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그네 노정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8-9).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 앞에서 한 말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었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사람의 생애가 모두 한눈에 비춰질 것이다. 부족한 사람도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까지 지구라는 동일한 무대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것 같다.
태어날 때 세상을 모르고 태어났듯이 오늘도 종착점은 어디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또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을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내가 태어났던 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거제도이다.
지금은 조선소가 들어와 많이 발전되어 거제시로 바뀌었지만 그 때는 기차도 자동차도 구경할 수 없었던 외딴섬 시골이었다. 물론 전기도 없었기에 제사지낼 때에라야 촛불을 켤 수 있었으니 아프리카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1. 처음 맛본 꿩고기
내 나이 열 살 정도로 생각이 된다.
이른 겨울 가까운 산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꿩 사냥을 나온 포수들이 있었다. 날아가는 까투리를 보고 총을 쌌는데 날개에 맞아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작은 소나무들을 젖히며 부지런히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그들이 먼 산을 넘어간 후 나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갔더니 소나무 밑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급히 가서 보니 마침 숨어 있던 꿩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잡아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날 어머니가 꿩을 잡아 국을 끓여주셔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2. 그때는 노루고기가 맛이 좋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그 개가 얼마나 사냥을 잘하던지 심심찮게 노루를 잡았다.
그런 날에는 집안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루고기로 성찬을 벌렸는데
어느 누구 고기가 맛이 없다거나 입맛이 없어 양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지금은 개가 노루를 잡아도 사람들이 먹을 생각을 안 한다. 이유는 너무 맛이 없어서란다.
내가 1960년대 중반 파월장병으로 모집이 되어 춘천 오옴리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
별미로 라면과 빵을 주어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월남에서 일 년 반을 근무하는 동안 미군들이 제공하는 음식에 입맛을 익힌 후 귀국하여 그 라면과 빵을 다시 먹어보았더니 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음식은 주리고 목마를 때 먹어야 맛을 아는 것 같다.
3. 자녀들의 생일을 챙겨주시는 어머니
어릴 때는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생일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이유는 그날이 돌아오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열 자식을 낳아 하나는 일찍 죽고 아홉을 길렀는데 오늘날 같으면 애국자 중의 애국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헐벗고 배고픈 시절이라 살아간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는 자식들의 생일은 잊지 않고 그날이 돌아오면 그릇 위에 밥이 올라가도록 담아 주셨다. 그래서 일 년 내내 생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루는 생일이 아닌데 누님들이 밥을 많이 담아주었다. 물론 꽁보리밥이지만 너무도 기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먹다 보니 밥그릇 안이 텅 비어있었다. 밥 그릇 뚜껑을 덮어놓고 그 위에 밥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그릇을 던져버렸더니 놋그릇이라 돌에 맞아 금이 가고 말았다.
아마도 누님들이 보기에는 어머니의 밥을 너무 많이 빼앗아 먹는 것이 밉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워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형제들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마른 논에 물이 들어가는 것과 자식의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4. 미꾸라지 잡는 방법
우리 집 앞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천수답이라 비가 오지 않으면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올려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웅덩이에는 미꾸라지가 많이 있었는데 어느 날 소고기 뼈다귀를 담은 바구니를 줄에 매어 웅덩이에 내려놓고 하루 밤에 세 번이나 가서 바구니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적지 않은 미꾸라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고단백 음식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에 내려갔더니 영농 개량으로 기계로 농사를 짓고 천수답은 묵혀버리고 웅덩이도 메우고 집 부근에 있는 논에는 나무를 심어놓은 것을 보았다.
5. 야곱의 농장
아이가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에는 불편, 불만을 모르고 자랐듯이 태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살던 집과 환경에 불만을 모르고 자랐다. 도리어 부모님의 품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였다. 비록 시골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있었을 때에 농사가 너무도 잘되어 이웃 사람에 비하면 평균 갑절의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땅은 거짓이 없기에 사람이 땀 흘려 가꾸는 대로 보상을 해 주었다.
가축도 마찬가지로 잘되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을 쳤는데, 우리 집에서는 염소를 키웠다. 일반적으로 염소는 한 번에 한 마리 또는 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우리 집에서 키우는 염소는 한 번에 세 마리씩 낳았다. 그것도 봄가을 두 번에 여섯 마리씩 늘어났다. 또 일 년이 지나면 새끼가 새끼를 낳고 그러고 보니 오래지 않아 수십 마리로 늘어나게 되었다.
염소는 젖이 두 개 뿐이라 번갈아 가면서 새끼 젖을 먹이고 나면 그 새끼들이 팔짝팔짝 모퉁이로 뛰는 것도 생각이 난다.
6. 속히 자라서 부모님을 모셔야지
아버지는 키도 크고 골격도 대단히 좋으신 분이셨으나 농촌에서는 부지런히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셨다. 이유는 일정시대부터 할아버지, 큰아버지, 또 아버지까지 한의원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내가 어렸을 때 본 아버지는 하루만 농사일을 하면 일주일동안 몸살을 하는데 당장에 돌아가실 것 같이 신음을 하셨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거름 짐을 지고 가는데 그때의 내 나이는 열두어 살 때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연세는 사십대 초반이었으니 가장 힘이 좋을 때인데 얼마나 엄살을 부리시는지 이러다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속히 자라서 부모님을 고생하지 않게 해드려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던지 노년을 나와 함께 사시다가 구십 삼세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일 년 반부터는 변을 가리지 못해 침실에 비닐을 깔아드렸다. 하루는 목욕할 때 갈약근육이 풀어져 항문이 열려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섯 시 1부 새벽예배를 마치고 여섯 시 이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집으로 와서 어지러워진 침구와 마루, 또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버지의 변이 내 코에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루는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돌아가시기 십오일 전부터 아버지의 기도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나를 불러가 주십시오. 아멘” 하시는데 이제는 마음이 준비되신 것 같았다.
그 후 아들의 품에서 물을 요구하시더니 그 물을 한 모금 드시고 조용히 호흡을 거두셨다.
‘주님, 이 죄인의 마지막도 병원을 가지 않고 아름답게 주님의 품에 안기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7. 몸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했던 시절
태양이 작열했던 여름이 되면 농촌에는 김을 매느라 여념이 없이 바빠진다. 하루는 논에 김을 매는데 오백 평의 논을 한 낮에 메고 집으로 들어오니 아버지는 주무시다가 일어나시면서 “얘야, 오십 평되는 귀퉁이 논을 다 메고 오느냐” 하시기에 ‘오백평의 논을 다 메고 옵니다.’ 했더니 깜짝 놀라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은 어른 세 사람이 해야 할 분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에 대한 욕심은 오늘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을 여섯 번 Computer에 입력을 했더니 몸이 균형을 잃고 걸음걸이가 불편해져서 한동안 고생을 했다.
8. 구유(소 여물통)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구유는 가축 먹이를 담는 여물통이다. 나무속을 파내고 거기 가축 먹이를 담아준다. 그런데 나무가 오래되면 썩어서 쓸 수가 없게 된다. 우리 집의 여물통도 마찬가지로 오래되어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침 군에 있던 형님이 휴가차 왔기에 형님과 함께 사백 미터 정도 되는 산을 넘어 또 백 여 미터 내려가 마침 잘 자란 소나무를 발견하고 잘라서 형님과 함께 지게에 지고 올라오는데 생나무라 너무도 무거웠다. 형님은 골격도 좋은데다 키도 179cm가 되는 거구의 체격이었다. 그런데도 10m도 오르기 힘들어 쩔쩔매면서 번갈아 힘들게 산 위 까지는 올라왔으나 내리막길을 갈 수가 없어서 다음 날 아버지를 모시고 올라와 나무껍질을 벗기고 도끼와 끌로 속을 파낸 다음 지고 내려왔으나 그것도 무거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형님의 나이 22세 되었는데 나이 차이가 8년이니 나는 중학교 일학년 정도가 되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지금 중1다니는 손자를 볼 때 그는 너무도 어려만 보이는데...
9. 금고 열쇠(도장 셋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보고 금고 열쇠 시골 사투리로 도장 셋대라 했다. 아마도 내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넓은 세상을 몰랐기에 태어난 곳에서 땅만 경작하면 되는 줄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 또 일했다.
아마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상당한 지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친척 아비 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셨고, 또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과 같이 나는 병이 들어 고향을 떠나게 하셨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보관하는 금고 열쇠를 바꾸어 진리를 보관하는 천국열쇠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주셨는데 허물 많은 죄인에게도 주셨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10. 밤중에 햇불 들고 바다에서 낙지를 잡고
내가 자랐던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게(반장게)가 많이 있었기에 그것을 잡아먹는 낙지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낙지는 야행성이라 낮에는 깊은 굴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모두가 잠이 든 고요한 밤이 되면 나와서 먹이를 찾는다.
하루는 이 낙지를 잡기 위해 누님과 형수와 함께 햇불을 들고 낙지 사냥에 나섰는데 낙지가 햇불을 보고 먹이인 줄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쭉쭉 다리를 뻗으며 다가왔다.
낙지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곧 익숙해져서 세 사람이 하룻밤에 73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재미있는 낙지잡이를 왜 다시 하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있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옛 추억이 그리워 그 바다를 다시 찾았더니 지금은 물이 오염되어 반장게도 사라졌고 낙지도 볼 수 없었다.
과연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면 이것이 진정한 복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11. 신앙생활을 하게 된 동기
내가 여덟 살 때까지는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고 또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 물론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풍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덟 살 때 6.25 전쟁이 터졌고 흥남에서 미국 군함을 타고 거제도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는 우리 집에도 와서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그때 남편을 잃고 자녀들만 데리고 피난 나온 분인데 저녁이 되면 매일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하고 눈물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들은 또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물론 그때 그들 중에는 목사도, 전도사도 없었다. 주일이 돌아오면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내가 공부하던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더니 얼마 후 동네 성곽 위 오랜 정자나무 아래 교회를 건축하고, 산소통을 나무에 달아 종각을 대신해서 예배시간을 알렸다.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아시아의 첫 열매 에배네도와 같이(롬 16:5) 아버지가 처음으로 등록을 했다.
그러자 문중 어른들이 너무도 심하게 박해를 하기에 나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교회에 등록했지만 나는 나가지 않는다고 변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몰랐으나 주일이 그렇게 기다려졌고 또 성탄이 돌아오면 아기 예수님이 교회에서 다시 탄생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성가대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새벽송을 하는데 팥죽을 쑤고 인절미를 만들어 대접했는데 너무도 기뻤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나 같이 나에게 “너는 커서 목사가 될 사람이야”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비하면 오늘의 환경은 천국 중간쯤은 아닐까 할 정도로 살기가 좋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도 집도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던 피난민들에게는 감사와 눈물의 예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감격과 감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성경이 달라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메시아를 믿어서일까? 아니다. 있다면 마음이 부해져서 천국의 영광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에베소교회가 첫사랑을 잃은 일로 회개하여 다시 찾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계 2:5)고 하셨는데, 오늘도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와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12. 죽음의 고비를 두 번 넘기고
1) 부모님의 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병든 몸
어릴 때부터 나는 논다는 것과 휴식하는 것까지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지만 젊을 때는 등산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에너지를 왜 일하는데 쓰지 않는지...
내가 성장할 때는 대략 건강했던 편이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도, 아버지를 통해 한약을 썼어도 효력이 없었다. 불평과 짜증만 늘어나서 왜 내 병을 고쳐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너같이 불평과 원망하는 자는 치료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너무도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부모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의지했는데 이제는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던지 “네 생명을 하나님께 맡겼다.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단다” 는 한 마디에 눈물로 작별을 하고 떠났다. 그때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던 모 기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거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하체가 마비되어 앉은뱅이로 있던 정규칠이라는 형제와 같이 방을 쓰게 되었다. 그 친구는 하체가 마비되어 움직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소변도 남에게 신세를 져야 했으니 불편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앉은뱅이 용쓴다는 말과 같이 사람들이 업어서 교회에 옮겨놓으면 밤을 새우며 기도를 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 형제에게 가서 기도를 부탁하는 분도 많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안수를 하는 중에 “기도하면 낫는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말에 힘을 얻어 얼마나 기도를 했던지 하루는 발가락에 신경이 돌아와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도 감격해서 “봐라 내 발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치시려면 왜 발가락만 움직이게 하겠느냐 벌떡 일어서게 하시지.’
그런데 어느 날은 발목이 움직인다고 하며 보여주는데 그래도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 후 하루는 목발을 딛고 일어서게 되었다.
그 당시 유명했던 깡패가 그 광경을 보고 하는 말,
“얘, 너 앉은뱅이가 왜 일어섰냐”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해주셨어요.” 이 말을 듣고 그는 자극을 받아 산꼭대기로 올라가 눈 덮인 바위에서 “하나님, 저 병신도 일어나게 해주시면서 왜 내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삼 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여 변화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무슨 일일까? 나도 몸부림을 치며 기도를 했는데...
욥의 시련이 떠올랐다.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욥 7:11-14).
하루하루 병들어 죽어가는 저의 모습을 보고 보호자는 “다른 사람은 다 은혜를 받고 병도 고침을 받는데 왜 너는 못 받느냐” 하였다. 죽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기가 너무도 민망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은혜를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또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몸은 더 쇠약해져서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여 해골같이 되고 말았다. 누가 내게 수갑 채워 감옥에 가두어두지 않았는데도 아무 곳에도 갈 수가 없었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에 나는 너무도 큰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죄인은 하루라도 더 살면 사는 것만큼 땅에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 더 이상 죄를 쌓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생명 받아주십시오.’ 하고 벼랑에 몸을 던졌는데 한참 뒹굴어 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려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으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를 남겼다.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생각하고 상처 난 몸을 이끌고 내려오니 그때도 보호자의 하는 말 “너는 어디 가서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자다 오느냐” 했다.
이제는 내가 사후에도 누구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방석 하나를 가지고 마지막 죽을 곳을 찾아 나섰다.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곳을 향해...
그런데 오후 두 시 경 출발을 했는데 밤이 깊도록 올라간 곳이 산 중턱이었다. 더 이상 올라갈 힘도 없고, 밤도 깊었는데 마침 거기 반반한 반석이 있어서 그 위에 방석을 놓고 마지막 기도에 들어갔다.
한 가닥의 미련이나 꿈이 있을 때는 하나님 내 병을 고쳐주시면 세상 어느 곳에 가서도 주님의 일 하겠습니다. 하고 할 말도 많고 기도할 것이 있었는데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고 보니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 내 나이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40까지만 살려주시면 세상의 모든 미련 다 벗어던지겠습니다. 이른 봄이라 메마른 대지에도 새싹이 나오고 미물의 곤충들도 살기 위해 꿈틀거리고 나오는데 나는 미물의 곤충만도 못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흥회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고 병도 고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하고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울고 또 울고 울기만 했다.
한 가닥 소망이 있었다면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기에 사후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지는데 밤하늘의 별도 보이지 않고 산 그림자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때 마음을 울리는 소리가 있었는데,
“아무리 애석해도 시체는 시체실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는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는 음부가 펼쳐졌다. 음부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구렁이었는데 그 순간 내가 음부로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차라리 악몽이라면 살을 꼬집으며 깨어나면 될 텐데 그렇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음부로 떨어지는 그 시간에 어디서 터졌는지 두 눈에는 펑펑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 눈물은 지금까지 인생이 서러워서 흘렸던 눈물과는 너무도 성격이 달랐다. 음부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 내 입에서는 으악 하고 외치는 외마디의 비명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 분명히 내 입에서 나오던 그 외마디 비명소리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변하면서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역사였다.
그 밤에 내가 죽을 죽음을 주님이 대신하시고 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되었다. 또 그때 이사야의 입술을 태웠던 제단 숯불이 내려와 전신을 불태우는데, 그 불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목으로 내려올 때는 목이 열기를 받아 화끈거렸다. 또 양팔로 손끝까지 사르고 가슴으로 내려와 발끝으로 전신을 사르며 지나갔다. 음부에서 천국을 맛보게 해주신 그 순간이 너무도 감격스러워 뜨거운 마음으로 찬양과 기도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지자 모두가 변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제 그 산을 오를 때에는 하늘도 땅도 산천초목도 다 나를 죄인이라 조롱했으나 이제는 모두가 기뻐하며 축복하는 하객으로 변해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님을 믿는 줄 알았는데 그 믿음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
2)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믿음
과학자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또 들어도 육신에 속한 자들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요9:18-21).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1:9-11).
나는 눈앞에서 일어나 걷는 앉은뱅이를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믿어지는 믿음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으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은혜를 받고 산에서 내려오니 제일 기뻐하는 분이 나의 보호자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아니다 당장 밥을 먹을 수 없다.” 그래도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면 죽을 먼저 먹어보고 소화가 되면 밥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여전히 죽도 소화가 되지 않고 속에서는 냉장고같이 찬 기운만 올라온다. 내가 은혜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인가? 너무도 낙담이 되어 힘없이 산으로 오르면서 ‘하나님, 영원히 이 죄인을 버리십니까.’ 하는데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영상으로 눈앞에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석 달 동안만 참으라 석 달 동안은 연단기간이니라” 하시는데 나의 입에서 ‘석 달 동안만 참으면 됩니까?’ 하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렇다고 하셨다. 그날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찬양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하는 회개가 참 회개인 줄 알았는데 주의 빛 아래서 하는 회개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믿음도 역시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닌 주께서 믿어주시는 믿음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래도 낙심하고 기도할 때는 부분적으로 임하는 성령의 불길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드디어 석 달이 지나자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등에 떨어진 불길이 위장을 뜨겁게 태웠다. 그날 이후 그처럼 먹고 싶었던 밥을 먹게 되었고 오늘까지도 식욕이 살아 있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고 있다.
3). 두 번째 찾아온 사선의 고비
세월이 한참 흘렀다.
“하나님 40세까지만 살게 해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때 주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가겠습니다.”라고 했었는데, 드디어 그날이 다가온 것 같다. 어느 날 부활주일 전 토요일 밤이다. 설교 준비를 마치고 밤 11시가 지나서 잠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갑자기 배가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침 집사람은 딴 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혼자서 몸부림을 칠 수밖에...
바로 누워도 그렇고 옆으로 누워도, 엎드려도 통증이 멈추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병원에 가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1) 밤이 늦었으니 병원도 문을 닫았을 테니까...
하지만 응급실은 24시간 열려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 밝아오는 새날은 부활주일이니 강단을 비우고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다 월요일은 노회가 있어 내가 노회장으로서 회의를 개최하고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주일 날 새벽 예배와 1부 예배를 마치고 나니 통증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약사로 있는 N집사에게 진통제와 소화제를 요청하여 통증이 올 때마다 진통제를 먹고 2부 예배와 청년 예배를 마쳤고, 월요일이 되어 노회장을 선출한 후 인수인계를 마치고 집으로 왔을 때는 허리를 펼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서둘러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맹장이란다. 수술대에 올랐을 때는 밤 열시가 되어서였다.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았기에 결국 성냥 알갱이만한 천공이 생겨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두 번째 고비도 넘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40세까지만 살게 해주시면 미련을 두지 않고 가겠습니다. 하고 몸부림을 치며 기도했던 때가 언제인데 지금은 40에서 갑절이 다 되도록 살았으나 여전히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살고 싶어서일까?
하지만 속사람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하루하루가 지금까지 살아 온 어느 때보다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감사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주님, 남은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자랑이 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13. 이렇게 어린 사람에게 무슨 은혜를 받겠다고
여름방학이라 전도 여행을 나가게 되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촌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삼촌, 할머니가 병들어 죽어갑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집도 다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모든 우상을 불태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라는 소식이었다.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그 조카를 데리고 주일학교에 다녀왔는데 아비가 식칼을 들고 목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교회를 못가게 박해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니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큰 어머니는 절반은 무당이었는데 내가 어릴 때는 그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던 기억이 있다. 급히 내려가서 보니 복수가 차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때 교회를 찾아 목사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마침 수요일이라 설교를 부탁하는데 곁에 있던 사모님이 한마디 한다. “이렇게 어린 사람에게 무슨 은혜를 받겠다고...”
그런데 그 밤에 예배를 드리고 나니 이제는 토요일까지 집회를 해 달라고 하신다. 그때 제일 앞자리에 앉아 은혜를 받으신 분이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셨다. 집회 때 치료 받은 사람들의 간증도 여기저기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고향 지역 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교회에서도 함께 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나는 그때 어떻게 설교했는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할렐루야!
13. 군에 입대하고
내가 어렸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나 1953년에 휴전으로 전쟁이 그쳤기에 나는 군에 가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국민의 의무이기에 국가의 부름을 받아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기합이 세기로 소문난 23연대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첫 수요일 저녁에 부대 안에 있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갔더니 그날따라 군목이 오지 않아 예배를 인도할 사람이 없다고 군종 사병이 걱정을 하기에 내가 할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 군복을 입혀주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도중에 중위 계급장을 단 부관이 들어왔다. 중위는 초급장교로 높은 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그 당시 23연대 기관병들에게는 그 사람이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 사람은 훈련병을 기합 주는 것이 아니라 기관병들에게 주는데 입에서 거품이 나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파란 훈련병이 소리 질러 말씀을 전했더니 그 사람이 거꾸러지고 말았다. 예배가 끝나자 내게 찾아와 어디서 왔고 또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도 물어보고, 사격 훈련을 받을 때도 옆에 와서 이야기를 했다. 놀라운 것은 호랑이라 별명 붙은 그 사람이 양으로 변해서 그 날 이후 기관병들에게 기압을 주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관병들이 내가 무슨 설교를 하기에 이렇게 변화를 받았는지 창문 밖에 와서 듣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대단한 배경이 있는 줄 알고 기관병들과 훈련병들도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14. 김해 공병학교에서 이차 훈련을 받고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자 김해 공병학교로 가서 이차 훈련에 들어갔다.
부임하자마자 분대장들만 불러 모아 이유 없이 곡갱이 자루로 열대씩 때리는데 훈련을 마칠 때까지 피멍이 풀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날 같으면 영창을 가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군인은 군인답게 훈련을 받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군인은 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력이다.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아랍 연합군의 항복을 받았을 때의 일화가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유학생이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같은 날에 휴학계를 내고 사라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스라엘 학생은 나라를 위해 귀국하여 전쟁터에 나갔는데 에집트 학생은 귀국 소환장이 오기 전에 미리 피했다고 한다. 그 때 이스라엘 학생에게 질문한 말이다.
“네가 왜 학교를 휴학하고 전선으로 왔느냐?”는 질문에 “조국에 전쟁이 터졌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에 답변하기 위해서였다” 고 했다.
골리앗 앞에서도 용맹을 떨쳤던 다윗을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매년 장교 임관을 받기 전에 로마 군인들에게 최후까지 항전했던 맛사다 요새를 찾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나라를 지키자”라는 선서를 하고 있다.
15. 죽었다고 복창을 해라
공병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대전에 있는 806공병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배낭을 메고 부대를 찾았더니 처음 만난 선임병사가 하는 말이다. “너 우리 부대 배치를 받았느냐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라” 하는데 무척이나 말이 거칠었다. 군대에서는 기본으로 쓰는 말이 이 새끼 저 새끼이다. 그동안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군대에서 쓰는 용어에는 익숙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또 군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단위부대라 부대 안에 교회가 없어서 주일은 민간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신병이라 교회에 나가는 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교회를 나가자 부대 부관이 그 교회 집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반가워 그분을 찾아 ‘내가 신학을 공부하다 왔는데 배려해주시면 여기서도 공부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다행히 승인해 주어서 대전에서 근무하는 동안 제복을 입고 일과가 끝나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16. 제대를 육 개월 앞두고
그 당시 월남과 월맹이 불꽃 튀기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우방 한국군의 참전을 요청하여 먼저 맹호부대가 파견되어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지원병을 모집하기에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나도 지원을 했더니 마침 통보가 왔다. 그래서 강원도 오옴리 유격 훈련장으로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면서 일 년 치의 월급을 집으로 보내드리면서 “제가 다시 연락하기 전에는 편지를 보내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었다. 그날따라 얼마나 춥고 눈이 많이 왔던지 영하 십구 도라 했다. 그럴지라도 훈련은 엄하게 받아야 했다. “여기서 훈련을 게을리 하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교관의 한마디 한마디는 너무도 엄격하였다.
17.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유격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연락했다. ‘부산에서 어느 날 몇 시에 월남으로 출항합니다’. 라는 편지를 띄운 후에 부산으로 행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첫눈에 놀란 것은 세상에서 이렇게도 큰 배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었다. 일만 칠천 톤 되는 군함인데 그 당시로는 무척이나 커 보였다. 마침 아버지가 부산에 사시는 매형과 함께 부두에 나와서 선상에서 송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가져왔던지 고춧가루를 한 봉지 올려주었다. 처음 타본 큰 배라 침실을 찾기도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처음으로 맛보게 된 양식이라 너무도 맛이 있어 많이 먹었더니 군함이 남지나 해를 향해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파도에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뱃멀미가 나는데 그때부터 음식냄새가 역겨워지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가서 보니 변기에 모두 물이 고여 있기에 재래식 화장실만 쓰다가 그게 변기가 아니라 모두 세면기로만 보여서 당황하게 만들었다. 수세식 변기에 대한 사전 교육이 있었으면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을 텐데...
그 배를 타고 열흘 동안 갔는데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고춧가루를 밥에 뿌려 전우들과 함께 조금씩 먹을 수 있었다.
18. 승선 한 날부터 미국 돈으로 일당을 받고
배 안에서 처음 받아보는 미국 돈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너무도 가난했다. 국민소득 육십오$. 그런데 한 달에 54$이 나왔다. 그 뒤 알고 보니 그것도 90%는 국가로 들어가고 10%만 지급된 돈이었다. 그 돈이 우리나라의 가난을 극복하게 했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돈은 미군들이 받는 월급이었다. 그런데 미군은 장교와 사병의 대우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미군 장교들은 우리나라 장관급 대우라고 할 만큼 좋았다. 그리고 보니 내가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미국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느껴졌다. 방법은 내 대신 동생들이 장교로 입대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마침 골격도 튼튼하고 성격도 군대에 적성이 맞을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내가 보내는 돈으로 동생들을 교육시키십시오. 저를 위해서는 저축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를 세계 경제대국 십위에 오르게 할 만큼 기적을 이루어 놓았는데 오늘에 와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19. 삼 일에 두 통씩 주고받았던 편지
대전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매일 만났고, 주말이 되면 온천에서 또 친구 집 포도원 농장에서 만나곤 했던 단짝 친구 셋이 있었는데 그때 만남은 재미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늙으면 멀리 떨어져 살지 말고 이웃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약속도 했다. 그러나 안방 주인이 Key를 쥐고 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 그래도 허물없이 가까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식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때 한 친구는 머리가 좋아 항상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였고 한 친구는 사교성이 뛰어나서 장로가 되어 우리의 용돈을 대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늦게 목사가 되어 지금도 설교를 하고, 또 모 대학 재단이사장으로 있으니 신기하게 느껴진다.
내가 월남에서 일 년 반 근무하는 동안 Y친구를 통해 삼일에 두 통씩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어떤 연인인들 그렇게는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덕분에 나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월남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신기했던 일은 내가 귀국을 한 후에 그 친구가 또 월남 가서 내가 근무했던 그 부대 옆에서 근무하고 돌아왔다. 덕분에 그 친구는 지금 국가 유공자가 되어 잘 지내고 있다.
20. 내가 만난 예수님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주님을 뵙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뵈옵는 그날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날이기에 영원한 희비가 엇갈리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니 그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날을 대비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구세주로 오신 주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4).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2) 심판하러 오신 주님
여기는 이미 받은 심판과 장차 받을 심판이 있다. 이미 받은 심판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빛을 등진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의 낮과 밤은 태양을 마주했을 때와 등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의의 태양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또 종말적인 심판이 있는데 이는 인류 전체가 받는 것으로 첫째 사망(개인 죽음)이 있고 또 둘째 사망이 있는데 이는 주님이 오실 때에 순식간에 받는 심판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2-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이같이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또 심판주가 되신다.
하루는 꿈을 통해 주님을 뵙게 되었고 더욱 귀중한 것은 주님의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는 주님을 뵈옵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는 본능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알 수 있었고 또 의사소통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집무실에 이르게 되자 거기는 주님과 나만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성경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집무실에는 사방 벽이 전자장치로 번쩍이고 있었는데 세상의 모든 정보가 다 수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내가 일선 목회를 할 때는 영문 성경을 컴퓨터에 한 번 입력을 했으나 은퇴 후에는 성경쓰기에 들어가서 다시 네 번을 입력하고 또 많이 읽었다. 그중에 요한복음과 시편 등 여러 장을 매일 암송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새로운 은혜를 힘입고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21 내가 만난 바울
어느 날 바울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쓴 사도행전 강해 표지에는 바울 사도의 초상화가 있다. 거기에는 바울이 대머리에 지팡이를 잡고 서 있는데 무척이나 늙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바울은 얼굴이 다를 뿐 아니라 그렇게 늙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울이 순교를 육십 대 후반에 하였으니 그렇게 많이 늙은 것 같지 않았다.
바울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던 것같이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 언어를 배우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릴 때부터 익혀서 알게 되는 모국어(Native language)가 있는가 하면 외국어(foreign language)가 있다. 성경도 원어를 깊이 이해하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아람어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천국의 언어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요 또 입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지는 언어였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유, 무식이 따로 없고 모국어와 외국어를 가릴 이유도 없었다. 있다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모두에게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에는 저주받은 마귀나 악인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2. 가 좋아하는 세 가지 음식
1) 누룽지
내가 어렸을 때는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라 밥솥에 붙어있는 누룽지를 너무도 좋아했다. 그래서 누룽지 긁는 소리가 들리면 급히 부엌에 가서 먹었는데 지금도 종종 누룽지 굽는 집을 찾아 누룽지를 끓여서 먹고 있다.
어릴 때 입맛은 오늘도 그대로인 것 같다.
2) 꿀
우리 집에는 토종벌이 여러 통 있었는데 초겨울이 되면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꿀을 떴다. 이유는 벌이 잠들 때 떠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잠들어 있을 때 뜨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꿀을 뜨는 날에는 얼마나 잠귀가 밝아지던지 약간의 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났는데 내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동생들도 줄줄이 일어나 꿀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꿀을 너무도 좋아하는 편이다.
3) 생선회
어릴 때 아버지가 통영 시장엘 가면 개상어를 사 오시는데 뼈채 먹는 것이 너무도 맛이 좋았다. 후일에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때는 그것이 제일 싸서 사 왔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고기와 해산물이 식탁에 오르면 해산물에만 젓가락이 간다. 교회에서 심방을 하면 성도들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목사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가 묻는데 회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다음부터는 묻지 않고 횟집으로 안내를 하기에 너무도 고마웠다. 한 번은 군산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님의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강사에게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기에 회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유명한 횟집으로 안내하여 잘 먹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묻기에 역시 항구라 회가 싱싱하더라 했더니 또 회집으로 가고 집회를 마칠 때까지 횟집만 찾았더니 그래도 마지막 한 끼는 식단을 바꿀 줄 알았다는 말을 했다. 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소록도 옆에 있는 작은 섬 연홍도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님이 있었는데 육지로 오갈 수 있는 보트(방주 9호) 진수식이 있어 성도들 몇 사람과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리고 다음 날 아침식사시간에 생선회가 올라왔는데 옛날 시골 가마솥 뚜껑 같은 그릇에 수북이 담겨있었다. 그 교회에 어장을 하는 안수집사님이 있었는데 지난밤에 잡힌 고기는 주의 종을 대접하기로 기도하였기에 다 가져왔다는 것이다. 모두가 맛있게 먹었는데 함께 먹던 사람들은 배불러 하나씩 하나씩 물러났는데 나중에 보니 나 혼자 먹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옆에 있는 사람이 적게 먹어주는 것이 고마웠고 또 그런 음식을 남기고는 수저를 놓지 못했다.
개척 시절의 추억
1.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으로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죄의 보응이 따르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동안 6.25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으며 또 고생했는지 말할 수 없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교회 개척을 했을 때 만난 사람인데 이 사람은 남편과 이혼하고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중랑천 철거민촌에서 살고 있었다.
너무도 살아가기 어려워서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았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영원히 버리지는 아니하셨다.
하루는 그분이 친구 K전도사의 권유로 개척하는 교회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첫 시간에 그분이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뜨거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생활환경은 그대로였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심령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분은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어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울고 또 울었다.
이제는 가난하게 살아도,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한숨이 아닌 찬송이 터져 나왔다. 어둠이 사라지고 새날이 밝아왔다. 그처럼 죽고 싶었던 그 충동이 이제는 감사와 기쁨의 생활로 변화된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성도들이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지상의 천국 곧 심중 천국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지상 천국을 맛보지 못한 자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진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8).
2. 주의 종에게 새 힘을 주옵소서.
하루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너무도 피곤하여 발성 기도를 하다가 곧 침묵에 들어가고 말았다. 육신은 육신이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실 밤낮으로 뛰고 공부를 하면서 일을 했기에 체중이 8kg이 줄어들었다. 군에 있을 때는 62kg이었는데 54kg이하로 내려갔다.
길을 걸을 때는 머리가 어지러웠고 버스를 타면 그대로 잠이 들어 정류장을 지나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는 내일에 대한 꿈이 있었고 기도하는 성도가 있어서 행복했다.
갑자기 뒤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주님, 주님의 종에게 기도의 힘을 주옵소서. 지치지 않고 기도하도록 새 힘을 주시옵소서.”
그 순간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새 힘을 얻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껏 소리쳐 기도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3. 정성이 담긴 생일 음식
젊은 전도사의 생일을 어떻게 알았던지 찹쌀밥을 지어서 가지고 왔다. 오늘같이 좋은 세상이라면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살 수도 있고, 또 식당에 가면 골라서 마음껏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춥고 배고픈 시절이라 먹고 싶어도 돈이 없었고, 먹고 싶은 음식도 넉넉지 않았다. 더욱이나 최소한의 생활비도 보장되지 않았던 개척교회 시절이었다.
물론 그분도 배고픈 아이들이 있었고 역시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에 대한 불행을 심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은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이제는 달라졌으니 그것은 매일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 이 죄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성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립니다.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이 성도의 손길에 복을 내려 주옵소서.” 아멘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리워진다. 이것이 지상에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천국 생활이었으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믿음의 열조들은 모두가 문명 이전의 생활을 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이삭이 그러했고 야곱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 같이 문명 이전의 생활로서 지상에서는 원시적인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고 또 누리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솔로몬의 영광에 비길 수 없다면 오늘도 주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영광 역시 천국의 영광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영광이 있기에 성도는 어떠한 시련과 연단이 있을지라도 인내할 수 있고 또 순교자의 길도 기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4. 뜻깊은 성탄 선물
성탄절 선물을 받았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끼워서...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너무도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로는 감히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에 버금간다 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선물들을 여러 사람을 통해 받았지만, 그때 같이 감동되었던 것은 기억에 없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하늘에 쌓이는 상급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오늘 우리는 작은 소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무슨 말씀일까? 선한 일은 의무를 넘어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요. 복된 일은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요, 헛되지 않는 일은 욕심을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선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도 주님께서는 기억하시므로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부자 곧 진실한 부자는 선한 사업의 부자인 것이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12:33).
세계적인 부호 미국의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병상에서 남긴 말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생명 보조 장치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낫게 웅웅거리는 그 기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죽음의 사자의 숨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배 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돈 버는 일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되어야 한다. 그건 인간관계가 될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꿈일 수도 있다. 쉬지 않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다보면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나같이 말이다. 부에 의해 조성된 환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이라는 것을 모두의 마음속에 넣어주셨다.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 가져갈 도리가 없다.”
5.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 벽돌을 세 장씩 머리에 이고 달음질을 하고...
어떤 집에 병든 사람이 있다고 하여 심방을 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식물인간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그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어도 효과를 얻지 못해 일곱 달을 자리에 누워만 있는 사람이다. 사연을 알고 보니 빙판에 넘어져서 척추를 다쳐 하체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말할 수가 없다. 전도자는 의사와 다르다. 그러므로 청진기나 의료도구로 환자를 진단하고 또 치료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기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합병원에는 전문의사가 있어 증상에 따라 병을 다루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하는 전도자는 전문부서를 따로 구별하고 치료하지 않는다. 감사할 일은 무슨 문제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또 어떤 병이 들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말씀을 전했고 또 기도했다.
사실 믿음은 추상적인 명사이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과학적인 증명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요. 기록된 진리가 증거 하는 믿음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 1서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영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다만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헬렌 켈러)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 이 시간에 역사하사 마비된 이 여인의 몸을 고쳐주셔서 일어나 걷게 해 주옵소서. 아멘”
기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진리가 영원하시다는 증거이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즉시 일어나 그 주일부터 뛰어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때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는데 중랑천에서 손수 블록을 뽑아서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블록을 두 장씩 옮기는데 그 사람은 석 장씩 옮기면서 하는 말,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셨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같이 할 수 있겠느냐” 하며 석 장씩 머리에 이고 달음질을 했다. 할렐루야!
6. 성탄절의 특송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우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BC와 AD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물론 예수님은 세속의 나라에 왕이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선악과로 인해 저주 아래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병들고 죽어야 하는 공포도 없었고 어떠한 불행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평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는 어떤 이념과 철학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직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오늘도 인간을 결박하고 있는 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1서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6).
성탄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도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와 같이(눅 2:8-7)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탄절은, 문명이 발전하여 살기 좋은 오늘보다 도리어 주리고 헐벗은 자가 많았던 개척할 그때가 더 감격스러웠다.
교회를 개척하고 첫 번째 성탄을 맞았다. 자살을 시도하던 그분이 그날 세 아들과 함께 성탄 축하 특송을 하는데 모든 성도가 은혜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땅 위에 이루어진 천국이다. 물론 세상에서 육신으로 누리는 천국은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누리는 영광을 땅에서 맛보게 하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보혜사 성령의 은혜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7. 채명신 장군이 기증한 오르간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아쉬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악기인데, 찬양할 때는 악기가 있어 음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월남에 파병되었던 일이 있었기에 채명신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채명신 사령관님, 저는 1966-1968까지 베트남 퀴논에 있는 00부대에서 16개월을 사병으로 근무했던 유중근입니다. 지금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오르간이 필요해서 사령관님께 이렇게 편지를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시는 사령관님과 우리 장병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유중근 올림.”
편지를 보낸 후 육본에서 군목이 왔고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에 오르간이 한 대 들어왔다. 그 오르간의 반주에 맞추어 예배시간에 찬양을 하고, 그 반주에 맞춰서 젊은 사람들 결혼식 주례도 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한 냉수 한 그릇도 하늘에서 받을 상이 있다고 하셨는데 비록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주 앞에서 받을 상은 더욱 빛나리라 믿는다.
채명신 장군은 지금 동작동 국군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분의 유언에 따라 장군의 묘역에 들어가지 않고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병 곁에서...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묘지에 가면 스폰지 같이 푹신한 잔디가 덮여 있는데 잔디 속에 묘비가 있고, 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이 마치 골프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이다. 비행기를 타고 왔던 유족들이 두고 간 꽃다발을 여기저기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사후에까지 차이를 둘 수 없다 하여 장군과 사병은 이름과 계급만 달리 표시하고 있을 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부록
1. 한 통의 전화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주변에서 걸려오는 전화도 점점 뜸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하루는 전화벨이 요란을 떤다.
“목사님, 그동안 전화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예 권사님, 반갑습니다. 그동안 별일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예, 저는 덕분에 별일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는 장례식장입니다.”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 목사님, 00집사 기억나세요?”
“그럼요. 전에 건국대 병원에서 수술대에 올라 배를 열어 보니 암이 전신에 펴져서 손도 못쓰고 그대로 덮었던 일이 있었던 그 집사님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있는데 지금 그 남편 집사가 옆에 있으니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전화를 바꿔주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위로의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집사님,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가야합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일지 우리가 모르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태어난 인생이기에 그 뜻을 준행한 사람이라면 어느 때에 불림을 받든지 그날은 영광의 날이 됩니다. 이는 주 앞에서 받을 영광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도 먼저 가신 집사님의 뒤를 따라가게 될 것인데 우리도 그날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위로를 받으시고 아이들을 위해서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십시오.”
그러고 보니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 같다. 건국대 병원에서 배를 열었다가 그대로 덮었다는 말을 듣고 문병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마침 그때 병상에서,
“짧고도 긴 여행”, “목사님, 금붕어 잘 있습니까.”라는 내가 쓴 책을 읽으며 눈물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 아직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생명 불쌍히 여기셔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의사의 손길은 한계가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로 치료해 주셔서 주님의 영광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십오 년의 기회를 주셨듯이 그 집사님에게도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그동안 충분한 기회도 주셨고 또 익은 곡식 수확하듯 적절한 기회에 부르셨으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할렐루야!
2. 한 인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
장모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울면서 태어날지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는 슬픔을 남기고 떠나간다.
마지막 염을 마친 사람의 말이다.
“이골이 된 팔을 바로잡아드렸습니다.”
물론 마취주사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인이 어렸을 때 탈골이 되었는데 병원치료를 받지 않고 침술 치료만 받은 일로 평생을 탈골된 상태로 살아야 했었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데 그런 팔을 사후에야 바로잡을 수 있었다니, 아무런 고통도 모른 채...
고인의 관에 꽃가루를 뿌려주십시오.
입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또 치러지는 의식이다. 고인이 예쁘게 화장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유족들이 국화꽃을 관속에 넣어준다.
그런데 곧 화로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유족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중에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육십 대 후반을 혼자 살아가고 있는 작은 딸은 고인의 얼굴에 진하게 키스를 했다.
야! 얼마 안 되네!
화장이 끝났다는 신호와 함께 유족에게 아직도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몇 조각의 뼈를 보여준다. 누구의 입에서인지 “얼마 안 되네” 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끝나는 것이 인생인데 그동안 그렇게도 몸부림을 쳤던가? 더 잘살고, 더 오래 살아 보려고...
아직도 열기가 살아 있는 골분
육신은 흙에서 취했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아직도 열기가 살아있는 골분을 뿌리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쳤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3. I love you, you love me
장래를 약속하는 청춘이라면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꿈이 있고 노래가 있고 행복이 있다.
솔로몬은 왕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에 시녀가 무수하였을 지라도 술람미 여자를 만났을 때 그렇게도 기뻐했고 또 그녀를 위해 사랑의 노래 아가서를 남겼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아6:4-9).
아가서는 시 중의 시요 노래 중의 노래로서 신랑 되신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로 성화시켜 해석이 되고 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와는 아이를 두지 않았고 암몬 여자에게서 낳은 르호보암을 후계로 세웠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던 스바 여왕도 그의 씨를 받아 이스라엘의 씨를 퍼뜨렸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일천 명의 여인을 거느렸으니 그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테미나가 그렇게도 좋았다는 말일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림자와 실체의 행복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오 년을 땅속에서 나무 진액만 먹고 살다가 땅 밖을 나온 매미는 남은 일주일이 아쉬워 그처럼 짝을 찾아 목 놓아 울다가 서늘해지는 가을 날씨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하트 모양을 이루며 사랑을 나누는 잠자리도 마찬가지다.
솔로몬도 늦게야 이 사실을 깨달은 다음 전도서를 남긴 후 사라져갔다.
허지만 사람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영생의 자유와 참된 해방 곧 진리의 세계가 따로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4. 저를 위해 백세까지는 살아주십시오.
나의 아내나 자식들이 내게 했던 말이 아니라 L목사님이 한 말이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한 인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맙기는 하였으나 ‘아멘’ 이라고 화답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모세나 므두셀라만큼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백년이나 천년이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원이 있다면 내가 맡은 본분을 다하기까지는 살게 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단순히 연명을 위해서라면 장수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내게는 시간이 없다. 젊은이들같이 생의 낭만을 즐길 시간도 없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야망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어 노력하고 있다. 감사한 일은 나이 들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요 병이 들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할 일이 너무도 많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할 일인 줄 알아 나라를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주님, 기도 팔이 내려오지 않게 붙들어 주옵소서 아 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
“(시4: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5.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하는 샤워
돼지를 도살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밧줄이나 막대기를 쓰지 않고 평소에 돼지가 좋아하는 미끼를 가는 길에 떨어뜨려 주면 된다. 그 길이 마지막인 줄도 알지 못하고 앞다투어 그 길을 달려간다.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이제는 천정에서 물보라가 쏟아져 돼지들을 생후 처음이요 마지막인 사워로 몸에 붙은 오물들을 제거해 준다.
이성 없는 짐승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 그렇게 된다면 이 일을 어찌할까!
가축은 사람을 위해 지음을 받았기에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마는 인생이 유혹을 받아 그렇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인생을 타락시킨 마귀가 오늘도 역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길을 앞장서기 위해 다투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국회에서는 인권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성 평등법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에 의해 성경이 비진리로 전락 될 것 같다. 이 땅에서 성경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생각해 보았는가?
노아의 물 심판이 온 세상을 덮었듯이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 역사는 끝날 것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3-7).
4.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쩌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세계 경제 대국 10위에 올랐던 나라가 어떻게 이처럼 짧은 기간에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매년 보릿고개가 있었던 가난의 시절에는 적어도 자식들에게 이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살았는데...
해방 이후 오늘까지 이렇게 극한 대립과 혼란에 빠졌던 일이 없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아무도 내 잘못이라 말하는 자가 없고 모두가 남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백보를 양보해도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자들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에게 책임을 전과시킬 것인가?
국민에게? 야당에게? 특정종교와 그 어떤 인물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그럴 수가 없다.
탈북하여 귀순해 온 사람까지도 김정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두 눈을 가리고 판문점으로 되돌려 보냈고, 바다에서 표류하는 우리 공무원을 총으로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워버리는 자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그런데도 핵무기 폐기를 운운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지금은 비핵화라는 말조차 쓰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전쟁하지 않고 북한이 하라는 대로 하자는 말이다. 자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일어나야 할 때가 이르렀다.
세계에서 가장 적은 출산율과 혼인율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세속에 물들어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한 교회 역시 회개해야 할 것이다.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성경은 사라졌는가?
초대교회와 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일어났던 부활의 생명력은 어디로 갔는가?
선조들은 일본의 압제하에도 굴하지 않았고, 6.25 전쟁으로 강산이 피로 물들었을 때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 믿음 다시 살려야 한다.
지금은 교회 개척은 고사하고 기성교회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주님, 이 악몽에서 속히 깨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5. 조카에게서 전해 온 부고 소식
지방에 있는 조카의 아내가 돌아갔다는 부고를 접하고 조의금을 보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비워 있는 자리가 너무 커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해 주어야 마땅할지.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람의 동정과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다 소용이 없다. 도리어 마음만 약해질 뿐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하루하루가 두 사람의 몫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할 일 끝나면 다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다만 내 곁에 있던 사람이 나를 떠났다는 것은 나도 살만큼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야.
다만 하루를 더 살게 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조금 더 남았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하지 말라.
늙어도, 병들어도 호흡이 있는 동안은 할 일은 있다.
사무엘의 경건생활은 은퇴 후에 더 빛을 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남은 삶을 그렇게 살도록 기도하자.” 했더니 듣기가 힘들었던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6. 어머니, 할아버지 설교가 천사의 소리로 들렸어요.
일선 목회를 할 때는 결혼식과 장례식 주례를 적잖게 했다.
하관 예배를 마치고 나면 돌아서서 조크로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하면 ”목사님 저요저요 하고 동행했던 사람 중에 대략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길은 누가 앞서며 또 어느 날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날을 비밀로 해 두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만일 그날을 안다면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 할 것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낙이나 삶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젊었을 때는 장례식을 하면서도 내게는 먼 줄로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게도 눈앞에 다가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근간에 지인의 장례식이 있어서 주례를 했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유족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신 일이다.
장례식을 마친 후에 생질 며느리가 전화로 하는 말이다.
“삼촌, 우리 아들이 하는 말이 할아버지 설교가 천사의 음성으로 들렸답니다.”
또 큰 생질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분별이 되지 않아 그의 동생인 줄 알고 ‘00야 네 형에게서 처음으로 내가 착한 말을 들었다’고 했더니 “삼촌 내가 00이 아니고 00입니다” 하였다.
하나님 이들에게 복을 내려주옵소서. 주님의 영광 크게 드러내는 믿음의 일꾼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
7. 혼자 가게 되는 길
사람에게는 반드시 따로따로 가게 되는 길이 있고 또 혼자만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것이 죽음의 길이다. 물론 어떤 연유로 동반 자살을 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사후에도 소원대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생각일 뿐이다.
사후의 세계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는 반드시 심판대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현혹되지 않고 그날을 대비하여 살아간다.
오늘을 사는 것은 나그네의 노정이요 영원한 본향은 따로 있다.
이 길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가 걸어가신 길이요, 구도자가 가는 길이다.
본향에서 받을 상급이 예비 된 자에게는 죽음이 공포가 아닌 영광의 길이 된다. 모두가 그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한다. 하늘나라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부르는 찬양이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0-11).
0목사님
숨 가쁘게 달린 한 해를 보내고 또 밝아오는 새 아침을 맞으며 동산교회 카렌다 첫날을 펼치면서 건강한 새해를 맞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큰 꿈 이루시기를 소원하며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맨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추억의 한 토막
그 어느 날, 총회신학교에서 졸업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을 갔을 때 일이다. 거기서 첫날 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 흔들바위, 촛대바위, 청용굴을 힘든 줄도 모르고 올랐던 기억, 비포장 동했길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면서 검푸른 동해 물결이 바위에 부서지는 것을 보며 흥분했던 일들,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다. 급우들중에는 본향을 먼저 가신 분들도 적지 않은데 남은 여정이 아름답기를 기도드린다.
사람은 몇 살이 되어야 철이 드는가?
나는 칠십이 지나서 철이 들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함께하는 부부의 시각차를 성격 차이로 생각했다.
남자는 볼록렌즈로 보는데 여자는 오목렌즈로 가까이 있는 것을 잘 본다.
이로 인해 남자가 보는 것을 여자가 못 보고, 여자가 보는 것을 남자가 못 본다.
여기서 큰 소리, 작은 소리 긴소리 짧은소리가 나기 마련,
나는 아내와 쇼핑을 못한다.
나는 리스트를 적어 오 분이면 되는데 집사람은 상품마다 깨알같이 쓰여 있는 글을 다 읽은 후에 또 살까 말까 망설이니 한 시간이 보통이다.
시각이 달라서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니 하나님이 복 주신 안식처가 따로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두를 잃은 것 같았는데
목회 생활 사십일 년에 은퇴하고 물러날 때는 텅 빈 가슴 순식간에 모두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연세 높은 어른들의 은퇴 예배를 드릴 때 내게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목사님 뵙고 싶습니다. 사모님도요. 제가 이번에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그동안 신학교와 대학원 과정을 다 마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분 중에 일곱 번째 여자 목사가 나오는 것 같다. 모두가 열심히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고 있다.
“어디든지 좋으니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에게 돌려준 청와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내가 미국 백악관은 들어가 보았으나 청와대는 가보지 못했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데 우리 일행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세금도 내지 않고 살면서 나라 살림을 잘 살았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하겠나 마는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목사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또 연락을 드릴 테니 뵙도록 해 주십시오.”
한때는 태풍의 소용돌이에서 모두를 잃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여기저기 숨은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린다.
아침마다 부르짖던 목사님의 기도 소리 귀에 쟁쟁합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집사 권사가 지금은 장로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했다.
“목사님, 주일 날 우리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목사에게는 설교보다 더 큰 대접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고말고요 고맙습니다.”
가서 보니 아담하게 교회를 꾸미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동안 코로나에도 한 주일을 안 빼고 주일 예배와 또 새벽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주일학교 예배를 따로 드리지 못해 함께 드리는데 아이들이 앞에 나와 성경을 외우게 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중고등학교에서 일등을 한다고 했다.
소리쳐 말씀을 전하고 나니 모두가 은혜받고 기뻐하였다.
“목사님, 아침마다 부르짖던 기도 소리 귀에 쟁쟁합니다.”
나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 오늘도 달리고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노라”(빌3:13-14).
목사님, 추수 감사 주일 설교를 부탁합니다.
김포시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님에게서 온 전화이다.
목사님, 맥주 감사 주일도 설교를 부탁합니다. 은퇴하고 나니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심령을 일깨우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내 Blog에 들어오는 많은 분들도 있다.
주님, 죄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억하십니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92:12-15).
권사님의 눈물을 하나님이 받으실 줄 믿습니다.
Y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때는 집사 부부로 충성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참 얘기를 나눈 후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해서 전화로 기도했더니 아멘 아멘 하면서 울고 또 운다.
“권사님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동안 많은 시련과 유혹에서도 인내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 계신지 그 뜻을 깨닫고 또 준행하고 주님 앞에 서도록 기도 많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적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승리하십시오.”
찾아온 후배 목사님들
목사님, 우리가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목사님 세분이 찾아왔다. 내가 일선 목회를 할 때는 무척이나 젊었던 목사님들이 지금은 모두가 육십 대 중반이 되었다.
나이는 나만 늘어나는 줄 알았는데...
“목사님, 건강하시지요? 자주 뵙지 못한 것 용서하십시오.”
사실 지금이라도 찾아온 것이 그들에게는 대단한 성의이다.
목장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분주하고, 모두가 삶에 지쳐 앞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텐데...
그중에 한 분이 하는 말이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번 설교해 주십시오.”
감사한 일이다.
약속된 주일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니 다시 하는 말이다.
“목사님, 두 달에 한 번씩 와서 말씀해 주십시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벌써 일 년 반이 지난 것 같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할렐루야!
목사님, 스승의 주일이라 설교 부탁합니다.
십팔 년을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인데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내가 일선 목회할 때는 설교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일 년 오십이 주일에 해야 하는 설교가 무거운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말씀 전하는 시간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베드로에게 주신 기회를 저에게도 주십시오. 남은 삶을 시공을 초월한 증인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올린 후 인터넷 목회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스승의 주일 설교를 하고 나니 교회를 설립하신 분이 앞에 나와서 “목사님, 우리 교회에 원로 목사님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하신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소서. 아멘
행복
팔십 대의 노인이 행복을 운운한다면 무슨 일일까 하겠지만 사실이다.
어렸을 때는 불행을 몰랐으니 행복도 몰랐고,
성장기에는 모진 병마에 극한 시련과 연단으로 몸부림을 쳤고,
중년에 와서는 맡겨주신 목장에서 숨 가쁘게 달렸는데,
그러다 보니 세월은 가고 어느새 황혼이 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
지난 세월 십 년은 어제 같은데 앞으로 남은 시간 그 얼마일까?
아무리 촌각을 다투어 시간을 아낄지라도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제야 여유를 얻고 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 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
혼자 가야 하는 길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하는 아이는 고아가 되고,
친구 없이 살아가는 아이는 왕따가 된다.
그래서 친구가 중요하다.
또 나이 들면 결혼을 하는데, 부부는 나그네 노정을 오래도록 동행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시고 만족하셨고,
아담도 하와를 보았을 때 잃어버린 갈비 생각은 하지 않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기뻐하였다.
이렇게 만난 부부도 마지막 가는 길은 오직 한 분을 제하고는 누구도 동행하지 못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할렐루야!
땀의 가치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인천 계양구로 계양산 아래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등산을 하는데 대략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생각해 보니 63kg 체중이 쌀 세 포대의 무게인데, 396m 고지에 오르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산수(팔십)가 되었다. 남자의 평균 나이를 지났으니 이미 나그네 노정을 마친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등산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육신의 연습뿐만 아니라 경건의 연습도 되기에 그 보물의 가치는 묻어두기로 한다.
젊었을 때는 한가한 사람들이 등산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체력은 운동으로 유지되고 또 건강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등산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1) 식욕이 유지된다는 것이요.
2) 의욕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일로 삼고 등산을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수명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느 때든지 내가 맡은 본분을 마쳤다면 족할 것이다.
감사할 일이 한둘이든가!
내가 어렸을 때 만해도 지금 내 나이에 치아는 이사 가고 잇몸으로 살아야 했는데
나는 지금 인플란트를 하여 불편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치아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맛있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얼굴 형태도, 발음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서 또 누구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하고 있다.
물론 건강도 대략 좋은 편이다.
더욱 감사한 일은 인터넷 선교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하여 증인 되게 하옵소서’ 기도의 응답으로 올린 글이다.
조용히 엎드려 기도 올린다.
‘하나님, 무엇에 쓰시렵니까.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합니까.
주님의 기쁨 되기 소원합니다.
주님의 자랑 되기 소원합니다.
주님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아멘!
아비의 머리에 있는 손을 제 머리에 옮긴 손녀
아버지 기도해 주십시오.
아들 부부가 손녀를 품에 않고 와서 기도를 받는다.
그런데 내게는 기도하는 손이 둘 뿐이라 한 손은 아들에게 한 손은 자부의 머리 위에 얹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에 세 살짜리 손녀가 제 아비의 머리 위에 있는 내 손을 제 머리 위로 옮기고 기도를 받는다.
그렇게 하는 손녀가 기특하게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고 기특하게도 우수 장학생이 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세월이 빠르다고 말을 한다.
시간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루는 이십사 시간으로 동일한데...
무엇이 다를까?
내가 사는 동안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두 여인이 있다.
하나는 어머니요, 하나는 아내다.
물론 아내는 내가 선택을 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이 무조건 이쁘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이는데,
아내의 눈은 다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내는 칭찬에 목말라 있는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더 큰 기대에서라면 누가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43년 전에는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 찾아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자식은 몇이나 되고, 출가는 시켰는지?
오랬 만에 만났기에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너무도 젊어서 거리에서 만나면 알아볼 수도 없을 뻔했다.
“옛날 기억이 무엇이 남아있느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금요일 밤에 불암산에 올라가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얼음이 벽을 이루고 있는 추운 겨울인데 바위 위에 올라가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했다.
“지금은 기도 생활이 어떻냐?”
“지금은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산기도 철야기도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좋아진 세상이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울어야 할 일에 눈물이 없고, 영적인 빈곤과 영의 눈이 어두워 벌거벗은 수치를 알지 못하는 엘리제사장 때와 같이 하늘 문이 닫혔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17-20).
마지막까지 달리며 살아야 할 이유
누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그럴지라도 숫자가 늘어나면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청소년들과 팔십 대 노인이 릴레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인간에게는 나이를 먹지 않는 속 사람이 있다.
이로 인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달려야 할 이유가 있다.
1) 영원한 청춘을 돌려받을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2) 새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
3) 받을 상급이 앞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이 길을 목숨 걸고 달렸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삶과 죽음의 거리가 이렇게도 가까웠던가.
형님이 쓴 나그네 노정과 성례 순례 기행문 잘 읽고 많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 내가 병원에 갑니다. 머리가 좀 안 좋아서요. 삼십 분 거리에 병원이 있었기에 자기 발로 걸어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MRI 사진을 찍고 혈관 조형 시술에 들어갔는데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태어날 때는 내가 먼저 났고 삼 년 후에 동생이 태어났는데 지금은 내가 동생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장례식 주례를 하게 되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할 일도 있다.
병실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깨끗이 갈 수 있었으니
나도 이렇게 마지막을 장식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할 일이 끝나면 그날로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같이 살아주어서 고마워요.
나도 인생을 많이 살았나 보다.
한참 열심히 살아야 할 나이인데 조카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집사람이 고마웠던 것은 자기의 친자식같이 멀리 있는 병원을 여러 번 찾아가서 신앙의 줄을 붙들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병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몹쓸 병이 목숨을 빼앗아 갔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족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모두가 돌아가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때 처조카의 하는 말 “그동안 함께 살아주어서 고마워요”
영구차가 시신을 싣고 화장장으로 운구하여 마지막 예배를 드린 후에 화로로 들어갔다.
두 시간이 지나자 시신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왔다.
이것이 인생이다. 모두가 가게 되는 길.
누가 이 길을 벗어날 자 있으랴!
차이가 있다면 앞서고 뒤선다는 것뿐이다.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데 떠날 때는 펴고 간다.
모두를 포기한다는 뜻일까?
붙잡아도 모두가 헛되다는 뜻일까?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기까지는 살아있는 꽃대
팔순이라 가까이 사는 생질 부부가 찾아왔다. 곱게 핀 서양란을 들고,
서양란은 동양란에 비해 향기는 없어도 아름답고 오래 피어있기에 보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철이 변해도 잎사귀는 떨어지지 않고 그 잎사귀 사이로 또 꽃대가 나오더니 다시 꽃을 피운다.
신기한 것은 꽃잎이 떨어지기까지는 꽃대도 살아있다가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면 꽃대도 말라진다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도한다.
맡긴 사명 다할 때까지 육신의 진액이 말라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라”(사40:31).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행20:24).
빠진 치아
아이들과 노인들은 이가 빠진다. 그런데 아이는 이가 없어도 흉하게 보이지 않는데 노인은 흉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는 이가 다시 나지만 노인은 다시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울어도 흉하게 보이지 않지만, 노인은 웃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그래도 모두는 아쉬워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는 본능이 있으나 노인에게는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한 오라기 머리가 그렇게도 아쉬울 줄이야!
하루는 어린 손녀를 품에 안고 한 말이다. 너는 머리가 많으니 열 개만 빌려줘 그러면 할아버지 머리도 자랄 수 있을거야 했더니 안되요 하더니 내 머리를 살피더니 “할아버지, 지금 머리가 몇 개 자라고 있어요”
또 후배 목사가 머리가 빠지지 않는 약을 먹는다고 소개하기에 나도 그 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김의한박사를 만나서 내가 머리나는 약을 먹는다고 했더니 “유목사, 나도 그 약을 먹게 사줘” 하기에 적잖게 놀랐다. 김의환박사의 대머리는 세상이 다 알고 또 보기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래도 본인은 아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약을 사드리고 약값을 묻기에 ‘약값은 박사님의 머리가 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그래, 고마워요. 하고 그날부터 약을 드셨는데 빨리 머리가 나기를 기대했던지 두 번 먹을 약을 한꺼번에 먹었더니 “그 약을 먹고 옷에 실례를 할 정도로 급한 변을 봤다”고 했다. 지금 내 나이 팔순이다. 그런데도 거울 앞에 설 때는 벗겨진 이마에 행여나 머리가 나는지 보고 또 본다. 못살겠다고 열을 받아 이사 한지가 언제인데, 머리 숫이 많은 사람은 이런 일을 상상도 못하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