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설교(본문설교)

제1권

주님만 주님만 2022. 3. 16. 10:37

큰 상을 받을 믿음

본문 : 히 10 ; 32-39

 

본문은 배도자들이 받을 형벌과 또 그들로 인해 성도들이 당할 환난과 핍박을 어떻게 대처하여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32-34).

먼저 우리는 초대교회와 같이 환난과 핍박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감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가 있었는데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세속에 물들어 죽은 신앙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억할 것은 영적인 전쟁은 전, 후방이 없을 뿐 아니라 휴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십시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인류의 불행은 죄 값으로 받는 보응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것이 죄 때문이요, 가인이 일평생 번민에 쫓기게 된 것이 죄 때문이요, 삼손이 두 눈을 뽑히게 된 것이 죄 때문이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던 것이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유의하십시오. 마귀의 유혹은 올무에 걸려들 때까지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거기에 빠져들면 무서운 본색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기는 아무리 유혹을 뿌리치려 하여도 지켜지지 않으니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임금은 컵에 물을 가득히 떠오게 한 후 “그 컵을 들고 정해진 시간 안에 성을 한 바퀴 돌아오는데 만일 한 방울의 물이라도 쏟으면 목이 달아날 것일세” 하였습니다. 신하는 공연히 이야기를 드렸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물을 흘리지 않고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극도로 긴장하여 진땀을 흘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임금은 신하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성 동쪽 모퉁이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서쪽 모퉁이에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있는데 그것을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그럼 되었느니라.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여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중한 목숨이 걸려있는 줄 알면서도 그런 도박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미련한 행위일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아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시험은 이겨야 합니다.

시험은 1) 마귀의 유혹(Temptation)과 환난(Trial).

2) 하나님의 시험(Test)이 있습니다.

차인가 있다면 마귀의 시험은 올무에 빠뜨려 실족케 하는데 목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안일한 마음으로 영광에 이를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근심 없이 살도록 기도하지 마십시오. 의미 없는 인생은 맹목적인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안일한 사람에게는 장애물이 걸림돌이 될 수 있어도 장성한 믿음 앞에는 더 큰 상을 받을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3. 믿음의 능력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이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멜산 이스라엘 백성들 같이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17-19).

우리나라는 아직도 불교문화가 뿌리 깊은 나라이기에 명승고적 관광지마다 불교의 유적이 있습니다.

일천 만 기독 성도가 굳게 뭉쳐서 과연 대한민국은 기독교 문화로 꽃피운 나라임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국가의 모든 의식이 기독교 의식으로 바뀌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 인내로 승리 합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6-37).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루 24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모자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없이 흘러갈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역경도 복이 되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안일도 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애굽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는 자들이 죽을 때까지 허무한 일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7-39).

우리 모두 인내로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총력 전도

딤후 4 : 1-5

 

바울은 믿음의 참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기는 유언으로서 엄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복음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물론 교회가 여러 가지로 구제와 봉사하는 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3-5). 모두가 영생을 원하면서도 복음을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대공원에 있는 코끼리나 사나운 맹수들이 힘이 없어 거기에 있을까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1.구원의 능력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과학문명 이면에 공해라는 불청객이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일본 동부에서 일어난 쓰나미 사건으로 파괴된 후꾸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태평양 전체를 오염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지질 오염, 수질 오염, 식품 오염, 심지어 대기권 오염까지,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과학자들이 아닌 어떤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에게 있을까요? 유일한 구원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5-16).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어둠이 물러가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18-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답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돠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22).

 

2. 복음의 빚진 자

의술이 인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든 자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사명의식이 없다면 의사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며, 사회의 정의와 인류 평화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자라면 정치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은혜를 값없이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마땅히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교주는 죽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성도가 빛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깨뜨리고 깨어나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4-15).

이렇게 이글거리는 성령의 용광로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시작하여 사도들의 가슴을 불태우고,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 죤 웨슬레, 존 낙스, 우리나라의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가슴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가졌습니까? 이제는 값없이 받은 은혜, 복음의 부채를 값으셔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이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3.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Dr. John, Gerstner)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자로, 높아지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은 청중 속에서도 외롭지만 섬기는 자의 삶은 외롭지 않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능력 받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구원 받지 못할 자

요8:21-30

 

인생에게 불행이 있다면 저주 아래 살면서도 저주와 불행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요 그보다 더 큰 불행은 구원 받을 기회가 있는데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8:21).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을까요?

 

1.선택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유기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밝은 눈을 가지고 증거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1-33).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화려하고 넓은 길이 아닌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찾는 이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이 길을 가야 할 것은 주님께서 가신 길이요, 이 길만이 유일한 영생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깨달은 자들은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4.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두 벌 옷과 전대, 지팡이도 가지지 않고 주님께서 분부하신대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로 인해 모두가 흥분하여 보고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하시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우리 모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51:1-19

 

일반 종교에 비해 기독교의 특징 중에 중요한 것은 대속의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3-26).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2-34).

문제는 멸망 받을 죄중에 있는 인행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본문 말씀은 시6편과 함께 다윗의 회개의 시로서 “내가”라는 말을 32회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사유의 은총을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1.근원적인 죄의 고백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12-13).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16-17).

진정한 회개는 진리의 빛 앞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어둠에 있는 자는 자기가 하는 것을 자기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현장에서 음행하다 붙잡힌 여인을 주님께 데리고 온 바리새인들의 말입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을 정죄하여 돌로 쳐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6-9).

그들이 물러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빛으로 명하신 말씀 앞에 그들이 감히 돌을 던질 수 없는 죄인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일로 공포에 질려 있는 여인에게 들려진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사실 주님만이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나도 묵인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2. 사유의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때든지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의 죄를 사유해 주십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지은 죄가 너무 많아 구원받지 못할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세리와 창기의 죄는 용서받았으나 바리새인의 죄는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3.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63:10).

하나님을 나의 대적이 되게 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 속할때에 성령은 원수 편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교훈입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 미국 링컨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인가 묻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 물어야 한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부왕 다윗의 유언을 따라 일천 번제와 성전을 건축했을 때는 열국의 조공을 받았으나 말년에 하나님을 등지고 예루살렘을 우상의 소굴로 전락시켰을 때는 우후죽순같이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왕상11장).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9-22).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7-18).

성 베네딕트는 찔레 밭에 몸을 굴리면서 은혜 속에 살았고, 성 프랜시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의 은혜를 좇아 살았습니다. 성 베르나르드는 독충의 골짜기를 지나 진리의 빛을 찾았고, 죠지 뮬러는 고아들과 함께 지내며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4.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51:12-13).

우리나라 초대교회 김예근 선생은 나사로의 대장이 되어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런 특수 임무를 띄고 주의 일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랜 병마에 시달려 고생한 분들이 있습니까? 병든 분들을 찾아 봉사하십시오. 찌든 가난으로 고생했던 과거가 있습니까? 불우 이웃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51:13-15). 아 멘

 

 

고난의 댓가

시119:66-7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세상에는 시련과 연단 없이 성숙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하였습니다. 이는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1.고난으로 얻을 수 있는 대가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는 메달을 따기 위해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 하고 무슨 일에든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더 철저한 시련과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안일한 마음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처절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군인들은 밤을 지키는 불침번이 있는데 이는 적군이 야밤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도 마찬가지로 밤과 낮이 따로 없기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로다”(시121:4) 하였습니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히틀러에 의해 처형된 본 헤퍼의 시입니다.

“나는 무엇?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 침착하고 명랑 확고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무엇?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 자유롭고 친절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 같다는데.

나는 무엇?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행한 하루를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 평온하게 웃으며 당당한지 마치 승리만을 아는 투사 같다는데

남의 말의 내가 참 나냐?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냐?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방종과 사소한 굴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다.

이별에도 지쳤다. 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무엇?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나냐?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이 둘이 동시에 나냐?

남 앞에선 허세,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불쌍하고 약한 나인가?

이미 결정된 승리 앞에서 무질서에 떠는 패잔병에 비교할 것인가?

나는 무엇?

이 적막한 물음은 나를 끝없이 희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나를 아는 이는 오직 당신뿐!

나는 당신의 것이외다.

오, 하나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한 인생의 불행이나 비극의 비명이 아니기에 그 이름이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2. 잠재된 기능을 찾게 됩니다.

엘리사 당시에 선지 생도들의 숫자가 늘어난 일로 수용능력이 부족하여 요단강으로 나가서 나무를 베는데 생도 중 한 사람이 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에 도끼가 깊은 물에 빠졌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떠오르게 하므로 다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왕하6:1-7).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쇠도끼가 떠오르게 하였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받은 은사도 잃어버리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또 도구는 오래 쓰면 무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불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 년을 지냈습니다. 비참했던 과거를 딛고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게 되었던 소피아 로렌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보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고생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

싱클레어 루이스의 명언에도 “인간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 두 개 있다. 이는 유모어 센스가 없다는 것과 고생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늙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꽃다운 청춘이 귀한 줄 모르고 젊은이들이 비관 자살도 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진리를 알게 해 줍니다.

“눈물 섞인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내 작품을 보지 말라”(로댕)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아직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불행을 불행인 줄 모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행복을 행복인 줄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우리 모두 이 영원한 행복 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한 가지 부족한 것

막10:17-22

 

하루는 주님께서 길을 가실 때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적어도 세리나 창기에 비해 자기의 경건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나 주님의 대답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이 말씀은 선의 올바른 개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10:21-22).

여기서 이 청년이 누린 복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풍족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사실 물질은 부활체가 아닌 이상 사람이 사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물질을 복으로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신28:1-14).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기억해야 할 것은 물질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물질이 죄라는 말씀은 없으나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물질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지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물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

문제는 물질이 있는데 물질이 주인이 되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계명을 지켰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10:20). 이로 보아 그 청년은 좋은 부모 밑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모든 부모가 이런 유언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도 그의 백성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9-20).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4-15).

이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지키고 살았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은혜보다 행함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신 후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39-41).

 

3. 한 가지 부족한 것

숫자적으로 보면 다른 것은 다 지켰으니 한 가지 정도라면 당연히 합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한 가지가 무엇이냐 입니다. 바로 그 한 가지가 율법의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으로는 우리가 온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은 없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4:20-21).

이것이 바울을 율법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한 진리입니다. 또 우리가 관과 해서는 안 될 말씀은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주님께서 모두를 책임져 주신다는 진리요.

2)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거기는 좀이나 도둑도 손을 쓸 수 없는 완벽하고 또 영원한 곳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 같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믿음의 부자 되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영원한 복음

계14:6-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계1:1). 계시라는 말은 아포칼루피스 곧 열어 보인다, 나타내 보인다는 뜻으로 면사포를 벗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요한은 그곳을 관광객들같이 여행이나 휴양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아 유배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길은 절망의 길이었고 또 죽음의 길이었으나 요한은 거기서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 영원한 천국의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14:6).

 

1.종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계1:1-2).

본문에서 영원한 복음을 어떤 특정인들이 받을 “말세의 비밀”이라 하여 변질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딴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계10:7).

 

2.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복음

진리와 비 진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성 삼위 하나님께만 돌리느냐 그리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에덴에서 아담을 미혹하여 타락시키고 주님께도 유대 광야에서 나타나 시험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3-9).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계13:4-6).

이렇게 마귀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3. 영생의 복음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부르는 노래는 천국의 찬양이요, 은혜받아 누리는 기쁨은 천국의 영광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기에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으며,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주기철 목사님은 못자국 위를 걸으면서도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9-10).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2-13).

우리 모두 영원한 복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더 확실한 예언

벧후1:12-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이 말씀은 마17:1-8, 막9:2-13, 눅9:28-36에 기록된 것으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서 깊이 졸다가 깨어나서 광채가 발하는 옷을 입으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한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막9:5-6) 하였습니다.

 

1.더 확실한 예언

성경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보여주셨고, 다니엘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오늘도 꿈과 환상을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점일획이라도 변할 수 없는 진리는 기록된 성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눈이 밝아질 때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 하는 것이니라”(요5:39).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4:21).

성경을 상고하십시오. 잠언서는 지혜의 보고요, 욥기서는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2. 이적보다 더 확실한 진리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8-39).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어떤 것을 뜻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살려낸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0-11).

마귀의 계교를 주의하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희롱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39-43).

 

3. 복된 믿음

열 두 제자 중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철저한 사실 주의자 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였을 때 그는 자기 눈으로 그 손의 못자국을 보고 자기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4-25).

여드레가 지난 후 주님께서 도마도 함께한 자리에 다시 나타나셨고 도마가 말한 대로 확인시켜드림으로 그 입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6-29).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오관으로 얻는 지식보다 더 확실한 것이 기록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록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지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오늘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1:19).

우리에게 이 진리의 샛별이 떠올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느헤미야의 회개

느1:1-11

 

유대역사는 기원전 2천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나 천년이 지난 이 후 사울과 다윗, 솔로몬 때에 와서 세계 역사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다윗 왕 통치 사십 년 기간에 이스라엘의 위상을 열국에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 솔로몬의 말년에는 그가 취한 이방 여인들을 통해 이방 신을 섬기는 죄를 짓게 됨으로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1.죄의 보응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 11:6-11).

이로 인해 나라가 분리되어 그 때부터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어서 나라가 망하기까지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고,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하게 되어 역사의 종지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벧후2:19)는 교훈대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칼에서 살아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20). 그 때에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노예처럼 사슬에 매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그 거리가 800마일(3200리)이 넘었습니다. 죄의 보응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2. 역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영영히 저버리지 않으시고 바사의 고레스가 등장할 때까지였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와 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대하36:22-23).

이는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총명을 거두시므로 칠년을 산에서 짐승과 같이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단4:28-33).

 

3. 느헤미야의 기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1:5).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도 왕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고 기슬르월에서(느1:1, 12월) 니산월까지(느2:1, 4월) 넉 달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우리’와 ‘나’라는 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그는 조상을 비롯한 어느 누구를 원망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먼저 돌렸습니다.

그는 또 주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1:8-9).

느헤미야는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느1:11).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시17:6).

믿음의 기도가 중요하고 회개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사명자의 기도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느헤미야같이 믿음의 기도, 회개하는 기도, 사명자의 기도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응답 받는 기도

느2:1-10

 

기도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 무한한 동력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는 믿음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죽은 믿음, 또 정욕을 따라 잘못 구하는 기도도 있기 때문입니다.

 

1.환경을 바꾸는 기도

기압에 따라 저기압으로 변하면 안개구름이 시야를 가리어 공항에서는 비행기의 이착륙에 장애를 받고 자동차는 속도를 줄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재리와 염려, 근심의 안개가 앞을 가릴 때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태양이 안개구름을 사라지게 하듯 뜨거운 믿음의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소망의 눈을 밝혀주심을 믿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엘가나라는 사람에게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와 브닌나입니다(삼상1:2). 문제는 브닌나에게는 아이가 있었으나 한나는 없었으므로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1:6-7).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열어주기 전에는 자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들딸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듯이 한나도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으나 자식 문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심지어 엘리 제사장도 하나님의 집에서 한나가 술주정하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근심이 어떻게 사라졌습니까? 기도의 응답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17-18).

기도의 응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인내의 기도

느헤미야는 넉 달 동안을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다니엘은 기도하여 이십 일일 만에 응답을 받았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던 모니카는 15년 만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습니까? 넘을 수 없는 산이 가로막았습니까? 응답 받는 기도는 건널 수 없는 강에는 교량이, 넘을 수 없는 산에는 터널이 만들어 질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 월에 왕의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눈앞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내 조상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느2:1-5).

시오니즘의 뿌리는 뽑을 수 없는 이스라엘 정신입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성도를 박해하여 “로마는 영원하다.”라는 고백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오직 진리만이 영원하다.”라고 변박하여 로마를 굴복시켰습니다.

“기도만으로 하나님을 통해 인간을 움직일 수 있다.”(허드슨 테일러).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느헤미야로서는 극도로 흥분할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3. 구체적인 기도

의식적인 기도에 그치거나 막연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느2:5-10).

한때 미국에서는 부자 병을 앓고 있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애플루엔자(Affluenja)라는 증상으로, 이는 정서적, 심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격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유모와 하인들에게 떠받들려 자라왔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아이들처럼 정서적인 불완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들에게 호화로운 생활을 “금칠한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심정이라” 표현합니다.

느헤미야가 인간적인 생각이었다면 현 위치를 가장 행복한 자리로 생각하고 안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3-26).

사명이 있는 자가 사명을 망각할 때 책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충고와 에스더의 결단으로 원수 하만을 죽이고 민족을 살려 부림일을 부림절기로 바꾸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여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우리 모두 응답 받는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에벤에셀

느2:8-20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말입니다. 사무엘 때에 불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므로 백성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7:8-9).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어떠한 문제든지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마귀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에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0-12).

그런데 느헤미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됨으로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느2:8).

이것이 바로 에벤에셀의 신앙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 하시므로 아닥사스다 왕은 군대장관과 마병을 동원시켜 수행케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머나먼 여로에 들어갔는데 그 길은 아무리 멀고 어려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소망의 길이었습니다. 강 서편 총독들에게 이르렀을 때 일입니다.

“어디를 가십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요.” “허가증을 제출하시오.” “예, 여기 아닥사스다 대왕의 조서가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통과하십시오.”

또 왕의 삼림을 맡은 아삽에게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 영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재목을 공급해 주십시오.”

“당신 누구이기에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요. 천만부당한 말이요. 왕의 명령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 원하는 대로 공급해 줄 것을 명하신 아닥사스다 대왕이 내린 조서가 여기 있습니다.” 누구의 명령인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라도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심할 수가 없는 것은 원수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첫 번째 장애물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느2:9-10).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의 칙령으로 고국에 돌아와서 성전을 세울 때에 이십 년 동안 공사를 못하게 방해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원수들이 희롱하는 것을 보십시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4:1-3).

원수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느4:7-8).

그럴지라도 느헤미야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 성곽을 준공한 느헤미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성곽이 없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 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느2:11-13).

이러한 광경이 느헤미야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요?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할 일이 있을 때에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의 애국심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악용하지 않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의 안일과 세상의 영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던졌습니다.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느2:7-8).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받아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열매 맺는 기도

느5:14-19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1-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응답하시는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장애를 극복하는 기도

세스바살이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받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때에 원수들의 방해가 있었듯이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받아 돌아온 느헤미야에게도 여전히 방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느헤미야는 어떠한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로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상교회는 천상교회와 달리 마귀의 영역이기 때문에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오순절 이후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그런데 그들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상이 천국으로 실현된 교회입니다. 순간이라도 방심하고 안일에 빠지면 원수 마귀가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방패기도와 또 어떻게 싸워서 승리했는지를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4:7-9).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족속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12-14).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느4:20-23).

 

2. 총독의 녹을 먹지 않기로 하고 올린 기도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 년부터 제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느5:14).

그 때는 성곽을 건축하는 일로 백성들이 지쳤고 또 흉년이 들므로 주린 상태를 견디지 못해 고리로 연명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식들을 노예로 파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느5:2-5).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여 이자를 받지 말고 받은 것은 백분의 일을 되돌려 주라 하였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순응하는 것을 보고 올린 기도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5:19).

 

3. 성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올리게 한 일

느헤미야가 오십이일 만에 성곽 공사를 완성한 후에(느6:15).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8:8).

그 때 백성들은 극도로 흥분하고 회개하며 다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해마다 우리 토지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느10:32-37).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느10:39).

 

4. 성전을 청결케 한 일로 인한 기도

지도자의 임무는 중요합니다. 느헤미야가 며칠 동안 아닥사스다 왕에게 다녀오는 사이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성물을 보관하는 곳간에 그동안 첩자 노릇을 하던 도비야가 거기 있었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떠나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물을 구별시키지 않는 일은 곧 하나님의 성전을 저버리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느13:10-14).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13:28-31).

우리 모두 느헤미야와 같이 내할 본분 다하고 영과 육에 넘치는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진정한 행복

고후4:7-10

 

“비판받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그리고 비판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반응하는 태도에서처럼 그의 겸손이 더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임무는 무거운 것입니다. 신랄한 비판의 가시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는 아직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세가 걸었던 마지막 사십 년은 험악했습니다. 또한 스룹바벨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걸어간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질그릇에 보화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두 가지 비유에서 공통점은 천국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감추인 보화와 발견된 진주가 자기의 소유 모두를 다 팔아도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영광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Window shopping 눈요기로 그친다면 내 소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진리는 내 것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

바울은 그 보화를 발견하였고 또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은 것은 이 진리의 보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진리의 보배를 내 것으로 소유하는 영광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영광의 보상이 있었으므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하늘에 상급이 기약된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불행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고난이 내일을 영화롭게 하는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런 소망을 못가지고 살았다면 그것이 불행입니다.

밀란의 대성당을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아취에 새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첫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둘째 문에는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진리)은 영원하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육신의 생명을 희생한다 해도 후회되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주님께 헌신하십시오. 물질에 매여 종살이 하지 말고 진리의 멍에 아래 충성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3. 승리의 보장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승리의 월계관은 승리한 전사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4-6).

예레미야 같이 험한 일을 많이 겪은 선지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눈물과 고난으로 국가의 운명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그 때에 그가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불행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남달리 고난 풍파가 많습니까?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주님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돌무덤에서 보좌에 서신 주님을 보았을 때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을 발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영광과 승리의 광채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예수의 흔적

갈6:11-18

 

갈라디아서는 유다서와 함께 전투적인 서신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약하고 병든 자에게는 인자하신 목자로 등장하셨으나 교만한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는 의의 불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유다서는 은혜를 색욕으로, 또 진리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복음을 등지고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율법주의를 대적하는 말씀입니다.

 

1. 복음의 흔적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난지 팔일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그때 사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그의 몸에는 지울 수 없는 영적 문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이었습니다.

대속의 진리, 영생의 복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이 비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가르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비판하지 않았던 것은 율법이 오실 메시아를 증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 하는 것이니라”(요5:39).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4:21).

 

2. 고난의 흔적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4:11-14).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인하여 세상에서 부요하게 되고 높아지는 것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영적으로 보면 어린 아이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어린 아이의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4-27).

그러므로 바울은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 곧 고난의 흔적을 지녔고 또 그 고난을 기뻐하였습니다.

 

3. 죽음의 흔적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7:1-2, 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바울은 살아있는 성자였습니다. 과연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걸었던 발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남긴 발길이었고, 그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흘린 복음이요 그의 서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흔적을 지닌 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영원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어찌하여 산 자를

눅24:1-12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가장 큰 슬픔과 불행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명예와 재물, 권력 등 모두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에 항거하여 몸부림을 쳤으나 결국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해 주신 분이 계시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

이렇게 기독교의 진리는 부활의 진리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1.빈 무덤을 찾은 발길들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성경 기자들이 각기 다른 측면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부활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28: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눅24:1). 그들은 삼 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으나 주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이른 새벽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찾은 발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비록 그들의 믿음이 부활 신앙에는 미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로 인해 빈 무덤과 그리스도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빈 무덤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부활의 진리를 밝혀주는 증거입니다. 사실 부활의 첫 증인은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고했을 때 장로들과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주며 거짓을 말하게 하였습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28:11-15).

그들은 마귀의 후예들로서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사실을 사실로 믿지 못할 뿐 아니라 거짓을 사실로 믿고 따르는 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를 따르고 순종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3.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나신 자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2-5).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는 만물 속에 충만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진리 곧 일반계시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므로 천사를 통해 부활의 진리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주님을 보고도 주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25-27, 31).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떤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사후의 천국만 생각하는 신앙이라면 이천 년 전 빈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4. 돌아선 발길

부활하신 주님을 목도한 자들은 이제 실의와 낙담이 사라지고 확신에 넘치는 증인의 발길로 변했습니다. 우리도 영의 눈이 밝아져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을 뵈옵고 그 앞에 엎드려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33-35).

모두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꽃을 피웠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나타나보였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7-28).

이렇게 그리스도 부활을 목도한 그들은 모두가 주님 위해 목숨을 바친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이 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평범 속의 비범

롬1:18-23

 

지혜 있는 사람은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요 시간을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용희 선교사를 아십니까? 그는 본래 술장사를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욕하는 것과 주정하며 싸우는 것을 보고 듣고 자랐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난 일로 변화를 받았고, 정식으로 신학을 하지도 않았으나 세계를 무대로 선교 활동을 하며 성령의 불을 뿜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 자연의 진리 즉 일반계시를 볼 수 있는 지혜

성경에는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에는 자연의 법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속에는 자연의 진리가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같이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화생활을 보면 조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에 가면 중국 문화를 볼 수 있고 코리아타운에는 한국 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만물은 누구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조물주 하나님을 불신하므로 모두가 스스로 존재하고 또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모르고, 원숭이가 내세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1-4).

 

2. 주님을 아는 지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인의 모습을 입으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에게 먼저 전해졌던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과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5-46).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지극히 작은 소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시고 메시아를 영접하여 영광을 주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이 주시는 지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를 일으키는데 여러 세기가 걸렸으나 나는 50년 내에 말살시키는 것을 보여 주겠다”말하고 하나님을 반박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에 “나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에 간다.”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제네바 성서공회에서는 그의 살던 집을 사서 파리의 성서공회 본부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

누가 이러한 사람일까요? 겸손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요. 성령으로 거듭나서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평범 속에 비범을 찾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평범을 비범으로 바꾸는 지혜를 가졌던 것입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상들이 왜 만주 대륙을 지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거기에 또 한반도는 양분되어 있으니...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진리는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 기름지고 거대한 땅 바벨론을 떠나 척박하고 작은 땅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고 그 자손으로 만민을 구원하실 계시의 통로로 삼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처한 환경에 지족과 감사를 잃지 마십시오. 진리 되신 예수님은 평범한 가운데 오셨습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우리 모두 성령의 도구되어 하나님의 영광 크게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자족의 은혜

딤전6:6-10

 

감사의 열매는 자족하는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학교 상담교실을 찾은 18세 소녀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진학도, 희망도... 이대로 인생을 끝내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여기 백지에 내가 묻는 대로 기록을 해 보아라. 건강 상태는?”

“네, 저는 지금까지 병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건강은 지극히 양호.

“경제 여권은?”

“지금까지 생활하는데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살아왔어요.” 경제 여권도 양호.

“부모님의 애정관계는?”

“어머니는 아주 인자하시고 아버지는 저에 대해 기대가 지나쳐 실망을 시켰어요.” 사랑도 양호. 이러고 보면 행복이 지겨워 불행으로 전락한 상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줄 압니다. 우울증 환자도 여기에 속하지요.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고 자족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30:15-1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자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자족과 감사

자족은 자기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기 재능대로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품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재물을 자기 생명에 해가 되도록 지키는 자입니다.

어느 날 TV 동물 프로에서 재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물 애호가들이 돼지를 잡아 동물원으로 옮기려고 우리에 두었는데 그 밤에 큰 구렁이가 와서 그 돼지를 잡아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돼지를 삼킨 구렁이가 배가 불러 울타리를 빠져나갈 수 없어서 사냥꾼들은 돼지보다 더 비산 뱀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2. 건강에 감사

물론 병들었을 때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저는 병들어 죽어갈 때 강아지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저런 짐승은 병을 모르고 뛰고 노는데 나는 이렇게 병들어서 죽어 가구나.” 하고 안타까워 몸 부림을 치던 때도 있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1-5).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건강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의 가치가 건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거인 국제 복지사 김해영씨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국가 모란 훈장을 받았습니다. “KBS 강연 100·C”에 나와서 “잘못 태어난 인생은 없다.”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습니다. 또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중부기술교육원에서 기술을 배운 것이 전부인데 2008년도에 미국 Nyack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명문 콜롬비아 대학원을 나와(오바마 대통령 동문) 국제 복지사 자격을 취득하여 지금은 남부아시아 부탄, 아프리카, 보츠와나, 미국 등을 넘나들며 희망 전도사로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딸이라고 아이를 벽에 던져 척추 장애를 입어 키가 136cm 이상은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애가 태어났다.”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머니를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가장 고마운 분이라”며 효도하는 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입니다.

“스스로 펄럭이는 깃발은 없다. 인생의 세찬 바람, 그것은 우리를 펄럭이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기억하십시오. 건강이 아무리 귀중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삶이라면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또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은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신분보다 더 복되고 귀한 신분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자신이 어떠한 신분인지? 또 무엇에 매여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어둠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은 마치 가룟 유다와 같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주님의 기르시는 양이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자녀의 권세가 얼마나 큰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녀는 아버지의 것을 대가 없이 상속 받을 법적인 권리가 있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탕자가 집을 나갈 때 당당히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인이라면 정해진 임금으로 족하지요.

이제 우리의 보호자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지켜주시고 모든 것을 보장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잊어서 안 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곧 자족과 감사로, 찬양으로, 거룩한 봉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시92:1-15

 

죄의 보응은 많은 고통과 희생이 따르지만 회개하면 그 고통으로 또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오, 고통은 나의 서재에 있는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다.(마틴 루터)

“필사적이라는 것보다 더 사람을 자극하고 동기를 유발케 하는 것은 없다.”(아이아 코카스)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전신마비가 된 신현만 군을 문병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몸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문병 갔던 사람도 울고, 환자도 울고,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님의 숨은 섭리를 깨닫게 되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시92:4-6).

열매의 종류는 빛의 열매 곧 의의 열매와 어둠의 열매 죄악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빛의 열매는 영생에 이르고 어둠의 열매는 사망에 이릅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11:19).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1-23). 의의 열매는,

 

1.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는 어둠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죄는 빛으로 말미암아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율법이 성령의 조명을 받기 전에는 내가 살았더니 성령의 조명을 받으므로 죄가 밝혀지므로 내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매여 종살이 한 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더 강한 것을 원하는 시대, 현대인은 만족을 구하는 외침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외침이 무엇이고 또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다.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가 감성적 만족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모든 것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마약은 잠시 만족을 줍니다. 약 기운이 있는 동안 황홀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파라다이스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기운이 떨어지면 상황은 더 나빠지고, 끔찍한 공포가 밀려오며 마치 지옥에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약의 투여량을 더 늘려갑니다.

술도 쾌락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해답이 있습니다. 마약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반 지성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가슴에 감성을 도려내지 않고, 사람을 단지 지적인 기계로 만들지 않고, 냉정하게 살지 않고도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까”‘

로이드 죤스

 

2. 의의 열매입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일 한 사람은 칭찬하고, 기념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11).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영원한 부자는 선한 업적의 부자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대조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다윗보다 부와 영화를 누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2-13).

그러나 다윗은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림자로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나, 솔로몬은 당대에 잃었던 이유는 자기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 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또 마노와 가공할 검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모든 보석과 옥돌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금, 은그릇을 만들며 장인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하는지라”(대상29:2-5). 이것이 천국 곳간에 쌓은 보화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12).

 

3. 열매 맺는 비결

성령의 열매 곧 복된 열매는 모두가 은혜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영국 고아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죠지 뮬러가 아흔 번째 생일에 자신의 평생에 자신을 선하게 대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언급하면서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모든 축복과 자신이 누렸던 행복의 비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선한 양심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

그리고 말씀 묵상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순종의 삶이다.” (앤드류 머레이)

여러분!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십니까? 어떤 권력이나 소유는 영원한 가치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직 성령의 열매 맺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계2:1-7

 

월남이 공산화되기 전, 저도 자유 우방의 명예를 걸고 정글을 누비면서 월남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화 여대 김옥길 총장이 위문공연단을 인솔하여 월남에 다녀간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제가 김총장 앞으로 감사하다는 메일을 보냈더니, 그 편지를 게시판에 게시했던 일로 얼마동안 반가운 사연들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문은 천국에서 날아온 편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일지라도 이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 보내진 영원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지리적인 배경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이며 소 아시아 지방의 정치, 교통, 무역, 문화등 각 방면의 중심지로, 아시아의 빛이라 불렸습니다. 주후 29년 로마의 여신 시이저를 경배하기 위해 신전을 세워 에베소는 황제 예배의 중심지로 아데미의 신전은 대리석 기둥 120개로 세워진 건물이었다고 합니다(행19:27).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AD54-59) 것으로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고 또 전도여행의 절정기였습니다(행20:31).

그 후에는 디모데가 감독이 되었고(딤전1:3), 아볼로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도 그 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행18:24-26).

 

2. 주님의 모습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계2:1). 여기서 일곱 별은 일곱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 하였습니다(계1:20).

물론 에베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부분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일곱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교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22:27).

에베소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에 대해 Clarke이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고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은 그 모양은 그가 목사, 및 교회들을 사랑으로 감독하며 능력으로 보급하시는 친밀한 협조를 극히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다.”

 

3. 받은 칭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주님의 지식은 경험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본래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잠든 것을 아시고, 또 제자들이 풍랑 속에 빠져들고 있을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나아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닥쳐올 시험을 대비하여 기도로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가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좋은 믿음은 좋은 풍토를 만들고 좋은 풍토는 좋은 전통을 이어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는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식별력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1서4:1).

어떤 사람이 미혹을 잘 받습니까? 식별을 못하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

니골라 당은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하게 하는 세속주의자들입니다. 참된 교회는 진리를 사수하고 성례를 정당하게 집행하고 바른 권징이 있습니다. 거룩한 예식이 세속화 되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게으른 사람은 국가도 대책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게으른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근면과 나태에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일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데 미개인들은 노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게으르지 아니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맹수가 먹이를 좇을 때 최고 속도로 달리고, 육상 선수도 실전에서 뛸 때에 기록이 나온다면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보는 성도들도 동일합니다.

 

4. 받은 책망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킨 청년이 한 가지 부족한 일로 주님을 떠나갔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촛대를 옮긴 교회는 진리의 빛을 잃은 교회요, 죽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피 흘려 사신 교회가 생명력을 잃었다면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절).

이는 군사적인 용어로서 사단과의 일대 결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교회들에게’라는 복수는 역사적인 교회요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말씀은 승리자가 누릴 천국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우리 모두 처음 사랑을 잃지 말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엡6:1-4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기뻐하는 것은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작은 은혜는 은혜인 줄 알면서 큰 은혜는 망각하고 사는데 망각해서는 안 될 은혜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

1)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은혜

라일락의 향기를 싫어할 자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왜 한 그루의 라일락이 되지 않고 사람이 되었는가 탄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지어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육신의 장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146:1-2).

2)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은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3-9).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릴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면 인간이 얼마나 불행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물론 인간보다 힘이 월등한 동물들이 있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사나운 맹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인간에게 주심을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3) 사유의 은혜

동일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0-11).

모두가 사유의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심을 믿으셔야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5-19).

 

2. 부모님의 은혜

엄히 분석하면 조물주는 한 분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두 분의 원인자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한분이 육신의 부모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성경에 약속 있는 첫째 복이 되고 불효하는 자 저주가 따름을 알아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더욱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도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4-6).

 

3. 효의 방법

1)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복 받는 삶을 살아갈 때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3서3-4).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분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어렸을 때만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늙고 병들어도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가지고 오도록 명했더니 구해온 세 가지는 피어나는 꽃과 어린 아이의 웃음, 병든 자식 곁에서 간호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꽃은 시들었고 아이의 웃음도 사라져버렸는데 자식 곁을 지키는 부모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껏 효도하십시오. 효도하고 싶어도 세월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2) 부모님의 교훈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8-9).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하다는 말에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분이 있다면 부모님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식이 똑똑하다 할지라도 부모님께 머리 숙여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은 두 번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내가 약해지므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길렀는데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주머니 사정도 항상 살펴 드려야 합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또 부모님을 잘 공경하여 모두가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죽도록 충성하라

계2:8-11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책망 없이 칭찬과 격려를 받은 교회입니다. 사람에게서 칭찬받고 산다는 것도 귀한 일인데 주님께 칭찬받는 생활을 하였다면 이는 세상에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큰 복이라 할 것입니다.

 

1. 지리적 배경

서머나는 에베소 북방에 있는 항구로서 로마에 충성을 다했고 주전 195년에는 여신전을 세워 황제 예배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헬머스 계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요지로서 “소아시아의 빛나는 도시” “이오니아의 면류관” “아시아의 훈장” 등으로 불렸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후 유대인들이 그곳에 많이 이주하게 되었고 지금도 20여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약 1/3이 기독교인이라 합니다. 또 서머나 교회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행19:10)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2. 주님의 모습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8절). 이는 주님께서 생명과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분이심을 밝혀주는 말씀으로 순교를 각오한 서머나 교회에 소망이 넘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서머나 교회와 같이 또 ‘일사각오’를 외쳤던 주기철 목사님처럼 주님을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과연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부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일까요? 그는 부왕 다윗과 달리 재물을 잘못 쌓았기에 허무주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물질을 바로 다스리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다스리는 주인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부자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쌓은 업적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 위해 받은 환난과 궁핍으로 믿음의 부자, 영원한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안목이 아니라면 홍포 입은 부자보다 나사로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악장 아삽도 이 문제로 거의 실족할 뻔 하였으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의 마지막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 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18-23).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의 말입니다.

“우리는 거의 완벽한 공화국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것을 지키게 되든지 아니면 풍요로움을 즐기는 가운데 자유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물질적 풍요는 파멸로 행하는 명백한 길이다.”

 

3. 자칭 유대인의 회

이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선민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믿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기억하십시오.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성령 떠난 교회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진리의 원수요 대적입니까?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4.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0절).

십자가 없는 영생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는 육의 몸이 죽어야 영의 몸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 곧 부활의 진리입니다. 여기 십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

1) 실제로 열흘

2) 도미티안, 데시우스 두 황제의 치세 십 년

3) 로마의 십대 박해

4) 어느 한정된 기간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또 시험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한 폴리갑이 올린 마지막 기도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 주께서 은혜롭게도 나를 이 날과 이 시간에 합당한 자라고 여기셨음이니이다. 그리하여 나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반열에 서게 되고 주 그리스도의 집에서 영원한 분깃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내가 지킬 수 없는 육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치면 주님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나는 욕된 것을 드리면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운 것을 주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아 멘

 

 

버가모 교회

계2:12-17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의 피가 있는 교회이지만 또 우상숭배와 니골라당도 있었습니다.

 

1. 지리적 배경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100km 지점에 위치한 무시아주의 수도로 주전 5세기 경에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주전 130년 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곳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으며 장서 20만 권을 헤아리는 도서관은 알렉산더 다음가는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버가모의 신은 아에스쿨라피우스라 불리는 뱀신을 비롯하여 주신 제우스, 승리자 아데네, 지도자 디오니소스 등이 있어 이를 수호신으로 섬겼으며 그 외에도 무수한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주후50년)보다 먼저(주후29년) 로마의 아구스도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 세워진 곳으로 주님께서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 하셨습니다.

2. 주님의 모습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이르시되”(12절).

이는 선한 목자로서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5-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절).

 

3. 버가모 교회의 위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계2:13).

놀라운 사실은 교회가 사탄의 사령부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선정을 잘해야 합니다. 쓴 뿌리와 독초를 내는 교회라면 영혼을 살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 교단을 주의하십시오. 오늘은 교회개척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과연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속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각오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라면 나 혼자가 아님을 믿으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3. 받은 칭찬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2:13).

이것이 진리 위에 기초를 잡았다는 증거입니다.

창수가 나고 대풍이 불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게 되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요동을 받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위축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요원의 불길같이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1:12-14).

 

4. 두어 가지 책망

지도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올무가 물질 문제요 또 음행입니다. 발람은 브올의 아들로서 브돌에 사는 이방인의 선지자입니다(민22:5).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을 앞두고 모압에 이르렀을 때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저주하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과 동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

그런데도 발람이 그들과 동행하므로 나귀가 가기를 거역하였고 이에 바람이 세 번이나 나귀를 채찍질 하였을 때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민22:28-30).

이렇게 선지자가 뇌물에 눈이 어두우므로 이성 없는 짐승이 주의 사자를 보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발람은 그 길을 갔고 발락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축복하므로 막이 내린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인과 음행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섬겼던 일로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던 것입니다(민25:1-3, 9).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의 책망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20).

 

5. 약속된 축복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오늘 이 자리에도 계시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감추었던 만나’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그런 만나가 아니라 영생의 만나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47-52). 중요한 것은 영의 눈이 열려야 이 만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받는 자 밖에는 알수 없는 그 이름을 오늘 우리 모두가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두아디라교회의 편지

계2:18-29

 

두아디라 교회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작았으나 가장 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특징이라면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를 종합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1. 지리적 배경

두아디라는 버가모 동남 64km, 서머나와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옛 이름은 펠로피아 또는 유힙피아라 하였고, 현재는 아킷살이라 하며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장사 루디아도 그곳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기원은 서머나, 버가모 경우처럼 바울이 에베소 체재 중에 전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가 하면 루디아의 전도로 세워졌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2. 주님의 모습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계2:18).

이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이십니다.

1) 전지전능하신 주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4).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26:6).

요나가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 내려가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2)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계14: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21:42, 44).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19:11).

 

3. 받은 칭찬

1) 사업

‘내가 네 사업과’ 이는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헛된 세상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일은 모두가 하늘 곳간에 쌓이는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하는 일에는 당연히 절제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0-12).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2) 사랑

첫 사랑을 잃었던 에베소 교회에 비해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면과 성실이 있어야 함과 같이 인생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사랑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사람을 우리는 외면해서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이 강요할 때 목숨을 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으나 유대로 발길을 옮겼고, 무덤에서 나사로를 다시 살렸습니다(요11:43-44).

3) 믿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믿음을 위해 전도가 필요하고 이 믿음을 위해 기도가 필요하고 이 믿음을 위해 봉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두가 믿음의 사람이 되면 땅 위에 천국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4) 섬김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고전16:15-16).

제자들의 발을 씻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3-15).

5) 인내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 인내를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2:19). 과연 두아디라 교회의 이러한 면은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책망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이세벨은 시돈 왕 엣 바알의 딸로서(왕상16:31) 아합 왕의 아내가 되어 이스라엘로 바알 우상을 섬기게 하므로 영적 음행을 행하게 하였고, 우상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에서 뿐만 아니라 남쪽 유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세벨이 그의 딸 아달랴를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로 주어 6년 동안 다윗의 혈통을 제거하고 자기가 유다를 다스리며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왕하11:1-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2:21).

죄에 대한 심판이 더디다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2:22-23).

 

5. 남은 자에게 주시는 교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나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4-25).

이들은 아직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가진 그 순수한 믿음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으라 하셨습니다.

 

6.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1) 철장 권세를 주시리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2:26-27).

2) 새벽 별을 주리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2:28-29). 이 약속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데교회의 편지

계3:1-6

 

“죄인은 많아도 죄의식은 없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칼 매닝거의 말입니다. 모두가 죄 중에 살고 있으면서도 죄의식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은 죄는 심판이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4:4).

 

1. 지리적 배경

사데는 두아디라 남남동 48km 헬무스 강과 트몰루스 산 사이 언덕 위에 자리잡은 도시였습니다. 주전 6세기에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세계적 대도시였으나 사이러스의 정복으로 그리스 영이 되고 다시 수리아의 안디오커스 대왕에게 공략된 후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상공업의 발달로 부유하게 되었고 안일과 부도덕으로 음탕한 생활에 빠져 신앙은 세속화 현상으로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칭찬 없이 책망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2. 주님의 지적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여기서 일곱 영은 각각을 뜻함이 아니라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충격적인 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이는 정신 차려 사수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물론 행위가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모르시고 하신 말씀일까요? 우리는 자신의 능력 기준을 장점에 두지 말고 약점에 두어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튼튼한체 할지라도 그중에 제일 약한 부분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그렇지요 어느 한 곳이 끊어지면 모두가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느냐?”

니이체는 성직자의 아들이었고, 스탈린은 신학을 하였고, 김일성은 주일학교를 다녔고 그의 꼭두각시 강양욱은 평양 신학을 나온 목사였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하나님의 심판은 문명이 발달되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혼란은 정치인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궁핍은 사업가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경성하여 죄를 짓기에 익숙한 악습을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선한 일에 부자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도가 시대적인 사명 의식을 버리고 나태와 방심에 빠지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3. 주님 앞에 합당한 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3:4).

놀라운 은혜입니다. 모두가 영적으로 잠들고 병들어 있는데도 그중에 이렇게 천국 시민으로서 복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될 자격을 갖춘 자들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8).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주 앞에서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시간을 기회로 만드십시오. 기회는 내게로 다가올 것입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은 “내일은 노련한 사기꾼이다. 그의 사기는 항상 그럴싸하다.”

존 크리소스톰은 “내일 아침에 하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일 아침이 결코 일을 해 주지 않는다.” “‘다음에 하자’ ‘내일 하자’는 말을 ‘하지 말자’, ‘하기 싫다.’는 말과 동의어인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지금 즉시’ 시작하라. 그렇지 않고 뒤로 미루면 그 일이 끝까지 당신을 찾아다니며 당신을 옭아매고 만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다. 하기 싫은 일일수록 ‘지금 당장’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나중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마져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은 대머리이다. 지난 다음에는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 대륙을 건너가 안과 밖으로 침략을 당할 때 외친 구호입니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수백만 불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바칠 수 있으나 조공을 위해서라면 한 푼도 내놓을 것이 없노라”하고 나라를 지켜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전쟁 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3:5-6).

우리 모두 승리자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빌라델비아교회의 편지

계3:7-13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같이 모범적인 교회로서 책망 없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는가 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동일한 것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회로 말미암아 연단 받았다는 일입니다. 지상교회는 이렇게 마귀의 도전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귀의 도전이 있을 때마다 믿음이 더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 빌라델비아의 위치

사데 동남 약 50km 코가이스 계곡에 연접한 소도시로, 주전 2세기경에 버가모 왕조의 앗달루스 2세가 건립하여 왕이 형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빌라델비아(형제의 사랑)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주님의 모습

1) ‘거룩하고 진실하사’ 거룩은 성삼위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4-16).

2)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다윗은 오실 메시아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열쇠는 왕의 절대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쳤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렘30:9).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34:23).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37:24-25).

 

3.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은 복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3:8).

열린 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

1) 선교의 문

증인의 임무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바울은 모든 생명에 대해 자기는 빚진 자라(롬1:14) 하였습니다. 채무자는 그 빚을 갚기까지는 빚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증인의 임무가 있는데도 사명을 저버리면 책임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3:18).

우리는 복음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기도하여 결실이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창숙 집사님은 매주 공릉동 원자력 병원을 찾아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일 년에 천이백 명을 결신 시켰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순복 전도사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Dr John Gerstner).

2) 응답의 문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잠13:12).

야곱은 형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얍복강 가에서 밤새껏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호2:21-22).

3) 축복의 문

세상에 복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축복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복권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을 통해 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진정한 복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귀한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4) 구원의 문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에서 미련한 처녀에게는 굳게 닫힌 그 문이 열려지지 않으므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절).

 

4.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앙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했습니다. 부족한 저도 바울 같이 큰 능력을 받았으면 하는 소원이 굴뚝같습니다. 유의할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배분해 주신다는 것이요. 또 받은 달란트에 충성하면 동일한 영광에 이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편지를 받기 까지는 평범한 교회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구상 어느 교회보다도 복된 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3:8). 아 멘

 

 

성전의 기둥

계3:10-13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3:10-13).

 

인내의 말씀을 지킨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시험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8:17-19).

2)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1:2-4).

우리는 욥이 받은 시련과 연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3) 영원한 승리를 위해서입니다.

무슨 경기든지 훈련과정이 중요한 것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40년 미디안 광야에서의 훈련이 끝난 모세의 앞길에 홍해가 갈라졌고, 40일 금식하신 주님 앞에 사단이 물러가고, 아라비아에서 3년을 훈련받은 바울에게 아시아와 로마에 복음의 문이 열려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병이요,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2. 내가 받을 면류관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이는 우리에게 허락된 기회가 넉넉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계시록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될 일”(계1:1) “때가 가까움이라”(1:3)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1: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22: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속히 오리라”(22:20).

달란트 비유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동등했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었다면 주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무엇을 하면서 이 나이를 먹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6:6).

진실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모두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주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이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청지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0-11).

그러므로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3.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

이기는 자에게만 돌아오는 상급은 일곱 교회가 동일한 하늘나라 영광입니다. 우리는 또 패자에게 돌아가는 영광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계3:12).

솔로몬의 성전에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야긴이요(그가 세우리라), 하나는 보아스(그 안에 능력이 있으리라)입니다.

이는 적은 능력으로도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 기약된 상급입니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여기는 세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

2) 새 예루살렘의 이름

3) 나의 새 이름입니다. 이 영광이 오늘 우리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 멘

 

라오디게아교회의 편지(1)

계3:14-16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 여섯 교회들에 비해 대략 순탄한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심하게 박해를 받은 흔적이 없고 내부적으로도 이단이나 도덕적으로도 큰 지적을 받은 일이 없이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영적으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현대교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치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 64km 떨어진 리커스 계곡의 서안에 위치하고 맞은편으로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가 있습니다. 이곳들은 바울 서신에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습니다(골4:13, 16). 이곳의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여 바울의 지도하에 성장하였고 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중요한 교회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2. 주님의 모습

1) ‘아멘이시오’ 이는 ‘그렇게 하옵소서.’ ‘진실로’라는 말로 예배의식에서 기도문 마지막에 화답하는 말입니다.

2) 충성되고 참된 증인 역시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19:11).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1:5).

3) 창조의 근본이신 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자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이렇게 라오디게아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사역적인 면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내가 네 이름을 아노니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신 말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3. 신앙 상태

1)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혹자는 이것을 진리를 극렬히 대적하는 행위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차가운 것과 더운 것을 동일한 진리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율법은 척도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정죄하셨으나 모세의 율법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은 신령한 진리입니다(롬7:14).

무엇으로 죄악을 척결합니까? 율법입니다. 아합 집의 죄악을 척결한 예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 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왕하10:30).

2) 덥지도 아니하도다.

죤 웨슬레를 통해 성령 역사가 일어난 고을에는 백 년이 넘도록 술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오순절 교회는 불같이 임한 성령의 역사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불길이 오늘도 꺼지지 않고 이어나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오순절의 불길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임했고 빌립보 옥중에 임했습니다. 성령의 불길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로, 소아시아에서 구라파로, 아메리카에서 동남아시아로 넘어왔습니다. 요원의 불길 같이 성령의 불길이 주님 오실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3)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지기 까지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으나 불이 내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

어떤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입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호수아는 외쳤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내 신앙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불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 위해 헌신합시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는 옥토의 씨앗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라오디게아의 교회의 편지(2)

계3:17-22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마게도니아 교회(고후8:1)들과는 대조가 됩니다.

 

1. 자만심의 죄

물질을 죄악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물질을 초월하여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적인 풍요를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없으면 바벨탑같이 붕괴를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물질을 바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선한 업적은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기틀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물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없어질 물질로 쌓은 업적은 영원함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장사 밑천으로 준비한 돈이 주머니에 있었는데, 철야기도를 갔더니 그날 밤에 목사님의 설교에 “있는 것 다 내놓으라고 강조하여 차비까지 내놓고 철야를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물질이 주인이었으나 삭개오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주님의 지적

1) 네 곤고한 것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너무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외모를 취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곤고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기에 번민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하셨습니다.

2) 가련한 것

불쌍하다는 뜻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자에게 ‘가련하다’ ‘불쌍하다’고 하신 것은 수전노 인생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우리는 재물을 욕되게 쌓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가난한 것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물질로 인해 속사람이 가난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기억하십시오. 그 밭을 산 사람은 영원한 부자 곧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던 바나바요, 세상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도자 바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눈먼 것

물질 세상은 보면서도 영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없으면 이는 영적인 맹인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운 자가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맹인이었지만 영의 눈이 있었기에 그처럼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2316-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5) 벌거벗은 것

벌거벗은 것은 수치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는 주님을 맞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마포가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속사람을 단장해 주는 세마포가 무엇일까요?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이 옳은 행실이로다”(계19:6-8).

 

3. 주님의 권면

1)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계3:18). 불 같은 시련과 연단은 순금 같은 믿음을 얻기 위한 용광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2) 흰 옷을 사서 입어 수치를 면하게 하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22:11-13).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것 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10).

3)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이는 소망의 안약입니다. 성도에게는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은 금물입니다. 스데반은 이 눈이 있었기에 보좌에 서신 주님을 볼 수 있었고 그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던 것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

창2:1-3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만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정해진 날이므로 잘 지켜야 합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부모 품을 떠나 하나님의 집에서 성장하여 은총을 크게 받았고 다윗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잘 섬겨 동일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1. 성수주일과 시간의 주인

시간의 주인이 되십시오.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하루 24시간을 자기의 의도와 계획에 맞게 활용합니다. 반면 실패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없으므로 시간 관리에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시간 관리는 몸 관리, 마음 관리, 신앙 관리, 돈 관리와 같이 중요하다. 낭비 중 가장 나쁜 낭비는 시간 낭비입니다.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보십시오.

1)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2) 시간은 저축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3. 시간은 매매가 불가능합니다. 일 억을 주고 단 일초를 살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서 빌릴 수도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미국의 지도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만일 네가 네 인생을 사랑한다면 네 시간을 사랑하라. 왜냐 하면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을 우선으로 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

성수주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복된 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수주일과 건강의 복

내과 전문의 제임스 브라운씨는 “현대는 너무 바쁜 가운데 신경증 환자가 많이 생기는데 그에 대한 최선의 처방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날을 잘 지키는 것은 영육 간에도 균형을 이루고 이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Royal Academy에서는 사람의 체력이 몇 일만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지 연구 자료를 내었는데 결론은 칠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혁명이 있었을 때 무신론자들이 노동량을 조절하여 십일 만에 하루씩 쉬도록 하였는데 40%의 결손을 보고 다시 칠 일제 휴무로 환원했다고 합니다. 또 소련의 공산 혁명이 있었을 때도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고 레닌의 머리에서 생각해 낸 것이 7일 동안 일하고 8일 만에 쉬게 하는 것이었는데 능율이 30%가 줄어들었고, 5일을 일하고 6일 만에 쉬게 하여도 회복되지 않아 결국 7일 휴무로 환원했다고 합니다.

 

3. 성수주일과 물질의 복

성수주일하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유는 모든 복이 인간의 욕심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군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세계 최대의 기업가요 경영인인 이니 브릿지 라는 사람은 매일 두 시간 이상 성경을 읽으며 성경과 함께 생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므로 사양길에 놓였던 제네럴 모터스 자동차 회사를 살리고 불황으로 문을 닫게 되었던 T.W.A 항공사를 살려내어 미국에서는 “우리 회사도 이니 브릿지가 있었다면...” 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4. 성수주일과 영적인 복

진정한 복은 속사람 곧 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과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2-14).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편과 살았던 여인이었고 또 남의 남자를 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까요? 여전히 마음의 공백은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만난 뒤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생수의 은혜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어느 중환자의 이야기입니다. 팔다리는 마비되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유일한 의사표시는 반짝이는 눈동자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는데 어느 날 시 한편을 받아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나는 오늘도 삽니다. 나는 왜 이 고통의 인생, 불구의 인생, 또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앞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다 겪으시고 먼저 가신 길이기에 나는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갑니다. 나는 장애가 있어서 수많은 사람의 눈길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내가 주 앞에서 잘못만 행할 때 주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영원한 행복자, 영원한 승리자, 그는 주님의 날을 거룩히 지키고 은혜를 힘입은 자들이요 주님 위해 헌신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새 하늘과 새 땅

계21:1-8

 

창세기 1장에는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하였습니다.

 

처음 창조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1:10).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3-4). 이렇게 처음 땅을 심판하신 이유는 자연이 변질되어서가 아닌 인간이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창조

둘째 창조는 다시 저주가 없는 완전무결한 세계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모두가 근본적인 변화로서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므로 부활의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0-52).

천국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글입니다.

“내 순전한 아름다운 땅을 말하리니 너무도 위대하여 말할 수 없도다. 거긴 끊임없는 태양이 빛나고 결코 늙지 않으며 수많은 아름다운 산 있으니 나무들은 시들지 않는다 하도다. 그 꽃들은 그 모양이나 색채가 지상의 아무 꽃에 비할 바 없으며 끝없이 피어나니 향기로운 냄새 가득하도다. 지상의 해충이 닿지 못하며 인간의 저주가 머무르지 못하도다. 천국은 극히 아름다우니 지상의 아무것도 비할 것 없어라. 주의 도성은 가장 훌륭하니 귀중한 보석으로 이루어졌도다. 문들은 진주로 되어 열려 있으니 많은 집들은 넓고 거리는 순금으로 되어 있도다. 천국은 극히 아름다우니 그 반이라도 말할 수 없어라. 이 도성은 죽음이 닿지 못하며 병과 슬픔과 고통도 닿지 못하리라. 성전이 필요 없으리니 우리 주 예수가 군림함이라. 그는 가장 영광된 성전이요. 영원한 빛이 됨이라. 천국은 극히 아름다우니 순결한 기쁨과 즐거움이 거하는 곳이라”(존 E 졸러)

 

3. 이기는 자가 누릴 유업

반드시 이겨야 우리가 기약된 유업을 받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으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D.L Moody의 말입니다.

“애굽에서 40년간 모세는 자기가 어떤 굉장한 인물인 줄 알았고, 미디안 40년의 모세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광야의 40년 동안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8).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7).

 

4. 하늘나라 영광에 들어가지 못할 자

악인들의 심판은 의인들의 구원입니다. 가라지를 불태우는 때가 알곡은 곳간으로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요15:2).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25:10-12).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24-28).

어떻게 보면 이들은 가라지와 같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성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구원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 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

출5:1-2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요셉이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고센 땅에서 잘 살아갈 수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 거짓말을 하고도 복을 받은 산파들

애굽의 바로 왕이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시켜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아이는 살리도록 하였으나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바로의 말을 듣지 않고 사내아이를 살렸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안에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 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출1:15-21).

여기서 산파가 바로에게 거짓말을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 이유를 살펴보면,

1)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였기 때문이요.

2)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거짓말을 하고도 구원받은 사례가 또 있습니다. 여리고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인데 라합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8-11).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요8:44). 진리를 대적하는 어둠의 속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거짓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출애굽의 의미

하나님께서 열조들에게 언약하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애굽 생활은 물이 넉넉하고 기름져서 먹을 것이 넉넉하였습니다. 거기에 비해 가나안 땅은 척박한 편입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은 노예였습니다. 그러므로 노예는 아무리 땀 흘리고 일을 해도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노예에게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평생을 매여서 종살이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이요, 또 구원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서 영원한 기업도 없고 참 자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마귀의 노예로 죄악에 매여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죄악 세상 애굽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진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천국을 건너가는 유리바다요, 예루살렘은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진리의 통로로 삼아 인류를 구원할 특별계시를 주셨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19-22).

 

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바로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1-2).

모세가 받은 계시를 바로가 알 수 없지요. 결국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을 보고 미련하다 생각합니다. 이유는 짐승은 본능대로 살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짐승에게도 인간보다 뛰어난 지혜를 주셨다면 원숭이나 맹수들이 인간을 철장에 두고 구경하기 위해 사육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인간에게 주셨고 인간이 그것을 다스리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만물의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 무엇이라 합니까? ‘짐승보다 못한 인간’ 이라 합니다. 짐승을 두고 사람같이 영리하다 하는 것은 짐승 이상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두고 짐승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지한 인생들은 이성 없는 짐승보다 더 미련하여 스스로 죽는 길을 찾아드는 것입니다.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9:13-18).

2) 조물주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2-3).

은혜를 배역한 그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0-22).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내게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을 탄식하게 하지 말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나는 함께 가지 아니하리니

출33:1-5

 

출애굽의 사건은 인류 역사에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적의 손길로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동시킨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를 통과하던 그때 같이 기적이 많았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통과한 후에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또 반석에서 솟아오르는 생수를 마셨으며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입을 열면 불평이요, 원망이었던 것은 광야 생활이 그렇게 고달팠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목이 곧고 패역한 이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출32:9-10).

 

1.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50일이 되던 날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또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이 되는 날로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임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지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 백성에게 주셨고 또 다윗에게 세우신 언약을 지키사 왕 중의 왕이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1:17).

우리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을 붙잡고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동행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에녹은 삼백 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하나님과 함께 함이 내게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제가 목사가 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60이 지나서 받아야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으면 그 사슬에 매여 살아야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투른 생각이지요. 은혜의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떠한 멍에 아래 있느냐 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

출애굽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애굽땅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이주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게 있어 아무리 좋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기뻐하지 마십시오. 또 아무리 역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4-6).

2) 지상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영원한 천국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그림자로써 가나안 땅을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순례객들이 가나안 땅을 찾는 이유는 그곳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탄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1-22).

그 구원의 진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생수를 맛보았기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도성으로 들어가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9-30).

놀라운 사실은 그 동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다 주님께로 왔다는 것이요. 또 그들이 와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하였더라”(요4:39-42).

이것이 지상에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거울로 삼아 목이 곧고 패역한 자들이 되지 말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표징을 보이소서

삿6:11-18

 

여선지 드보라가 사사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태평하였으나 드보라 사후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므로 7년 동안 또 미디안에 붙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굴과 산성에서 숨어 살아야 하였고 파종기나 수확기 할 것 없이 미디안, 아말렉, 동방인들이 메뚜기 떼 같이 들어와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도 미디안 사람이 알지 못하게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기드온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주셨나이다”(삿6:12-13).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그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절망과 낙담은 금물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간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4-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1. 기드온의 겸손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 아니냐 하시니라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6:14-15).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5-6) 하였고,

바울은 삼층천을 보고도 12년 동안 입을 열어 자기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5-16).

 

2. 표징을 주옵소서

백악관의 주인공이 된 후에도 다니엘과 같이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A. 링컨대통령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더러 대통령이 기도하느라고 공연히 시간만 허비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아니하고는 이 중한 직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삿6:17). 사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증거 있는 믿음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보십시오. 심지어 자식이 눈 뜬 것을 보고도 그 부모는 출교를 두려워하였는데 증거가 있는 사람은 담대했습니다.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4-25).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1-33).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9:28, 34).

믿음의 선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능욕을 기뻐한 것은 하늘의 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욕을 먹고 축출된 사람에게 나타나신 인자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5-38).

주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기드온은 막강한 병력이나 무기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로만 족하게 생각했습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시33:16-17).

 

3. 40년을 태평한 이스라엘

사람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백수는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2040년이 되면 수명이 120세가 되리라고 합니다. 끔찍하게 느껴집니까? 그런데 본인의 나이가 그렇게 되면 그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가치가 수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명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고 사는 날 동안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된다면 수명은 길어도 복이 될 줄 압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삿8:28).

오늘 기도의 사람이 우리나라에 필요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3-24).

기도의 사람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 되어 세계와 역사의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

잠23:23

 

진리가 무엇인가? 수 없이 오랜 인생 여정을 내려오면서 오늘까지도 여전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철인 칸트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나의 머리속에 있는 그것에 대한 개념과 실제의 사물이나 사건이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자연의 진리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생의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연의 법 곧 물리적인 법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창조역사와 함께 부여된 법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영원하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진리는 무엇일까요?

 

1. 율법이 진리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시119:160).

다만 사람이 율법의 진리를 어떻게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온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10:17-20).

분명히 그 청년은 주님께로부터 “네가 율법을 잘 지켰으니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니라”는 칭찬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영생의 관문에서 실격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율법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9-14).

이렇게 율법의 진리는 우리가 죄인 된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영생의 진리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인 된 근본을 일깨워주는 진리라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사유의 복음이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9).

이천 년 전 골고다 산상에는 세 십자가가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요 양편에 있는 십자가는 강도들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1-34).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동일한 죽음에 이르렀을지라도 강도들의 죽음은 의미가 없으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흘리신 그 피는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강도들의 피는 죄인의 피 곧 죽은피 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의로운 피 곧 살아서 역사하는 보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1:12-13).

 

3. 진리를 사라.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

무슨 말씀일까요?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백화점 진열장에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라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라 대가가 없는 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요. 멸망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세상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6).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목숨입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물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물질을 팔아 진리를 샀으나 부자 청년은 재산이 아까워서 진리를 등졌습니다. 바나바는 재산을 팔아 진리를 샀으나 아나니아 삽비라는 물욕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아, 돈이여!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생겼는가.” 탄식했습니다. 물질보다 귀중한 것이 목숨이라면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영생의 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고 영생의 진리를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내가 너를 세웠노라

렘1:1-10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때를 잘 만나야 하고 또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난 일로 수제자 베드로가 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매여 무엇을 위해 사느냐 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유다의 요시야 왕 때로부터 시드기야 왕 11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5-7).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명령을 내리신 분이 맡긴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계시가 임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성지를 순례하며 시내산에 올랐는데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붉게 타오른 바위 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 모세에게 베푸신 은총을 저에게도 허락하옵소서.”

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의 말을 들었을 때 의분이 불타올랐고, 이사야는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6:8) 하였습니다.

 

1.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예레미야는 요셉과 다니엘같이 정치적인 역량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 기울어진 국운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세속의 권력을 부여하시리라는 뜻이 아니라 열국의 선지자로 세우리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예레미야가 열국에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장에서 45장까지는 유다 멸망에 대한 예언이고 46장에서 52장까지는 애굽과 불레셋, 모압과 암몬, 에돔과 다메섹과 하솔, 엘람과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말씀으로 모두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2.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8-9).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일이 있습니까? 인내하십시오. 예레미야는 죽을 때까지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결박하고 죽이려 하였으나 진리가 결박되지 않으므로 진리 안에 참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영의 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열국의 몽둥이로 들어 쓰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죽는 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유다가 망하고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 잡아 간 후 남은 자들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워 다스리게 했을 때 이스마엘이 또 그다랴를 죽이므로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에게 기도 응답이 어떻게 임하든지 그대로 따르겠노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42:5-6). 열흘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받은 응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렘42:11-12).

그 때에 그들은 순응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이 망할 때에 그들도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영의 눈으로 앞길을 보았으나 그들은 영의 눈이 없었기에 인간의 생각으로 행동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의 눈을 가진 예레미야는 열국의 지팡이로 쓰임 받은 바벨론의 멸망도 예언했습니다(렘50-51장).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죄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그 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영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3.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대안 없는 비판은 조심해야 하며 대책 없는 파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4대 명물 중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공룡화석을 비롯하여 보석 종류, 비행기의 발전사를 볼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오물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악은 일소해 버리시고 새로운 초석을 놓게 해 주십니다. 이방 나라들은 유다의 멸망으로 인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진리가 사라지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 앞에서 희롱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39-4).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드릴 것은 영원한 승리는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영원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비밀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무기나 권력은 과거에도 없었고 오늘도, 이후에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다가 죽은 것 같으나 오히려 가장 큰 일을 한 사람이었고, 온갖 수난을 겪고 빛을 보지 못한 사람 같으나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인물이었고, 날마다 죽는 사람 같았으나 날마나 승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18-19).

아 멘

 

 

여호와로 자랑하라

렘9:23-26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렘8:22).

백척간두에 있는 국가의 운명을 내다보며 예레미야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렘9:17-18).

사실 울어야 할 형편인데도 눈물이 없다면 이는 마음이 강퍅해졌거나 감정이 메마른 때문일 것입니다. 죄인이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세척제가 되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하려 함이라”(사57:15).

 

1. 지혜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지혜는 무엇보다 귀중하기에 자랑할 가치가 충분하다 할지라도 시대를 잘못 태어났을 때에는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망할 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 때에 걸쳐 유다인들을 포로 잡아 갔는데 그 때 왕과 고관, 부자들, 지혜자들이 먼저 사로잡혀 갔던 것입니다. 나라가 태평하다면 지혜는 큰 재산입니다. 역사의 발전은 지혜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도 이 지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반세기 동안에 반만 년의 역사보다 더 큰 발전을 가져온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물리학 부문에 노벨 수상자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특허권 신청도 미국과 일본을 앞질렀으면 하는 욕심이 듭니다. 모두가 세계적인 안목 곧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지혜는 영생에 이르는 참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2.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을 과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라면 이는 미련한 인간입니다. 대표적인 인간이 있다면 골리앗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년 다윗을 보고 그는 조롱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불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삼상17:43-44).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하고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두개골을 뚫었던 것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8-31).

 

3.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돈의 힘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는 돈 지갑이 비었을 때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오늘은 신용카드만 있으면 걱정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14:20).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19:7).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이러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형편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제와 동정의 타성에 빠져들지 말고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바벨론이 몰아닥칠 때에 과연 그 재물이 자기 생명을 지켜줄까요? 과거 우리나라 6.25 전쟁 때에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산 빨갱이들은 인민의 피를 착취했다고 해서 부자들을 먼저 처형했던 것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4. 여호와로 자랑하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

여호와를 아는 것은 영원한 구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구원받은 사람은 오늘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근심할 것 없음은 영원한 주님의 나라가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갔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속한 곳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관계를 뛰어 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됩니다. 마틴 루터는 거센 홍수에 떠내려가는 인생이라는 위험한 배에 올라타면서도 “도미니 수무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녀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세월의 파도가 거세질 때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배는 침몰하거나 좌초하지 않습니다. 배의 키는 하나님이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정석) 아 멘

 

 

진정한 봉사

마20:20-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 종이다.”(마틴 루터)

“예언자가 되려면 필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봉사의 손이다.”(어거스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경건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힐 때 내면적으로 영적 인격이 형성되고, 순종의 행위로 나타날 때 봉사의 결실이 맺혀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이번 길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희생적인 봉사

천로역정을 기록한 죤 번연은 평신도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에 의해 12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올 때 남긴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옥문을 나서는 그 시간부터 나는 복음을 전하겠다.”

“위법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겠느냐”

“나는 죽어도 복음 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나를 고치려 하지 말고 너희 제도와 법을 고치라”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희생을 다짐한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해서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 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8-19) 하시며 두 번째로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요한의 어머니 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님께 나아와 절을 하며 구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1). 그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로 인해 제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갑자기 시기와 질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1-3).

 

2. 섬기는 손길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집권자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7).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진정으로 존귀하게 되는 비결을 자기보다 남을 더 존중하고 섬기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서로 높아지려는 데는 문제가 따르지만 서로 섬기려하고 낮아지려 하는 데는 시기할 이유가 없을 줄 압니다.

 

3. 겸비한 봉사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는 대상을 가리고 기회도 구분합니다. 그러니 참된 청지기의 정신은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든지 장소와 시간,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하는 복종하는 믿음으로 하고 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에 대한 사르밧 과부의 봉사요, 바울에 대한 루디아의 봉사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봉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무익한 죄인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아니하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

 

4. 자족의 봉사

재능대로 배분된 달란트에 충성하면 모두가 동일한 영광에 이름을 믿으셔야 합니다. 자족에는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한 농부의 이야기다. 이 농부는 자신의 농장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농장 안에 있는 호수는 관리하는 것이 힘들었고, 농장은 넓고 이어진 작은 언덕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젖소들이 왕성한 식욕으로 풀밭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골칫거리였고, 울타리를 치고 가축을 먹이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매물로 내놓았다.

며칠 후 광고 문구를 확인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광고 내용은,

“새로운 농장주를 찾습니다. 이 농장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며, 굽이굽이 이어진 자연의 언덕이 있고, 부드러운 목초가 넘치는 곳이며, 깨끗한 호수로부터 자양분이 넘치는 곳이어서 가축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축복의 땅입니다.

이 농장의 새로운 주인을 찾습니다.”

광고 문구를 본 농부가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소. 그 땅이 바로 내가 평생을 찾고 있던 땅이요.” 하였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있다.”(밥 러셀)

우리 모두 지족과 감사를 알고 섬김의 도를 앞장서서 실천합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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