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강해설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3:1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고전 10:14-33

지금 우리는 태풍 루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모은 수재의연금은 총회로 송금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더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1. 우상숭배와 예배
신은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복 받은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화합차원에서 종교 일반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서 한신대 교수 김경재 원장과 미국인 현각 스님이 강연을 하였는데 요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각 스님은 말하기를 “내 믿음에만 집착하고 남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종교적 폭력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왕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자비와 같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도대체 그 진리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하고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그런 의문을 갖고 영적 방황을 했으며 책도 수없이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선 수행을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맞추어 김경재 목사는 “왜 종교간에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는가, ‘자기 붓 대롱으로 본 하늘만이 진짜요, 자기만이 하늘을 모두 본 자라고 우기는 배타적 독선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종교가 더 좋은 진리 체계를 가졌는가를 따지는 ‘정교 경쟁’이 아니라 어느 종교가 더 많은 자유 정의 평화 봉사운동에 복무하는가를 따지는 ‘정행 경쟁’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종교에 앞서 화목과 질서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종교는 왜 필요합니까? 인간에게는 어떠한 이념과 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각 스님은 가톨릭에 몸담고 있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불교에 입문하여 깨달은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진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요. 김경재 목사는 ‘진리보다 행위’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종교 혼합주의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일치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일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진리를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면서도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비진리와 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14, 20-21) 하였습니다.

2. 자유와 덕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3-24).
기독교 정신이 이 한 구절 속에 함축되어 있는 줄 압니다.
모두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구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 이룩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난 여름 청년들이 땀 흘리고 수고한 사역지에서 날아온 편지를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청년회 모든 분들께와 교우님들께 언제나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오래 오래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람들과 일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떠나갔지만 남아있는 우리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떠난 후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오래 정들었던 사람이 떠난 것처럼 허탈했습니다. 마음에 작은 고동이 울린 감동이었습니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앞에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사랑뿐임을 또 다시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 봅시다.
‘주님! 그들이 무엇을 원합니까? 건강, 지혜, 주님을 닮은 고상한 인격, 부자입니까? 주님! 다 채워주십시오.’
1년 동안 사역자금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한꺼번에 다 쏟아놓고 가셨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하루쯤 쉬려고 계획했는데 계곡에서 발이나 담그고 가셨는지요?
그 교회 성도들을 보면 목사님을 알 수 있다던데, 유목사님, 오목사님, 부장집사님, 전도사님 참 감사합니다.
밥하시느라 고생하신 권사님, 집사님, 궂은 일 도맡아 하던 청년들, 현관공사 때문에 세 번씩이나 오셨던 장집사님, 특별히 이발, 미용하셨던 자매님, 아프던 손과 목은 어떠하신지요? 이름들을 잘 몰라 미안합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다 건강하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사역이었습니다.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강명애 사모 드림
이 편지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와 일시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것이 내게 있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이 그림자에 속한 것인지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그 기도를 즐겨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자원보다 큰 보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전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생활에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필요로 하는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명이 발전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물질적인 세계에 국한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로 받는 복은 영육 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일로 청지기의 직분을 박탈하려 했을 때 계약서를 위조한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인의 것으로 사후를 대비했다는데 있습니다. 만물의 주인은 내가 아닌 조물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셨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톨스토이는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쌓여 있으면 악취가 나지만 뿌려지면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주셨다. 하나는 받는 손이고, 하나는 주는 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33절). .
이처럼 복 받을 믿음이 중요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이것이 사명을 가진 자의 믿음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3. 나의 양심과 다른 사람의 양심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25-27).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21절).
이는 앞뒤가 상반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먹어도 무방하고 어떤 경우에는 먹는 일을 삼가야 하겠습니까?
사실 무엇이든지 묻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믿음이라면 이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음식은 음식일 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죄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입니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0-31).
그러나 우상을 인정하면서 제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불신가족으로 인해 조상의 제사에 함께 참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적인 믿음으로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제사하는 것이 참된 효도가 아님을 알았다면 속히 극복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지라도 내 믿음의 잣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28-29).
무슨 말씀일까요? 이는 내 신앙이 아무리 성숙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신앙 잣대로 재지 말고 상대방의 신앙 잣대로 재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가족과 함께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밖에서 손님을 접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예의를 잃지 않고 먼저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반드시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시킨다면 이는 마치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황새와 여우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족일지라도 나이 많은 어른이나 병든 사람, 어린 아이가 있을 경우에도 그 상황에 따라 배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이 생각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나와서 자기가 앉는 자리를 두고 다툼을 일삼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양보하고 상대편을 위하는 미덕이 더 귀하지요. 또 부담 없이 주고받은 이야기이지만 실족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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