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설교(본문설교)

제3권

주님만 주님만 2022. 3. 16. 10:44

두 가지 악

렘2:13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백성들의 두 가지 악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죄

2)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물과 관련된 말씀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2:10-14).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책망했습니다.

 

1. 생수의 근원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흔히들 도덕적인 잣대로 자신을 보고 자신이 의로운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를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는 자들을 보십시오.

1)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프랑스는 97%가 가톨릭 신자인데 60%가 평생에 세 번만 성당을 찾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기념 성전들을 비롯하여 로마에 있는 성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대를 옮긴 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으나 지금은 그렇지를 못하고, 한 때는 구라파에서 세계적 발판을 내린 교회가 지금은 세속화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듯이 진실한 회개 없는 중생의 역사는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 없다면 참 신앙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라도 발은 또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불신앙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이는 신앙생활 잘하던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죄의 욕심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가 아니게 실수를 하여 후회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속에 있는 죄의 욕심입니다. 죄의 욕심은 다스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2. 터진 웅덩이

물이 귀한 이스라엘은 갈릴리 호수의 물을 수도관을 묻어 지금은 황막한 광야를 농장으로 개발하여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요르단과 이집트, 시리아 같은 나라와는 큰 대조가 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달려있으므로 사람이 복을 받으면 자연도 아름다워지고 사람이 저주를 받으면 자연도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터진 웅덩이가 무엇일까요? 성지에 가보면 여기 저기 인류의 문명을 꽃피웠던 유적지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모두가 황폐된 유적지입니다. 당시에는 가장 화려하고 완전한 웅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터진 웅덩이입니다. 이집트에서는 황금으로 미이라가 있는데 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물적인 가치보다 뛰어난 것이 정신적인 가치요 영적인 가치입니다.

지하자원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100% 산악지대로서 그 중의 20%만 경작이 가능한 스위스는 GNP가 세계 일위입니다. 스위스에는 물건을 살 때 흥정하여 거래하는 일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나라의 상품을 사기 위해 고객들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기한 것은 각 나라에서 부정으로 축재한 돈이 스위스 은행으로 모이는데 거기는 이자를 받기보다 신탁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데도 맡긴다고 합니다.

우리는 터진 웅덩이에 물을 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곳에 해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우리 모두 보물을 하늘에 쌓아 영원한 믿음의 부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동역자

행18:1-11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것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사람은 동지가 필요하고, 사업가도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교사역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1. 바울의 동역자

바울은 삼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가 명을 내려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떠나게 한 일로 고린도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그들은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더 큰 은혜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유대교에서 개종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같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숫자는 1%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인해 복음은 위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은 땅에 심겨진 한 알의 밀 같이 복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

유대인으로서 개종한 봄브랜드 목사는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십이 년 형을 받고, 옥중에서 또 복음을 전하다가 팔년 만에 석방이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나는 이제 목장을 잃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도 귀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과거부터 바울과 어떤 친분이 있었거나 또 바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지금 고린도에는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닌 바울의 기념교회가 있는데 거기는 제일대 교역자가 바울이고 이대가 아굴라, 삼대 교역자는 실라로 되어 있습니다.

 

2. 본업과 부업

오늘날 성도들이 주업과 부업이 무엇인지 분간은 하면서도 실질적인 생활에서는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물론 부업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디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항상 우선으로 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영생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6-2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2) 하나님이 주관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된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사람이 바꿀 수 없듯이 인간의 생사화복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부업을 함께 하면서 이익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주업에 더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3. 충성된 동역자

가장 이상적인 친구의 모델을 말한다면 다윗과 요나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또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면 모세와 여호수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일을 금식하고 기도할 때에 얼마 떨어진 곳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요. 사십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갈렙과 함께 믿음으로 보고를 한 사람이요, 또 모세가 회막을 떠나 진으로 돌아올 때에도 회막을 지킨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그런데 충성된 믿음으로는 아굴라 부부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동역자로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을 섬기는 믿음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 된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4. 하늘나라 영광을 함께 받을 동역자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론과 미리암이 있었는가 하면 고라의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2).

“엘리압의 아들은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에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민26:9-10).

이는 모세의 지도력이 부족해서나 은혜가 떨어져서 반역한 것이 아니라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교만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이것이 마귀의 교만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거짓말로 인간을 타락시킨 영물입니다.

충성된 동역자! 과연 그들은 하늘나라의 영광에 함께 이를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충성된 대열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 영원한 영광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18:16-26

 

저의 어머니가 장손의 상견례를 하는 날 부르지 않았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이든지 의논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붙들고 의논할 수는 없지요. 국가에서 중요한 정책을 세울 때는 발표하기 전에 기밀을 지켜 연구하고 검토하고 또 수정해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4, 17).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사전에 동선을 알리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누구에게 먼저 알린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의미로서 사전에 아브라함에게 통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

 

1. 계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진리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있다는 것 자체도 숨겨야 한다.” 정보요원의 수칙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따라 선포된 복음은 공개된 것이지만 또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공개된 비밀이요,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찾아서 헤롯에게 알려 주면서도 그들은 가서 경배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4-6).

중요한 것은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과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비쳐주었던 별의 계시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2.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숨기시는 하나님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7-18).

그러므로 멸망 받는 자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그날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3. 주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에게 보이십니다.

세상에는 눈을 뜨고도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보았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시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해 주시는지 보십시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비밀을 다윗에게 알려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왕자 요나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에게 비밀이 없었습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14:22-23).

 

4. 비밀을 알게 하시는 목적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어느 때든지 그 시대에 감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동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달리 받은 은혜가 있습니까? 사명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8-11).

 

5. 아브라함의 기도

세상에는 예고 없이 닥치는 재앙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는데, 그 이유는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중보의 기도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릴 심판의 손길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악인이라도 그 악에서 돌이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18:23-24) 여기서 시작한 기도는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아브라함의 간구는 여기서 끝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의인 열 명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롯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베드로의 고백

마16:13-19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 산 아래 있어 요단강의 근원지로서 물이 좋아 이천 년 전에는 번영된 곳이었으나 지진에 의해 모두가 무너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귀신을 축출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주님을 특별한 분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진리의 지식이 없어 주님을 바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례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3-14).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모두가 주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옳게 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으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에게 그 질문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여기서 우리가 먼저 제자들에 대해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1)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선택받은 자들이 복 받은 자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2) 각가지 은사를 받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7-13).

이런 일로 제자들이 크게 놀라 흥분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10:17-20).

 

1. 베드로의 고백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성격대로 먼저 고백했습니다. 복된 일이라면 뒤지는 것을 겸손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을 줄 압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고백이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베드로가 받은 복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1) 반석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요동치 않는 기초를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2)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의 기초는 반석이므로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내려도 요동하지 않는 것같이 교회는 모진 박해와 시련을 당했으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나라가 망하고 개인이 망하여 없어져도 교회는 더 왕성해 가는 것입니다.

3) 천국 열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복이 얼마나 귀중한 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회 잃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천국 문이 열려지지 않는데, 베드로에게는 ‘천국문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열쇠를 이용하면 땅에서도 하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7-18).

이 열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서서 올리는 기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4)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이 땅에 사는 인생을 다 잡아 삼켜도 만족을 모르는 것이 음부입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30:15-16).

어떤 자는 “이제 지옥은 만원이라 들어갈 곳이 없으니 지옥 갈 걱정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과연 홍포 입은 부자처럼 그런 자들이 음부에 들어가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음부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권세를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복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우리 모두 영원한 승리자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십자가의 길

마16:21-28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1-22).

 

1. 베드로의 항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서 광채 띤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여기가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주고받은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는 베드로는 항변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본향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2. 주님의 엄한 책망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고 반석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무서운 책망을 하신 것은 그것이 사탄의 소리로서 십자가를 등지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너무나 어려웠기에 예수님에게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12:27).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이렇게 고통의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셨으며 유다는 주님을 관헌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어거스틴 그리스도 대속의 진리를 불신하는 인간은 어떤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은 동일한 하나님의 일이지만 유다가 관원들에게 넘긴 일은 마귀의 도구로 쓰여 졌기 때문입니다.

2) 피 흘림이 없이는 대속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우리는 순간이라도 이러한 마귀의 도구로 전락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3.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모세와 바로의 영광을 비교해 보십시오. 바로의 영광은 피라밋 속에서 썩어진 영광이지만 모세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영광입니다. 우매한 자의 고난에는 보응이 따르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4.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 율 일위입니다. 죽음은 불가항력이라 할지라도 의미 없는 죽음은 영원한 불행입니다. 또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빨리 가려고 지름길을 찾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가게 되는데...

저는 어제 제가 결혼 주례를 한 A집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부인 K집사는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결혼을 했는데 이제 혼자가 되었습니다.” 하는데 저는 “사람이 사는 것이 다 그렇단다. 네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착한 아들을 어떻게 선물로 얻었겠느냐” 하고 착한 아들 얻은 것으로 위로를 받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1-13).

 

5. 십자가의 길은 영생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의 학살 기념관에는 들어가는 입구 나무마다 팻말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자기들을 살려준 은인들을 의로운 분들이라 하여 그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때의 참상을 스크린과 사진에 담아 놓았는데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거기 있는 대리석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참상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또 다른 추방을 초래할 것이며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치욕을 보상받는 길이다.”

역사의 유례없는 큰 비극이 오늘 유대인들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조상들의 희생이 그들을 대속하지도, 구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토록 우리의 목자 됨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뜻

살전5:14-22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아랍인들의 생활신조를 보면 머리글자를 따서 I.B.M이라고 하는데,

I는 인샬랴: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합니다. 잘사는 것도 신의 뜻이요 못사는 것도 신의 뜻이며 전쟁도 평화도, 일거수일투족, 또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도 다 신의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신을 말하는 것이며 과연 그 신의 뜻을 깨닫는 지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그 뜻을 깨닫지 못하면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이 심판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B는 브룩클라: 오늘 못하면 내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법칙을 따르면 근면한 사람은 양식이 풍족하여도 게으르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충실하지 않으면 내가 기대하는 내일이 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C는 말뤼쉬: 될 대로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무책임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책임도 인간에게 물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살전5:14).

개역성경에서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 하였습니다. 구제는 게으른 자에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국가도 대책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10-12).

바울이 그처럼 자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을 받은 교회이지만 그중에는 규모 없이 생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2. 마음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5:14).

어린아이들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듯이 심약한 자들도 용기를 살려 주고, 힘이 없는 자들은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힘이 없는 자의 곁에 계시는 주님께서는 병들고 약해서 떨어진 한 마리 양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항상 선을 따르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우리가 만일 악으로 악을 갚으면 어떻게 될까요?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그러므로 ‘항상 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선’의 개념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는 그 기준이 인간의 기준이 아닌 진리의 기준 곧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진 구제는 세상에서 칭찬받는 일일지라도 하늘의 보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7-18).

무슨 말씀일까요? 이것이 사람이 말하는 선의 개념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의 개념의 차이입니다. 이 사람은 눈에 들어나는 선, 곧 예수님의 행위를 두고 말한 것이나 주님께서는 선의 근본 곧 하나님의 진리를 두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4. 항상 기뻐하라.

이 기쁨 역시 세상의 기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전2:1-2).

이런것은 세상이 말하는 기쁨, 육신적인 희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무엇일까요? 구원의 기쁨, 영생의 참 만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끝이 있던가요. 그러므로 거기는 참 만족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다윗이 아내가 없어서 우리야의 아내와 범죄한 것이 아니며,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이 예쁘지 않아서 이방 여인을 그렇게 많이 두었던 것이 아니었을 텐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말년에 젊고 아리따운 처년 아비삭을 들여보내 주었어도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다”(왕상1:4) 하였고,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26회 또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는 등 다른 용어를 쓴 것이 19회나 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바울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영적인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매 맞고 들어간 빌립보 감옥에서도 여전히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기쁨과 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5. 쉬지 말고 기도하라.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

솔로몬은 기도한 후 꿈을 통해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가 생명의 호흡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기도는 만능 키(Master Key)와 같아서 기도하는 믿음은 불가능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아 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11:21-26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동안에 누구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면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이라 하였는데 실제로는 거의 4km가까운 거리입니다. 그 곳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자주 들리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자기 가정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또 향유를 주님께 부었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주님께서 갈릴리 지역 요단강으로 갔을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급히 사람을 주님께 보낼 때 무엇이라 했는지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3).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요소가 사랑입니다.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죽을병과 죽지 않을 병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11:4).

나사로의 생명이 너무도 위급한 상태에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냈는데 주님께서는 그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죽을병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생명보험에 들었으니 걱정이 없다”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의 어떤 보험도 죽을 목숨을 죽지 않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 교통사고로 한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있습니다. 보험에 들지 않아서 그런 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생명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지, 근심을 끼치는 사람인지 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삶의 의미도, 어떤 가치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멸망 받을 자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그처럼 존귀하게 된 것은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음이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2. 갈릴리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주님

그렇게 위급한 나사로의 소식을 접하고도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주님이 그곳에서 더 다급한 사정으로 머물러서야 했다고 생각 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살고 죽는 문제는 주님께 있다는 것이요 또 제자들의 믿음과 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요11:15,42).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6-8).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9-11).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오늘의 시간으로는 오후 여섯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일하실 때가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요11:11-12).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씀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1:14-15).

‘너희로 믿게’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주님께서 늦게 도착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베다니까지는 오 백리 정도 거리입니다. 오늘같이 교통이 편리하다면 문제될 일이 없으나 주님께서 베다니에 오시는 데는 또 이틀이 걸렸습니다. 우리 격언에 “사후 청심환” “사후 약 방문”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마르다의 믿음으로는 그의 오라버니가 마지막 때에 다시 살아나게 될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간구입니다.

 

3.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이 믿음이 잘못이라고 마르다를 나무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 하면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마지막 날 부활 때가 아니라 지금 살아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5-27).

마르다는 이 말을 하고도 여전히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당장 살아나리라 하는 말씀으로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과연 나사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부활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활의 진리

계20:10-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기독교 진리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영광의 부활, 성령의 강림, 그리스도 재림을 불신한다면 이는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부활에 대해서는 교회 안과 밖에서 논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부활을 믿는 바라새파가 있었는가 하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에 관한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2-20).

세상에는 자연의 진리와 구원의 진리가 있습니다.

자연의 진리는 창조의 질서 곧 피조물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이 법을 역행하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이 있는 피조물은 대기권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또 모든 어족은 물이 있어야 살고, 짐승은 뭍에서 살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의 법 아래에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진리가 필요한데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중생의 진리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3-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다시 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진리는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지도자요 산헤드린 회원으로서 크게 존경을 받는 니고데모도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3:9)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성의 한계입니다. 기독교는 중생의 종교 곧 계시의 종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듭나지 못하면 사대 교회와 같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오순절 이 후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모두가 은혜를 받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후 성령의 불씨가 로마에도 들어갔는데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2. 부활의 진리입니다.

여기는 두 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5-29).

중생하지 못한 자가 이 믿음을 사수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스데반은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에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세상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도니라”(딤후4:6-8).

최후의 심판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계20:10-14).

그날이 오래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도둑같이 오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한 사람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곧 할례당

빌3:1-6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으로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진리를 변질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양의 생명을 노략하는 이리들이기에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본문에서 바울이 ‘곧 할례당’이라고 한 것은 할례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정통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1. 삼가야 할 자들

1) 개들을 삼가라.

개를 개라고 하는 것은 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개로 칭하는 것은 욕이 됩니다. 바울은 짐승을 삼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자들을 삼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개들은 수치를 모르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또 그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5-18).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

이는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개들은 도덕적인 면에서 삼가야 할 자들이라면 행악자들은 육신의 소욕에 치우쳐 마귀에게 종살이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고난을 받았습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4:14-15).

어느 여성도의 간증입니다. 결혼 전에는 교회를 잘 다녔지만 모두가 반대하는 불신결혼을 하므로 자기도 교회를 등지게 되었는데 남자는 무위도식하며 낭비벽까지 심해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추운 겨울 밤 어린 애기와 함께 경춘선 철로를 베개하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때는 기차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병들어 공릉동에 있는 원자력 병원에 입원하였고 장암으로 판명되어 머리가 다 빠지게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길 때는 주변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고 몸은 쇠약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브란스 병원에서 육 개월간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더해만 갔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도 살기 어렵다는 판정이 나서 일본에 가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퇴원을 했는데 그 때 이웃에 살고 있는 K집사님이 그 사정을 알고 전도해서 우리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자기 몸에서 비닐 같은 껍질이 열두 겹 정도 벗겨져 그것을 보자기에 싸고, 또 어금니가 빠져 그것과 함께 저에게 건너 준 꿈이었습니다. 감사한 일은 그 후 마음에 기쁨과 소망이 넘치고 새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난 후 다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들이 놀란 사실은 모든 증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3) 손할례당을 삼가라.

손 할례당은 카타토멘 곧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2. 곧 할례파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자랑할 게 많으나 신앙이 깊어지면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는 전하고도 버림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일까요?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복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령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바울은 육체를 따라서도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8-9).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것이 참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요 정통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은혜

롬7:15-25

 

창세기 일 장과 이장에 나오는 창조의 용어는 ‘바라’(창1:1, 시51:10), ‘아다’(창1:16,25,26) ‘야찰’(창2:7,9), ‘바다’(창2:22)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고, 그 외의 세 가지 창조는 바라에 의한 발전과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올린 회개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바라)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인간은 근본이 죄인이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듯 새로 만들어 달라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20).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두가 무익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1. 거듭난 새사람

세상에는 특수임무를 맡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하천풍언은 걸인을 위해 복음 사역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십억의 빚을 지고 자살하려 하다가 은혜를 받고 물질의 복을 받아 노숙인과 선교사역을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인 된 근본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이 말씀은 깊이 통회하고 낮아진 자에게 더 큰 은혜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향유를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씻은데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귀중한 것은 일곱 귀신이 들려서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1-2).

 

2.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은혜를 귀한 줄 모르고 무의미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이라는 이 하루를 더 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을 결코 낭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건강의 복이 아무리 귀할지라도 생의 의미를 모르면 건강의 가치고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과 가을은 따뜻하고 여름과 겨울은 덮고 추운 계절입니다. 그런데 여름과 겨울의 덮고 추운 계절을 감사하지 못하면 향기 풍기는 따뜻한 봄과 오곡백과 무르익은 가을이 와도 감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노르웨이 속담)

또 열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나이는 피부의 주름을 만들지만, 삶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영혼의 주름을 만든다”(사무엘 울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노인이라도 청년처럼 보이지만, 열정이 상실된 사람은 청년이라도 노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같이 열정의 온도는 삶의 온도를 나타냅니다.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리라! 마르고 썩어 숨막혀 죽기보다는 차라리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완전히 불타 없어지리라! 활기 없이 영원불멸한 행성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원자 하나하나까지 장엄하게 빛나며 타오르는 멋진 별똥별이 되리라!”(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

열정적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는 많은 희생과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는 단어 Passion은 ‘아픔’이라는 의미의 Passio가 그 어원입니다. 이는 미래의 꿈을 위해 눈앞에 있는 달콤함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영광에 이르는 아픔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enthusiasm입니다. 그것은 헬라어 entheos. 즉 “하나님 안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변함없는 열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깊은 우물이 빗물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일정하고 지속적으로 솟아오르게 하는 샘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열정은 살아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3. 열매가 풍성해야 합니다.

농부가 땀 흘리는 이유는 가을에 수확을 기대하기 때문이요, 사업하는 사람이 투자하는 것은 더 큰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1-2).

또 들포도가 아닌 우량종을 내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1-2).

성경에는 농사에 대한 비유가 있는가 하면 달란트와 므나 비유도 있습니다. 모두가 주인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같이 은혜를 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풍성한 열매 맺어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5

 

완전과 온전은 같은 의미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 흠이 없이 완벽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죄와 상관없는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러나 우리가 사유의 은혜를 입으면 의의 반열에 서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정죄하던 무리들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5)는 주님의 말씀에 자기들이 지은 죄가 빛 앞에서 들어 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사실 모세의 율법대로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

이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에서 살려내신 은혜입니다. 이제는 그 여자에게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1. 빛 앞에서의 완전

병든 나사로의 소식을 접하고 주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자 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7-10).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빛은 진리의 빛 곧 영혼을 비추는 진리와 생명 곧 조물주의 빛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1서1:5).

빛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빛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주님의 마지막 성만찬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마26:21-25).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나 속은 짐승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마귀의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므로 후에 뉘우침은 있었으나 회개는 없었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0-12).

 

2. 진리의 말씀으로 완전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3-10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성경이 담고 있는 영적인 보배는 달리 설명을 요하지 않을 줄 압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으나 진리가 우리를 완전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믿음 안에서 완전

연세 높은 분들 중에는 “목사님, 제가 이렇게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릅니다.” 걱정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믿음과 지식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1-2).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지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혈통으로 연결된 것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중생의 은혜로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어 완전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4. 은혜 가운데서 완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한순간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1-4).

나를 지키시는 손길이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는 원수가 밤낮으로 우리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밤에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121:5-6),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4-5).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이 우리 모두의 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 같은 신이 누구니이까

출15:11

 

홍해의 이적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뒤따르던 애굽의 바로의 군대가 물에 매장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같은 신이 어디에 있나이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이 노래는 성도들이 부르는 구원의 노래로서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15:2-3).

 

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 곧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성도가 성결을 잃어버리면 세속에 물들어 영력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으로 죄를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에 따른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0-11).

 

2.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은 영광중에 계시고 세세에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지 않아야 하고, 또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의 불길을 당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아들? 복음이 없는 나라들? 열악한 도심? 외곽의 신도시? 내면의 불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노래하고 싶은 열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노래하시오.

환자들로 인해 아픔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섬기시오. 잃은 영혼에 부담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가르치십시오. 젊었을 때 나는 설교에 소명을 느꼈으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읽었는지 확신이 없어 존경하는 목사님께 조언을 청했습니다. 꼭 해야 하지 않는 한 설교하지 말게.”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에 답을 찾았습니다. 나는 꼭 해야 한다. 설교하지 않으면 이 불이 나를 삼키고 말테니까’ 당신을 삼키는 불은 무엇입니까?” (맥스 루게이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3.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요, 입술의 열매입니다. 천국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천국의 찬양을 보십시오.

1) 보좌 앞에 있는 네 생물들의 찬양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4:8).

2)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0-11).

3) 왕 같은 제사장들의 찬양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5:9-10).

4)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5) 구원받은 족속들의 찬양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9-10).

6) 천사와 장로들의 합창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계7:11-12).

어떤 곡조로 이러한 찬양이 불려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천국의 오디오, 비디오를 함께 접할 수 있었는데 멀지 않아 우리에게도 그날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군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라면 지옥은 불못에서 비명소리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세세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세 가지 눈

출16:1-9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시력을 잃으면 밝은 천지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지식의 눈도 밝아야 하고 더욱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1. 육신의 눈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볼 수 있습니다. 대기권을 벗어나서 지구를 보면 그토록 아름답게 비춰지는데 그것은 우주 공간에 천제중에 지금까지는 지구같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은 천체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라는 KBS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안방에서 여러 나라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장면만 화면에 담았기에 그럴 수 있겠지만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저는 족장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이 발전한 오늘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족장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도 이삭과 같이 시력을 잃었을 텐데 백내장 수술을 하고나니 지금은 얼마나 잘 보이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밝은 눈으로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지식의 눈

옛날에는 책을 보고도 읽지 못하는 눈을 까막눈이라 했습니다. 문맹이지요. 지식의 눈이 없으면 우리가 어두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나 인디안들 중에는 아직도 원시적인 삶을 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는 지식의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의 눈이 그렇게 뛰어나도 지식의 눈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식의 눈은 천길 바다에 있는 보물을 찾아낼 수 있고 땅 속 깊은 곳, 또 우주 공간에 있는 것도 찾아내고 개발합니다. 옛날에는 체력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지금은 지식으로 체력을 다스리는 것은 용장이 지장을 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화민족으로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지식에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영의 눈

지식의 눈이 문화세계의 창문이라면 영의 눈은 진리 세계 곧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창문이 됩니다.

도단 성 게하시가 영의 눈이 없었으므로 아람 군대가 포위하여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공포에 떨었으나 엘리사의 기도로 영의 눈이 밝아져 천군천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왔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과 열정탐군의 보고가 달랐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광야 사십 년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거역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영의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이러한 행위는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있을까요?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16:4-5).

기억하십시오. 찬양과 감사는 많을수록 복이 되지만 불평과 원망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조심하십시오.

“기도를 보면 은혜로 하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과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실 때 감사와 찬양은 필연적입니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보냄을 받았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시고 감동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보여주시며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특권과 놀라운 부분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감사가 있고 찬양과 송축과 예배가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중에는 일방적인 요구와 불만에 지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자신의 행복입니까? 찬양과 감사가 없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기도일까요? 성령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항상 감사와 찬양이 넘칠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이스라엘 역사가 일반 역사와 다른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반 역사는 어둠의 역사이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영의 눈을 가진 선지자들이 계시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역사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고 거역하면 죽는다고 하였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열국의 몽둥이로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렘25:15-26).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은 죽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을 미련하게 보는 이유는 본능으로만 알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영의 눈을 못가지면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빈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신 것같이 오늘 우리도 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기적의 양식

출16:12-20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한 사십 년 동안 만나로 살아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오늘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1. 하늘에서 내린 만나

만나는 땅에서 나온 자연식품이 아닙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땅에서 나온 양식으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메추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메추라기가 아프리카 내륙지방에서 계절풍에 의해 날아와서 이스라엘 진지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만나와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민11:18-20).

심지어 모세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반문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11:21-22).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를 알지 못했던 빌립과 안드레와 같이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계산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11:23).

여호와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민11:31).

그때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이 땅에 떨어졌는지 보십시오.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하룻길 되는 지면에 1m 이상의 메추라기가 쌓였다면 어디서 그 많은 메추라기가 날아왔을까요?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날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메추라기를 거두어들였는지 보십시오.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민11:32).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한 호멜이 약 이백이십리터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메추라기를 모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여호와의 진노

느헤미야가 성벽을 완성하고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을 때 에스라가 백성 앞에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 총독이 그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 날은 가진 자 못 가진 자가 다 함께 나누는 기쁨의 날입니다. 이 기쁨은 은혜의 기쁨이요, 구원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도 감사를 모르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한 말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11:11-14).

그런데 이렇게 탐욕을 부리고 원망하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11:33-34).

 

3. 만나 생활

만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만나를 썩게 하는 것은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썩게 해서는 안 됩니다.

1) 만나는 그날에 먹으라 하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만나가 썩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위해 거두어들인 것은 썩지 않았고 또 만나단지 안에 있는 것도 썩지 않았습니다.

2)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남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5, 출16:18).

우리는 헛된 욕심으로 죄를 지을 것이 아니라 지족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복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아 멘

 

모세의 기도 팔

출17:8-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나 광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전쟁을 위해 훈련받은 군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레셋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우회하게 하신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13:17).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여호수아를 명하여 아말렉과 맞서 싸우게 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였습니다.

 

1. 르비딤과 므리바

르비딤은 ‘원기 회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에는 와디 페이렌이란 지명으로 불리며 화려한 종려나무 숲을 이루고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과 다투었으므로 그곳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는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광야였으므로 모세를 향해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17:4-7).

그때 반석에서 터진 물은 적은 양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물이었습니다.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시78:20).

 

2.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아말렉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았다면, 대대로 여호와의 원수가 되는 우를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신25:17-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애굽의 산파는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를 살려서 복을 받았고, 기생 라합은 두 정탐꾼을 숨겨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어떤 일이 마귀가 기뻐하는 일인지 분별하여 복 받을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3. 여호수아의 순종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17:9).

여호수아는 모세의 충복입니다. 이때도 내가 무엇으로, 또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핑계하지 않고 복종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임무를 부여하시든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음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대책 없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눅22:35).

이유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는 모두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4. 모세의 기도 팔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또 이겨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골리앗을 꺼꾸러뜨린 다윗의 믿음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팔은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팔이 내려오지 않아야 합니다.

 

5. 기도 팔을 부축한 아론과 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세 번이나 깨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는데도 기도하지 못했던 이유를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0-42).

원수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할 때까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했던 아론과 훌같이 기도의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의 줄을 놓아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승리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8:5-7

 

본문 말씀은 성도들이 개업예배를 드릴때에 많이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에서 다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유대민족의 역사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이것이 유대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41:14).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을 물이 넉넉한 갈대아 우르에서 물 없는 가나안 땅으로 옮겼고, 또 모세를 통해 물이 흔한 애굽 땅에서 물이 없는 곳, 불같은 시련의 광야를 통과하게 하였습니다.

 

2. 복음의 역사

그리스도 복음 사역은 겨자씨와 같이 지극히 작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를 보십시오.

1) 나사렛 출신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나다나엘도 빌립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하였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7:52).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요6:41-42).

2)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므로 그처럼 미워하였고 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0-33).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다”(요19:7).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거짓말로 마귀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4-55).

 

3. 교회의 역사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에 거기 있던 자들은 백이십 명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거기 예수님의 열한 제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교회를 개척할 정도의 숫자입니다. 더욱이나 그 때의 상황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또 예수를 믿는 자들을 뿌리 뽑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그런 중에도 성령 받은 무리들은 모두가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6-20).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복음을 박해하던 자들도 놀란 일이요, 복음을 전하던 자들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1:4-7).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이렇게 겨자씨와 같이 작은 숫자로 시작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복음이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또 오천 명, 드디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나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 박해로 복음은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소아시아로, 로마로 요원의 불길같이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것이 생명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때 불림 받은 여러분! 우리 모두 땅 끝까지 증인되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의 주신 기업

시127:3-5

 

오월을 일컬어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 또는 ‘청소년의 달’이라 합니다. 가을이 완숙한 계절로 수확의 기쁨을 안겨 준다면 봄은 발육의 계절로 그윽한 향기 속에 새로운 희망을 살려줍니다. 노년은 과거의 추억과 현실주의로 살고 아이들은 내일의 희망과 꿈속에 살아갑니다.

 

1. 하나님이 주신 기업

남아 선호사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딸아이는 어차피 남의 집에 보낼 아이라 생각하고 아들은 내 대를 이어받을 자식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장가보낸 아들은 해외동포가 되어 얼굴 보기도 힘들지만 시집보낸 딸은 비행기를 태워준다고 하니 아들딸 가릴 것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3-5).

문제는 어떠한 자식이냐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10: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잠15:20).

예루살렘에 가면 기드론 골짜기에 압살롬의 무덤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반역한 역적 아들이었지만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인 줄 알았기에 크게 슬퍼했습니다.

성지를 여행했을 때 어린이를 보고 쓴 글입니다.

 

미소 띤 어린이

노인을 대하여는 웃음 짓기 조심스럽다. 잘못 오헤할 수도 있으니, 젊은이를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 아이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워라. 그 천진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미소, 무슨 꽃으로 비길 수 있으며 무슨 향기가 이보다 더하랴. 어린이를 친구로 삼고 싶어라. 영원히 동심에 머물러 서서.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

값진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고, 좋은 기업은 정력을 쏟아야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자녀를 더 잘 가꾸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의 상급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상급은 공적에 따라 수여하는 것이지만 자식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같이 부모 역시 자식을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딸은 마음대로 구분해서 낳을 수 없는 것같이 용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뿐만아니라 똑똑하고 덜 똑똑한 자식도 마음대로 가려서 낳을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하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이삭을 주어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였고 성모 마리아는 예수 탄생으로 말미암아 세세에 복 있는 여자라 칭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에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귀부인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한 여인은 극히 화려한 모습이었고 한 여인은 검소한 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려하게 꾸민 여인은 입도 부지런하여 보석상자 안에 있는 각종 보석을 보이면서,

“이건 정말 값진 거야 내가 가장 아끼는 거란다. 남편이 결혼 십주 년 기념일에 선물한 것인데 옛날에 터키 귀족이 가졌던 거란다. 얘 너도 상당한 보물을 모아 두었을 텐데 나에게 좀 보여 주렴.” 그때 그 부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나도 너에게 꼭 보여 줄 보물이 있단다.” 하면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즉시 방문이 열리고 준수하게 생긴 두 아들이 들어오더니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이분께 인사드려라. 나와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공작부인이시란다.” 하자 두 아들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간 다음 “내게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이 두 아들이란다.” 하였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더 귀중한 보물인지 분별하기는 어렵지 않을 줄 압니다.

어떤 분은 너무도 속상한 나머지 “난들 왜 자식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그런데 자랑할게 없으니 문제가 되지요.”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형상을 발견할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양육의 문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양육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면 자식 양육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의식주 문제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자라지만 곡식은 가꾸어야 하는 것같이 자식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서 자식이 타고난 적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연한 교훈일지라도 자식에게 희망을 살려주지 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탈선하기는 쉬워도 회복은 어렵습니다.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사람은 태어나고 첫 번째 반항기가 2-3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니야” “싫어”라는 부정적인 죄 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식은 무의식중에 부모의 단점을 익혀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미워질 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이렇게 비춰지지 않는지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식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부모의 감정을 이어받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또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 선물을 더욱 값지게 잘 가꾸어 사무엘 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존재하게 된 두 원인자를 두고 있는데 한 분은 조물주 하나님이요, 한 분은 육신의 부모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과 부모를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존귀하게 되고 땅에서 복을 받는 길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나를 낳아 주신 은혜

자식을 두는 것은 부모님의 바램에서요, 자식의 소원에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만 자식에 대한 책임이 있고 자식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저버려도 될까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고 마지막 날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은 단순한 눈요기의 기쁨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이 경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로 말미암아 심판을 내리신 일이 없습니다. 이유는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해 만드셨고 또 인간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은 인간에게 무익하거나 인간에게 해가 되면 존재가치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높고낮은 가격을 누가 부여합니까? 인간이 그 용도를 따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쓰레기와 오물은 내가 대가를 지불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불효자가 가는 길은 집 나간 탕자같이 돼지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는 천한 자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금쪽같이 길렀는데 자식은 부모 귀한 줄 모르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다 길렀는데 부모가 병이 들면 열 자식은 먼저 몸살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 양육의 은혜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낳은 정 기른 정을 다 받고 자랐다면 더 많이 감사해야 옳지요. 받은 은혜는 당연시하면서 효는 저버려도 괜찮은 줄 생각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어느 부모든지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반항한다면 그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병든 부모를 간호하면서도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는 청소년 가장들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인생의 쓴맛을 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실 줄 믿습니다.

 

3. 효의 도

성경에는 불효자를 엄하게 다스리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6).

모두가 엄한 교훈입니다. 누가 감히 여기에 반항할 자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효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알지 못할 때는 우리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도예배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는 고인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아닌 가족들이 모여서 고인을 기억하고 그 뜻을 되새기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살아계신 부모님께 공경하라고 하셨으나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드려야 한다고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곤충의 생애를 살펴보면 유충에서 번데기, 나방으로 탈바꿈이 됩니다. 모기는 물속에 알을 낳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탈바꿈을 하여 공중을 날게 됩니다. 이러한 탈바꿈은 정상적인 변천과정으로 죽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충껍질을 보고 슬퍼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부모님의 사랑은 살아계실 때나 사후에나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서 세상에 있는 형제 다섯을 생각하여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혹 자식이 있었다면 자식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했을 줄 압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6:20-21).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23:25-26).

링컨 미국 대통령이 9살 때 그의 새어머니 낸시가 눈을 감으면서 그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항상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아들이 되어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백악관에서 생일을 맞이하여 손님을 청했는데 프랑스 대사가 워싱턴 대통령의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키웠습니까?” 하자 어머니의 대답입니다.

“나는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한 것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4. 약속 있는 첫 계명

효도는 덕의 으뜸이요 복의 근원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아직도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 이렇게 고생하는 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품으면 잘 되어도 여전히 효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버이 살았을 제 섬기기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에는 애닲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정철)

“부모를 잘 섬기는 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서는 어지럽게 하지 않으며, 동료들끼리는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주머니를 살펴드리십시오. 부모님은 잘살고 효도하는 자식이 주머니를 채워주면 어려운 자식 찾아 발길을 옮기십니다. 열 자식 중에 하나가 잘못되어도 부모는 내가 죄가 있어 자식이 잘못된 줄 생각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또 연세 높으신 모든 분을 내 부모 섬기듯이 공경하십시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32). 아 멘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20:1-3

 

율법에서 유대주의가 나왔고 율법에 의해 선민과 이방이 생겼으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2:13-14).

 

1. 출애굽의 목적

1) 율법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특별계시의 통로로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 사명을 망각하면 존재할 가치가 사라질 뿐 아니라 책임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2)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던 자들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이 그것을 알지 못했듯이 그곳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땅에 들어가서 죄를 때에는 그 복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령한 복을 잃지 않도록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2. 시내산 계시

성경은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를 세분하면 육십육 권이지만 대별하면 율법과 복음입니다. 물론 구약은 모세의 오경과 역사서, 또 지혜서, 선지 예언서로 되어있는데 모두가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함이라 하셨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 대하여 기록된 것이라 하셨습니다(요5:39).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고는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3-17).

 

3.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또 영원히 계시는 분으로 참신이십니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범신론이나 다신론이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신론은 인간의 무지로 만물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또 다신론은 각종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하였으나 아직도 귀신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우상과 귀신의 존재를 알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을 알지 못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5-8).

에덴동산에 뱀의 유혹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유일신 사상은 마귀나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 신이신 조물주는 한 분뿐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결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대속의 피를 흘리신 분도 한 분이시오, 보혜사 성령도 한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22:18).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1).

 

석탄일에 불교에서 하는 염불입니다.

“사탄님이여 우리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천당도 지옥도 허황된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석가모니는 지옥에 떨어지는 중생들을 위해 지옥에 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38-40).

2)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예물을 드릴지라도 대상이 잘못되면 복을 받지 못하고 또 평안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3) 진리에 복종해야 합니다.

진리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마귀의 말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존귀와 영광을 돌리시기 기원합니다. 아 멘

 

 

우상을 만들지 말라

출20:4-6

 

우상의 근원과 허구성을 말씀드리기 전에 생각할 것은 우상이 인간에게만 있고 금수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수와 달리 영적인 동물로서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1. 우상은 종교심의 발로입니다.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길 중 아덴에 들렀을 때 아덴은 헬라문명의 중심지로서 로마, 알렉산더와 함께 세계 3대 도시로 문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덴에는 삼만 개가 넘는 우상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크로폴리스 안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3천 년 전에 대리석으로 세워졌던 것으로 지금은 기둥만 남아있으나 세계 칠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 성에 들어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이 가득했으나 지혜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2-25, 29).

 

2. 우상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우상을 보면 별의별 모양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만든 신은 대부분 동물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도에서는 살아있는 소를 그들의 신으로 섬기는가 하면 태국이나 그 외에 동남아 국가에서는 원숭이, 코끼리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기독교 이천 년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로마 10대 박해 때에는 카타콤 곧 무덤 밑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살아있었고 교회 안에서의 우상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기독교의 상징으로 물고기를 표시했는데 물고기는 헬라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의 머리글자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암호표시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모두가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등장하여 주후 삼백십삼 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주후 삼백구십오 년에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것 역시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의 그림자로서 특별한 구원 섭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정치와 교회가 밀착되어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레고레 칠세와 인노센트 삼세 때는 교황이 권한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그레고리 칠세가 영국왕 윌리암 일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조물주는 하늘에 두 빛을 달아 두시므로 만물을 비취게 하신 것처럼 땅에는 두 큰 권력을 세우시므로 만민을 지배하여 잘못된 데 빠지지 않게 하신다. 이 두 권력은 교황과 국왕이다. 교황은 큰 빛이고 국왕은 작은 빛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도의 권력이 국왕의 권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었던 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주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니라 진리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6-37).

 

3.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135:15-18).

기드온이 사사로 등장하기 전에 먼저 바알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깨뜨려 불태우고 나서 칠년 동안 괴롭혔던 미디안 적군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마음에 품은 우상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또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아 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지 말라

출 20:7

 

이름은 인격을 표시합니다. 이는 이름이 인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연 만물에 이름을 부여하였는데 거기는 그 이름에 따라 어떤 경외심을 표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공경할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자식들이 함부로 그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므로 영광을 돌림이 인간의 도리요 그 이름에 욕을 돌리는 행위는 심판받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내 망신이 하나님 망신이 아닙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 세워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멸시와 천대는 내게 돌리고 주님의 이름은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가 누구입니까?

 

1. 회개가 없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6-27).

회개 없이 여호와를 부르는 자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세리는 죄인 된 모습 외에는 주님께 내어 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로 회개하였고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은혜 베푸신 주님보다 자기를 과시하는 기도로 일관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의 출입구는 좁은 길입니다. 교만한 자, 회개하지 않은 자는 그 길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죄 짐으로 얼마나 고달픈 나날을 살아왔습니까? 이제는 주님께 내려놓고 참된 안식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2.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자랑할 일이 있습니까?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기뻐할 일이 있습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도들은 주목하는 무리들 앞에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어느 날 저는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자식의 병상에서 눈물짓는 한 여인을 찾아 기도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00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받아보면 어떨까요?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사한 일은 다시 그 병실을 찾았을 때는 죽어가던 그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다섯 번이나 척추에서 골수를 뽑아 실험하던 그 아이가 건강을 되찾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3. 구원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성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입니다.

 

4. 주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여 마귀의 노예로 전락하면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북에는 김일성 삼부자의 이름이 함부로 입에 오르내리면 존엄을 무시하는 일이라 하여 엄하게 다스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일지 두고 볼 일이지만 역사가 주는 교훈은 독재자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1-2).

 

5. 헛된 맹세를 하는 행위입니다.

맹세는 최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6:13).

그런데 헛된 맹세는 하나님을 거짓 증인으로 만드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맹세를 삼가야 합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3-37). 오직 우리는 진리에 순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5:11).

아 멘

 

성수 주일

출20:8-11

 

안식의 뜻은 히브리어로 ‘사빳’입니다. 이는 ‘노동으로부터 쉰다.’ 또는 ‘옮긴다.’는 의미입니다. 즉 안식일이라는 말은 심신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서 쉰다는 의미와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신령하고 거룩한 영의 일을 한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안식일 제정

1) 첫 창조와 안식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2).

기억할 것은 안식일의 제정을 단순한 기념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의 목적이 안식일에 있고 또 이날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육일 창조의 거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이는 ‘만족’과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끝이 났는데 이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에덴동산에 불행이 닥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에덴에서 축출되고 참 안식을 잃었습니다.

2) 출애굽과 안식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애굽에서 노예로 있었을 때는 그들이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애굽 노예의 멍에에서 해방시킨 목적은 안식일을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를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의 사람이 되게 해주셨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1-36).

 

2. 안식일과 주일

에덴동산에서 생명과 보다 선악과를 먹은 일로 안식을 잃었듯이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28:1-2).

진정한 생명과는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참된 안식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돌아가셨으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날이 주님의 날 곧 주일입니다. 율법으로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구원받을 육체가 없으므로 율법의 안식일은 우리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3. 성수 주일의 방법

1) 삼가야 할 일

육신의 노동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누릴 복은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2).

헛된 수고 곧 쭉정이 농사라면 그것은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개인 사업을 하시는 분들 중에 주일에 문을 닫으면 상당한 타격이 오리라 염려되시는 분들이 있다면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를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제가 아는 K장로님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까지는 전화를 꺼놓고 목장예배와 성수주일을 하는데 전국적으로 거래처가 늘어나서 더 많은 복을 받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2) 주일에 해야 할 일

주님의 날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을 그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58:13-14).

주님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곧 생명을 구원하는 일, 또 선을 행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와 같이 모이면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제와 봉사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4. 성수 주일과 축복

우리가 성수 주일을 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의 복을 받게 됩니다. 지옥 갈 인생이라면 천사의 보호가 필요할까요? 심판에 이르도록 그대로 폐기 처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4-25).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8-31).

우리는 성수 주일로 성별 받아 영원한 존귀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살인하지 마라

출20:13

 

스위스의 심리학자 폴 투니어는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폭력을 분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1. 최초의 살인

최초의 살인은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이 죄의 시작은 아닐지라도 에덴에서 타락한 이후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었고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노아에게 살인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9:6).

이렇게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을 파괴시키는 행위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살인의 동기

끔찍한 흉악범도 최초의 동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솟구치는 증오를 다스리지 못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1서3:14-15).

실패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되는데 과연 그들에게는 성공할 기회가 없어서였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타고난 재능을 무엇에 또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뛰어난 화가 임마누엘 닝거의 초상화는 16,000$에 공매되었는데 같은 정력을 낭비하여 20$짜리 가짜 화폐를 그린 사람은 입건되어 벌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합법과 불법의 차이입니다.

폐유를 참기름과 섞어 시장에 내어놓고, 두부에 횟가루를 넣는가 하면 커피에 담배꽁초를 넣어서 함께 달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거짓은 진리와 통할 수 없고 의와 불의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3. 살인의 종류

1) 직접 살인

여기는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과실치사는 정상 참작을 할 수 있으나 그럴지라도 살인은 여전히 살인입니다. 요즈음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감각기능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마음 놓고 학교에 보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2) 간접 살인

어떤 면에서는 더 무서운 범죄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접 살인은 개인 또는 소수의 상대라면, 간접 살인은 그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가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농약을 세계에 수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선진국이 공헌하는 바도 크지만 이렇게 저지르는 죄악도 많습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모두가 엄히 다스려야 할 죄악입니다.

3) 자살

생각해 보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기로 방향만 돌이키면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주님께 드리면 순교가 되는데... 믿음이 보배입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것이 생명인데 아무런 의미도, 보장도 없이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살 율 세계에서 일위가 되었다고 하니 언제부터 이렇게 높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순교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라면 진리를 위해 죽는 것은 가장 값진 죽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산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영원히 살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상당히 수명이 높아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야할 때가 되어도 의사가 붙들어 놓고 못 가게 하니 그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맹장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을 했을 때였습니다. 암이 전신에 퍼져서 대수술을 한 환자의 보호자가 하는 말입니다. “살리지도 못할 사람 왜 이렇게 고통만 더 받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기도가 필요할 줄 압니다.

1)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게 해 주십시오.

2)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보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생의 보장은 주님 위해 살고 주님 위해 죽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3. 살인의 결과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세벨의 죽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

과연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는 그렇게 죽었고 아합의 집은 망했습니다. 직접 살인, 간접 살인, 자살 행위 모두가 제육 계명을 범하는 죄악입니다. 마음으로 범하는 증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모두가 사랑의 꽃을 피우고 구원의 열매를 맺어 이 땅에 천국을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구원의 삼 단계

출19:1-6

 

출애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진리의 노정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계시의 점진성이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삼 단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홍해에서의 구원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 용맹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통제책으로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명하여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 하였으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죽이지 않고 바로에게 이스라엘 산파들은 튼튼하여 자기들이 가기 전에 아기를 낳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가 태어났고 생모 요게벳이 석 달을 숨겨서 길렀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었는데 그때 바로 공주의 딸이 목욕하러 나왔다가 상자 안에 있는 아이를 발견하여 자기 아들을 삼고 이름을 물에서 건졌다 하여 모세라 하였습니다. 그때의 애굽의 왕조는 투트모세(Thutmose) 1세입니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투탄카멘(Tutankhamen) 왕 다음으로 많은 유물을 남긴 사람이 모세를 양아들로 삼은 하셉슈트(Hatshepsut) 여왕입니다. 이 하셉슈트는 투트모세 1세의 무남독녀로서 투트모세(Thutmose) 2세와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음으로 하셉슈트가 집권하여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때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애굽의 문물을 다 익혔습니다. 하루는 벽돌을 굽는 현장에 나갔다가 이스라엘 노동자를 징계하는 애굽인을 죽였고 그 일이 탄로되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호렵산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출애굽의 거사를 이룩하였는데,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살아나고 바로의 군대는 물장사 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높혀 “여호와 같은 신이 어디에 있나이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일 단계 구원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2).

 

2. 시내산 구원

애굽의 바로 왕과 그 군대는 물장사 되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극적인 구원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하고 기뻐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광야길이 시작되었고, 3일 후에 마라에 서 쓴 물로 인해 다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나 교회에 안 나왔을 거예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해서 특별한 세계가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애굽을 돌아볼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이것이 훈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훈련하고자 하실 때, 그 사람을 감동시키기 원하실 때,

세상이 놀랄 정도로 위대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분이 사용하신 방법과 방식들을 보라. 당신이 택하신 자를 얼마나 철저히 다듬으시는지, 그 사람을 내리치고, 상하게 하시며, 강력한 타격을 가하여, 그를 초라한 진흙덩이로 전락시키시니, 이를 이해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 고통에 겨운 그의 심령은 부르짖을 뿐이며, 그는 탄원의 손을 치켜들 뿐이다.

그분이 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할 때, 구부리되 결코 부러뜨리지 않으신다.

당신이 택한 자를 사용하시되 온갖 의도로 그를 녹이시며 온갖 행동으로 그를 권유하심으로서 당신의 영예가 드러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분만이 아신다.” (오스 힐먼)

드디어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되었고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고 기도하여 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회막에 법궤를 두고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복을 주시고 앞길을 인도해 갔습니다.

 

3. 가나안의 구원

가나안은 믿음의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요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 고달픈 나그네 노정은 거기서 끝이 나고 가나안 땅에서는 지파대로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고달픈 광야 길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 노정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들은 고센 땅에서 애굽에 내리는 열 재앙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홍해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은 어려웠던 것만큼 기적도 많았습니다.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광야 길 40년을 지나는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또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메추라기 고기도 먹었고 반석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마셨습니다. 모두가 자연상태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일어난 기적의 사건들이었습니다. 꼭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도 믿음으로 대처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애굽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차이가 났을까요? 영의 눈 곧 믿음의 눈을 가지고 못 가진데 있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영의 눈이 있는 사람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하였는데 영의 눈을 못 가진 열 정탐꾼은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을 보는 눈은 있었으나 영의 눈은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를 돕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그 하나님, 광야 40년을 지켜주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영의 눈이 밝아지고 지각이 열리면 약속의 땅 가나안은 우리 앞에 펼쳐질 줄 믿습니다. 어떠한 유혹과 장애가 있을지라도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 모두 승리합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1-8). 아 멘

 

 

도우시는 하나님

 

시121:1-3

 

한 성령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가 임하는 것같이, 한 사람에게도 시간과 환경, 여건에 따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호, 양육, 축복과 구원의 은혜를 다양하게 내려 주십니다.

펄시 콜레 박사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에 보면 한 의사가 어느 토요일 오후 집에서 TV를 통해 축구 경기를 보며 쉬고 있는데 병원에서 응급환자가 있으니 급히 오라는 전화가 와서 가방을 들고 차에 올라 급하게 시동을 걸려는 순간 차창 밖에서 누군가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나타나서 “차를 후진시키지 말아요. 당장 내려서 뒤를 살펴봐요.” 하기에 내려서 차 뒤를 살펴보니 두 살짜리 꼬마가 흔들의자에 앉아서 뒷 범퍼에 기댄 채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개인에게 주시는 은혜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1. 선택의 은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준 땅으로 가라”(창12:1). 이는 다 하나님의 선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의 권한이 얼마나 당당한지 아십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법적인 상속권을 보장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낳은 부모에게는 양육의 의무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의무가 없으나 자식에 대해서는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무가 부모에게 있지만 육신의 부모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위에 계신 하나님은 완벽하신 보호자이십니다. 육신의 부모는 잊을지라도 위에 계신 아버지는 영원히 잊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14:18-19).

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은혜로 채워주시고 또 영생을 보장해 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2. 보호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적자와 같이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라도 나 홀로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17:8). 세계 이차 대전 때 미국 병사 죠지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B24 폭격기 편대의 일원으로 특수 임무를 띠고 중부 유럽지방으로 출격하게 되었는데 폭격 목표 지점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누군가가 자기 어깨를 힘 있게 잡고 “일어나서 비행기 뒤쪽으로 가봐” 하기에 뒤쪽으로 갔는데 그 순간 적군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서 자기 자리로 돌아와 보니 포탄이 자기가 앉아 있던 좌석을 지나갔는데 천장에 삼인치나 구멍이 났다고 합니다. 제가 목회할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찰 집사님이 주일 날 성도들을 태우고 육군 사관학교 입구에 있는 철길 건널목에 왔을 때 기차가 오는 신호가 울리기 시작하였으나 간수가 건너가라는 수신호를 해서 그대로 건너는데 그 앞이 사거리라 앞에 가던 차가 신호에 정지하게 되어 앞을 막아 어쩔 수 없이 차는 철길 중앙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간수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야단이고, 다른 방법은 없고 해서 자가용 한 대 받아서 사고 내는 것이 더 났겠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주님, 사람만 죽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액셀레이터를 힘 있는 대로 밟았는데 분명히 쾅하고 소리가 났어야 할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눈을 떠 보니 자가용도 동시에 출발이 되었고 기차는 쏜살같이 뒤를 스쳐 기적적으로 사고를 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시18:36).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요16:1-4).

 

3.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은혜

우리가 누리는 어느 것 하나라도 자신의 공로를 따라 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나는 본래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조상을 잘 만나서 일까요? 물론 모태신앙은 무엇보다 큰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롬8:29-32).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121:1-3). 아 멘

 

죄의 종과 순종의 종

롬6:16

 

괴테의 앉은뱅이 꽃이라는 시입니다.

“한 소녀가 들길에서 앉은뱅이 꽃을 꺾어 들었다.

그런데 꺾인 앉은뱅이 꽃이 노래했다.

내가 만일 무지한 남자의 구둣발에 짓밟혔으면 얼마나 비참했을까?

나는 깨끗한 소녀의 손에 꺾이어 행복했노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1. 존귀한 피조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사람보다 더 귀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치를 이탈한 천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독생자를 보내시지 않았으나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독생 성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의술이 개발되고 새로운 약품이 생산되지만 그런 것을 먼저 사람에게 실험하지 않고 쥐나 원숭이 같은 체질적으로 인간과 가까운 짐승에게 먼저 실험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때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동조는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 직접 실험했던 인면수심의 야만적인 행위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6.25 전쟁이 터져서 그때는 ‘인생의 행복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굶지 않고 먹을 것만 있으면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것이 제일 서럽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나 목적’을 운운한다면 배부른 사람들의 잠꼬대로 생각했습니다. 저의 어린 꿈도 목사가 된다든지 학자나 정치인이 되어야 겠다는 것보다 빨리 성장하여 부모님을 고생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모셔야겠다는 소박한 것이 었는데 지금은 “내가 늙고 병들기 전에 시간을 선용하여 주님 앞에 설 때에 후회 없는 인생이 되어야 겠다”는 일념입니다. 저는 이제 일반 사람들같이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직 목사답게 살다가 목사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다양한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꿈을 가졌는가입니다. 사람이 품은 꿈은 그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키와 같아서 선택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대한 꿈이 있는 사람에게 위대한 업적이 쌓여질 것입니다.

스케이프 윌킨스의 성공원리입니다.

1) 책임감 2) 불타는 욕망 3)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능력을 활용하는 지혜

4) 모든 사람을 위해 헌신 5)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을 묻어두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개발하고 선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용도와 가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우리는 하나님의 큰 집에서 어떠한 용도로 지음을 받았던지 고유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지족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달란트를 시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3-6).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12:22-25).

우리는 각자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고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3. 수고와 보상

누구를 막론하고 허무에 매여 종살이하다가 생을 마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도 모르고 마귀에게 종살이하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충실했던 가룟 유다의 종말을 보십시오. 마귀가 어떤 보상을 주었습니까? 자살의 길로 몰아넣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지 세계에서 자살하는 비율이 1위가 되었습니다. 자살은 타살과 다른 것입니다. 자살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지만 타살은 그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타살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멍에서 벗어나 진리의 멍에 아래 있어야 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19-22). 아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주님

요13:1-17

 

목사가 결혼식 주례를 할 때는 반드시 서약을 받는데 ‘건강할 때나 병들 때를 막론하고 끝까지 사랑하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 때는 서로 좋아서 하는 결혼인데 대답 안할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서약한 것도 깨뜨리고 헤어지는 일도 있습니다. 황산성 변호사의 남편이 목사였는데 남편이 주례한 부부가 자기에게 이혼 소송을 의례하는 경우가 있어서 남편에게 결혼 주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끝까지 지키시는 주님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7-9).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여기서 끝까지라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1)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입니다.

2) 세상 끝날 때까지입니다.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실 때도 이 약속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하셨습니다.

또 주님과 함께하면 근심할 것 없으니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2. 마귀가 주는 생각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13:26-27).

마귀가 유다에게만 이런 생각을 넣어주는 줄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감 바이러스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상을 가리지 않듯이 마귀의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경성해야 합니다. 마귀는 항상 육신의 생각을 통로로 하지만 성령은 영의 생각을 통로로 삼는고로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3.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신 주님

종의 신분으로 발을 씻었다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위계질서를 떠나 우리도 이렇게 하도록 교훈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13:3-6).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6).

 

4. 베드로의 과욕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5-10).

물론 은혜를 받는데도 욕심이 필요합니다. 이유는 작은 믿음보다 큰 믿음을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1) 그가 세족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요.

2) 이미 목욕을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세족식을 하셨기에 우리도 세족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세족식이 의식에 그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짐의 은혜를 힘입을 때 우리의 손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손길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간음하지 말라

출20:14

 

십계명은 율법의 기초요 골격으로서 모든 율법은 십계명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1. 가정과 행복

행복의 기본 조건이 사랑이라면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정입니다. 과거 신학생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반 친구 중 한 사람이 서독에 있는 애인에게 만리장성의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들 보고 싶어서 애태우는 사연들이었습니다. 여자가 지음을 받기 전에는 에덴동산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였으나 여자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셨고 아담도 그렇게 기뻐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여자가 무엇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의 갈빗대 없어진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크게 기뻐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아름다울 때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가 왕의 허락도 없이 얼굴을 보였을 때 법으로는 죽여야 하지만 죽이지 않고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5:3)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못받을 때는 계산을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가정은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영하며 복을 누리도록 두 기관을 두었는데 그것이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가정을 잘 지키고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2:15).

여러분! 행복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무지개 속에 행복이 있을까요? 아마도 병석에 있는 분들은 건강이 제일 행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하는 자들을 보면 병이 들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라 건강을 가지고 자살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로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죄악은 풍요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심판은 가난 때문에서가 아닙니다.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주님 모시고 사는 내 가정에 행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힐 듯 손에 들어오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여. 어떠한 아름다움이 여기에서 더하랴!

조물주의 영감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예술의 극치여.

그의 아름다움이 이 가슴에 있나니

 

2. 합법과 불법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불법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1서3:4).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불법이요, 생명과를 먹는 것은 합법입니다. 남녀 간에도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합법이요, 가정을 벗어나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성하고 거룩하게 일평생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소돔 고모라가 이보다 더했을까 할 정도로 음란문화가 안방까지 침투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잠9:13-17).

순간적인 죄의 충동을 다스리지 못해 따르는 보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눈이 뽑혔고 다윗은 일평생 고통을 당했습니다. 지혜자의 말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5:15-19).

육신의 정욕을 다스리고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3. 삼가야 할 문제

내가 누릴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다면 이 행복을 일평생 누리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친구를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남녀 간에 서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다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를 가려서 가까이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L장로님은 직장생활을 접고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직장을 그만둔 이유가 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정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도 술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 거절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 눈으로 보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뱀의 말을 듣기 전의 선악과와 듣고 난 후의 선악과가 달리 보였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혹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만일 네 눈이 너를 볌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7).

3) 더러운 말을 삼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음담패설을 복음으로 간주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아 멘

 

 

도둑질 하지 말라

출20:15

 

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께 나타나서 한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주님이 금식한 후였기에 시장하신 주님의 사정을 가장 많이 헤아려서 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능력이 있으므로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누구의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절대 복종하지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그런데 마귀의 말에 주님께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세상 사람들은 떡으로만 사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떡이 필요한 것을 인정하시면서 떡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1. 물질과 신앙

물질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 덤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물건을 살 때 어떤 것을 덤으로 줍니까? 값이 싼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했더니 부와 귀와 영화는 덤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잘못되면 물질이 주인이 되어 더 귀한 영적인 복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던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마19:22).

그러므로 물질이 천국 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2. 물질 관리

1) 성물에 대한 죄

같은 물질이라도 성물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처음 소득이 성물이요, 십의 일이 성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물을 성별시키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성물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몫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물을 구별시키지 않는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버리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3:8).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훼파된 성벽을 건축하고 난 후 그 백성들에게 성물을 구별시켜 레위 자손들에게 주도록 하였는데 주지 않으므로 그들이 자기 밭으로 도망하여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민장들을 꾸짖었습니다.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13:11-14).

2)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한 죄

어떠한 경우에도 남의 물건을 정당한 대가없이 취하는 행위는 도둑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성도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3. 물질과 업적

물질은 모으는 데 목적을 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전노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면 폭군으로 변하고 물질을 다스리면 충복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의 진리를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과 캐나다가 국경을 이루고 있는데 두 나라는 그 수자원을 관광 산업으로 개발하여 수입을 올릴 뿐 아니라 또 수력발전으로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천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독점하려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강을 막아버린다면 스스로 물 재앙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이 내 수중에 들어왔다고 해서 유통과정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졸부근성을 버리고 직업의식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재산을 독점하고 또 대물림하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당대에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자는 선한 업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 청년이 영생에 관해 물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1-22).

여러분! 물질이 영생을 포기할 정도로 그렇게 귀중할까요? 기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위해 투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그날은

마24:36

 

D-day, 결정된 날입니다. 사람이 목적을 세우고 어떠한 날을 정했다면 그날을 대비하여 사전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역사적인 그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날에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인데 영광중에 주님을 맞이할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갈며 슬퍼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1. 제자들의 질문

마24장, 막13장, 눅21장은 복음서 안에 있는 묵시록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란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이 질문이 귀중함은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우주 창조의 기원에서부터 타락의 역사와 대속의 은총, 영생의 부활, 영원한 천국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종말에 일어날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심판과 구원의 날이므로 더욱 중요합니다.

 

2. 종말의 의의

1) 예루살렘 심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성막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이루고 복을 받았으나,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이 후 오늘까지 성전은 복구되지 못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오마르 신당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2).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적인 심판을 주님께서는 동일선상에 두고 말씀하신 것을 유의야 합니다. 이유는 진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13: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

2) 개인적인 종말

개인적인 종말은 수명이 다하는 그날입니다. 우리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명이 늘어나서 백수를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 년을 살아도 36,500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얼마나 살았고 남은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개인적인 심판의 날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7:4).

그날은 언제일지, 또 어디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모른다는 것이 다행이지 그날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낙을 모르고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 결혼을 해고, 회갑연을 차려도 죽을 그날을 생각하면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또 젊은이들도 그날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날을 우리에게 비밀로 해 두신 것은 희망을 오늘을 살게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3) 역사적 종말

역사적 종말은 노아 홍수 때와 같이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임하는 심판입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3. 재림의 날짜

1) 아무도 모릅니다.

한때 주님의 재림 날짜에 대해 예언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Word Society에서 공개한 소책자에 보면 1988년에 휴거가 일어나야 할 이유 88가지로, 1988년 9월 11-13일에 주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 바람을 타고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나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주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

2)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여기서 아들은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여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때는 모르셨으나 부활 후에는 아셨다”고 합니다.

Alford는 “성부에 대한 성자의 완전한 복종과 겸손을 표시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성부와 성자, 성령은 권능과 영광, 지혜와 지식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역적인 면에서는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영역이 있고, 아들의 사역하시는 영역이 있고, 성령이 사역하시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요3: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

여기서도 열흘이라는 날짜를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전히 오실 날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아 멘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인간에게 주신 언어기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철인 죠지 산타니아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가 언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렇게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인간에게 언어를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과 같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또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다른 피조물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언어기능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또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편리한 도구를 인간의 타락으로인해 저주와 악독한 말을 하여 온갖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홉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1.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편리하고 또 귀중한 것은 값지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입같이 유용하고 편리한 지체가 없지요. 너무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귀한 줄 잊고 살아가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성가대원들은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과 학식으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분들도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감사와 불평에 있습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감사가 있으면 밝아지고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주신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존귀한 언어를 죄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냐”(약3:9-11).

일반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지각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침묵이 금이라면 웅변은 은”이라 하였습니다.

“군자는 말이 적으나 버릴 말이 없고 소자는 말이 많아도 쓸 말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3:19) 하였습니다.

2) 성격이 급한 사람이 대략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남녀의 성이 구분되듯이 성격도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권총, 자동차를 좋아하는데 여자아이들은 주로 인형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남자 중에서도 여자 같은 성격이 있고 여자 중에서도 남자같이 활달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능동적이고 활달한 성격은 마음이 깊지 못한 면이 있지요.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성격의 장단점을 바로 알아 보완해 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3) 말씀 전할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한 팀이 되어 전도 파송을 받았을 때 바울은 신앙의 연조를 보면 바나바에 비해 어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받은 은사가 특별하여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을 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나는 혀가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였을 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하시고 아론으로 모세의 말을 대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해야 할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입을 다물고 전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2. 말로서 짓는 죄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는 남을 해치기 위해서 하는 말로서 삼가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이렇게 남을 중상하거나 모략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4-6).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4:11).

우리는 계명을 준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을 문병했던 것은 욥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욥의 그 참혹한 현상을 보고 그들도 일주일 동안 입을 떼지 못하고 욥과 함께 땅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한탄하며 원망하는 것을 보고 인과응보의 도덕적인 잣대로 욥을 정죄하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 친구들도 믿음 없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작은 등불도 어둠을 밝히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그런 빛은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42:7).

물론 욥도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특히 환자 문병을 갔을 때 조심할 것이 많습니다. 환자를 배려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인간적인 잣대로 함부로 비판하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도록 기도하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우리는 혀로 죄를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입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이 계명은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입니다. 어느 국가나 단체든지 조직이 필요하고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법은 행위의 법이라면 열 번째 이 계명은 행위의 뿌리가 되는 마음의 법 곧 탐욕의 법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인간 세상에서 빈부격차는 누구도 해소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낙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3-15).

이 말씀을 하시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탐욕을 다스리지 않으면 아무리 소유가 늘어도 만족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가치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자가 되어야 그 생명이 귀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 생명이 천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비길 수 없는 믿음의 복을 가난한 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2:5).

사람이 허황된 생각에 빠지게 되면 값비싼 물건을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줄 생각합니다. 거기에 무슨 만족이 있을까요? 세상을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이 부끄러운 줄 알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삶을 지양하고 조용히 속사람을 가꾸어야 합니다. 얼굴 미인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어진 여인은 오래갑니다. 탐욕을 다스리십시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2.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6:27-29).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잠6:32-35). 지금은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어느 나라 보다 앞질러가고 있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말입니다. “아내와 자식 말고는 모두 변해야 한다.” 모두가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사람 욥의 고백입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욥31:1-2).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욥31:9-12).

여러분! 진실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미국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여덟 번 결혼하고 여덟 번 이혼하였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자보다 더 뛰어나지요. 사마리아 여인도 여러 남자의 품을 거쳤으나 영혼의 욕구를 채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 수술을 하려고 했다가 “당신 눈 수술하면 그날로 나하고 이혼하는 줄 알아, 이대로의 모습을 내가 좋아하는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수술이냐”하고 남편이 호통하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3.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

오늘에는 종의 호칭을 쓰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용주도 봉건사회 의식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예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노 사할 것 없이 모두가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은 함께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소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잘 살아가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고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에게 기약된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2-14).

중요한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입니다.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다가 저주받은 아합과 이세벨 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1, 5-6).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그의 양이니 우리는 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아닌 선한 일에 부자 되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기복 신앙

신28:1-10

 

나라마다 복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복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1. 기복 사상과 제사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제사는 가인과 아벨이 올린 제사입니다. 물론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어떤 모양으로라도 아담과 하와가 올린 제사로 그의 아들들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후 노아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 또는 율법의 제도를 따라 올리는 제사도 전통의 영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통해 영육 간에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2. 신앙의 대상

중요한 것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라면 마땅히 그 앞에 경배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하였습니다(엡6:1-2).

그런데 부모 제사는 왜 우상이 될까요?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입었던 옷이라 하여 그것을 부모님과 동등시 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 신이시오. 또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조상을 타락시킨 마귀가 유대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나 무엇이라 유혹했습니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8-10).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기독교 박물관(꼽틱 박물관)과 카이로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다 무덤에서 발굴해 낸 것인데, 기독교 박물관에 있는 것은 모두가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던 유물이지만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 것은 그들이 섬기던 여러 종류의 짐승과 우상입니다. 문제는 우상과 미신행위를 하는 자들은 그것을 참 신인 줄 알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정성은 예수 믿는 성도들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범신론, 즉 자연신론자들은 우주만물이 그들이 섬기는 신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해가 신이요, 달이 신이요, 또 자연만물이 다 그들이 섬기는 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신을 의식하고 섬기는 것은 내세를 의식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다른 것으로 영혼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살아계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므로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제사의 형식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나라 별로 차이가 있는데 동양은 주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미신행위는 어떠한 교리나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귀신이 유혹하는 속임수에 이용당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의 행위나 경배의 대상을 알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이 알지 못하고 섬겼던 것같이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 해 전 이야기입니다. 축호 방문 전도를 하는 중에 어느 가정에 가서 노크를 했더니 문을 열어주기에 내가 가까운 교회의 목사라고 했더니 자기는 절에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와는 별 볼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무척 바쁜 사람인데 잠깐만 이야기를 하고 가겠다고 하여 복음을 전하고 귀가 조금 열리는 것을 보고 이제 나를 만나려면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만날 수 있습니다 했더니 그 때부터 교회를 나오게 되어 정식으로 심방을 하였더니 집에 부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목탁도 있었는데 다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천국을 갈 때까지 예수님 다음으로 목사를 극진히 생각하고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는 소와 양과 비둘기와 초태생을 제물로 드리고 또 십일조와 맏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4. 제사의 목적

이것이 귀중합니다. 이는 경배의 대상과 제사의 형식을 바로 갖추었다 할지라도 목적이 어떠하냐에 따라 ‘기복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율법도 비판하지 않으셨으나 율법주의자들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율법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19-24). 그러므로 진정한 복은 영생의 진리 곧 대속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55:2-3).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찾은 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주님을 전했습니다. 이 영의 눈이 밝아져서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아 멘

 

 

죄인 중에 괴수

딤전1:15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였는데 그러나 죄인도 사유함을 받으면 의인이 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이후로는 누구도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은 사유의 은혜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큰 죄인 바울이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율법 아래서의 사울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바울은 야망을 키우기 위해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또 젊음의 패기와 정의감에 있어서 지도자들에게 많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 용기는 만용으로서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를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돌로 쳐 죽였으나 그것을 당연시하고 증인으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청년 사울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앞장을 섰는데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2-3).

 

2. 진리 앞에 꺼꾸러진 바울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혈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가두고 또 죽이기 위해 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던 청년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3-5).

감히 주님 앞에서 거꾸러지지 않을 자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바울에게는 최후의 심판대가 아니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그날 이후 사울은 작다는 의미의 바울이라는 뜻으로 주님을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달렸습니다. 그동안 진리를 대적하여 달렸으나 이제는 진리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유자 이면서 멍에 아래 있었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고백대로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되었습니다.

 

3. 죄인 중에 괴수

우리가 은혜를 받고 거듭났다고 해서 육성이 사라진 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정과 욕은 숨질 때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단회적인 회개

중생을 은혜를 힘입는 회개입니다. 이는 은혜의 조명으로 단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육신의 연약으로 인한 회개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회대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성도들도 육신의 연약으로 인한 회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고 선한 일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또 회개하여 고쳐질 것이 있고 회개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 고백이 끊임없는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한 순간이라도 교만할 수 없었으며 방심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 이는 바울이 사유함을 받지 못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요 또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것은 일평생 망각해서도, 망각할 수도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4. 회개와 축복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여기서 욥의 모든 시련은 끝나고 갑절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1-8)

베드로는 그때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시련에는 보상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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