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강해설교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3:14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고전 9:17-27

바울은 전도자요 사도로서 복음과 함께 그의 마땅한 권리를 밝히면서 그러나 ‘내게 이같이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 이것이 직업의식과 사명의식의 차이입니다. 단순한 직업의식에서라면 마땅한 대가를 내세우겠지만 사명의식은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감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
이러한 임무는 바울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행해야 할 복음의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바울이 받을 상급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18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상급을 살펴본다면,
1) 값없이 전하는 복음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당부하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라”(마10:8) 하신 말씀을 순종하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직업적인 의식으로 복음사역에 이바지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나았고 또 구원을 받았으니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구원의 복음이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감사할 일은 이런 믿음으로 전할 때에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역사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보장된 권리를 쓰지 아니하는 것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세상에는 없는 권세도 있는 것같이 행세하다가 거짓이 드러나서 부끄러움 당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의 전권대사로서 당당한 권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가 기도할 때에는 즉시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서는 그날에 받을 더 큰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처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위치에 서게 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바울의 처세를 보십시오.
1)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목숨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하였습니다.
2) 더 많은 사람 구원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어제 일간지 사회면에서 감동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은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강태원씨로 이분은 월남하여 팔십 평생에 모은 재산 270억 원을 불우 이웃에게 사용해 달라고 내어놓았습니다. 그 분에게도 1남 4녀의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는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시켜 아파트 한 채만 사주면 됐지 더 이상 주면 자식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난해에도 10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충북 청원군 꽃동네 사회복지대학에 기증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선친으로 말미암아서 였는데 선친이 평양 지주로 있으면서 100만 평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며 유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지금까지는 내가 모으는 재미로 살았으나 이제는 돈을 뜻있게 쓰는 재미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 그 이상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성도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힘들어 나는 목사 사모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반드시 교역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명의식에서 나오는 차이인 줄 압니다.
3) 유대인들과 같이 된 바울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절).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인데 강조형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혈통의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으로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요 열심당원으로는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혈통과 율법을 초월하여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 하였습니다.
4) 이방인들과 같이 된 바울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절).
성도들은 율법을 초월하고 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은혜의 사슬이라는 더 엄격한 멍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사슬에 매인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5) 약한 자들과 같이 된 바울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22-23).
‘복음에 참예하고자’ 바울은 인간적인 관계를 폭넓게 하기 위해 약한 자들과 함께 하며 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처세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사명의식에서였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친구라는 것은 관계가 좋을 때이지 싫으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명의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높고 낮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찾아갔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거론하며 냉수 한 그릇까지도 대접하기를 거절하였으나 오실 메시아임을 알고 나서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물동이를 버리고 도성으로 뛰어가 외칠 수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았던 간다게 여왕의 내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빌립이 유대 광야로 가게 되었던 것이 은혜였다면 구스의 내시가 홀연히 자기 나라로 가게 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은혜는 모든 것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은혜 힘입고 하나님 영광 크게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경기자의 자세
1)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절).
연습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가 본선에서 이기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각기 맡은 본분과 사명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찬양대원들도 연습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교사들과 남녀 전도회,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기약된 영광의 대열에서 모두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절제해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절제는 경기장의 룰과 같아서 마땅히 성도들이 지켜야 합니다. 정과 욕을 다스리기에 게을리 해서도 안 됩니다.
3) 목표를 이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6-27).
마라톤 선수가 42km를 달리고 마지막 코스를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최후까지 향방을 잃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 되어 오늘도 내일도 충성을 다짐하여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설교 > 강해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0) 2014.09.27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0) 2014.09.27
사도의 권세  (0) 2014.09.27
지식과 사랑  (0) 2014.09.27
임박한 환난을 대비한 신앙  (0) 201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