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입을 때까지
눅24:49~52
세상에는 육적인 전쟁이 있는가 하면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 육적인 전쟁에서 패배하면 생명과 영토를 잃게 되고, 영적인 전쟁에서 패배하면 영생의 소망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적인 전쟁에서의 승리할 수 있을까요? 영적인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아버지의 약속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는 오실 메시아의 첫 번째 언약입니다. 메시아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고 그의 전 생애는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그의 죽음과 부활, 또한 장차 오실 재림의 역사, 어느 것 하나도 선지자의 예언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생애였으며 새로운 언약 속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해, 또한 무엇을 목적으로 세운 언약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언약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은혜의 통로가 열려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또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주느냐”(찬311장)
2. 보혜사 성령의 약속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보혜사 성령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한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또한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증거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어떠한 사역을 하시는지 보십시오.
1) 거듭나게 하십니다.
밤에 니고데모가 주님께 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고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주님이 행하시는 그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3,6).
옳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으므로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는 자라도 돌감람나무요, 참감람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본래 멸망 받아 마땅한 진노의 자식은 어떠한 수양이나 도덕으로 거듭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바울이 이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이것이 복음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5~16).
2) 능력을 주십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0~12).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라면 시험을 보는 시간에 근심할 이유가 없고,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경기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용장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 족속들이 먹이로 보였으나,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메뚜기 떼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왜 그처럼 부흥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험, 환난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처럼 미워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선해졌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은 더 흉악해서 재판도 없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위축되지 않은 것은 영적인 무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17~19)
3) 은사를 주십니다.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는 무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잔치는 모두가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솔로몬이 무엇으로 그처럼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재산이 있다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은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귀신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의 입니다. 이 영적인 무기는 능히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활용하십시오. 또 은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식이 필요합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더 큰 믿음에 이르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병마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병마를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의 병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능력과 예언, 영 분별,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지금도 사망 권세 깨뜨리고 뭇 영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십자가의 정병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은 전대나 두 벌 옷, 지팡이보다 이 영적인 무장을 필요로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모습을 연상해 봅시다. 거기는 약한 자가 없었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닥치면 불같이 일어나고 사자 같은 시험이 닥치면 그를 능가할 새 힘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무장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일어납시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 은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그 큰 능력, 영원한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주님 맞을 준비
살후2:1-12
데살로니가 후서는 데살로니가 전서에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 문제를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이 장은 본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일어날 사건들을 순서에 따라 다룬 후 올린 기도입니다.
1. 그리스도 재림과 그 시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새로운 메시아가 와서 구원하여 주실 날을 기다리고 있으나 우리는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신 메시아를 믿고, 또 고난당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신 재림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믿는 메시아와 우리가 믿는 메시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세속의 왕국을 꿈을 꾸고 있지만, 주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 시달렸으므로 그들에게 박해와 고난이 있을 때마다 원통함을 신원해주실 주님의 재림을 더 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에는 어떻습니까? 극심한 빈부 격차, 전쟁에 대한 불안, 각종 범죄와 약점을 이용하여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말한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분명할지라도 성경에서 비밀로 묻어둔 것을 우리가 언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래 주님의 재림 날짜는 신, 불신을 막론하고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문제를 궁금하게 여길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간교한 자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 삼위하나님이 동등하다 할지라도 하시는 일은 구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으시고, 성령은 아들이 흘린 피를 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8~12)
미혹시키는 영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 때에 아합을 죽이기 위해 거짓 영이 거짓 선지자 사백 명에게 들어가서 하나같이 거짓 예언을 했던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인 주의 재림의 날짜를 말하는 거짓된 시한부 종말론 자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2.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2:1~2)
즉 요동하지 말고 일상적인 생활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세속에 물들어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니라면 주님 오시는 날에 “어디에 있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
3.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을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1) 원수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여호와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이유는 원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이 밤낮없이 싸워야 하는 것같이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마귀가 있으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2)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0~41)
그 때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뿔뿔이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죽는 데도 함께 가겠노라고 장담하던 베드로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의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 오실 때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합니다.
어느 때 누구를 막론하고 성도들은 주님 오시기를 기대하는 마음 한결같을 줄 압니다. 물론 연세 높으신 분들이 더 간절하겠지요.
목사도 장례식 주례를 하다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 오시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닌 영광의 날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광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이 말씀은 세속에 물들어서 종말 의식도, 주님을 영접할 준비도 없이 안일하게 지내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적인 징조를 볼지라도 이제는 머리를 들고 주님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4. 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종말을 대비한 성도들은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즉 받은 달란트를 갑절로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장사하는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장사는 단순히 사고파는 거래로만 생각하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먼저 신용을 살려야 하고, 남들보다 부지런해야 하고, 또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 하고, 경쟁력을 살려야 흑자를 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루아침에 국제 재벌로 등장하였다가 또 하루아침에 부도 처리되어 철장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자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인생 문제에 있어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인에게서 재능대로 배분받은 자본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나누어 준 분량에 신경을 쓰기보다 얼마를 남기느냐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은 달란트를 재능대로 배분했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이 찾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인이 요구하는 것은 충성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결코 주인에게 무익한 청지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업적, 과연 얼마나 이룩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 범위는 땅끝까지 두고 그 업적은 하늘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해 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청지기라면 받은 달란트를 남기는 것보다 더 큰 준비는 없을 줄 압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모두가 각기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을 다짐하여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호령과 천사의 나팔소리 울리는 그날 영광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모든 사람의 가는 길
왕상2:1-4
인생은 인생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고 짐승은 짐승으로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짐승 중에도 유인원 원숭이 종은 영리하여 사람의 흉내를 내면 그것을 신통하게 여겨도, 사람이 짐승 흉내를 내면서 짐승같이 살면 욕이 됩니다. 또한 같은 인간일지라도 삶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방식이 다양하다 할지라도 세월에 따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갔더니 관광객들 중에 일본인들은 청소년들이 많은데 서양인들은 노년층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서양인들은 사회복지제도가 잘되어 늙어서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 비해 힘들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처럼 위엄과 권세를 떨치던 다윗인데 그가 임종 직진에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왕상2:2)
1. 다윗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윗은 평범하게 태어나서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광야를 누비며 성장했습니다. 오늘도 유대 광야에는 베두윈이라 하는 양을 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그들은 대부분 지극히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특이한 면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입니다. 그는 문명과는 거리가 있었을지라도 은혜 가운데 사는 복되고 존귀한 소년이었습니다. 믿음의 열조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이 발전한 오늘에 비하면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천국의 소망이 있었는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시날 평지에 쌓아 올린 바벨탑의 문화로 모래성과 같아서 파도가 스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백 층이 넘는 빌딩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는가 하면 일본은 해상에 세울 500층짜리 빌딩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하나님의 입 기운에 사라집니다. 소련 공산당 전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누구든지 정신병 환자가 아니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세상에는 정신병자가 많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마귀의 충동을 받으면 이성을 잃게 되고 스스로 죽는 길을 가게 되는데 그것이 마지막 때 일어날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16:12-14,16)
때가 되면 왕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평화를 운운한다 할지라도 평화가 깨뜨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2.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곰과 사자와 싸워 이겼을 뿐 아니라 골리앗을 거꾸러뜨리므로 나라를 구해내었고, 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을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고 다윗을 위하는 자들은 함께 복을 받게 했습니다.
3. 시련과 연단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처럼 존귀에 이르게 되었을지라도 그의 발자취는 말할 수 없는 시련과 연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뒤쫓던 사울로 인해 받은 시련과 또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일로 집안에서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죄 없는 사람? 물론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죄를 모르는 어린 아이일까요? 사실 일생토록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린 아이의 순수성은 천사와 방불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아담의 혈통을 이어 받은 원죄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피골이 상접하도록 침상을 적시며 통회함으로 사유의 은총을 힘입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1-5)
4. 다윗의 유언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이는 직역하면 “너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결단력이 있어야 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2:3)
이것은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이면서 믿음 안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영광을 비교한다면 이보다 귀중한 것이 무엇이며, 비중을 봐도 이보다 더 값진 유언이 없을 줄 압니다. 진리대로 순종하고 그 법도를 준행하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3서4절)
옳습니다. 자녀들이 복 받는 것을 보는 것으로 부모의 소원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3절)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축복의 유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2:4)
과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처럼 귀한 언약을 하셨고 그는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나 그 길은 죄인들이 가는 멸망의 길이 아닌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빛으로 남아서 아들 솔로몬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생명과 복이 되는 교훈입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요 축복입니까? 우리 모두 다윗과 같이 진리의 등대되어 영원한 빛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베드로의 설교
행10:34-43
본문 말씀은 이달리야대에 소속한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증언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 제이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그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청중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는데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이 일로 직접 목도 했던 베드로가 놀랐고 그 보고를 받은 사도들도 놀랐습니다.
1. 고넬료의 경건생활
진리는 어떤 혈통이나 국가에 국한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믿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4: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의 혈통이라 하여 자랑할 것도, 이방인이라 하여 좌절할 이유도 없는 것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께는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29)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 중 네 사람의 백부장이 있는데 모두가 신앙의 사람입니다. 복음서에 나온 두 사람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두 사람 중 특별히 본문에 나온 백부장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2)
사람과 또 환경에 따라서 가치 기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문화인이라 하여 진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군인의 신분으로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루는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냈습니다.
“고넬료야”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3-4)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고넬료가 모처럼 구제하고 한두 번 올린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더니”
그렇다고 기도할 때마다 천사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믿음입니다.
혹자는 목사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는가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목사님,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내일부터는 새벽기도에 안 빠질 것입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 얼마나 고마웠던지, 또 기도의 일군이 나오리라 기대합니다. 지금 새벽마다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우리도 올리는 기도와 맺은 열매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의 응답
1) 고넬료에게 내린 지시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10:5)
고넬료의 경건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는데 베드로를 청하여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제사장이나 유대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요,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질서와 선교의 차원에서 빌립이 전도한 사마리아에 사도들을 보내어 성령을 받게 하시고, 마게도냐 빌립보에 사는 루디아의 가정에 바울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셨던 것입니다.
2)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
욥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가 제 육시 기도시간을 따라 지붕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복음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해, 뿐만 아니라 주의 복음을 더욱 담대히 증언하기 위해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등 모두가 부정한 것으로 평소에는 율법을 따라 금했던 것이었습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행10:14) 이렇게 거부하는 베드로를 불순종으로 정죄하지 않은 일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행10:15-16)
여기서 네 귀를 매달아 내린 데 대해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달아 내린 데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10:17-20)
환상의 의미는 여기에서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의 축복을 내리십니다. 고넬료는 기도할 때 주의 사람을 모셔오게 하였고, 베드로에게는 환상을 보인 후에 의심 말고 함께 가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도 응답 받는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베드로를 영접한 고넬료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10:24-25)
사실 구원의 은혜는 사람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세주가 오셨는데도 멸시하고 외면한 유대인들에 비하면 고넬료는 너무도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절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권위 앞에 자신을 낮춘 겸비를 보인 것입니다. 평소에 쌓은 덕과 경건한 그의 신앙, 또 그의 기도는 인간 베드로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영광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 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찬534장)
4.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베드로는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중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거기서도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10:44-45)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
지금도 성령이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제이, 제삼의 고넬료를 찾아 땅 끝까지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명하고 또 기뻐하시든지 즐겨 순종하여 주님 뜻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수1:1-9
여호수아서는 모세 오경으로 족장들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정착시키므로 새로 건설된 신정국가를 보여주기 위하여(수21:43-45) 기록된 책입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1. 모세의 대를 이은 여호수아
모세와 여호수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첫째 혈연과 믿음의 관계요 다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입니다.
1) 혈연과 믿음
모세는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하시고 크게 들어 쓰신 인물이지만 아론과 같이 계대를 잊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형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의 직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영도자로는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혈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
2) 질서의 하나님
크게 되고 강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던 엘리사의 요청과 엘리야의 대답입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2:9)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왕하2:10)
이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까? 그로 인해 땅이 입을 열어 고라의 무리들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위치를 바로 알고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어느 때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는지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1-2).
2. 약속의 땅 가나안
가나안 땅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이후부터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전쟁이 빈번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면서 그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유업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있던 일곱 족속에게는 원수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줄 압니다. 혹시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라면 몰라도 남의 땅을 밟기만 해도 네게 준다고 하였으니 놀랄 일이지요.
그런 일이 오늘에도 보장된다면 당장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서 아메리카 대륙을 모조리 밟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한정된 지역이 있었습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1:4)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천국의 모형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약속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젖과 꿀이 흐르는 진정한 복지는 그리스도의 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도 그리스도 복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영토 넓히기 위해 피 흘리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받는 구원의 영토를 넓혀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하겠습니다.
3.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어떻게 보면 가나안 땅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업으로 주셨으므로 그 때에 영도자 여호수아는 다른 염려 전혀 없이 요단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보장도 보십시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
그렇게까지 하셨는데도 “강하고 담대하라”(수1:6)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약속의 땅에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원수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12:29)
옳습니다.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4.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어느 사회나 국가를 보더라도 극단주의자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직도 물리적인 방법이 최상인 양 물의를 빚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볼 때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주권을 국민이 행사할 수 있다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진리는 절대이므로 가감이나 타협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형통이 무엇일까요? 이는 무사안일이나 향락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모두 썩어질 것이므로 허무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누린 형통의 복을 보십시오. 외부적으로는 약속 땅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바로 다스려야 하는 무거운 짐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뻐할 일은 진리를 위한 수고에는 대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좌절과 낙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와 영광이 우리에게도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영적인 세계에 많은 혼란을 빚고 있습니다.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등 별별 사이비 인사들이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새로운 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심지어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에 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의 가죽을 덮어 쓴 이리들의 미혹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물질 뿐만 아니라 영혼을 노략질하는 어둠에 속한 무리들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큰 은혜 힘입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 언약의 직분
고후 3:6-9
바울은 고린도후서 삼장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언약에 따른 직분과 새 언약에 따른 직분을 비교하고 거기에 따른 영광의 차이도 언급하였습니다.
1. 옛 언약과 영광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3:7)
‘없어질 영광’이 무엇을 뜻할까요? 사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종들과 신약시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서 받을 상급에는 어떠한 차이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 하여 구원에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았는데 오늘에도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2. 옛 언약은 사라질 것입니다.
율법은 공의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율법의 예식
1) 할례
이는 육체에 있는 구별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
2) 제사
출애굽 이후 사백팔십 년 만에 건축된 솔로몬의 성전은 영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제사로 인해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성전 제사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훼파되었어도 영생의 진리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3) 제사장의 직분
율법에 의한 제사는 성전 출입을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없었으므로 제사장이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다른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에서 구별하는 성물로 하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종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구원받은 성도는 왕 같은 대제사장이므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옛 언약의 결과
옛 언약은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여 이스라엘 밖에서는 소망도 없었는데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으로 유대인들조차 구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율법이 하나님 공의의 법령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라”(고후3:6)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율법이 진리이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으므로 율법의 역할은 복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4. 새 언약의 직분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고후3:6)
옛 언약, 곧 율법에 의해서라면 이방인인 우리는 성직을 맡을 수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감람산 예수님의 승천기념교회를 보았습니다. 특색은 지붕 없이 벽만 있는데 이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 보기 위해서라 하였습니다. 거기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신 곳으로, 두 발을 딛고 섰던 반석이 있는데 순례 객들의 손길에 달아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1-13)
이처럼 우리를 용납해주신 보혈의 공로로 이제는 우리가 영광스러운 언약의 직분을 맡게 되었으니 이 은혜가 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1) 영의 직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7-8)
“영의 직분” 우리는 주님께 불림을 받고 장로 혹은 권사, 집사, 권찰 또는 남, 여전도회를 비롯하여 교사와 성가대로 또는 각기 여러 부분에서 여러 가지 맡은 임무에 충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따르는 임무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봉사하는 영의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위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래로는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거룩한 봉사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누가 이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리를 성자로, 창기를 성녀로 만들어주신 은혜,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의의 직분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9)
여기에서 정죄의 직분은 남을 참소하고 정죄하는 마귀의 임무를 의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을 받아 선포한 모세의 율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 중에 있으면서도 죄인 줄 알지 못하는 인생에게 당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임무가 중요합니다. 이유는 율법이 아니고는 깨닫지 못하는 죄를 깨달아 회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병이 있는 환자를 율법은 불치병이라 진단하는데 복음은 대속의 은혜로 죽을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심판을 선포하는 공의의 직분보다 생명과 구원을 안겨주는 이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사40:9)
이 복음 때문에 성도들은 박해 속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이 영광된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보화를 땅에 묻어두지 마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이 복음을 만민에게 증언합시다. 또한 이 사명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두가 서로 돌아보고, 아끼고, 섬기며,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안일과 방심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어 영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전진합시다.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인류를 살릴 복음의 역군으로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주님을 따르는 길
마16:21-28
오늘은 종려주일이요, 이번 주는 수난주간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십자가의 진수를 깨닫지 못하면 신앙이 건성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구원은 참 진리가 될 수 없고, 십자가와 무관한 축복은 기복신앙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바로 깨닫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1. 고난의 길
사람은 태어나는 그날로부터 고난과 죽음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면 인내할 수 있고,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관문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한 제자들도 “우리들 중에 누가 크냐”하는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오병이어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6-27)
2. 죽음의 길
골고다에 세워진 세 십자가는 동일한 형틀일지라도 동일한 죽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요 양편에 있는 십자가는 죄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면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십자가,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으십니까?
주님과 가장 가깝다는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달아났을 때에도
주님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자기 변호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늘나라 영광을 버리시고 가시관을 쓰신 주님,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였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19:10)
주님께서 그것을 모르실리가 없지요.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로 기도하셨기에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벙어리가 되십시오. 주님 때문에 바보가 되십시오. 십자가의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이라면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3. 부활의 길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의미 없이 사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욕된 죽음을 영광스러운 부활로 만들고, 없어질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 부활의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영광된 것이 부활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찬144장)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 부활의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이 영원한 진리, 이 영원한 생명 힘입기 원하십니까? 육신의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성도 중에는 분별력이 없어 잘못된 길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를 모르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은혜를 베풀 때에 그 기회를 잃지 마시고 구원의 은총을 힘입기 바랍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삭개오의 가정에 임한 구원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고난 주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언행을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로 따르기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지니고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두 가지 부활
요 5:24-29
부활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 “일어남” 또는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7대 불가사의에 들어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굴한 고대 왕들의 미이라를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에서 황금집에 미이라를 만들어 두었으나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못하지요. 모두가 부활을 기다리지만, 문제는 어떠한 부활이냐입니다.
자살한 자들이라면 또 그러한 삶으로 되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살소동이 다시 일어나기 쉬울 것입니다. 남의 돈을 빚지고 갚지 못해 죽은 자들도 빚쟁이들이 벌떼같이 달려들면 그 또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죽음을 인생의 도피처로 생각할 터인데 무덤에서 다시 살려놓으면 과연 좋은 세상이라 기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부활은 최후 심판 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형태도 그 행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우리는 그날에 주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부활 사례
1) 구약
일시적인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17:17-),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32),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시체가 되살아난 사건 등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2)신약
야이로의 딸(막5-35-),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요11:11-)
그들은 주님께서 직접 살려주셨고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는 무덤 속에서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 후에 다시 살아난 이들도 있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27:52-53)
또 베드로는 경건한 여성 도르가를 살렸고(행9:36-),
바울은 삼층 루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20:9-)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었으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사도들은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부활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구약에 있는 부활의 신앙
구약의 대표적인 부활 신앙은 욥과 다윗, 또 에스겔서(37:1-10)에 있습니다. 욥은 그렇게도 가혹한 시련 속에서 오히려 낙심하지 않고 신앙의 안목으로 땅 위에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또한 에스겔 선지자가 본 이상에는 마른 해골 떼가 살아나서 극히 큰 군대로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에게는 좌절과 낙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9-11)
소망이 없는 자는 내리막길 인생일지라도 우리는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독수리같이 올라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인생을 편리 위주로 생각한다면 내리막길이 편한 것 같지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편리하게 살아갑니까? 어느 불신자의 잔칫집에 갔더니 예식이 끝난 후 고급 부페로 손님들을 청했는데 거기에는 얼마든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또 술이 있어서 모두들 한 잔 하고 즐기는데 저는 술을 못해도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믿음 때문에 제약이 많은 것 같으나 도리어 감사할 일이지요, 죄악의 유혹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내림이 자연의 법칙이나 열을 가하면 증발이 되어 올라가는 것도 자연의 법입니다. 이같이 은혜받은 성도의 생활은 천성을 향해 올라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선한 일과 생명의 부활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자신을 위하여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어떻게 남을 위해 사느냐고 생각한다면 그 시간부터 인심은 각박해질 것입니다. 또한 나를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흉악한 마귀의 소굴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에서 기쁨이 넘치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생애요, 그리스도의 남은 과업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죄인 된 자로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멸망에 처해야 할 자를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의 대열에 이르게 하시고, 생명의 부활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4. 악한 일과 심판의 부활
법정 용어로 “완전 범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미궁에 빠져 밝히지 못하는 범죄 행위를 말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어느 날 갑자기 살인강도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얼마동안 떠들썩하더니 그 후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범인을 잡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는 완전범죄가 있어도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어리석은 인생들은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하나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2-13)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날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는 날이 될 줄 알았다면 애타게 예수 믿으라고 하던 전도자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줄 알았다면 좋은 일만 하였을 텐데…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도 불의한 일은 밝혀지는 것 그 자체가 심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으로 주를 섬기고 떨며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영광의 부활절, 과연 무덤 문을 터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요(요1:14),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2:5)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요(히2:14, 요1서3:8),
죄인 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딤전1:15).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곧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보장이요, 의롭다 인정받는 칭의의 보장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풀지 못할 원통함이 있겠으며 신원함을 받지 못할 억울함이 있을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부활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내 영광으로 변화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 부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날은 우리 모두에게 영광의 날, 승리의 날, 축복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빌4:6-7
세상에서 근심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굴까요? 강보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곤고와 형통은 양쪽 수레바퀴와 같아서 누구를 막론하고 인생이 살아가는 동안은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전7:14)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로 점점 입맛이 고급화되고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사람이 항상 입에 단 꿀만 당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쓰고 매운 음식이 있어야 구미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드시 고단백 음식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대한 사람은 체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으로 자만하지 못하게 고난을 주십니다.
1. 불안의 원인
모든 불안은 어둠으로 인해서입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저녁 예배를 마치고 산기도를 갔는데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기도가 되지 않아 한참 동안 애를 쓰다가 담요 자락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갑자기 농악대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더니 내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만화에서 보았던 마귀할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머리를 확 덮치는데 그 순간 내 머리는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몇 분만 계속된다면 미칠 것 같은 느낌 이 들어서 있는 힘을 다해 주님을 부르면서 몸부림을 치는 순간 갑자기 벌떡 일어나게 되고 마귀할멈도 고통도 사라져서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금도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지만 기뻐하십시오. 선한 목자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천구백칠십삼 년 유월 미국 LA시장으로 취임한 톰 브레들리씨는 취임 선서식에서 미국 시민과 고생하는 모든 젊은이들을 위해 신앙고백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골 출신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도회지로 가면 잘살 줄 알았는데, 너무도 고생이 심해서 그의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다섯 아이들과 부인을 버려둔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동생들과 살아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미국은 돈 있는 사람들은 살기 좋게 꾸며 놓았으나 돈 없는 자들은 살아가기 힘든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나날을 살아가면서 주일이 되면 온 가족이 주일을 성수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밭에서 목화를 따던 중 어린 톰 브레들리의 손이 목화가시에 찔려 피를 흘릴 때 아픈 손을 쓰다듬어주던 어머니와 주고받은 얘기입니다.
“어머니, 언젠가는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얘야, 너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훌륭한 것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일이란다.”
“어머니,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네가 하나님께 서서 이렇게 여쭈어 보면 알게 된다. 하나님, 저에게 생명주시고 건강을 주셨으니 주여, 제게 주신 이 모든 것으로 무엇을 해야만 되겠습니까?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어머님의 값진 교훈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에 의해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이 칠흑같이 어둡습니까?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안겨 주는 별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역경은 내 인생을 좌절하게 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인내를 배우는 기초석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2. 평안의 축복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1) 세상의 평안
세상의 평안은 그림 속 평안이요 그림자 평안이므로 진정한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16-20)
2) 하나님의 평안
가라지와 곡식은 구분하기 어려워도 결실이 다른 것같이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들은 근심도 복이요 평안도 복이 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은혜를 깨닫는 자에게는 하늘의 위로와 평화가 넘침 줄 믿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412장)
3. 기도
1) 회개의 기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언제일까요? 그 기회를 잃어버리면 곰과 같이 부르짖고 비둘기같이 슬픈 소리를 낸다 할지라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에는 먼저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1:18-20)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사울은 버림을 받았어도 다윗은 은총을 힘입은 것은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주의 은혜를 분별치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59:1-3)
2) 믿음의 기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믿음의 기도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15:28) 본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약5:15).
어떤 분이 “목사님, 저 기도시키지 마십시오. 저는 기도를 못합니다.” 하면서 개인기도, 대중기도 모두를 꺼려하더니 해외에 나가있는 아들이 일자리를 못 구하고 놀고 있으니까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간구하여 이제는 “목사님, 주님께서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셨습니다.”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믿고 기도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감사의 기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근심된 일도 감사로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문제가 닥칠지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에 이르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평화, 주 안에 숨은 기쁨,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더욱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여로보암의 병든 자식
왕상14:1-4
북쪽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소년 시절부터 큰 용사였습니다. 그의 부지런함을 보고 솔로몬 왕이 요셉 족속의 사역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그에게 임한 예언입니다.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라”(왕상11:30-32)
이는 여로보암의 신앙을 보고 내린 복이 아니라 솔로몬이 범죄한 망령된 행위로 인해서였습니다. 솔로몬의 행위를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왕상11:33).
그러므로 복을 받았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번영 뒤에 따라오는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십중팔구는 여기에 빠져들고 있으니 그것은 복이 아닌 도리어 욕이 되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우리는 반드시 받은 달란트에 따라 정산해야 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왕이 된 여로보암
하나님의 사람 아히야의 예언이 있은 후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므로 그가 애굽으로 도망하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돌아왔고, 르호보암이 노년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년들의 의견을 따라 백성에게 더욱 강경책을 선포하므로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왕상12:16).
그때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 애굽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는 대권을 잡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거나 피를 흘린 일도 없이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왕상12:15).
그런데 이런 때에 범하기 쉬운 죄가 교만입니다. 인간에게 교만이 들어가면 은혜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2.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
다윗이나 솔로몬과 달리 여로보암은 왕위에 오르자 전능하신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으로서는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안정을 찾는 길이 급선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통치가 중요하지만 방법과 수단도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왕이 되었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뜻을 따름이 마땅한데 여로보암은 그러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은 언제 만들었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 시내 광야에 있던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왕상12:27-29).
정권과 교권의 야합은 금물입니다. 세속적인 기관과 영적인 기관은 서로 병행하지만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칼빈주의 국가관은 국가와 교회가 부분적으로는 일치하나 분명히 어느 편에서도 다스리는 입장이 아닌 상호 보완의 입장에 서야 함을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리된 원인이 그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지도자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 중 어느 한 편을 택하고 어느 한 편은 버리셨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선지자들이 북쪽 이스라엘에서 등장한 것을 보아서도 어느 쪽도 버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은 레위 지파가 있는데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또 절기도 마음대로 변경하여 분향하고,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망령된 행위를 따라 다시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한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금송아지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비중을 높이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경고를 저버린 여로보암
여로보암이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마침 거기서 분향할 때에 유다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러,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3:2).
그때 여로보암이 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하므로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켰던 손이 말라붙어 다시 거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간구하기를,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왕상13:6).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진실한 변화가 있었다면 왕 위에 오르기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아히야의 예언을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이요, 또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를 두려움으로 순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저버리고 도리어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일로 그것이 대대로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련한 인생은 여전히 그 미련한 가운데서 살다가 죽게 마련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진리에 복종하여 선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4. 변장한 여인
이제 여로보암의 가정에 하나님의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왕상14:1).
주석가들은 그 아들이 여로보암의 대를 이어 왕 위에 앉을 아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써도 살아날 가능성은 사라져만 갔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여로보암이 자기 부인을 평범한 여인으로 변장하여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아히야의 예언대로 왕 위에 올랐으나 그때까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은혜를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부인을 변장시켜 보내는 그 태도, 과연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변장을 하였어도 하나님의 사람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부인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 발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 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리니 가서 여로보암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14:6-9).
두렵고 불행한 경고입니다. 은혜를 욕으로 바꾸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더미를 쓸어버림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왕상14:10-11).
이것은 너무도 비참한 저주로서 은혜를 배역한 자에게 내리는 심판입니다. 역사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교만하여 은혜를 배역하지는 않았습니까?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병든 자식을 되살려 보려고 찾아 갔던 발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그 자식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아이는 유일하게 그 가정에서 복을 받았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왕상14:13).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만 품어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복 받기를 열망한다면 복 받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뜻을 품고 선한 일에 열매 맺기를 소원하십시오, 그 소원을 품은 대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영화를 누렸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저주받을 자
갈1:6-10
하루는 저의 집사람이 물통 안의 이끼를 없애기 위해 락스를 풀어 놓았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항에 부었더니 갑자기 금붕어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렇게 무서운 독성을 가진 공해 물질로 오염된 상수원의 물을 식수로 삼아 우리가 먹어야 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수강산 삼천리, 산 좋고 물 좋기로 세계에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문제는 영적인 오염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흐르는 생수는 만국을 소생시키기에 넉넉한데 타락한 인류의 세계는 얼마나 오염되고 더러워졌습니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권징조례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징계받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이럭저럭 살아간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 그처럼 고집을 부리고 행동한 결과가 지금에 와서 무슨 신기한 세계를 발견했느냐는 질문에, “목사님, 무슨 특별한 것이 있겠어요. 그저 그런 것뿐이지요.” 그런데 왜 돌이키지 않고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1.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동기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기독교의 골격을 유지하는 중요한 교리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루터)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헌장이다”(스탐).
이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중요하게 취급되고 “소 로마서”라 불리고 있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문제가 있을지라도 능히 해결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의심 많은 도마나 빌립을 대할 때 주님의 제자인 사도의 믿음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우문현답이라는 말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질문을 통해서 심오한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 당시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했으나 그로 인해 진리의 골격을 튼튼하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처럼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런데도 바울이 스스로 나서서 유대인의 율법주의 아성을 무너뜨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고 영생의 참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항상 유대인을 우선으로 하는 그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증언할 때 가장 큰 장애가 있었다면 유대인이요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면 역시 유대인으로 인해서였습니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사람이 도리어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의해야 합니다.
2. 참된 복음과 다른 복음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구원의 진리가 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진리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도 양의 가죽을 쓴 이리들에 관하서는 관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는 분별없는 성도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어떠한 길을 선택하든지 신앙은 자유라 하겠으나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30:19-20)
이 말씀은 율법에 의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1:6)
종교 개혁자 루터는 “과오라거나 마귀의 명칭으로 오는 이단도 없고 마귀의 모양으로 오는 마귀 자신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성하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안 들고 다니는 이단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또 그러한 무리들은 교묘히 성경을 미끼로 성도의 약점을 악용합니다. 그 미끼에 빠져들면 이단의 본색을 드러내어도 그때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분별의식이 마비되거나 올가미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 하나같이 그 집단 안에 들어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기성 교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땅 위에 있는 교회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멜기세덱도 아니면서 기독교의 역사성도 무시해버린 채 혜성같이 등장한 새로운 인물이 증언하는 진리가 참된 복음이요, 구원이 그 안에만 있다고 하면 복음이 이단의 숫자만큼이나 많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각기 다른 복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구원파”라 하는 자들을 보면 권신찬, 유병언씨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란 간판을 걸고, 이요한 일명 이복칠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대한 예수교 침례회”란 이름으로, 또 박옥수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예수교 복음 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도 갈등을 빚고 있으니 어느 것을 바른 진리라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영광스러운 참 교회요, 신. 구교는 모두 부패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교회의 비밀이 구원파에서 비로소 깨달아 진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기성교인들이 미혹될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 열 가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미혹합니다.
1)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2) 선생님은 거듭났습니까?
3)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4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합니까?
5) (당신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6)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8)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9)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10)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여기에 어느 것 하나 성경과 무관한 질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해석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회개에 대한 진리도 잘못 해석하는데 기성 교회에서 회개하는 기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한부 종말론자 서달석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는 진정한 회개를 적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논리적인 근거로는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회개가 필요한 자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자기들의 집단에 들어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예수의 보혈로 값 주고 산 교회라 할지라도 땅 위에 있는 교회가 흠과 티가 없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달리 구원의 날을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생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들은 어떠한 행위를 하여도 죄가 될 수 없다는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이 없는 자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1서 1:8-10)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
그러므로 전도자 바울도 날마다 정과 욕을 쳐서 복종시키므로 성화의 과정을 걸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무엇일까요? 물론 계명을 범한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도 불이행하는 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4:17).
우리는 소극적인 죄에서 벗어난 것으로 자만하지 말고 도리어 적극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저주받을 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는 마귀의 앞잡이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우리를 미혹하였고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지금도 동일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궁금하고 그렇게도 알고 싶어집니까? 선악과의 비밀인가요? 벌써 선악과의 진미를 맛본 후에는 생명 세계에서 축출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1-2)
누가 은혜 받은 성도를 잘못된 길로 빠뜨립니까? 진리를 변질시키는 저주받을 자들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비진리를 물리치고 자신을 지키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되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주께서 쓰시겠다
눅19:28-40
주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말씀을 “승리의 입성”이라 합니다. 유의하십시오. 주님께서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주님은 왕 중의 왕이요 만유의 주로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21:1-11, 마가11:1-11, 요한12:12-29등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1) 아기 때(눅2;22) 2) 소년기(눅2:42) 3) 시험을 당하실 때(눅4:9) 4) 공생애 첫 해 유월절(요2:23) 5) 부림절(요5:1) 6) 공생애 두 번째 유월절(요6:4) 7) 장막절(요7:10)에 이어 여덟 번째입니다. 물론 성장기에는 얼마나 있었는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가 두 제자를 미리 성으로 보내며 하신 말씀입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19:29-31).
1. 나귀새끼의 소유주
오늘도 중동 지역에서는 약대로 생계를 이어가는 베두윈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은 주로 사막 지역이므로 소나 말보다도 양이나 약대, 나귀 같은 짐승들을 목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믿음과 소유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눅19:34).
그때 주인이 더 이상 말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몰고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나귀의 임자와 미리 약속한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하신 것이냐의 문제로 논의를 빚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능한 지식과 능력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소유, 과연 어느 선까지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믿음이 통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을까요? 은혜의 열매는 많을수록 더 큰 복이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5-8)
2. 주께서 쓰시겠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필요로 하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그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부정하게 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앗시스의 성자 프란시스는 포목상을 하는 부요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 때 중병을 앓으면서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는데, 그는 성 다미얀(ST.Damian) 회당에서 친히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에 “프란시스야 나의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에 가족과 이웃이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피복상 물건을 팔아 다미얀 회당을 수리했다고 합니다. 그는 휴식을 모르는 활동과 극단적인 금욕생활 때문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주후 천이백이십육 년 사십이 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이름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에 “오, 주여 감사합니다. 무엇에 쓰시렵니까?”
과연 내게 있어 무엇을 필요로 하시든지 주님께 헌신하여 주님 뜻 이룩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눅19:35).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신분이라면 백마를 타는 것이 당연하나 스스로 겸비하여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그 때에 무리들은 겉옷을 벗어 깔고 엎드려 경배드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안목을 가졌습니까?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소자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오직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백마가 아닌 나귀새끼를 타셨을지라도 주님은 왕 중의 왕이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보는 눈과 듣는 귀,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7-38).
이는 주님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부른 노래요, 하나님께 돌린 영광입니다. 이렇게 영감으로 부르는 노래는 성령의 노래요, 천사들의 노래요,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영혼의 노래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알 수가 없고, 은혜가 아니면 찬양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4.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면 역시 은혜가 많은 곳에 마귀의 역사가 크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9-10)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요12:19).
그럴지라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원수도 비상을 걸기 때문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39-40)
무슨 말씀입니까? 피조물의 영장인 인간이 본연의 임무를 저버릴 때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이는 인간을 대신하여 돌들이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소리요, 심판의 소리요, 메시아를 증언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주님 발자취를 보십시오. 누가 메시아를 밝히 증언하고 있습니까? 돌들입니다. 비록 황폐된 흔적일지라도 그 돌들은 주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받은 심판과 십자가의 고난, 영광의 부활을 생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묻혀 있는 자연이라 무시하지 마십시오. 또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어머니의 품과 같이 숨겨 주리라고 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비밀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흙먼지가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신30:19)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여호와를 기뻐함이 내게 복이 됨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이 들어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나 없을 때에도
빌 2: 12-18
빌립보 교회의 설립 경위를 보면 바울이 일차 전도 여행 때 중도에서 되돌아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일로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진 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 여러 교회로 다니며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계속하여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어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더니,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를 지나 마게도냐 지역 네압볼리(오늘의 지명 까발라)로 건너가 거기서 빌립보로 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으로 그곳에서 수일을 유하던 중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강가에 나갔는데 거기서 한 무리의 여자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였더니 마침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시므로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또 바울을 통해 회개한 간수도 있어 그들이 빌립보 교회의 초석을 이루게 되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형언할 수 없이 오묘합니다. 좋은 풍토에서 좋은 결실을 얻듯이 좋은 교회는 좋은 성도를 배출합니다. 이로 인해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감사를 안겨 주었습니다.
1. 천국의 모형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목자와 성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도 살벌해져 가는 것은 불신과 증오로 인해서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 이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보다 더 악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경멸은 최소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사람은 그 존재마저 부정합니다. 경멸은 사람을 불경한 행동으로 이끌어갑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 여정에 고려할 요인이 못되는 것같이 행동하게 만듭니다.” (맥스 루게이도)
오순절 이후 초대 교회가 땅 위에 이루어진 이상세계 곧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가운데 하나 되어 천국건설의 역군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목자의 당부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라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바울의 역할과 활동 무대를 보면 전도의 대상을 전 인류에 두고 활동 무대는 세계에 두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3-14).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증언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웠으나 어느 교회에도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불타는 사명감이요, 또한 그를 강권적으로 들어 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같이 과학 문명이 발달한 환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음을 사모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박해, 이방인의 박해, 광야의 위험, 굶주리고, 헐벗고 매 맞는 고통,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장애들이 가로막고 있었어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장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희생을 각오할 때 오늘도 복음이 살아서 역사할 줄 믿습니다. 그는 세계를 발판으로 삼으면서도 현실에 충실하였고, 모든 인류를 상대하면서도 작은 소자 하나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고 달리면서도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충직한 목자로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당부한 말씀입니다.
1) 항상 복종하라.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는 당시 빌립보 교회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전 세계와 모든 인류를 상대로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깊이 새겨 열매 맺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우리 모두 그날에 받을 상이 더욱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마귀가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향기가 되고 본인에게는 은혜가 되는 일이지만 마귀가 기뻐하는 일은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내 자식을 영웅시하지 말아라.” 분신자살한 자식을 둔 아버지의 말입니다. 과연 우리 민족이 잘 살고 평화를 누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의 인자와 긍휼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일군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3-16).
과연 이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의 허물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3. 목자의 기쁨
땀 흘린 농부의 기쁨이 무르익은 가을 농장에 있다면, 목자의 기쁨은 은혜로 열매 맺는 양들을 대할 때입니다. 선한 목자 주님의 참 사랑은 양을 위한 희생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5).
주의할 일은 매사를 당연시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당연지사로 넘겨버릴 때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 양육하는 일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자식의 효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이 자식 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간다 할지라도 내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박물관에 소장품이 되기를 소원하고, 땀 흘린 농부는 쭉정이가 아닌 알곡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50:22)
우리는 때를 따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아멘!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
행11: 1-18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욥바에 사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던 중 환상과 음성을 듣고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오순절과 같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일로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유대인의 비난이 일어나자 베드로가 변명하였습니다.
1. 할례자들의 비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11:2-3)
할례 문제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행21:18-32).
1) 할례의 기원
아브람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17:4-5, 10-11).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
2) 진정한 할례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4:3-4).
참된 할례는 중심에 있고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내용을 잃어버리고 경건이 능력을 상실할 때에 형식으로 전락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할례로 육체에 표시를 나타내는 것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9-11).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상징적인 표시는 본래의 목적한 바가 끝나면 효력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죽어갈 때 놋뱀을 장대에 달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이 후에 놋뱀을 우상으로 섬겼는데 그런 행위는 히스기야 왕 때까지 있었으므로 그것을 느후스단(놋조각)이라 하여 없애버렸던 것입니다.
어떤 유물이든지 조상들의 얼과 발자취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 되면 우상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5:2)
3) 유대인의 독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11:2-3).
완고한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칭찬 들을 일이라 하겠으나 진리를 대적하는 행위라면 문제가 됩니다.
그때 베드로를 비난한 유대인들이 복음과 무관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율법 의식에 깊이 젖어 있는 그 사상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10:1).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2-14).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율법으로 자랑을 삼는다면 그것이 독선인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의 외식과 독선 때문에 세리와 창기들은 먼저 의에 이르리라 하셨고 육체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오직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게 있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은혜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2. 베드로의 변명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행11:4).
베드로는 여기서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사건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베드로 개인의 영달이나 또 복음과 무관한 일이었다면 얼마든지 비난을 감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민이 구원받을 복음에 있어서는 침묵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미쳤다는 비난을 듣던 바울도 법정에서 변명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구원의 은혜를 소리 높여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은 결박할 수 있을지라도 진리는 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유대인에 대한 우월의식이 철저하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하늘로서 내려온 보자기와 함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행11:7-9).
그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후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성과 속의 기준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모세의 율법입니다. 율법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감히 누가 부정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유대인의 율법의식에 뿌리내린 베드로의 고정 관념을 누가 깨뜨렸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
3. 구원받을 복음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행11:12).
하나님의 특별 섭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은혜는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계시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11:13-14).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경건생활은 유대인들이 본받아야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행10: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 은혜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오순절의 역사는 고넬료 가정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말씀 한마디 땅에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은 말씀이 불이 되고 말씀이 능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0-31).
은혜를 받기 위해 무슨 말씀을 기대하십니까? 내가 믿는 그리스도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번민과 고통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병마의 고통 중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도 나의 병을 짊어지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생명 얻는 회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진정한 회개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후회하는 것, 또는 새로운 각오나 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생명 얻는 회개는 올바른 방향에 서야 하고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일평생 계속해야 마땅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은 나는 비록 약할지라도 온전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있어 진리의 행방이 흐려지지 아니하고 은혜의 품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아멘!
위에 것을 찾으라
골3:1-4
골로새 서신은 전반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과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논하고, 후반부에는 성도의 의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비록 율법에서는 자유를 얻었다 할지라도 진리에 순응하는 생활에 태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에 이르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다스리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 귀한 것을 위해 과감히 투자하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선할 문제는 올바른 가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25,33).
진리는 하늘에 속한 보화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것을 심고 하늘에 속한 것을 거두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까지 이 진리를 깨닫고 변화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은혜를 힘입은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생애는 진정한 헌신입니다. 우리도 진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은혜를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2. 육신의 것과 영의 것
제가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보이는 것은 그림자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실체를 그림자라 할까?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실체는 인격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장하면서 진정한 실체는 육신이 아닌 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육신뿐이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러므로 “인생무상”이라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주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인생은 육신뿐일까요? 아닙니다. 불신 사회에서 내세와 영혼을 부인하면서도 사후에 제사를 고집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엄존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소욕에 치우치지 말고 영혼의 소원을 따라 진리에 순종하기를 소원합니다.
3.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세상에는 제 밥 먹고 사는데도 욕을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면서도 존중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전자는 욕된 것에 매여 종살이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영광스러운 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LA에서 만난 교민의 미담입니다. 한미장로교회 이효덕 권사님은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묵을 만들어 신학생 16명을 교육시키고 있었는가 하면, 나성영락교회 최금순 권사님은 연금 대상자로 노인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은밀히 봉제업을 하였는데, 그들은 준법정신이 투철하여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을뿐더러 법을 어기면 고발합니다. 복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별도의 직장이나 수입원이 없어야 하는데 최권사님이 일하는 것을 보고 이웃에서 고발하여 집달리를 시켜 모든 살림 도구를 길가에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때에야 그 권사님은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밝혔는데, 그렇게 일을 해서 전도자들을 후원해왔다고 그동안 후원해왔던 교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미워하던 이웃도 눈물을 흘리고, 단속하던 사람들도 울고, 그 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청교도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이기에 당국에서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여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한 삶은 이렇게도 귀중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일군 삼아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썩을 것은 땅에 속한 것이라면, 썩지 아니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동일하게 계절에 따라 겨울을 맞을지라도 낙엽은 거름이 되고 씨앗은 새싹을 내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자살하는 자의 자유를 누가 잘했다 할 수 있을까요? 무지의 소치로 자기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지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으십시오. 허무한 데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6-29).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었느냐에 따라 주님을 향하는 헌신이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셨는데 그 은혜 생각하면 어찌 다시 물욕에 매여 종살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주님의 경고입니다. 세상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어떤 분은 주님 은혜로 살아나서 남편을 구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남편이 돈을 맡기지 않아 십일조를 빚을 내어 하는 석달을 한 후 남편이 추궁하자 “나를 죽을병에서 살려내기 위해 무뿌리 하나 약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이렇게 죽을병에서 살려주셨다. 그런데 어찌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 당신이 안 주면 나는 계속 빚을 내어 하겠다”고 하여 남편의 손으로 십일조를 하고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어떤 것이 썩어질 것이며 어떤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인지를 분별하여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5. 불의한 것과 의로운 것
세계적으로 유명한 환락과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는 주머니에 돈을 남겨두고는 돌아서기 어려울 정도로 도박이 심한 도시입니다. 불야성을 이루는 네온싸인, 호텔마다 입구는 왕자와 공주를 위해 예비해 놓은 듯 화려하게 꾸며 놓고, 차에서 내리면 에스컬레이트의 터널로 손 발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도박장으로 바로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결국 주머니를 다 털리고 돌아갈 때는 쓸쓸히 걸어 나와야 합니다. 어쩌다가 돈을 따면 다시 그 안에서 다 쓰고,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데 거기에 무슨 만족이 있을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수제자 베드로를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일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십시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피터 모펫의 시를 소개합니다.
“우물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양 떼 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살찌게 하라
그대의 집을 방어하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 지키기를 더욱 힘쓰라
그대의 돈을 지키기 보다는 그대의 마음 지키기에 더욱 힘쓰라”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 보십시오. 천구백육십 년대까지는 너무도 극한 가난에 쫓긴 나머지 어떻게 하든지 가난만 벗어나면 모두가 해결될 줄 알고 경제 부흥에 주력하였는데 칠십 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경제문제가 해결되자 이제는 인권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팔십 년대에는 민주화만 되면 모두가 해결될 줄 알고 구호를 외쳤으나 구십 년대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도리어 기강도, 질서도 없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일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또 어떠한 경우든지 인간은 의무와 권리를 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헛된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라
잠 23:23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엇을 가지려고 하면 그것은 도둑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라”(마10:8).
여기에는 신앙의 안목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대가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했던 전도자 바울의 생애에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값진 보배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있어야 하게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기준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옳은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물론 조건부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참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특별한 일이 있으면 서원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 드린 약속을 저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 진리를 사라
해외로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국산 자동차를 보면 왜 그렇게 반가운지, 또 TV 광고에 우리 상품이 소개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일본 자동차가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야심이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초토화된 이후 이제는 경제적으로 세계를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적인 도태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면 우리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 분발하고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과학기술의 첨단은 한가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요행수나 행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땀과 노력의 결정체로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더 밝은 내일을 위해 힘차게 달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백화점에 있는 것이 아무리 고가의 상품일지라도 대가를 지불하면 내 것이 됩니다. 미국에서 받은 인상 중의 하나가 정직하고 성실한 상거래였습니다. 모든 물건은 정찰제로 거기에 세금을 별도로 가산하여 사게 되는데 누구도 흥정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시장에서 eye shopping을 하는데 어떤 상품을 보니 주인이 와서 이틀 후면 세일을 하니 그 때 오면 같은 물건을 20%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다며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다시 그곳에 갈 기회는 없었지만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어도 진리의 보배가 없는 자들에게는 엄격하게 통제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진리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하였습니다. 또한 그 진리 가운데 머무르기 위해 일평생 찌르는 가시가 자신을 괴롭혔을지라도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십자가인 줄 깨달았다면 그 은혜 내게 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진리 안에서 주의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지혜를 사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혜의 가치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여 구하지 아니한 부귀, 영화, 권세도 덤으로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혜는 모든 복의 근원이요 으뜸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3:13).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4:6).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잠8:11).
지혜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훈계를 사야 합니다.
오늘날 불행 중 하나는 훈계가 멸시받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훈계하다가 교단에서 물러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학사 운영에 학생이 직접 관여하겠다고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제정된 헌법과 권징조례가 제대로 시행되는 교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도리어 징계가 있기 전에 먼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집에서 잘못되어 집 나간 탕자라면 어디에 간들 문제가 없겠습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혹자는 “목사님, 우리는 이제 아무도 모르는 교회에 가서 평신도로 출발을 하겠습니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 자유, 양심 자유, 교회도 자유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덕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훈계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훈계가 내 영혼의 양약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값지게 받아들이십시오. 눈물이 나도록 어려울지라도 감수하십시오. 여기에서 신앙 인격이 튼튼하게 성장하고 또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게 될 줄을 믿습니다.
4. 명철을 사야 합니다.
명철은 우리말 사전에는 ‘영리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기억력이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어는 ‘비나(bee-nah)’라는 히브리어로 지식, 지혜, 명철, 지각, 총명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욥28:12-13,15-16).
진리의 보배 곧 영적인 보배는 물적인 것과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보배를 귀로만 듣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족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는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명철의 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보배를 여러분들에게 진열하였습니다. 또한 소유할 수 있는 기회도 함께 드렸습니다. 다만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여러분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또 헛된 욕심에 치우쳐 생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마음 문 열고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힘입어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너무도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의 전 생애와 의지와 결단이 모두 담겨있는 무거운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씀이 곧 솟아나는 은혜의 생수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진리의 보배를 보는 눈과 귀가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줄 믿었다면 이 진리를 내 것으로 소유한 줄 믿으셔야 합니다. 주의 지혜와 훈계, 명철도 소유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이 보화를 잘 간직하고 팔지 마십시오. 모든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이 이 속에 있음을 기억하시고 진리와 함께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왕하3: 4-16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즉위 이 년에 난간에서 떨어져 자식 없이 죽게 되자 그의 형제 여호람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는 아합이 만든 바알우상은 제하였으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금송아지 우상은 제하지 않았습니다. 매년 새끼 양 십만 마리, 수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던 모압 왕이 배반하자, 여호람 왕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청하여,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과 에돔 왕이 합세하여 모압을 치기 위해 에돔 광야 길을 가는데 전쟁을 하기도 전에 물이 없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했을 때 엘리사가 여호람 왕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엘리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사람의 얼굴을 가리신다는 것입니다.
1. 모압과의 전쟁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선풍을 일으켜 러시아에서 민선 대통령이 된 보리스 옐친은 “이제 소련의 공산주의는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물질을 위주로 살아가는 데는 일반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평화를 누리고 복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백성이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림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경건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나 아들 여호람이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삼은 일로 그 여자가 유다에 끼친 악영향은 너무도 많았습니다. 결혼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이웃집에 ‘벌’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 분이 있었는데, 성격이 특별해서 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요란을 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딸도 그렇고 또 딸의 딸 외손녀도 성격이 닮은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이제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 왕과 함께한 일로 선지자 예후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의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2. 물이 없는 광야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무기도와 병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람이 여호사밧과 에돔까지 합세하여 모압을 치러 왔을 때 에돔 광야길로 접어들어 칠일이 지났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왕하3:1012).
여호람이 엘리사에게 이르렀을 때 엘리사가 하는 말입니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왕하3:13)
이는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숭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음에 품은 우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참 신이시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왕하3:14).
전쟁은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는데 하나님은 유다 왕의 얼굴을 보시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고 소돔성에서 조카 롯을 건져내신 하나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목이 곧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 오늘도 이 땅 위에 죄악으로 무너져가는 성벽을 수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막을 일군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보시고 이 땅에 평강을 내리시기 소원합니다.
3. 거문고와 성령감화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왕하3:15)
다윗이 거문고를 탈 때에는 사울에게 있던 번민의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찬양은 성령의 은혜를 힘입게 하십니다. 찬양은 영적인 무기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감사한 일은 우리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입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증거입니다. 주의 은혜가 날마다 찬양 속에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왕하3:16)
그곳에 개천을 판들 물이 나올 수 없는 광야였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왕하3:17)
갈멜산 엘리야는 지중해 위에서 떠오르는 손바닥만 한 구름이 징조가 되어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게 되었으나 지금 엘리사에게는 그런 징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에 한 사람도 불응하거나 회의를 품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이 골자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목이 말라 쓰러져가는 병사들에게 물 없는 개천을 판다는 것은 전쟁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보십시오.
“아침이 되어 소제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왕하3:20).
여기에서 우리는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역류하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그렇게 넓은 사막에 흘러서 그곳까지 올 수 있었으며 또 골짜기에 가득할 수 있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그 때에 깊은 샘이 열렸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의 앞길에 어떠한 문제가 있을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
4 더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왕하3:18)
지금 그들은 양을 치기 위해 나온 발길이 아닌 이스라엘을 배역한 모압을 치기 위해 나온 발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 기적의 물을 먹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남아있고 싸워야 할 원수들이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그 일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의 선하심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문제, 물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작은 일로, 그보다 더 큰 일 곧 우리의 원수 마귀를 물리치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악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낯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가정이, 친척이, 이웃이,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 날 영광이 넘칠 줄 믿습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29
바울은 진리를 대적하고 박해했던 사람이라 감히 자기는 사도라 불리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 하면서도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복음의 사역을 많이 한 사람이면서 또한 주의 이름으로 고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1.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절)
바울이 사도의 권위와 예수님의 심정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울은 일찍 로마 교회와 같이 골로새 교회도 방문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과는 대면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골1;7-8)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골2:1)
만일 우리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떤 분이 이러한 편지를 보내왔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시대와 같이 대제사장 제도가 그대로 내려오는 것도 아니요, 캐톨릭교회와 같이 교황제도를 내세워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떻게 소화될 수 있으며 또한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바울에 대한 소문을 그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대상과 시대를 초월하듯 바울이 받은 영감의 말씀 역시 한 시대나 개인에게 국한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 인의 교회에게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느 때는 어떠한 말씀이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인 줄을 믿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 말씀은 잘못 해석하기 쉬운 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 흘리신 그 피는 역사와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넉넉한 복음이요, 완전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불완전한 대속, 또는 미완성의 대속이 아닌 완전한 대속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과거나 현재, 미래, 어느 때든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죄인 된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대속은 단번에 완성되었을지라도 복음에 이르지 못한 영혼들은 여전히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그리스도의 대속이 완전한 효력을 발생하려면 모든 죄인이 다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뭇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할지라도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임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임하는 능력이 되는 십자가의 도요, 또 접붙이는 비유로 나타나는 복음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로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다 꺾여야 하고 또 꺾인 자리에 새로 접붙이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는 우리를 접목시키기 위해 이미 죽으셨으므로 이제는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그리스도에게만 있어야 되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내가 지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와 같이 누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신앙 연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난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없습니까? 십자가의 진수를 깨달아야 합니다.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절)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은 심판에 이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영광에 이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구원, 우리 모두의 구원, 또 이 땅이 복음화되고 땅끝까지 증인 되기 위해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3. 복음의 비밀
새로 등록한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반갑게 맞아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시 신앙은 순수할 때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순진하다고 하여 항상 아이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지요.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도 성숙해야 일군이 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해 안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복음은 땅끝까지 울려 퍼지고 있는데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보석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값진 보물이라도 땅속에 있는 동안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도 알지 못합니다. 영생의 복음, 구원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비밀, 진리의 가치를 생각해보셨습니까? 황금과 보석으로는 내 생명을 구원할 수 없으나 주님의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6-27) 아멘
만세에 감추어진 이 비밀의 은혜를 발견하였습니까?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진리의 방관자가 되지 말고 내 소유로 삼으시기를 소원합니다.
4. 힘을 다한 수고
우리의 생애에서 그리스도를 제한다면 삶이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아무런 삶의 의미도, 목적도 없이 존재하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병아리가 껍질을 터뜨리고 나오듯 잘못된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일어나십시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고 전진해야 합니다. 분발하십시오. 잠든 시간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뛰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이 일에 있어서는 어떠한 장애도 극복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아멘!
그리스도의 심장
빌1:3-11
“기뻐하고...즐거워하라”
주석가 Bengel은 빌립보서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에베소서의 주제가 ‘칭의’로 되어있듯이 기쁨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아니다. 이는 다만 빌립보 서신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음악이요, 광범위하게 비취고 있는 태양빛과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서신에 흥미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1. 감사와 기쁨
전도자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기에 바울에게는 어둠이 없었습니다. 특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를 생각함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4:10)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4:15-17).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복 받을 손길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의 기도입니다. 당연히 올릴 기도일지라도 근심으로 기도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11:41-42)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의 무덤에서 올린 기도는 감사가 있었으나 배신자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1:3-5).
감사한 일은 우리도 빌립보 교회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에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은 주변과 이웃뿐만 아니라 세계로 확산되고 역사에 빛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내게 있어 선한 마음을 품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어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내 남편 변화시켜 주신 것을 생각하면 무어라고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집 세 채에 가게 두 개를 술로 다 탕진해버리고 길거리에 앉게 된 사람이 이제는 충실한 가장에다 새벽기도도 빠지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알고 나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복음을 전할 때 전도의 열매가 또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성령을 거역하지 마시고, 또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실 때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로 그치지 말고 일평생 또 영원토록 주님께서 들어 쓰시기 합당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이 믿음의 줄 굳게 붙들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순종하십시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1:7).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모두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기에 내가 참여하고 내 몸이 주님 들어 쓰시기 합당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일에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인체에서 중요한 장부를 든다면 심장, 폐장, 신장, 간장, 위장입니다. 이는 각각 기능이 달라서 그 중 어느 장부일지라도 기능이 마비되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중에도 심장은 더욱 중요합니다. 심장에서 전신에 피를 공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마음가짐도 심장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기억할 것은 성령의 역사는 전도자를 도구로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에 전달된 이 편지는 바울의 사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계시입니다. 이는 한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향하여 계시하시는 말씀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도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독수리같이 힘차게 전진하여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줄을 믿습니다.
4. 바울의 기도
“내가 기도하노라”
여러분 배후에서 올리는 기도를 아무나 할 수 있고 또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풍년든 농장을 바라볼 때 농부에게 의욕이 솟구치듯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을 대할 때 목자에게는 새 힘이 넘치게 되지만 열매 없는 농장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로되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14:15)
복음이 보배로되 대상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됩니다. 돌짝밭에 뿌려진 농사, 길가나 가시떨기 역시 씨종자만 없어질 뿐 수확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1:10). 얼마나 세밀하고 깊은 성찰입니까? 선한 목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야 이렇게 주의를 기울일 수가 있을까요? 흠과 티가 없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11)
최대의 영광이요, 존귀에 이를 수 있는 기도입니다. 자신은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을지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렇게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소원하는 전도자의 심정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소유한 참 목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가릴 것이 있습니까? 모두가 복이요 은혜입니다.
누구를 위해 살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으시렵니까? 오직 주님 외에는 달리 없음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몸 바쳐 충성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아멘!
기념할 업적
마 26:6-13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부은 것은 사복음서에 (마26:6-13, 막14:3-9, 눅7:37-39, 요12:1-8) 모두 기록된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다만 마가와 요한이 기록한 것은 문자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보아 같은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누가복음에 나온 것은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1. 주님을 영접한 가정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6절)
혹자는 베다니 문둥이를 마8:2에 있는 주님께서 고쳐준 나병환자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나사로의 아버지, 마르다나, 마리아의 남편, 아니면 나사로 자신이나 친구 등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근거를 찾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마지막 노정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생명록에 남길 수 있는 뜻깊은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생 노정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주님을 영접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2. 향유 부은 여인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1-3).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이며 복 받을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이와 같은 장면을 흠모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늘나라 그림자인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 복을 받았고, 교회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교회를 사랑하여 은혜를 받는데, 그리스도의 몸에 향유를 부을 수 있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줄 압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주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분을 품은 제자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마26:8).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이르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아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4-6).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주님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귓방망이를 한방 날리면서 나무랐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해 이를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12:7-8).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누가 질투하였습니까? 밤낮 선지 예언을 상고하면서 메시아를 대망하던 서기관과 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요, 복 받을 일일지라도 노출될 때는 마귀의 타켓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삼 년 동안 유다가 얼마나 부정을 저질렀는지 알기 어려우나 결국은 스승까지 팔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마26:14-16)
세월은 가고 인생은 변합니다. 그림자같이 허무하게 사라져갈 죄악에 미혹 받지 마십시오. 또 복 받을 일을 하고 인정을 못 받는 일이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4. 선에 대한 개념
가룟 유다의 말대로 값진 향유를 주님을 위해 드림이 허비라면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선이 무엇일까요?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은 귀한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 역시 있어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내가 행한 일이 아무리 칭찬받을 일일지라도 복음이 없으면 무익하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명을 불사르는데 내준다 할지라도 주의 이름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쓰임 받을 때는 냉수 한 그릇에도 죽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5. 기억할 업적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함께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
주님께 인정받는 일,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줄 압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1).
기회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신속하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잃고 핑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때 어디를 막론하고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이 임할 때는 ‘아멘’하고 순종하여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생각해보십시오. 그 여자가 그처럼 대단한 인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당대 훌륭한 인물들은 주님을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또 아무리 값지다 할지라도 향유 한 옥합으로 그렇게 복을 받게 된다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집을 팔고 땅을 팔아서라도 먼저 드리려고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면 향유를 부은 아름다운 정성과 영원히 기억될 복된 업적이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선한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또한 진리에 대적하는 마귀의 올무를 주의 하십시오. 기회를 잃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의의 면류관 받아쓰기까지 더욱 충성을 다짐하여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질그릇에 담긴 보화
고후4:7
질그릇은 그릇 자체의 가치보다 용도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질그릇에 오물을 담으면 오물 그릇이요, 또 물을 담으면 물그릇입니다. 더욱 귀한 것은 그 안에 보화도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화 그릇입니다. 떠도는 말에는 부잣집에는 불시에 찾아오는 불청객 때문에 금, 은, 보석을 금고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허술한 신발장 같은데 둔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발장도 되면서 보화를 보관하는 금고도 되는 편이지요.
1. 질그릇의 본질
질그릇은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만든 후 불에 구워서 만들어 낸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의 본질은 흙입니다. 유의할 것은 사람도 흙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그러고 보면 육체는 모두 진흙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혹시 나는 예쁘다고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흙인 줄 알고 겸손하십시오. 참 신기하지요. 사람도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이 있는 것 같이 흙도 황토, 흑토, 백토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많은 흙이 황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피부색이 흙색과 비슷합니다. 다만 이 흙에 생기가 불어넣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구울 때 알맞게 구운 것과 많이 구운 것, 적게 구운 것이 각기 색깔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흑인들은 지나치게 구운 사람이고, 백인들은 덜 구운 사람인데 황인들은 알맞게 구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황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누구를 막론하고 육체는 진흙에서 나온 산물이므로 모두가 자기 근본을 바로 알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생기를 불어넣은 피조물
우리 몸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으뜸으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도 육체뿐이라면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그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인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 사파리에 가면 사자 숫놈과 호랑이 암놈을 교미시켜 새끼를 낳았는데 이름 붙여 “Liger”라 했습니다. 즉 “Lion”과 “Tiger”의 합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누가 지었습니까? 역시 사람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동일한 피조물로서 만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만물을 다스릴 영장의 위치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가 조물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렇게 인간을 존귀하게 지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으나 불순종하여 죄에 빠진 후에는 도리어 심히 부패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의 모습과 위치를 회복하여 존귀에 이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진리의 보화를 담은 피조물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 자연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통해 베드로를 회개시켰고, 당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닭이 인간 위에 선지자로 군림하도록 허락하지 않은 일이며, 당나귀를 세워 주의 종으로 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통해 역사하셨으나 역시 지팡이는 지팡이에 불과할 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성령의 도구로 주님께 봉사를 하십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6:63).
육은 무익합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엎드려 나는 죄인이요, 또 무익한 질그릇임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들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 보화의 가치
세상에서 무엇이 귀하다 할지라도 생명보다 귀한 보배는 없습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입니다. 최신 레이다 장비를 갖춘 비행기 중에는 일억 불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항공모함 한 척의 값이 몇십억 불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싼 것도 인간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버리고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생명은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어도 다른 것을 위해 목숨을 투자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생명이 귀하다 할지라도 육신은 역시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진리의 가치가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소유한 자들이 복된 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보화가 아무리 값지다 할지라도 가치 평가를 못할 정도로 귀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얼마짜리라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진리가 보배임을 알았다면 나를 이처럼 존귀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이렇게 보배로운 만큼 우리의 생활도 보배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보화그릇답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가 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교사의 직분을 맡았습니까? 내게 맡긴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간식이나 옛날이야기, 노래와 율동으로 그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의 초등교사로 끝날 것입니다. 진정 진리의 보배가 담긴 그릇이라면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하고, 내게 맡겨진 어린 심령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이번 어린이 여름 성경하교, 학생회 수련회는 연중행사가 되지 않고 성령의 대축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고전10:23-24
사도 바울이 고전10:1-22까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심판받는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경고하고, 25절 이하에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본문은 중간 부분에 삽입된 것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 특권과 건덕의 문제, 또 성도로서 마땅히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유와 유익
세계는 이제 이념의 장벽을 넘어서 국익을 우선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르가이 협정에 의해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출입을 자유롭게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각국에서 몰려드는 외제 상품이 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 힘을 얼마나 갖추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일은 당국의 농림정책입니다. 한때는 감자 과잉 수입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팔리지 않아 창고에서 혹은 밭에서 썩어나가더니, 이제는 바나나 수입 과잉으로 심지어 배에서 하역도 못하고 썩히는가 하면, 제철에 수확한 양파는 저장할 창고를 얻지 못해 길거리에서 썩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사업을 할 수 있고 또 경제를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경제에 기여할만한 책임자라면 건전한 사고의식으로 기반을 잡아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업구조를 보면 대부분 노동력으로 운영해 나오다가 노사분규, 인건비 파동으로 뿌리까지 흔들리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오십 위 이내 재벌, 오백 대 기업에 들어가는 회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제시장에 우리의 기술특허로 수출하는 상품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산업기반은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는데 열심히 배워야 할 젊은이들은 연구열이 선진국에 따르지 못하고 또한 산업전선에서는 노사문제로 분쟁만 일삼고 있으니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국민은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세계 기능 올림픽 대회에서 구 년 연속 종합우승을 하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입증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우수한 인적 자원을 기술개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고의식과 집념입니다. 역사 속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뛰어난 강점을 살려야 하고 부지런하여 능률면에서도 앞장서야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절제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23절).
2. 자유와 건덕
성도에게 건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시내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그들은 애굽의 멍에 아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 해방을 받은 후에 진노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진리를 등지고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10:6-7)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일을 금식하고 있었는데, 산하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기뻐했습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갔을 때에 시내산 정상에서 불과 한 시간 정도 머물렀는데도 입술에 동상에 걸려 여러 날을 감각이 무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가 시켜서 망령된 짓을 했을까요? 스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8-10).
결국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는 망령된 행동으로 이스라엘이 멸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런 결과를 빚었을까요?
그들은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감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의해야 합니다. 날마다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죄를 범하는 자는 없습니까? 마음속에 십자가 대신 사욕의 우상은 없습니까? 마음에 품은 음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3. 남을 위한 삶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
모두가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따로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남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따라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그렇게 산다고 하여 누구에게 비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 길이 모두가 걸어가는 길일지라도 육체의 길은 소망이 없는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진리의 길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경찰이 자기가 휴대한 권총으로 이웃 식구들을 살해하고 그동안 괴로움을 당한데 대한 정당한 보복인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극에 이르면 너도나도 함께 죽자는 생각도 합니다. 이성을 잃은 행동이지요.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경찰서 열 개 보다 교회를 하나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이렇게 교회 숫자가 늘어났는데도 사회적인 변혁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맛을 잃은 소금, 빛을 잃은 등이라면 그것이 죽은 교회일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우리는 작은 일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바울은 먹는 것도 언급했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우리가 지녀야 할 덕목이 있다면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다음에는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잠든 시간에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못된 종자일수록 발육이 좋다는 것입니다. 방치하면 곡식은 죽고 맙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봅시다.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을 미워하지는 안습니까?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데도 감사와 기쁨을 망각하고 있다면 모두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희생 없는 제사는 상달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에 절제가 있었던가요? 지금까지 자기의 유익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의 유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습니까? 결단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빛을 등지고 어둠을 택하지 마십시오. 돌아설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어둠을 빛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모두 진리에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땅 위에 천국 이룩하는 역군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종말적인 심판
왕하18:13-16
우리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중에 히스기야와 같이 경건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왕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통치할 때 앗수르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1. 히스기야의 개혁
개혁은 어느 때나 필요한 것입니다. 안일과 방심, 타성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3-4).
이렇게 망령된 소행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중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건은 능력을 잃고 모든 신앙의 행위는 모양에 그치는 것입니다. 개혁이 필요한 때 히스기야가 등장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18:5-6).
백성들도 왕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대하31:5-6).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보다 더큰 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와 예물을 통해 위로부터 은총과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모습이요 땅 위에 이루어지는 천국입니다.
“히스기야가 그 더미들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대하31:9-10).
2. 의인이 받는 환난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는 상선벌악의 원칙이 적용되지만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욥이 당한 시험이요, 또한 그의 결국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 당하는 보응은 부끄러울지라도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는 주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시험을 극복할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5:8-9).
히스기야 사 년 곧 북쪽 이스라엘 왕 호세아 칠 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삼 년 만에 정복하고, 히스기야 십사 년에는 살만에셀의 아들 산헤립이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하고, 히스기야에게 협박을 가해 오자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에게 너무도 약한 모습을 들어내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왕하18:14)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고,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왜 그때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도 침묵을 지켰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3. 만족을 모르는 어둠의 정체
앗수르 왕의 요구대로 히스기야가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주었으나 산헤립의 군대가 물러가지 아니하고,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어떠한 약점도 보이지 말고 물리쳐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4:7).
그때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남쪽 애굽까지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까지 포위하였으니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골리앗을 꺼꾸러뜨리고 백전백승한 다윗의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오리이까”(시56:4).
4. 산헤립의 협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원수들의 희롱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40-43).
원수의 희롱에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성도에게 닥칠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요16:2).
오늘 구원파에 뿌리를 둔 사이비 집단들을 보십시오. 남의 재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습니까? 또 생명이 귀한 줄은 압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으는 수법을 이용하여 결국 집단 자살 길로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산헤립의 협박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18:22,25)
과연 산헤립이 여호와를 믿었으며 또한 주의 계시를 받았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을 희롱하는 소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만 어둠에 속한 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지요. 스스로 심판에 이를 뿐입니다. 그렇게 협박을 가해 오면서 한편으로는 민심을 흩어놓기 위해 회유책을 또 썼습니다(왕하18:31-32).
그러나 백성들이 잠잠하고 요동하지 않은 것은 왕이 명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입니다.(왕하18:36).
그런 상황에서도 백성들 앞에서 히스기야 왕의 통치권이 살아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서도 신앙으로 하나 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히스기야의 기도
산헤립의 협박장을 손에 든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혜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사37:17)
이것이 얼마나 절박한 기도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에게도 빌 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과 직통하는 지름길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종말적인 심판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사37:26)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 무리들의 심판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해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사37:36-38)
산헤립의 교만은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이 났습니다. 산헤립의 심판은 종말적인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 날에 의의 면류관 받아 쓰고 할렐루야 찬양으로 주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영광된 삶
고전15:57-58
고린도전서 십오 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부활 사건은 기독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서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대속의 역사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역사는 부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십자가 정병
걸프전에서 가장 난처해진 나라가 패전국 이라크를 비롯하여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입니다. 그들은 패전국이며 또 패전국과 손을 잡았던 나라들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패배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그런 자와 손을 잡고 함께 어둠에 빠져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패자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는 자유도, 주권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차 대전 당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 민족들이 팠던 마스시로 대본영 땅굴을 최근에 공개했는데, 그때 징용된 사람들은 하루에 20시간씩 중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짐승도 그렇게 혹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행은 그분들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겪은 고통이요 불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을 당한 민족이요, 원한이 맺힌 민족인데도 오늘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망각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끝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 보니 장교로 입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니 첫날부터 군기를 잡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으니 강한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군대 생활도 점점 익숙해져 가면서 느낀 것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얼마 지나니 훈련이 끝나고, 또 몇 년을 지나니 제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일은 끝나는 날이 있으나 영적인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의 고통이 자살로 끝난 것일까요? 더 무서운 둘째 심판 불못이 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자유, 인권, 존재가치와 같은 화려한 용어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왜 지옥은 고통뿐일까요? 구원의 진리를 등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1서3:8).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이 복음이 세상과 어둠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2. 견고한 믿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고전15:58).
“전자는 그들의 신앙을 굳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유혹이나 시험에 대비하는 것이라”(Vincent).
사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기도 우수해야 하겠으나 사기는 더욱 중요합니다. 점령군과 패잔병의 눈을 보면 차이가 있는데, 승자는 위엄이 있으나 패배자는 긍휼을 구하는 눈빛입니다. 통일의 그 날이 우리에게 오게 될 줄 믿습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든지 남과 북의 어느 곳이나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유물사관이 진리라면 그것을 고수해야 마땅하나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종주국 소련이 개혁의 기치 아래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을 북한에서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독재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북한의 세습독재도 그렇게 사라질 텐데 그때 신으로 받들고 충성하던 인민들은 아마도 신이 죽었으니 함께 가야 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정병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마십시오. 뿌리 깊은 나무는 폭풍 한설이 몰아쳐도 견딜 수 있습니다.
어떠한 유혹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오늘도 갈라디아 교회와 같이 율법으로 떨어진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단의 함정에 빠진 자들도 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목사님, 너무 견디기가 어려워 지탱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문제로 고민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주님 살아계십니다. 주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도와주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에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에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121:5-6).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의의 면류관 받아 쓸 때까지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주의 일에 힘쓰는 삶
우리나라에는 재벌 총수들이 책쓰기 경쟁이나 하는 것같이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하고 미인 간첩 김현희가 쓴 고백록도 잘 팔린다고 하니 ‘역시 세상에는 돈과 얼굴이 인기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은 그림자 아닙니까? 내가 예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늙은이가 되어 버리고, 돈이 좋은 줄 알았는데 내 생명에는 무용지물임을 깨닫게 되는 날 내 인생도 조용히 막을 내리게 되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인생의 낭만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젊을 때는 젊은이답게 인생을 즐기십시오. 청소년들은 청소년답게 활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11:9).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수고의 대가를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은 육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업을 하여 돈을 모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산되는 에너지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또 봉사와 헌신하는 생활은 모두가 영적인 일이 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는 육신의 일이지만 성물을 구별시키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일일지라도 육신의 일로 끝난다면 허무로 돌아갈지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알곡으로 천국 곳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산다는 대답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은혜로 살아가는 생애라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을 믿습니다.
2) 구원 사역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십자가를 제하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주시고 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 안에는 모든 계명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아무리 이웃을 섬기는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복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선행이 믿음이 제하면 구원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할지라도 복음이 있으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허물지고 무익한 인생이 보배로운 손길이 되어 뭇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복된 은혜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7-58) 아멘!
히스기야의 교만과 회개
대하32:24-26
유다 왕 히스기야의 경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역대 왕들 중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경건한 왕도 교만하여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히스기야의 약점이 내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약점을 빙자하여 자신의 허물을 합리화시키거나 회개할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흠과 티가 없는 믿음으로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 은혜를 망각하는 행위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대하32:25).
무서운 일입니다. 깨닫고 보면 하나님의 책망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라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지요. 특별히 살인죄나 간음죄도 아닌 일들이 허물로 밝혀지겠습니까? 유의하십시오. 언제나 정의의 잣대는 진리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면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은 사람 앞에서 칭찬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두려워할 일입니다. 일꾼이 품삯은 받는 그 날로 의무가 청산되지만 은혜는 힘입는 시간부터 빚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나는 받은 은혜가 없어서 주님 섬길 줄 모른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자녀 삼으시고 허물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수고 했던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자기를 과신하는 행위
사실 자신을 과신한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이지요. 인간이 감히 무엇으로 자랑할 것이 있을까요? 물론 과소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부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남달리 자랑할 것이 많은 줄 아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어느 때에 교만했는지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대하32:27-29)
히스기야의 이러한 부가 어디서 왔습니까?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협박에 국고와 성전 곳간에 있는 보물이 모자라 성전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걷어서 바쳐야 하였고 뿐만 아니라 죽을병이 들어 삶의 여망까지 끊어졌던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대하32:22-23)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권능으로 원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몸이 살아나고 하나님께서 부와 귀와 또 영화로 옷 입혀 주셨으니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은혜입니까? 복을 받았을 때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자랑하지 마십시오. 지엽적인 복 때문에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 옷을 바꾸어 입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가요? 고급 음식을 잡수셔도 여전히 그 사람이요, 지위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사람일 뿐입니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진다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경건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머리 잘린 삼손이 두 눈을 잃고 원수 앞에서 맷돌을 돌려야 했던 그 큰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았는데, 복을 받은 후에는 왜 은혜를 등져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원수 앞에서 약점을 노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감사를 잃어버린 행위
진정한 감사의 생활은 자기의 공적을 넘어서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조건을 넘어서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살았다 죽었다, 또는 크다 작다, 좋다 안 좋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평가 할 수 있을까요? 감사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달았다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 헌신, 봉사, 희생할 수 있다면 다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 감사입니다.
‘주님 은혜 생각하면 무엇인들 아까우랴 이 생명을 주님께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
여기에 진정한 헌신이 있고 봉사의 열매도 맺게 됩니다. 이 감사가 내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진단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 감사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2-23)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항상 엎드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향기를 발하여 주님을 기쁘게 하는 아름다운 제물로서 주님께서 흠향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감사, 내일도 감사, 영원토록 감사를 더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히스기야의 회개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대하32:26)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교만하여 패망하는 것보다 교만해질 요소가 없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사람이 어느 때에 교만해지는지 살펴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은혜를 크게 힘입은 자, 복을 많이 받은 자가 그러한 죄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았다고 그릇이 보화 될 수 있으며 나귀의 발밑에 카펫이 깔렸다고 나귀가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은혜를 힘입은 사람들이 그런 죄를 범하니 문제입니다. .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엎드러져 회개했습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과 보응은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더 큰 불행은 어둠 속에 살면서 어둠 속의 행위를 깨닫지 못하므로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서 빛의 교훈을 받고, 어둠의 일을 회개하므로 어둠의 일을 배설물 같이 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청산하십시오. 은혜를 배역하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핑계와 변명은 금물입니다. 은혜로 사는 몸 저주로 마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를 심판하는 교만의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 생각하여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고 엎드려 경배하여 은총을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뜻
렘29:10-13
유다 말년에 불림을 받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1. 므낫세의 죄
유다의 역사를 보면 북쪽 이스라엘이 패망한 후 남쪽 유다에는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경건한 왕들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모든 우상과 죄악을 척결시킨 일도 있으나 므낫세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므낫세가 저질은 망령된 행위를 보십시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섬기며...여호와의 전에 제단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흰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대하33:3-6).
이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망령된 행위를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자행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므낫세가 어린 나이 왕위에 올랐으므로 신하들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행위는 역사에 유다 멸망을 자초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2. 보응의 시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
감사한 일은 죄의 기한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칠십 년이 길다고 생각하면 길지요. 그러나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기한을 정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4-5).
‘바벨론에서 70년’
이 기간은 어느 특정인의 기도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을 권고하심은 그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운 언약에 의해서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래지 않아 영광의 새날이 밝아올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뜻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렘29:11)
1) 재앙이 아니라 평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평안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변하여 재앙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지 아십니까? 재앙을 자초할 때입니다. 탕자가 고생을 많이 했다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등지고 세상 죄를 즐기므로 성령이 탄식함을 아십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손길로 징계하시고 축복의 손길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또 찌르는 가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쓰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만하지 못하도록 찌르는 가시를 육체에 주었듯이 우리에게도 탈선을 방지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시를 주는 수가 있습니다.
혹시 ‘이런 약점이 내게 없었으면 너무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약점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 때문에 더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의 약점은 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코에 있으므로 사람은 코를 꿰어 농사를 짓습니다. 나의 약점이 무엇이든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 약점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약점 때문에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므로 주님의 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2)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
사람은 영원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먹구름이 천지를 뒤덮고, 태풍이 몰아칠 때에는 세상이 뒤집힐 것 같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무지개 언약과 함께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듯이 우리들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신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으신다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육신이 불편한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여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감사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맛보는 참된 평안과 그 기쁨, 얼마나 귀중한 은혜입니까? 오직 성령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참된 평안이요 영생의 기쁨입니다. 이는 땅 위에서 누리는 천국의 영광이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약속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29:12).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빌 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절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135:15-18).
무슨 말씀입니까? 살아있는 인생이 우매하여 석고와 목상의 우상같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복 받기 위해 들인 정성으로 복 대신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게 부르짖으며…내게 기도하면’
오직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때 응답받고 축복받게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감사드릴 일은 비록 나라는 망하고 주권은 잃었을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구원받을 길을 열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그 은혜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여기는 시간과 장소, 또 어떠한 여건에서도 기도하고 응답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을 줄 압니다.
5. 새로운 결심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우리의 전심과 주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일에도 긴급을 요하는 일이 있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교통법규에도 응급 자동차가 비상등을 켜고 비상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리면 모든 차량은 양보해주어야 하고 그런 차는 신호등도 무시하고 통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히 큰 문제도 아닌데 소동을 부리면 이상한 일이지만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태연하다면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국민들은 거기에 대비하고 따라야 하는 것 같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막다른 골목의 기도를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119에 어떻게 신고해야 할까요? 내 집에 불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오시면 고맙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알아서 조치하라’하고 말할 것입니다.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까? 전심으로 기도하여 해결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기에 자신의 공로가 개입되는 줄 생각한다면 이는 대리석으로 집을 세우면서 썩은 목재를 사용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는 에스더의 기도가 에스더의 공로라 할 수 없고, 한나의 기도가 한나의 공로가 아닌 오직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소망이 없음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전심으로 간구하는 기도일까요? 이는 조건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요, 의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요, 막다른 골목에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응답과 축복
이제는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하여도 이미 기울어진 유다의 국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지경이라면 자포자기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칠십 년의 언약입니다. 이는 숫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진리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구약에 있는 메시아 언약은 모두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현실 세계의 약속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영생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3).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이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욥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모든 시련이 끝이 나고 갑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욥42:10).
수가성 우물가에서 메시아를 만난 여인은 생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언약을 굳게 붙잡고 기도합시다. 하늘의 평안과 영생의 소망이 내 마음속에 넘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멘!
은혜를 배역한 요아스
대하24:20-2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유대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어두웠던 때와 은혜를 배역한 요아스에 대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유다의 왕가
유다 왕 여호사밧이 그의 아들 여호람을 악명 높은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정략적인 결혼을 시키므로 아달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올라와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고, 또 여호람은 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나와 죽었습니다(대하21:17-20)
그 후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대를 이어 왕 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즉위 일 년 만에 또 예후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2. 왕족을 멸하고 나라를 다스린 아달랴
“짐승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인간이 있으니니 문제입니다. 청나라 말년 서태후는 아들을 두고 섭정을 하였으나 아들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아가 예후에게 죽은 후에 스스로 왕족을 죽이고 육 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아달랴는 이세벨보다도 더 극악무도한 여인이었습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대하22:10).
그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없었다면 다윗의 혈통이 끊어졌을 것입니다.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몰래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하였으므로 아달랴가 그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더라”(대하22:11).
3. 왕 위에 오른 요아스
“제칠 년에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백부장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그들이 유다를 두루 다니며 유다 모든 고을에서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들을 모아 예루살렘에 이른지라”(대하23:1-2)
제사장 여호야다는,
1) 매사에 신중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왕자를 은밀하게 보호하고 양육하여 오다가 적절한 시기에 백성들 앞에 공개하여 다윗의 혈통을 왕 위에 앉혔습니다.
2) 백성들 앞에서 존중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군대장관, 레위인, 이스라엘 족장들, 모두가 그의 소집에 응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그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특별히 놀라운 일은 그들이 일이 수행될 때까지 비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3)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대하23:3)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를 도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성전에서 대관식을 올리는데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각각 삼분의 일씩 나누어 성전 출입문과 왕궁 또 기초문을 지켜 제사장과 레위인 외에는 여호와의 전에 출입을 통제하여 대관식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4. 요아스의 등장과 종교혁명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대하24:1)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라는 영화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줄 압니다. 왕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어린 나이에 왕관을 쓰기는 하였으나 자유가 그리워 그렇게 궁중을 뛰쳐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찡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아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뒤에는 덕망이 높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으므로 그가 등장하자 제일 먼저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모든 우상과 죄악을 척결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부수고 그의 제단들과 형상들을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대하23:17).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대하24:2).
또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아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어 그 일을 빨리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모든 방백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궤에 넣으므로, 필역한 후에 그 남은 돈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어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아스에게는 둘도 없는 은인이요, 국부요, 제사장인 여호야다가 백삼 십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대하24:16)
5. 은혜를 배역한 요아스
마치 홍수에 제방이 무너져 내리듯이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나라는 다시 패망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대하24:17-19)
사람이 망하려면 망할 행동을 하고, 죽을 때가 되면 평소에 안하던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복 받을 사람은 복 받을 말씀을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데 저주받을 인간은 유혹에 빠져들게 됩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은혜를 욕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은혜의 사슬에 메인 바 되어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진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아스를 보십시오. 그는 사십 년을 권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렸으나 그의 말년에는 은혜를 배역하고, 선지자의 말을 외면하고, 또 우상을 만들었습니다(대하21:11).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대하24:20).
그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여야 마땅하나 회개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스가랴를 돌로쳐 죽였습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대하24:21).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22).
은혜를 배역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아람의 적은 수의 군대 앞에서 요아스는 참패하고 부상을 당하자 그로 인해 그 신복들이 그를 죽여 열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주의 죽음으로 생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요, 등불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배반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겸손으로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영을 시험하라
요1서4:1-6
목회를 하다 보니 성도들이 분별력이 부족해 좌우로 잘 치우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은 “엘리야 복음 선교원”에 대해 성경적으로 비판하면서 “영을 시험하라”는 말씀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적그리스도나 이단은 특정 인물이든지 어느 시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끊임없이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단의 특징 중에 공통된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시한부 종말론 2) 교주의 절대 권위 3) 특정 지역과 한정된 구원 4) 기성 교회에 대한 배타적 행위 5) 성 문란 6) 재물 약탈 등입니다.
적그리스도 이단들은 오늘도 택한 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또는 화려한 천사와 같이 등장하여 미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술책을 주위 하십시오. 사람은 약점이 많으므로 마귀가 그 약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그 율법으로 복음을 대적하게 하였고 율법이 없는 자들은 율법이 없는 어둠 속에서 온갖 죄악으로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마귀의 올무를 보십시오.
1.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용한 무기가 호기심입니다. 선악과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여겨졌다면 이는 벌써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보다 보기 좋고 먹기 좋고 탐스럽기도 한 생명과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왜 하필 금기로 한 그 선악과에 호기심을 가졌을까요? 그것이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달에 이르기 전에는 달에 대한 동경심이 가득하였기에 상상하는 대로 비춰지는 꿈의 천체였으나, 지금은 인간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불모지로 떠 있는 작은 위성이지요. 사실 광활한 우주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영영 이르지 못할 세계이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인간이 사는 자연 세계는 다스리도록 허락을 받았으므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리나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금기된 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는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십 세기 지구상의 가장 큰 변혁은 천구백십칠 년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볼세비키(다수파) 공산 혁명으로 확산된 유물사관으로 칠십년이 지난 오늘에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보다 백만 배나 더 자유롭다. 모든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이 공산주의다. 우리는 인민에게 빵을 줄 수 있고 멀지 않아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신 주님께 시험한 마귀의 소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는 오늘까지 ‘혁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진리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참된 진리는 영구불변이요, 가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을 붙들고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는 나라가 있지만 역시 무너질 날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유 진영은 낙원입니까? 아닙니다. 한 편으로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일지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에 빠질 때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야4: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1서2:15-16).
2. 영을 분별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1서4:1).
분별하는 지각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서울 돈암동에 가면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철학도사들의 간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들도 그곳을 출입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곳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합니다. 아마 다급한 사정에 해결책을 찾고자 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역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복음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없다면 천사의 소리를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한다 하여도 저주받은 마귀의 올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양가죽을 쓴 이리들입니다.
엘리야 복음 선교원의 교주 박명호가 말하는 것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을 “친 아버지” “친 아빠”
2) 인간은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의 태에서 낳다.
3) 선악과에 무서운 독이 들어있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즉시 죽었다.
4) 십자가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지신 큰 십자가, 아들 예수가 지신 작은 십자가가 있다.
“저 쓸쓸한 갈보리 언덕 위에 두 십자가가 나란히 서 있네요. 하나는 큰 십자가, 하나는 작은 십자가. 큰 십자가는 아버지의 십자가요 작은 십자가는 아들 십자가랍니다.”
“십자가의 피보다 더욱 진하고 십자가의 죽음보다 강하신 사랑 아무도 알 수 없는 친아빠 사랑, 온 우주에 가득 찬 아빠의 사랑”
5) 천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악한 천사(사단)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6) 한국은 사41:25에 나오는 동방이며 특히 강원도 원성군이 동방의 중심지며 동방에 나타나는 마지막 선지자 엘리야가 박명호 교주다.
7) 예수는 창을 꼭 닫고 창녀 마리아와 연애를 했다.
8) 중매쟁이는 중매 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예수도 하나님께 우리 인간을 중매했으니 이제는 직접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
9) 기성 교회는 모두 마귀가 만든 집단이다.
10) 하늘가는 길은 좁은 길이 아니라 황금 고속도로다.
11) 안식일 교리를 주장
12) 남자는 왕자, 여자는 공주로 호칭.
성부의 수난 설은 주 후 이세기 노에투스와 클레오메네 또 프락세에 의한 설로서 삼위일체론을 주장한 터툴리안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3. 신앙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잠든 시간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므로 곡식밭에 가라지가 나는 것같이 우리가 세속에 물든 시간에, 또 사데 교회와 같이 영이 죽었을 때 마귀에게 농락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오순절 교회와 같이 은혜 충만, 진리 충만, 권능 충만한 생활을 한다면 마귀의 유혹은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잠들어 있을 때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다는 것을 알았다면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정도 버리고 자녀들 교육도 무시해 버립니다.
자신을 성찰해보십시오. 과연 어떠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이단들의 열심보다 더 주님을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잠든 자리에서 깨어나고, 병든 자리에서 고침을 받고, 죽은 자리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만방에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은혜를 입기를 소원합니다.
4.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것은 밤낮으로 택한 자들을 참소하고 괴롭히던 원수 마귀가 받을 심판이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진리가 승리합니다. 미가야 한 사람의 예언이 거짓 선지자 사백 인을 이겼고, 엘리야 한 사람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 팔백오십 인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와 비 진리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아멘!
하나님의 전신갑주
엡6:10-20
출전하는 선수는 기량을 갖추어야 하고, 시험에 대비하는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고, 전쟁에 나가는 군대는 무장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같이 십자가의 정병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1. 싸움의 대상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의 물결이 공산주의 이념을 뒤집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 평화가 올까요? 마귀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은 진정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악령이나 성령, 모두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혼과 내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두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죽음을 부인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와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땅에 화평을 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독재 폭군들로 말미암는다고 하지만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어둠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악령을 축출하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를 보십시오. 벙어리 되고 더러운 귀신이 아이에게 들어가니 간질병이 발작하여 물과 불에 뛰어들게 하였듯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귀가 역사하면 스스로 죽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됩니다. 또 그들은 순교하는 성도들같이 거룩한 죽음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악마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축출해야 합니다.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모두가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영적인 무장
1)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옷을 열두 벌 입어도 허리띠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로 허리띠가 튼튼해야 합니다. 여자들의 핸드백과 남자들의 허리띠 때문에 악어가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마는 그만큼 악어가죽이 좋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보다 더 튼튼하고 낡아지지 않는 허리띠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사람이 진실을 잃으면 어떠한 말을 할지라도 멸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 같은 재능이 없어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것은 수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허리띠로 영적인 무장에 빈틈이 없기를 바랍니다.
2) 의의 흉배를 붙이고
흉배는 가슴에 부착되는 표식입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의의 흉배가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살전5:8) 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의, 즉 주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으로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그것이 의의 흉배입니다. 최후의 승리 곧 영원한 승리는 의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우리 모두 의의 반열에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평안의 복음의 신
이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복음의 신입니다. 평안을 원하십니까? 복음의 신을 신으십시오. 구원의 기쁨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멍에에서 영원히 해방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으십시오.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또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믿음의 방패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엡6:16).
‘모든 것 위에’ 지금까지 언급한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다 갖추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믿음의 방패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유혹했을 때 그 방패가 튼튼하지 못하므로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도 그런 유혹을 했으나 말씀의 방패로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의 방패는 ‘내가 믿는다’는 주관적인 신념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이란 일명 마귀의 전술 무기입니다.
주석가 렌스키는 타는 솜을 간직한 큰 화살을 포위된 요새를 향해 발사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화전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믿음의 방패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주님을 믿는 이 믿음이 얼마나 복된가를 알았다면 우리도 그 믿음으로 무장하여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5)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구원의 투구, 이는 현재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는 전사라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백전백승을 한 용장 다윗의 수하에는 약졸이 없었던 것과 같이 십자가의 정병 앞에는 승리만이 보장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련에서 스탈린과 레닌의 동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스탈린과 레닌은 칼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혁명가로 독재와 폭군으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우리의 구원은 유물사관의 헛된 속임수의 구원이 아닙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마4:4)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말씀만이 우리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로 무장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성령 안에서 기도
이상에서 다룬 영적인 무기는 모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여기에는 기도의 필요성과 방법, 시기, 목적, 모두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산업전선에서는 전력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능력의 원천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기도(예배를 포함한 모든 형태)와 간구(도움이 필요할 때)’, 이는 매사에 기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무시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물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단계 신앙이 더 깊어지면 ‘무시로’ 기도하고 또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고 항상 기도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혹시 은혜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다 된 줄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기도는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동차의 시동은 출발 준비입니다. 시동만 걸어 놓고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사람이 하고 또 어느 때에 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은혜받은 사람이 은혜 안에 거할 때 시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처럼 많은 일을 하고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는 값없이 받을지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불 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 주시라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다면 기도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중요한 대목입니다. 언제든지 전도자의 주변에는 은혜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위해서 기도하는 사명 자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도의 젖이 마르지 않고 강단에서 복음의 비밀이 강같이 흘러넘칠 때 생명과 구원의 역사는 땅끝까지 퍼져나갈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과 역사적인 과업을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스라엘의 목자
대상11: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1. 초대 왕 사울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아 사십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나 후손이 대를 이어 왕 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열조 야곱이 애굽에서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유다 지파에서 나오리라 하였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웠을까요? 그것이 때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사무엘 때까지는 사사정치로 특별한 조직이나 기구도 없이 각 지파 별로 생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 역시 특별한 계보가 아니고 어느 지파 누구든지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 유사시에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로 사무엘 때까지 내려왔고 백성들은 사사에 순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늙고 그의 아들들이 사사로 등장하자 그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삼상8:5).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한 사무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받은 응답입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억할 일은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여 무조건 하나님의 뜻인 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나 나중에 허락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그 길로 발람은 저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2:15-16).
생각해 보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런 빌미를 주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서두르면 이스마엘을 낳고 기다리면 이삭을 낳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구한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때를 깨달았다면 비록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정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새의 줄기에서 새싹이 움 돋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늦게야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대관식 때에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12:19).
2. 사울과 다윗 집안의 싸움
복 받을 사람은 복 받을 일을 하고, 복을 못 받을 사람은 받은 복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에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월권하였고, 또 아말렉과 아각을 죽이고 모든 소유를 불태우라고 한 명령을 듣고도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일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버려 부리는 악신이 들어가 일생을 번민에 쫓기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와 함께 길보아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군대 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대를 이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아브넬은 사울 왕의 사촌입니다. 그 때 길르앗, 아술,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이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나라가 극히 혼란하였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을 다스리는 동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 이는 한 나라에 치리 자가 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쪽은 점점 강성해 가고 한 쪽은 점점 쇠잔해 갔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사실 숫적으로 보면 유다 지파 하나만 거느린 다윗이 전적으로 불리하게 여겨질 수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하시느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동류들보다 승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특한 수단으로 복을 받으려 하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다윗에게로 돌아온 이스라엘
군대 장관 아브넬이 다윗에게 왔다가 요압에게 죽은 것을 보고, 군장 바아나와 레갑이 침상에서 이스보셋을 살해하여 즉위 이 년 만에 사울 왕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이르되 우리는 왕의 가까운 혈족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대상11:1-2).
매사는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사울의 신복으로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을 통해 진리의 역사는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삶이 귀중함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이스라엘의 목자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왕에게로 나아가니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대상11:3).
다윗은 이제 왕으로서 세 번째 기름 부음을 받게 되므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목동으로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고, 두 번째는 유다 지파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돌아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이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열국에 하나님의 이름을 떨치게 한 역사적인 인물이요 왕 중의 왕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인디애나주 에반스 빌은 링컨이 성장한 유적지로서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링컨이 어렸을 때 생활한 환경은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고생했던 모습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는 일찍 생모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성경을 배우고 믿음으로 성장하여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젊은이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교훈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지라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다윗은 은혜와 진리의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
그는 통치자이지만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복종할 줄 아는 양이었습니다. 정치인이면서 신앙인이요, 정의의 사람이면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그의 이름은 영원히 존귀한 반열에 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과 같이 선한 목자 주님의 은총 힘입어 존귀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경고
말1:6-10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1:1).
말라기 선지자의 경고가 있은 후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까지 사백 년 동안 침묵을 지키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이 인류 종말에 대한 예언과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이라면, 말라기(나의 사자, 나의 전달자)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과 주의 첩경을 평탄하게 할 세례 요한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일어났던 걸프 전쟁의 원인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한데 대한 다국적군의 최후통첩을 무시하므로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법으로도 마지막 경고를 무시하면 다음에는 법 집행이 따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경고는 더 엄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사랑을 저버린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은혜를 배역하고 사랑을 저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1:2).
내게 있는 것 중에 은혜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Y장로님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분인데 갑자기 풍으로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경희의대 한의과 원장을 비롯해 유명한 의원을 찾아다니며 육 개월이 지나도록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 도중 입안이 물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중에, “너는 입안이 물려 피 흘리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느냐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받은 고난과 흘린 피를 생각해 보았느냐”라는 책망을 듣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장로님, 오늘로 모든 치료는 끊으시고 나와 함께 기도하러 갑시다” 하고 교회 뒤편에 있는 도봉산 줄기로 올라가서 기도했는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고쳐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징계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새로운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형통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감사가 없으면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1:2).
과연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증거가 무엇이며 베푸신 은혜, 내려주신 복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이요 배역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말1:2-3).
에서와 야곱은 이삭이 쌍태로 얻은 아들들입니다. 복 받은 이삭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인데, 그 중에 하나밖에 택함을 받을 수가 없었던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을 사랑하시므로 에서를 미워하였고, 야곱을 선택하시므로 에서를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열조를 사랑하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후손에게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복을 귀한 줄 모른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살펴봅시다. 꼭 같은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들로서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나은 것이 무엇일까요? 윤리나 도덕, 인격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허물지고 부족한 것뿐이지요.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나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주의 상을 경멸한 죄
금년에는 한가위 민속 절기가 마침 주일이 되어 성도들은 음식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 산 제사 드리는 것이 더 큰 은혜요,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이 날 조상 앞에 제사와 성묘를 합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제사일지라도 돌아간 조상이 그것을 먹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복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돌아간 조상이 복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살아계실 때 주고 싶은 대로 복을 줄 수 있었겠지요. 복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복 받을 일이지만 사후의 제사는 우상을 섬기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를 보십시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소행을 모르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가인은 변명하기에 급급하다가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신 메시아를 배역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백성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의로운 줄 알고 있었으나 주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흠향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의 예물과 정성을 기쁘게 받으시는지, 의식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주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기뻐하신다면 주님의 은혜가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유의 은혜, 중생의 은혜, 치료의 은혜와 모든 은사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할 줄 믿습니다.
3. 헛된 제물은 드리지 말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3-14).
올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제사가 하나님을 짐이 되는지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말1:8).
의식적인 예배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올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1:8).
“십일조는 제일 먼저, 농산물은 맏물로, 가축은 처음 난 것 중에 흠 없는 수컷으로” 이렇게 내게 있어 가장 귀중한 보배를 항상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복은 기대하면서 그의 믿음은 본받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때에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까? 약속의 아들이삭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귀중한 것은 그 아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순종하여 바친 데 있었습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복 받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앞장서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말1:13).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를 멸시하며 성물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반드시 제사에 올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성으로 드려야 합니다. 무서운 것은 성물에 관한 죄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짓는 죄보다 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이 범한 죄와 심판을 기억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삼상2:25).
하나님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오곡백과 무르익은 이 계절에 조상들은 처음 익은 열매로 신에게 감사드리고,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는데 이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 합당한 예물로 영광 돌리고 만민 중에 뛰어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바울의 권고
골4: 2-6
골로새서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쓴 서신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성도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적인 문제도 담당해 주십니다.
본 서신을 대별하면 그리스도의 탁월성(1장~2장)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3장~4장)이라는 두 주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기도에 항상 힘쓰라
기도는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십일 특별 기도를 은혜중에 마쳤습니다. 그동안 많은 은혜를 힘입고 또 변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먼 곳에서 매일 택시를 이용하여 아이들까지 참석시킨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이웃 사람을 일깨워 함께 나와 은혜를 받은 분도 있습니다. 또한 새로 등록한 성도 중에는 장애가 있는데도 새벽 예배에 참석하여 변화를 받기도 하고, 고질적인 증상을 치료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새벽 예배를 엄두도 내지 못한 분들이 꾸준히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 일들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원한을 안고 기도하였고, 집중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기도하였고, 주의 긍휼을 따라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기로 작정한 첫 날부터 하늘나라에 상달되었으나 이십일일 만에 응답받은 것같이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올린 기도는 모두 상달됨을 믿으시기바랍니다. 유의할 것은 기도는 일정한 기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골4: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원동력이 기도임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기도의 일군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침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기도 많이 하는 교회로 소문이 난 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기도의 사명자 곧 성숙한 기도가 아쉽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먼저 받은 분이 새벽기도, 저녁 기도회에 불씨가 되어 기도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를 올릴 때 역사하는 힘이 커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이번 특별 기도에 대해서도 혹시 평생토록 하여야 할 기도인데 사십일 작정은 무어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십일이라는 날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정된 기간이라면 어떻게 그 기간을 활용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육은 평생토록 받아도 모자라는데 졸업장이 왜 필요합니까? 어른들이 생각하기로는 유치원 졸업 아무것도 아니지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전히 철부지 인생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은, 각 과정을 마친 사람은 마치지 않은 사람에 비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이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답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끝까지 펼치는데 앞장서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2.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사람에게는 활동할 수 있는 낮이 필요하고 밤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과 낯은 자연의 질서이므로 만물들도 여기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질서를 무시하고 기도하라는 뜻일까요? 이유는 원수와 대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노리므로 거기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졌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속에 물든 사데 교회와 같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원수와 대적이 어느 때에 온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을 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까요?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하였습니다.
사람이 잠든 집에 화재가 나면 생명과 재산을 잃게 되어도 깨어 있는 사람은 미리 단속을 할 수 있습니다. 잠든 집은 도둑을 맞아도 깨어있는 집은 대비책을 세웁니다.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자에게 어떠한 은혜가 임하는지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감사로 깨어있다면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실지라도 영광중에 주님을 맞이할 줄 믿습니다.
3. 주의 종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골4:3).
이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예배에 임할 때에는 은혜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느낀 것은 목회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와 교역자 사이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품에 안고 쓰다듬어 줄 때가 좋지요. 다 크고 나면 시집장가보내서 독립시키게 됩니다. 물론 신앙이 정상적으로 성숙한 상태라면 큰 일군이 되지요. 그렇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스러운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여기에 대해 주석가들 중에는 “전도할 입”으로 또는 “전도할 기회와 환경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는 순전히 불신자, 이방인을 상대하는 기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
그리스도의 비밀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관하고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복음일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의 깊은 비밀은 전도자에게 필요한 복음이요,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필요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영적인 맹인이 되는 일입니다. 왜 그처럼 메시아를 대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신 메시아를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들이 교만하여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이 강단에서 복음의 비밀이 선포되어 죽은 영혼이 살아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4:4).
4. 세월을 아끼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실패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성공합니다. 어디에서 이러한 차이가 생길까요? 이는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활용하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입니다. 재물은 잃었다가도 회복할 수 있으나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불신자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만난 일로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와 창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전도를 목적으로 한 일이라면 내 평생을 다 바쳐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면 성도지 간에도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한가한 두뇌는 마귀의 공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에 대해 엄히 경계하고,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지 일하기는 싫어하면서 놀기를 즐기는 풍토가 만연해가는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졸부근성이 가진 자들이 중국에 가면 대단히 돈 많은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이 어떻습니까?
과거에는 일본에 주권을 잃었던 민족이 이제는 경제적으로 중국에 예속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우리는 자긍심을 가지고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5. 너희 말을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4: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
주님께서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은혜롭게)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우리의 언어와 동작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맛을 냅니다. 성도들도 생명의 진미를 살려야 합니다. 또한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부패를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으로 부패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련에서 레닌의 동상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북한 김일성 동상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의 비밀이 선포되도록 기도합시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은혜 안에서 성령의 열매 맺는 성도되기 기원합니다. 아멘!
섬김의 도
요13:1-17
요한복음 십삼 장부터는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으로, 이 기간을 수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13:1).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사역 중에서 이 “때”라는 말씀을 비교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역 초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셨고(요2:4, 7:30, 8:20).
후반기에는 때가 이르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2:23, 17: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3:1-2).
만물은 때를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며 또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이 때는 무었을 의미할까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을 위하는 목자의 사랑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끝까지’라는 원어는 “에이스 텔로스” “완벽하게” “영원히”또 “지극히”라는 의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후 검과 몽둥이, 횃불을 들고 주님을 체포하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요18:4-8).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최후까지 지켜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1.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마귀
주님이 계신 성스러운 자리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은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원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그런데 하나님의 총회에 사단이 동참하여 경건한 욥을 참소하였던 것같이, 오늘도 마귀는 역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어떻게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가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된 데는 가룟 유다의 약점이 마귀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점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내 약점이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12:5).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욕을 주의하십시오. 에서가 팟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았다면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2.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주님의 교훈
1) 베드로의 거부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을 때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13:6).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리요, 행하신 일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참소하였습니다(마26:6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2).
“내가 하는 것을… 이 후에는 알리라” 어떻게 알까요? 진리의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3-34).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섬김의 교훈
주님은 떠날 기약이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는데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크냐”(눅22:24)하고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시고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그 중에 있노라”(눅22:27).
이렇게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여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digtal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차산업 곧 농경문화를 비롯하여 모든 기계문명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자고 나면 달라지고 또 새로운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적응해나가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약품 하나를 개발하면 거기에 따르는 부가가치가 천 배를 내다 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보다 월등하게 작은 영토일 뿐 아니라 또 산악지대인 스위스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발명특허 일위라고 합니다. 외국 상품은 하루가 다르게 홍수같이 몰려와 우리 경제를 빚더미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크게 각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더 귀중한 것은 진리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얼마나 귀중한 교훈입니까? 만일 주님께서 그 당시 컴퓨터 산업이나 우주공학을 가르쳤다면 전문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도, 활용하기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남녀노소,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유의할 것은 물질문명에는 구원이 없으나 진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비한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이미 목욕한 자일지라도 발을 씻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13:8).
어떻게 생각하면 제자로서 당연한 겸손을 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의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원문은 우크 에케이스 이는 현재 진행형으로 미래에 대한 축복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의미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한 발 더 떠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13:9).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깊이 유의해야 할 말씀입니다. 여기에 목욕은 로우오 이는 중생 곧 전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에 “씻는다” 닙토라는 말은 부분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제자들이 목욕 곧 중생하였는가? 또 가룟 유다가 목욕에서 제외된 이유 등 궁금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의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가룟 유다도 주님의 세족식에 참석하였고 최후의 만찬에도 참석하여 떡을 나누었습니다. (마26:23)
기억할 일은 이러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임으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가룟 유다는 믿음이 아닌 의식적으로만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이 없으면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단회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거듭난 사람이면 다시 거듭나기 위해 중생의 은혜를 간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발은 끊임없이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은혜받은 성도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몸으로 제물 삼아 하나님께 드리고 매일매일 기도 생활, 봉사 생활, 주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외면하고 세속에 물들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생활을 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아직도 음주, 흡연 문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자라면 철저히 정리하십시오.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허물, 나의 죄를 씻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
우리 모두 형제의 발을 씻어 사유의 은혜 실천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셉의 시련
창39:7-19
야곱이 형의 칼을 피해서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무는 동안 라반의 작은 딸 라헬과 칠 년을 연애하여 결혼을 했는데, 첫 날밤 자고나니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가 침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항의했더니 “이곳 풍습에 따라 그렇게 하였으니 다시 칠년을 봉사하면 동생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을 하여 칠 일 후 또 결혼을 하고 십사 년을 다시 무보수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자식을 넷이나 두는 동안 라헬은 자식이 없으므로 몸종 빌하를 들여보내 아들 둘을 얻게 되자 레아도 몸종을 들여보내 또 아들 둘을 낳고 자기 몸에서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더 두어, 야곱의 소생이 열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라헬은 그처럼 자식 낳기를 원했어도 하나님께서 성태하지 못하게 하시더니 늦게야 태를 열어 자식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이름을 ‘요셉’이라 하였는데 이는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여 ‘더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 욕심을 부리던 라헬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난산으로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슬픔의 아들) 하였고, 야곱은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창35:16-18).
1. 채색 옷을 입은 요셉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또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히고 더 깊은 사랑을 쏟았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고 형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에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37:7).
그 말을 듣고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또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37:9).
이것은 요셉이 형제 중에서 크게 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예정섭리입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2. 형제들의 박해
야곱에게는 장자 권과 천상의 복을 빼앗긴 에서의 박해가 있었듯이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시기가 없어도 형제들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교육 문제도 각기 타고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양을 치는 형들에게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게 됐는데 도단에서 요셉을 만난 형들이 무서운 음모를 꾸몄습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창37:19-20).
형제인데, 얼마나 미웠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보면 시기가 살인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4:1-2).
기억할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만 미워하는 자는 마귀의 정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평안과 기쁨이 있어도 미워하는 자는 불안과 초조, 번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여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3. 노예로 팔린 요셉
르우벤의 설득으로 살인은 면했으나 요셉이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스마엘 사람들이 상품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고,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변을 당한 요셉은 울고 몸부림을 치면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서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13:6).
4. 마귀의 올무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은 보디발에게 크게 신임을 얻어 가정 총무로 발탁되어 가사의 모든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과 같이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귀가 틈을 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요셉에게 눈짓을 하던 보디발의 부인이 갑자기 요셉을 대하는 눈빛이 달라지더니 요셉, 요셉 하다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요셉씨라 하더니, 하루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노골적으로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Come to bed with me). 그러나 요셉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8-9).
그러자 이제는 요셉의 옷을 벗기며 노골적으로 부여잡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런 유혹에 빠져들지 않을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요셉이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는 것을 보고 여자가 소리 질렀습니다.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창39:14-15).
그때 그 여자의 눈이 어땠을까요? 마귀의 눈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이성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잠30:18-20).
요셉은 물증이 있으므로 변명의 여지없이 억울하게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보디발의 부인이 요구해 올 때 들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당장에는 그런 봉변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을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잃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변장술이 뛰어납니다. 어느 때는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등장하기도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이 마귀는 아닐지라도 마귀가 그 여자를 통해 요셉을 시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행이나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 고난을 당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기 바랍니다.
5. 감옥에서 받은 은총
신앙의 안목에서 보면 요셉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요셉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렇게 억울한 일을 신원해주지 않으십니까? 내가 이렇게 누명을 덮어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들에게 팔릴 때는 그래도 혈육에 호소할 수 있었으나 이국땅 애굽에서는 요셉을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억울한 옥고를 치룰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이제는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여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하였고, 그의 범사에 형통한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창39:20-23).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좁은 국토에서 부자들은 여기저기 별장도 마련하고 살아갑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을까요? 진정한 행복을 물적인 세계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요셉을 성장시킨 과정을 보십시오. 그것은 어떤 명문대학의 졸업장이 아닙니다. 혹자는 “목사님,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 걱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는 나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섭리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이제는 유물사관이 무너지고 핵무기의 감축으로 세계는 평화의 물결이 출렁이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치관으로 오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고 있습니까? 하루가 다르게 사치성 외국 상품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것을 볼 때 과연 우리 민족에게도 혼이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지닌 뼈대 있는 민족입니다. 하루속히 이 땅 위에 복음 나라 이룩하고 열국의 제사장 민족이 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시련과 연단을 겪은 민족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으므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승리하여 주의 영광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
창 41:37-45
오늘은 고난당할 때의 요셉에 이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상고하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1. 요셉의 꿈 해몽
요셉은 본래 꿈꾸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물론 꿈은 누구든지 꾸는 것이지만 요셉같이 하나님의 계시가 꿈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흔하게 또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꿈의 종류를 보면,
1) 잡몽(일반적인 꿈) 그 꿈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없으므로 되새길 이유가 없습니다.
2) 실몽 꿈을 통하여 사전에 알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대부분 사후에야 해석할 정도로 일반적인 꿈에 속하는 것입니다.
3) 영몽 이는 계시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어김이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같이 불신자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꿈은 영감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꿈을 통한 계시는 극히 드물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통해 계시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잠을 청하기보다 열심히 기도하여 받는 은혜를 더 사모해야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을 통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던 요셉은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전옥에게 은혜를 입어 모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던 중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범죄하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람들이 심상찮은 꿈을 꾸고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해석할 자가 없도다”하고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중요한 꿈이었으나 해몽할 자가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창40:8-11).
그 꿈에 대한 요셉의 해몽입니다.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창40:12-13).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떡 굽는 관원장이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창40:16-17)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몰라서 불행하게 되는 일이 많으나 알아서 불행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길한 징조를 보고도 몰라서 근심을 하였다면 떡 맡은 관원장은 심판의 날을 알게 되어 더 큰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창40:18-19).
결국 요셉의 해몽대로 삼 일 후에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고 떡 맡은 관원장은 매달려 죽었습니다.
2. 술 맡은 관원장의 망각증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40:14-15).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된 후에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창 40:23).
사람은 그처럼 쉽게 망각하는 건망증 증상이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을 그대로 두신 것입니다. 사실 바로의 꿈이 있기 전에 요셉이 출옥하였다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을까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3. 바로의 꿈 해몽
하루는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는데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하숫가에 함께 섰다가 살찐 소를 먹어버리는 것을 보고 곧 잠을 깨었는데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이제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창41:1-7).
깨고 보니 꿈이었는데 심히 번민하여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을 모두 불러 그 꿈에 대한 해몽을 바랐으나 아무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꿈 해몽이 없었다면 아무리 바로가 계시의 꿈을 꾸었다고 할지라도 그 꿈은 영영 수수께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없었다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꾼 금신상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아니고는 누구도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므로 요셉이 바로 앞에서 그 꿈을 해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총리가 되어 다가올 칠년 흉년을 대비하여 칠 년 풍년에 곡식을 저장하게 하였습니다.
4. 애굽의 총리대신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창41:38-43).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면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도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9:17).
어떤 사람은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보디발의 아내에게 왜 보복하지 않았을까 궁금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도 바쁜데 그런 일은 기억에서 사라졌을 줄 압니다.
5. 세계적인 기근
요셉의 해몽대로 칠 년 연속 풍년이 계속되더니 이제 칠 년간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애굽에만 국한된 기근이 아닌 주변 나라에도 몰아닥친 기근이었습니다(창41:54,56)
물론 칠 년 풍년도 마찬가지였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요셉이 있는 애굽에는 칠 년 흉년을 대비하여 미리 곡식을 저장하였으나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문제는 지도자들의 비젼입니다. 적어도 나라를 다스릴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십 년 앞을 내다보고 정책을 세워야 옳을 것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 연속 풍년으로 쌀이 남아돌아가니 술을 빚으라고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쌀 생산은 아직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짓는 농민들이 있기에 쌀이 남을지라도 국제시장에는 팔 수 없으므로, 과학적인 영농법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영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치풍조는 더해만 가고 있습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우리가 세상 향락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 기근이 닥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늘에서 단비를 거두어 은혜의 기근이 들면 순직간에 재난이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셉같이 총명 있는 사람이 나와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를 바로 알고 장차 닥칠 재난을 대비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바나바의 믿음
행4:36-37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는 지상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 상을 초대 교회에 두고 교회가 세속화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식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입니다. 물론 초대 교회가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면모를 모두 갖춘 교회는 아니지만 살아서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을 든다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전도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사랑하고, 성령 안에서 교제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성령 충만한 집사들이 있었고, 또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앞에 엎드려 회개하였고 거기서 변화의 역사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을 찾는다면 솔로몬의 웅장한 성전에서보다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초대교회 성도의 모습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역사가 펼쳐진 안디옥 교회에 훌륭한 한 믿음의 사람이 있었는데 바나바입니다.
1. 결단의 사람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인으로, 본래 이름은 요셉이라 불렀으나 사도들이 개명하여 바나바라 하였습니다. 이는 곧 권위자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의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1)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보혜사 하나님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렸다” 하고 오순절의 성령 역사를 보고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행2:13)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용기 있고 담대한 것 같아도 얼마나 비겁했습니까? 죽는 데도 함께 가겠다고 장담하던 그가 하루도 못가서 맹세하고 저주하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성령을 받고 나사렛 예수, 곧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이 우리의 메시아임을 증언하게 되었으니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성령이 역사할 때 바나바는 박해하고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휩싸이지 아니하고 은혜를 사모하여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바나바와 같이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 바나바는 성령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신이시므로 지, 정, 의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인해 기뻐도 하시고 슬퍼 탄식도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복이라면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이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불안한지 보십시오.
술집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휘발유로 불을 질러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가 하면, 사랑을 외면당한 젊은이의 증오심은 무고한 아이들을 자동차로 치어 죽게 합니다. 모두가 살려는 생각에서가 아닌 막가는 행위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은혜에 참예한 바가 되었어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로 심판에 이르렀으나 바나바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그로 인해 바나바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7-18).
주님의 존귀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바나바와 같이 순종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겸손한 바나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가 모진 박해를 받게 되자 성도들은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받은 성도는 어느 곳을 가든지 생명의 불씨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서 권능의 역사를 하였고, 구브로와 그레네 사람들은 안디옥으로 가서 복음을 증언하여 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였는데 그때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행11:24).
더욱 중요한 것은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일 년을 머무르면서 큰 무리를 가르치므로 선교의 본거지를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능한 사람들이 함께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쉬운 것 같아도 어렵습니다. 우리도 바나바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착한 사람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행11:24).
이는 바탕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개별적으로 젊은 성도들에게 쉽게 나오는 말이 “요즘 많이 착해져 가는가?” 하는데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목사님은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러시는가?’ 혹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있다면 더 착해져서 흠과 티가 없는 사람으로 가꾸고 싶은 욕심에서일 것입니다. 성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타고난 성격이 그렇다’고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이해해 주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혈기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말고 스스로 절제하도록 하십시오. 불평을 잘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백합은 화장실에서도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향기 풍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11:24).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향기를 따라 봉접이 날아들 듯 성령의 향기는 성도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가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보배입니다. 썩어질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보배를 얻게 된 사람이요, 없어질 것을 심고 영원한 것을 얻고, 욕된 것을 심고 영광된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내가 무엇으로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고치며, 멸망에 처한 자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남은 과업을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해 불림을 받았습니다. 각기 맡은 임무를 살펴봅시다. 불림을 받은 위치에서 어떠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백이십여 명이 모인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또 안디옥에서 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도 각국으로 퍼져나가는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한 달란트 받은 청지기같이 받은 은혜 방치하지 말고 널리 뿌리고 증언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므로 우리도 살아서 움직이는 성도되어야 합니다. 주의 성령이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도 능력의 일군이 될 줄을 믿습니다. 주님께 헌신합시다. 우리 모두 주님 들어 쓰시기 합당한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 겸손의 사람 되어 바나바와 같이 생명 사역에 남기는 흔적이 온 세상 모든 인류 앞에 빛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셉의 관용
창50:15-21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 야곱의 열한째 아들입니다. 그가 꾼 꿈으로 인해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은 이십에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숱한 시련과 연단을 딛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 때에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을 애굽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1. 가나안 땅의 기근
바로가 꿈에 본 시대적 징조는 애굽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주변까지 큰 흉년으로 기근에 빠졌던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복과 저주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복 받은 나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간 걸었던 시내 광야도 일 년에 내리는 강우량이 20mm에 불과하니 우리나라 이슬만큼도 안 되는 실정입니다. 모든 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문을 닫으면 땅은 사막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위로부터 내리는 단비가 있는데 결실이 없다면 이는 황폐된 땅이요, 단비가 없다면 광야요, 사막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셨으나 은혜를 배역하고 범죄할 때에는 저주를 내려 이방 나라에 짓밟히게 하였습니다.
어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자식들 공부시키고 살아오느라 갖은 고생을 하고, 이제는 다 키워 장가도 보내고 직장도 구했으니 노년에 좀 평안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더니 내 몸이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건강할 때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는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주님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됨을 알아야 합니다. 형통할 때 감사를 잃지 말고 천국 창고에 저축하십시오. 온 세상에 기근이 들지라도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근심 없이 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
연세가 쉰이 지난 분들은 대부분 가난의 쓰라림을 겪었을 줄 압니다. 너무도 고생스러워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서러움이 제일 크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옛날에는 양식이 없어서 굶기를 밥 먹듯 하였단다”하면 “그러면 라면 끓여 먹지”한다고 합니다.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인생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입니다.
가나안 땅에 몰아닥친 기근으로 야곱의 아들들이 마른하늘만 쳐다보며 애를 태우자,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창42;1-2).
그리하여 베냐민을 제외한 열형제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에는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사십 년의 노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인생 노정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84:5-6).
3. 요셉을 만난 형제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요셉이 결재하여 양식을 팔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형제들이 요셉 앞에 나타나 얼굴을 땅에 대고 큰절을 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했을까요? 요셉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너무도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으나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어릴 때는 그 꿈으로 미움을 받았으나 이제는 형들 스스로 요셉 앞에서 엎드려있을 때 요셉이 엄한 소리로 말합니다.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창42:7).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42:9).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창42:13).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창42:15).
처음에는 자기들을 정탐으로 몰더니 가정사 이야기를 들은 후 말째를 데려오라 하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시므온을 결박하여 감옥에 두고 다른 형제들은 양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42:22). 그 때 피차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나누는 말을 요셉이 모를 줄 알았으나 요셉은 다 알아듣고,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다”(창42:23-24)고 했습니다.
4.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나 야곱의 말년에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여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창46:1-3).
애굽에서 양식은 가져왔으나 애굽으로 내려갔던 열 아들 중에서 시므온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대가를 분명히 지불하고 양식을 가져왔는데 지불한 돈이 모두 자루 안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양식이 떨어져도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야곱을 설득시켜 베냐민을 데려가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애굽으로 내려간다 해도 이제는 속절없이 도둑으로 몰릴 수밖에 없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베냐민을 사랑했는지 보십시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창42:38).
여러 날이 지난 후 베냐민을 데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다시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는 뜻밖에도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베냐민이 함께 온 것을 본 요셉이 청지기에게 명하여 요셉의 집으로 형제들을 인도하여 후한 대접을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안부를 자세히 묻고 하인을 시켜 다시 가져온 그 돈과 또 양식을 자루에 가득 넣어 주었습니다.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는 금잔을 넣어 도중에 베냐민만 붙잡아 와서 자기 곁에 있도록 계략을 꾸몄는데, 유다의 설득으로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형제 앞에서 자기를 알리고 서로 부둥켜안고 방성대곡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신분을 밝힌 후에 앞으로 오 년 연속 흉년이 더 들 것을 대비해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시고 올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야곱도 요셉이 살아있고 또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로의 수레를 보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요셉을 만나 애굽에서 십칠 년을 더 살다가 모든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나그네 노정을 마쳤습니다.
5.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푼 요셉
야곱이 돌아가자 그의 유언에 따라 가나안 땅 헤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조상과 함께 장사지내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의 형제들이 서로 말하기를,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50:15-17).
격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용은 본래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요셉의 관용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유의할 것은 아무리 관용을 베풀지라도 회개가 있어야 긍휼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요셉의 믿음은 악을 선으로 갚은 일입니다. 이는 자신을 통해 만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우리도 요셉과 같은 믿음의 사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방인을 위한 기도
대하 6:32-33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안치한 후 온 이스라엘을 마주하여 손을 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할수록 복입니다. 또 기도로 영적인 세계가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즐겨 응답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올린 기도를 보십시오.
1)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는 것과 온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종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14절),
2) 주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대로 전을 이루었으니 이제 그의 언약을 따라 왕 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15-17).
3)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으나 주의 이름을 두신 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18-21).
4) 이웃에게 범죄한 자가 이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그 행위를 따라 다스리소서(22-23).
5)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24-25).
6) 그들이 범죄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고 죄에서 떠나거든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 비를 내려주옵소서(26-27).
7) 이 땅에 무슨 재앙이나 질병을 무론하고 그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사유하시옵소서(28-31).
8) 그들이 범죄하므로 적국에게 붙이실 때 스스로 깨닫고 이 땅과 빼신 성과 주의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사유하시옵소서(34-42).
이렇게 올린 기도에 이방인을 위한 기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분량에 비해서는 짧은 기도입니다.
1. 이방인을 위한 기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도에 비해 이방인을 위한 기도는 짧은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한 고백이라면 저는 솔로몬같이 짧은 기도나마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와서 하나님 잘 섬기고 복 받기를 구하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이방인이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열국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고 영원히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참 신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29-30).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회중 곧 너희에게나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민15:14-16).
예수님의 족보에 기생 라합이 있는가 하면 모압 여인 룻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대하6:32-33).
우리는 이제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응답받게 됨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를 섬길 때 주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2. 이방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사명
먼저 믿는 우리는 세상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또 충직한 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바로 섬기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함도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 모두 마지막 때 불림을 받은 진리의 증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사람의 본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이방인은 누구며 이스라엘은 누구일까요? 알고 보면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이방인을 버린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한 구원의 섭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주어진 진리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된 계명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천하에 충만할 때 땅 위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불행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당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생활환경은 놀랍게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도 삶이 더 심각해져 가는 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영이 주리고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임무가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성도와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집사님은 어떤 기술이나 자격증이 있습니까?” “아니요, 나는 아무 자격증이 없어요.” “그러면 무엇을 잘합니까?” “저는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어요. 인분 만드는 기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해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신앙생활을 잘하면 존귀한 사람이 되어 존귀한 대우를 받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때라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존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본분을 이행하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생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에 만물의 영장으로 특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면 만물의 찌끼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의 입에는 찬양이 있습니다. 복 받은 사람의 생활을 보십시오. 검소하게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응답, 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소망입니다. 빌 길을 열어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기에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아니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를 통해 진리를 배역한 이스라엘에도 이 복음을 전하고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 모두 은혜 입혀 주신 하나님께 더 큰 영광 돌리기 위해 힘찬 전진과 승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오병이어의 기적
요6:1-15
오병이어의 사건은 복음서 기자들이 모두 담고 있습니다(마14:15-21, 막6:31-42, 눅9:10-17).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전도의 행적을 보고하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하시고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 편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고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도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막6:30-33).
숫자로는 그때가 최대의 군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무리들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요6:26-27).
1. 모여든 무리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요6:1-2).
이러한 현상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든 자가 낫는다는 소문만 들으면 어디든지 모여듭니다. 그만큼 병자가 많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물론 병 고치는 은사가 귀중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내세워 신비주의로 전락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병든 자들의 입장에서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건강을 되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영생의 은혜와는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병약한 것은 불행이요, 고통입니다. 그렇다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불행이 없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사회적인 병폐가 어떤 자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건강한 자들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세계에서 생산되는 녹용의 팔십 프로가 우리나라에서 소비된다고 합니다.
병약한 자들이 이 자리에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병마가 괴롭힌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 너무도 병이 많아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으나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찌르는 가시가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선한 목자 예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다윗은 목동으로 있을 때나 환난 중에 있을 때, 또는 전쟁터에 나갈 때,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힘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함께 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선한 목자는 양의 사정을 아는 고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리십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장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무엇보다 진리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을 따랐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영생의 진리는 등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다 지켜주십니다. 모든 것을 맡기면 모든 것을 담당해 주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감당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33:29).
3. 빌립을 시험하신 주님
한적한 곳을 찾으시는 주님께 무리들이 도착하여 그들은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막6:31-33).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요6:5-6).
시험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실력을 평가하여 진학 또는 승진시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는 자격이 없는 자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하셨으나 아브라함에게 시험하셨고(창22:1-) 욥에게 시험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이며 또 어떤 시험이 마귀로 말미암아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험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이는 경건한 욥과 같이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당하는 시험도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내 힘만 의지할 때면 패할 수밖에 없으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리기로다”
감사할 일은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전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재정을 맡은 제자가 따로 있는데 왜 빌립을 시험했을까요? 그 시간에 빌립이 주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빌립을 더 사랑하여서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간접적인 교훈보다 직접적인 교훈이 효과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빌립의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6:7).
만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해오시면 어떠한 대답이 나올까요?
저의 집안 이야기입니다. 막내 누이동생이 대전에 살고 있는데 매제의 신앙 연조는 그렇게 오래되지 못합니다. 마침 근처의 조그마한 개척 교회에 나가는데 얼마 전에 만났을 때 “형님, 우리교회 건축합니다.” 하기에 반가워서 어떻게 건축하게 되었느냐 했더니 부동산업을 하는 분이 수 억의 땅을 바쳐서 건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얼마나 하였느냐?” 물었더니 “저는 증권을 좀 사 두었는데 그것을 다 바치고, 건축 공사비 대출 책임을 저에게 맡겼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적인 생각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도 빌립과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넘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4. 오병이어의 기적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막6:38).
이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그때에 기근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물도록 주님을 떠날 줄 모르는 무리를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하리라고 하였는데 주님께서는 오십 명씩 앉게 하시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줄 때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어린 소년이 오병이어를 내놓는 것을 보고 모두가 감동되어 여기저기서 내놓아 그렇게 흐뭇한 잔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자들이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마는 이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믿으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일지라도 부족할 텐데 은혜의 잔치에는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5.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지 말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
우리나라는 지금 먹다 버리는 음식을 돈으로 환산하면 일 년에 무려 칠조원이 된다고 합니다. 꿀꿀이 죽, 미군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도 먼저 얻으려고 하였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프랑스는 국민 소득이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그런데도 과거 전쟁 때 고생했던 생각을 하여 음식을 먹다가 버리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로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치와 향락풍조를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넉넉해졌습니까? 또한 넉넉한들 그렇게 낭비하여 무슨 만족이 있을까요? 또 다시 이 땅에 불행을 막기 위해서도 낭비하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십시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6. 생명의 양식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이는 오실 메시아를 가리킨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훌륭한 믿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동생들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요7:3-4),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한 제자들마저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이것이 세속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과연 영생에 이를 참된 양식은 무엇 것일까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라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8:5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이것이 영생의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 영원한 진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행6:1-6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 혹은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땅히 흠과 티가 없이 우리는 완전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완전무결한 교회가 지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집합체가 아닌 허물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 교회는 초대 교회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도 사도행전 5장부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인간의 연약성을 빙자하여 불의를 합리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구약시대에는 성소 안에 속죄소가 있었듯이 교회 안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구상에는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살아서 역사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의식에만 매여 있다면 죽은 교회요, 통회자복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라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본문에는 오순절 성령 역사로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자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간에 구제 문제로 서로 원망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일어나 이 문제의 해결책을 위해 일곱 집사를 제비뽑아 세우게 되었습니다.
1. 화목이 깨어지는 이유
1) 죄로 인해서입니다.
교회는 성역인데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에덴동산에 뱀의 유혹이 있었듯이 경건한 사람들에게도 마귀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골수 관절을 찔러 쪼개어 살피십니다. 양의 가죽을 덮어쓴 이리가 있는가 하면,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온갖 죄악을 자행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주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철저히 회개하고 사유의 은혜를 힘입어야 할 것입니다.
2) 이해관계로 인해서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구제 문제는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을 것 같으나 오히려 작은 문제가 은혜의 길을 막고 또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6:1).
사실 이런 일은 이해할 수도 있고 또 고의가 아니라면 건의하여 얼마든지 시정할 수 있습니다.
3)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해서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체에 따라 임무도 다양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사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행6:4) 하고 집사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말씀을 전할 자는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고 구제할 자는 봉사와 구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제를 받는 자도 마땅히 내가 하여야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다면 주의 일에 한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조직의 필요성
한 마디로 조직은 기능의 활성화에 있습니다. 잠재 능력이나 부존자원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개발하기 전에는 자원으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이념적인 승리에 쾌재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폭등하는 물가고에 품귀현상까지 겹쳐서 다시 어두움의 그림자가 덮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처럼 광활한 영토와 세계 제일의 부존자원을 지닌 나라에서 생활필수품조차 구입하지 못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들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생필품을 생산하는 경공업을 소홀히 하고 군수산업에만 집중해서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칠십 년 동안 사회주의 체제에 젖어온 국민들이라 일할 의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게의 점원들이 손님을 끌기 위한 서비스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하는 인생일까요? 자기 개발에 땀 흘린 사람이라면 무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요, 자기 개발에 게으른 사람은 소극적이고 무능력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울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믿음의 보화를 묻어두지 아니하고 오직 충성 일념으로 개발하고 선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발합시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얼마이든지 거기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우리가 맡은 그 직분이 사명이요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주님 기뻐하는 사역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각기 받을 상급을 위해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다양성의 조화가 더 아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원수끼리의 만남일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천구백육십 년대 월남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이 그 당시의 베트콩 사령관과 악수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쟁이 아닌 평화요, 단절이 아닌 교류를 뜻합니다. 사람은 불화가 있을 때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끼리 만나서 화목을 운운한다면 놀라운 일이지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피차에 주고받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극약끼리 중탕을 하면 보약이 되기도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사람이 조직체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집사의 기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택된 일곱 집사는 교회에서 처음 세운 직분입니다. 물론 사도직이 있으나 이는 사람에 의해 계승되는 직분이 아니고 또 단회적인 것입니다. 후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면 집사뿐만 아니라 다른 직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본문에는 집사에 대해 세 가지의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이 주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일군 된 자는 사명 곧 믿음이 성숙한 자로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재물에 노예 되어 십일조도 모르고 봉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교회의 일군이 된다면 그 교회는 인본주의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과 성령의 역사보다는 도리어 구원 길을 막고 나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받은 일군이라면 성령의 사슬에 매인바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든 무엇이든 순종할 줄 아는 능동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 성 삼위 하나님 안에는 이 은혜가 일치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혜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분별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장로 장립식에 참여하여 “장로는 종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권면의 말을 듣고 “죽으라는 것이 장로인가?”하며 불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은혜를 모르면 교회의 일군 되기에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야 내가 살게 됨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하는 바울의 자랑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3) 모든 사람에게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건덕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건덕을 위해 사는 것이 내게 있어 영화요 존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성도들이 많이 기도하였고 또 집사와 권사로 피택 될 분도 많이 기도하신 줄 압니다. 또 그동안 신앙생활 잘하였는데 피택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주님 나를 무엇에 쓰시렵니까?”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내 생명 다하기까지 충성 일념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칭찬 듣는 일군, 모두가 사명자로서 땅 끝까지 증인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달란트 비유
마25:14-21
마태보음 이십오 장에는 세 가지의 천국 비유가 있는데, 첫째는 열 처녀 비유, 다음은 달란트 비유, 마지막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유의할 것은 “그 때에 천국은”(마25:1) 하고 세 가지 모두 천국을 비유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상에서 있을 최후의 심판인데 이러한 심판을 통해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관문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1. 청지기의 위치
1) 청지기의 임무는 소유권이 아닌 관리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이렇게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소유주가 위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그러므로 은혜로 받은 복을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2) 한정된 자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3:22-23)
청지기는 다른 사람과 달리 주인의 분부를 따라야 합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인간의 타고난 기본적인 저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줄 압니다. 다만 어떠한 정신 자세로 잠재된 능력을 개발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단일 민족이면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짧은 기간에 기독교가 튼튼히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역사에 기독교 정신같이 살아있는 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다윗같이 휴전선 이북의 유물론 우상을 거꾸러뜨릴 날이 올 줄 믿습니다. 기골이 장대한 아낙 족속들이 여호수아 앞에서 음식이 된 것같이 오늘 우리도 두려워할 것 없을 줄 압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진리 위에 설때 열국의 머리가 되는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2. 재능대로 배분된 달란트
정의와 평등사상을 잘못 이해하면 공산주의 이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유물 공산주의의 허구성이 온 세상에 드러난 지금도 공산주의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중에서도 고유의 기능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운동가들이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등의식의 기준은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국민으로서 투표권에 있어서는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부부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할 분담에 있어서는 엄연히 성적인 차이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아내이기 때문에 자녀를 출산하고 남편이기 때문에 땀 흘리는 수고를 더해야 마땅합니다. 남편에게 자녀 출산을 기대할 수 없듯이 아내에게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등의 기준을 양으로 따지지 말고 부여받은 임무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달란트 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
여기에서 각각 달리 배분했다는 것은 주인의 권리에 속한 문제입니다. 또 각기 재능대로 배분하였으므로 객관적인 평등을 인정한 것입니다.
나무가 자랄 만큼 자라면 재목으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습니까? 성도답게 행동하여 세상에 빛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3. 타국으로 떠난 주인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마25:14)
무엇 때문에 주인이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기고 타국으로 떠난 것은 비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비유로 인해 청지기들의 충성도를 판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유의할 것은 주인이 떠난 후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청지기들의 충성 여하에 따라 업적이 달라졌다는 것이요, 그날에 칭찬을 받고 영광에 이를 자와 심판받아 어둠에 떨어져서 이를 갈며 슬퍼할 자로 나누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지기의 신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한 달란트 받아 땅에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청지기는 어떤 자일까요? 매일 먹고, 자고, 놀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인생이었을까요. 허망한 데 매여 종살이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는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일생 동안 재물에 치심하여 살아간 인생이 있는가 하면, 죄에 매여 종살이 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라지와 쭉정이 인생들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 모두가 인정받고 칭찬받는 알곡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4. 최후의 심판
“그 때에 천국은”(마25:1)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나누는 것이요, 충성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는 것이요,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심판입니다. 어떤 곳이 천국이요 어떤 곳이 지옥입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라면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곧 지옥입니다. 세속에 물들어 죄에 매여 종살이하는 것이 지옥이요, 진리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 섬기는 것이 천국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땅 위에서 주님의 나라 맛보지 못한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악을 멸하고 죄를 다스리십시오. 주님의 나라는 내 마음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충직한 청지기와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니다. 한 편은 지족과 감사에 있다면 한 편은 불만과 나태에 있습니다. 한 편은 기쁨이 있다면 한 편은 심판의 공포가 있는 것입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진리를 따르면 천국이요 진리를 등지면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향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 위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고 주의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났다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게으른 청지기에게 내린 심판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30).
심판자는 주인이십니다.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작은 일에 충성된 자 큰 일을 맡기리라”
작은 일에 충성된 자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고 작은 일에 무익한 자 영원한 흑암에서 이를 갈게 됩니다.
여러분! 받은 달란트가 무엇이든지 주님께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힘차게 전진하여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부자와 나사로
눅16:19-31
누가복음 십육 장에는 두 가지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1-13절까지는 부자와 청지기의 비유이고, 본문 말씀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등장하는 부자는 심판권을 행사하는 조물주의 위치라면, 두 번째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는 재물에만 치심하다가 심판받는 어리석은 인생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생명과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1. 부자와 나사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부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가고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간다는 일반적인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가 받을 심판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잘못 둔 데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충직한 청지기라면 자신을 위한 부자가 아닌, 선한사업에 부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같은 시대에 사는데도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마음에는 하늘나라 소망이 있었으나 부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난이나 병이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부자 된 후에 또는 건강하면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생각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모습 이 대로 용납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보십시오. 부자는 나사로를 만나는 시간이 불쾌하였을지라도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버려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시간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아무리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가난과 병마까지 평등을 주장할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들고 가난한 나사로에게 천국의 소망이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함을 믿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2.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
“인생무상”이라 나사로도, 부자도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천대와 멸시를 당한 몸이라 그가 죽은 후에도 애도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죽었을 때는 많은 조문자들의 문상을 받으며 성대한 장례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대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불가피한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행위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영원한 심판을 망각하고 사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16:22-23)
부자와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 극적인 대조를 이루더니 사후에서도 극과 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무슨 얘긴들 효험이 있겠습니까마는 그것이 엄연한 진리이므로 마지막 심판을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나사로가 무슨 공로로 그 영광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그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윌리엄 로우는 “세계에서 최대의 성자는 기도나 구제보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으로 들어간 나사로에 비해 너무도 비참한 광경입니다. 자기만 기쁘게 한 자가 받는 보응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늘나라 영광을 원하신다면 위에 것을 찾으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 15:1-2,5)
3. 부자의 요청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떴을 때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알고 있었던 처지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을 어떻게 알아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영적인 지식입니다. 또 호칭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그도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간청한 내용입니다.
1) 한 방울의 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16:24)
얼마나 기막힌 장면입니까? 사실 손끝의 물이라면 그 양이 얼마이며 더욱이 불못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 물로 혀끝을 적신들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평소에 그렇게 대했던 나사로인지라 거기서도 통할 줄 알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안개 같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사후의 세계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림자같이 허무한 것에 치심하여 영생을 잃지 말고 영원을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이것이 사후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영원토록 존재할 뿐입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두려운 일입니다. 행여나 오늘 우리가 그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와 무관한 생활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허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습니까? 없는 것같이 청빈하고, 선한 사업에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장애가 있습니까? 극복하십시오. 불원간 우리 모두 심판대 앞에 설 때 물 한 방울이 아쉬워 몸부림을 치지 말고 내게 있는 십자가의 흔적,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고난의 흔적을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나사로를 내 형제에게 보내소서
사실 음부에 있는 자가 영광중에 있는 성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음부에 있는 부자는 여전히 나사로에 대한 인식이 옛날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부자는 이제 자기가 받는 고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게 되자 다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자기와 같이 음부에 들어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절한 부탁에도 아브라함은 불응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의 진리는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16:30)
잘 생각하십시오. 믿음은 어떤 표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살아나서 증언할 때에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0-11)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에 치우치지 마십시오. 애굽에서 술객들도 모세의 이적을 따라 행한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표적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사하여도 주님께 외면당할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 하여도 마귀의 유혹이라면 물리치고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바로 섬기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믿음의 주
성경은 역사적이면서 영원한 진리요, 또 생명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을 얻게 되고 또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돈만 아는 구두쇠 스크루우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낮고 천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이미 사관에는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위해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지금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주님 섬기는 일이라면 열심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이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 영광에 치심하지 말고 작은 믿음으로도 크게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영안이 밝아져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와 같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