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설교(본문설교)

제2권

주님만 주님만 2022. 3. 16. 10:41

그리스도의 탄생

눅2:8-14

 

세상에는 가룟 다와 같이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서 세상에 큰 빛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과 같이 부정모혈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로 또 왕의 신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과연 주님은 왕 중의 왕이요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역시 세속의 왕국이 아닌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1. 천사가 전한 복음

한밤에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에게 천사들이 전한 성탄의 소식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8-14).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구유에 탄생하신 아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5-46).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이렇게 부르짖는 소리에 침묵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모두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오, 주여! 당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412장)

 

2.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이신 주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9-10).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이 볼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면 인간은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나타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일 장에서 “내가 보매” “내가 보니”라는 말씀이 일곱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의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오신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18).

 

3. 소동이 일어난 예루살렘

평화의 왕 주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헤롯의 반응입니다.

“혜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마2:1-3).

마귀는 헤롯을 충동하였고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오신 일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함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마귀를 멸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1서3: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메시아를 대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해야 마땅한데 헤롯의 앞잡이 노릇만 하였습니다.

 

4. 다른 길로 고국에 가라.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7-8).

왕의 명령을 박사들이 거스릴 수가 없지요. 놀라운 사실은 동방에서 박사들을 인도하여 오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 예수 탄생하신 곳을 비춰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2:10-12).

마귀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다 하여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른 길로 돌아간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영감, 다 뒤졌어, 다 뒤졌어.” 어느 시골 노인네가 말벌의 애벌레가 고단백으로 좋은 줄 알고 후라이 팬에 볶아 놓고 한 말입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게 오신 주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끄러움 없는 인생

삼상12:1-4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34:5).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라면 이는 복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힘입고 성장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가정은 그의 아들들의 죄악으로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기고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등장하여 법궤도 돌아오고 잃었던 영광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외적을 막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삼상7:13-14).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무엘은 노년에 사울 왕과 백성들 앞에서 그의 일생에 결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아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삼상12:3).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이런 인물이 나왔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자신의 인생 노트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6-21).

“오늘을 사랑하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 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처럼 중요한 날도 없다.

오늘처럼 소중한 시간도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오늘이 30번 모여 한 달이 되고. 오늘이 365일 모여 일 년이 되고.

오늘이 3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

 

2. 자신의 위치가 어느 편에 있는지 살펴봅시다.

마25장 31절 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는데 이 역시 종말적인 비유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어떻게 보면 양과 염소는 행위에 따라 구별시켰는데 특징은 의인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기억하지 않았으나 악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또한 왼 편에 있는 염소들도 대답을 했는데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였습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25:44).

임금의 대답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일까요?

높은 자리에 있다가 부정이 드러나면 “대가가 없는 돈이었다”고들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치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물질이 대상을 바로 찾아 쓰였다면 그것이 알려지는 일로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진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외면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섬겨야 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손길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큰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물질 이상의 은혜의 손길로서 내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살펴봅시다.

땀 흘려 지은 농사가 쭉정이가 되었다면 그같이 허탈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7-8).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10-11).

쭉정이는 아무리 많아도 곳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전무후무의 부를 누린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와 영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2).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9-11).

하나님께 전부를 드린 부왕 다윗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했던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지금 우리는 어떤 농사를 짓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하늘나라 곳간을 채울 알곡 농사를 지었는지, 불타버릴 쭉정이 농사를 짓지는 않았는지? 시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날에 가슴 치며 통곡한 들 무슨 소용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날이 부끄러움 없는 영광의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4:1-10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1-2).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생 아벨의 제물은 상달되고 자기의 제물은 상달되지 않은 일로 인해 동생을 미워하여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언을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3:3-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만 받으셨는지 궁금하게 여겨집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이라’ 곧 맏물이라 하지 아니하였는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라’ 또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적인 제사와 영적인 제사 곧 신령과 진정의 제사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큰 은혜와 복을 받으면 시기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존중하면 나 또한 동일한 은혜와 복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1.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

1) 마귀의 올무를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고 악마는 우리에게 유혹을 준다.”(키엘케고르)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성적 유혹을 했을 때 그곳을 피하므로 극복하였으나 삼손과 다윗은 거기에 끌려들어 큰 보응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6:27-28).

2) 인내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환난과 핍박, 고난이 닥쳤을 때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0-11).

“누구에게나 문제는 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란 허상 즉 사망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고통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공허한 환상을 추구하는 것이다.”(R.H. 슐러)

3) 대적하여 물리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1-13).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패배자를 위한 기념관을 짓고 기념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

1) 진리를 상고해야 합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8:30-36).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면 말씀은 우리를 죄에서 멀리 떼어 놓을 것이요 우리가 죄와 가까이 하면 죄는 우리를 성경과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주님을 죽이려 하였는지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말씀이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2) 믿음의 방패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이 얼마나 귀중한지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과 동행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이레의 복을 믿으십니까? 주께서 예비해두신 양을 발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 닛시의 복을 믿으십니까? 승리의 주님을 뵙게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 라파의 복을 믿으십니까? 치료의 은혜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 샬롬의 복을 믿으십니까? 하늘의 평화를 맛보게 될 줄 믿습니다.

여호와 삼마의 복을 믿으십니까? 하늘의 영광 구원의 주님을 뵙게 될 줄 믿습니다.

3)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봉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성도는 봉사로 열매 맺을 때 자신의 신앙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해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4)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해주시고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해 주신다.”(앤드류 메리)

어떠한 마음 자세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땅에서 비상을 걸면 하늘에서도 비상을 걸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하룻밤 기도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5)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6-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7-10). 아 멘

 

 

사명자의 기도

히13:18-21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 히브리서 저자를 비롯한 우리라는 전도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23절) 하신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데 내용과 문장으로 보아 학자들의 견해로는 바울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1. 교회를 위한 기도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을 세울 기초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초를 잘못 놓으면 오래지 않아 철거할 문제가 생기지만 기초가 튼튼하면 오래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천국은 열두 보석으로 꾸며진 집입니다.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그 이름이 빛으로 남겨진 성도는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은 막달라 마리아가 보배라면 구제와 봉사가 심히 많았던 도르가도 역시 보배요,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던 백부장 고넬료도 보배입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재목으로 세워진 교회는 복된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2. 전도자를 위한 기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당부한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6:18-20).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6:25).

배후의 기도는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에게 실탄을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대는 수가 많아도 실탄이 떨어지면 싸울 수가 없듯이 영적 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기가 없으면 마귀의 아성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1:1-3).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는 왕권으로 내렸기 때문에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서 주변 나라를 두려워하여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성전공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스3:3).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지 이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스3:8).

그 때에 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보십시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스4:4-6).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지을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사생활에만 급급하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해 책망하였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1:4-5).

일에는 항상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아무리 분주하게 뛴다 할지라도 우선순위를 잃으면 실패하는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너진 성벽을 건축할 때도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이 그처럼 방해를 하였으나 느혜미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밤에도 무장을 풀지 않고 오십이일 동안 그 공사를 완성했던 것입니다(느6:15).

신앙은 전투입니다. 안일한 마음이라면 무엇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맡겨진 직분 따라 충성을 다짐합시다. 우리 모두 사무엘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아 멘

 

 

모범적 교회

살전 1:1-8

 

교회라는 명칭은 큐리아코스(Kuriakos)에서 나온 말로 이는 ‘주님의’ 또는 ‘주께 속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불러내다‘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의 단체이며 믿음의 친교로 보았습니다.

또 벨직 신앙고백서에는 “우리는 한 공동적 또는 보편적 교회를 믿고 고백하나니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하여 그의 피로 씻음 받고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거룩한 모임이다”라고 하였고,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에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모여진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요, 모든 성도들 즉 성령의 말씀에 의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올바르게 예배하며 섬기는 자들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대속의 은혜에 참여한 자들의 단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억할 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아니지만 그럴지라도 세상을 구원시킬 수 있는 방주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 밖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요 교회는 지체이며,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교회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절).

문제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마땅한데 그러지 못한 교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1-2).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목자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땀 흘리는 농부는 수확의 기쁨이 있기에 또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실적이 있어서 또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1-2).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지와 정과 의가 인격의 삼대 요소라면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의 삼대 요소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2-3).

이러한 교제는 모두가 은혜 가운데 행하는 일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교회가 복을 받아 생동하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이후에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으로 땅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4. 복음이 각처로 퍼져나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리신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진리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에게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땅에 묻어둔 게으른 자에게는 책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모두가 성령 충만 능력 충만하여 땅 끝까지 증인되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유일한 길

행4:5-12

 

“어떤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Barclay)

“이는 이상적 교회사이다”(Julicher).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전기인데 비해 사도행전은 복음의 발전사요, 신약에 있어서 유일한 역사서이기도 하면서 일면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시작하여(2장) 성령이 다시 사도들에게 충만히 임하시고(4:23-31) 성령을 속이는 자를 징계하시고(5:1-11) 사마리아 인에게 임하시고(8:14-17) 빌립을 인도하시며(8:29) 고넬료 가정에 임하시고(10:44-48)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세우시고(13:1-4) 예루살렘 총회를 인도하시고(15:28) 바울을 들어 역사하시고((16:6-7) 에베소 제자들에게 임하시고(19:1-6) 바울의 장래를 예언하시고(20:22-23, 21:11) 교회의 감독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20:28).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로 인해 예수의 이름이 땅에서 근절될 줄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도 전파되는 것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진리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가 자기들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1-3, 5-7).

이는 그들이 사도들이 전하는 그 복음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등장하였던 세례 요한에게도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예수님께도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요1:22-25).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8:48-50).

양의 생명을 유린하는 이단자들은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들어가서 오신 메시아를 무시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은 너무도 당당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8-10).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하게 전하는 복음은 원수들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6.25 전쟁 때 있었던 어느 전도자의 간증입니다.

동족의 피로 강산을 물들일 때 어느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하루는 인민군이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과 같이 나타나 가슴에 총을 겨누며 “동무, 인민군이 이기는 것이 좋소? 괴뢰 국군이 이기는 것이 좋소?” 하고 함경도 사투리로 묻기에, “그건 왜 묻소?”하고 반문하니 “이곳 여론을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상부의 명령이요. 잔소리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여론이라면 간단하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 만세 하고 인민군이 들어오면 인민군 만세 하는 것이 이곳의 실정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7-20).

 

3.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은 멸시하였으나 그 이름은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을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4:6-10).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귀에 음악 같도다 예수 복된 예수

내 맘에 계신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눈에 눈물 씻기는 예수 복된 예수

주 예비하신 하늘 집 예수 복된 예수 날 구원하신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아 귀하다 그의 이름 갈보리 산의 어린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 복된 예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는 곳에는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비쳤습니다. 유일한 복음, 영원한 이 복음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이 복음이 온 천하에 충만할 때 땅위에 천국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아 멘

 

 

갑절의 복

욥42:10-17

 

욥기서가 주는 교훈은 애매하게 받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모든 사람은 선악 간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인생은 고난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하였습니다.

 

1. 갑절의 물질

서민에게는 지금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물질적으로는 대단한 복이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 전도단 김미진 간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오십 억의 빚을 지고 자살하려고 제주도에 갔는데 그곳에서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오십 억에 또 이자 오십 억을 합하여 백 억의 빚을 모두 갚고, 지금은 백% 자기 자본으로 회사를 세 개나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달라진 것은 돈을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요, 또 주인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모시고 자신은 청지기의 신분으로 충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경건한 사람으로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하지 않고 오직 복을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며 섬겼는데 환난 후에는 갑절로 복을 받아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욥42:12).

이렇게 거룩한 부자 곧 믿음의 부자들은 물질이 많을수록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들입니다.

 

2. 장수의 복

“수측다욕”이라 하여 오래 사는 것이 욕이 된다는 말입니다. 장수를 반드시 복의 기준으로 보기는 어려울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수명은 복이 됩니다.

유다 역사에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는, 다윗의 혈통을 죽인 후 유다를 육년 동안 다스리던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죽이고, 일곱 살 된 요아스를 왕 위에 앉힌 후 경건한 교훈으로 나라를 바로 다스리게 하므로 여호야다가 죽을 때까지 아달랴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왕하12:2). 이렇게 어린 요아스 왕을 교훈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던 여호야다가 백삼십 세에 죽고 난 후에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대하24:15-18) 하였습니다. 사무엘과 엘리야, 엘리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사람은 사는 것이 복이 됩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42:16-17).

 

3. 자녀의 복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3-5)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있다면 자식이라 생각합니다. 욥은 환난 전에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두었으나 마귀의 시험으로 잃고 난 후에 또 열 자녀를 얻었습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처럼 기업을 주었더라”(욥42:13-15).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값절로 주실 때에 자녀들을 그렇게 주지 않으신 것은 먼저 간 자녀들이 주님의 품에 있기 때문입니다.

 

4. 더 깊은 은혜의 복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욥은 여러 달을 그처럼 극한 시련에 처해있으면서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세 친구들과 변론할 때 누가 과연 위로자이며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할 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변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13:1-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욥31:35-36). 그런데 그렇게 당당하던 욥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4).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1-6). 여기서 마귀가 주던 그 심한 고통과 시련은 이제 모두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욥의 인내를 요하지 않으시고 값절의 복을 내려 욥을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이렇게 빛 앞에 설 때에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우리 모두 욥과 같이 인내로 승리하여 값절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경고

말3:6-12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반역한 그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끊어진 것을 보면 이로 인해 구약이 완성된 것을 뜻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라기서를 통해 각자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 제사를 경시한 죄

성도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는 정성으로 주님께 올리는 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달되는 예배를 드림으로 구원의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되지만 의식적인 경우일 때는 그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엘리야의 제단에는 불이 임했으나 바알의 제단에는 불이 없었습니다. 가인이 믿음에 문제가 있었다면 바알신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은 대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달되는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 유일하신 참 신을 바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 때 불레셋에게 참패를 당하고 또 법궤를 빼앗겼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후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2-17).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십시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3:14).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은 죄

피조물로서 가장 큰 임무는 조물주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나 인간은 배역하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6:5-7).

우리는 또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탄식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런 자들에게 내리는 것은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8, 21-23) 하였습니다.

진정한 복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망령된 일을 버리고 내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 한 죄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자기의 공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성물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도둑으로서 하나님을 등지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7-9).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그런데 성경에는 시험하여 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다시 말씀드리면 성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그것은 반드시 성별시켜 씨종자로 삼아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물을 구별시키려고 하여도 구별시킬 수 없는 환경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죄에 매여 종살이 할 때요, 소망이 없는 어둠속에 떨어졌을 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니까?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와서 무너진 성벽을 건축한 후 더 중요한 일을 하였는데 그것이 십일조이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므로 그 백성이 복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느12:44-47).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13:14). 우리 모두 성물을 구별하여 느헤미야와 같이 생명록에 올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기도의 자원

마21:18-22

 

성도에게 주신 복 중에 기도의 자원보다 더 큰 자원은 없습니다. 기도는 또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는 영적인 창구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대화 창구가 막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과 항상 기도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1. 기도의 자원을 활용해야 됩니다.

아무리 부존자원이 넉넉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개발하기까지는 재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버려진 나무토막을 조각품으로 만들어 수출을 하고, 유대인들은 흠 있는 다이아몬드를 조각하여 더 값진 상품을 만들고,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개발한 상품을 사들여 새롭게 개조하여 오리지널보다 더 편리한 상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와 우주세계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입니다. 우리도 에디슨과 같은 과학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개발할 수 있는 지각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하스 왕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사7:11-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하였습니다.

역사에 보면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모든 인물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크게 구하고 또 계속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책망을 들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도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크게 쓰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1-8) 하셨습니다.

 

2. 기도의 자세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막다른 골목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중언부언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한 맺힌 기도를 들으시고 강청하는 기도를 들으시며 사생결단의 기도를 들으시고 속히 응답해주십니다. 이 기도가 한나의 기도요, 소경 바디매오의 간구요,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간구하는 기도의 공통점은 묵상이 아닌 부르짖어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린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하셨습니다.

 

3. 기도의 내용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발생하는 문제는 한둘이 아닙니다. 어쩌면 사람의 숫자만큼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으며, 사람의 수명만큼 또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일은 우리가 언제든지 또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1서3: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1) 복음 선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영토를 위한 전쟁이지만 우리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전도에 있습니다. 복음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감사한 일은 보혜사 성령이 충성된 증인을 능력입혀 들어쓰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스데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0, 15) 하였습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0-4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3) 사유의 은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문제를 방치하는 행위입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죄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은 죄를 지적 받았을 때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1-2).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13). 또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원을 방치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의 자원을 백% 가동하여 오늘도 기적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36:1-26

 

빛의 강도에 따라서 사물이 밝아지듯 하나님의 은혜는 심도가 깊어질수록 감사의 향기가 진해집니다. 감사의 절기를 기해 과연 하나님께 감사할 은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를 노트에 기록하여 마음 깊이 새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빛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마귀의 노예로서 불안과 공포에 쫓기며 살다가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은 아들 집에 갔다가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면 자식들의 앞길이 막힌다.”는 중의 말을 듣고 두려워서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1.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사자굴과 풀무불 속에 들어갈지라도 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크게 믿으면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작게 믿으면 작은 역사에 그치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도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지옥은 감사도 찬양도 없고 영원토록 불못의 고통에서 비명을 지르는 곳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아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그러나 천국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세세에 하나님께 찬양하는 곳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8-1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3).

 

2.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국제법에서 특허권은 기본으로 오 년을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진국 일수록 특허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자의 두뇌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비길 수 없는 것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4-36).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욥38:2-6).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4-9).

 

3. 죄와 사망의 멍에에서 속량하신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앞길에 어떤 장애가 있습니까? 도우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더 큰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5).

만일 우리가 바로의 후예였다면 ‘과연 그 조상들을 심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받은 빛의 자녀들이고 애굽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려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3-5).

 

4. 온갖 좋은 것을 후히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미국 하와이에 있는 “하가이 인스티튜트”는 제 3세계 목회자 양성기관인데 설립경위를 보면 죤 하가이 박사가 25세 때 죽은 정신박약아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합니다. 감사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공해 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롬8:32).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2-5).

자족과 감사의 은혜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바울은 일생 찌르는 가시를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순교할 때까지 고난과 박해의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쁨 충만, 감사 충만, 찬양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3-26). 아 멘

 

 

다니엘의 결심

단1:8-16

 

다니엘이 젊은 나이에 포로로 잡혀간 후 느부갓네살 왕에게 발탁된 것을 보면 그의 총명이 남달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단1:3-4).

 

1. 채식만 먹기로 결심한 다니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1:8).

학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육식은 먼저 우상 앞에 드렸던 제물이었기에 그것을 먹지 않으므로 자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달리 신약시대에 와서는 식물은 구원과 무관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27).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3-5).

중요한 것은 먹든지 먹지않든지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식물과 건강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단1:10).

환관장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채식만 고집하다가 건강을 잃으면 자기의 직위가 위태로우리라 두려워했는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채식만으로도 건강이 더 좋아졌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단1:15-16). 사실 암세포를 잡아먹는 T임파구는 투약에 의해서가 아닌 사랑과 희망과 감사를 하는 사람에게서 생성된다고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3. 식물과 신앙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1-3).

체질적으로 무슨 음식이든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가려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음식은 우리가 구원 얻는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먹었다고 자랑할 것 없고 또 영양가가 낮은 음식을 먹었다고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14:6).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15:1-2) 하였을 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0).

 

4. 다니엘의 명철

드디어 다니엘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하루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크게 번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꿈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과 같이 한 이불 밑에서 잠을 자도 꿈은 각각인데 본인이 말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꾼 꿈을 알 수가 없지요. 하루는 느부갓네살 왕이 장래에 대해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꿈에 금 신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 하나님께서 보여 주었어도 깨닫는 지각이 없으면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

2) 하나님의 사람을 등장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누명을 쓰고 보디발의 감옥에 있던 요셉을 누가 출옥시켜 총리대신이 되게 했습니까? 바로가 꾼 꿈입니다. 바로 역시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은 아무도 해몽할 수 없었는데 요셉이 그 꿈을 해몽하였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1-35).

이 계시는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종말적인 심판과 함께 영원한 새 나라를 이룩할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는 다른 모양으로 두 번이나 계시해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금 신상 곧 우상의 나라요 주님의 나라는 심판의 뜬 돌의 나라요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나라입니다.

불원간 닥칠 심판의 날에 모든 물질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0-13). 아 멘

 

 

땅에 떨어지지 않는 말

삼상3:3:19-20

 

길거리에서 다이아반지를 발견했다면 그냥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물은 외면하지요. 그것이 보물과 오물의 차이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19절).

“소인은 말이 많아도 쓸 말이 없고 군자는 말이 적어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무엘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서원으로 말미암아 젖을 떼자 부모를 떠나 하나님의 집에서 성장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량한 엘리의 아들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물을 먹으면서도 극히 불량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실을 보십시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2-17).

그런데 사무엘은 거기에 오염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잘 섬겼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2. 충실한 제사장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2:35).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세우실 때도 동일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행13:22).

영원하고 진실한 복이 무엇일까요? 에덴에서 선악과로 사람을 타락시킨 마귀는 광야에서 주님을 또 시험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3-9).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가룟 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팔았던 그 돈으로 영화를 누린 것이 아니라 자살로 끝을 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런 흉악범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도 어처구니없지요. 그 돈으로 외국에 나가서 멋지게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마귀의 올무이고 거기에 빠져들면 마귀는 본색을 드러내어 자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사무엘과 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영원한 존귀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3. 기도의 사명 자

사무엘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또 그는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후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3-24).

사무엘이 올리는 기도는 나라를 지키는 간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삼상7:13-17).

사무엘의 경건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의 집 나마나욧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보냈던 사람이 세 번이나 거기서 꺼꾸러졌고 사울도 불을 받아 하루 종일 벌거벗고 예언하여 속담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의 기도와 경건, 믿음이 오늘 우리의 기도와 경건, 믿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랑

마5:43-48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수명이 길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요한은 주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21:20-23).

요한은 설교를 할 때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말씀을 반복하므로 “그 설교 어제도 하셨는데요” 하였더니 “그래도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4:7-8).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6일 창조 사역이 계속되는 동안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생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랑의 속성은 차이는 있지만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사랑에 있고 고독과 슬픔도 사랑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사랑할 때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또 “사랑은 인생의 열병이요 마음에 중환이라”고 하였고,

몽테뉴는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 안가 싫증날 때가 온다. 그러나 선량한 여자는 결코 싫증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 사랑의 계명

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서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둘째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5-38) 하셨습니다.

기억할 것은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킬 때 기약된 복을 받고 범할 때는 벌을 받게 됩니다(신28장).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2:2-4).

2) 사람에 대한 사랑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9-40).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1)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2)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3)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4)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계명을 알면서도 실천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육이 잘못되어서가 아니요, 신앙 연조가 짧아서도 아니라 육신의 생각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7:15).

그러므로 옛사람 곧 육의 사람을 죽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다시 살 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둘째 계명을 실천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계명을 실천할 때 오는 복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35).

계명 중의 으뜸이 사랑이요, 첫째가 사랑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아 멘

 

 

바울의 감사

롬1:8-10

 

바울 서신 중에 로마서의 비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로마서와 같은 교리서신이 없다면 신비주의 이단에 대해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와 진리의 종교입니다. 유대인이 표적을 구할 때에 예수님은 다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병이어라는 기적의 양식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생의 양식 곧 주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일로 물러가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7-69).

 

1. 구원받은 성도로 인한 감사

지금 지구상에는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탄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6:5-7).

과연 진실한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감사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말은 구원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다는 것이요,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들어났다는 말씀입니다.

 

2. 믿음의 열매로 인한 감사

로마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답게 성장하는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1:8). 꿀이 있어야 봉접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는 이 은혜의 꿀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하였습니다.

사실 로마에는 누가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해 성령을 받은 이달리야 부대 백부장 고넬료라는 설도 있습니다(행10:1-48). 그런데 로마에 들어간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령의 불길은 마게도냐 교회도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6-8).

이 불길이 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이 땅을 태우고 세계를 태워야 합니다.

 

3. 기도로 감사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9-10).

주의 종은 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그 기도가 성도에게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기도이지만 사람에 따라 감사하며 올리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탄식하며 올리는 기도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거울 같아서 서로 대할 때 비춰지는 것입니다. 내가 우울하면 상대방에 불안을 주고 내가 기쁠 때는 상대방의 마음에도 밝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4-6).

식사를 하지 않아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으나 탄식의 눈물을 흘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4. 신령한 은사를 나누기 위한 감사

옛날에는 산모들이 모유로만 아기를 키웠으므로 논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모유가 돌아오면 아이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가슴에는 도의 젖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0-12).

산모는 젖 먹는 아이를 보고 행복을 느낀다면 전도자의 행복은 도의 젖을 사모하는 성도들을 대할 때입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 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7-11).

우리도 바울 같이 이 기쁨과 감사의 기도로 영원한 존귀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서책에서 발견한 예언

단 9:1-2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 3년, 즉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원년에 일차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 바사가 등장하기까지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과연 바벨론으로 내려간 자들은 살았고 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의 꿈

다니엘이 포로의 몸으로 바벨론에 있을 때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계시였기에 평범하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단2:27-30).

2)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2:46-49).

3) 역사의 운행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단4:17).

 

2. 다니엘의 경건 생활

다니엘은 70년을 하루같이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의 그룹 채 의숭 회장을 아십니까? 지금은 그분이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46년 동안 새벽 예배를 빼지 않고 또 하루에 11번을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분은 자기 당대 “백 곳에 교회를 세우게 해주옵소서.” 기도하여 2014년이면 백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척한 교회에서 또 전도하여 지금은 오백 교회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나는 백 곳에 교회를 세웠지만 너희들은 천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남은 소원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리오 왕 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허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다니엘을 죽이려고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30일 동안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결과를 모른다면 다니엘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고 30일을 넘기면 하나님께서 나무라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면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아끼던 다리오 왕은 사자 굴을 막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고 살려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할렐루야!

 

3. 서책에서 발견한 예언

다니엘서나 예레미야서에 보면 년대 순으로 되어있지 않는데 학자들의 견해로는 사건 중심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실 인쇄술이 오늘 같지 않아서 그 당시 두루마리에 쓰여진 성경을 보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거기다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므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그두루마리 예언을 불에 던져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렘36:21-23).

중요한 것은 왕이 두루마리를 불태웠어도 진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죄가 더 무거워졌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면 재앙이 사라질까요? 그러지 않습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도 진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렘36:32).

다니엘이 말씀을 상고하는 중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두루마리를 귀중하게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1-2).

만일 그 때에 다니엘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럴지라도 당연히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모든 것을 의미 없이 넘겨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신실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4. 다니엘의 회개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9:3-4).

예루살렘 성벽이 황폐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역시 평생을 높은 자리에서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자로서 먼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9:5-19의 기도에 ‘우리’라는 대명사를 32회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눈물의 기도 다니엘과 느헤미야의 회개의 기도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전도자의 발길

롬1:13-17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현대인들을 편리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한 도구로 출발한 미디어가 이제는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를 켜고 그 안에 들어갑니다. 또 일어나자마자 신문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로 감정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인터넷 채팅이나 게임에 빠진 배우자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한 번 안 본다고 세상이 정지되거나 국정이 마비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인터넷 접속을 잠시 미룬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집에 놔두고 와도 벨이 울리지 않아도 사업이 망하거나 친구와 멀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괜히 혼자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어딘지? 또 무엇을 향해 그처럼 분주하게 달리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바울도 뛰었습니다.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던 것은 복음이 너무도 귀했기 때문이요,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1. 전도자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과 같이 로마는 국제적인 수도로서 수많은 발길이 로마로 향했으나 전도자 바울에게는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9-10).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1:13).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에게 길이 막혔다면 무슨 이유일까요?

1) 마귀가 가로막는 경우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7-18).

사탄의 무기는 다양합니다. 모진 박해와 고난으로 오는 시험이요, 또 화려한 유혹으로 빠져들게 하는 술책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막는 경우입니다.

무엇보다 깨닫는 지각이 중요하고, 또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6-10).

그런데 때가 이르자 바울에게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이는 백마 타고 개선장군으로 입성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 박해를 통해서요, 유라굴로 태풍을 통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3-24).

주님께서 이렇게 귀하게 들어 쓰시는 일꾼에게 이렇게 환난과 풍파가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2. 복음에 빚진 자

일반적으로 채무자는 부채가 있는 동안은 채권자의 얼굴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은혜의 빚을 지고 있습니까?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요나같이 피하려 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8-11).

바울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해 복음의 빚진 자라 하였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4-15).

바울은 이 빚을 갚기까지는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뛰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저에게 “목사님, 지난밤에 제가 목사님께 얻어맞았어요.” 하는데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은 칭찬을 받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장애를 극복하고 힘차게 전진하여 최후의 승리자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타락의 역사

창3:1-7

 

타락의 역사는 창조의 신비와 함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3:1) 하였습니다. 어떻게 뱀의 지혜가 인간보다 월등하였는지 또 뱀이 어떻게 마귀가 되었는지, 이 마귀가 유대 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나 세 번이나 시험한 일,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고, 베드로에게 들어갔던 일, 그리고 오늘도 택한 자들을 시험하는 일 등 모두가 궁금해지는 문제입니다.

 

1. 에덴동산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으로 살게 하셨는데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유토피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아담에게 참 만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하와를 창조하여 아담에게로 데리고 왔을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2-25).

갈빗대를 잃고도 행복을 느끼는 것이 남자입니다. 최초의 가정은 이렇게 만들어 졌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1) 부부는 한 몸이라는 것이요,

2)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요, 또 벌거벗고도 수치가 아닌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틈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다투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와가 아담 없이 뱀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선악과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하나님의 엄명이 있었는데도 아담과 의논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며, 또 뱀의 유혹에 대해 과연 눈이 밝아지는지 그 사실 여부를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2. 달리 보여 진 선악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 마귀가 오늘도 이 진리에 도전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다윈이 말한 진화론이 전 세계에서 교과서로 교육하고 있는데, 이것이 창조의 역사에 도전하는 마귀의 계략입니다. 마귀의 술책을 보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나님께서 언제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다만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외의 모든 실과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화를 끌기 위한 마귀의 궤휼이었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2-3).

이렇게 마귀는 거짓을 진리로, 진리를 거짓으로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술책에 빠져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물러갈 것입니다(약4:7).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뱀의 말에도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그렇다고 뱀의 말이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순종하고 지킬 때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뱀은 최초로 인간을 속인 거짓말쟁이가 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하와가 뱀과 놀아나는 그 시간에 선악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십시오. 물론 변한 것은 선악과가 아니라 하와의 마음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4-6).

사막에서 개미귀신이 개미가 걸려들기를 바라고 함정을 만들듯이 마귀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혜자의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9:16-18) 하였습니다.

 

3. 에덴에서 축출된 인생

1)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진 것은 마귀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그런데 마귀의 말에 두 가지의 거짓이 있습니다.

1)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한 것이요,

2)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진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장해주시지만 불순종하고 거짓에 빠져들면 마귀는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살로 생을 마친 가룟유다를 기억하십시오.

또 하나님과 같아진 것이 아니라 심판의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8-10).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무엇이 깨뜨렸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의 죄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4:18).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과연 무화과 잎으로 수치를 가릴 수가 있으며 또 그들이 여호와의 눈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을까요? 결국 금단의 선악과를 먹은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어서 숨을 곳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이렇게 선악과로 축출되어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기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아 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5:20-21

 

성경은 역설적인 진리의 교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1. 공의의 법령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기억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죄 가운데 있었으나 죄를 죄인 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생을 죽인 가인이 번민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또 세상 법은 공포되는 날부터 효력이 발생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든 법은 불완전한데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던 자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법을 만들었을 때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고 법을 만든 줄 알면서도 여전히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 다리오 왕에게 한 말입니다.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단6:15).

그런데 그 법이 그렇게 되었던가요? 하루도 넘기지 못하였고 그들이 도리어 사자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민주 선진화를 이룬 미국은 건국 이후 오늘까지 그 법을 수호하는데, 우리나라는 해방되고 오늘까지 법 개정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도 국회선진화 법으로 인해 도리어 국정이 마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입니다.

“지구상에 어떤 이념도 개혁이 불필요한 완전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합니다.

 

2. 율법의 임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여기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죄를 반복하는 행위가 아닌 죄를 죄로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동굴 속에 있는 곤충이나 물고기들은 눈이 퇴색되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이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살았으나 율법으로 그 죄가 밝혀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9-13).

 

3. 죄 많은 곳에 임하는 더 큰 은혜

죄 많은 곳에 임하는 더 큰 은혜는 더 큰 속전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라면 오십 데나리온만 갚아주면 되지만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면 사백오십 데나리온으로는 완전 탕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지은 죄가 세상에서 비길 수 없는 큰 것이었기에 더 많이 탕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결코 자기를 과시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도리어 더 많이 감사해야 할 성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면서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0-21).

물질로 빚진 자는 물질로 갚아야 하고 은혜로 빚진 자는 은혜로 갚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식이 없어 고아를 입양하였는데 그 아이가 소아마비로 장애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죄가 많아서 아이가 이렇게 되었으니 더 많은 아이들을 돌보아야하지요” 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4.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혜

우리가 더 큰 은혜를 사모할지라도 은혜를 더 받기 위해 죄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탕자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탕자와 같이 방탕하다가 돼지 쥐엄열매를 먹을 정도로 비참하게 된 모습을 부러워할 자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탕자는 그 수치스러웠던 삶을 통해 아버지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으나 장자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탕자는 과거가 불행했던 것만큼 오늘의 행복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가 더한 곳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진정한 행복

행복을 좇고 있는 한

너는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비록 사랑하는 것 모두 네가 가졌을지라도

 

잃어버린 것들을 애석해 하고

목적에 집착하여 안달하는 한

결코 평안의 참 뜻을 모르리라.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적도, 아집도 잊어버린 채

행복 따위를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워져

네 영혼 편히 쉴 수 있으리라”(헤르만 헤세) 아 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1-7

 

에덴에서 축출된 아담의 가정에는 자녀를 얻은 기쁨이 있었는가 하면 형이 동생을 죽이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축출된 일로 생명과를 먹을 수 없었으나 생육과 번영,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게 하신 복은 거두지 아니한 고로 여전히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두 아들의 이름

이름은 중요합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든지 일생토록 그 이름으로 살게 될 뿐 아니라 사후에도 주님께서 이름을 따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1-3).

1) 가인은 소유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하고 그의 이름을 가인이라 하였습니다. 하와가 첫 번째 산고를 겪고 얻은 아들인 고로 무엇보다 큰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2) 아벨은 허무, 숨김, 수증기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나무에 다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된 일로 한없이 큰 무상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아담이 선지자의 안목으로 아벨의 운명을 알고 지은 이름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제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4:2-5).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말의 의미는 ‘마지막 날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일 년의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 금식 일을 지키는 년 말, 또는 한 주일의 마지막 일곱째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담의 가정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의식이 처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그 이유를 성경에는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형제가 함께 제사를 올렸는데 형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동생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물에 문제가 있었다면 레위기서에 땅의 소산으로는 제물을 드릴 수 없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언급된 것은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드렸다는 일반 소산과 첫 새끼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제물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에 그치는 제사와 신령과 진정의 제사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러므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 때문에 자기의 제물이 상달되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결국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여 죽였습니다. 기억할 것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3. 가인에게 내린 경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4:6).

하나님의 음성은 가인이 살인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도 도리어 변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이것이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의 양심을 보십시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은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26:20-25).

이것이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마귀에게 화인을 맞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4. 죄의 소원

어둠 속에 사는 인간에게는 죄의 유혹 곧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소원은 바울에게도 있었는데 이것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5, 17-20).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죄가 문에 엎드려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출입하는 문에서 죄가 기회를 틈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은 먹이감이 가까이 올 때까지 목을 움크리고 있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번배 같이 물어버립니다. 마귀도 이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죄의 소원은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죄의 노예로 살지 말고 죄를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진노 중에서도 베푸시는 긍휼

창4:8-15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동묘지는 적막강산입니다. 지금은 DNA를 통해서 죽은 사람의 신원도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죽은 자를 증인으로 세울 수는 없는 것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는 사후에도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9-10).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9-11).

 

1. 죄의 보응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1-12).

선악과로 에덴에서 축출될 때 이미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가중되는 보응으로 안식할 곳도 없이 유리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넓어도 범죄한 인생에게는 안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잠24: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57:21).

 

2. 가인의 간구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

죄의 보응이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다면 쉽게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가인이 받는 벌이 아무리 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구할 수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는 그때는 회개할 기회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은 “가인의 아내는 누구며 그가 유리할 때에 누가 있었다는 말인가?” 하는 말을 합니다. 성경은 인류 전체의 족보 책이 아닙니다. 노아 이전에는 천수를 누렸는데 모두를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레26:36).

 

3.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이 표에 대해서는 몸에 있는 어떤 흔적을 말하기도 하고 기드온에게 보여준 어떤 표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울이 지닌 그리스도의 흔적과 같은 것이 아닌 집행유예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집행유예는 실형보다는 가벼운 것이지만 일정기간, 또는 활동범위도 정해질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을 비방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자 솔로몬 왕이 죽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왕상2:4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그러므로 회개할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사유의 은혜와 영생의 보증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은혜 입은 노아

창6:1-8

 

노아는 아담에 이어 제 이의 조상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연대를 계산해 보면 노아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오십팔 세까지 생존했습니다. 구약의 연대는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70인 역과 사마리아 사본에는 B.C 5411년으로 되어있고, 맛소라 사본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와 있는 연대로는 아담이 에덴에서 축출된 이후 BC2006년에 노아가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때가 아브라함의 58년입니다. 또한 노아 이전에도 수금과 퉁소 등 관현악기가 있었고(창4:21) 동, 철로 기계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창4:22).

그런데 노아 때의 물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는 일로 인해서였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1-2).

이 문제를 어떤 사람은 천사와 사람, 또는 아담의 혈통과 관계없는 다른 자손들이 타락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을 영적인 상태로 구별하는 것같이 그 당시에도 아벨 대신 태어난 셋을 주신 하나님께서 경건한 셋의 후손들과 가인의 후손들, 즉 믿음의 후손들과 혈육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 육체로 전락된 인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6: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일’ 이것은 세속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호흡이 있는 모든 생물에게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과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기적이 많았던 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과정입니다. 그들은 애굽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를 육지같이 통과하고, 광야에서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마시고, 또 모세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께 올라가서 율법을 받고, 또 낮에는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진영을 지켜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33:3).

모세의 기도로 심판은 막았지만 징계가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2. 마지막 기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백이십 년’ 이는 물로 심판을 내리기 전에 허락된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홍수 후의 수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홍수로 심판 받을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기회요, 또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허락하신 마지막 기회를 살려 노아와 같이 방주를 만든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3:20).

은혜 받을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었고, 소경 바디매오는 밝은 천지를 보았고,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임을 알고 믿음의 방주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3. 새로 시작되는 역사

선악과를 범한 일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는데 지금도 만물이 탄식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파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9-22).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물로 심판을 내리실 때 씨종자를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창7:7-9).

멸망 받을 인간은 방주를 외면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씨종자를 구별하셨습니다. 노아가 한 일은 방주로 오는 짐승들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아 멘

 

 

노아의 제사

창8:20-22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홍수가 시작되어 사십일 후에 온 지면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12).

하늘의 창과 윗물에 대해서 Henry Mprris는 “물 분자가 대류권 지상 10-18km 위에 광활한 수증기 층을 구성하고 있으며 더 높이 성층권에까지 확산되어 있다.”고 하였고, Walter Byzley는 “이 수증기 층은 200-300마일까지 펼쳐져 있으며 그 수증기 층을 지구 위에 있는 바닷물과 같은 밀도로 압축한다면 5마일 두께의 물이 될 만한 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였는데 이는 지구의 대 지각 변동으로 땅이 물속에 잠길 때 솟아오르는 현상입니다. 땅이 물에서 나왔다는 말씀이 성경에 두 번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들어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9).

이것이 셋째날 창조입니다. 이 날에는 아직 짐승과 물고기를 창조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두 번째 육지를 바다에 덮게 하셨는데 대 지각 변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에 있는 그랜드캐년에 있는 지층을 보면 성경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는데 창세기 일 장 셋째 날에 만들어진 지층에는 물고기 화석이 없는데 노아 홍수때 만들어진 지층에는 물고기 화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흔적입니다.

 

1. 권고하시는 하나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3-4).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을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는 지역적으로 일어난 허리케인이나 쓰나미 태풍이 아닙니다. 쓰나미 태풍이 일어나고 일 년이 지난 후 미국 LA 앞 태평양 바다에 배가 한 척이 떠 있었는데 그 배는 쓰나미 때 일본에서 떠밀려 왔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천지가 뒤집혔는데 노아의 방주는 키도 닻줄도 없었는데 무엇이 방주를 붙들어 주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안전키요, 소망의 닻줄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6:19).

드디어 노아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었고 육지에서 물이 걷히고 노아가 다시 땅을 딛게 된 것은 1년 11일이 지난 노아 601년 2월 27일이었습니다(창8:14).

사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양식을 준비하였으나 그 많은 동물 가족과 함께 1년을 견뎠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서울 대공원 동물가족 398종 4천두의 일 년 사료가 14억 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창8: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안에 있는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때에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담당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2. 노아의 제사

일 년 만에 첫발을 땅 위에 내려놓은 노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말레지아 휴양지에서 일어났던 쓰나미를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반겨주는 친지나 이웃도 없고 인적도 찾을 수 없는 황폐한 모습이었습니다. 노아는 제일 먼저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해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8:20-21).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노아가 올린 제사는 믿음의 제사요,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12).

‘그 향기를 받으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는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점을 중요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경성하게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별한 일이 있어 성도들에게 헌금할 기회를 주었더니 그 일로 시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성도가 꿈을 꾸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네가 내게 무엇을 간구한 일이 있는가?”

“예, 제가 많이 간구했고 또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너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할 때, 또 너의 건강과 사업의 번영과 가족의 화평과 앞길의 형통을 위해 간구할 때 응답을 받았는가?”

“예, 지난 날 저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셨고 어려울 때마다 저의 목숨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나도 방침을 바꿔야 되겠네, 이제부터는 네가 다시 나에게 아무 것도 간구하지 않기로 하고 나도 역시 너에게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겠네” 하고 떠나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서 깨어난 그 사람은 크게 회개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희생하는 일에 더욱 앞장을 섰다고 합니다.

 

3. 어려서부터 악한 인생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는 홍수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의 근본은 달라진 것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마엘이 나고 이삭에게서는 에서가 난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요3:1-5). 또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만 죄의 소원이 있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의 정욕도 살아있으므로 우리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지 않도록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무엇에 매여 종살이 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은혜를 받으므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붓는 복된 손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눅7:37-47).

 

4. 무지개 언약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사실 무지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두고 언약을 세우기 전에는 그대로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지만 언약을 하신 후의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 때와 같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표증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흘리신 보혈의 언약을 믿는 자에게 대속의 은총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

고전12:12-26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성도들 간에 사분오열 분쟁이 있었는가 하면 불륜의 문계로 큰 시험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상교회는 항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전도하는 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경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방패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모세의 기도는 여호수아 군대를 승리하게 하였고, 사무엘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이방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혼인의 문제와 우상 제물의 문제, 특히 성찬에 관한 문제를 깊이 있게 밝히고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와 헌금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신앙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다루었습니다.

 

1. 인간의 형상

만물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시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이러고 보면 사람의 인체 구조와 기능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라 합니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 가서 육지와 동종의 동물 중에 변종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진화론을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변화일 뿐이고 도리어 근친관계로 퇴화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물들 중에는 농사짓는 것도 개미도 있고 단체로 살아가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리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동물세계에 종교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영혼이 없고, 내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2. 몸에 있는 여러 지체

사람을 단순히 몸과 지체의 관계를 논하는 것뿐이라면 다른 피조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1) 몸에 붙어있어야 하는 지체

지체가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2) 공평을 유지하시는 하나님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몸의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은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12:20-23).

중요한 것은 각 지체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암 세포는 자기만 생각하는데 건강한 세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3. 은사의 통일성

모든 은사는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8-11).

다만 나누어 주신 달란트에 차이가 있다면 재능대로 배분 된 것이요,(마25:15) 능력에 차이가 있다면 믿음의 분량에 따른 것입니다(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이는 지체의 위치와 기능에 따라 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통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고 그 영광을 높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기드온 삼백 명 중에는 두려움에 떠는 자가 없었고, 다윗의 군대에는 약졸이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어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오직 믿음으로

롬1:16-17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빗텐베르그 대문에 걸고 교황에게 항거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처음부터 잘못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도 요원의 불길같이 복음이 퍼져나갔습니다.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였고, 불타는 사명이 있었기에 순교를 각오하고 주를 섬기며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지금도 터키 갑바도기아에 가면 성도들이 박해 속에 몸을 숨겼던 곳이 있는데 지하 18층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박해 속에서 진리를 사수하던 교회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주후 312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또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395년)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위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이것은 고레스가 천하에 있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한 일보다 더 큰 사건입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햐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1:2-3).

고레스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였다면 콘스탄틴 대제 데오도시우스 역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박해가 없어지고 로마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할지라도 로마는 여전히 세속의 나라일 뿐 천국이 될 수 없고 또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여전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1-5).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멸망 받을 자들 즉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는 다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육의 사람을 죽이고 영의 사람으로 사는 진리입니다.

 

1. 오직 은혜(Sola Gratia)

우리가 사는 동안 은혜 없이 이렇게 잘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남달리 자랑할 것이 많은 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은 받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할것이라”고(눅12:48) 하셨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2-3).

우리는 순간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발이 낡아 불평을 하다가 거리에서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 곧 구원이 은혜요, 축복이 은혜요, 건강이 은혜입니다. 심지어 찌르는 가시도 나를 낮추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임(고후12:9)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어떠한 공적도 믿음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루터는 심지어 야고보 장로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을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지적한 것은 유대인의 의식화 된 믿음 곧 죽은 믿음을 경계하는 것이지 행위를 믿음보다 앞세운 것이 아닙니다.

1) 모든 창조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믿음의 위력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것이 믿음의 역사요,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중천에 머물게 한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2) 그리스도의 대속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그것을 보는 자들은 다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않고 그대로 죽어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세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옷깃만 스쳐도 기적이 일어났고, 또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골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0-21).

 

3. 오직 성경(Sola Scripture)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이것이 샤마니즘과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전통이나 의식도 진리와 동등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십계명 중에서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당마다 마리아 우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전통의 권위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하고 한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생활에 정확무오한 법칙임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널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지금도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소리를 들으시고 참 생명과 능력을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이 나의 증인

롬1:8-10

 

자신의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는 과연 진실한 사람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창6:8).

온전하고 정직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동방의 의인 욥도 마찬가지입니다(욥1:1).

 

1. 감사하는 전도자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들어간 믿음이 온 세상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이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여기 대해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9-10).

이처럼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섬기는 전도자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으면 출세하고 복을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섬기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4-27).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같이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성자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분의 일화를 보면 소록도에서 숨져가는 환자들의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에 옮겼습니다. 바울은 어디로 가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8-9).

 

3. 기도하는 전도자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전도자에게 기도란 마귀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도를 쉬지 않았고 또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바울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자기는 무익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2:21).

주님의 성역 삼 년 동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5-29). 기도는 마스터키와 같이 만능입니다. 무슨 문제를 두고도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1) 회개하는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죄를 지으면 마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8:34-35).

그러므로 회개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가로막힌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

상달되는 기도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소식을 접하고 넉 달 동안을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였고(느1:4-11), 다니엘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칠십 년 만에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그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단9:3-19).

2) 강청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8, 11-13).

우리는 가나안 여인이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어떻게 건져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7-28).

3) 인내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십팔 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인내의 기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6-8).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병사가 무장을 풀고 싸울 수가 없다면 전도자도 기도 없이는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 있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우리도 기도로 무장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아브람의 축복

창12:1-4

 

자연의 혜택을 동일하게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고 그 앞에 영광 돌리는 사람은 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지만 은혜를 욕으로 바꾸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1.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이는 아브람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

이때는 아브람이 메소보다미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행7:2-3).

그 때 아브람과 함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11:31).

아브람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해야 할 이유에 관해서는 그 곳에서 그들이 우상을 만드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을 애굽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업으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가나안에 비해 애굽이나 메소보다미아는 에덴동산을 방불할 정도로 기름지고 아름답고 광대한 땅입니다. 그런데 작고 척박한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하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영원한 본향 천국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고 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눈을 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음 중심 곧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지면 하늘의 영광을 보고 듣게 될 줄 믿습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장엄한 일출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다가 왔는데 런던에서 내려온 상인이었다.

동쪽 하늘을 물들이며 수평선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햇살이 잔물결에 부딪혀 수없이 갈라진다.

블레이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저는 마치 금조각 같군요. 모두가 금화로 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요?”

“내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그리고 철석거리는 저 파도소리는 무수한 천사들이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라고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2. 기약된 복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오늘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기독교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도 정경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욕심을 부린다고 받을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오직 선택의 은혜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기억하십시오. 모든 복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성군 다윗의 고백입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이 신분은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복이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보호자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시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또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

2)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명예는 축복과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독재 폭군의 수명이 짧은 것은 역사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사람이 복을 받아야 명예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약된 복은 아브람에게만 국한된 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6-9).

이제 우리도 이 복을 받아 열국 중에 존귀한 성민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아브람과 롯의 이별

창13:5-18

 

롯은 하란의 아들로, 하란은 그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고 롯은 아브람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자기 아내 사래에게 믿음의 조상답지 않는 약속을 합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12:11-13).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를 팔겠다는 생각을 옳은 처사라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래의 나이가 있는데 여전히 그 미모가 그처럼 뛰어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보다 사래의 현숙함이 그를 존귀하게 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전적으로 복종하고 따랐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니라”(벧전3:5-6).

 

2. 바로를 속인 아브람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대신들이 바로 앞에서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바로가 사래를 취한 일로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의 조상으로서 신앙의 자존심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14:21-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책하지 않으시고 사래의 일로 바로에게 재앙을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12:17).

잘못은 아브람에게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택함 받은 사람의 특권입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43:3-4).

 

3. 목자끼리의 다툼

아브람은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고, 세월이 흘러 아브람과 조카 롯도 양떼가 많아지자 목자끼리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물질은 작아도 문제지만 많아도 문제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죽을 때에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명예를 얻기보다는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일로인해 형제끼리 법정 소송을 벌리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도 더 탐욕을 부리는 것을 서민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음부에 떨어진 어리석은 부자보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복 받은 사람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아브람의 제안

1) 선택의 우선권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9).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입니다. 이렇게 선택의 우선권 즉 기득권을 양보하면 시비할 문제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아브람처럼 위에 있는 사람, 복 받은 사람이 배워야 할 일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화목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3-15).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2) 롯의 선택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0-12).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보기에 유대 광야에 비해 소돔과 고모라는 물이 넉넉하고 땅이 비옥하여 가축과 사람이 살기에 너무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는 낙원 같았으나 죄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롯이 알지 못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삼가하고 거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5.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이 복은 아브람과 같은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은 롯과 이스마엘, 에서와 함께 이 복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육에 속한 자들은 영에 속한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6. 단을 쌓은 아브람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13:18).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땅 위의 천국은 물질문명을 꽃 피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적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닌이다(시4:7).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아브람이 친족 롯과 결별한 후 이 복을 누림과 같이 우리도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때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영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충직한 종의 도리

창24:1-7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해서는 알고 있으나 아브라함의 종은 누구인지, 그 행적은 어떠한지 본 장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짐작합니다(창15:2).

분명한 것은 그 종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소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사라가 죽은 지 3년,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들 이삭도 40이 되어 결혼을 시켜야 하겠기에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가나안 여인 중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그 종을 메소보다미아로 보내기로 하고 아브라함이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여 하나님께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 후 리브가를 만나서 이삭의 아내가 되게 한 것같이, 주의 종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중매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1. 복종하는 믿음

종은 주인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을지라도 불응할 수 없고 거역해서 안 되는 것이 종의 신분입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창24:5-8).

종의 말이 일리가 있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허락하지 않았고 또 종은 주인의 뜻에 복종하였습니다.

 

2. 기도하는 믿음

아브라함의 종은 머나먼 길을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지 65년, 사실 아브라함의 이름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 앉아서 하나님께 먼저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24:12-14).

누구나 기도는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정이 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자기도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사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우물가에 왔고 또 물을 좀 달라 했을 때 리브가는 상냥하게 물을 드렸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먹이리라 하고 우물물을 길어서 먹이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순탄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신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창24:26-27).

 

4. 주인을 더 기쁘게 하는 믿음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창24:55-56).

이제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열흘 동안 자기를 위해 잠시 머물 수도 있었으나 아브라함의 종이 단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은 주인을 더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형통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을 더 기쁘게 하십시오. 내게 있어 좋은 일이 있을 때 항상 주님을 먼저 영화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6. 리브가의 결단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자 이제는 리브가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24:57-58).

아무리 사랑스러운 딸일지라도 더 큰 행복을 찾아서 가려 하는데 붙들 수가 없지요.

“그들이 그의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59-60).

기억하십시오. 기회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충직한 종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충성을 다짐하고 리브가와 같이 기회를 잃지 말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자

느2:1-10

 

아닥사스다 왕은 다리오 왕의 3대 손이며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을 최대의 영토로 넓힌 왕이었습니다. 그는 30만의 보병과 6만의 마병을 두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위를 얻은 직후 유대인들이 두 번째 성전을 완성하는데 모두를 지원하였습니다(BC522-486).

또한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 왕(BC486-465)은 인도에서 에디오피아까지 다스린 왕으로, 왕명을 어긴 와스디를 내어보내고 유대인 에스더와 결혼하였습니다(에2:16).

그런데 역사에 의하면 그는 침실에서 저격을 받아 즉위 20년, 곧 BC465년에 막을 내리고 이어서 즉위한 아닥사스다(BC465-424) 왕이 유대인 느헤미야를 신임하여 궁중에서 술 맡은 관원장으로 세웠습니다.

 

1.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 월에 수산궁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그 때부터 울며 금식하고 기도에 들어갔는데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니산월에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내 조상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느2:2-3, 5).

오늘 우리 믿음의 성벽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벽이 훼파되었다면 울타리 없는 집과 같아서 마귀의 출입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기도의 위력

왕의 조서를 받아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근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느2:10).

구세주가 탄생하셨을 때 헤롯이 비상을 걸었고,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자 예수를 십자가에 넘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비상을 걸었던 것같이, 어느 때든지 빛의 역사가 일어나면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이 비상을 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스1:1-4).

누구의 어명입니까?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에게 내리신 어명이요,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어명입니다. 감히 누가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스4:4-6).

이로 인해 성전공사는 십팔 년이나 중단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3. 무장을 풀지 않은 느헤미야

지상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아이성을 진멸한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원수를 진멸할 때까지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왔더라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이천 명이라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수8:23-26).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성곽 일을 마칠 때까지 밤에도 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4:7-9).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건축하는 영적인 전사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4-17).

 

4. 제사를 회복했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8:3-4, 9).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느10:32-33, 39).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13:14).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13:22).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31).

우리들도 느헤미야와 같이 맡긴 임무 다하고 응답 받는 기도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신앙인의 자존심

창14:21-24

 

창세기 1-50장중에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사역을 비롯하여 노아의 물 심판까지의 천년이 넘는 기간을 너무도 짧게 기술한 후 12장에서 50장까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생애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믿음의 열조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통해 동일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 부족들의 전쟁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에 큰 전쟁이 있었는데 연합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창14:1-2).

전쟁의 원인은 그들이 12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배반한 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끊임없는 전쟁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귀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불황을 모르는 산업이 군수산업입니다. 이북을 보십시오. 인민은 굶주려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데 “선군정치”라 하여 핵무기 개발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쓰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을 가지고 한반도를 적화 통일시키고 김씨 왕조를 자자손손 이어가겠다는 계산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심판하기 전에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었을 때는 메시아 왕국이 즉시 이루어지리라 기대했는데 해방이 되지 않으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말씀을 신성모독이라 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6-7).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통치하실 나라가 세속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기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5).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요18:36-37).

주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세속의 나라는 영원하지 못하지만 진리의 나라는 영원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롯을 구한 아브람

아브람에게는 평소 무력을 익힌 318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람이 어떤 족장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놀라운 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호수아 군대는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기드온은 3백 명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4-16).

이 승리가 오늘 우리의 승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멜기세덱의 축복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14:18).

이 멜기세덱의 관해서는 궁금한 문제가 많습니다. 과연 그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인물이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노아의 아들 셈이었다고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1-3).

이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이유를 살펴보면,

1) 복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19-20).

2) 성물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4).

 

4. 아브람의 자존심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소돔 왕이 하는 말입니다. 사실 소돔 왕은 패전 왕으로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나가서 승리하고 잃었던 물건까지 다 찾아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는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14:21).

노략물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14:22-23).

전승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말씀이라 생각듭니다. 이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려는 아브람의 신앙에서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용맹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의 영광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합니다. 아브람의 이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탄의 참된 의미

눅2:8-14

 

세상에는 존중받을 사람이 많습니다. 애국지사, 독립 유공자들이 있는가 하면 조국 수호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도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는 연중행사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매년 성탄절이 돌아오면 상가나 백화점, 호텔이 먼저 화려하게 성탄 추리로 장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탄과 관계없이 대목장을 보는 사람들이지요. 판문점을 한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출발할 때까지는 인민군이 도끼 휘두르던 기억이 있어서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서 보니 군인들의 표정도 밝고 안정된 모습이었습니다. 철조망도 높은 담벽도 아닌 한 건물 안에서 절반은 이북이요, 절반은 이남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를 위해 이 분계선이 필요하고 누구를 위해 젊은이들이 그렇게 피를 흘려야 했으며 또 누구에게서 그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미국 LA 한인교회 박요한 목사의 북한 방문기를 보니 추수감사주일에 평양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설교 내용은 열 문둥이 사건으로 지극히 복음적인 설교였다고 합니다. 얼어붙은 땅에도 봄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입니다. 인신매매에 남창제도, 동성애 부부, 자살과 교통사고는 세계에서 1위가 되었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없는 신앙은 의식적인 신앙으로 전락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죽어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1-14).

 

2. 성탄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역사를 초월한 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탄은 임마누엘의 주님께 보배합을 열어 그 앞에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몸통만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브이 치치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한 소녀가 브이 치치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숨은 길을 찾으라”

삼백 명쯤 되는 십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과 믿음을 설명하는 도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헤쳐 온 난관들을 설명하다 문득 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학생과 교사들이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고개를 묻고 심하게 흐느끼기까지 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그 친구의 끔찍한 기억과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슬픔과 눈물을 삼켜가며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랍고도 용감한 질문을 했습니다. 앞에 나가서 한 번 안아 봐도 괜찮겠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도 뜻밖이어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나오라고 했습니다. 여학생은 눈물을 훔치며 청중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서슴없이 끌어안았습니다. 안고 또 안았습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멋진 순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강당에 있는 이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소녀가 내 귀에 속삭였습니다.

“아무도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예쁘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사랑한다고 말해 준 이도 없었고요. 그런데 그 쪽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어요.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이 참 멋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구주 성탄은 만 인류의 영원한 복음입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진 목소리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적기가 우리의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속히 방공호에 몸을 숨겨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수차례 반복되더니 얼마 지난 후에 “국민 여러분, 방금 귀순 용사가 미그 19기를 타고 00 비행장에 착륙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쟁의 경보를 유쾌하게 들을 자는 없을 줄 압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소리이지요. 과연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어떤 소식이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폐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문병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 되는 권사님이 평생을 기도하여도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는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칠세라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이 의사가 오니까 “선생님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 하면서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의사가 죽을 사람을 살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주실 분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4 성탄의 표적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1-12).

구주 성탄은 환상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에 탄생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목자들이 보았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표적과 증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증거 곧 표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확실한 진리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 있는 믿음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보십시오. 이 증거가 있었던 사도들은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7-20).

이렇게 표적 있는 믿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표적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장막 터를 넓히자

사54:1-3

 

본문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포로에서 돌아오는 유대민족입니다.

시드기야 왕 11년에 유다의 멸망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다시 복구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므로 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은총을 크게 힘입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2) 기독교의 박해와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세계적으로 확장되리라는 예언입니다.

계시록 7:4-8에 보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를 계수하는데 144.000이라 하였습니다. 사실 이 숫자를 그대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작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또 열방 중에서 인 맞은 자는 극히 많아 누구도 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7:9-12).

 

1. 믿음의 확장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천당과 극락은 하늘 위에 있지 않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발밑이 곧 천당이요 극락이니 다만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므로 영원무궁한 행복의 세계가 열린다. 높은 하늘을 아버지로 넓은 땅을 어머니로 삼고 다 같이 살아가는 우리는 한집안 식구이며 한 형제라”(이성철 종정).

이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내세관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볼 수 없기에 발밑에 천국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또 육신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도단 성에서 게하시가 포위해 들어오는 아람 군대는 보았으나 하늘의 군대는 보지 못했으나 엘리사의 기도로 그 눈이 밝아졌을 때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스데반은 보았으나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영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의 나라 확장에 앞장서야 되겠습니다.

 

2. 축복의 확장

받은 은혜에 족한 줄 알고 감사하는 생활은 복이 되지만 안일주의는 죄악입니다. 다윗이 어느 때에 죄를 지었는지 아십니까? 사울에게 쫓길 때가 아니요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아닙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11:2-4).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나 전쟁할 때는 기도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동행하였지만 안일할 때에는 죄를 지었습니다.

세속의 나라는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지상에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허리띠를 풀지 말고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가 실패한 원인은 전쟁을 싫어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을 그리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군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진정한 복을 원하십니까?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안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도 주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도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우리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일하고 개척자의 정신으로 일하고 땅끝까지 나가야 하겠습니다.

 

3. 은혜와 진리의 확장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바울도 믿음이 어린 시절이 있었으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장성하므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였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의 은혜가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면 어린 아이의 은혜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물론 주님께서 어린 아이를 두고 천국의 표상을 삼았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그러나 이 말씀은 교만한 자들을 낮추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장성한 믿음으로 은혜와 진리가 땅끝까지 확산되는 일에 앞장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청지기의 신분과 상급

눅12:35-40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관리권은 있어도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청지기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영국 왕실을 지키는 수위들을 보면 특이한 복장을 하고 근무시간이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12:36-37).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12:42-43).

놀라운 사실은 청지기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주인이 청지기에게 수종을 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눅12:37). 사실 청지기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주인이 이렇게 존귀하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상을 받고 주인에게 칭찬받는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자기 몸을 자기 것인 줄 아는 것이 잘못이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든지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으시고 순종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요5:30-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8-29).

 

2. 나의 모든 소유로 주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우리는 마태복음 25장 14-30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각기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올 때는 맡긴 달란트로 그동안 주인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0-12).

우리는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청지기 같이 주인에게 무익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초대교회 은혜 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청지기의 신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자연계에는 계절이 있고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회를 잃지 않고 열매를 맺지만 우매한 자는 열매맺을 기회를 잃게 됩니다.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삼백 명 교인이었을 때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자 모두가 찬성을 하는데 그 중 한 사람만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면서 하는 말이 “교회가 건축되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건축한 후 그 사람이 교회를 나오지 않아 심방을 갔더니 장이 병들어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기회를 잃으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삭개오는 기회를 잡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무대에서 하루에 24시간이라는 시간을 동일하게 배분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되어 뿌리 채 뽑히는 인생이 되지 말고 충실한 알곡으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이제는

롬3:21-23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께서 지킬 수 없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주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율법을 지키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1) 율법의 필요성입니다.

암은 수술을 해서 떼어내어야 하는데 그것도 시기를 잃으면 수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중병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므로 의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악입니다. 병은 육신의 생명을 빼앗지만 죄는 영육을 모두 빼앗아갑니다.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3:19).

자기에게 중병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 의사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옳지요.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을 일깨워 주는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2) 율법의 능력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법관이 무엇으로 죄수를 다스립니까? 형법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법관이라도 법 조항 없이 죄를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범은 정권이 바뀌면 법 적용을 달리하여 무죄로 석방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는 무기가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마귀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일은 하늘의 군대가 마귀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 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7-10).

 

1.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구약시대에는 신앙의 기초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 성전을 건축하고, 율법에 의해 제사장을 세우고, 율법에 의해 제물을 드리고, 율법에 의해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에 의해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연약으로 인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의사도 불치의 환자를 대할 때는 “잡숫고 싶은 것을 잡수시고 기다리십시오. 많이 괴로우시면 진통제는 놓아드릴 수 있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서 율법 외에 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의 무용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이르게 하는 구원의 통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5-26).

 

3. 믿음과 행위 언약

신학적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세운 선악과의 법을 ‘행위언약’이라 합니다. 생명과는 먹어야 살고 선악과는 먹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7-28).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갈 때 놋뱀을 보면 살아난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그것이 은혜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무익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 주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 모두 의의 열매 더 많이 맺어지도록 기도합시다.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

고후5:9-10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구원 문제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라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할렐루야!

그 날에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또 받는 상급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상급에 차이가 없다는 해석

1) 신학적 입장

은혜로 받은 구원인데 형평원리에 어긋난다는 주장입니다. 자기 공로로 받은 구원이 아닌데 상급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성경적 근거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마20:1-16) 보면 하루에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정하고 일꾼을 고용하였을 때 제3시, 제6시, 제11시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품꾼이 있어 남은 시간을 함께 일하도록 하고, 일과가 끝난 후 주인이 계산할 때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나누어 준 비유를 들어 상급의 차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차이가 있다는 해석

1) 공의의 심판에 의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마16:27).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사실 상급의 차이가 없다면 충성의 의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2) 상급의 구분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1-42).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지자를 대접한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이 의인을 대접한 상을 받으며 어떤 사람이 주님을 대접한 일로 상 받을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7:36절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루는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을 하였을 때 죄 많은 한 여인이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 붓는 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7:39)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자라면 죄 많은 여인은 주님께 드린 상을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기 집에 올 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같이 영접하였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어느 날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집에 한참 떠들기 좋아하는 개구쟁이 꼬마가 있었는데 절제가 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니 내가 쩔쩔 매네” 하더니 그 떼부터 말없이 얌전해져서 예배도 잘드리고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3) 심판의 구분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벗어날 수 없는 빌라도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죄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인의 죄악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19:7-11).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긴 유다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던 사람이었다면 오신 메시아를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마귀의 노예로 전락되어 저질은 죄악입니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진리의 멍에 아래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역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헛되지 않은 일

고전 15:58

 

세상에는 각기 직업에 따라 하는 일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평생을 땀 흘리고 수고하여도 허무로 돌아가는 일이 있는가 하면 후대에도 기념할 값진 업적이 있습니다.

 

1. 면류관의 종류

1) 의의 면류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이 영광은 주님 위해 끝까지 충성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상급입니다.

2) 생명의 면류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시련과 연단 가운데서도 인내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상급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3) 시들지 않는 면류관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4).

세상 영광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재물의 영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4) 생명의 면류관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 모든 면류관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입니다.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날에 이렇게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지상에서 받을 복

1) 각양 은사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롬8:32).

2) 기도의 응답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요셉의 창고에 곡식이 많아도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하늘 곳간에 쌓인 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 아일랜드에 ‘아미’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평소에 어머니와 같은 푸른 눈이 아닌 갈색 눈임을 고민하던 차 “믿고 구하는 것은 다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거울 앞에 섰는데 비쳐진 눈동자는 변하지 않고 갈색 눈동자 그대로였기에 “하나님은 거짓말장이야” 하며 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아미야,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란다” 하고 달래주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인도 선교사로 지원했는데 눈이 푸른 서양 여자는 요물이라 하여 접근도 못하게했는데 아미는 갈색 눈을 가졌기에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부자이며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일까요? 빌 길이 열려있고 또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3. 영원한 상을 위한 성도

1) 자기의 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9-13).

세리의 기도는 상달되었으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상달되지 않았습니다.

2) 작은 일에 감사를 잊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작은 은혜, 큰 은혜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모두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7:13) 하고 부르짖던 열 문둥이 중에 돌아와서 사례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습니까? 사마리아 문둥이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7-19).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주 앞에 엎드려 경배드리고 향기 풍기는 손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아 멘

 

 

아브람의 제사와 축복

창15:1-17

 

예수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나라 역사는 몰라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지리적으로 보아 그렇게 큰 나라도, 아름다운 나라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분쟁의 불씨가 그칠 줄 모르고 또 그곳이 마지막 화약고가 되리라는 말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역사의 중심 위치로 부각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1. 아브람의 두려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두려워하여 다니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벨사살 왕은 두 무릎까지 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동일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1) 심판에 대한 공포입니다.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10:24).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4:18).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단5:5-6).

2) 신적 권위 앞에서 두려움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1:17).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28:16-19).

3) 아브람의 두려움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1-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세운 언약은 자손에 대한 복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으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2. 아브람의 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어떤 행위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또 복을 기약하셨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1-5).

 

3. 아브람의 제사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15:8-10).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증하는 것으로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리므로 아브람이 쫓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아브람의 제사에 쪼개지 않은 비둘기가 그 원인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나 레위기에 보면 비둘기는 쪼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17).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종이 되게 하였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민족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칠십 가족이 기름진 애굽 땅으로 내려가서 사대 만에 그렇게 많은 숫자로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 늘어났다고 했습니다(출1:12).

그 때 바로는 산파를 시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 하였으나 산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바로의 말을 듣지 않고 살려주었습니다. 사실 사대 만에 남자 장정이 육십만 명이 넘었다면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2)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는 유보하셨습니다. 노아 홍수를 비롯하여 소돔 고모라와 니느웨 성도 마찬가지로 죄악이 찰 때 심판하셨습니다. 종말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14:18-20).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에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올리는 제사를 흠향하시고 기약대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람과 같이 믿음의 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오늘

히3:7-14

 

어느 백화점 앞에 “내일 오면 이 상품을 절반 값에 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팻말을 달았더니 다음 날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그 날도 여전히 ‘내일’이라는 표시는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미래의 꿈과 영생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생은 현재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바로 살지 않으면 미래의 꿈이 아무리 화려해도 허황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과거는 갔으니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내 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을 중요시하여 공백이 없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리는 열 재앙 속에서도 보호를 받았고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서 물장사 되는 것도 눈으로 보았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그것을 거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1. 오늘 받을 구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구원받을 기회를 얻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면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에서 임금이 아들을 위해 잔치에 손님을 청했을 때 하나같이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마22:5-8).

임금이 다시 종들을 보냈습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22:10-13). 이 잔치는 왕이 베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으로도 황송한 일인데 그들은 멸시하고 외면하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아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였습니다. 모두가 기회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2. 성령을 거역하지 않아야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1-53).

불을 토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7-58).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히3:7-9).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성령이 나를 대적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63:10) 하였습니다.

 

3.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기름 준비된 자에게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이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되지만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세상에서 지옥 가기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요? 마귀의 올무를 주의해야 합니다. 죄의 보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청교도 신앙인 윌리엄 젠킨의 말입니다.

“사탄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적당하게 바꿀 줄 안다.

만약 악마가 교만한 사람이나 방탕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는 아첨꾼으로 변장해 그들을 현혹시킨다.

또한 탐욕적인 사람을 찾아갈 때는 그의 손에 쥐어 줄 재물로 유혹한다.

사탄은 하와의 과일도, 노아의 포도주도, 게하시의 은과 옷도, 유다의 돈주머니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입에 맞는 떡을 준비할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의 발에 맞는 구두도 소지하고 있다.

그는 각각의 조건에 맞는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있다.”

 

4. 예고 없이 오는 그날

사람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모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두르지 않아도 찾아오게 마련인데 그 길마저 뒤질세라 서둘러 가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 율이 일위라고 하니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살은 사후의 심판을 모르는 자들의 불장난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잘못된 길이라면 돌이 서면 되지만 죽음은 마지막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옥불이 뜨거워도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3:14-15).

오늘 바로 이 시간 마음 문을 열고 진리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성령을 영접하십시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땅 위의 천국

요12:1-3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꿈꾸는 이상세계입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여전히 성취되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캐나다 서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빅토리아 섬에 가면 채석장을 화원으로 꾸며 놓았는데 에덴동산이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꾸며 놓은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과연 땅 위의 천국은 어디일까요?

 

1.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0:24).

그러므로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기를 그처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낙원에서 살고 있던 가나안 일곱 족속들은 그 의미를 알았을까요? 도리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레20:22-23).

기억할 것은 천국은 원수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안일에 빠지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진멸하기까지 칼을 칼집에 꽂지 않았고, 예루살렘 연합군과 싸울 때는 적군을 진멸할 때까지 해와 달을 중천에 머물게 하였던 것입니다(수10:1-13).

 

2.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바사 왕 고레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의 8.15 해방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는지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 보내소서”(시126:1-4).

그들이 돌아와서 성전 기초를 놓을 때에 젊은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옛 성전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스3:10-12).

다시는 우리가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감히 천하에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였고 또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게 했는데 원수들은 그 일을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스4:4-7). 중요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문서 곳간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다리오 왕 때에는 발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공사에 드는 모든 비용도 국가에서 담당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 곳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스6:6-12).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3. 느헤미야의 귀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 있으면서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 하는 말을 듣고 넉 달 동안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한 후 왕의 허락을 받아 돌아와서 성벽을 건축하였는데 그 때도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의 방해가 그치지 않았으나 공사를 중단 없이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의 기도와 믿음에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밤낮 무장을 풀지 않고 장애를 극복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신약의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4.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2-3). 주님을 모신 가정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곧 성령이 임하신 곳이 땅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이제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알았고 거룩한 봉사와 헌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안주할 수 없는 것은 영적인 싸움은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였으나 교회는 위축되지 않았고, 땅 위의 천국은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십자가로 싸웠고 또 십자가로 이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바울은 마귀를 이길 수 없으나 그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자들은 원수 앞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땅 위의 천국은 이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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