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34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보고 브엘세바에서 서로 후대하기로 맹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친척, 아버지의 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으나 가나안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할 때에는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하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했던 일도 있었습니다(창2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시므로 꿈에 나타나 지시했습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창20:3, 7).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누가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신복들도 이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아내 뿐 아니라 양과 소와 노비와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고, 아비멜렉과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벌이 거두어지므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1. 존귀의 복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충청으로 가서 장날이라 시장에서 전도를 하는데 여름이라 목이 말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어떤 여자분이 음료수를 사주어 목을 축인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집사님이었습니다. 마치 루디아가 바울을 영접했던 것같이 저를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찬송이 얼마나 은혜가 되었던지 길을 가던 사람이 듣고 ‘음식이라면 염치를 불구하고 빼앗아 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이삭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선대한 이유 역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동일한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2. 권세의 복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따르는 것은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
택한 자들이 받는 복은 영육이 다 포함됩니다. 다윗이 받은 복을 보십시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 다윗이 누린 복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와 같이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광은 초로와 같이 사라졌지만 다윗의 이름은 오늘도 빛나고 있습니다.
이차 대전의 패배를 디딤돌로 다시 일어난 일본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물론 앞서가는 기술문명입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르만 민족의 자존심이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 독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에서 영생의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영생의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늘 이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존귀와 권세가 임할 줄 믿습니다.
3. 영적인 복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1-23).
제사장들과 장로들 곧 교권주의 자들은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21:23).
이는 교권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능력이 있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2-13).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옳습니다. 믿음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방인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참 신이심과 또 함께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므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었고, 그 땅에 생명과 구원 역사를 일으킬 뿌리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또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 굳게 붙들고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후계자
민 27:12-23
이사야를 통해 죽음을 통보받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그 때 히스기야의 눈물과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십오 년을 연장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처럼 열망하던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조용히 막을 내려야 했을 때 자신의 수명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후계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27:16-17).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간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일로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받았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의 후계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며,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금식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금식기도에 대한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입니다.
“산시성에서 정기적으로 금식 기도하는 중국인 크리스쳔들은 금식이 주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거룩한 도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금식을 싫어합니다. 금식은 진정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금식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 사역의 가장 큰 방해꾼은 스스로 능력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고작 한 끼의 음식에 의지해야 하는, 그런 약하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임을, 금식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2. 충성된 여호수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폭군과 독재자들은 언제까지나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같이 행동하다가 말로가 비참하게 끝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재 세습을 하고 있는 김일성 가문도 얼마나 갈지 두고 볼 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했을 때 후계자 여호수아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믿음을 보십시오.
1)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출24:12-13).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는 사람이나 짐승 하나도 그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손만 댈지라도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맞아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일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옷도 빨아 입게 하였습니다(출19:12-15). 그때 여호수아는 사십일을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있었습니다.
2) 금송아지 우상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사십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던 일로 그 죄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시내산 바위 밑에는 푸른 나무 몇 그루와 작은 집이 있는데 거기가 여호수아가 머물렀던 곳이라 합니다.
3) 회막을 떠나지 않은 여호수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어린 사무엘을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유의해야 할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충성심을 보십시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
여호수아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3.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치고,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민13:18-20).
그들이 동일하게 사십일을 정탐하고 돌아왔으나 정탐들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열 정탐의 보고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민13:32-33).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입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6-9).
이 믿음이 골리앗 앞에선 다윗의 믿음이요, 갈멜산 엘리야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모세에게 지시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27:18-20).
우리 모두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충성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제사와 축복
민 28:1-8
오늘은 예배라고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제사라고 하여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제사와 예배를 통해 영적인 교제를 이루시고 또 복을 내려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내 헌물, 내 음식인 화제물 내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바칠지니라”(민28:1-2).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내 헌물, 내 음식인 화제물 내 향기로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복 내려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상번제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어린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양 한 마리는 해질 때에 드릴 것이요 또 고운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빻아낸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시내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며”(민28:3-6).
상번제는 매일 드리는 제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올리는 새벽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순간도 살 수 없는 인생임을 알았다면 매일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에게 넘치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2. 안식일 제사
주님의 날에 올리는 예배입니다.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이는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매 안식일의 번제니라”(민28:9-10).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1) 창조사역을 완성하고 안식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이 조물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2)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날입니다.
모든 날이 다 귀하지만 특히 안식일은 주님을 섬기는 날이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경배드리고 거룩한 봉사로 섬기는 날로서 약한 자, 병든 자를 돌아보며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3. 초하루의 제사
“초하루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매 수송아지에는 고운가루 십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와 숫양 한 마리에는 고운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매 어린 양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섞은 소제를 향기로운 번제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며 그 전제는 수송아지 한 마리에 포도주 반 힌이요 숫양 한 마리에 삼분의 일 힌이요 어린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이니 이는 일 년 중 매월 초하루의 번제며 또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숫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민28:11-15).
초하루의 제사는 안식일과 상번제와는 별도로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당시에 수넴 여인이 갑자기 아들이 죽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녀오겠다고 하였을 때,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왕하4:23).
이는 그들의 경건생활이 어떠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무교절 행사
“첫째 달 열넷째 날은 여호와를 위하여 지킬 유월절이며 또 그달 열다섯째 날부터는 명절이니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이며 그 첫날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된 숫양 일곱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 번제가 되게 할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십분의 삼이요 숫양 한 마리에는 십분의 이를 드리고 어린 양 일곱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죄하기 위하여 숫염소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되 아침의 번제 곧 상번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민28:16-23).
무교절 곧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매년 유월절이 돌아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회로 모이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항상 도우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5. 칠칠절 제사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한 마리마다 십분의 삼이요 숫양 한 마리에는 십분의 이요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죄하기 위하여 숫염소 한 마리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민28:26-31).
이 절기를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6. 나팔절 제사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되고 흠없는 숫양 일곱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에는 십분의 삼이요 숫양에는 십분의 이요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죄하기 위하여 숫염소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되 그 달의 번제와 그 소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 그 규례를 따라 향기로운 냄새로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민29:1-6).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나팔소리가 울렸고 또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도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7. 속죄일 제사
“일곱째 달 열흘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된 숫양 일곱 마리를 다 흠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십분의 삼이요 숫양 한 마리에는 십분의 이요 어린 양 일곱 마리에는 어린 양 한 마리마다 십분의 일을 드릴 것이며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라”(민29:7-11).
속죄의 제사는 반드시 통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을 괴롭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8. 초막절 제사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이레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숫양 두 마리와 일 년된 숫양 열네 마리를 다 흠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너희가 이 절기를 당하거든 여호와께 이같이 드릴지니 이는 너희의 서원제나 낙헌제로 드리는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 외에 드릴 것이니라”(민29:12-13, 39).
초막절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지키는 3대 절기로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모든 제사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제사에 대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땅 위에 사는 동안 해야 할 임무가 무엇입니까?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최고의 임무요 우리가 누릴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 모두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미디안 정복
민 31:1-16
이스라엘의 원수 곧 미디안도 아브라함의 핏줄을 받은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창25:1-2).
1. 독자 이삭
아브라함은 이삭 외에도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독자라고 하신 이유는 사라가 낳은 외아들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이렇게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형제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삭에게만 하셨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있는 칠각형의 오마르 신당 중앙에 가서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독자를 바친 돌 제단이 있는데 거기는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바쳤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마엘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마22:32).
어떤 사람은 우리 조상이 노아의 후손 중에서 셈의 후예, 곧 욕단의 후예라는 것을 연구 발표했습니다. 물론 단군의 족보는 신화이므로 셈의 후예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기억하십시오. 지은 죄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기억에서는 사라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사유함을 받기 전에는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4:4).
2. 죄값을 반드시 물으시는 하나님
“죄는 지은대로 가고 선은 쌓은 대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왕상2:5-9).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서 일생 다윗을 지켰던 충신이었기에 당대에는 그에게 죄를 따라 시벌하지 못했으나 아들 솔로몬에게는 이런 유언을 남겨 벌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미디안을 물리칠 것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올무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염병이 들어 이만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25: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민31:1-2).
3. 하나님의 군사
세상에는 의의 군대가 있는가 하면 불의의 군대도 있어 불의가 의를 다스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누가 히틀러를 전범자, 독재자, 폭군, 살인마로 심판을 하였습니까? 이것이 역사의 재판정에서 내린 심판입니다. 의의 군대는 패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패배를 모르는 영원한 승리는 오직 의와 진리에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미디안을 물리친 이스라엘 군대를 보십시오.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소집하여 일만이천 명이 나가서 싸우도록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나팔을 들려서 싸움에 나가게 한 일입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민10:9).
그 나팔이 기드온 삼백 명 용사가 불었던 나팔이요 오늘 우리가 외치는 복음의 나팔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그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31:7-8).
이 싸움은 하나님께서 미디안에 내린 심판입니다. 특히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내린 심판을 보십시오. 그런 자는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들어갈 인간입니다(계19:20).
4.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
전쟁의 역사를 보면 가장 큰 목적이 영토 확장과 전리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스라엘에게는 많은 전리품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원수의 수중에 있던 것이 다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얻은 전리품은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가를 부르며 많은 노혁 물을 얻어 돌아오는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책망했습니다.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다 진영 밖에 나가서 영접하다가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니라”(민31:13-14).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여자들을 살려둔 일로 인해서 였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5-16).
여자는 평화의 상징도 되지만 마귀의 올무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씀입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우리 모두 마귀의 올무를 깨뜨리고 믿음으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높이 드러내는 십자가의 정병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나그네 여정
민 33:1-49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렇다고 인생이 무의미하게 살고 향방 없이 살아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존귀한 존재이므로 의미 있게 살고 또 향방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1. 출애굽의 역사
어떤 의미에서는 애굽은 이스라엘의 민족을 이루기 위한 텃밭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칠십 인 가족이 내려가서 사 대만에 장정 육십만 명이 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바로가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산모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죽이지 않고 바로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거짓말을 하고 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야곱과 기생 라합과 이스라엘 산파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의의 기준입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1) 애굽에서의 신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무는 동안은 노예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질 기업이 없었습니다. 이같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영원한 기업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1서 2:15-1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2) 유월절과 홍해 사건
애굽의 바로는 마지막 재앙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장자재앙이 내리자 드디어 손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으므로 심판하는 천사가 넘어갔는데 피가 없는 집에는 가축에 이르기까지 초태생이 다 죽었습니다. 바로가 얼마나 미련했는지 보십시오. 애굽 천지에 내린 재앙을 그렇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을 떠나고 삼 일 후에 또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잠26:22).
모세의 기도로 홍해가 나뉘어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지 같이 바다를 건너게 되었으나 바로와 그 군대는 물장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광야 길 사십 년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의 노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은 사십 년을 허송세월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야 사십 년의 세월에 전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시78:33).
연단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훈련하고자 하실 때, 그 사람을 감동시키기 원하실 때,
세상이 놀랄 정도로 위대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분이 사용하신 방법과 방식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택하신 자를 얼마나 철저히 다듬으시는지, 그 사람을 내리치고, 상하게 하시며, 강력한 타격을 가하여, 그를 초라한 진흙덩이로 전락시키시니, 이를 이해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니, 고통에 겨운 그의 심령은 부르짖을 뿐이며, 그는 탄원의 손을 치켜들 뿐입니다. 그 분이 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할 때, 구부리되 결코 부러뜨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택한 자를 사용하시되 온갖 의도로 그를 녹이시며 온갖 행동으로 그를 권유하심으로서 당신의 영예가 들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분만이 아십니다.” (오스 힐먼)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고난은 불행이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유익하게 해주시므로 믿음이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돌을 용광로에 넣고 녹일 때 거기 철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찌꺼기로 드러날 것입니다. 순금을 고르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1-2).
3. 성공과 실패
실패를 즐겨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불행은 실패하는 인생이 월등이 많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이유와 조건을 붙여 하나같이 핑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한 므나 (눅19:12-27)씩 배분 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결과에 차이가 있었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신앙과 불신앙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그들은 열조의 신앙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했을 때 갈 곳을 알지 못해도 떠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요8:39).
축복과 저주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는 원망과 불평이 없는 곳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데 저주아래 있는 사람은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동일하게 정탐을 하였어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부정적인 언어와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나 열 정탐은 긍정적인 용어와 감사가 없었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었으나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의 나그네 노정이 아무리 고달프다 할지라도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을 거울로 삼아 소망 중에 인내하여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 경외함을 가르치라
신 4:9-14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 있었는데 그때 산 위에는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었다고 했습니다. 기상학적으로 보면 그때 대이변이 있었습니다. 기상 이변은 엘리야 당시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에서도 있었습니다. 호렙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신4:10).
1. 음성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12절).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말씀을 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 신이시므로 인간이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15-18).
2. 십계명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에 쓰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13절).
성경 영감에 대한 세 가지 학설
1) 축자영감설(완전 영감설)
2) 목적영감설(부분 영감설)
3) 기계적영감설(성경저자는 도구로 사용됨)
축자영감설은 정통주의의 견해이며, 목적 영감설은 자유주의 견해요, 기계적 영감설은 근본주의자들의 견해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그러므로 부분적인 영감을 주장할 수 없으며 또 성경저자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보면 성령은 인격을 갖춘 하나님의 신이요, 인간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인 헌신으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과정에도 마리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26-28, 38).
바울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6-17).
더욱 중요한 것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에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3. 힘써 지켜야 할 진리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4:9).
1)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사람이 늙으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했더니 “본래 개구리란 기억력이 나빠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허지만 인간이 개구리와 같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배역하지 않아야 합니다.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셨으나 그 백성 이스라엘은 배역하였습니다.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3).
3)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2-14).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 누구를 막론하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그처럼 경건했던 유다 왕 히스기야의 교만을 보십시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대하32:24-2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16-18).
4. 자녀들에게 가르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신4:9-1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갈 때에든지 누어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녀들을 진리 안에서 양육하므로 주님의 은총이 대대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선택
신 7:6-11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13:18).
“내가 그들은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진정한 선택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혹자는 전도할 필요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을 받고 못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수도 있지만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1. 행위 이전의 선택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1-2).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기억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모든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2. 사랑 안에서의 선택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선택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구했다(asked for), 바울은 작다(littie) 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았을 때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기를 낮추어 죄인 중에 괴수로 알았을 때에는 그 속에서 진리가 샘솟듯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선택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10:15).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맹세로 인한 선택
하나님은 거짓말을 안 하시며 또 믿는 자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5-28).
본문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8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냐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29-30).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4. 선택 받은 자의 본분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7:11).
우리가 국법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천국시민이 되었으니 반드시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 국법을 지킬 때에 그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어길 때는 제재를 받는 것같이 하나님의 법도 마찬가지로 지켜야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10절).
5.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복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12-13).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기약된 것은 모두가 넘치는 복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지형적인 조건을 보면 그렇게 기름진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은 위로부터 임하는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면 물적인 것은 그림자 같이 따르게 되고 건강도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15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다윗의 이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 될 줄 믿습니다. 진리에 복종하십시오. 인간의 생사화복이 주님께 있음을 알았다면 나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그 크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심히 가까운 진리
신 30:11-14
사람이 후회 없이 살고 부끄러움 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출애굽의 거사를 이룩한 모세 백이십 년의 생애는 사십 년씩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사십 년,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 광야에서의 사십 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면 모세의 마지막 사십 년을 위해 80년을 연단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궁전에서의 사십 년이 가장 큰 꿈이 있었던 시절이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심장에는 이스라엘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세는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 할지라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다릴 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되려고 애쓰는 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당신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믿음의 출발점이 어딜까? 자기에 대한 철저한 절망, 인간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을 찾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영적 삶의 비밀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1.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번성은 생육의 복이지만 정복은 문화적인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은 교육을 통한 지능개발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벨 수상자가 많이 나오고, 역사적인 인물, 국제적인 재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역사는 특별한 인물보다 평범한 사람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받는 문제도 특별한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면 서민들은 구원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물론 고등 학문이나 높은 지위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해서 마음을 높이는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주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오래지 않아 민간인들도 우주를 여행할 때가 오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과학문명의 발달로 우주를 여행한다 할지라도 영의 눈이 어두우면 진리는 여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입에 있는 진리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무슨 말씀일까요? 진리를 담고 있는 입이요, 진리를 선포하는 입이요, 진리를 찬양하는 입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어떤 계급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그 발 앞에 엎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신적인 권위 곧 복음이 그 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그 집에 충만하였습니다.
2) 마음에 있는 진리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천국이 이미 임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받는 자밖에 모르는 비밀, 성령으로 인침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제 육의 사람, 곧 멸망 받을 죄인이 아니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믿음 굳게 붙들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실천에 옮기는 진리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실천하기 불가능한 진리, 곧 못 지킬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칠십인 역본에는 “그것은 네게 너무 어렵거나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내게 주신 은혜요, 구원이요,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으면 믿고 순종하여 영생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3-105).아 멘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니
수 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절)
파란만장했던 모세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여호수아의 시대가 왔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큰일을 하였기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에 가면 지금도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풍화작용으로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웅들의 기념비는 허물어가도 모세의 발자취가 빛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진리의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1.여호수아에게 내리신 복
하나님의 복은 물적인 것보다 진리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복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2-4).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땅을 밟아 기적을 체험했다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말씀한 배경에는 이미 열조들과 모세에게 내린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그 땅도 지도를 펼쳐보면 그렇게 광활한 땅이나 비옥한 땅이 못됩니다. 다만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 그 땅과 예루살렘 도성은 하늘나라 모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에 기약된 은혜와 진리는 만국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수아에게 주신 권세
스룹바벨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멜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슥4:7).
진리 위에 군림할 자는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권력보다 더 큰 힘은 의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역행하는 일이라면 천하를 준다 해도 그것이 마귀의 올무라는 것을 알고 물리쳐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그 일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요구
1) 담대한 믿음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5-6).
악어가 우굴대는 호수에서도 악어를 무서워하지 않는 물고기가 있는데 전기뱀장어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전기에 감전되면 악어가 혼비백산으로 도망을 합니다. 곰을 무서워하지 않고 함께 먹이를 먹는 동물도 있는데 스컹크입니다. 곰이 귀찮게 굴면 꽁무니에서 고약한 가스를 터트리므로 그냥 두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원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13:6).
이것이 믿음의 장부들이 가진 영적인 무기입니다. 금성철벽의 바벨론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도 하나님의 손길은 완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121:1-3).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32:7-8).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2) 진리에 순종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7-8).
말씀대로 순종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담당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위스의 제네바는 국제도시입니다. 그런데 죤 칼빈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 집 건너 술집이요 한 집 건너 기생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패했던 도시에 말씀이 들어가므로 지금은 너무도 깨끗하고 밝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아직도 방황하는 자 있습니까?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후회하십니까?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우리는 여호수아와 같이 약속의 땅, 영원한 천국을 향해 진군하는 십자가의 정병입니다.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수많은 유혹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우리가 새로운 역사의 주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 대장되시니 우리 모두 힘 있게 전진하여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명하신대로 행할 것이요
수 1:10-18
여호수아가 백성의 관리들을 향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준비를 명하자 백성들은 여기에 순응하고 충성을 다짐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수1:16).
1. 양식을 예비하라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수1:11).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수5:12). 유대인 학자 중에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가나안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출19:10-11참고).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축제가 아니라 싸워서 정복해야 할 전투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위해서는 비상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0-12).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2.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라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형제 지파들과 함께 요단을 건너지 않고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가지기로 한 일로 내린 명령입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수1:14-15).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 이룬 지체므로 각기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에서도 핑계하려면 얼마든지 핑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 가나안 정복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동안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요,
2)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다른 지파들의 몫이 더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기억할 것은 나로 인해 우군의 전열이 약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무장한 사만 명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수4:12-13).
이렇게 그들이 앞장서므로 이스라엘은 빈틈없이 단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행동으로 형제를 낙심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 덕을 세우고 하나 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믿음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수1:16).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1) 권위에 복종하는 믿음입니다.
지도자가 권위를 상실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어른을 존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청소년들은 마음껏 희망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뒷 밭침을 해주어야 합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질서가 무너지고 권위가 떨어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죄로 인해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경건생활을 바로 할 때는 그를 대적하는 원수도 재앙도 없었습니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왕상5:4).
그런데 그의 말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왕상11:4-5).
이로 인해 사방에서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왕상11:14).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왕상11:23).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왕상11:25).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26절).
2) 지도자를 돕는 일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수1:17).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관시킴으로써 모세의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마게도냐 교회 중에서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0,14).
전도자는 일선에 나가서 싸우는 병사와 같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실탄과 보급품이 제 때에 공급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수1:18). 아 멘
요단 동편의 기업
수 22:1-9
사람은 음식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오늘을 바로 살아야 내일이 보장되고 현세를 바로 살아야 영생이 보장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각기 지파대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나눈 후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으로 보내면서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2-5).
1. 모세와 세운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동편에 정착하는 동안 시혼과 옥, 미디안 사람을 물리침으로 아셀 땅과 길르앗 땅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땅은 가축을 치기에 적당하여 르우벤 지파와 갓, 므낫세 지파에서 모세에게 나아와 청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민32:5).
그 말을 듣고 모세가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거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민32:6-7).
그들이 가족을 두고 형제 지파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원수를 진멸하고 돌아오기로 다짐하자,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32:23).
유의하십시오. 모세가 말하는 죄가 어떤 것이며, 그 죄가 또 무엇을 한다고 하였습니까? 묻 성도 접전하는데 방심하여 안일과 나태에 빠져들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요, 그 죄가 나를 찾아내어 무거운 책임을 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약속 이행과 하나님의 보장
그 후 그들은 정예부대 사만 명을 차출하여 이스라엘의 선봉이 되었고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칠 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요단 동편에 있는 가족과 가축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 일을 담당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였던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성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발길은 진리와 함께 영원히 빛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사실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된다면 염려할 것 없지요. 그렇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요 또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리의 꿀벌이 꿀을 모으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본분인 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선한 일에 따르는 보상
선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악을 멸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을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어 범죄한 이스라엘 남자와 모압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임으로 재앙을 그치게 하였습니다(민25:1-9).
여호수아가 여리고 도성에 정탐을 보냈을 때는 기생 라합이 정탐을 숨겨주었던 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게으른 청지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7-8).
동일한 물질이라도 불의로 취득한 것과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시는 물질은 같지 않습니다.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듯 불의의 재물은 생명을 욕되게 할 뿐이나 선한 일의 보상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 당부
흐르는 세월이라 여호수아도 늙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숱한 고역과 학대, 광야 사십 년 동안의 시련과 연단,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던 모세의 죽음,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던 일과 여리고 도성을 비롯한 가나안 땅의 정복, 모두가 기억에서 지워질 수 없는 일대 파노라마라 할 것입니다. 이제 약속대로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요단 동편으로 떠나는 르우벤과 갓지파, 므낫세 반 지파를 향해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4-6).
머나먼 여정도 끝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지파별도 제비 뽑아 지역도 배분했습니다. 이제 그가 마땅히 안식에 들어가야 하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8-10).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수아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과연 그도 바울과 같이 의의 면류관을 받기에 충분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은혜와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심판
삿 1:1-7
사사기의 명칭은 원어로 쇼페팀입니다. 이는 지도자, 재판관을 뜻하는 소페트의 복수입니다. 사사기는 옷니엘부터 엘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그리던 영토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이지만 그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은 주변 나라들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도 고통과 질병,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그 땅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기도하지 않은 죄
하나님은 일반계시의 은혜 속에서 생육과 번영의 복을 누리게 하시듯 구원을 위해서는 특별계시의 계시로 섭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은혜가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1) 기도하지 않은 과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하자, 기브온 사람들이 위장을 하고 나타나서, 자기들은 먼 나라에서 소문을 듣고 화친하려 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기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지 아니하고 맹세하였습니다. 여호수아 같이 경건한 사람도 기도하지 않으면 속게 되는 것입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9:14-15).
또한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 때에도 아론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나 역시도 기도하고 다시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생각이었습니다.
2) 기도의 능력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8-29).
기도는 귀신을 축출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기도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기도와 믿음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함으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유다와 시므온의 협력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삿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였고 응답은 유다 지파에게 내려졌습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삿1:3).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므로 유다 지파만 올라가도 승리할 수 있으나 협력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말고 항상 합심하고 협력하는 일에 앞서야 합니다. 협력할 때 일어나는 증폭의 효과를 보십시오.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레26:8).
이렇게 단결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올리신 기도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3. 공의로 갚으시는 하나님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삿1:4-7).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무시하였던 것같이(요8:49)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므로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더딜지라도 그 심판을 벗어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주님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천국 가는 길에는 자동장치가 없다는 A W 토저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입니다. 이는 요3:16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이제 나는 천국행 비행기를 ‘자동장치’로 해 놓고 뒷자석에 앉아 평안히 천국으로 가면 된다”는 개념입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언젠가는 큰 환멸을 느껴서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는 자동장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선택은 우리 영혼의 원수들에게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동조절장치에 의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영적 무감각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영적 무감각은 폭군과 같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 멘
이스라엘의 불순종
삿 2:16-25
사사는 성령으로 기름 부어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사사가 있는 동안에는 외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1.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삿2:16,18).
사사들은 왕과 달리 백성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함께하시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5-26).
2.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삿2:17).
이해하기 어렵지요. 사람이 망령이 들면 죽을 짓을 한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역사도 우상을 섬기는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워 남아 있는 자를 다스리게 하였을 때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이고 또 갈대아 군사까지 죽이고 암몬으로 도망하자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42:5-6).
그런데 열흘이 지난 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자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 가게 하려 함이라”(렘43:2-3).
또 여자들이 나서서 무슨 말을 했는지 보십시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렘44:16-18).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영의 눈이 어두워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찌르는 가시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33:5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삿2:20-21).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스스로 자초한 고통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요.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찌르는 가시로 고통이 극심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면 회개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므로 죄악을 따라 심판을 하실지라도 긍휼을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는 사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령된 행위를 우리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우리 모두 육신의 생각을 다스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복 있는 사람
시 1:1-6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복을 좋아합니다. 복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모세의 율법도 복을 약속하였습니다.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7:13-15).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으로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
성경은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모두 복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보십시오.
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레샤임’,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 또는 인격이 견실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좋은 사람과 인격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사람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도덕적으로 해이하거나 인격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입니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4:10, 13-15).
2.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죄인은 ‘카타임’ 목표를 맞추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생은 조물주의 표적을 이탈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로서 남자답게 사는 삶이 있고, 여자는 여자답게 사는 삶이 있습니다.
버트랜드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는가?’에서 아들을 그처럼 처참하게 죽이는 그 신을 나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는 아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은 죄의 대가로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만한 자 ‘레침’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53:1).
유대인들의 교만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마9:32-34).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이것이 마귀의 교만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4.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복 받을 사람은 복 받을 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지만 어둠에 속한 자는 마귀의 말을 기뻐하므로 마귀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오늘의 대중문화가 성경적인가요.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모두가 마귀의 올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2-105).
5.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묵상 ‘허가’는 울부짖다, 신음, 묵상, 포효라는 의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그날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행동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복을 받은 사람들은 열조에게 세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119:127-128).
6. 모든 행사가 형통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형통한 사람을 보십시오.
1) 모든 일이 잘 풀려가는 사람입니다.
2)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3) 시작보다 끝이 더욱 창대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4) 금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내세가 예비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기억합니다. 또 다윗을 비롯하여 뭇 선지자들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진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걸었을지라도 모두가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
과연 진정한 복이 무엇일까요? 영생의 소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의 진리를 더욱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존귀한 자
시 16:1-11
본문 말씀은 속죄의 시 또는 황금의 시, 금언 시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10절).
이 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절).
1.존귀한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도피성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11:1).
환난이 닥칠지라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손길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체리 힐의 글을 소개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쫓으셨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절망적인 상황에 가두신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에 빠지면 믿음을 파괴하겠다며 위협합니다. 그러나 상상 이상으로 믿음이 강해지는 곳은 바로 완벽한 절망의 골짜기입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가장 큰 역사가 행해지는 곳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분의 계획을 실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의심을 녹이고 걱정을 베어내면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가 위를 올려다 볼 때까지 그런 상황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형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테스트합니다.
...
또한 어린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부모처럼 우리를 받쳐주는 모든 지지대를 치우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도, 돌보아주는 물증도, 보상도 없습니다. 넘어져도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걸을 수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니다.
...
수없이 넘어져도, 흉하게 무릎이 까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상처를 치유하시고 일으키셔서 결국 당신의 두 다리로 걷게 하실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격려해주시고 의심과 싸우도록 허락하면서 당신 옆에 계실 것입니다.”
2.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존귀한 자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누구에게 선택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14:2).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생이 담겨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4절).
그 이유는?
1) 마귀와 귀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요.
2) 멸망에 이르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영국인들은 인도를 잃어도 세익스피어는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가 집에 오면 나가서 악수를 하겠지만 주님이 오시면 무릎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3. 아름다운 기업을 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5-6).
디아스포라 즉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거기 묻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한정된 지역이라 그럴 수 없어서 예루살렘의 흙을 무덤에 뿌려준다고 합니다.
나라마다 주고받는 인사가 다르지요.
미국 사람들은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입니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이므로 자고나면 “곤 니찌와” “곤 방아” “지진에 별일 없었습니까?”입니다. 즉 “땅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인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많은 나라이므로 “샬롬” 곧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배고픈 시절이 많았으므로 아침이나 점심이나 저녁, 어느 때, 언제 만나든지 “식사했습니까?”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행복한 사람일까요? 영생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욕되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4. 견고한 복을 주십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16:8-10).
우리가 누릴 기업은 확고합니다. 흔들리지도 않고 버림을 당하지 않는 부활의 영광이요 영생의 기업입니다. 이에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을까요? 넘치는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이 영원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찬양의 은혜
시 22:1-3
노래 없는 인생을 연상해 보셨습니까? 이는 물 없는 사막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노래하는 직업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미국의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초상화가 14억에 거래되었다는 것을 보면 과연 제정신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각기 살아가는 취미가 다르니 누가 무어라 하겠습니까? 사실 노래가 없다면 정서가 매마를 수 있지요. 특히 좋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1. 찬양은 영의 노래입니다.
찬양할 때 은혜가 되는 분이 있지요. 찬양의 은혜를 받은 분들입니다. 또 찬양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복 받은 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흥이 겨우면 노래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노래입니다. 춤에 빠진 사람은 길을 가면서도 노래가 나오면 스텝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찬양을 들을 때에 감동이 됩니다. 또 찬양은 목소리만 좋아서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는 사람이 은혜를 받아야 듣는 사람에게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찬양대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2. 찬양은 구원의 노래, 승리의 노래입니다.
찬양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노래요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입니다. 또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영의 노래요, 마귀를 이기는 승전가입니다. 세상에는 흘러간 노래가 있지만 찬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언제 불러도 은혜가 되고 누가 불러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2, 11-13).
더욱 놀라운 사실은 모세의 노래가 천국에서 불리는 어린 양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15:2-3).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찬양의 영감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어도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보고 미갈이 멸시하였으나 이로 인해 왕의 권위가 실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존귀하게 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다윗 왕국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다윗의 육각형 기를 국기로 쓰고 있습니다.
3. 찬양은 기적을 일으키는 노래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고난의 동참한 다윗의 고난의 시요 노래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이 기도는 분명히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마지막 부르짖는 기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에게 그리스도 고난의 영감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제 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나이까
1.지금도 십자가에서 예수님 지르신 소리
내 귀에 들려옵니다. 처량한 고통의 소리
2. 이 소리 무슨 소린가 예수님 고통의 소리
수렁에 빠진 양떼를 구하는 목자의 음성
3. 하늘도 눈을 감았네 예수님의 고통의 모습
죄에서 해방시키려 피흘린 사랑의 소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다윗을 보십시오. 환난과 고통 중에 처했을 때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이것이 찬양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립지 않습니까? 찬양을 하십시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또 찬양을 하십시오. 항상 주님과 함께하기를 소원하십니까? 찬양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찬양대를 앞세워 찬양으로 적군을 진멸하였고(대하20:21-22), 다윗이 악기를 탈 때 사울을 번민하게 하던 악신이 물러갔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서 찬양할 때 옥문이 터졌습니다.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는 생명력이 왕성하며, 찬양이 죽은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4. 천국에서 부를 노래
찬양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리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기도나 전도, 봉사, 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세상에서 그치지만 천국에서 하는 것은 찬양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천국에는 성도들만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군 천사들도 찬양을 합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계4:8).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6:1-3).
이 찬양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진실한 복
시 128:1-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1).
모두가 복 받기를 열망하면서도 진실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여호와를 두려움으로 섬기고 공경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신앙이 건성으로 흘러간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경건생활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딤전4:8-11).
성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고도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한 일은 없습니다. 가이사랴에 백부장 고넬료의 경건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10:2-5).
그에게 누가 전도하여 이러한 믿음이 들어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백악관에 기도의 집을 만들어 놓은 A 링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의 식탁에 나가기 전에는 육의 식탁에 나간 적 없습니다...이는 내 지혜와 내 능력과 내 노력만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게 나무 베는 시간을 여덟 시간을 준다면 여섯 시간을 도끼 가는(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A. 링컨)
기억하십시오. 복 받을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받을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 수고한 대로 받는 복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절).
내 손이 수고한대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복이라 생각이 드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복이 없으면 수고의 대가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게으르고 복을 못 받아 가난하게 되는 것은 국가도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3:10-11).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1) 실패가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면 더 많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실패하는 인생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2).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실패의 함정을 막아 주시고 또 모든 일을 합력하여 유익하게 만들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실패할 일이 없으니 성공하고, 실족할 일이 없으니 형통할 수밖에 없지요.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갔을 때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어도 하나님은 더 잘되게 해주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또 보디발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지라도 하나님은 요셉을 더 존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복을 받으면 불우한 환경도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3. 가정에 임하는 복
1)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이 땅에서 행복은 가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몰랐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황혼 이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이 가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보물입니다. ‘어린 감람나무’ 이는 사무엘처럼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희망을 주는 새싹들이므로 자식보다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가정들마다 자식들의 복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4. 시온의 복과 예루살렘의 복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시온의 복과 예루살렘의 복은 몸된 교회를 통한 복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는 거룩한 전을 통해 은혜와 진리의 복이 넘쳐날 줄 믿습니다. 또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는 장수의 복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오래 살아도 복이 됨은 시므온과 안나, 또 사무엘과 같이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아 멘
느부갓네살 왕의 꿈
단 2:1-9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1절).
이 년대는 해석상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통치 원년에 바벨론으로 갔고 1장 5절에 보면 그가 왕 앞에 나가기 전 삼년간 개인 교사들 밑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나 조기 이수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1:17-20).
혹자는 느부갓살의 단독 통치 이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그가 부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렇게 왕위에 있으면서 하루는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할 때에 꿈을 통하여 한 징조를 보았는데 이로 인해 마음이 번거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1. 꿈에 본 신상
이 꿈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계시를 이방인에게도 보여주시지만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알 수 없다는 것이요.
2) 하나님의 계시를 박사와 술객, 갈대아 술사들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부각시키기 위한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인들에게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단2:9-11).
진리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그 꿈을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은 그로 인해 마음이 심히 번거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갈대아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5-6).
아무리 폭군일지라도 이렇게 무리한 요구는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등장시키기 위해 그를 번거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하니라”(단2:12).
2. 기한을 구한 다니엘
“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단2:14-16).
왕이 꾼 꿈을 바로 알게 하지 않으면 다니엘도 죽게 되는데 다니엘이 그처럼 당당했던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도 다니엘의 말을 듣고 기한을 허락하였고 또 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3. 합심해서 올리는 기도
다니엘은 그 길로 그의 세 친구들에게 이 일을 고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합심기도의 위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를 통해 비보를 들은 에스더가 자기 백성으로 삼일 동안 자기를 위해 금식을 부탁하고 함께 기도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갔을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이렇게 합심기도로 응답을 속히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단2:19, 23).
4. 왕 앞에 등장한 다니엘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라”(단2:24).
죽게 되었던 그들이 다니엘로 인해 모두가 살아나게 되었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왕 앞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대하는 왕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단2:46).
이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와 위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신상의 계시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2-35).
금 신상을 다니엘이 ‘우상’이라 한 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은 신상을 신으로 숭배하지만 그것은 우상일 뿐이요 신이 아니므로 뜬 돌의 심판을 받게 되고 뜬 돌은 태산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불원간 세상나라는 뜬 돌이신 주님의 심판으로 끝이 나고 진리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뜬 돌이 우상을 깨뜨리고 진리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날, 세세에 왕이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자기의 뜻대로
단 4:4-18
다니엘 이장에 나온 금신상의 꿈은 시대적인 징조요 뜬 돌의 심판은 종말적인 심판을 의미하고 있으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징조는 느부갓네살 개인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평강 중에 나타난 계시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단4:4).
이때가 다니엘의 세 친구의 사건과 시간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평강할 때에 이러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강을 원하고 또한 이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다 말년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멸망이 닥쳤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육체의 기회로 삼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마음의 허리띠를 풀고 있을 때를 노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나 전쟁에 나갔을 때는 기도가 있었고 또 영적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긴장을 풀었을 때는 우리아의 아내가 눈에 들어왔고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2. 비밀의 진리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요한 때까지를 암흑시대라 하는 이유는 사백 년 동안 선지자의 예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든지 선지자는 그 시대의 눈이요 등불입니다. 사람은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으며 빛이 없어도 볼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눈이 있어도 사물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라굴로 태풍을 기억하십니까?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죄수가 아닌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갈 때 지중해에서 일어난 태풍입니다. 그때 바울은 큰 풍랑 닥칠 것을 미리 말했으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행27:10-11).
백부장은 군인이었지만 선장과 선주는 항해에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입니다. 그럴지라도 인간의 경험과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보십시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0-25).
이렇게 바울은 선장과 선주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의 눈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바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복음이었습니다.
3. 성령과 함께 하는 다니엘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단4:8).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에게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부탁합니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단4:18).
오늘 우리가 빛과 소금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과연 생수가 흐르는 교회, 은혜의 불길이 일어나는 교회라면 뭇 영혼이 살길을 찾아서 모여들 줄 압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번민 속에 있는 영혼들이 살길을 찾아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여전히 해갈하지 못하는 물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단4:9).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다니엘은 능히 그 꿈을 해몽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4. 느부갓네살의 권세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단4:10-12).
다니엘의 꿈 해석입니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단4:22).
꿈에 본 신상에서 금 머리는 바벨론을 가리켰는데 여기서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슨 힘이 있을까요?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단4:13-16).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인생은 무기력할 뿐입니다. 느부갓네살을 높인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느부갓네살을 낮추는 것도 하나님의 손길인데 그는 알지 못했으나 다니엘이 해몽한대로 되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우리 모두 다니엘과 같이 주님의 존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기원합니다. 아 멘
은총을 입은 자
단 9:20-23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소망이 사라지는 줄 생각하고 낙담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37:11).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패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지은 죄로 법궤를 불레셋에 빼앗겼으나, 법궤가 다곤 신을 거꾸러뜨렸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하여 만민 앞에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참 신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1. 기도의 사람 다니엘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역사가 요세퍼스는 “다니엘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하나다.”라고 했습니다. 예언적인 영감은 기도 없이는 받을 수 없는데 과연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4:14, 20).
에스겔은 다니엘과 동 시대의 사람으로 다니엘은 일차, 그는 이차 포로로 바벨론에 내려갔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젊은 다니엘이 역사적인 인물 곧 노아와 욥과 함께 기도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느니라”(단2:20-22).
중요한 것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할지라도 응답받지 못하면 어떤 것도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내를 요하는 기도도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를 속히 응답해주셨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단10:12).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은혜되기 소원합니다.
2. 말씀을 상고한 다니엘
다니엘을 보십시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1-2).
다니엘이 어떻게 예레미야의 두루마리 예언을 입수하고, 또 그때까지 보관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경건생활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들인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다리오 왕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위대한 정치가요, 신앙인이요, 총명이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서 참 신앙인은 어떤 환경에서도 소금과 빛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은총을 입은 다니엘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23절).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단10:11).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단10:19).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었습니다. 사람이 신뢰도에 따라서 대화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같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이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이란 그분의 임재 안에 시간을 보냄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계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 말씀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다 떨기나무 옆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통해 요나의 죄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형 수족관 앞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분의 마음을 가끔 한 번씩 나누는 잡담이나 일주일 단위의 방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그분의 집에 거할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분과 함께 오래오래 꾸준히 걸으면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4. 종말의 비밀
다니엘서는 요한 계시록과 같이 종말의 징조와 비밀을 예언한 책입니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이르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기억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단9:20-23).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를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습니다. 동일한 영감을 받아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사람은 깨달으리라”(단12:10).
우리는 다니엘같이 지혜의 은혜를 받아 주님의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고 깨어 있어 그날을 맞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풍랑 속의 인생
마 8:23-27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북쪽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실 때 가버나움 회당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와 귀신들린 자들, 병든 자들을 고치신 후에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던 중 풍랑을 만난 사건입니다.
1. 갈릴리 호수의 풍랑
인생 노정을 고해라고도 합니다. 그 때 일어난 풍랑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속절없이 익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살아나게 된 이 사건은 거친 세파에서 고통당하는 인생에게 임하는 구원 사역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예수를 믿는데도 이렇게 시험이 많은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많은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겪는 풍랑입니다. 감사할 일은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과 풍파가 닥칠지라도 기도로 주님과 더 가까이 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제자들의 아우성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아우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제자들이 대화가 없었으므로 주님께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음식들 겨를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풍랑 일어난 호수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는 절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파도가 잔잔하게 될 줄 알았다면 ‘우리가 죽겠나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 풍랑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신 일로 찬송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리가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서양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빠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3. 주님의 책망
주님께서는 큰 믿음에 대해서는 칭찬이 있었으나 작은 믿음에는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1) 마르다의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믿는다는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 주님께서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2) 귀신 들린 자를 둔 아버지의 믿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막9:22-27).
제자들을 향해 책망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4. 믿음의 기적
제자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8:26-27).
주님은 전능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빛을 남긴 모든 사람은 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헬렌 스토크라는 부인은 이 신앙을 고수하다가 체포되어 남편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한 말입니다.
“여보, 기뻐해요. 오늘 우리가 죽으면 가장 즐거운 날이 될 거예요. 우리 앞에는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 시간 나는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귀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히11:38). 이 믿음 안에 참 평안이 있고(요14:27), 이 믿음 안에 참 기쁨이 있고(빌4:4),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음(요4:14)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풍랑 속의 인생, 그러나 이제는 근심할 것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앞길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합력하여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아 멘
하나님의 나라
마 12:22-30
주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친 일로 무리들이 놀라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비난했습니다.
유의할 것은 순수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지만 교만한 자들은 진리가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1. 사탄의 세계
사탄의 세계는 어둠인데 사탄의 세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26절).
그러나 어둠의 세계는 평안이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탄이 받을 둘째 사망을 영원한 불못이라 합니다.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0-14).
2. 사탄의 계략
사탄은 위장하고 접근하여 택한 자들을 미혹합니다.
1) 간교한 뱀으로 등장합니다.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지혜는 정신적인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으나 덤으로 구하지 않은 물적인 것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누구에게 이용되느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뱀의 계교를 기억합니다. 거기서 승리한 뱀은 여인을 도구로 삼아 남자도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간교한 뱀의 유혹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혹은 화려해도 이면에는 무서운 악마의 사슬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화려한 천사로 등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3) 우는 사자와 같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마귀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수단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처하여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0-13).
마귀의 시험이 불같이 닥칠지라도 주님께서 이기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3. 주님과 바알세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4절).
바알세불은 인분 또는 오물의 주, 파리의 주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나 귀신들은 알고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27절).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막9:38-39).
이렇게 주님 당시에 제자들 외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4. 실현된 천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하나님의 나라’ 이는 우리가 소망하는 본향입니다. 그런데 땅에 이루어진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은 귀신이 축출되고 병마가 물러갑니다. 땅에 이루어진 천국을 보십시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5-16).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이 천국이 우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주님을 따를 자격
마 16:24-28
매년 성탄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붐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과 더 가까이 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일 줄 압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세상을 등져야 하지만 염세주의와는 다르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하지만 금욕주의와 다릅니다. 고난 속에 기쁨이 있고,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돌아오는 진리입니다.
1. 복음을 믿는 사람
사거리에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왔어도 예복이 없으면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도 개와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옥토를 제외한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수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21절).
여기서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때로부터’ 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던 그때부터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받은 복입니다.
1)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
2) 그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3)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절).
이보다 큰 복이 있을까요? 모두가 바른 신앙고백으로 받은 복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어떠한 것도 십자가와 무관한 것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항변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1-22).
그때의 베드로는 많이 흥분해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생의 진리는 십자가에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복음은 참 복음이 될 수 없으므로 십자가 없이는 어떠한 것으로도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생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같이 쏟으시며 울부짖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데 있었기 때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책망
유의하십시오. 마귀가 가룟 유다를 유혹한 것보다 베드로를 시험한 것이 더 무서움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의 시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신 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지만 베드로의 시험은 영육의 영광을 다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육신의 생각을 통해 시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진리이지만 사람의 일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4. 주님을 따를 자격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십자가의 도가 영생의 관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 얻기를 원하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5. 영원히 사는 길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
이것이 영생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운명을 띠고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진리는 죽음이 부활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진리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도는 옛사람이 죽어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5-7).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가신 길,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도 바로 지고 모두가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아 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과 안나
눅 2:36-40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 때까지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에 암흑시대라 합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를 본문에서는 선지자라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계시를 받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다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예언하였습니다.
1. 금식하며 기도한 선지자들
안나는 결혼하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다가 사별하고 오래 혼자 살아온 사람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하는 것은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았느냐 입니다. 지금은 빨리 죽고자 하여도 죽지 못하는 것은 죽을만하면 병원에서 다시 살려놓기 때문이라 합니다.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행복한 노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장수가 불행입니다.
2. 운동을 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3.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좀 재워 달라 할 때에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나이나 지위, 재산을 초월한 친구)
4. TV 시청을 줄여야 합니다.
팔십 년 생애에 수면 20년, TV시청 16년, 식사 6년, 기다리는 시간 6년, 일하는 시간 32년.
5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6.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린 몬로: 웃지 않는 남자와 사는 것은 날 감자를 먹는 것 같다.)
2. 예수님을 만난 선지자들
안나와 시므온, 사무엘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복이 됩니다.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은 외적이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삶을 기도보다 더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없을 줄 압니다. 무엇이 그들을 역사에 존중받는 인물이 되게 만들었을까요? 돈이나 자녀들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세계를 여행한다고 그런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기도하는 자가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일을 두 번이나 기도하였고 주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91:14-16).
고인이 된 승동교회 한수산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장로님의 아들로서 왜정시대 때 건축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핑계로 주일이 되어도 교회를 나가지 않고 목사님이 심방을 오면 바쁘다고 되돌려보내고 하는 것을 아버지 장로님이 보고 “네가 쫄딱 망해서 연탄 구루마를 끌었으면 좋겠다”하는 말을 듣고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부모님의 기도가 그렇게 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3. 감사의 향기
신앙생활에 감사가 없는 것은 양념 없는 음식과 같아서 제대로 맛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힘입은 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야생화의 향기가 진하듯이 역경 속의 감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 진하게 풍기는 것입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가 올린 감사기도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2:28-30).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눅2:38).
4. 메시아에 대한 예언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1-32).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절).
곧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메시아가 탄생하셨는데 그분이 이 아기 예수님이라고 증언 한 것입니다.
이렇게 금식하며 기도하던 선지자들이 메시아를 전할 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눅2:33)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놀라운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시므온과 안나 같이 내가 만난 예수를 만인에게 전하는 증인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죄 많은 여인
눅 7:36-39
옛 어른들은 여자가 꿈에 보이면 그날 몸조심해야 한다. 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14:34)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여자들에게 이런 발언을 해서 여자의 내조를 받지 못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을 줄 압니다. 여자는 요리하는 솜씨뿐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자는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 자는 여자다.”
여자가 행복해야 가정이 평안하고 여자 성도들이 은혜받으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드실 때, 그 동네에서 죄 많은 여인이라 소문난 여자가 와서 향유를 주께 붓고 눈물로 발등을 적시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1. 죄 많은 여인의 믿음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를 하였기에(요9:22) 주님을 집에 초대하여 대접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과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절).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여 선지자 중의 하나로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의 정성이 그 여인으로 인해 빛을 잃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가 죄 많은 연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이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위선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39-41).
위선자는 회개할 필요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믿음의 비교
항상 따르는 제자들이 주님 주변에는 있었으므로 청하여 대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불청객이 등장하여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등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는 것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은 좋게 보고 넘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어떻게 섬기든지, 받은 달란트대로 섬기면 족할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이해하고, 형은 돌아온 동생을 관용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모두가 기뻐해야 할 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희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4-18).
3. 더 많이 탕감받은 은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7:40-46).
이 여인과 같이 더 많이 감사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고의적인 죄는 회개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서운 보응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6: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4.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믿음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사유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고백한 바울은 순교하는 그 날까지 그 사랑의 사슬에 매여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더 기쁘게 하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48, 50).
이제는 그 여인을 죄 많은 여인이라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사유함을 받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어두웠기에 이제는 더 밝은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더 깊은 감사와 감격, 기쁨을 맛보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은혜
눅 8:1-3
갈릴리 전도가 본 궤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1절).
특이한 일이라면 열두 제자와 함께 주님을 섬기는 여인들의 이름이 올려져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누가복음을 일명 “여자의 복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 창조의 질서
창조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부여된 것으로서 이는 자연의 법 또는 자연의 질서이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비롯한 우주 만물들이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충돌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안목으로 자연을 보면 자연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0-23).
사람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그 법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특별계시 곧 진리이지만 율법을 따라 구원받을 수 없듯이 자연의 법도 마찬가지로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기적의 은혜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자연을 초월하는 기적의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구원을 위해 기적을 행하실지라도 자연의 법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 년 동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만나가 끊어지고 땅에서 나는 소산을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가 다 귀하지만 그중에는 가시의 은혜도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9).
바울도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탈선을 막아준 가시가 바로 기적의 은혜입니다.
어느 날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친구의 아이가 백혈병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는데 가서 기도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 소아과 병동에 백혈병 걸린 아이들만 입원된 병실인데 모두가 특수 약물 치료를 받아 머리가 빠지고, 기운을 잃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기가 너무도 민망했습니다. 기도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의 부모가 그 친구에게 “목사님이 기도하고 내 자식이 살겠다는 무슨 말씀이 안계시더냐”고 물어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예,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분명히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그 아이가 죽어간다는 소식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살아났고 그 주 토요일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찌르는 가시를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1) 진리의 교훈을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3. 자족의 은혜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세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병이 들면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을 음식같이 상복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가 족한 줄 깨달아야 합니다. 자족과 감사, 이것은 경건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받은 은혜를 족한 줄 알고 감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주님을 섬긴 여인들을 보십시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8:2-3).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손길은 항상 아름다운 것입니다. 마치 천사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로 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4:15-17).
우리 모두 선한 일에 부자가 되어 더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2, 7-8).
주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 부은 여인을 기억하십시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
우리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목숨 바쳐 주님을 섬기며 엎드려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눅 24:13-35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의 새날이 밝아졌습니다. 이제는 빌라도의 법정이나 마귀의 시험, 유대인의 정죄는 영원히 사라지고 왕 중의 왕으로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엠마오로 행하는 두 청년이 있었는데 글로바와 또 한 제자입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
이들은 요셉의 형제 글로바와 나다나엘로 보는 사람과, 또 요19:25에 나오는 글로바와 누가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눅24:17-24).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30-31).
오늘도 영의 눈이 밝아져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슬픈 기색을 띤 얼굴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그들이 슬픈 빛을 띤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참혹한 죽음만 알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았다면 슬픔 대신 감격과 황홀, 찬양이 있었을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빈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 알았을 때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20:15).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20:16).
이같이 극적인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현실과 이상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I don know how can do love you)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지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3. 메시아 대망 사상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중요한 것은 구속의 개념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이 이스라엘을 속량하는 것인데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제자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또 이것이 오늘까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의 주권이 회복되고 만국을 다스리는 왕국이 이룩될 것을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속의 나라는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6-37).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고전1:18).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마귀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진리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예루살렘으로 돌이킨 제자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옳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불이요 또 심원골수 관절을 찔러 쪼개는 칼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주님을 만난 일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엠마오로 행할 때는 실의와 낙심이 있었으나 극도로 흥분된 것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33-35).
그때 거기 있던 무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사람도 역시 거기에 가세했습니다. 더욱 흥분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시간에 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6-39).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좌정하신 자리가 천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진리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중생의 은혜
요 3:1-12
산헤드린 회원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왔던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를 나사렛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기에 주변을 의식했는지도 모릅니다.
1. 밤에 찾아온 발길
중요한 것은 어느 시간에 주님을 찾아왔느냐가 아니라 주님께 왔다는 그 자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식의 눈을 뜨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는 예수님이 고쳐주셨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9:20-22).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는 시간을 아끼고 분수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기회는 시간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믿음을 칭찬한 이유는 주님을 뵈올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았고 또 주님을 영접하여 내린 결단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8-9).
영생과 물질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홍포 입은 부자는 물질은 있었으나 하나님이 없었고, 내세가 없었고, 영혼을 위한 대비가 없었기에 음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철인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입니다. -
그가 은퇴할 무렵, 자기와 함께 할 친구들도 소원해지고, 강의실을 찾던 학생들도 떨어져 나가자 그는 깊은 외로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베를린 대학 안에 있는 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벤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공원지기가 와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누구요? 어디서 온 사람이요?”
혹시 집도 없고 갈 곳이 없는 노인인 줄 알고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 갈 곳이 어디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요,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하는 문제로 평생을 고민 했지만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뿐이요.”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죽을 것은 알면서도 어디로 가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존중받는 선생으로서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귀중합니다. 비록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지혜에 유대인들은 놀랐습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눅2:46-47).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5-16).
사람을 외모로 대하지 마십시오. 외모로 대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3. 아무나 할 수 없는 표적
니고데모의 발길을 주님께로 오게 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옳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 때문에 주님을 찾는 발길이 아닌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오병이어로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요6:26-27).
4. 중생의 진리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 5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6-7).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육이오 전쟁 때에 함경도 흥남에서 피난 나온 분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으로 순수한 믿음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시골이라 목회자는 일 년에 두 차례, 학습 세례 성찬식이 있을 때뿐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주일이 그렇게 기다려졌고, 성탄이 돌아오면 과연 아기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서 탄생하시는 것 같은 감격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때 몸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로 사경에 들게 되자 부모님도 포기하는 것을 보고 사후에 낙원을 기대하며 마지막 시간을 어느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다리는 중 갑자기 음부가 눈 앞에 펼쳐지는데 그때 깨닫게 하는 말씀은, “아무리 애석해도 시체는 시체실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3,5)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진리를 깨닫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5.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구원의 복음은 곧 중생의 진리입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중생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물러가고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절).
옳습니다. 중생의 진리는 배워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참 생명입니다. 이 중생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니고데모의 신앙 성장
요 19:38-42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진리를 접한 이후 바리새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변증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 가까이 하는 자에게 오늘도 은혜 내려 주심을 믿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1. 어둠에서 빛으로
예수님은 참 빛 곧 영원한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불행이라면 세상이 그 빛을 알지 못하므로 그를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그러나 니고데모는 주님을 찾아왔고 또 영접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주님을 찾은 발길이 많았으나 니고데모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는 썩어질 양식이나 병든 문제, 또는 어떠한 올무를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마11:7-9).
2. 예수님을 변호하는 믿음
주님께서 두 번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가르치실 때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학벌이 없는 주님께서 글을 안다는 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7:15).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글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는 배우지 아니하였고 가르친 스승도 없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6-17).
성도들 중에는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저같이 학벌이 낮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 병들어 기억력도 흐려져서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지를 못합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구역예배를 드릴 때에는 말씀이 솟아나와 성도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각처에 퍼지므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6-49).
그때 니고데모가 한 말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절).
세상에는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죄를 짓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누가 기뻐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3:14-16).
니고데모가 그처럼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믿음은 자기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
예수님은 분명히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나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의 믿음이 얼마나 복 받을 믿음인지 보십시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눅12:8-9) 하였습니다.
3. 예물을 주께 드린 니고데모
한 그루의 식물이 결실하기 위해서는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같이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과 봉사, 예물로 성령의 열매 맺기 위해서는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성도 중에는 주일마다 다른 사람을 태워서 모시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새벽 예배 한 번을 빠져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야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신앙이 성숙해야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사람은 어린 시절이 그리울지라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같이 우리의 신앙도 어린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성숙해진 니고데모의 신앙을 보십시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터리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4. 복을 받은 니고데모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았던 그 일로 인해 그 이름은 생명록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 문을 터뜨리고 부활하셨고 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옥합을 깨뜨려 발을 적신 여인이 복을 받았다면 몰약과 침향을 드려 주님의 시신을 모신 니고데모의 정성 역시 귀하게 받으신 줄 믿습니다. 영원히 복되고 기념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긴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니고데모와 같이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 멘
합심 기도
행4:23-30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복음이 살아서 사역하신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사역이 기도와 함께 일어난 역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환난과 박해가 극심하였어도 좌절과 낙심이 없었던 것은 기도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장애도 걸림돌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디딤돌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또 기도로 무장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니이까”하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 나를 보내소서 내가 있나이다”하고 헌신하는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1. 기도는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기도 없는 신앙은 단전된 공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설이 잘 갖추어졌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모태 신앙도 많을 줄 압니다. 복 받은 분들입니다. 또 상당한 신앙 연조를 가지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경건의 모양과 함께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법궤를 통하여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경건이 의식화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기도는 명령입니다.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16:10-11).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105:3-4).
2. 기도의 종류
1) 개인기도
기도는 언제든지 감사로 시작하여 회개하고 간구하고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까? 감사하므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는 지름길이 될 줄 믿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2) 공중 기도
이는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공중 기도는 모임의 성격을 따라 거기 맞는 기도를 올려야합니다. 공중 기도는 회중 모두에게 은혜가 되어야 하므로 준비 기도가 많아야 합니다. 주의할 것은 감정이 들어간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예배 시간에 적절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합심기도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기뻐하시지만 합심기도를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십니다. 이때는 같은 목표를 두고 기도하므로 응답이 속히 나타납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본문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행4:23-24).
여기 개인의 사정이 따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은 모두가 주님의 일이요, 그 일이 곧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하나 되게 하였을까요? 이것이 환난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4-31).
이렇게 기도는 중요합니다. 이 무한한 자원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뭇 성도 접전하는데 나 혼자 편히 누워서 영광에 이르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주의 일에 앞장서는 역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장소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이것이 다락방 기도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 오순절에 임하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실 기도는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각기 사정에 따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일과 나태는 적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무방하리라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사7:10-13).
주님의 이름을 두신 전에서 올리는 기도는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4. 기도의 능력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8-29).
흉악한 귀신들린 아이를 두고 제자들이 밤새껏 씨름했으나 축출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다스릴 수 없으나 기도하는 사람은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 되어 영원한 승리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흥왕하는 교회
행 6:1-7
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왕성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지상의 천국이 확장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1. 초대교회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세운 성막의 중요함은 하늘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이요. 교회의 중요함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있었고 중생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땅끝까지 증인 될 사명이 불타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말씀이 흥왕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당시에는 그의 아들들의 지은 죄로 인해 영감이 사라져서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했습니다(삼상3:1).
말씀이 희귀해지는 것은 영적인 암흑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환난 때에도 영적인 기근과 기갈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그런데 초대교회는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가 충만하며 말씀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6:7-8).
태초에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또 보혜사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초대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같은 시험이 닥쳐도 위축되지 않았고, 어떠한 장애에도 그것은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선포할 때 놀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는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
2) 또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3. 제자의 수가 흥왕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1-42).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4: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그때 은혜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이것이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이렇게 급격히 늘어나는 성도들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세우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는데 집사의 기준은,
1)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집사를 세웠다고 해서 그 숫자를 12사도나 천국의 24장로와 같이 특별한 의미를 둘 이유는 없는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은혜를 받아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4:5-7).
3) 칭찬 듣는 사람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집사의 자격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8-11).
직분을 맡은 자가 모범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므로 더욱 주위 해야 합니다.
4. 능력이 흥왕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2:43).
초대교회에 일어난 이 역사는 단번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6:8).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5-8).
기억하십시오. 성령으로 인한 복음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우리는 땅끝까지 전파될 복음의 증인입니다. 사명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두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역사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의 대열에 앞장서서 기적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아 멘
고넬료의 신앙
행 10:1-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1-2).
고넬료는 로마의 군대 백부장으로서 어떻게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믿음과 경건 생활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 고넬료의 믿음
고넬료는 구라파 전 지역과 애굽을 비롯한 중동,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한 철권 로마제국의 이달리야 부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요새화한 강한 성으로 아구스도 가이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가이사랴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성은 해변에 위치해 있으므로 로마나 다른 식민지들과의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로마 총독이 여기에 거하였으므로 고넬료는 경호부대의 백부장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였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율법적인 신앙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유는 오순절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실천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의 신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경건한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하셨습니다.
2. 고넬료의 구제
군인은 정치인이 아니기에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위해 구제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선한 일은 반드시 어떤 특정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선한 일은 소비나 낭비가 아닌 옥토에 심는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업의 부자는 영원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5-36, 38).
3. 고넬료의 기도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2-6).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는 사자굴에 던질 법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다니엘과 같이 고넬료의 경건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또 믿음이 없는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
4. 하나님의 응답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행10:31-32).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청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가 전도자를 흠모하는 이유입니다. 고넬료는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즉시 욥바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에 즉시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베드로의 설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 시몬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베드로에게도 환상이 나타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은 마음을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이르자 고넬료가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10:24-25).
1) 친척과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이는 은혜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새로 등록한 가정에서 심방 요청이 있어 약속을 하고 갔더니, 냉장고에 ‘0일은 목사님이 심방오시는 날’이라는 글이 붙어 있어 감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가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응답해주십시오.’ 하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십 년 만에 아들을 얻어 그 아들이 잘 자라 지금 미국에서 영재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2) 베드로의 발 앞에 절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 베드로에게가 아닌 그와 함께하시는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복 받을 준비, 곧 은혜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에 오순절의 역사가 고넬료 가정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4-46).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이 놀란 것은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인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은혜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바울의 마지막 훈계
행 20:17-21
바울은 성령에 붙잡힌바 되어 3차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에베소는 밀레도에서 45km 떨어진 거리입니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0:18-21).
1. 겸손으로 훈계하였습니다.
겸손은 항상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흔히 교만과 겸손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만과 용기를 혼동해서는 안 되며 아첨과 겸손을 혼동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속한 곳 -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관계를 뛰어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됩니다.
마틴 루터는 거센 홍수에 떠내려가는 인생이라는 위험한 배에 올라타면서도
“도미니 수무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녀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세월의 파도가 거세질 때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배는 침몰하거나 좌초하지 않습니다.
배의 키는 하나님이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 정석 목사)
2. 눈물로 훈계 하였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29-31).
눈물샘은 반가워도 열리고 슬플 때나 고통을 당할 때도 열립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주님의 탄식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3. 인내로 훈계했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0-21).
제가 시한부 종말론 자들에게 빠져든 부교역자를 총신 교수의 추천으로 세웠다가 많은 고통을 겪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분별없이 빠져든 성도들을 붙들고 애원해보기도 했습니다.
“처음 등록할 때의 교회가 지금에 와서 달라진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처음 신앙생활 했을 때 알았던 목사가 지금은 변질된 것으로 느껴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 무엇이 불만이 있어 거기에 빠졌냐고 물어도 돌이킬 줄 모르는 것을 보고 그날이 되면 후회할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 따라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면 이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4. 흉악한 이리에 대한 경계입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2서9-11).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1서4: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3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12:9)가 마지막 불못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는 시험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욱 경성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건물에서 삼층에는 교회가 있었고 지하에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술집에 왔던 손님이 이층에 있는 화장실을 찾으면서 삼층에 교회가 있는 것을 보고,
“응, 여기는 지옥과 천국이 함께 있네” 하였습니다. 술 취한 사람도 교회는 천국이요 술집은 지옥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천국을 외면하고 지옥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귀의 올무에 빠져있기 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위해 환난이 닥쳐도 위축되지 않았고 스데반은 돌무덤에 들어가면서도 얼굴은 천사와 같이 밝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4-2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뿌리와 줄기
롬 11:13-24
로마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본문은 감람나무의 접붙임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뿌리와 원가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뿌리는 아브라함에게 세운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그런데 이 복이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수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달리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도 진리 가운데 바로 서 있다면 말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1-36).
본문은 하나님께서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우리를 유대인 되게 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 후손이 복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또 율법을 주셨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며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신 것을 구원의 진리 곧 성경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열국 중에서 선택받은 백성이지만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39-41, 44).
2. 원 가지와 접붙인 가지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내면적으로 큰 근심이 있었는데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일본이 낳은 성자 하천풍언의 말입니다. “기독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교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나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나의 조국 일본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7-9).
그럴지라도 우리는 원가지가 아니라 접붙임을 받은 가지임을 알아서 자만하지 말고 두려움으로 주를 섬기고 떨며 구원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3.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세상의 부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11:12).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복음이 이방에 넘어온 것이 사실일지라도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들의 넘어짐’ ‘세상의 풍성함’ ‘그들의 실패’ ‘이방인의 풍성함’ 모두가 그리스도 복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민족이었지만 오신 메시아로 인해 도리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유대인이 받아들이지 않고 버렸다고 하여 복음이 복음 아닐 수 있으며 진리가 비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3:3-4).
예수 믿는 사람이 실족하여 넘어질지라도 복음이 잘못될 수 없는 것같이 진리는 여전히 진리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실패로 구원받는 복음보다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함께 구원을 받으면 그 은혜가 더 귀하다 하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4. 그림자와 실체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믿음에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과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참된 예배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그럴지라도 겸손해야 할 것은 우리는 여전히 접붙인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11:17-18).
여러분! 우리는 죄인 된 근본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열매 없는 가지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모두가 참감람나무의 진액으로 선한 일에 부자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도의 실천 강령
롬 12:9-21
석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보면 그 말이 합당하지 않는 것이 사람은 유아독존이 아니라 조물주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상부 상호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서로 사랑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9절).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어느 순박한 시골 아낙네가 TV에서 로맨틱한 드라마를 보았는데, 다음 날 보니 배역이 바뀌어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를 날마다 바꾸는 몹쓸 인간들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랑에는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서3:18).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2. 먼저 존경하라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3-4).
화목이 어디서 깨뜨려지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일 때입니다. 하루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의 좌우편에 두 아들을 앉혀달라고 요청하자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기는 보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3. 열심을 다하여 주를 섬기라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이같이 미지근한 신앙은 안일과 방심에 빠져있는 자들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
이것이 자만심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의 눈이 어두워 참으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미지근한 사람은 뜨거운 것이 어떤 것이며 찬 것이 어떤 은혜인지 그 진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과연 뜨겁게 주님을 섬기는 자라야 찬 은혜의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뜨거워야 하지만 율법은 엄격해야 합니다. 뜨거움과 찬 것이 교차하는 가운데 신진대사가 원활해지듯이 우리의 속사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4.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성도의 기쁨이 세상의 기쁨과 다른 것은 죄에서 벗어난 구원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평안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 길을 가는 자들은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천국의 소망이 있는 자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5. 환난 중에 인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보십시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파스칼은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하였고,
죤 밀턴은 “오! 주여,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내 영혼이 수그러짐은 나의 창조자를 섬기기 위함이니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인격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고난과 역경은 은혜 받을수 새로운 기회가 됨을 믿습니다.
6. 기도에 힘쓰고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폐활량이 좋아야 몸이 건강하듯 기도가 왕성할 때 믿음이 좋아집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이러한 손길이 은혜를 받는 손길이요 열매 맺는 손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아름다운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랑의 부채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사람이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남에게 빚을 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니라”(신15:4-6).
1. 물질적 부채
‘빚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일단 부채를 갚기까지는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2-14).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7:9-10).
기억하십시오. 계명을 지킬 때에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담당하지만 불순종하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2. 영적인 부채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과학자를 냉동시켜 후일에 그 병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회생시켜 달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암을 다스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정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끝까지 죽음에 항거하다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눈을 감게 되는데 이것이 선악과로 타락한 죄의 보응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대속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유의 은총을 힘입은 성도는 죄에 매여 종살이 하던 어둠에서 벗어남을 믿습니다. 우리는 숙명론 곧 그렇게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멍에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에 매여 종살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사망권세 깨뜨리고 승리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의 부채
사랑의 부채는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망각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주는 선물을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보고 “자네는 주지 않고 받기만 하였는가?” 물었더니 “아니요 저도 꼭 같은 것을 선물했어요”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돈 가지고 제 것 산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의 선물은 주는 것도 기쁨이 되고, 받는 것도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까? 그 사랑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사랑이나 조건부의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을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사랑입니다. 이 큰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 사랑의 멍에 아래서 종이 되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5:13).
사랑의 멍에 외에 다른 멍에는 메지 마십시오. 전남 고흥에 있는 녹동 제일교회 강채영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조그마한 서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섯 곳에 교회를 개척하게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울 자리가 나면, 갑자기 돈이 들어와서 가마니에 넣어 창고에 쌓아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입니다. 아직도 사랑이 고갈되어 나눌 것이 없는 줄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십니다.
결코 늦지 않으시는 주님 -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시점에 건져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빠르면 빨랐지 늦는 법이 없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주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은 자주 있어도, 주님께서 당신을 마냥 기다리게 내버려 두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단 일초라도 기다리게 하지 않으시고 정확히 약속을 지키십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하신 말씀은 당신이 주님을 신뢰하기를 지체하여 스스로 넘어지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주님께서 약속을 이뤄주시는 시점을 지나치게 지연하여 당신을 넘어지게 하시는 일은 단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C S 스펄젼)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아 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롬 13:11-14
본문은 탕자 어거스틴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한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나 내게 있어 특별히 은혜가 되는 말씀이 있고 또 은혜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여기에서 시기라는 말씀은 크로노스 즉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Kairos) 중요한 시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1. 이 시기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는 진리 가운데 있는 자가 깨닫게 되는 은혜 받을 시기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개인적인 종말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임박한 재림 사상은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초대교인들 중에는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종말 사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지금 우리나라에는 신천지를 비롯하여 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여 양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4-5, 9-13).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이 부활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종말을 우리가 알 수 없듯이 개인적인 종말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2.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어둠의 일을 벗어버립시다. 어둠의 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절제하고 부끄러운 죄악의 행위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절).
소돔과 고모라가 오늘보다 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마트 폰에 중독되는 청소년들의 장래가 염려됩니다. 어둠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현실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마귀의 견고한 진을 깨뜨리고 건져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0-11, 13).
3.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 세례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물론 우리는 육신(flesh)과 몸(body)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는 “육신을 기르는 것은 원수를 기르는 것이요 몸을 멸하는 것은 친구를 멸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8-10).
2) 선한 행실입니다.
얼굴 파는 여성은 늙으면 그만인데 어머니는 늙어도 더 존귀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한 업적의 가치, 곧 자신을 희생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졌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으로 무장하십시오. 모두가 주님의 날에 영광이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활의 진리
고전 15:1-8
미국 하버드대 법학 교수 Dr Simon Green Leaf의 말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이든 편견이 없는 법정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가 제기될 때 그것을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판정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불신자들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시는지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1-23).
1. 부활의 진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4, 7).
부활이 없었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나사렛 이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바울의 증언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3-8, 19-20).
2. 대속의 은총을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베드로의 무덤이 있고 또 성당마다 성모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다가 죽었을지라도 그들의 죽음이 누구를 대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1:12-13).
오직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주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속의 진리를 증언할 수 없지요. 죽은 자는 증언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마리아에게 보이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와 또 다른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실 때에는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육안으로 보고 믿는 것보다 진리로 믿는 것이 정확하기 때문입지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요5:33-37).
3.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증하는 진리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의 혈통을 바꾸어 의의 반열에 서게 해 주셨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1-2).
4.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는 것이 그리스도 부활에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9:22).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눅18:31-33).
이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마27:62-64).
그런데 그들이 경비병을 통해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접하고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28:11-15).
어둠에 속한 자들은 거짓을 믿고 빛에 속한 자들은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불원간 오실 재림의 약속이 남아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모두가 영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엄한 명령
딤 후4:1-5
제임스 몽고메리의 글을 소개합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거룩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시작하는 시점이 언제가 좋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대답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마음껏 즐기고 신앙은 나이 들어서 가져도 늦지 않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정 반대입니다.
“나를 위해 살려거든 지체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빠를 때, 곧 젊어서 시작하라. 네가 젊어서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늙어서도 나를 위해 살 가능성이 없고, 네 삶은 결국 황폐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선한 충고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젊을 때 익혀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고 대부분 평생을 갑니다. 젊을 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교회에 다니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선을 행하는 좋은 습관을 기른다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도 더 쉽게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젊을 때 나쁜 습관을 기른다면 나중에 올바른 선택을 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또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젊을 때 순결한 습관을 형성하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바울은 영광스러운 노정의 종점에서 이제 순교의 쓴잔을 앞에 두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1-3).
1.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내린 명령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확실한 진리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영원불변한 것은 진리입니다.
저명한 공학자 Richard Bube는 “과학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속아온 것 중에서 가장 큰 속임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세상의 어떤 이념이나 철학이나 과학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인간 세상은 끊임없는 개혁과 발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 영생의 진리가 온 세상에 충만할 때 땅 위에 천국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2. 증인의 임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기회가 돌아왔든지(opportune) 돌아오지 않았든지, 시기가 돌아왔든지(in season) 돌아오지 않았든지(out season), 또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합니다. 차를 몰고 달리다 보면 도로 보수공사를 하는 곳에는 사람 대신 로봇이 안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사람보다 났지요. 사람은 쉬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교대를 해야 하지만 로봇은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사명을 맡은 자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3-14).
소금이 음식 따라 맛을 다르게 내지 않으며 빛은 어떠한 물체든지 동일하게 비취듯이 전도자는 대상 따라, 또 환경 따라 임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삯꾼 목자에게 책망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같이 크게 넘치리라”(사56:10-12).
3. 전도자의 자세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존 허튼 경은 등산에 성공하게 된 요인으로 계획과 조직력, 우수한 장비 등을 들면서 결론은 “우리들의 성공을 지켜보고 기대해 주신 다수의 성원과 기도의 덕분이다. 또한 신의 인도를 받는 인간 정신은 정복하지 못할 높은 산도, 깊은 바다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영국인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파는 상술을 지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상술이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그렇다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일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옳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어느 목사가 인기 절정에 있는 희극 배우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목사님은 진실을 거짓같이 전하고 나는 거짓을 진실같이 전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과업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나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받은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4. 때가 이르리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이는 복음을 전할지라도 열매 맺을 수 없는 어둠의 때, 믿으려고 하여도 믿을 수 없는 때가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
우리는 때가 이르기 전에 복음의 증인으로 본분에 충성하여 의의 면류관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