제시켰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절).

이렇게 전도자들이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말한 일로 신적인 권위가 실추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존귀한 일꾼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죽음의 고통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절).

어떤 사람은 싸움을 했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몇 날 며칠 이길 때까지 계속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독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바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라면 그처럼 열렬하게 유대교를 신봉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했으니 마음 편할 수가 없었겠지요. 잘못된 신앙관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도자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원수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쳤고 또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 내던졌으나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상처를 입었는데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지요. 바울은 그처럼 심한 박해를 통해 소망의 눈이 밝아져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8:18)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영광과 정비례함을 알았다면 우리도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천국 가는 노정

다시 일어난 바울을 보십시오. 여전히 전도자의 본분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죤 번연은 십이 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때 간수가 말하기를 "네가 오늘이라도 전도를 안 하겠다고 하면 곧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네가 오늘 나를 놓아주면 나는 오늘부터 다시 전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0-22절).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에게 펼쳐진 하늘나라를 보면 영광스런 보좌와 천군 천사들의 노래 소리에 맞추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나오는데,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라 하였습니다.

그때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이른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보십시오.

1) 환난을 통과한 자들이요.

2)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도록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았다면, 또한 저주받은 원수들이 그처럼 미워하는 이유도 알아야 합니다. 방심을 주의하십시오. 영생 길은 달리 없으니 힘들어도 가야하고, 죽더라도 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고난이 닥쳐와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침이라"(고전9:16)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머나먼 전도 여정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온 전도자들은 그곳을 종착역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차, 삼차, 최후에는 순교의 제물이 될 때까지 주님의 분부를 따랐습니다.

여러분! 향방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로 살지 않고 천국을 소망삼고 살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허무한 것에 종살이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주를 위해 피 흘리기까지 충성하신 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바로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합시다.

영광의 면류관 받아쓰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예루살렘 총회

행15:1-21

 

매년 일차씩 구월이 되면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총회를 개최하고 봄, 가을에는 노회가 열립니다. 그때마다 인용되는 구호는 '성 총회', '성 노회'입니다. 또한 개회예배와 성례식에 이르기까지는 엄숙한 분위기가 지켜지나 서기가 출석을 확인하면서부터는 회원의 자격문제부터 시비가 벌어지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덕스럽지 못한 일로 모처럼 방청석에 참석했던 성도들은 평소에 존중받던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모임이기에 오순절 성회로 알았다가 상처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1. 할례와 구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1절).

이 말을 한 사람은 복음과 무관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욕되게 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이 유대인들의 율법 의식에서 나온 교만입니다. 바울도 누구 못지않게 유대인인 것을 자부하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후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또 증언하였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할례와 복음의 문제입니다. 할례는 율법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사 그와 그의 후손에게 언약을 세울 때 모든 남자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므로 선민의 표시를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체의 표시보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

유대인들이 망한 이유는 할례의 의식보다 진실한 회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 뿐 아니라 유대인의 구원도 대속의 제물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아니하고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2. 양보할 수 없는 진리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2절).

이 문제는 안디옥 교회에서 결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의와 죄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진리처럼 위장한 비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오늘 구약입니다. 그런데 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한 편에는 진리인데 다른 한 편에서는 비진리가 될까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옳습니다. 동일한 말씀일지라도 주님께서 계시면 생명의 말씀이 되지만, 그리스도가 없으면 율법조항일 뿐입니다. 이는 신앙의 핵심 문제이므로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1-2).

그것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게 한 뱀의 유혹과 동일한 것입니다. 본색을 가리고 접근하는 이리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은 율법같이 행위의 계명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선물로 받은 후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의 은혜를 배역하고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4-5).

행위가 온전하여 성령 받았다는 고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은혜로 받은 구원을 율법으로 마치려고 한다면 이는 배도자가 받을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3. 베드로의 해명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4절).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 파 중에 속했던 유대인은 여전히 율법을 고집하였습니다.

"바리새 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합니다.

그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많은 변론을 벌인 후 베드로가 일어나서 하는 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7-9절).

베드로는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방에 대한 차등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민의 자존심이 아니라 잘못된 교만입니다. 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겼습니까? 이방 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이방인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엎드려 통회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0-11절).

옳습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롬 3:31). 이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의 해명에 이어 바울과 바나바가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4. 야고보의 결론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13-21).

역시 베드로의 해명에 동의하면서 사도행전 15:16-18절까지 아모스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고 야고보가 마무리를 하였는데 율법과 계명 중에서 네 가지만 언급하여 지키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 총회에서 다루던 안건은 막을 내렸습니다.

1) 우상의 더러운 것

엄격이 말하면 우상은 신이 아니기에 무시하면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14:1-2).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다만 건덕에 문제가 될 때는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섬기던 우상 행위를 단절하고 가담하지는 아니할지라도 그들의 잔치에 스스럼없이 참여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불신 가족이 있어서 조상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속히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2) 음행

이를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성도는 가정생활이 건실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5).

3) 목메어 죽인 것

우리나라에서 이 말씀을 문제시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구원에 관하여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4) 피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피는 생명이니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의미에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해 전에 영락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지도자 협의회가 있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는 몰라도 낮 집회가 끝나자 교회 앞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가 어딘데' '과연 저 사람들도 성직자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도 틀림없는 성직자들이었고 한 나라의 대표자로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나라에서는 성직자들이 담배를 피워도 무방하다는 것뿐입니다. 그와 같이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한 것이 구원에 이르는 절대적인 진리는 아닐지라도 바울과 같이 덕을 위해 삼갈 것은 삼가므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행16:1-15

 

사도행전 십육 장부터는 바울의 제이차 복음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마가의 동행 여부를 두고 바나바와 심히 다툰 까닭에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지중해에 있는 구브로로 향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들렸다가 더베와 루스드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일차 전도 여행 때 유대인들의 박해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던져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충직한 제자 디모데를 만나고 그 후부터 실라와 디모데는 누가와 함께 유럽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복음사역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1. 동역자 디모데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를 얻은 것은 백만 원군을 얻은 것보다 더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경건 생활을 보면,

1)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2절).

이 믿음이 귀중합니다. 동일한 믿음을 가졌는데 걱정 끼치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심을 끼치는 것은 자신에도 불행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기대를 잃지 않고 디모데와 같이 칭찬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빌2:19-20).

바울 사도의 주변에 그렇게도 사람이 없었을까요? 그런 뜻이 아니라 디모데와 같이 충직한 사람을 얻기가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디모데의 충직한 믿음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1-22).

얼마나 보배롭고 값진 믿음입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신실한 믿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의 인도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6-7절).

성령과 예수의 영을 달리 구별하여 해석할 이유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전도자의 길을 가로막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중요시합니다. 또한 우리를 들어 쓰실지라도 기계적인 방법이 아니라 즐겨 순종하는 자를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절).

기억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마틴 미네르라는 목사는 히틀러 치하에서 젊은 신학자 본 회퍼와 함께 수감되어 많은 고문을 당한 끝에 본 회퍼는 처형당되고 그는 출옥하여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는 심상찮은 꿈을 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섰는데 주님께서 그 사람들을 향해 "너는 네가 한 일을 변명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답하는 말이 "지금까지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만 아닌 일주일 동안 그런 꿈을 계속 반복해서 꾸게 되었는데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환상이나 꿈은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에 비해서 불확실 할 수 있겠으나 깨닫는 지각이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환상으로 주의 계시를 전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의 계시로 나타나는 환상과 인간의 이상 곧 꿈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절).

여기서 바울이 주의 환상을 본 후에 즉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로 깨달아야 하고, 또 그 뜻을 준행해야 합니다. 안일하고 한가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의 뜻을 준행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소원합니다.

 

3.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11절).

지금은 터키와 그리스로 국적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자유롭게 오갈 수가 없으나 그 당시는 모두가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통행에 장애가 없었습니다.

특이한 현상은 지금 터키는 회교 국가가 되어 국민의 98%가 회교도인데 반해 그리스는 기독교 국가로서 98%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12-14절).

중요한 문제는 본래 루디아가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루디아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였고 또 언제부터 그 믿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복 받을 사람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고 또 그곳에서 디모데와 같은 충직한 일꾼을 얻게 되었는데, 머나먼 빌립보까지 전도자의 발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루디아와 같이 주님의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을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이 사랑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의할 것은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깨닫게 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도 이 복된 말씀을 깨닫는 지각이 열리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밝아지기를 소원합니다.

 

4. 강권하여 유하게 하는 손길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15절).

주의 종들이 성도들의 가정에 심방을 가면 정성이 담긴 손길로 음식을 준비하므로 일행 중에 식사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심방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게 하셔서 또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지요. 심방을 하는 분은 심방 대열에 서게 되어 감사하고, 심방을 받는 분은 받게 되어 감사하고, 또 대접하게 되니 감사드릴 일이고, 대접을 받게 되니 역시 감사드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전신 치유 운동을 주도해 온 미국의 Tunner 박사는 "인간이 가장 건강할 수 있는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다"라고 했습니다.

루디아의 정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십시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올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로 응답받아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를 힘입기 바랍니다.

루디아는 은혜를 받는 그 순간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집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는데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알았기에 쉽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받을 기회를 잃지 않는 사람이 은혜받게 됩니다.

그 일로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 후에도 기도로, 또 물질로 전도자를 후원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루디아를 기념하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되어 우뚝 서 있습니다.

위대한 업적은 위대한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원하든지 순종하십시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물감 장사 루디아, 그는 학벌이나 재물이 많아서 그렇게 복된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들도 이 믿음 소유하여 생명록에 업적을 남기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16-34

 

바울과 실라는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결실을 얻은 후, 이제는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여종을 건져낸 일로 소득원을 잃게 된 주인이 전도자를 고발하여 관가에 넘기고,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매질하고 그 발을 차꼬에 채워 옥에 가뒀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일으켜 차꼬와 옥문이 터지게 하므로 결국 간수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1. 귀신 들린 자들 이용하여 재물을 얻은 사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나 남을 죄짓게 하면서 아무런 가책도 없이 사욕을 챙긴다면 이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더 잘살기 위해서는 생존경쟁에서 뒤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자라면 먼저 귀신을 축출하고 건져내야 마땅한데, 그를 이용하여 돈을 벌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영혼을 팔아먹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특이한 현상은 그렇게 귀신 들린 자가 전도자들을 따라 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고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군대 마귀들린 거라사 거인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주님께서 귀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유는 귀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성결하고 정절을 지키며 절제하는데 귀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7-18).

여기서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는 말씀은 바울의 인내에 한계점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로는 귀신들린 여자를 불쌍히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 여자는 즉시 입이 다물어지고 마음이 새로워져서 자기의 삶을 바로 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도자들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귀신 들린 여자를 통해 수입을 올리던 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가에 넘겼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귀신 들린 여종이 고침을 받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 수입원이 끊어진 것만 문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도자를 고발한 죄목입니다.

1) 유대인이다.

2) 성을 요란하게 하는 자.

3) 로마인에게는 받지도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어디든지 악의 원인은 돈이다. 오오 이 고도의 잔인성이여 저들은 이 여자가 그대로 마귀에 들린 채 돈만 벌게 되기를 원했다." (Chrysostom)

그렇게 전도자들은 죽은 자, 병든 자, 마귀에게 매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둠의 권세를 대적하여 싸우는데, 불의한 자들은 자신의 사욕을 위해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 밤중에 올린 기도와 찬양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22-23절).

뉴욕 맨하탄 거리에 육십층 빌딩을 가진 프랭크 우르우즈에겐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무남독녀를 키웠는데 딸이 난봉꾼에게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낳고 자살해 버리자, 아버지도 그 충격으로 육십칠 세에 돌아갔습니다. 수천억의 상속을 받은 일곱 살짜리 외손녀는 자기만 위해주는 환경에서 자라나 시집을 갔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일곱 번 결혼을 하고 천구백구십칠 년 어느 호텔 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십대 소녀들에게 수천, 수만 평, 수십억의 주식과 부동산을 상속하여 평생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요.

전도자들을 송사하는 무리들이나 옷을 찢어 매로 치고, 옥에 가두게 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엇이라 변명하였을까요? 전도자들에게 닥치는 고난은 불행이 아닙니다.

사실 전도자들도 인간적인 생각에서라면 할 말이 많겠지요. '하나님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 극하여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소망 가운데서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절) 하였습니다.

여러 해 전 성지순례 때 빌립보에서 바울을 가두었던 감옥이 무너진 성터 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과 몇 평도 되지 않은 감옥에서 전도자들은 밤중에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절).

이러한 역사는 사도 시대에만 아니라 오늘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스캇 목사는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인도 내부에 야만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짐을 챙긴 후 바이올린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는데, 수일 후 한 곳에 다다르자 시퍼런 창을 든 토인들이 몰려와 선교사를 둘러쌌습니다. 토인들은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로 창끝을 모두 스캇 목사에게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인식한 스캇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를 부르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저 사람들이 나를 찌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으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일절과 이절을 부르는데도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눈을 떠보니 창끝이 모두 땅으로 쳐져 있었고, 토인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엎드려진 것입니다.

'큰 지진' 이것은 천재지변입니다. 옛날부터 지구상에는 많은 지각변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있던 옥문과 차꼬가 터지는 지진은 자연 발생이 아닌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차꼬와 옥문이 열렸는데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또 그 지진으로 도성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포와 불안에 빠져들어도 사도들은 기뻤습니다. 이유는 그 지진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손길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도 동일할 것입니다.

성도를 박해하던 원수들은 산과 바위, 언덕 밑으로 들어가면서 어린 양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성도들은 구원의 기쁨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3. 자결하려는 간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27절).

로마의 법은 엄격하여 죄수가 도망하면 간수가 대신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을 때 헤롯은 파수꾼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행 12:19).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절).

신적인 위엄과 권세가 넘치는 음성입니다. 이제는 어느 쪽이 죄수요, 어느 쪽이 간수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 성도들이 누릴 승리요 영광입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9-10).

 

4. 생명의 복음

J. T. Smith 목사는 종군 목사들에게 "전쟁에서 삼 분 후에 죽을 부상병에게 전할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지요. 인생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음성을 듣고 간수는 자결을 하려다 멈추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절) 하였습니다. 여기에 '선생들아' 하고 부른 것은 '쿠리오이' 즉 "주"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때 간수의 입장에서 말한 구원을 신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다만 루스드라에서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허메와 쓰스라 이름 붙여 사도들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던 것과 같이 간수도 이제는 사도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기에 구원의 은총을 간구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복음이 우리에게는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도성의 한 간수에게는 달랐습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절).

이제는 공포와 불안이 사라지고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많아 지옥가리라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당부드리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것은 우리가 영생 얻기에 넉넉한 복음입니다. 이 말씀에 간수와 그 집은 회개하고 은혜 충만,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옳습니다. 주의 이름은 어느 때 또 누구든지 구원 얻기에 넉넉한 복음임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고 은혜는 강물같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세계가 변하고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또 영원 무궁히 변함없는 생명의 이 복음이 우리 속에 활화산 같이 폭발하기를 소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아멘 -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16-34

 

바울 사도의 일행은 이제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는데 그 거리는 160km(400리)의 길입니다. 바울은 거기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2절).

여기서 "자기의 관례대로"라는 말은 율법적인 의식을 따라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강론한 내용은 유대인들같이 율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전도자들을 따랐으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을 영접했던 야손을 잡아 고발했는데 그때 고발한 죄목입니다.

1)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2)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선동한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그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케 하므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아덴으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박해 속에서 전파되었습니다.

 

1. 철학의 도시 아덴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의 삼대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도시 이름은 헬라 여신의 이름을 따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덴은 철학과 문학, 예술의 중심지로 서양 문명 뿐 아니라 세계 문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아덴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비구레오, 스토익파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덴은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에서 볼 때 지적 수준이 가장 높았으나 바울은 복음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식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22).

이렇게 변론의 광장을 지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성령의 도구로 들어 쓰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2. 우상을 보고 격분한 바울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16절).

나라마다 고유의 퐁속과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요시 하는 것은 그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상의 얼이 담긴 풍속과 전통이라 할지라도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면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살풀이라 하여 무당이 굿을 합니다. 또 지방에 가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 이름 붙인 장승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지성인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교까지 그런 것을 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상 행위냐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것을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는 인구 숫자와 비길 정도로 신이 많은 나라입니다. 매년 수백만이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데 소를 그들의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전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는 국회에서 소를 외국에 수출하자는 제의를 했다가 국회의원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태를 빚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건축한 12사단 포병 연대본부교회 준공 예배시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대장이 부처를 땅에 묻어 버린 일로, 한동안 여론에 올라 결국 대대장은 군복을 벗게 되었는데, 그 후 독지가들이 대대장을 신학교에 보냈다고 하니 머지않아 기드온과 같은 성직자가 등장하리라 생각됩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이면서 또 신전의 도시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여신의 신전)을 비롯하여 삼만이나 되는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아덴은 우상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은혜와 복을 주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3. 희랍의 철학과 부활의 진리

바울은 우상의 도시 아덴에 들어가서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시장, 거리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우상숭배의 죄와 철학의 허무를 논하면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떠한 수모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8절).

두 학파의 주장

1) 에비구레오 철학

이는 주전 삼백사십팔 년에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학파입니다. 그들의 윤리 철학은 인간 쾌락주의입니다.

a. 신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신은 인간을 다스리지 않는다.

b.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사망은 달콤한 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c. 먹으라 그러나 남들과 함께 먹으라 그렇게 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2) 스도이고 철학

주전 삼백삼십육 년 구브로에서 출생한 제논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학파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을 지식의 기준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18절) 하였습니다.

"이 말쟁이" 이는 새가 곡식알을 쪼아 먹듯이 여기저기서 지식의 조각을 얻어가지고 모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을 멸시하여 한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은 바울이 아닌 자기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18절).

부활의 진리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중의 하나입니다. 그들도 내세는 인정하지만 몸의 부활은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모든 원리를 밝혀주는 것 같으나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내세를 운운한다는 것이 막연한 것일 뿐 영생에 대해서 어떠한 확신과 증거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의 진리는 어떻습니까? 실의와 공포에 빠져있던 제자들을 찾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26) 하시며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산물이라면 부활의 진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철학에는 생명이 없으나 부활의 진리는 영원한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복음

회당이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아레오바고(화성신의 언덕)는 헬라주의 철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를 순례했을 때 보니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언덕은 아덴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동산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에 의해 닳고 닳은 천연 대리석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절).

그때 바울이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친들 그것이 잘못된 복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직설적인 복음보다 우회적인 방법이 더 큰 효력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개종할 수 있는 설득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알지 못하는 신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참으로 기이한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섬기는 신을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우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상을 섬길 뿐이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누가 우상 앞에 복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상 행위는 인간 무지에서 나온 소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구백칠십오 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세계적인 점쟁이 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세계 각국에서 삼천 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무당과 점쟁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문명이 발달한 구라파나 미국에서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처럼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쉽게 빠져드는지 아십니까? 귀신들은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을 분별없이 용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1-3).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제에 대한 학설입니다.

a) 처음에는 알다가 후에 잊어버린 신

b) 주전 육세기 아레오바고에 큰 질병이 있었는데 구레네인 에피파네스가 와서 구원하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그때 빠진 신이 있을까 두려워서 희고 검은 양들을 놓아 양들이 앉는 곳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쌓은 데서 기인되었다고 합니다.

2) 하나님과 우상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 하고 제사를 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요, 하나님께 드린 제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 무지로 인해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4-25절).

여러분! 우상이 무엇입니까?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29-30).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이 이르기 전에는 어떤 우상의 행위일지라도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죄는 여전히 죄가 됩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자행된 죄는 빛 가운데 나올 때에 죄인 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에 비추임을 받고도 어둠의 행위를 저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고의적인 죄가 되므로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므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새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강물같이 흐르는 사유의 은혜를 받아 영원토록 주님만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두려워하지 말라

행18:1-10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처럼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씨를 뿌리기만 하여서는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고와 땀 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역사를 살펴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렀던 삼 년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간이었습니다. 대부분 몇 달 심지어 몇 날 또는 그냥 스쳐서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자의 발길을 주님께서 항상 인도하시고 복음을 전할 때는 말로만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확신으로 증언하게 해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1.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 부부

바울은 아덴에서 높은 식견의 사람들을 상대로 변론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결실은 빈약하였습니다. 값진 소득이라면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 하는 경건한 부부를 만나게 된 일입니다. 그들의 충성된 믿음은 보석같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두 사람이 하나 된 자리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그처럼 충성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므로 은혜의 역사는 더욱 크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자는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이후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나, 오히려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축출한 일로 고린도에 온 것과 바울이 로마 교회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지식을 얻게 된 것이 그들을 통해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바울과 아굴라는 업이 같으므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혹시 바울같이 위대한 전도자가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개척자의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주업으로 삼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도 개척자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감수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결혼 전에 우리 교회를 다니다가 결혼을 한 후 일 년 동안은 사정이 있어서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개척 교회로 다닌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되느냐?" 물었더니 목사님 가족들과 자기뿐이라 했습니다. 남편이 실직한 관계로 자기가 직장을 다니다가, 아기를 낳게 되어 시부모님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러한 형편을 알게 된 목사님이 "우리 식구가 아침 한 끼는 금식을 하여 금식미가 있으니 쌀은 우리 집에서 가져가도 되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척자의 길입니다. 살펴보면 안타까운 일이 어찌 한둘이라 하겠습니까?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3절).

바울과 아굴라는 단순히 먹는 것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4절).

이것이 귀중합니다. 성경에는 세상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면류관을 주리라는 약속은 없어도 주의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는 면류관을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복 받은 사람이 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토요일, 제이 남전도회 회장과 집사들이 쌀가마를 어깨에 메고 당회실로 들어오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 쌀이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분들을 돕기 위해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열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불림을 받은 여러분! 우리들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같이 목숨 걸고 주님 섬기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은혜

우리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힌 은혜,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라는 말씀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하였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5절).

바울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불길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레미야와 같이 전하지 않으면 심령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사명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할 때마다 만족스런 결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주의 이름으로 자기 민족을 사랑하여 복음을 증언하는데도 유대인들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또 박해였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6절).

전도자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의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절).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며 이방인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이 말씀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도성은 죄 많은 도성, 음란한 여자의 별명을 '고린도 여자'라 할 만큼 음란하고 방탕하기로 소문난 도성이었습니다. 거기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대적하여 훼방하므로 바울이 옷을 떨어 심판받을 그 피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는데, 그 도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이 나를 붙잡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것은 갈급한 주의 양들이 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오늘 이 믿음과 불타는 사명이 우리들 속에서 불타오르기를 소원합니다.

 

3.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라

루마니아의 공산 체제하에서 박해받던 범브랜드 (Richard Wurmbrand) 목사는 옥중에 있을 때 성경에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세워 보았는데 삼백육십오 회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의 날짜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7절).

전도자를 박대한다고 해서 세상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선한 목자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내 길이 막히면 주님 예비한 새 길이 열리고, 내 능력이 한계에 이를 때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십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8절).

이렇게 갈급한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포기할 수가 없지요.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모진 박해가 닥쳐와도 꺾일 줄 모르는 전도자의 이러한 의지가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환상과 계시로 주의 손이 함께 하심을 체험한 후에는 또다시 새 힘이 솟아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후일에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그것을 밝혀주었습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요 많이 수고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0). 이 은혜가 그립지 않습니까? 주의 일에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일제 통치하에 있을 때 "예수 천당"만 외친 최권능 목사님께서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그 말을 그치지 않으니 결국 풀어주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4. 아무도 너를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

제이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에서 죽은 청년의 수가 삼십만 명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에 보내고 불안과 근심으로 심장병을 앓아 죽은 시민들이 백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총,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안과 공포의식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0절).

주님의 보장하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정된 곳이 있을까요? 이 은혜를 힘입은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11:1).

여호수아가 무엇으로 무기를 삼았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1:5-6).

 

5.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건전한 정신력은 건강한 체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체력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는 건강의 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는 건강해도 세월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기 위해 건강을 지키고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물론 육신의 일도 근면하고 성실하여 남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만 더 귀중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입니다.

주의 은혜로 병 낫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주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자의 발길이 왜 그처럼 복된지 아십니까? 맡은 임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이 온 천하에 충만하기 위해 더욱 분발하여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절).

- 아멘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절).

여기에 ,윗 지방, 이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말하는 것입니다(행18:23).

바울은 이차, 삼차 전도여행 때 특히 에베소에서는 오랜 기간 눈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대 교회사에 보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두고 아리우스(Arius:그리스도의 신성만 주장)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가 신학적인 대립을 하므로 주후 삼백이십오 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초교파적으로 총회를 열어 아리우스설을 이단으로 배격하고, 아다나시우스의 정통 설을 채택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혹자는 그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진리를 보십시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8-30).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러므로 그들이 요한의 제자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 믿음의 성장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1. 이성으로 믿는 믿음

1) 합리성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으로 사고하고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이성과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성은 합리성을 전제로 합니다. 물론 진리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타락한 인간 이성이 미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이성에 속한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예수를 분명히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알았습니까?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오늘도 이성의 안목으로 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 사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밖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조건을 제시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0, 42).

이는 골고다에서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원수들의 소리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온들 그들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대제사장들은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려내셨을 때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요12:10-11).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0-21).

또 어떤 사람은 육신의 병마와 질고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찾는 사람, 세속의 왕권을 기대하고 자리를 탐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의회를 중심한 보수 세력과 개혁을 주도하는 옐친이 한판 대결을 벌인 끝에 옐친에게 승리가 돌아가자 보수주의를 지지하던 자들이 돌아서서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힘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속의 권세와는 무관합니다.

 

2. 선지자로 아는 믿음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3-14).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7:39).

여러분!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이 시간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도 향기 풍기는 정성이 담겨질 줄 믿습니다.

 

3. 성령으로 믿는 믿음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년 동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 가운데 수제자 베드로는 제사장의 뜰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보고도 "나는 갈릴리로 가겠노라"하고 다시 그물을 던진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의해야 할 일은 거듭난 후에도 육신의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중생 후에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영적인 지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영이므로 은혜를 받게 되면 진리의 지식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자신의 신앙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지각이 중요합니다. 신앙이 병들고 죽어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대입니다.

1) 칭찬의 시험대

누구든지 칭찬받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을 때 조심하십시오. 이는 칭찬의 시험대가 시련의 시험대보다 넘어질 확률이 월등히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 위주로 일을 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자고하지 마십시오.

"칭찬만 받기 좋아하는 것은 못난이의 짓이나 잘난이도 좋아한다. 그러므로 위정자를 공격만 말고 칭찬도 하여 주라"(도산 안창호).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27:21).

2) 시련의 시험대

시련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유혹은 악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련은 고난으로 닥쳐오고 유혹은 거짓으로 위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욥과 같이 까닭 모를 시련이 있습니까? 인내하십시오. 칭찬에는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우나 시련에는 지키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몸에 생긴 종처로 "네가 죽으리니 네 집에 유언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수 있었으나,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는 교만이 들어가서 국고를 다 보이므로 모든 보물을 바벨론에 빼앗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어떠한 시험이든지 극복하면 복이 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사람이 성공하려면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시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이 올 때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감사는 역경을 극복하는 무기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인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 대상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서와 같이 망령된 행실을 버리고 야곱과 같이 장자 권과 천상의 축복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일로 정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그들이 누구를 통해 복음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으나 전도자들이 성령을 제하고 성경을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진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앙 상태에 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러한 믿음도 연조에 따라 학습, 세례 또 직분을 받아 교회에서 일꾼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씨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지금도 역사를 하십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불씨는 에베소로 인화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6-7절).

진리의 불길은 어거스틴의 가슴에서 일어나 세속에 물들어 병들었던 고대 교회를 일깨워주었는가 하면 루터와 칼빈의 가슴에 인화되어 죽은 교회를 개혁하게 하였고, 요한 웨슬리, D.L 무디, 스펄죤 목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일어나 오늘 기독교 백이십 년 역사에 세계에 불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 분발하여 성령의 강권적인 손길에 붙잡혀 헌신하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주의 일에 방관하지 마십시오.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에 보면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트 곧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사람이 끼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저항운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평안하기를 바라는 자인데, 그렇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때 한 저항 운동가가 옆에서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오 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이제 한 해도 소리 없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무르익은 곡식들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능력 받아 본연의 임무에 충성하여 주의 날에 영광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희한한 능력

행19:8-20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한 복음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은혜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어본 것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은혜를 사모하는 그들에게 은혜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사모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추수 감사 절기를 앞두고 전 성도들이 무엇을, 어떻게 감사드려야 하며, 또 무엇으로 영광 돌려야 할지를 바로 알고 풍성한 열매 맺는 은혜를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1.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8절). 바울이 이렇게 상당 기간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이 용납했다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지는데 그러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1) 긍정적 반응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9절).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최대의 정력을 쏟은 일로 생각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세워서 그 일을 맡긴 다음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바울의 선교 역사에 획기적인 신기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헬라인의 철학 강당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처럼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능력 있는 복음을 증언하므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절) 하였습니다.

"날마다 강론하여" 이렇게 이 년 동안 목숨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후일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놓고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씀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18-21).

2) 부정적 반응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영생에 이르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마음이 강퍅해져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세상에는 진리의 원수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천 사람을 상대하여 그중에 몇 사람을 얻는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나와서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은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2. 놀라운 능력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절).

과연 놀라운 능력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 병든 자를 고치고 악귀를 물리쳤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런 것으로 병을 고친 사람이 그것을 우상시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목사의 말 한마디, 한 번 붙잡아주는 그 손이 성도에게는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일 제가 갑자기 “내가 기도하면 물이 생수로 변한다”고 하면 또 다른 이단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장대에 달게 하여 그것을 볼 때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우상시하므로 히스기야가 부서뜨리면서 '느후스단' 놋조각이라 하였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도 있었으면 그것도 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을지라도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마술사들의 흉내

성경에 마술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러한 자들은 진리로 말미암아서가 아닌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13절).

중요한 것은 악귀가 능력 받은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흉내 내다가 봉변만 당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4-16절).

악귀는 영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귀신이 먼저 알았습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8-29).

영력이 없는 자는 귀신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주변에는 영을 분별하지 못해 방황하는 양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이재록 씨가 출옥한 후에 다시 강단에 서서 "역사가 계속되는 한 분명히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신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지요, 그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거짓말하는 미혹의 영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 죄를 회개해야 하지요. 그런데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가 받은 고난은 바울같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 하니 또 어떤 거짓말을 하고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회개가 없는 저주받은 영물입니다. 그와 같이 마귀에게 속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에서 발행하는 중화 신문에 게재된 문선명의 말입니다.

"축복받은 가족들은 혈통을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혈통을 더럽히려고 한다면 자살을 하는 게 좋다. 그러면 지옥행은 면한다."(82.6.15일자).

얼마나 허무맹랑한 망언입니까? 그런데도 미혹된 자들은 깨닫지를 못하니 문제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열심과 충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별 있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짐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4. 불태운 마술 책

드디어 에베소에서도 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17-19절).

불태운 마술책값이 '은 오만', 주님의 몸값, 은 삼십에 비하면 그것이 얼마나 거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은 오만의 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영영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죄악에 매여 종살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닻줄을 던지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 신이심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절).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리의 증인되기 기원합니다. - 아멘 -


진리의 원수들

행19:23-41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

그런데 사람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니 문제입니다.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환자에게 얹으므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또 귀신이 물러감을 보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도 마술책을 불사르고 돌아섰으나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전도자들은 복음사역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

그 당시 로마에 가는 것은 모든 사람의 꿈이었습니다. 정치가는 권력을 위해, 군인은 명예를 위해,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발길이 더 귀중한지는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1. 우상을 업으로 삼는 데메드리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23-25절).

데메드리오는 신전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집에 두고 섬기며 또 몸에 호신부로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26절).

이런 말을 하고 무리들을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폭군의 잔재입니다. 오래지 않아 평양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자주독립, 주체사상, 조국통일, 하나도 잘못된 구호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호는 모두 세습 독재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을 속이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데메드리오를 보십시오.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나온 발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과연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신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데메드리오는 이런 말로 군중을 선동하였습니다.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해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27절).

우상이 무엇입니까? 이는 생명과 구원, 축복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 무엇인지 바로 알았다면 회개하고 살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사44:9).

 

2. 목적도 모르고 모여든 청중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28-29절).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거기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때 연극장에 모여든 무리들은 뚜렷한 이유도 목적도 모르고 모여든 사람들이 태반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33절).

여기 알렉산더의 신분과 유대인들이 그를 밀어낸 이유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그를 불신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화가 자기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책임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려 했다.

2) 유대인 신자로 보고 나가서 그리스도교를 변명하라고 했다.

양편 다 일리가 있다고 보겠으나 유대인 신자로 보고 기독교를 변명하라 했다는 설이 보다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34절).

군중들은 유대인들의 어떠한 변명이나 기독교인의 복음을 받아드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화난 감정을 부채질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러한 분위기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선동으로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물리적인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의 역사와 적어도 천구백칠십 년이라는 시간적인 공백을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베소에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외치는 사람을 볼 수 없으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복음은 온 천하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진리는 영원, 불변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군중을 해산시킨 서기장의 지혜

의회의 서기장은 에베소에서 가장 권력 있는 사람으로 법령을 기안하고, 시 예산을 집행하며, 로마의 총독과는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를 크리스천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나 정치인으로서 군중을 수습하는 데는 지혜로웠습니다. 미국의 제 삼대 제퍼슨 대통령이 로버트 장군을 불러 그의 직속 부하를 지휘관으로 승진시키기 위해 적합한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을 때 "각하, 그는 유능한 군인으로 지휘관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하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의 부하는 로버트 장군을 찾아가서 "저는 평소에 장군을 비난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하니, 장군은 "알고 있었네, 그런데 대통령의 질문은 내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이지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었네." 이것이 상사의 덕인 줄 압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35-36절).

이 말은 성난 군중을 잠재우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37절).

바울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러한 지적은 율법주의로 전락한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는 타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비진리와 타협이 용납될 수 없으나 성도는 사명감을 가지고 불신 사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38-39절).

그런데 복음 사역에 주동자인 바울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서기장은 그 자리에 붙잡혀 오지 않은 바울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법치 국가에서 치외법권자로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회질서에도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마땅히 국법을 지켜야 하고, 국제법을 깨뜨려서도 안 됩니다. 한때 러시아에서 동해에 버리는 핵폐기물로 인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온통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공해라 할지라도 국제법이 있으면 지켜야 합니다.

감사할 일은 기독교의 복음은 세상 법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세상의 법을 지키시며 율법도 준행하시고 또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것이 세상의 법이라면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법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가이사는 세상 법으로는 예수님을 죽여야 할 죄를 찾지 못했으나 유대인은 율법에 의해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 율법 조항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신성을 모독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4-55).

예수님은 세상법이나 모세의 율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오직 진리를 말씀하신 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침묵을 지키신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은 사망이 다스릴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무덤 문을 터뜨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받으신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하였습니다.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40-41절).

옳습니다. 어둠 속에 속한 사람들은 까닭 없이 진리를 대적하고 불법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진리 앞에서는 물거품에 불가할 뿐입니다.

진리의 증인으로 불림을 받은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되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기까지 이 영광의 대열에서 모두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삼층 누에서 떨어진 유두고

행20:7-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1절).

바울은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소요 사건으로 그곳을 떠나 마게도냐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하고,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건너와 일주일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드로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는 밤 깊도록 복음을 전하므로 그때 삼층 누에서 졸고 있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사고가 발생했으나 바울이 기도하여 죽은 자를 살린 일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12절).

 

1. 안식 후 첫날(주일)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7절).

이날은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1) 주의 날에 대한 성경적 근거

밧모섬에 유배 갔던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주님께서 주일 아침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막16:9), 엠마오로 향하는 두 청년과(눅24:13-15)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20:19).

초대 교회도 유대인들 같이 안식일에 모이고(행15:21, 16:13, 18:4) 또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날에도 모였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명백해지고, 교회와 회당이 독립되므로 안식일은 주일로 변경된 것입니다.

2) 초대 교부들이 지킨 주일

익나시우스는 "안식일은 이제 지키지 않고 주의 날에 그들의 생을 새롭게 한다"고 하였고, 고린도의 디오니시어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주의 날을 성일로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사데의 멜리트는 "주의 날에 관한 논문을 썼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내려준 것이 아닙니다. 참 안식은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입니다. 유의할 문제는 율법의 안식일과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참 안식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날이라면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참된 안식과 영원한 구원이 완성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3) 안식일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는 안식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휴식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루하루 창조사역을 완성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만족과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아담을 지으신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하시고 여자를 지은 다음 안식하셨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가 안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겼다면 에덴의 안식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었으나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어 에덴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4) 안식일과 구원 문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주님께서 안식일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흥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는 안식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릴 구원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밤중까지 전한 복음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7절).

예배 시간은 한정이 있으므로 모든 순서는 시간에 맞추어 진행해야 합니다. 설교가 길어도 문제이나 너무 짧아도 그렇지요. 제가 제대하고 중랑천에서 개척했을 때, 일 년 후 팔십오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대문에 있는 동부교회에 여전도회 헌신 예배 요청이 있어 갔는데 원고도 없이 기도만 하고 강단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전도회 회장이 오늘 저녁 특별 강사를 통해 은혜 많이 받으라고 소개를 한 다음 제가 나갔는데 몇 마디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도 합시다" 하고 한 오분 기도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개척교회 간증을 해서도 은혜가 되었을 텐데... 교인들은 서론을 하고 기도했겠거니 생각하고, 이제부터 설교를 들으려고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사는 들어가 버렸으니 그게 무슨 망신입니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얼굴 들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하는 얘기가 "예배가 짧아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설교를 조금 더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도 그곳에 머물러 목회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절).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청지기의 마지막 밤은 주님의 양들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한마디라도 더 전하고픈 욕심에서 전하고 또 전하다 보니 시간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줄 압니다.

 

3.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

잠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불면증에 걸리면 절감하게 됩니다.

섹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헨리 4세가 리쳐드 2세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려 고민하는 글이 있습니다.

"오오 잠이여, 자연계의 보모 인자한 잠이여, 내 어쩌다 그대를 놀래어 쫓아버렸는가 그대가 다시는 나의 눈꺼풀을 덮어 눌러 감각을 망각에 젖게 해 주지를 않는구나!

잠이여, 향불을 피우고 달콤한 음악으로 자장가를 부르며 호화한 청기와 밑에 누워있는 귀인의 침실은 마다하고 연기가 자욱한 골방 안 불편한 자리에 누워 모기떼에 뜯기면서도 잠자코 잠이드는가!"

수면은 귀중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그렇지만 장소와 시간을 가려야지요. 어느 집사님이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있기에 지적했더니 마침 그 시간에 눈이 아파서 감고 있었는데 지적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눈을 감는 것도 조심하고, 옆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물론 눈을 감고 찬송을 부를 때는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는 정신집중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은 유두고와 같이 떨어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9절).

유두고가 삼층 누에서 떨어진 이유는,

1) 창 누 위험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요

2) 깊이 졸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받기 위해서 백척간두에 앉아 모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8절).

공간이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어도 창 누에 걸터앉아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은혜받는 자리인데 유두고는 떨어졌으니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정하고 동하는 가운데서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창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낮 같이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낮에 쉬어야 하지요.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밤에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졸며 자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모른다" 하고 주님을 부인할 뿐 아니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졸고 잠자던 때의 제자들과 깨어 기도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비굴하고 부정적이고 살기 위해 도망간 제자들이, 기도로 무장하고 능력 받은 후에는 모두가 변화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던 주님의 기도 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지 않습니까? 깊이 잠든 영의 잠을 일깨우시기 소원합니다. 성지 순례때 쓴 기행문입니다.

[숱한 사연을 지닌 도성, 여전히 오늘도 말이 없다.

그러나 너만은 알리라.

수만리 길 멀다 않고 네게 담긴 비밀이 알고 파서

찾아 온 길손에게 속 시원히 말해다오.

예루살렘아 너는 알리라 나사렛 예수 전하신 복음을.

예루살렘아 너는 알리라 그의 수난, 영광의 부활, 재림의 약속을.

소리쳐 전해다오. 이 영원한 진리를…]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그러나 졸며 잠자던 유두고에게는 여전히 어둠이었던 것같이 우리도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다를 바가 없을 줄 압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 등불입니다. 이 빛은 온 세상을 밝히기에 넉넉하나 불행스럽게도 빛을 등진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둠일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오늘 우리는 빛의 역군으로서 세례 요한과 같이 이 빛을 증언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다시 살아난 유두고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삼층에서 실족하여 떨어졌다면 골절상을 입거나 죽게 되지요. 졸다가 떨어져 죽은 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렸습니다. 바울은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릴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왕상17:21, 왕하4:34).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즉각적인 응답과 함께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드러났고, 그 밤은 날이 새도록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유두고 까닭에 오늘도 졸며 잠자는 사람들이 있다면 위로 받으리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자신이 어떤 흔적으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진리로 무장하여 복음의 역군으로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충성된 청지기

행20:17-27, 갈5:22-23

 

충성이라는 말은 본래 군신이나 주종관계, 즉 수직적인 관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수직 관계라도 부모와 자식 간에는 효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존경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와 성도들 관계는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사에서 바울같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극적으로 변화를 받아 충성되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오늘까지도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미움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단에 빠졌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지요. 한때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들어 "이제야 참 진리를 깨달았다. 거기에 가보니 무언가 다른 게 있더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 받은 바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는 유대 종교를 바울이 정죄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율법주의를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누가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율법과 복음은 상반될 이유가 없으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2-7, 13).

성도 중에는 "목사님, 이렇게 믿어도 되겠습니까?" 걱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구원은 지식이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소망이 없는 줄로 믿고 주를 섬기면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1. 진리의 사슬에 매인 충성

충성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충성 일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일생 동안 성령의 사슬에 매인 바 된 삶이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2-24).

바울이 그처럼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으나 지금까지는 길이 막혔는데(롬1:13) 결국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결박된 채 로마에 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록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끌려가는 일이라도 이 길이 주님 가신 길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즐겨 복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겸손과 눈물의 충성

바울은 복음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습니다. 그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던 전도자도 어떤 경우에는 두려워하며 또 울기도 하였습니다. 오로지 그의 겸손과 눈물은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한 충성과 진실의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오게 하였습니다. 그 길은 45km, 즉 100리가 넘는 거리입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17-21).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절).

바울은 눈물의 사도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리신 그리스도와 같은 심정에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구원의 진리가 온 세상에 선포되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대할 때, 또한 진리를 대적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을 대할 때는 슬퍼 탄식하는 마음이 더해만 갔습니다. 이 눈물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를 통해 전해진 복음, 또 빌립보 옥중에서 간수에게 전했던 복음은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신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이 능력의 복음이 증언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눈물에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과 눈물' 우리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영생의 결실을 얻을 수 있기 소원합니다.

 

3. 인내로 충성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핏줄은 못속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았을지라도 어디를 가든지 항상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또 유대인을 우선으로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복음으로 개종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더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으나 좌절하지 않은 것은 장차 받을 더 큰 상급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4. 대상과 시간을 가리지 않는 충성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0-21절).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상과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 불타는 사명감도 저버리지 마십시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8:26).

빌립은 즉시 순종하여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6-27절).

얼마나 자랑스러운 고백입니까? 바울에게는 그 순간이 에베소 장로들과 최후의 작별을 고하는 뜻깊은 자리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같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청지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목숨을 다한 충성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하나님께서 즐겨 응답하시는 기도는 충성을 따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목적 삼고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라면 이보다 더 기뻐할 일은 없을 줄 압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무엇이 바울을 그처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까? 충성 일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벧세메스로 향하던 두 암소에게는 법궤가 있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도 새끼의 유혹과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벧세메스로 향했던 것같이 바울 사도도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3-24절).

'충성의 열매'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의의 면류관이 보장됨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충성의 열매 맺어 이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죽음을 각오하고

행21:1-14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에스더의 결단은 그의 민족을 하만의 계략에서 살려내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머나먼 항해의 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리아의 두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당하게 되리라는 예언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1. 성령의 예언

여기서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못 가게 했는데, 바울은 그 길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을 떠나 돌레마이를 지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할 때에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유대로부터 선지자 아가보가 내려와서 또 예언 했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

그때 모든 사람들이 울며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못 가게 하였습니다. 유의할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어떠한 의도에서 그렇게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항상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그 길로 죄수 아닌 죄수의 몸이 되어 결박된 채 예루살렘에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로마까지 가게 되었고, 최후에는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그때 성령의 예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있다면 영적 안목의 차이입니다. 시력이 좋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으나 안 좋으면 가까운 것만 보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딤후 4:7-8).

뿐만 아니라 진리는 결박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

사람은 결박하여도 진리는 결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는 자는 참 자유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빌립집사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7-8절).

빌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루살렘에서 세움을 받은 초대 집사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였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에디오피아 간디게 여왕의 신하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행8:26-40). 빌립의 네 딸들도 처녀로서 예언한 것을 보면 그들의 경건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은혜의 사슬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 자기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이미 순교를 각오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위력은 순교를 각오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눈을 뽑힌 삼손이 죽기 전에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위력도 마찬가지입니다(삿16:28-30).

주님께서 교훈하신 영생의 진리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에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변에서 권유하는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였으나 방향을 돌이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의지는 더 굳어만 갔습니다. 주님의 참 사랑과 혈육의 정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이것이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입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는 발견할 수 없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4. 주님의 뜻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절).

아무리 붙들고 간청하여도 바울의 발길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내린 결론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1) 형통의 뜻

다윗이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누리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무덤에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십시오. 금요 철야 기도회 때 간증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아쉬움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움이 있을 때 은혜가 더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복 받아 누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과 번영의 복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2) 곤고의 뜻

땅에서 누리는 복이 형통과 연관이 있다면 고난은 십자가와 연관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형통과 번영이요, 또 영원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생에게는 고난이 다르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8-9).

"인생을 가리켜 고해"라 하는데 그 이유는 범죄한 인생의 노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느 때에 번민과 고통에 빠졌습니까? 양치는 목동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죽인 일로 인해서 였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아내를 빼앗아 네 눈앞에서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아내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 하였습니다.

다윗의 탄식을 보십시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죄의 보응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죄의 보응이 그렇게 무서울지라도 영원히 계속하지 않고 사유의 은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바울의 믿음이 요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길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곧 십자가의 진리요 부활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가는 길은 영광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신 여러분!

우리들도 대속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진리의 대열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광에 이르시기 기원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아멘 -


바울의 변명

행22:1-21

 

부여잡는 성도들의 손길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문안하고 이방인 중에서 그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고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행21:20).

문제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인식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유대인을 책망한 것같이 바울도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 의식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깨닫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행21:21).

이것은 바울이 주장했다기보다 유대인이 비난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줄 압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라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격하는 율법주의를 타파한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의 비난이 진실이라면 모세의 율법이 진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권유를 받아 머리를 깎고 성전에 들어가서 육일 동안 결례를 행했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행21:27-28).

유대인은 성역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여 오늘까지도 훼파된 성전 자리를 밟지 못하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역은 사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왜곡하여 바울을 정죄하니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폭동이 어디에서 기인 되었는지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행 21:29).

이 말을 듣고 온성이 소동하여 바울에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1. 구조의 손길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행21:31-3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손길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천사를 통해서 또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는 자연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어떠한 방법을 이용하든지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십니다. 그때 천부장은 전도자 바울을 보호해 줄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도 없었으나 천부장은 바울에게 중요한 보호자의 손길이 되었습니다. 천부장이 선해서였을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이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의 반란자인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신자의 손길을 통해서도 이렇게 지켜주십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행21:37-40).

그때 군중들의 분위기는 바울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은혜받을 성도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증오심이 불타올라 당장에라도 돌이 날아올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무슨 말을 한들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바울은 사명이 있으므로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사명은 귀중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맡겨진 특별한 임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는 있으나 나의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Ruskin)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6-17).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을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명이 있는 사람은 맡은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불타는 사명 의식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도 폭발되기를 소원합니다.

 

2. 바울의 변명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행 21:40-21:1).

오순절 사건으로 성령이 충만할 때 사도들은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와 각국 말로 복음을 전하므로 모여든 무리들은 그 일로 더 큰 감동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일이 있었으나 바울은 방언의 은사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학문이 언어 장벽을 넘어서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가 히브리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2절).

그때 바울이 변명한 말씀입니다.

1) 율법에 완벽한 행위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3절).

그는 누구보다 율법을 많이 배웠고 또 계명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

율법에 대한 그의 열심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4-5절).

물론 그때 바울의 변명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동의해 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 바로 섰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회교권을 그처럼 미워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유교, 불교에 관해서도 그들은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에 관해서는 이렇게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형제애를 발휘하여 관용을 베풀 수가 없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함과 같고, 에서가 야곱을 미워함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두고 일어난 질투라면 양편을 다 만족시킬 수 없지요. 메시아로 인한 구원의 은혜를 유대인은 뺏기고 이방인에게 넘어갔으니 유대인은 그들의 율법으로 마음 달래며 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는 바울도 유대인이 주장하는 율법의 정통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그처럼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방향을 돌이켜 진리의 증인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 주님의 음성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 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6절).

이는 행9:1-18에 있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동일한 변명을 하였습니다(행26:1-23).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교의 전통과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습니다.

또 당당하게 자신의 회심은 주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서요, 이방에 대한 전도 역시 이 계시에 의한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체험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복음을 전할 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이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7-8절).

얼마나 확실한 은혜요 증언입니까? 주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14-16절).

지금 이 간증을 하고 있는 바울은 자신이 도리어 전도의 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들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 순간은 귀중하였고, 선포되는 말씀은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는 눈이 가려지고 듣는 귀가 열리지 않은 무리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15).

 

3. 유대인의 폭동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 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17-23절).

유대인들은 극도로 흥분하고 격정되어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분위기였습니다. 부모 죽인 원수가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요? 만일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유대인들도 자기 동족을 그처럼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다는 구실로 폭력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복음 전하는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유대인들이 분노하였을 때 교법사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5:35-39).

그처럼 유대인들이 박해하고 또 로마 제국이 박해하던 기독교의 진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변화시켰는가 하면, 오늘에는 전 세계 만민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기억할 일은 이 생명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수많은 전도자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복음 전하기 위해 동일한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바울과 같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복음사역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 아멘 -


담대하라

행 23:1-11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교만이 금물이라면 연약한 믿음도 경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바라보고도 믿음이 약한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믿음을 통해 일어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내세우지만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큰일을 하게 됩니다.

 

1. 공회 앞에 선 바울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바울의 간증을 듣고 군중들은 극도로 흥분하였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행22:22-23).

그때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다가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그 앞에 세워 정당한 변론과 절차에 따라 합법적인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여 변론한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노라"(1절).

"양심을 따라" 이 말은 헬라 원어에 "순: 같이, 오이다: 안다"라는 말로 "같이 안다" 즉 도덕률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로는 정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합당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바치는 충성은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올무를 주의해야 합니다.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선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니 제사장 아나니아는 "그 입을 치라"(2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회에서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하는 행위입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절).

이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저주입니다(마23:27).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절). 그들은 대제사장의 지시대로 바울의 입을 치지 못하고 이렇게 나무라기만 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5절). 과연 바울이 대제사장을 알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래있지 않았으므로

2) 아나니아가 중간에 로마로 송환되어 제사장의 직분을 중단한 시기가 있었으므로

3) 안질 때문에 잘 볼 수 없었으므로

4) "그런 말투를 하는 대제사장이 어디 있느냐"는 풍자적인 표현으로

5) 변론에 열중하다 보니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했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던지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주의 사자가 힘을 도왔던 것과 같이 바울에게도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 크신 은혜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까? 십자가 바로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바울의 지혜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

혹자는 "만일 그때 바울이 아닌 그리스도였다면 그런 방법은 쓰지 않았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 전에 죽음을 감수하기 보다는 바울은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은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7-8절).

이 일로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9-10절)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요, 복음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선 무리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는 바울을 두둔했습니다.

 

3. 주님의 음성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절).

과연 소망과 용기가 용솟음치는 말씀입니다. 이제 바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려울 게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받는 자 외에는 알지 못하는 비밀의 은혜입니다.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알프스산을 넘을 때 척후병을 보내 탐지하게 했습니다. 척후병은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 말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실은 '가다가는 큰일 납니다. 못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군 명령을 내려 알프스산을 넘었습니다. 또 한 번은 오만 명의 군대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낡아 금방 내려앉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참모들은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직접 칼을 휘두르며 다리 복판에 서서 지나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죽음을 불사한 그의 용기는 오만 명의 군대를 무사히 건너게 하였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의 수중에는 총칼이 없어도 세계 모든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의 밝은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소천하신 이근복 성도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만 밤낮을 지내야 했던 분이 병석 세례를 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어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과연 복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은혜 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4. 유대인의 음모

"도고 십 척이면 마고 십 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면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있는데 큰 나무는 큰 바람을, 작은 나무는 작은 바람을 맞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겪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을 겁내지 마십시오. 시험당할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미리 예비해 두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12-13절).

한마디로 바울을 죽이기 위해 뭉친 결사대라 하겠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마귀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마귀는 박해라는 무기로는 실패를 거듭했는데 여전히 그 방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약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어떠한 방법으로 시험을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한 믿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작전과 하나님의 작전을 비교해 보면, 마귀는 끝까지 바울을 죽일 계략을 꾸몄으나 하나님은 피할 길은 열어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14-15절).

한 치의 빈틈이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들이 바울을 죽이는 일에 실패하였는데 금식은 언제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근성에는 비길 민족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손길은 더 완벽했습니다. 바울의 생질이 그 계교를 사전에 포착하므로 그 공작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도단성의 엘리사는 빽빽하게 포위한 아람 군대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은 원수보다 뛰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맡겨주신 임무를 다하기 까지는 우리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박해를 당하는 것도 은혜요, 병마와 죽음까지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시므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올린 찬양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9-31).

복된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요, 진정한 자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 아멘 -


이 사람은 염병이라

행24:1-9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 하겠다 하고 동맹한 자들이 공회에 이르기 전에 중도에서 바울을 죽이리라 공모하였는데 바울의 생질로 말미암아 천부장에게 알려지자 천부장은 즉시 백부장 둘을 불러 밤 제3시에(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9시)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여 총독 벨릭스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때 바울의 신변 안전을 위해 동원된 병력이 사백칠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동원했습니까? 이는 천부장이 아니라 바울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천부장이 편지를 써서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보내자,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행 23:34-35) 하였습니다.

 

1. 유대인의 고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도 회개가 없는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그렇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라고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허물에서가 아닌 진리를 위한 고난이라면 부끄러워할 것 없지요. 어떤 경우에는 목사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너무도 무겁고 힘들어서 '나도 평범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천국 가는 길을 택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지요.

변사가 바울을 송사하는 내용입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3절). 그들이 과연 평소에 총독을 그렇게 존경하였는지 궁금합니다.

1)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고대에는 페스트같이 전염병이 발생하면 삽시간에 퍼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전염병이라 하였으니 그 얼마나 악의에 찬 말입니까?

모택동은 "종교는 아편이다"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신앙을 뿌리 뽑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공산주의가 종주국 소련을 비롯하여 동구권이 무너지므로 유물사관의 허구성을 인류 앞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백 번을 양보하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할지라도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이방인의 법정에서 복음의 역사를 전염병 운운한다는 것은 성령을 모독한 중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물론 바울을 접하는 자들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되는 것을 보고 한 말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일말의 양심을 가졌다면 그런 일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귀는 회개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대열에 서지 않고 진리의 증인이 됨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변사의 변론을 보십시오. 그는 에덴에서 유혹하던 뱀의 간사한 혀끝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의 망령된 변론입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4-5절).

2) 나사렛 이단의 괴수

바울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복음 진리를 듣는 귀와 보는 눈과 깨닫는 지각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열두 제자들도 있는데 왜 바울에게 그들이 이단의 괴수라는 용어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이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에 비해 바울의 활동이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인 줄 압니다. 불행한 일은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는 이 영광의 주님을 보는 눈을 밝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한 때는 이 진리를 대적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변화 받은 후에도 죄인 된 근본을 잊지 않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쓴 죄인이라는 용어를 유대인들은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는데 썼고 바울은 자신이 죄인 된 근본을 고백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편은 정죄의 용어요, 한편은 사유의 고백입니다. 과연 이단의 괴수라면 그것은 심판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사유함을 받은 고백이라면 영광에 이를 줄 믿습니다.

3)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6절).

땅 위에 세워진 성전은 하늘나라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두신 곳이므로 성전은 거룩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제사를 받으시고 또 성전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주의 전을 사랑하는 자가 주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경건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기 전에도 제사를 받아 주셨으나, 성전에서 올리는 제사일지라도 범죄하고 회개가 없을 때는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누가 하나님의 전을 심판한다고 하셨습니까? 주님이십니다. 형식은 중요시하면서 주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박대하므로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7-9절).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앞에서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진리에 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비한 마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바울의 변명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용한 변사 더둘로의 아첨하는 말에 비해 바울은 당당한 자세로 사실을 변증합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10절).

과연 어느 쪽이 원고이며 어느 쪽이 피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 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1-13절).

이로 인해 바울을 "염병이라"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백성을 소요케 하는 자라"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이 근거 없는 거짓임이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18:17).

지금까지 바울의 변명은 소요의 건이었으나 이제는 더 중요한 진리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4-15절).

바울과 유대인들의 차이점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믿었으나 바울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언하신 임마누엘의 주님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진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형식에 매여 내용을 배격했으며 그림자에 치우쳐 실체를 저버리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바울의 변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17-18절).

무슨 말씀일까요? 이는 유대인들의 고발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한 일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으므로 바울 역시 율법을 폐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7, 9).

이것이 귀중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근본을 회개하므로 복음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벨릭스의 물욕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큰 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벨릭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물욕으로 그 눈이 어두워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4-26절).

유대인들에게는 바울이 전염병으로 보이고, 벨릭스의 눈에는 뇌물 주는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바울을 통해 영생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희생 없는 제사는 죄악이라"(마하트마 간디) 했는데, 과연 바울은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 영광스러운 대열에서 진리를 위해 거룩한 희생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죽일 죄가 없나이다

행 25:23-27

 

성경 역사와 일반 역사를 살펴보면 동일한 인간의 발자취라 할지라도 거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성경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로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편에서 기록한 것이라면 일반 역사는 인간의 안목으로 인간 편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영광의 부활 사건을 일반 역사로는 다룰 수가 없듯이 전도자를 통한 복음의 발자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반 역사에는 영생의 진리가 있을 수 없으나 성경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정치적 인물들이 바울과 무관했다면 그들 역시 성경에 밝혀질 이유가 없으나 전도자 바울과 관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역사가들 역시 바울을 역사에 남길 인물로 비중을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바울이 당대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권력을 행사하다 사라져간 로마의 역사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은 바울의 발자취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복음은 이렇게 귀중합니다.

 

1.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 벨릭스가 뇌물을 기대하고 풀어주지 않은 일로 바울은 이 년이나 가이사랴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지난주 교회 꽃꽂이를 담당하고 있는 Y집사님이 갑자기 코안에 동맥이 터져서 입원한 일로 우리 성도들이 많이 기도하신 줄 압니다. 몇 년 전에는 남편 M집사님이 성탄을 앞두고 그렇게 되더니 이번에는 부인 집사님이 그렇게 되었으니 부부가 코피 터지기로 의논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로는 그동안 아플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살아야 했던 사람이 이번 일로 잠간이나마 여유를 얻게 된 것 같았습니다. 감사드릴 일이지요.

바울 역시 옥고를 치룬 것은 허송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숨 쉴 겨를도 없이 일차, 이차, 삼차 머나먼 전도 여행을 거쳐 지친 몸 쉴 수가 없었는데, 투옥되어 이제는 기도로 영적인 무장을 갖출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복음의 씨를 뿌린 교회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이 그때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후 총독 벨릭스는 재임 중에 도처에서 소요가 일어났던 일로 유배되었으나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의 노력으로 집행을 면했다고 합니다. 벨릭스의 후임으로는 베스도가 총독이 되었는데 그는 벨릭스보다 선량한 정치가로 고상한 인격과 온순한 성품을 가지고 정의를 실천하며 도적과 암살자들을 진압하였으나 그도 이년 후에 죽었습니다.

 

2. 살기가 동등한 유대인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1-2절).

새로 부임한 총독이 자기의 관할 구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먼저 간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때를 놓칠세라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그동안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던 바울을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세워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년 전에 품었던 음모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리라 결심한 자들이 그때까지 금식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요. 그러나 바울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스도의 말입니다.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도 전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로 제사장들은 파수병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그 후에 스데반과 야고보를 죽이고, 이제는 또 바울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도 악랄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간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을 죽인다고 기독교가 없어질까요? 오히려 그들이 심판을 자초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까지 악해진 이유는 원수 마귀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흉악한 마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를 위해서도 사유의 기도를 올렸으나 마귀는 주님을 죽이고도 본색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과거 왜정시대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가서 투신을 맹세할 때 혁명 선배들은 세 가지 각오를 물었다고 합니다.

1)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2)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3) 추위에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한 마디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각오를 갖지 않고는 혁명전선에 뛰어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3. 가이사에게 항소한 바울

혹자는 "바울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대인들을 걸어 가이사에게 항소하였으니 기독 신자가 같은 신자를 세상 법관 앞에서 소송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또 복음을 박해하는 진리의 원수들이므로 진리를 포기하고 원수 앞에 굴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순교를 찾아 구하여 순교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다. 일부러 고난의 구렁에 자신을 빠트리는 사람은 고난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다"(Camhpell Morgan).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한 이유입니다.

1) 유대인의 음모

국회에서는 끊임없는 흑백 논리로 여·야가 국민을 볼모로 하여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당이나 야당 할 것 없이 세속의 정치를 하는 자들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이상 나라를 위해 건설적인 정책 대결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발전을 위해서 절충점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유대인의 대립은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타협이 용납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민족 신으로 전락시킨 자들입니다.

기독교의 복음과 일반 종교의 차이를 지적한 스탠리 죤스의 말입니다. "종교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이다. 종교는 허다하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뿐이다."

유대인들은 합법을 빙자하여 불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3절).

2) 바울에게 임한 주님의 계시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벨릭스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정죄하지 못하면서도 유대인들로 인해 그를 풀어놓을 수 없었던 것같이 가이사 황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받은 재판 결과가 어떠했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감옥에서 순교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소명 의식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1:13).

바울이 아시아와 마게도냐 고린도에까지는 복음을 전하였으나 국제 수도인 로마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은 지금까지 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도자로서 바울은 마지막 남은 꿈 곧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가이사에게 상소하므로 그 꿈을 이룰 수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에 가서도 바울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런 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는 차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성탄 행사 팜플렛에 담임목사로 인사 말씀을 실었는데 어느 집사님이, "문제는 내가 만들고 책임은 주님에게 돌리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대목에서 "목사님 그 부분이 저의 마음을 찔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저의 약점을 고백한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도 자극을 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는 바울을 그처럼 괴롭히고 또 극형에 처하게 하였으나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희생의 발자취를 무익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생명과 성령의 역사는 불길같이 일어나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진리는 결박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명과 구원"이라는 말씀이 평범하게 들리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무관심 속에 묻혀있는 진리를 능력 있는 복음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 바울에게 역경과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 섭리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박세직 의원이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있었던 간증입니다. 나트랑에서 출장 임무를 마치고 사이공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객기의 결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 마침 육군 항공기 U-6기가 있어서 거기에 동승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비행기로는 사이공까지 세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륙 후 한 시간도 못되어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으로 비상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한 지역으로 생각하고 권총을 뽑아 들고 주변을 살피는데 마침 태극기를 단 국군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조종사가 "비행기 날개에서 기름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대로 비행했다면 30분을 못가서 공중분해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하여 그때서야 "폭풍을 통해서도 살려주신 하나님! 무엇에 쓰시렵니까?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겸비한 마음으로 새롭게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정죄할 수 없는 복음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처럼 미워했다면 이는 바울보다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부터 주님을 미워했습니까? 아기 예수 탄생하실 때 부터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

헤롯은 왕이었으므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지라도 메시아를 대망하던 유대인들이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을 헤롯에게 알려주면서 그리스도를 미워한 이유를 어떻게 보아야 옳을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과 신앙의 전통을 지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진리와 상반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여 할 복음을 그들은 철저하게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뜻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진리는 결코 정죄될 수 없고 또 진리는 결박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의 대열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바울의 복음 증거

행26:1-7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온 바울의 다섯 번째 변명으로 유대 땅에서는 마지막 증언입니다.

1) 안토니아 성으로 오르는 계단에서(행22:1-21)

2) 공회 앞에서(행23:1-6)

3) 벨릭스 앞에서(행24:10-21)

4) 베스도 앞에서(행25:6-12)

26장은 바울이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따라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에게 증언한 복음입니다.

 

1. 율법아래 있었을 때의 생활

베스도가 유대인의 총독으로 부임하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일로 이제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가이사랴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전도자로서는 마지막까지 본분을 다한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1절).

바울에게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시간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이때 바울은 대단히 상기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는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으로 말미암아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게 되리라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북한 선교를 다녀온 분의 이야기입니다.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첫 질문이 "예수님은 언제 오시지요?"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마지막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라면 어떤 기도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사람들 앞에서 찬송 한 번 마음껏 부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도 자유로워 안일과 방심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경성해야 합니다. 충직한 전도자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과거에는 자신을 정죄하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2절).

이는 자신의 결백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다고 말이 아니라 유대교에 충실했던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고백하고 지금 이렇게 변화된 것이 율법이나 선지자의 예언에 어긋남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3-5).

이렇게 바울이 율법에 충성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달라졌다면 이유가 분명히 있어서 이지요.

 

2. 바울이 정죄 받은 이유

"이제도 여기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다"(6-7절).

이것이 모순이라면 큰 모순입니다.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이며, 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언약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신 메시아를 죽이고 또 부활하신 구주를 목도한 병정들에게 돈을 주어 거짓으로 증언하게 만들고 주를 믿고 따르는 자를 박해하니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며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선지 예언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될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도 한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생각하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죽이고, 박해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제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로마 교황과 유대인들이 손을 잡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역시 정치적인 외교 일 뿐 그리스도로 하나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 이 선물은 주권자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3. 바울이 받은 사명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처럼 진리를 대적하던 바울을 택해서 증인을 삼아 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바울같이 철저하게 박해해야 위대한 인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줄로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후일에 그가 남긴 고백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이렇게 알지 못할 때는 과오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진리를 대적하는 죄를 지어야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고의적인 죄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7-18절).

이것이 과연 누구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요 사명입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임무를 누가 박탈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명을 맡겨주신 분이 능력도 입혀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베스도의 비난

바울은 이렇게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의 기회가 돌아오자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발당한 바울이었으나 오히려 바울은 왕과 총독에게도 담대히 전했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3절).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베스도가 외쳤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이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4-27).

여기서 바울과 베스도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재판관과 죄수의 관계가 아닌 진리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요. 어느 쪽이 잘못된 사람일까요?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진리 때문에 미쳤다고 비난받은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보십시오. 바울을 심문하던 총독과 아그립바 왕을 존중하는 사람은 없어도 바울의 이름은 빛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은혜입니까? 우리도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아그립바 왕에게 전한 복음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이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6-27절).

이때 아그립바 왕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선지자들을 시인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부인한다면 그가 유대인으로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저하는 왕을 향해 바울이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하고 답변을 대신하며 동의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여기서 "적은 말로"라는 뜻은 "적은 말", "짧은 시간", "적은 노고"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복음은 복음이요, 진리는 진리이므로 진리는 분량이나 시간을 두고 논할 성격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사실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고난도 영광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받는 고난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불신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데는 은혜의 복음 곧 구원의 복음만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처럼 심문받는 죄수를 담대하게 하였으며, 누가 바울을 그처럼 복되게 하였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어떤 성직자는 이북으로 넘어가서 김일성과 포옹한 것을 그처럼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피는 나를 대속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는 나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각오를 다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이 생명을 제물로 삼아 아낌없이 드리도록 우리 모두 다짐합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도 바울같이,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앞장서는 은혜 힘입기 소원합니다.

- 아멘 -


머나먼 여로

행27:1-44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롬 1:13).

바울이 그처럼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던 것은 로마가 예루살렘과 같이 진리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로마가 국제적인 수도요, 또 복음을 위한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정치적으로는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예로부터 죄는 농촌보다 물질문명이 풍부한 도시에 더 많았습니다. 로마 역시 그러한 면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사치와 향락이 있었고 또 권력 있는 자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은 그러한 공명심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땅끝까지 선포하기 위한 사명감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자유로운 몸이 아닌 가이사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고 또 그의 생애 마지막 노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로마에 간 후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진리는 결박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 사명을 어떻게 완수했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그가 남긴 서신이 성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 로마로 출항하는 바울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 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1절).

바울이 탄 배에는 바울뿐만 아니라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할 다른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한 오늘이라면 비행기로 이스라엘에서 로마까지 두세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또 여행은 목적에 따라 그 길이 유쾌한 여행이 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 행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여행은 사정에 따라 시기를 변경할 수도 있고 방향을 달리할 수도 있으나 인생 행로는 인위적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자유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몸이라면 그 여행은 불안과 고통이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죄수들은 기회만 있으면 탈출할 생각을 하게 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 행로였기에 바울로 말미암아 그 배에 탄 사람들도 유라굴로 태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고 바울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2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4-8).

지금까지의 여행은 소아시아 해변을 끼고 왔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철야 시간에 어느 집사님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집사님은 세상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다 갔으면 좋겠습니까?"

"목사님, 지금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집사님은 오늘부터 곡기를 끊으시고 금식을 하십시오. 다만 며칠까지라고 기한을 정하지 말고 세상 떠날 때까지 잡수시지 않으면 금년 내로 하나님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웃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인생 팔십을 살아도 더 살고 싶어 약방을 찾고 병원을 찾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느 시간 TV를 보았더니 구십다섯 된 할아버지가 “세월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감사 할 것은 인생이 고달파도 천국 본향을 향해 가도록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다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얼마나 오래 살까 하는 근심은 하지 말고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두려워 말라

"여러 날이 결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9-10절) 하였으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일기예보는 과학적으로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럴지라도 과학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 운명은 의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성공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 정확한 것 같아도 영감으로 아는 지식과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누구의 말을 더 믿었는지 보십시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절).

지금 세계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밝고 잘 살아가는 사회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이념 투쟁도, 동맹 관계도 맺어왔고 무기 경쟁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통해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지금 지구는 이상 기온으로 미국 동부는 갑자기 몰아닥친 강추위로 남극보다 더 추운 영하 50도로 떨어져 있는가 하면 남미 아르헨티나, 브라질은 영상 50도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 앞에서도 무기력한 것이 인간입니다.

바울의 말을 믿지 않고 행선하던 배가 갑자기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18-19절).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그들은 살아날 소망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져 없어졌더라"(20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십 세기 유라굴로 재난으로 한치 앞을 의식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바울과 같이 영감으로 받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2-25절).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요 소망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망망대해에서 유라굴로 태풍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바울이 전한 이 소식은 그대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에게도 영감의 말씀은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 되은 것입니다.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라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의 빛으로 암흑의 세대를 밝히는 진리의 등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음식을 먹으라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육 명이더라"(33-37절).

이제 그들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라굴로 태풍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바울을 지킨 백부장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42-44절).

머나먼 여로, 유라굴로 태풍, 죽음의 고비는 일단 넘겼으나 아직은 종착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동승한 죄수들이었습니다. 물론 바울도 죄수의 몸으로 그 배를 탔으나 바울은 일반 죄수들과 다른 것이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매인 바 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죄수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 하므로 배에서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위해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의 법정에 설 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증언했던 것같이 가이사의 법정에서도 복음 전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사명은 귀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하늘에 상이 큰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여로가 험악합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세는 팔십 노구의 몸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광야 사심 년을 걸었습니다.

머나먼 인생 여로, 우리는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어떤 영광 받기를 기뻐하시든지 그 뜻을 이루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행28:1-10

 

해도 달도 별도 볼 수 없었던 유라굴로 태풍속에서 십사 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바울이 도착한 곳은 멜리데 섬(Melita)이었습니다. 지금은 말타(Malta)라고 불리는 이 섬은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같이 로마의 남방에 있는 시실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둘레는 30km, 넓이는 15km²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은 아프리카의 칼타고에서 이민 온 뵈니게인들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곳을 성 바울 부두라 하여 지금도 바울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무는 동안 거기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발길을 옮기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났으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향기 풍기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1. 멜리데 섬에 도착한 일행

지중해 연안에 있는 멜리데 섬은 그 당시 로마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야 할 목적지는 로마인데 예기치 못했던 풍랑으로 멜리데 섬에서 구조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생 여로에도 불시에 몰아닥치는 폭풍이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실패의 고통일 수도 있으나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슬며시 닦으며」라는 글입니다.

상자 속의 은혜

네모난 상자 그것이 내가 사는 공간의 대부분이다. 네모난 방, 네모난 침대, 천정, 문, 달력, 책들…네모 침대를 짊어지고 네모와 대치한 채 살아온 것이 어느새 구 년, 네모난 창을 열고 하늘을 바라본다.

"경추 제5번 골절 전신마비"

의사의 말을 듣기 전에는 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말은 현실이고 석 달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십오 일 만에 퇴원을 했는데 넉 달, 다섯 달이 지나도 죽지를 않았습니다. 의사의 선고대로 죽지를 않으니 내가 죽음을 찾아갈 수밖에... 앞으로 밀려올 고통, 절망, 괴로움 등을 생각할 때 자살만이 최선의 길이요,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식으로 들어간 것이 오 일, 그러나 병든 자식을 옆에 두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어머니의 간곡한 기도에는 자살 길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이 널 살리신 거여 목숨은 네맘대로 하는 게 아녀" 어느 날 동네 선배로부터 선물 받은 성경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주님께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였을 때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에서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후에 미친 듯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결국 나는 여기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변화를 받게 되어 참된 위로와 기쁨을 맛보게 되었는데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하나님은 내 편이시며, 하나님은 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제 육신은 비록 네모난 상자에 갇혀 있으나 영혼은 하늘을 향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한쪽 손을 살려 놓으심은 이 왼손만으로도, 그분은 능히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밤도 별이 보이는 하늘을 향해 조용히 손을 들고 이 연약한 자 사랑하심으로 빛과 진리와 생명,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불행이 행복으로, 어둠이 빛으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앞길이 가로막혀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는 기쁨으로 충만한 하늘나라 영광을 맛보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중에는 어린 딸이 자궁 기형아로 태어나서 이백만 원을 들여야 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하지 않고도 기도로 고침을 받아 정상적인 아이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2. 토인들의 동정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2절).

사람에게는 기본 양심이 있으므로 불우한 사람을 대할 때는 동정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쟁상대가 될 때는 달라집니다. 백인들이 친절한 것 같으나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자유를 지켜준 혈맹 우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농산물을 수입해야 한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리적인 방법이 국제 사회에 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북한같이 국제 사회에 담을 쌓고 살아야 옳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피와 땀과 눈물로 산업기술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살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요행수나 옅은 동정으로 살겠다는 심약한 굴레는 던져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멜리데 섬에 사는 원주민들도 조난 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우리도 내 주변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독사에게 물린 손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3-4절).

원주민들은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렇게 말한 줄 압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5절).

그것을 본 원주민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6절).

바울이 뱀에게 물렸을 때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 하더니 이제는 신으로 높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죄인이라 할 때 낙심하지 않았고, 또 신이라 하여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위치를 이탈하지 아니하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바울을 이렇게 지켜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뱀에게 물려 죽었다면 원주민들의 말대로 그는 사람을 살인한 자로 바다에서는 살았으나 뱀에게 물려 죽었다는 말이 사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톤은 "사명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과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사의 독에서 뿐만 아니라 유라굴로 태풍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든지 그 뜻을 준행하고 의의 면류관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병든 사람들을 고친 역사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7-9절).

기억할 것은 바울을 통해 병든 자를 고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하지만 바울에 대한 그들의 인식 변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그들에게 신적인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증언할 때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은혜를 받기 힘들지요. 유대인들의 교만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성도 중에는 "목사님은 단 위에서 설교하실 때와 밑에서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달라 보입니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지 않으면 무익한 죄인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들어 쓰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줄 믿습니다.

 

5. 원주민들이 베푼 호의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10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스라엘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까? 오히려 학대하고 멸시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 내린 열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날 때는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선해서가 아니라 재앙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모두 죽을 줄 알았습니다.

원주민들이 자기들의 쓸 것을 쓰지 않고 이들에게 후한 대접을 했을 뿐 아니라 떠날 때도 많은 것을 주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성도에게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목사님 우리 당대에 교회를 또 세울 기회가 오겠습니까? 이번에 작정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직 생활이 여의치 않아 전세집에 살면서 이자를 물어야 하는 빚이 있지만 금년 내에 하나님께 천만 원을 헌금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마음이 뜨거워지는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더 큰 영광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헌신의 제물로서 바울같이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는 성도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마지막 행적

행 28:11-23

 

우리는 오늘로 신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약은 밧모섬에 유배 갔던 사도 요한의 계시로 끝이 났으나 복음의 사역은 사도행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하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출발 되었으나 사도행전 28장에 와서는 뚜렷한 결론도 없이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모든 사도들의 행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설에 의하면 안드레는 흑해 연안에 있는 스구디아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스페인, 바돌로매는 이에라 포리스, 도마는 인도, 마태는 에디오피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 복음 사역은 어떤 한 특정한 인물이나 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리스에서 주의 사역을 하고 온 김미영 선교사를 통해 그리스 성지순례 안내 책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칼라 사진으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수감되었던 감옥과 루디아 기념교회를 비롯하여 고린도 교회와 아덴에서 헬라 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아레오바고를 비롯하여 마지막 로마를 향할 때 잠깐 머물렀던 멜리데 섬에도 기념 교회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복음 사역의 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 성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대를 달리하여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태어난 것뿐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복음으로 주님의 자녀요 사명을 받은 일꾼임을 알았다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로마에 도착한 바울

멜리데에서 겨울을 지낸 바울과 그의 일행은 다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시실리를 지나 레기온, 보디올, 압비오, 삼관 등을 경유하여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11-15절). 혹자는,

"바울이 멜리데에서 머물렀던 석 달 동안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의 휴양은 여전히 쇠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행28:20)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곳곳에는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는 바울이 차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1)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음이요

2)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겪는 고통 중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Geoge Mevedith) 하였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경제 불황을 겪던 어려운 시기에 장애의 몸으로 삼십이 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삼대에 걸쳐(1933-1945) 재임하였던 루즈벨트가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로 가서 사냥을 즐기고 돌아올 때 그 앞에는 카펫이 깔리고 팡파레가 울려퍼지며 환영 인파가 물결쳤는데 일생을 아프리카 풍토병과 싸우며 아내마저 잃고 돌아오는 한 선교사에게는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너무도 실망하여 "하나님 나는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하였더니 "너는 아직 본향에 이르지 않았느니라"는 영감으로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전도자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까? 바울 역시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이나 황제같이 그를 위해 울려 퍼지는 팡파레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쇠사슬에 매인 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28:15).

이것은 받은 자밖에는 알지 못하는 비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에게도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여기서 먼저 바울이 로마에 가서 일 차 석방되어 서반아까지 복음 전할 기회를 얻었다는 일부 학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바울이 석방될 것을 확신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2:24).

2) 로마의 관리들이 바울에게 관대하게 한 사실을 미루어 그가 석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내려오는 전통을 보아서 알 수 있다.

⑴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A.D. 96) : 바울이 온 세상의 의를 전하고 서쪽 첨단까지 방문했다.

⑵ 무라토리안(Muratorian)(A.D. 170-200) : 바울이 서반아까지 여행했던 사실이 마치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던 것처럼 진술하고 있다.

⑶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도 바울이 석방된 후 복음 사역을 계속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전통이나 어떤 학설을 성경보다 앞세울 수는 없으나 이와 반대되는 전통이 없다는 것도 유의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 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행28:17-19).

그러고 보면 바울은 자기 백성을 송사할 의도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죄할 마음도 없었는데 유대인들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받은 고난의 결과가 진리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속의 제물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맡은 사명과 주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 까지는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일이 불가피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변명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주의 복음이 진리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의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하였습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 울프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는 절대로 풀길이 없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두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바울에게 하였다면 바울은 이렇게 불확실한 답변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 너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은 몸이기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며 이 진리 증언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복음을 듣고도 못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은 한마디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여기에 속한 숫자가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을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도 멸망 받을 사람일까요? 그것이 결정된 사항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는 이유는 선택의 자유가 본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소련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원자로 사고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가 발생하면 누구에게 책임을 묻게 됩니까? 기계에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격이 아니며, 문제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든 일에 책임을 의식해야 할 뿐 아니라 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을 망각하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는 핑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7-8)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10:6).

그러므로 우리는 경성해야 합니다.

 

4. 계속해서 전한 복음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이로서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이 났습니다. 로마의 차디찬 옥중에서 최후까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딤후4:11).

분명한 것은 그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는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입니다(딤후4:7).

이 얼마나 값진 생애요 보배로운 죽음입니까? 진리 위해 바쳐진 한 사람의 희생이 기독교 의 역사를 빛나게 하고 있다면 우리들도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을 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만 위해서 온전한 제물로 드려지는 은혜를 힘입기 기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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