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13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거울로 삼아 ‘선 줄로 아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진리를 아는 지식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교황과 사제들이 해석해서 전해주는 성경의 내용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과 전통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또 마리아 우상을 비롯하여 각 가지로 조각한 우상을 세워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또 영생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는 부흥이 있었으나 죄악이 관영할 때는 영적인 삶이 침체되고 영감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사울은 블레셋 군대로 인해 두려워서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꿈이나 우림, 선지자로도 응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신접한 여인을 찾았으나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삼상28:6-19).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심령이 변화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교회가 부흥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 때 사회가 변화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이렇게 죄악을 소멸하는 불같은 말씀, 강퍅한 심령을 깨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에 3천 명, 5천 명이 가슴 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진리가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선포될 수 있도록 사명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교훈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오늘을 바로 살게 하는 지침이 될 줄 압니다. 주말 드라마에 나온 ‘고려 왕건’, ‘제국의 아침’ 같은 것은 단순한 오락물과는 달리 등장하는 인물들의 영욕의 세월과 그 마지막을 통해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많은 생각할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와는 비교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감에 의해 기록된 글과 일반 사가에 의한 기록으로서 이것이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 역사를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성경을 통해서는 구원의 진리 곧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요5:39).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4).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구름과 바다를 통과한 세례
이는 출애굽한 자들이 홍해를 지지난 것과 또 그들을 지켜준 구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합동세례라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개개인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만민이 구원 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개개인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유아세례일 경우에는 그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대신하고 만 십오 세가 지나면 다시 입교문답과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2) 신령한 식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신령한 식물이라면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는데 이 양식을 먹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9).
우리는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바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았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6-27).
그런데 바울이 만나를 신령한 양식이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만나는 상징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을 때는 은혜의 양식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신령한 음료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반석, 이도 역시 상징적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상징적인 진리를 어떻게 영적인 양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은혜가 될 수 있으나 믿음이 아니면 신령한 양식 곧 진리의 말씀도 사람의 소리에 그치므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이렇게 진리에 불순종하는 다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3. 광야에서 희생된 이스라엘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절).
여러분!
이제 신령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허물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자신의 눈에 든 들보를 발견하고 먼저 그것부터 뽑아야 하겠습니다.
1) 금송아지 우상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7절).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는 시간에 산하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헌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모세가 기도로 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세의 심정을 헤아렸다면 40일까지는 그만두고 단 일 주일이라도 금식하며 때를 기다렸어야 마땅할 것이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믿는다고 하면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금송아지 우상은 없습니까? 탐욕의 우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하였습니다.
2) 음란 죄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8절).
오늘날 안방에까지 들어온 음란 퇴폐문화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베드신이 나오면 흉내만 내었는데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 윤리가 무너지면 모든 것은 다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의 무서움을 알고 있다면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 길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원망하는 죄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9-10).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원망하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이 천국이라면 원망하며 사는 것은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지옥생활을 그리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조장하는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1-12).
결코 자만 할 수 없는 것은 끊임없이 역사하는 마귀의 올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로서 미국 유타주에서 살고 있는 브라이언 하이스씨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7월 어느 날 윗집에서 수도가 터져 자기가 사는 집이 물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양수기를 빌리러 가려고 자동차로 왔을 때 자동차 바퀴가 터져서 급히 갈아 끼워야 했고,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집에 들어가서 전화기를 들었는데 전기쇼크로 충격을 받아 전화기가 박살이 나면서 쓰러지게 되었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자동차를 누가 훔쳐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연료가 조금 밖에 없었기에 도둑이 버리고 간 차를 길가에서 발견하여 주유소까지 밀고가야 하였고, 그날 밤에 대학모임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 앞으로 갑자기 날아든 돌을 피하려다가 심하게 다쳐 병원에 가서 꿰맨 후 집에 돌아와서는 물에 젖은 카페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는 말 “누군가 내가 죽기를 원하는데 계속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야.”
감사할 일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절). 우리 모두 믿음으로 승리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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