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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주님만 주님만 2022. 3. 19. 14:49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교회

6:10-13

 

에베소서의 주 내용은 교회론입니다. 전반부는 교리편이고, 후반부는 실천편입니다. 특히 육 장 십 절 이하는 영적인 무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1. 싸움의 성격

성도는 세상에서 싸워야 할 원수와 대적들이 많습니다. 물론 싸움에는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무슨 전쟁이든지 전사는 무장을 잘해야 합니다. 오늘 미국과 러시아가 계속적으로 전략무기를 감축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일본이나 중국, 북한에서는 오히려 증강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평화가 없는데 이유는 마귀가 왕노릇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여 원수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10).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전쟁의 대상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어둠의 권세 곧 마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전쟁을 살펴보면,

1) 영과 육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어느 지역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요, 또 어느 때까지라고 한정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계속되고 또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불행과 비극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전쟁이나 질고, 궁핍이 없어도 문제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서도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3).

바울은 이 문제로 번민하였으나 그리스도 예수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2) 이단과의 전쟁입니다.

여기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곧 종교다원주의가 들어와서 구원은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함께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간교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주 앞에 바로 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단의 역사를 보면 이는 기독교 진리와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비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잘못된 집단들이 어제오늘에 등장한 것이 아니며 또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1:3-4).

그들은 이질적인 존재요, 양의 가죽을 덮어쓴 이리들입니다. 이단의 특징이라면 유일한 구원의 진리를 인간 교주에게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모든 불의와 죄악과의 전쟁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5:13).

소금은 여러 가지 용도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적절한 염분은 음식의 맛을 살려줄 뿐 아니라 또한 부패를 방지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지형적으로 특이한 것이 많은데 거기는 갈릴리 호수와 사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헬몬산에서 눈녹은 물이 갈릴리로 들어오고 다시 요단강으로 흘러 사해로 들어가는데 사해는 염분이 32~33%나 됩니다. 그러므로 사해는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변질 되는 소금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맛을 잃은 소금' 이는 세속에 물들어 타락한 자들입니다. 빛을 잃은 등이지요. 불의와 죄악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본연의 임무와 사명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4)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가피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런 전쟁은 지엽적인 전쟁이라면 마귀와의 전쟁은 전면적인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물로 지엽적인 전쟁이라 가볍게 생각하면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하나님의 보장입니다.

1)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담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2) 주님께서 이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그렇다고 방심해서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감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영적인 무장이 귀중합니다. 진리로 매는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이는 감히 마귀가 넘볼 수 없는 완전한 무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시설이 다 갖추어 저도 전력이 없으면 가동할 수 없듯이 기도는 생명의 원동력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18-19).

바운즈(E.M.Bounds)"우리는 기도할 때 지칠 줄 모르는 힘과 거절할 수 없는 인내와 꺾이지 않는 용기로 강하게 구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강단에서 생수가 마르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성능 좋은 밧데리라도 충전이 없다면 에너지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바로 붙잡힌 바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20).

우리 모두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는 교회, 진리의 비밀 곧 생명과 구원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게 주신 달란트를 잠재우지 마십시오. 녹슬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교회" 이는 전 성도가 깨어있는 교회요,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한가한 자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은 좁고 협잡하여 찾는 이가 적어도 영생 길은 유일합니다. 새는 날개가 무거워도 날개로 날아가고, 비행기는 엔진이 무거워도 그 엔진으로 뜰 수가 있는 것같이 성도들은 십자가를 져야 천국 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 모두 진리의 역군으로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푯대를 향해 전진

3:13-16

 

희망찬 새해! 영광의 꿈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들의 머리 위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한 해도 거친 세파에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송구영신하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맞은 아침 해는 오늘도 동일합니다. 도리어 삶에 지친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만 갈 것입니다. 귀중한 것은 부단히 흘러가는 세월이라 할지라도 불변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이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갔고, 오늘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어둠으로 사라져 간 사람들이 많으나, 또한 빛을 찾아 빛을 남기고 간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 빛을 지향하여 살고 빛의 열매가 더욱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1. 뒤에 것은 잊어버립시다

사람이 궁지에 몰릴 때는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여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신년 벽두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추억이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슬픔도,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구도자 바울의 생애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7-9).

이와 같이 우리들도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진리를 위해 더욱 매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뒤를 돌아볼 때 닥치는 불행

자동차는 후진 기어를 넣으면 뒤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향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주행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순리적인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진리를 등지고 살아가면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근간에 살인죄를 저지른 죄수가 수감 중에 형무소 쇠창살을 끊고 탈옥했으나 결국에는 자살로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살아갈 곳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것이 죄의 보응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애굽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던 것같이 오늘도 세상이 그리워 뒤를 돌아보는 자는 영생의 유업을 잃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전진하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잊어야 할까요?

1) 나쁜 일은 잊어버립시다.

바울은 일생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180˚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경건 생활에 장애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상처받은 일이 있습니까? 사랑으로 고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좋은 일도 잊어버립시다.

좋은 일이라 거기에 머무르면 새로운 도전을 잃게 됩니다. 옳은 일을 했다고 거기에 머물러서 안 될 것은 더 큰 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머물지 않았습니다.

 

3. 푯대를 항하여 달려갑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시다.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던 것같이 우리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명의 새 아침은 밝았습니다. 모두를 청산하고 일어납시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십시오. 우리 모두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장하는 교회

4:13-15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1. 아이의 특징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거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령에 맞는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성인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1) 신체적인 활동이 미성숙합니다.

신경 반응이 늦기 때문에 주사를 맞을 때도 주사기를 빼고 나면 그때야 '으앙'하고 울지요, 또한 어떤 동작을 할 때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성도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으므로 목자가 없으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2) 본능적인 욕구로 행동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에 의하면 1~4살까지 유아들의 즐거움은 입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갑니다. 심지어 먹어서는 안 될 것도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가 울면 어미젖을 물려줍니다. 심지어 가짜 젖꼭지도 물려주지요. 가짜인데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니 신기하지요.

영적으로 어릴 때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 가장 기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 들어가는 것 곧 부자 되는 복음입니다. 물론 그런 것을 죄악시 할 이유는 없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살려야 하지만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6-27).

3)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있는 데서 언행을 주의해야 합니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단점을 무의식중에 익히고 좋은 것은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옳은 교육은 돈을 들여 가르쳐도 익혀지기 어려운데 못된 행실은 쉽게 익혀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연약한 자들에게는 앞선 자들이 좋은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에게 먹음직하다고 해서 아이에게도 그대로 먹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았다면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14).

 

2. 말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상을 먹고 살아가는 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세 끼씩 차려야지 일 년에 한 끼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육신은 땅에 속하였으므로 호흡이 그치면 땅으로 돌아가 거기서 모두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늘에 속하였으므로 영원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람하십니까? 새벽 미명 빈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같이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눈과 귀도 열려질 줄 믿습니다.

 

3. 기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보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으나 장성하면 어린 아이의 일은 버립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맺어야 영이 자랄 수 있습니다. 새해 인사차 들린 K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교회 잘 정한 것이 우리 가정에 얼마나 큰 복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해에 너무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복을 누리고, 육체적으로는 건강을 회복하고, 영적으로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금년에 모두가 기도로 새로워지고 풍성한 은혜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4.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아이의 믿음과 장성한 믿음에는 능력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지라도 장성한 신앙은 환경을 개발하고 변화를 가져옵니다. 신미년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꿈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장성한 믿음으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모두가 믿음의 장부가 되어 성령의 역사, 권능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온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로운 피조물

고후5:16-17

 

우리는 또 한 해를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생은 덧없이 늙어갑니다. 꿈이 많은 청소년은 새로운 기대에서 새해를 맞는 즐거움이 있으나 연세 높은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지요. 그러나 오늘을 값지게 살게 되면 더 밝은 내일이 보장될 줄 믿습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인생은 충분하고 길다. 보람차게 보낼 수만 있다면 위대한 일을 완성하는데 충분하다. 그러나 방탕과 나태 속에 낭비해 버리고 착한 일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인생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희망찬 새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 가정마다 새로운 변화와 축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1. 자연의 변화

문명의 발전으로 우리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해 문제로 피해를 많이 입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석유 자원을 개발한 일로 자동차 산업을 비롯하여 전기, 플라스틱, 섬유, 심지어 사람이 먹는 양식도 추출 해낸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석유로 인한 공해는 너무도 심각한 것입니다. 대지가 오염되고 수질과 공기의 오염으로 생명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공해 문제는 다를 것이 없을 줄 압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일로 인해 저주와 고통을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무엇 때문에 핵무기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대량 살상을 위한 무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지대로 남북이 합의하고 선포하였으나, 김일성의 술책은 남북 조절위원회를 개최하고 나서 휴전선 밑으로 땅굴을 팟던 것같이 비핵화 선포를 한 후에 핵무기를 만들었습니다.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패전한 일본이 오래지 않아 다시 핵무기 강국으로 등장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는 인류에게 희망 대신 종말적인 심판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인류에게 희망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멸망 받을 인간을 죄와 허물에서 구원해주실 유일한 소망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2. 인간의 변화

"목사님, 그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귀티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분이 돈 많은 사람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도 늙어지고, 꽃다운 청춘도 세월이 가면 추해지게 마련입니다. 불교 종정 성철 스님은 "나는 죄가 많아서 떨어진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불로 존중하지만 그것은 죄인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읻것이 복음입니다.

저는 군대 들어가기 전에 은혜를 받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 날 입대를 했는데 성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에 도착하여 수요일 저녁에 교회 갔는데 목사님이 오지 못해 설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군종 사병이 걱정을 하던 차 "제가 신학을 공부하다 들어온 사람이니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했더니 마침 잘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때 묻은 훈련병의 옷을 입고 단에 올라갈 수가 없기에 군종 사병의 계급이 달린 옷을 입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도중에 중대 부관 장교가 들어와서 말씀을 듣고 변화 받았습니다. 감사드릴 일은 훈련소에서는 호랑이 장교로 별명이 붙은 사람인데 그날 후로는 양같이 순해지고 말았습니다. 기관병들이 저에게 "너에게 무슨 재주가 있기에 그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때 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기관병들이 제가 설교할 때 창밖에 와서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사람이 따로 없고 안 좋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귀하게 되고 은혜 밖에 있으면 타락한 인간성대로 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6-17).

 

3. 시간의 변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1:9-10).

자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인생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흐르는 시간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미국 남부에 있는 땅콩 농장에 가면 목화 벌레 기념탑을 세워 놓았습니다. 사연은 어느 해에 목화 벌레가 농장을 못 쓰게 만들어서 농부들이 땅콩 농장으로 품종을 바꾼 결과 더 많은 수입을 올렸기 때문이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으로 농부들의 살길이 막막해졌다고 아우성입니다. 물론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런 때일수록 냉철하게 생각하여 우리도 이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가 삼십 년 사이에 참으로 많은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저력 있는 민족입니다. 새해에는 감사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작은 은혜에도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자동차 황 헨리 포드의 전성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시골 학교 여교사가 피아노를 한 대 구입했으면 하고 일천 달러를 도와달라고 포드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포드는 그 편지를 받고 단 10센트만 보내주었습니다. 여교사는 그 돈으로 땅콩 종자를 사서 심어 땅콩을 수확하여 감사하다는 편지와 함께 땅콩을 보내드렸더니 감동이 되어 일만 달러를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지금까지 건강을 지켜주시고 형통의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다짐과 각오 아래 주의 뜻을 이루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죽도록 충성하라

2:8-10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책망 없이 칭찬받은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로마 황제 숭배 강조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온 교회입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많은 환란과 경제적 불이익을 당했으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칭찬을 받았습니다. 기억할 것은 이러한 주님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지상 교회는 영생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9).

사탄의 회는 어느 한 시대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마귀의 역사도 있으므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종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누가 바울을 그토록 괴롭혔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가룟 유다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 되었던 것같이, 유대인들 역시 진리를 대적하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탄의 회당"이라 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1. 예배에 충성해야 합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3-25).

헌법에 나오는 예배 모범입니다.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이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드리는 일에 동참함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먹을 것까지도 미리 준비하고 이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 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그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정성에 따라 아벨과 그의 제사와 같이 상달될 수도 있고 가인과 그의 제사와 같이 상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달되는 제사는 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차 받을 하늘나라 상급과도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충성하여 복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기도에 충성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12:23).

사무엘같이 우리는 책임 있는 기도, 사명자로서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어떤 기도가 중언부언의 기도인지 아십니까? 책임과 사명을 망각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으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가 가리는지 아십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무력하게 만드는 자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기도 없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주의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도록 열심히 기도합시다. 매일 저녁 기관별 기도에 열심을 다 하시고, 새벽 기도, 금요일 철야기도에 충성하여 영적인 무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명을 가지고 기도하고 목적을 두고 기도를 하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6-7).

앞길에 장애가 있습니까? 기도할 할 기회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우리 모두 기도에 충성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전도에 충성합시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내린 엄명은 "말씀을 전파하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

누구에게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을까요? 충직한 증인들에게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었습니까? 진리의 증인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전도는 하면 좋으나 안 해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성도라면 증인 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 자가 사명을 저버리면 책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라 소홀히 해도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의 흘리신 보혈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귀의 꼬임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보십시오. 전도는 목사나 전도사와 같이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쟁에 나간 병사가 우리는 사병이니 싸움은 장교가 하는 것이라 하고 무장을 풀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전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를 하고 또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루려고 애를 써도 문제는 더 심각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마귀의 유혹으로 죄악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챨스 스펄젼이 제자들을 런던 거리로 보내 전도를 시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공했는데 어떤 이들은 수고만 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열매를 맺은 자들은 감사를 드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핑계가 있었습니다.

"스펄젼씨, 나는 왜 그리스도에게로 영혼을 인도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충실히 복음을 전했는데 결실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물었습니다.

"당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리라 기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직 교육도 마치지 못했고, 다른 사람처럼 많은 은사와 재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틀린 사람입니다."

스펼젼은 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전도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우리는 그리스도로만 자랑하고 복음의 증인 되어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은혜를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4. 받은 달란트에 충성합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아직도 나는 받은 은사가 없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2:8). 그러므로 우리는 값진 선물을 땅에 묻어두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같이 선용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4:11).

이보다 귀한 은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쓰지 않으면 내 말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쓰지 않으면 내 손길을 통해 어떻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에서 받은 직임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귀중한 것은 부여받은 재능입니다. 우리 모두 타고난 재능을 주님 앞에 바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 힘입기를 바랍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0-11). - 아멘 -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3-17

 

희망찬 새해 성도의 가정에 하늘의 영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어느 때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지난해는 크고 작은 사고로 얼룩진 한 해였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의 불행은 이러한 사고들이 지난해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기초가 잘못된 집이라면 외부만 손질한다고 해서 바로 잡을 수가 없는 것같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뿌리 깊은 민족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복음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금년은 해방된 지 오십 년 곧 희년이 되는 해로서 공산주의 유물사관의 멍에와 또 죄악의 멍에에서 자유를 얻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1. 성숙한 예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바울은 여기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종말적 위기를 바로 대처하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말세는 '고통하는 때'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시련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밝힌 말세의 고통을 보십시오.

1)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이는 비정상적으로 즉 극단적 이기주의로 나가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낙으로 삼는 것입니다.

2) "돈을 사랑하며"

사치와 향락을 위해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소비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돌보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3)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불의한 자들은 남을 경멸하고, 조소하며, 교만하며, 웃을 훼방합니다.

4)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핵가족 시대로 바뀌면서 자녀들을 하나 혹은 둘만 키우다 보니 집집마다 자식 우상에 빠져 이제는 효의 사상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사가 없고, 거룩이 없는 생활은 경건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배은망덕과 거룩함을 등진 삶이라면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인간이라면 따뜻한 정이 오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오히려 무정하고 무자비하여 마귀의 원흉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존파가 잡혔다고 평화로운 사회가 이루어지던가요? 여전히 불안합니다.

6)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무절제한 생활은 모래성과 같아서 명예도, 재산도 하루아침에 사라기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배반하여 팔며"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0:21).

모두가 심판을 자초하는 극단적인 행동들입니다.

7)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부지런한 것은 마땅하나 조급한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스스로 높은 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은 미덕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마귀의 올무에 빠져드는 행이 입니다.

어떤 사람은 낚시광이 되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 위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박에 빠져들어 생을 그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진리를 위해 헌신하십시오.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참된 신앙은 형식이 아닌 내용이요, 그림자가 아닌 실체입니다. 과연 성숙한 믿음이라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믿음으로 열매 맺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성장에 장애가 되는 요인이 무엇일까요?

1) 소극적인 사고 의식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먼저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능력의 역사는 적극적인 믿음을 통해 일어나게 됩니다. ·여전도회나 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수동적인 믿음이 아닌 능동적인 믿음, 소극적인 믿음이 아닌 적극적인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2) 안일한 신앙입니다.

어느 날 "집사님, 제가 교회에서 잘 뵙지 못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 제가 언제 교회에 빠지는 것 봤습니까? 주일 낮 예배는 정확하게 드립니다." 하는데 목에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물론 주일을 잘 지켜야 하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자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번거롭게 하려고 저녁 예배, 또 새벽 예배를 드리는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일 동안은 육신을 위해 일하는 날이라 하여 주님을 멀리하고 살아도 무방한 줄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27-28).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3) 교역자만이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한 사람의 목회가 아니라 전 성도의 목회요, 한 사람만이 능력 받은 교회가 아니라 전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교회입니다.

힘 있는 군대는 어떤 군대인지 아십니까? 전군을 간부화시키는 군대입니다. 육일 전쟁으로 아랍을 항복시킨 이스라엘 군대는 장교를 훈련 시키는 사관학교가 없습니다. 그 대신 전군을 지휘관으로 무장시키는 훈련을 하므로 그만큼 강한 군대를 양병하고 있습니다.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도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성한 믿음의 일꾼으로서 주의 뜻을 이룩하고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3.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확신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3-14).

사나운 맹수가 초식 동물에 비해 숫자가 적은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의로운 사람보다 불의하고 흉악한 사람들이 세상을 점령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진리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15).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 어릴 때부터 경건한 생활로 신앙의 기틀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위한 충성심은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5).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지혜의 보고입니다. 이 진리를 사모하십시오. 주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응답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지난여름에는 밤에 비가 스며들어 천장에 비닐을 받혀서 물을 받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집을 주셨습니다. 그때 사글세를 얻어 이사를 하라고 해서 셋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하나님 또 월세 집에서 살아야 합니까? 집을 하나 주옵소서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집을 주셨습니다."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16-17).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신체적인 조건은 나이가 들면 성숙할 수 있으나 인격은 교육으로 갖추어집니다. 사람은 평생토록 교육이 필요하지만, 성장기의 교육은 더욱 중요합니다. 또 어떠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인격 형성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 부분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교육은 영생을 위한 진리의 교육입니다.

, 박사의 자격으로 영생 얻지 못함을 알았다면, 우리는 진리의 교육에 더욱 철저해야 할 것입니다.

4) 선한 일을 행하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천국 곳간에 들어갈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번에 청년들이 필리핀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값진 기회가 된 줄을 믿습니다. 또 이번에 배후에서 기도해주신 성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힘이 되어주신 분들께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지난 주일에는 전 성도들이 사랑의 저금통으로 나눔의 손길에 동참함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행하고 온전하게 되기 위해 진리로 무장합시다. 새해에는 전 성도들이 이 보화를 개발하여 천국 건설에 이바지하는 역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큰상을 받는 자

10:32-39

 

본문 말씀은 배도자들이 받을 형벌과 그들로 인해 미치는 환난과 박해 속에서 성도들이 어떠한 신앙으로 인내할 것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32-34).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같이 그런 환난과 박해를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초대 교회가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는데 오늘은 세속화 현상으로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태와 방심은 마귀가 기뻐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에 적이 됩니다.

 

1.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6:23).

인류의 불행은 죄값으로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원인이 죄 때문이요, 가인이 평생을 번민에 쫓기게 됨이 죄 때문이요, 삼손이 두 눈을 뽑히게 됨이 죄 때문이요,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란을 당하게 됨도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07:10-11).

마귀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거기에 빠져들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옛날에 어느 신하가 하루는 임금에게 "자기는 아무리 유혹을 뿌리치려고 결심해도 지켜지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임금은 컵에 물을 가득히 떠 오게 한 다음 그 컵을 들고 정한 시간까지 성을 한 바퀴 돌아와야 하는데 만약 물을 한 방울이라도 쏟으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하는 공연한 이야기를 하여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고 후회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정한 시간 내에 돌아오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조심하며 돌아와서 임금 앞에 섰을 때 다시 임금은 물었습니다.

"네가 동쪽 모퉁이를 돌 때 어떤 건물이 있는데 보았느냐?"

"못 보았습니다."

"그럼 되었느니라,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여야 하느니라." 하고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인데 두려움 없이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저지른 죄 값을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 있는 줄 알았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목숨 외에는 어떠한 것도 대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6:23) 감히 죄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주의 흘린 보혈로 사유의 은총을 힘입고 이제는 영원히 의인의 반열에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는 유혹의 시험(Temptation)이 있는가 하면 환난의 시험(Trial)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Test)하실 때가 있습니다(22:1). 그러나 마귀는 시험과 올무로 우리를 실족하게 함이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새해에는 안일한 중에 복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염려도 근심도 모르고 안일하게 사는 것은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것이요, 맹목적인 인생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낭비입니다. 환난 풍파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도 말고 오히려 그로 인해 더 큰 신앙의 업적을 쌓아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장애가 있습니까? 게으르고 약한 자에게는 걸림돌이 되어도 믿음이 장성한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3.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35).

감사드릴 일은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이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의 이스라엘 백성같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17-19).

우리는 6·25의 불행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때는 수치를 가릴 형편도 못되었을 뿐 아니라, 수치가 수치인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국가의 모든 행사가 기독교 의식을 따르고 주일은 공공기업, 사회단체, 상점, 시장, 백화점 할 것 없이 성일로 지키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국가정책은 국민의 요구를 따르게 되는데 국민 다수가 기독교인이 되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문제는 해결될 줄 압니다. 이 영광스러운 새 날을 향해 우리 모두 사자와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분발하여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4. 인내로 승리해야 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6-37).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9-10).

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한데 시간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허무에 매여 종살이 하지 말고 진리를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흥왕하는 교회

6:1-7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흥왕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흥왕하게 하기위해 우리 모두 힘차게 전진하는 새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광야에 세운 성막의 중요성은 그것이 하늘나라 모형이기 때문이요, 초대 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확정된 숫자나 어떠한 조직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임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 중생의 은혜가 임했고, 땅끝까지 증인 될 사명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이 경건의 능력으로 선포되는 복음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말씀이 흥왕하였습니다.

사무엘상 삼 장 일 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였습니다. 사실 말씀이 희귀해진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고갈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큰 불행입니다. 마지막 환난 때에도 말씀의 기근과 기갈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런데 초대 교회는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7)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말씀으로 우주 만물이 창조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오셨고, 오늘은 말씀과 함께 보혜사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영감의 말씀이 사라지면 영혼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한 초대 교회는 박해가 닥쳐도 위축되지 않았고, 어떠한 장애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평소에 학문이 없었던 자들로 알았다가(4:13) 사도들의 입에서 의의 불검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앞에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의 은혜는 어느 때 어떤 특정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4:31).

 

2. 제자의 수가 흥왕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보십시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2:41) 하였고, 또 오천 명, 나중에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4-47).

중요한 것은 그 무리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배불린 후 썩을 양식을 찾으러 주님을 찾았던 무리와 다른 것은 그들이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설교에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지상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은혜로 거듭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석가 랜스키는 그때에 성도의 숫자를 2~25천으로 추측을 합니다. 그렇게 폭발적인 부흥을 가져오고 보니 부작용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1).

이를 가리켜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결국은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지체하지 않고 제자를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2-4) 하였습니다.

물질 공궤가 사도들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사도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회에 따로 교역자를 둘 수가 없지요. 모든 분야를 한 사람이 맡아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늘어나면 자연히 전문 교역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여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들은 그중에도 신실한 사람들을 세워 교회 안에서 섬기는 집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집사를 제비 뽑아 세울 때의 기준을 보십시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일곱 집사를 세운 일로 일곱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살리려는 분들도 있지만, 그 후로 어느 때에도 그 숫자에 맞추어 세우지 않은 것을 보아 그러한 추정은 불필요할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아야 십자가를 질 수 있고 또 사명을 감당하여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1:29).

수고의 대가라면 임금을 주고받을 때 의무가 청산되나 은혜는 받는 시간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0:16)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당연히 진실하고 양순함이 있어야 하지만 사물을 처리해나가는 데는 지혜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이는 전문적인 기능과 타고난 달란트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섬길 위치를 바로 알고 봉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줄 믿습니다.

3)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집사의 자격을 보면,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8-9)라 하였습니다.

특히 유의할 점은 건덕입니다. 집사는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도록 멍에를 메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여기에 머물 수 없었기에 땅끝까지 증인될 사명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일어나서 초대 교회처럼 진리의 증인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능력이 흥왕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2:43).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하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땅이 진동하였고(4:3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고(5:1-9), 또한 죽은 다비다를 살려내었습니다(9:41).

심지어 사도들이 지나갈 때 그림자를 통해서나 손수건을 통해서도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은혜는 사도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사들을 통해서도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6:8).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5, 7-8).

그렇게 초대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역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교회였습니다. 기억해야 할 일은 사도행전은 이십팔 장일지라도 성령으로 인한 복음의 역사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전파될 복음은 사도행전에서 출발 신호를 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권능의 역사는 이천 년 동안 역사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5:32).

여러분! 과연 거듭났습니까? 진리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때 일어난 역사요,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때 일어난 역사요, 복음을 증언할 때 일어난 역사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

- 아멘 -


고난주일

갈보리의 세 십자가

27:32-38

 

사형법이 존속되어야 하느냐? 폐지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나라마다 많은 논란이 있는 줄 압니다. "행한 대로 갚으라"는 모세의 율법에는 사형법이 있습니다. 무고하게 남의 생명을 빼앗은 흉악범이라면 아무리 관대한 사회라 할지라도 행위의 보응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편에 강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주님이 못 박힌 십자가는 십자형인데 강도의 십자가는 T자형으로 된 것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모양이 아니라 의미에 있습니다.

 

1. 강도의 십자가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9:18).

양편에 있는 십자가는 강도들이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극한 형벌일지라도 목숨을 대가로 지불 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편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까지도 대속의 은혜를 외면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존중받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요, 또 자기 수명은 다하고 죽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오래 살고 또 부를 누린다 할지라도 죽음은 면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그날을 맞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죽느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에서 죽었다고 해서 소망이 없었고, 홍해를 건너간 후손들이라 하여 소망이 있었던가요.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으나 믿지 않고 죽은 자는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대속의 기회를 잃어버린 왼편 강도를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23:39).

이렇게 예수를 희롱한다고 그에게 고통이 감해지거나 누구에게 칭찬을 받을 일도 아닌데 여전히 마귀와 합창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편 강도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못 박힌 십자가일지라도 멸망 받는 죄인의 십자가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심판의 형틀일 뿐입니다.

 

2.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

그들은 동일한 범죄로 동일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죄인들이기에 그처럼 극형에 처한 줄 압니다. 그런데도 그중 한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자는 멸망 받기로 예정된 자이기에 일생을 신앙생활 하다가 죽을 때에 주를 부인하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구원 받은 강도와 같은 기회가 돌아온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 강도는 멸망에 이르고 다른 강도는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렸을지라도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골고다의 세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최후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양편의 죄수들은 자기 죄 값으로 받는 형벌로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거기 주님께서 계셨다는 것이 구원받을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이 만민을 구원하기에 넉넉할지라도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에게라면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고 구원받을 성도에게만 영생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 값으로 멸망 받는 강도에 비해 구원받은 강도는 특별한 공로가 있었습니까? 있다면 주의 긍휼을 따라 간구한 것뿐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0-43).

얼마나 확실한 구원입니까? 과연 참혹하게 죽어가는 절박한 십자가상에서 그보다 더 귀중한 은혜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구원을 보장받은 이 강도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그의 욕된 삶은 부끄러움뿐이었고 죄값으로 받는 형벌은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이제는 모두가 해결되었습니다. 도리어 더 크게 감사드리고 영광을 주님 앞에 돌릴 수 있는 극적인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십자가 형틀에서 받는 고통은 그대로요, 외부적인 환경은 바뀐 것이 없을지라도 구원을 보장받은 그 심령은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오늘 이 영원한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독교의 진리는 대속의 진리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만일 주님이 아닌 다른 죄수가 그곳에 하나 더 있었다면 이천 년 전 골고다의 세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죄수를 못 박아 죽인 형틀일 뿐이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될 때 각 곳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김일성의 사적지는 북한에서 성역화되고 그의 동상은 여전히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그렇게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유물사관이 진리라면 왜 일세기도 못가서 그같이 허무하게 무너질까요?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영원하고 영원하며 영원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죽인 형틀이었으나 그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는 진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예수님을 유대인에 의한 종교 재판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열린 세상 재판 곧 이중 재판으로 십자가에 넘긴 것입니다.

1) 종교 재판

이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회로 대제사장 앞에서 받는 재판입니다. 그때 적용된 법 조항은 모세의 율법으로서 주님을 죽여야 할 죄목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신성을 모독한 죄라 하였습니다.

진리를 사수하겠다는 열심이 지나쳐서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심판한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등장하여 양들을 짓밟고 죽인 일은 있었습니다. 충성된 목자라면 양을 바로 지켜야 하는데도 청지기가 선한 목자와 이리도 분별을 못하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는 회개하고 용서받기 전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2) 세상 재판

유대인들에게 주권이 보장된 상태라면 종교 재판으로 그리스도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결국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게 되었습니다.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왕 중의 왕인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가 어떻게 세상의 법정에서 심판받을 수 있을까요? 진리가 세상 법의 저촉을 받는다면 진리가 판사의 판결에 따라 바뀌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모순이 있을 수 없으나 엄연히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법정에 고발한 것을 보십시오.

백성을 미혹하는 자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23:2).

어떠한 연유로든 점령지의 통치자로서는 백성을 선동하고 미혹하는 일은 반역에 해당되므로 방치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미혹이라는 말의 성격이 어떤 것입니까? 이는 바른길에서 잘못된 길로 오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덴에서와 같이 생명 길에서 사망 길로 빠지게 한다면 그것은 미혹입니다. 그러나 멸망에 처한 인생을 구원받게 한다면 이는 미혹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복음이지요, 그리스도는 이 복음 외에 우리에게 어떠한 미혹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23:2)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도 역시 세상 법에 저촉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올무는 바리새인들이 주님 앞에 제공했을 뿐 주님이 백성에게 탈세하라고 하신 일은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0:25).

국세는 국가에, 성물은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응해야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 법을 준행해야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칭 왕 그리스도라"(23:2)

순금은 순금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도금은 도금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실 때는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품에 안겨야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23:2).

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 같이 오늘도 성령을 떠난 위선자들이 진리를 매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여야 할 죄를 찾지 못했으므로 놓으려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23:13-14).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23:22).

그런데 무리 들이 소리 질러 십자가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신 십자가! 왜 그렇게 귀중할까요? 그의 상함과 그의 찔리심이 곧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주님이 지신 십자가 이는 영원한 대속의 진리요 참 생명입니다. 이 진리, 이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고난의 길

53:4-6

 

세상에서 고난을 즐거워할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어떠한 것이며 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어떠한 마음으로 고난을 대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형틀로서 이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승리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1. 고난과 불행

불교 철학에는 인생이 태어날 때 백팔번뇌를 지니고 태어난다 해서 그것 때문에 고생한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고난과 죽음은 죄 값으로 받는 보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행의 원인은 죄요, 그 죄의 보응으로 고통 속에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근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어린 시절이 잠깐이나마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는 날 동안은 부를 축적하여 불행을 피하려고 하고 또 향락을 도피처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무익한 것입니다.

 

2. 고난과 연단

고난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불가피한 고난이라면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5:7).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살펴보면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한 시대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불같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걷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세례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삼십 년을, 또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 년을 연단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이 숙명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영적인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그런 차이가 있을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보배이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어떠한 고난도 인내할 수 있고 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고난과 은혜

바울이 자기 몸의 찌르는 가시로 인해 하나님께 세 번 간구하였을 때 받은 응답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어떤 것이 은혜이며 어떤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모든 은사와 능력이 은혜로되 찌르는 가시도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러고 보면 고난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밀턴은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이 가장 많은 영화를 받을 것이며, 가장 위험한 곳을 지나온 사람이 큰 승리와 성공을 볼 것이다." 하였고,

도미트니야산은 "고난을 모르는 사람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 있을지라도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은혜를 힘입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십자가의 진리

로마에 가면 십자가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나무 형틀과 머리에 씌운 가시관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어떠한 형틀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므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미합중국을 독립시킨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의 기념관을 비롯하여 제퍼슨, 링컨 등 많은 위인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으로 작은 영토인데도 민주화가 제대로 되지 못해 항상 문제가 많은데 미국은 넓은 땅, 많은 종족이 함께 사는 나라인데도 사회 질서가 지켜지는 것은 역시 인류 앞에서 존중받는 정신적인 지도자가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14).

팔레스틴이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세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전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을 때도 진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까? 도리어 죄악이 가득한 멸망 받을 도성으로 심판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죄악이 없었던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범죄 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경전으로 삼았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하여 죄에 빠질 때 엄히 징계하여, 그 백성을 진리의 통로로 삼아 그리스도가 그 땅에서 탄생하게 되셨습니다.

마태복음 일 장 일 절에 보면 생명의 계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 곧 아브라함과 다윗 역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지만 그들이 영생의 계보에 오르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완전한 하나님으로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엘리사의 해골에 시신이 닿았을 때 죽었던 자가 살아났던 것같이 오늘 그리스도로 인해 죽은 자는 살아나고 어둠의 역사는 빛의 역사로 변화됩니다. 십자가는 이천 년 전 로마에서 사형수를 처형한 형틀입니다. 그 십자가 형틀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죄수가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죄인의 피 흘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도 로마에 가면 바울이 순교한 자리에 트리폰타네(단두대에서 머리가 굴러 떨어진 곳에 세 개의 우물이 솟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라 이름 한 단두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교한 바울로 인해 복음이 전 세계에 확산되었고 또 스데반의 순교가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했을지라도 교회의 상징은 돌무덤도, 단두대도 아닌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귀중합니다. 어떤 생물학자나 철인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자라는 풀을 보라"고 하였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 어떤 인생 교육이나 새로운 지식은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일 뿐이요 영생의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영생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면 몸소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받는 은혜는 더욱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5. 대속의 죽음

인류사에 골고다에서 구원받은 강도같이 복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보십시오. 한편 강도는 죽으면서도 원수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회방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한 편 강도는 달랐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39-41).

죄인이 죄인 취급을 받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수할 도리밖에 없지요. 그러나 의인이 죄인으로 취급을 받는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만일 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 양심에 호소하여 정당한 권리를 찾게 할 것입니다. 그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이 최고이고 돈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권력도 무너지고 돈도 죽음 앞에서는 무익하여도 정의는 승리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28:1).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생의 진리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받으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운명하실 때는 오른 편 강도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2-43).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한편 강도를 누가 의인의 반열에 세워 주었으며 영화로운 낙원에 이르게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는 죽을 자를 살려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아직도 육신의 소욕에 매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무관하게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도와 무관한 삶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복음 중에도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4-5).

여기에 무슨 수식어가 필요합니까? 오직 진실 그대로요 고귀한 희생의 진리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받은 구원이며 또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를 알았다면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에서 찾으십시오. 십자가 없는 영광은 마귀의 올무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대속의 은총을 십자가에서 찾았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바로 지고 영원히 승리하는 성도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주님을 따르는 길

16:21-28

 

오늘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뜻깊은 종려주일이요, 이번 주간은 그리스도 수난 주간입니다. 주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참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건성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구원은 속임수에 불과하고 십자가와 무관한 축복은 기복 신앙으로 전락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진수를 바로 깨닫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1.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그날부터 고난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결과는 달라집니다. 고난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숙명으로 여기는 것은 불행입니다. 이러한 불행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또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을 품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벌였는가 하면, 부활하신 주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1:6) 물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8-19).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2-23).

우리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원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 바로 내 속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논한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그것은 남을 돕는 손이 있고, 가난함에서 빠져나가는 발이 있고, 고통과 원하는 것을 보는 눈이 있고, 인간의 슬픔과 한숨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사랑은 바로 그런 모습이니라."

 

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죽게 마련이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죽음은 그 의미와 성격이 죄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는 어떠한 십자가입니까? 죄인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지금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도 십자가를 목에 걸고 등장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면 교회마다 세워진 십자가는 의미가 없지만, 주님께서 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물이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고발한 대로 그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목이 있었던가요? 도리어 이방인인 빌라도마저도,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주님은 변명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심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벙어리가 되십시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바보가 되십시오. 십자가의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길이라면 우리도 그 길 따라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3. 십자가의 길은 부활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진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억울하고 고통스런 죽음으로 영원한 침묵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인생을 의미 있게 해주시고, 욕된 죽음을 영광스럽게 해주시고, 없어질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죄 없이 성체에 못을 박히고 고난을 당하신 일로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받으신 고난과 죽음은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더 위대한 것은 부활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21)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제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영생에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병마와 질고, 또한 사업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와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신앙으로 주님을 따르느냐입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간구하여 그 눈이 밝아진 다음에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생의 길입니다. 이 진리와 생명의 은혜를 힘입기 원하십니까? 육체의 길에서 돌아서고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우리는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생할 양식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성도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즐겨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에 힘쓰는 모습을 볼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 또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구원하시고 기뻐하신 주님의 심정을 맛보게 됩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이처럼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시다. 또한 성도의 가정을 심방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가장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언행을 삼가 조심하십시오. 주님을 바로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십시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골고다로 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고,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주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주님을 따를 자격

16:24-28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성탄절과 함께 연중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객들이 가장 많은 계절입니다. 모두가 주님과 더 가까이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일 줄 압니다.

그리스도 수난 주간을 기하여 성도들은 오락을 금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금식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세속을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하나 금욕주의는 아닙니다. 고난 속에 기쁨이 있고 죽음 속에 부활이 있으며 십자가로 인해 영광이 이르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1.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성경에는 사거리에 나가서 강권하여 초청했을 때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고(22:1-14),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고 또 "개와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라"(7:6)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도 옥토를 제외한 길가와 돌짝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하나같이 결실이 없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21).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때로부터' 이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그가 복을 받게 된 시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이 신앙 고백으로 베드로가 받은 복을 보십시오.

1) 영감으로 받은 지각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2) 음부의 권세를 이길 능력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음부의 권세, 이는 사망 권세를 다스리는 권세로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3) 천국 열쇠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또 있을까요? 구하는 대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복이 올바른 신앙 고백으로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주님께서 신앙의 기초가 바로 놓일 그때 진리의 진수 곧 십자가의 도를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먹고 배부른 것이나 병 고치는 일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진리의 초보입니다. 우리는 초보에 머물지 말고 더 깊고 오묘한 진리의 진수를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2. 베드로의 항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베드로같이 마음이 급한 분들은 좋은 일에도 앞장을 서지만 좋지 않은 일에도 앞서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흥분된 상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영생의 길, 진리의 길은 십자가에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십자가가 없는 진리는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항변을 보십시오.

주여 그리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과 죽음을 금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또는 주여, 주님의 몸을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간곡한 소원이 담겨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일 곧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에서 이탈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책망

유의하십시오. 가룟 유다를 시험한 마귀가 더 고차원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를 통해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로 인해서 지게 된 주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렀으나, 베드로를 통한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정의 줄을 끊으십시오. 정욕의 유혹도 물리쳐야 합니다. 신앙의 전통이 아무리 귀하고, 민족의 복음화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도가 없는 복음이라면 세속화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네게 덮친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에 베드로의 언행은 완전히 사탄의 도구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사탄의 올무는 계속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우리 중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중에, 어떤 경우에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육신의 욕심에 끌려들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그러한 올무에 빠져있다면 주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님께서 올린 기도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12:27).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26:39).

침묵을 지키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전능하신 손길로 나를 건지사 이 잔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린 기도를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12:27-28).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마귀의 올무를 조심하십시오. 우리 모두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십자가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디응 소원합니다.

 

4. 주님을 따를 자격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카톡릭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세우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합니다. 기억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귀하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도'를 역행할 때는 사탄으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성당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둘째 계명을 깨뜨리고 우상의 소굴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고 우상을 만들려고 했을 때 옷을 찢으며 만들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오늘 달라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경건의 능력이 의식으로 전락되는지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잘못되어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고 종교의식으로 전락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회개하고 사유함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9).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이는 멍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 신분이나 공적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겸손하게 엎드려 제물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몸으로 산 제물을 삼아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5. 영원히 사는 길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이것이 복음의 진수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를 졌다고 하여 자기의 공적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인의 피는 누구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사람은 죽을 죄인이기에 주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로 옛사람이 죽고 거듭난 새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6-7).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가신 길 골고다로 가야합니다. 피 없이 못 가는 길,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희생을 하고야 만족하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함께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번 그리스도의 고난 주간을 기하여 그 진리의 깊이와 높이를 심도 있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 몸에도 지니도록 합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26).

옳습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우리의 목숨을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영생을 원하면서도 허무에 매인 노예를 십자가의 진리는 자유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절망은 소망으로, 죽음은 부활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지고 영광의 길 승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고난의 의미

119:67-72

 

이번 주간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무관한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무관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금식을 권고합니다. 금식은 한 주간을 계속하시든지 그렇지 못하면 일일 일식이라도 금식을 하고 금식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기준은 일식에 최저 액수를 정하시고 그 이상은 자유롭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헌금은 구제에 쓰일 것입니다.

 

1. 고난의 원인

오늘까지 수많은 사람이 고난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지만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고난의 원인을 전생의 업보"라 합니다. 이는 윤회설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호멧은 모두가 신의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이 전생의 업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불순종한 죄의 보응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초의 행복 곧 낙원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그 행복은 깨어졌고 결과로 인간에게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1) 여자가 받은 보응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그러고 보니 사람에게만 해산하는 고통이 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그 보응을 회피하면 어떻게 될까요? 고통이 될지라도 그 고통을 감수할 때 새 생명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진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2) 남자가 받은 보응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17).

아담이 핑계해도 죄에 대한 보응은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삶에 지쳐 고생하는 분들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줄 압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달파도 보응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지런해야 하고 여자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2. 의인이 받는 고난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하시고 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동일한 아담의 후예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죄의 보응으로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한 분들입니다. 상선벌악의 원칙에서 따진다면 그들은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한 자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도가 누릴 최고의 영광 곧 의의 면류관을 받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빛 가운데서 살다가 빛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으니 그 얼마나 복되고 귀한 생애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새 가족들을 심방 할 때 보니 하나님께서 보배들만 다 보내주신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모두가 주의 일에 한가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손님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내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집에 몸을 담은 한 가족이라면 이제 내 할 본분과 도리를 힘써 이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하십시오. 남이 받은 달란트와 비교할 것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의 고난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우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오십삼 장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사야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고난을 당하게 되는지 모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늘까지도 회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53:4-5).

여러분! 대속의 은혜를 믿으십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기도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22: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46; 15:34).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22:7-8).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15:29-30; 27:39,43; 23:3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22:15).

"내가 목마르다"(19:2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22:18).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15:24; 27:35; 23"34; 19:24).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22:16).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23:33).

중요한 것은 다윗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였지만 다윗이 받은 고난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는 여전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부전선 최전방에 있는 군부대를 위문하고 김일성이 파놓은 제4 땅굴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김일성 수령님이여 명령만 내리소서"

지금 평양 광장에서 외치는 그 소리는 한 때 히틀러나 일본의 동조 같은 폭군 앞에서 꼭두각시 노릇하던 청중들을 방불하게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명령을 내리므로 남침을 위한 땅굴을 파던 그들이 이제 또 어떤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김일성의 정체가 메시아라면 평양 거리에 붙어 있는 구호대로 세계 모든 인류가 "김일성 수령님의 은덕으로 행복합니다."라고 외쳐야 옳을 것입니다.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그리스도가 그처럼 낮아지셨으며 또 고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기 위해서요.

2)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큰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4. 십자가의 길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표시요 대속의 상징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헬라어로 테텔레스 타이, 영어로 It is finished) 하시고 눈을 감으신 주님, 주님은 만 인류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심으로 단번에 대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이 구원받을 길을 열어주셨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골고다의 길,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이것이 십자가의 도, 구원의 신비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은혜라면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 역시 은혜이므로 그 은혜를 힘입은 자는 십자가의 도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법률 담당 보좌관으로 있던 챨스 콜슨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일곱 달을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감옥이 범죄 해결에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라 더 큰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음을 알고 교도소 선교협의회를 설립하여 헌신하게 되어 천구백구십구 년 템플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갔지만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거기서 발견했다.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신음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최고의 사역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갔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힘입게 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너무도 어려워서 '이 방법이 아니고는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까?'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22:42). 그러나 범죄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닌 은혜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우리도 받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고난, 십자가의 길, 이것이 곧 복음의 진수요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제 내게 있어 십자가의 고난은 불행이 아닌 구원의 표상이요 고통이 아닌 영광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 아멘 -


고난의 복음

119:67-72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고생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보다 나은 보상이 보장되는 고생이라면 그 고생은 불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겪었던 가난의 고생, 자랄 때는 병들어서 죽음의 고비를 격게 되었던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저보다 다른 일행이 더 심해서 도리어 저는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식탁에 치킨과 하얀 깍두기가 있었습니다. 입맛 가리는 사람들을 의식하여 음식을 맛있게 먹노라고 치킨에 깍두기 두 개를 먹은 다음 옆자리에 계신 박요한 목사님께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음식 맛이 어떻느냐는 집사람의 질문에 달작지근해서 좋다는 말을 하고 세 번째 깍두기를 먹었을 때는 깍두기가 아닌 각설탕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박목사님의 말씀에 한바탕 웃음 지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가리지 않지요. 불행을 모르는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H.V 클라이스트는 "악이 선을 인식하게 하듯이 고통은 기쁨을 느끼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1. 고난을 위해서 태어난 인생

"사람은 고난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5:7).

우리는 욥이 당한 시험과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욥의 경건 생활이 하나님께 칭찬받은 것을 보면 그는 살아있는 성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처럼 참혹하게 전락되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욥이 죄 값으로 받은 환난이 아니기에 승리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24:16).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삶의 고통은 불명예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있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서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사에 빛을 남긴 위인들은 하나같이 역경과 고난의 길을 통해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숙명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고생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1) 수고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이 없지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그처럼 수고하는지 생각해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4:8).

부자는 부요한 일로 더 많은 노고가 따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므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중국에서 금기 사항으로 삼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분리하는 것입니다.

중국 역사를 보면 끊임없는 전쟁과 분리가 있었는데 모택동이 통일시켰다는 것은 대단한 일로서 중국인들은 존중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자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 그러한 정책을 쓰고 있는 줄 압니다.

2) 서구화입니다.

오늘의 중국은 서구 문명을 막을 수 없으므로 체제는 그대로 살리면서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평양에서 중국을 비판하는 실정입니다.

3) 교화입니다.

모택동은 "종교는 아편이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의 종교 교육을 금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에 입당하려면 당을 위한 충성심 외에는 어떠한 종교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 이념이 인민의 신앙이요, 모택동과 김일성은 인민의 교주입니다. 그러므로 수령은 죽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이 어느 때까지 이어질지 두고 볼 일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는 완벽할까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불의와 부패 죄악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인 지주가 무너지면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것일까요? 신본주의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살펴보면 여호수아 이후 사무엘 때까지(260)는 사사시대로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워서 통치하시고 사울 때 이르러서 왕을 세웠으나, 이방 나라와 다른 것이 있다면 헌법 대신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그 나라의 국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는 백성들이 국법을 잘 지킬 때 국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은혜와 복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법에 안주하기보다는 진리 안에서 영생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2)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

우리는 모두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기가 그처럼 힘든데도 이유는 있겠으나 하늘나라가 그리워서 세상을 빨리 떠났으면 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압니다. 어느 날 저의 집사람이 작은 아들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안 되요, 예수님이 지금 오시면 안 되요!"

"왜 안되? 속히 오시면 더 좋지"

"그래도 안되요, 내가 장가들고 나서 오셔야 되요!"

아직 세상을 모르는 마음에서라 생각할 수 있지요. ‘인생에게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문제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까? 시간을 이대로 멈추어 두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때도 있을 줄 압니다.

북경에 있는 자금성과 이화원, 십삼릉과 만리장성, 또 서안에 있는 진시 왕 릉은 중국 역사에서 왕과 노예는 있어도 백성은 없었던 때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비하면 신앙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고 땅속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했던 로마 카타콤의 성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무도 귀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모두가 허무로 돌아가는 삶이라면 천년을 살아도 실패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가피한 죽음이라면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으로 극복하십시오. 사망은 우리에게 정복될 것입니다.

 

2. 고난의 복음

우리가 받는 고난은 죄값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받은 고난은 나를 위한 고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으로 우리가 받는 고난은 이제 불행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받은 고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2:6-7).

주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지 않으시고 궁궐에서 탄생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이목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지 않으시고 베들레헴에서 자라났어도 유대인에게 그처럼 멸시받는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경건한 나다나엘도 빌립의 전도를 받았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들의 교만을 보십시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7:47-49).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그렇게 낮아지셨을까요? 겸손한 자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에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며 고생하는 김득만 성도가 부인 서숙규 집사와 함께 저를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는데 김득만 성도는 오랫동안 의식불명으로 죽음을 맛보고 다시 살아났으니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렸습니까? 주님께서 응답해주시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아직 건강 상태는 완전하지 못하나 달라진 것은 변화 받은 믿음입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는데 나는 무익한 자요 허물진 죄인으로서 주님께서 버리시면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17:3).

그렇게 값 비싼 대가를 지불한 다음에야 복종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형통할 때 겸손하고 충성합시다. 범사에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주님께서 왕궁에 계셨다면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들은 높은 인간 장벽으로 인해서 가까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주변에 높은 장벽이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주님을 만날 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찬송 324)

2) 대속의 죽음으로 받으신 고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셨습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십자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십자가를 지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7).

십자가의 진수를 맛보십시오. 은혜의 샘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가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망을 이기는 무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기 원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울 때 주님의 능력이 내게 임할 줄 믿습니다. 인생에게 가장 큰 불행은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 불행, 그 고통을 정복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요, 부활의 복음입니다.

죄가 있어 받는 고난이라면 부끄러울 뿐이나 주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크리라 하였습니다. 그림자 같은 인생, 허황된 무지개 꿈에서 깨어나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능력과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성찬 주일

 

주의 성찬에 임할 자세

고전11:23-34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

우리도 이를 행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복음 증언하는 일에 참예하고자 합니다. 먼저 성찬에 있어 삼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분쟁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11:18-20).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삼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21).

탐욕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의의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입교 문답을 하기 전에, 또한 학습을 받았으나 세례를 받지 않은 성도들이 성찬을 삼가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배신자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유다도 마지막 성찬에 참여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와는 무관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4:21).

주님의 살과 피를 욕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안 될 것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2).

 

2.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자는 주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므로 우리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올무에 빠뜨리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0:1-2).

회개가 없이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양의 문은 겸손한 자, 회개한 자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할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만이 대속의 은총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7-29).

 

3.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는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화체설과 칼빈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기념설과 영적 임재설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축사하고 나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요, 칼빈 개혁주의는 기념설과 영적 임재설로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함께하시는 성령의 응답을 믿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쳐도 혈루 근원이 말라버린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제비를 뽑아 통째로 그 옷을 소유하였어도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골고다 산상에서 피 흘리는 광경을 목도하고도 불신하고 희롱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주의 성찬에 임하여 대속의 은혜와 영생의 유업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4. 성찬과 참된 양식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흙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짐승과 달리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영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육체는 한정된 생명이지만 영혼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육신보다 영혼이 중요하고, 현세보다 내세가 중요하며, 물질보다 진리가 더욱 중요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이는 믿음으로 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55:2).

배부르게 못할 것이 무엇이며, 목마른 자에게 해갈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땅에 속한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이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인간에게는 은혜와 진리 외에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영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5. 주의 살과 피를 범하는 죄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야 할 시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30).

여기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약한 자: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의의 은혜를 힘입었을 때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고 믿음을 잃게 되면 마귀의 종으로 전락됩니다. 경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삼킬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죄의 올무에 걸려든 자입니다.

2) 병든 자: 모든 병이 다 하나님의 징계로 온다고 볼 수는 없으나 죄 값으로 오는 징계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5:14).

3) 잠자는 자: 이미 죽은 자입니다. 소망 가운데서 잠자는 자라면 알곡으로 천국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원한 어둠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31-32).

나를 위해 피 흘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분쟁과 탐욕을 버립시다. 회개하는 믿음으로 거룩한 성찬에 임하여 사유의 은혜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부활 주일

 

부활의 진리

고전15:35-44

 

초대 교회부터 부활의 문제는 많은 논쟁을 빚어 왔습니다. 이는 죽음이 비밀이요, 부활은 그 다음에 오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영리하여도 내세를 의식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의식합니다. 이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유대인 중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인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것같이 부활 세계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떠한 형태의 부활이냐가 중요합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1. 자연을 통해서 주는 교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5-38).

우리의 밥상에 없어서는 안 될 채소를 비롯한 모든 식물을 재배하는 것을 보면, 작은 씨앗을 심는데 거기서 싹이 나고 잎사귀가 퍼지면서 자랍니다. 자연의 신비를 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오묘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토양일지라도 어떤 종자를 심었느냐에 따라 각기 그 종류 따라 수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큰 은혜를 입고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영화롭게도 아니한다면 그것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늘에 속한 영광과 땅에 속한 영광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밝은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분야에 기술 혁명이 일어나는데 이십오 년 정도가 걸렸으나 지금은 하루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까?

지금 전 세계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의해 무역 개방을 하지 않으면 국제 교류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농산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 쇠고기 수입을 통제하고, 쌀 수입은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농촌을 살리는 길일까요?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 당당히 경쟁하여 살아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구백삼십여 회나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강직한 민족입니다.

신한국 건설의 기치와 함께 우리들의 앞길에도 새로운 희망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묵었던 때를 벗기고 병든 부분은 도려내고 새로운 정신과 각오로 모든 국민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뉴 코리아 창조를 위해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입니다. 기술 혁신에도 선두 주자가 되고 근면 성실에도 앞장설 때 우리의 앞길은 밝아질 줄 믿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 영광입니다. 아무리 생명 공학이 발달하여 우수한 품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여도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자 줄기에서 토마토가 열리게 할 수는 있어도 감자 줄기에서 성령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공 수정으로 석학들의 피를 이어받게 하는 구상을 하는가 하면 전쟁을 위해 신체적인 조건이 우수한 혈통을 대량 출산시키는 연구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천국도 인위적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늘의 영광과 땅의 영광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5-7).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40).

그것이 곧 진리의 세계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모두가 밝은 내일을 위해 산업전선에서 딸흘리고 수고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큰 업적을 이룰 수가 있다면 우리 모두 인류사에 공헌하는 일등 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과학 대국, 경제 대국, 정치 대국이 되는 것이 자랑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진리의 세계와는 근본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외국으로 나갈 필요가 있을지라도 은혜받기 위해서는 각국에서 우리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2).

 

3. 심고 거두는 진리

자연은 진실합니다. 인간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으나 자연의 질서와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순리대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파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수확기에 추수를 기대할 수 없지요. 또 적게 심은 자가 많이 거두기를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면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 같이 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자들이 잘 살아가고,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좁은 땅에서 부동산으로 부자 된 자들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은 정직한데 사람이 거짓됨으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셨다면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영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

우리는 어떤 것을 심고 무엇을 거두어야 할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 반드시 심어야 할 것은 심어야 복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곧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기뻐하여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영적인 농사에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진리를 팔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도 썩을 것을 위해 진리를 팔아먹는 자라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인생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6).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먹는 것 때문에 장자 권과 천상의 복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썩지 아니할 것을 수확하기 위해서 썩을 것을 심을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욕된 것을 심고 영광스러운 것을 거두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욕된 것은 어떤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욕된 것은 영혼에 죄가 되는 것이요,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욕된 행위를 청산하고 주의 진리에 순종합니다.

3)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을 거두어야 합니다.

약한 것은 부축해도 여전히 약한 것이요 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약하지만 영은 강합니다. 저는 앞으로 삼십 년 후에는 제 모습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게 생각이 되어 지금 삼십 년 후의 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거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보다 삼십 년을 앞서 사시는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제가 어릴 때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시골에서 하루만 힘든 일을 하시면 일주일씩 몸살을 해서 그 당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다만 어린 가슴에 내가 속히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힘드시지 않게 잘 모셔야 되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지금 저도 엄살을 떠는 것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히 승리하는 새 생명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44).

주님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인생의 죽음은 종착역이 될 수가 없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나의 영광이 될 줄을 믿으십시오. 이 영광의 대열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부활하신 주님

28:1-10

 

할렐루야! 오늘은 인류에게 가장 큰 소망과 승리를 안겨준 부활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정의가 불의를 물리치고, 억압받는 자가 해방을 맞게 되고, 억울하고 원통함을 입은 자들이 그 원한을 풀게 되고 죄와 사망에 매여 종살이하던 자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의 흘린 보혈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에 넉넉하고, 그의 생애는 멸망 받아 마땅한 인생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학설

어둠에 속한 자들이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마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와 진리의 영원한 승리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을 충동하여 주님을 못 박은 어둠의 권세가 이제는 불신자가 아닌 신학자들을 내세워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허위설

주님께서 허무하게 죽은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제자들이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로마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다른 곳에 옮겨 놓고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파수꾼이 돈을 받은 일도 있었고, 또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에게 돈을 받았고 누구의 조종을 받아 거짓말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장로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28:11-15).

2) 무덤 오인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흥분하여 다른 무덤을 찾아가 거기 예수님의 시체가 없음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시체가 없어졌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유의하십시오. 무덤을 찾아갔던 세 여인은 천사에게 들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분명하게 보고 또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3) 기절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상태로서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밤중에 의식이 회복되어 돌문을 열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벗겨놓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주님께서 운명하신 사실을 생생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23: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뿐만 아니라 군병들도 확인하였습니다.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19:32-35).

4) 환상설

제자들이 심히 피곤한 상태에서 예수가 죽을 분이 아니라는 강한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부활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육체를 떠난 주님께서 영적으로 제자들의 영혼과 만났을 때 제자들이 눈에 나타나므로 믿었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환상이라면 개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5-7).

5) 신비설

이는 부활에 관한 바벨론 신화가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제자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주님에게 적용하여 부활한 줄로 믿었다고 합니다. 또 제사장들이 말한 대로 파수꾼이 잠든 시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거짓말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리싱(G. Lessing)"모든 종교적 진리는 이성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성이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임마누엘 칸트(I. Kant)"예수의 부활은 이성에 매우 해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성론자들로서 인간이 이미 범죄 타락하여 에덴에서 축출되면서부터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영화롭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켈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단순히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으로만 알고 있으나 그 사건은 신앙과 신학적 견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므로 허황된 말만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부활의 성경적 근거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면서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육신을 입으시고 삼십삼 년이라는 생애를 보내시며 갈릴리와 유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여기서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과 부활의 종교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하던 도마의 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십시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나의 주님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7-2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일까요? 성령으로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이 진리가 들어가는 곳에는 깡패가 회개하여 성자가 되고 창기가 변하여 성녀가 되었습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나는 예수와 상관이 없노라"며 맹세코 부인하던 베드로를 통해 삼천 명, 오천명이 가슴 치며 회개한 역사를 보십시오. 그처럼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얼마나 유대교에 열렬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였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4-5).

그리스도의 생애가 아무리 값지고 보배로운 삶이요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없다면 불교나 유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주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도 복음이 말로만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신앙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리의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음부에 떨어진 홍포 입은 부자라면 세상에서 부자 되었던 것이 기쁨이 될 수가 없지요.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사실 기독교 이외에 다른 부활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부활을 기대하여 피라밋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부활하는 날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의 형태입니다. 만일 둘째 심판인 사망의 부활로 나온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이 엄연한 사실임과 같이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원한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장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3-19).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사망을 향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사망 권세 깨뜨리고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혜와 능력이 온 누리에 퍼지고 땅 끝까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부활의 진리

28:1-10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역사를 무시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고, 그렇다고 신비를 무시하면 복음은 윤리와 도덕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또 대속의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는 일어난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복음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면서 또한 역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진리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1. 빈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의 발길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1).

이때가 유월절 끝이라는 설과 안식일의 끝으로 보는 설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그날은 지금 우리가 지키는 주일 새벽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의 날에 모였고(20:7; 고전16:2; 1:10), 후에는 율법의 안식일을 대신하여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복음을 등지고 율법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율법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삼 년 동안 따르던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이 여인들은 골고다 산상까지 울며 따랐던 자들이요, 무덤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유향을 예비하여 이른 새벽에 찾아온 여인들입니다(23:55-56).

이처럼 주님을 섬긴 그들의 손길은 진리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오늘도 향기 풍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무덤 문이 터진 사건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2-3).

주의 사자가 나타날 때 땅은 진동하고 무덤 문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히 승리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담고 있는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류를 대속함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 사역의 완성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망을 향한 선전포고가 아니라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무덤 문을 터뜨린 천사를 보십시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3).

천사는 영물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에는 영의 눈이 밝아져 천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오늘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121:4).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121:8).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이 믿음으로 여호수아가 승리하였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을 보십시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4).

창과 칼은 천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 앞에서 발굴된 병마용은 진시황이 살았을 때 호위하던 군사들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거기는 전차병들을 비롯하여 창검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있는데 오랜 세월을 내려오는 동안 나무로 만든 전차와 쇠로 만든 창검은 녹슬어 없어지고 흙으로 만든 병사들만 있었습니다. 허무한 것이 인생이지요. 그런데도 자신을 모르고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2:2-4).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여인들에게 나타난 천사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20:11-13)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5-6).

동일한 천사이지만 무덤을 수직하던 군병들에게는 위엄과 권능으로 번개와 같이 나타나셨으나 주님을 사모하여 찾아간 여인들에게는 안내자로서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수호신으로 지켜주시고 앞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고, 교회에 큰 박해가 몰아닥치자 사도 외에 모든 성도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들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많은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들이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나타나서 한 말입니다.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8:26).

빌립이 즉시 내려갔더니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병거 위에서 성경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즉시 수례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자 거기서 은혜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제사장들이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군사로 지키게 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옥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12:7-9).

오늘도 주의 사자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4.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주님

천사는 영물입니다. 그러나 경배를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밧모섬에 유배 갔던 요한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입니다.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19:9-10).

천사는 영광 받을 대상이 아닐지라도 주님은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미워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십시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11:9) 하며 메시아께 돌릴 영광을 나사렛 예수께 돌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만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므나의 비유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19:12-14).

그리스도의 왕 됨을 기뻐하는 자들은 장사하여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고 또 다섯을 만들어 상급을 받았으나, 한 므나를 가져온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고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한 므나가 열이 되고 한 므나가 다섯으로 늘어났는데, 어떤 사람은 한 므나 그대로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은 주님께 영광돌리기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12:26).

부활하신 주님께서 원수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보여주신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8-10).

너무도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무서움이 있었다면 영적인 위엄 앞에서요, 큰 기쁨이 있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서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원수들은 떨었으나 성도들은 기쁨이 충만하였고, 또 그 소식을 전하는 발길은 극도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광을 오늘도 사랑하는 자에게 보여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초청 잔치에 자식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을 불러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하였더니 믿으려고 하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도 세례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딸이 보기에는 그렇게 믿어지기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를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는 기도문을 적어서 보여주었더니 자식의 마음이 숙연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이천 년 전에도 불신자의 눈에는 주님의 모습이 평범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보였지만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에 오신 구주 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10).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만난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서 나를 보리라"(10).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7).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복음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부활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그를 만난 증인들을 통해서 갈릴리에 전달되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받아 쓰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두 가지 부활

5:24-29

 

부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일어남), 또는 엥게르시스(일으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금수와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의 칠 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의 피라밋에서 발굴한 미이라를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에서 황금집을 겹겹이 만들어 그 속에 묻어두었으나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못하지요. 문제는 어떠한 모양으로 부활하느냐입니다.

세상이 괴로워 자살한 사람에게 그러한 삶을 되돌려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살소동이 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돈을 갚지 못해 죽은 자들에게는 빚쟁이들이 벌떼같이 달려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한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욕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형태도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가 아닌 행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1. 죽은 자가 살아난 부활의 사례

1) 구약

육신 적인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죽었던 아들(왕상17:17)과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32), 또한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시체가 되살아난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2) 신약

야이로의 딸(5:35-)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7:11-), 또 무덤에서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11:11-)는 주님께서 직접 살리셨고, 또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 거룩한 성에 들어간 일도 있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2-53)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도르가를 살렸고(9:36), 바울은 삼층루에서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를 살렸습니다(10:9-).

구약시대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믿음으로 살렸고, 예수님은 스스로, 사도들은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살렸습니다. 이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부활에 이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부활 신앙

구약의 대표적인 부활 신앙은 욥과 다윗, 또 에스겔서(37:1-10)에 있습니다. 욥은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의 안목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이상에는 마른 해골이 살아서 극히 큰 군대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37:1-10).

 

3. 생명의 부활과 선한 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12-13).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

자신을 위하여 살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어떻게 남을 위해 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다면 그 시간부터 세상은 각박해질 것입니다. 또한 나를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만 살아간다면 세상은 흉악한 마귀의 소굴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생애요, 그리스도의 과업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자로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멸망 받아 마땅할 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4. 심판의 부활과 악한 일

법정 용어로 '완전 범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밝히지 못한 범죄행위를 뜻합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분도 어느 날 갑자기 살인강도에게 피살되었는데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세상에는 완전 범죄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또 죽음은 도피처가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20:12-13).

무서운 일입니다. 악인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날이 심판의 날이 됩니다. 그때는 가슴 치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에 죄와는 상관없는 오직 주의 진리와 은혜만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광의 부활절, 무덤 문을 터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요(1:14),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요(딤전2:5),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아이십니다(2:14; 13:8).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보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풀지 못할 원통함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해결해주심을 믿으십시오.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날 두 가지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이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날 성도들에게 영광의 날, 승리의 날, 축복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영광된 삶

고전15:57-58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로서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길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생애도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로 말미암아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보혜사로 오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1. 십자가 정병으로서의 삶

걸프전에서 어려워진 나라가 패전국 이라크를 비롯하여 요르단과 PLO, 즉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입니다. 그들은 패전국이며 패전국과 손을 잡았던 나라들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패배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자와 손을 잡고 어둠으로 함께 빠져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패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는 자유도 인권도 모두 빼앗깁니다. 분명한 것은 퍠배자를 기념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일본에서 팠던 마스시로 대본영 지하땅굴을 최근에 공개했는데 그때 징용된 사람들은 하루에 이십 시간씩 중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것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짐승도 그렇게 혹사를 시킬 수 없지요. 그러한 불행은 몇몇 사람만이 당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 모두의 수모요, 불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슬픔을 당한 민족이요, 원한 맺힌 민족인데도 오늘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불행은 아랑곳없이 도리어 망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 코스트의 묘비명입니다.

이러한 참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또 다른 추방을 초래할 것이며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치욕을 보상받는 길이다.”

The foreetfuless leads to exile while the rememberance is a secret of redemption (BAAL SHEM TON)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고달프다 할지라도 이는 한정된 생애입니다. 제가 군에 때 일입니다. 사병으로 입대한 것이 한이 맺힐 정도로 후회가 되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니 기압을 주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기가 잡히지 않지요. 그러한 고된 훈련도 점점 익숙해가면서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얼마 지나니 훈련은 끝이 나고 또 몇 년을 지나니 제대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사 모든 일은 한정이 있으나 영적인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의 고통이 자살로 청산될까요? 아닙니다. 더 무서운 둘째 심판 불못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자유나 인권 같은 화려한 용어는 해당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와 같이 영벌 받아 마땅한 인생에게 복음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

이 부활의 복음이 영원히 승리하게 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견실한 믿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58).

여기서 '견실'은 신앙을 굳게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흔들리지 말며'는 유혹이나 박해에 대비하는 것이라(Vincent) 하겠습니다.

사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기도 우수해야 하겠으나 정신 무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점령군과 패잔병의 눈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승자는 위엄을 띄고 있으나 패자는 자비를 구하는 눈빛입니다. 이제 남북통일이 될 날도 멀지 않은 줄 압니다. 그날에는 누구든지 어느 곳이나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동포들의 생활을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투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동족에 대한 적개심을 더하기 위해서라면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독재자의 종말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왕 중의 왕이 신 그리스도의 정병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견실하여 흔들리지 마십시오. 뿌리 깊은 나무는 폭풍 한설이 몰아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유혹이 있습니까? 물리치십시오. 내가 받을 상급을 무엇에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너무 견디기가 어려워 지탱할 수가 없네요.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심각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능히 나를 도와주심을 믿으십시오.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며" 주님만 바라봅시다. 우리 모두 의의 면류관 받아 쓸 때까지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3. 주의 일에 힘쓰는 삶

요즘은 재벌 총수들이 책 쓰기 경쟁이나 하듯이 자서전을 내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러한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부자 되고픈 욕심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 것은 모두 그림자이지요. 청춘도 어느새 늙어가고, 돈도 죽음 앞에서는 무익함을 깨닫는 그 날에는 조용히 내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인생의 낭만을 죄악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때는 젊은이답게 인생을 즐기십시오. 청소년들은 청소년답게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패와 허무가 아닌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먹는 것은 육신을 위한 것이지요. 사업을 하여 돈을 모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먹고 힘을 얻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또 봉사와 헌신하는 생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영적인 일이 됩니다. 돈은 물질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는 성물로서 천국 곳간에 쌓이는 보물이 됩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육신으로 끝난다면 허무로 돌아가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천국에 쌓이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산다고 힘주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구원사역에 이바지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십자가를 제하면 모든 삶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시켜줍니다. 유의할 것은 우리의 선행에는 반드시 복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에서 복음을 제하면 구원과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지라도 복음으로라면 하늘나라 상급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헛되지 않은 수고의 대가는 영생이요 또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57-58). -아멘-


어찌하여 산 자를

24:1-12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죽음이요, 가장 큰 슬픔과 고통도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명예, 권세, 물질,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 같이 죽음에 항거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보응입니다(6:23).

이렇게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으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밧모섬에 유배갔던 요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7-18).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누가 가졌습니까? 주님이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1. 빈 무덤을 찾아간 발길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복음서 기자들이 각기 다른 측면에서 기록한 사실과 같이 부활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자연적 부활의 기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그런 것을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1).

물론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영접하기 위해 찾아간 발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삼 년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골고다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누구도 무덤을 터뜨리고 부활하셨으리라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무덤을 찾았고 손에는 향품이 예비 되었습니다.

하와이 국립묘지에는 사후에까지 차이를 둘 수가 없다고 하여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묘지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백의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용사들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족들이 가서 추모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른 새벽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찾아간 발길들을 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특심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를 줄 믿습니다.

 

2. 빈 무덤

빈 무덤은 기독교가 부활의 진리임을 알리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성지를 순례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빈 무덤을 보이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며 장사하던 자들과 같이 빈 무덤을 보고도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또 화려한 무덤이 사후에 받을 영광과 직결된다면 당연하다 하겠으나 잠시 후면 빈 무덤이 될 텐데 화려하게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최대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부활의 첫 증인은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였을 때 장로들이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거짓말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28:12-15).

인류 역사를 통해 잠든 시간에 일어난 일을 믿게 했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처음이요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상에 어떤 법정도 잠든 시간에 일어났다는 증언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거짓말이 만들어졌는데 그런 거짓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8:47).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짓을 진리로 믿는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공산 이념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도 우리나라는 분단의 비극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의 합법이 휴전선을 넘으면 불법이 되고, 북한에서의 합법이 여기서는 불법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구불변한 진리는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습니까?

체제 따라 바뀌고 이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오직 그것만이 영원한 진리임을 밝혀주는 역사적 증거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24:2-6).

그리스도의 탄생 사실도 천사가 전하였고, 부활 사건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진리를 알 만한 증거가 만물 속에 있으나 인간이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일깨워주셨습니다. 거짓으로 진리를 막으려는 시도도 문제이나 살아계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도 알지 못해서였던 것입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7-8).

그들뿐만 아니라 믿지 못하기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7-18).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5-27).

중요한 것은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신앙은 과연 어떠한지 진단해 보셔야겠습니다. 아직도 기독교를 사후의 구원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신앙이라면 2천 년 전에 빈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까지 마음속에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불안과 공포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

내세에 맞이할 주님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부활하셔서 나에게 나타나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만나므로 의심은 확신으로, 근심은 감격으로, 죽음은 영생으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돌아선 발걸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이제는 모두가 실의와 낙담이 아닌 확신과 증인의 발길로 변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20:18).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24:33-35).

모두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화제의 꽃을 피웠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같이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노라 하던 사람도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문제에 이제는 백 마디 변증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가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염려할 것 전혀 없음은 주님의 부활을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이요,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 의심할 것이 없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엠마오로 향하는 발길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빈 무덤이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을 전환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드리고 이 영원한 부활의 진리를 땅끝까지 증언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의 삼 년 공생애 기간 동안 누구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성도는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11:5).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한 오리쯤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4km가 거의 되는 거리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출입하실 때에 중간 기착지로 들리셨고 또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7-28).

선한 목자와 그 품에 있는 양의 모습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상상만 하여도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이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므로 다시 요단강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베다니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이 소식을 접한 주님께서는 너무도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1:3-4).

유의할 문제는 죽을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혹자는 나는 생명보험에 들었으니 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지만 생명을 보장해주는 보험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교통사고에 한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기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보험에 들지 못해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니지요.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욕을 돌리는 사람인지입니다. 복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애를 다 바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병든 나사로의 소식을 접하신 예수님이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죽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생각해서였거나 또 그곳에서 발생한 다른 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1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으나”(11:45).

그때 예수님이 머무신 갈릴리 지역은 베다니까지 약 오백 리 정도의 거리입니다. 오늘같이 교통이 편리한 시대라면 문제 될 일이 없겠으나 그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장사지낸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례를 치릅니다. '사후 청심환'이라는 말이 있지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이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에 받을 종말적인 구원을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1.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3-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옳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주님께서는 공생애 삼 년 동안 '장례식'을 주례한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믿음도 여전히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39-40).

과연 어떤 믿음이 칭찬을 받았는지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5-28).

하나님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크게 믿으십시오.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십시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의 눈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3-35).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기록이 세 번 있습니다(19:41, 5:7, 11;35). 주님의 눈물은 동정과 위로의 눈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상가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오신 발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불신으로 인한 통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려낼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분통할 일입니까?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9:21-23).

2) 사망 권세를 쥐고 있는 원수 마귀에 대한 분노의 눈물입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향해 눈물을 흘리신 주님은 오늘도 평화의 소식을 등지고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영혼을 바라보시고 통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38).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셨는데 그의 백성들이 믿지 않으니 얼마나 통분할 일입니까?

언젠가 석관동에 있는 유치원에 불이 나서 진화하고 현장에 들어갔을 때 어린 아이들이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창문을 긁으며 밖으로 나가려고 애쓰다가 질식되어 죽어간 모습을 보고 부모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도 죄 가운데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고 통분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13:46-48).

하나님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8:10)이라면 하나님께서 근심하는 일은 인간의 심판(6:6)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영접하므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돌을 옮겨 놓으라.

어떻게 생각하면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이 큰 문제이므로 돌을 옮기는 것은 대수롭잖게 넘기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소홀이 여기기 쉬운 문제가 큰일의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이것이 칭찬받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7:9).

그 믿음대로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11:39).

물론이지요. 사람의 뇌는 십 분만 산소공급이 중단되어도 부패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하실 때 그들은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4. 예수님의 기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1-42).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11:43) 하실 때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믿는 자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새 아침, 무덤 문이 터짐과 동시에 이제는 주님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부활의 진리

20:10-15

 

기독교의 교리에 있어서 도성인신과 함께 부활의 진리는 대들보를 이루는 중심 교리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진리는 교회 안과 밖에서 수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 중에도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있었고 교회 역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때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마침 히브리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중에 있는 감리교 출신의 어느 전도사님이 한시간 강의를 했는데, 예수님을 유대인 중에 종교 분파주의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말을 했습니다. 또 히브리 대학에서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도사님의 믿음은 어떤가 하는 질문에 확실한 답변이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독교의 기본교리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삼위 일체,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영광의 부활, 재림의 약속, 성령의 강림을 의심한다면 이는 신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변증론적으로 부활의 진리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2-20).

여기서 두 가지로 진리를 살펴보면 자연의 진리와 구원의 진리가 있습니다.

 

1. 자연의 진리

이는 자연과학을 의미합니다. 인류문명은 자연과학에 의해 발전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천 년대에는 마하 25의 여객기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미국까지 불과 삼십 분이면 갈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실로 꿈같은 일입니다.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새로운 발전의 영광을 안겨 주리라 생각합니다.

기억할 것은 자연을 개발하고 정복해나가는 데는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는 새로운 개발이나 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죄인을 대속하는 영생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2. 구원의 진리

1) 중생의 진리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창조된 것같이 자연의 진리는 영생의 진리에서 나온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의 근본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생의 진리 곧 복음에서 먼저 중생의 진리를 살펴보면 이는 우리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있는 동안 반드시 힘입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3:5-6).

이렇게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이면서 중생의 종교입니다. 이천 년 전에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을 믿고 또 대속의 공로를 믿을지라도 오늘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이는 에베소 교회같이 촛대가 옮겨진 교회요, 중생이 없다면 역시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 교회는 끊임없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받은 은혜는 날로 더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도 보혜사 성령이 이 자리에 또 우리들 속에 역사함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대로 믿는 신앙이요, 참 생명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2) 사역의 은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와서 보라"(1:38-39)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와서 보라"(1:46)

전도자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이후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불같은 시험이 닥치면 불같이 일어나고, 우는 사자같이 박해가 닥치면 사자같이 담대해졌던 것은 모두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일어난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오늘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이 담고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증언되었고, 고넬료 가정에도 성령이 충만하였고, 빌립보 옥중에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터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리요 참 생명이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능력을 힘입은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은혜가 새 생명의 은혜라면 사역의 은혜는 장성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듭나는 은혜와 함께 사역의 은혜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3) 부활의 진리

부활을 열망하는 인간의 심리는 어느 때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욕망이 있기 때문에 내세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태의 부활이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생명 부활과 사망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12:2).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20:11-15).

누가 죽음을 인생의 종말이라 하였습니까? 과연 죽음은 영원한 비밀이요, 영원한 침묵이요, 인생에게서 모두를 빼앗아가는 것만 죽음인 줄로만 알았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죽음을 잘못 인식하므로 지나치게 공포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또 죽음을 잘못 인식한 데서 생명까지 포기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 죽음을 택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떠한 종말을 고하느냐에 따라 부활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뿐인 생명을 두고 도박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심판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생명이 귀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영광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5-38).

누가 그들을 그렇게도 강하게 만들었습니까? 영광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린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 그리스도의 승리는 부활의 첫 열매이므로 이 진리를 믿는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동일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 인해 둘째 사망 곧 불못의 심판과 상관없이 영생의 복을 누릴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을 들어 산천을 보십시오. 자연이 부활의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시간을 초월하여 모두가 힘입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생을 원하면서도 어둠에 빠져가는 인생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영원한 부활의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 온 누리에 두루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24:13-35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이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

 

1.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

본문에 등장한 인물로는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는 요셉의 형제 글로바와 나다나엘로 보는 사람과, 또 요한복음 1925절에 나오는 글로바와 본서의 저자 누가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교훈을 듣고 보고 따르던 무리 중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19-24).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5-27).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고 깨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지순례 도중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오병이어 기념 교회와 산상 팔복교회에 갔을 때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0-31).

마치 꿈같은 일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그들에게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우리도 이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져서 영생의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2. 슬픈 기색을 띤 얼굴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믿고 기대했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변명 한마디 없으셨습니다.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27:40-42).

이렇게 희롱하는 무리들 앞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담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혹자는 "목사님, 예수 믿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안 믿었을 거예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10:36-39).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좌절과 낙담이 있습니까?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마음속에 어둠이 있습니까? 영광의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직 알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

사망권세 깨뜨리고 승리하신 주님 앞에서도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하는 말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운 자는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움을 받아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3. 인간적인 기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1).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메시아의 잘못된 기대입니다. 메시아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오셨고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부활하셨고, 다시 제자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2:11).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의 해방을 바랐으나(1:6),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몸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인해 만민의 죄를 대속하였으나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메시야의 나라가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22-24).

이렇게 천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들었고 또 빈 무덤을 보았으나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잘못된 종말론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 무용론을 주장하므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또 성탄절을 태양신 숭배하는 절기라 하여 반대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크리스마스를 지킬 사람이 있을까요?

또 칠 년 대환난 전에 성도의 휴거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때는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되리라는 말을 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자들은 지구 종말이 정확히 이천년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반드시 칠 년 대 환란을 빼면 천구백구십삼 년이 되지요. 거기에 착오된 서력기원 사 년을 제하면 천구백팔십구 년입니다. 그런 자들은 천구백구십일 년 전반기부터 은행이 도산되고 세계 경제가 공항에 빠져들어야 자기들의 예언이 맞다고 해석을 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장차 닥칠 환난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오순절 이후 은혜받은 성도들이 환난을 의식하여 신앙이 위축되었던가요? 더욱 왕성하였습니다. 바울이 찌르는 가시로 인해서도 감사드린 것은 하늘나라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요 그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소리를 주의하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무엇이 절도며 강도요, 양을 늑탈하는 이리인 줄 아십니까?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관문을 무시해버리고 휴거만을 주장하는 종말론을 조심해야 합니다. 돌무덤 속에서 죽어가는 스데반을 하나님께서 손이 짧아 건져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데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주님께서 오실지라도 충성된 청지기는 근심할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자기의 맡은 임무에 더욱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눈이 밝아진 제자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8-31).

이 은혜가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받고도 눈이 어두워 밖으로 나갔으나, 엠마오로 향하던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여기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발길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주님의 말씀은 불이요, 반석을 깨뜨리는 방망이와 같습니다.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3-35).

이 영광스러운 부활절 아침을 맞아 우리도 "과연 주님 부활하셨고 내게 이렇게 나타나셨다"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부활의 진리

고전15:1-8

 

미국 하버드대 법학 교수 시몬 그린 리프(Dr. Simon Green Leaf)"이 세상 어느 곳이든 편견이 없는 법정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가 제기될 때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판정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무덤 문을 터뜨리고 부활하신 영광의 날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또한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리스도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 믿는 자는 문제 될 것이 없으나 불신자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으므로 불가피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부활이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세계와 불신앙의 세계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주장하는 일반적인 진리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진리 역시 차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불순종하여 타락하였고 그로 인해 불행과 슬픔, 고통 속에서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고 있으나 과학은 그것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창조 사역과 도성 인신하신 역사와 그리스도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 곧 진리의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것을 과학적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것은 부적절한 논쟁이 될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또 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기록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 하였을 때 의심 많은 도마가 한 말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그런데 여드레가 지난 후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 하셨는데 도마에게는 왜 만져보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도마가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기 때문인 줄 압니다.

결국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고백 하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14:9).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힘입기 소원합니다.

 

2. 대속의 은총을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1:18).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무엇으로도 이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무리 의로운들 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희롱하는 무리들의 말과 같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고 죽어간 한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신 사건으로 대속의 진리는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진리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

타고난 혈통을 바꾸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더욱이 멸망 받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로운 반열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인위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므로 이것을 교정하는 것이 치세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라서 세상을 태평스럽게 만들지 못할까요? 문제는 인간 개조가 인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3).

오직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1-2).

 

4. 주의 말씀이 사실로 입증된 진리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말세에 미혹하는 영을 받아 메시아로 등장하여 "내가 죽었다가 삼 일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황천객이 되어버린 인간이 있었는가 하면, 버젓이 재림주로 등장하여 사역하다가 죽은 자들도 있습니다. 또 미혹하는 자들의 특징은 회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져드는 자들이 자기가 잘못된 줄 알면 돌이킬 수 있지요. 그러나 알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미혹하는 이리들을 경계하십시오.

얼마 전 광주에서 부녀자들의 집단 탈출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집단 자살 사건도 있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비진리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주의 진리 위에 바로 선 믿음인지 아닌지 다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거짓된 자들의 말에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8:31).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18:31-33).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것은 역사요,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은 예언입니다. 역사는 사가들이 기록할 수 있으나 예언은 영감이 없이는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기의 사후 문제를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헬라 왕 필립스는 신하에게 당부하기를 아침마다 냉수 한 잔을 가지고 들어와서 "필립스 왕이여 그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자에게 부활의 소식보다 더 값진 복음이 있을까요? 어느 재벌회사 회장은 위암으로 숨져가면서 음식 잘 먹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도 죽음 앞에서는 그렇게 무기력한 것이 인생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지고 돌아가셨으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우리는 마르다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11:27)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5. 재림의 약속을 보장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영생의 종교임을 밝히 증명해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요 유대인들이 정죄한 나사렛 이단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7-19).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좌절과 낙망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닥쳐도 두렵지 않음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서재에 말씀 서각이 있는데 이상돈 집사님이 친히 파서 기증한 것입니다. "목사님, 성구를 무엇으로 할까요?"하고 묻기에 계시록 2220절에 있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참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외에 어떤 종교에서 그와 같은 부활이 있었으며 또 재림의 약속이 있던가요?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가 승리하고 진리가 영원함을 증언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날, 우리 성도들의 앞길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가정 주일

 

의인의 가정

112:1-10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들어있는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사랑의 보금자리요, 복된 안식처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가정이 귀한 줄 알고 복되게 지켜야 합니다. 전도 학교 간증을 듣고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을 줄 압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불만이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내 아내가 전도만 한다면 환영하기가 어렵겠다는 것입니다.

각기 받은 달란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건강이 허락되지 않아서 고생하던 몸, 주님의 일에 힘쓰니 건강을 보장받고, 자녀를 잘 길러보려고 그처럼 노력하여도 심약하기만 하던 자식이 어머니와 떨어져도 튼튼하게 잘 자라고, 알뜰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살림이 주의 일 하면서 형통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내가 살고 내 가정이 구원받는 길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떤 가정이 의인일까요?

 

1.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고인이 되신 대구 서현교회 정기만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자녀들이 장가들어 자녀를 두고 사회적으로 상당한 직위에 있는데도 어머니가 부를 때는 항상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경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에 보배가 많을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누리는 믿음보다 값진 보배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은 믿음의 보배로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가정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부흥사로 큰일을 하신 김대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자식 낳으면 대학 보낼 생각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예배드리자는 말에 순응을 잘하는데 대학에 들어가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 나름이겠지요. 복 받은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급할 뿐 아니라 크게 즐거워합니다. 마리아가 주의 말씀 듣는 것을 얼마나 즐거워하였습니까?

다윗은 주의 말씀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함같이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목사에게 가장 큰 복이 있다면 말씀을 상고할 때요 또 증언할 때라 하겠습니다.

심슨(M.Simpson)의 말입니다. "설교자의 왕좌는 설교단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 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의 주위에는 불멸의 영혼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구세주께서 그의 곁에 계신다. 성령께서 회중들에게 역사하시고 천사들이 그의 광경을 보고 계신다.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막대한 책임인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또 목사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있다면 역시 설교입니다. 저는 날마다 주일에 증언할 말씀이 완성되기까지는 전신을 누르는 중압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 이번 주일은 무슨 말씀을 전하여야 하오리까? 영감의 말씀을 주옵소서. 진리를 담대하게 증언하도록 입술을 도구로 들어 쓰시옵소서.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양식을 주옵소서."하고 간구하지만 감동이 오지 않으면 새벽까지 날을 새워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강단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더욱 힘 있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1)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127:3-5).

세상에서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자녀입니다. 사실 복 받는 것이 인간의 마음대로 된다면 복을 못 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복은 땀 흘리고 수고하는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127:2).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의 등불이 당대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꺼지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이요 다윗에게 세우신 언약입니다. 자손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진리에 순응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시기를 소원합니다.

2) 부와 재물을 얻게 됩니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3)

이는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이 구비된 것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세계적인 재벌로 군림했던 정주영 회장이 출간한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책에 보면 빈대 철학이 있습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집에서 뛰쳐나와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농촌 출신이라 몸으로 하는 일은 견딜 수 있었지만 밤만 되면 달려드는 빈대는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머리를 써서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자는데 얼마동안은 조용하더니 잠시 후 밥상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또 물기에 빈대가 헤엄칠 줄 모르는 것을 알고 상다리 밑에 물그릇을 놓았더니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였는데 밤중이 되니 또 물어서 도대체 이 지독한 빈대가 어떻게 올라왔을까 하고 불을 켜서 보았더니 이제는 천장으로 올라가서 사람이 있는 밥상 위로 낙하 작전을 펼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 보잘것없는 빈대도 사람의 피를 빨기 위해 이처럼 교묘한 수단을 다 쓰는데 사람인 내가 빈대만큼도 못해서 되겠는가?' 결국 빈대 철학이 인생을 성공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떠한 부자이냐에 달린 것입니다. 선한 사업에 부자요, 남긴 공적이 후대에도 기념할 수 있는 부자라면 그 재물은 값진 것입니다. 물론 물욕은 삼가야지요. 또한 분수에 넘치도록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영화가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욕이 되는 재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욕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4).

그런 사람은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암흑이 짙을수록 빛은 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세상의 부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생의 결실로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5).

진리 위에 기초를 놓고 영생의 업적을 쌓는 가정, 이는 의인이 누릴 영원한 영광입니다. 없어질 것을 심고 영원한 것을 수확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욕된 것을 심고 영광된 것을 얻을 수 있는 복,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을 얻을 수 있는 복, 그것이 경건의 은혜입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9-10).

의인은 영원한 영광에 이르나 악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가정의 달, 한 가정도 빠짐없이 영육 간에 영원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주는 나의 방패시오

3:1-8

 

자식은 못나도 근심이요, 부모의 은혜를 망각해도 근심이 됩니다. 본문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므로 궁중에서 맨발로 쫓겨난 다윗의 시편입니다.

 

1. 아버지를 반역한 아들

자식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도 기막힌 일인데 압살롬은 아비를 죽이려고 반역하였습니다. 술을 먹고 방탕하는 것을 간섭한다고 기운 약한 부모를 구타하고 죽이는 폐륜아들이 있는가 하면 고부지간에 일어나는 불화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귀하게 길렀는데 부모 귀한 줄 모르고 학대하는 이 세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가정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식사할 때, 옷을 입을 때, 학교 등록금을 받을 때도 모두를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넘겨버린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유산은 더욱 중요합니다.

 

2. 죄의 보응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삼하 15:13).

다윗이 어느 때에 죄를 지었습니까? 사울에게 쫓길 때나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가 아니라 궁중에서 여유를 누릴 때였습니다. 은밀하게 저지른 죄일지라도 여호와의 불꽃 같은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12:10-12).

무서운 일입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육신의 정욕은 다스려야 합니다.

"바보의 천국은 현명한 자의 지옥이라"(T.Fulle)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중받을 가치가 무엇인지 분간하십시오. 범죄행위는 잠깐일지라도 따르는 보응은 너무도 가혹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할 일에 한가한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다윗의 간구

우리는 다윗을 통해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가장 큰 힘과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요, 또한 간구할 때 응답받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역경 속에서는 엎드려 간구하면서 형통할 때는 기도하지 않으니 무슨 일일까요? 마음의 허리띠를 풀지 마십시오. “한가한 두뇌는 마귀의 공작 창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꿀벌에게는 잡념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1)

그 원수는 이스라엘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자식이 반역하여 자기 목숨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2).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있을까요? 홍안 소년으로 골리앗을 거꾸러뜨렸을 때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며 백성들이 사울 왕의 열 배가 되는 영광을 돌렸으나 이제는 저주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다윗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3-5).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잠자리를 평온하게 하셨고 밝은 아침을 맞게 해주셨습니다. 불안과 번민에서 다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

이것이 기도하고 응답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역경은 새로운 디딤돌이 되고 환란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

우리도 다윗과 같이 기도하여 응답받고 구원의 은총을 힘입어 더 큰 영광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압살롬을 위한 다윗의 간청

다윗은 군사를 요압과 아비새 또 가드 사람 잇대에게 각각 1/3씩 맡기고 반역자들을 섬멸키 위해 출전하는 자리에서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 당부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역적인데 아버지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반역자를 물리쳐 당일에 이만 명을 죽였고 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더 많았다고 하였습니다(삼하18:7-8).

한편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치다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렸고, 뒤쫓던 요압이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이므로 그 날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승전 소식을 가져오는 신하에게 제일 먼저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묻고 영문을 모르는 구스 사람이 흥분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하18:32) 하자 왕은 즉시 문루로 올라가서 통곡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다윗이 왜 그처럼 슬퍼했을까요? 이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서보다 아들의 반역이 자기의 죄 값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 이완용의 무덤을 그의 자손이 파헤쳤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감람산 기슭에는 반역자 압살롬의 무덤이 그대로 있습니다.

 

5.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8).

짧은 기도이지만 시작과 끝은 많은 대조가 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는 구원받은 주의 백성에게 내리는 평화의 기도요, 축복의 기도입니다. 이제 다윗은 범죄하고 타락한 죄인이 아니라 사유의 은혜를 힘입은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이렇게도 귀중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3-34).

우리도 동일한 믿음으로 열국의 제사장 민족이 되어 이 복음 선포하는 은혜를 힙입기 기원합니다. - 아멘 -


복된 가정

6:1-4

 

가정의 달을 맞아 연중 한 달만 가정을 생각하고 그 외에는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데에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이 파괴되는 문제입니다. 흔히들 가정을 떠나 다른 곳에 행복의 무지개가 떠오를 줄 착각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가정을 이루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1)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그처럼 아름답게 창조하셨어도 하와를 만들기 전에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간혹 아들딸을 잘 키우는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집사님, 그렇게 예쁜 딸을 언제까지 데리고 사시렵니까?" 하면 "목사님, 시집을 보내야지요. 데리고 살기는 어떻게 살아요." 그러나 애지중지 기른 자식인데 어디로 보낸다고 생각하면 아쉽지요. 그런데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행복을 위해 부모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아들 둔 어머니는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네가 커서 장가들면 엄마를 더 사랑할거냐? 네 마누라를 더 사랑할거냐?" 어릴 때는 열이면 열 모든 아들이 엄마를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품에 안고 "그래야지 내 새끼야, 기특하기도 해라 그럼 그래야지"

속지 마십시오. 딸 가진 부모가 사위에게 양보해야 한다면 아들 둔 부모도 며느리에게 양보해야 하지요.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부모에게 순종하는 가정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

이 계명은 눈으로 보고 감상하라는 그림이 아닙니다. 마땅히 실천 해야 할 강령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부모에게 경제권이 있을 때는 순종하는 것같이 하다가 경제권이 없어지면 부모님의 권위를 무시해버리기가 일쑤입니다.

어떤 분은 '내 죽기 전에는 절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 굳게 다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재산을 상속해주는 그 순간부터 세대 차 운운하면서 순종은 고사하고 부모님의 이야기는 잔소리로 넘겨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순종'입니다. 그러나 불신 부모일지라도 마땅히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1:8-9).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일까요?

1)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내가 부모님의 연세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비만 오려고 하면 아프다고 하여 엄살 부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나이 들어가니 이해가 된다" 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십이 된 자식은 팔십 된 아버지의 몸을 씻어드리는데 이십 대 아들은 아비에게 그런 마음을 안 가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직 늙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 가는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서럽거늘 짐마저 질까보냐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정철)

2)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1:4).

이는 목자로서의 양들에 대한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모로서 과욕이 아니라면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복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못난 부모라고 원망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조물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복이 있다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받을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을 많이 알고 똑똑한 것 같아도 부모님의 깊은 경륜과 인생 경험에서 나온 철학을 배워야 합니다. 폐 일언하고 부모에게 근심 끼치는 자식보다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드리고 효도하는 자식이 복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존경, 순종, 위로, 부양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2-3).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하십시오.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으뜸이 되는 축복의 약속

십계명 전체가 첫째라는 견해

둘째 돌비에서 첫 번째 계명

유대인 아이들이 첫째로 배우는 계명입니다.

이 중에서 첫째, 곧 모든 계명 중에 으뜸이 되는 계명이 유력한 학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연세 높은 어른들을 모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옛말에 "논 서 마지기 유산보다 부모님 모시기가 더 어렵다"과 같이 부모님의 노후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가는데 부모님 아프다면 짜증부터 내지는 않았습니까?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길렀는데 자식들은 부모님이 병이들면 먼저 몸살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눈물짓게 한 일은 없었습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멍들게 하지 마십시오. 가지가 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호하는 것을 알았다면 내 생명의 뿌리를 복되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 공경이 내가 복 받는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진심으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부모님을 잘 공경하십시오. 혹시 "나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있다면 '이름 석자' 밖에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준 것이 무어냐"고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또는 내가 훌륭하여 자수성가 한 줄로 생각하고 자만하지는 않았습니까?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같이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H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왜정시대 건축업을 시작하여 큰돈을 벌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도 나가지 않고 목사님이 심방 오면 비서를 통해 없다고 되돌려 보내고 하니 아버지가 화가 나서, "이놈아 너는 망해서 차라리 연탄 리어카를 끌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기도하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렇게 잘되던 사업은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재산은 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세상 떠난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생전 효도하여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2. 복 받는 가정

자식들이 잘되고 땅에서 창대하게 되는 일은 또한 부모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은혜는 천 대까지 이르나 죄의 보응은 3,4대까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대 자손들이 잘되고 못되는 일에 부모로서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델이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4).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징계라면 나쁠 리가 없겠으나 가혹한 징계로 자녀를 낙담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유교 사상은 부모의 명령에 절대복종을 요구하고 있으나 성경은 그 모든 일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짐승도 모성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은 교양과 훈계로 하는 양육이 아니라 본능적인 모성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기본적인 교육과 전문적인 분야의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십시오. 이는 마치 나무가 자랄 때 농부가 붙들어 주는 대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어떤 기질을 타고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라는 과정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인격 형성이 달라집니다.

천구백팔십 년 "Harvard Business Review'지에 실린 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특별한 은사를 받지만 이러한 은사들은 개발하고 발휘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입니다. 성악가는 밤낮없이 악보에 맞추어 목소리를 다듬다 보니 성악가가 되고, 체육인은 또 남달리 체력단련에 힘쓰다 보니 올림픽에도 출전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술, 과학, 철학, 의학 모든 교육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교육으로 어떠한 분야에 전문적인 인격이 갖추어지고 또 그것을 직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적성과 취향이 맞아야 하고 또 사회에 대한 봉사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선발 기준에 성적만 우수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 정신을 중요시한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천구백구십일 년에 있었는데 전교에서 최고의 점수를 얻은 학생을 교수회에서 떨어뜨렸는데 이유는 봉사 정신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군은 왜 어려운 의학을 지망했지?"

", 저는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려고요."

"그렇다면 제군은 오늘 인류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못되므로 우리 학교에서도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의 인격입니다. 우리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범죄하지 말고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자녀교육이요, 또 값진 일이 있다면 역시 자녀 교육인 줄 압니다. 물론 인생 교육에 따르는 출혈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능력의 한계를 알았다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엎드려 기도하고 복된 가정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어린이 주일

 

여호와의 주신 기업

127:3-5

 

오월은 '계절의 여왕', '청소년의 달'입니다. 가을이 완숙의 계절로 수확의 기쁨을 안겨준다면 봄은 발육의 계절로 그윽한 향기 속에 새로운 희망을 살려줍니다. 장년들은 실리주의로 살지만, 아이들은 이상과 꿈으로 살아갑니다.

 

1. 하나님이 주신 기업

남자아이 선호사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딸아이는 혹시 걱정 들을 만한 성품이 있어도 "어차피 남의 집에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똑똑하면 "저 녀석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4-5).

다만 어떠한 자식을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복된 자녀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꽃이 있어 아름답다면 가정에는 아이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지순례 때 썼던 글입니다.

미소 띤 어린이

노인을 대하여 웃음 짓기 어렵다.

자칫 버릇없이 비칠 수 있기에

젊은이를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마음이 아닐 수 있으므로

천진한 아이들의 아름다운 미소

 

동심의 세계는 아름다워라

꽃으로 여기에 비길 수가 있으며

향기가 진하여 이보다 더하랴

어린이를 친구로 삼고 싶어라

영원히 동심에 머물러 서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0:14).

값진 보물일수록 관리를 잘해야 하고 수익성이 높을수록 정력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정마다 하나님의 주신 기업을 복되게 가꾸어서 주님의 영광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상급

상급이라면 공적을 따라오는 주는 것이지만 자식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식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 자식 관계는 본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를 선택하여 올 수 있습니까? 부모 역시 자식을 아들딸 가려서 낳을 수도, 지능 지수 역시 높고 낮게 조정할 수도 없습니다. 똑똑한 자식은 내가 낳은 자식이고 덜 생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상급인 줄 알고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백 세에 상급을 주어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얻게 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해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음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귀부인 두 사람이 오래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한 여인은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이었고, 한 여인은 상대적으로 극히 검소한 차림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화려한 여인은 입이 보석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각종 보석을 보이면서 "이건 정말 값진 건데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란다. 남편이 결혼 십 주년 기념일에 선물한 것이야 옛날 터키 귀족이 지닌 거란다." 하면서 친구에게 "얘 너도 상당한 보물을 모아 두었을 텐데 나에게 좀 보여 주렴" 하였습니다.

그때 한 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나도 너에게 보여줄 보물이 있단다."

그러면서 아들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즉시 방문이 열리고 준수하게 생긴 두 아들이 들어오더니,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이분께 인사드려라. 나와 오래전부터 절친한 친구인데 공작부인이시란다."

두 아들이 공손히 인사를 드린 후 나가자 조용히 하는 말이 "내게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이 두 아들이란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느 쪽이 더 귀한 보물인지 쉽게 가늠할 줄 압니다. 혹자는 "나라고 왜 자식을 자랑하고 싶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인물이 잘생겼나, 공부를 잘하나, 그렇다고 뚜렷한 특기가 있나, 매일 말썽만 부리고 속만 상하게 하는데"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의 자녀들은 보배로운 가치가 그렇게 없는지? 가치를 학교 성적으로 속단하지 말고 올바른 눈으로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될 줄 압니다.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십시오. 숨은 장점을 살려주십시오. 무한한 잠재력이 살아날 줄 믿습니다.

 

3. 양육의 문제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은 돈으로 가늠하나 인간의 성공은 돈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힘든 문제가 있다면 자식을 양육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는 단순히 의식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부모와 자식 관계라 할지라도 부모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자식을 대해야 합니다. 부모의 사회적인 위신과 체면을 생각해서 자식의 타고난 적성은 무시한 채 일방적인 강요로 무리를 빚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위치에서 자녀의 타고난 재능을 이해하고 적성에 맞는 교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은 환자를 대할 때 진단을 옳게 했을지라도 건강에 유의하고 기력을 살려가면서 병을 다스립니다. 왜냐하면 병에만 신경 써서 처방하면 생명을 잃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교훈인데도 자식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희망을 살려주지 못할 때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사학년생들이 이학년 아이에게 돈 백 원을 요구하다가 거절하자 몽둥이로 때려 매장시킨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음란 비디오는 판을 치고, 집을 뛰쳐나온 청소년들은 밤을 새우며 거리를 방황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십 년 전에 비해 오늘의 청소년 범죄율은 210%나 증가했으며 죄의 성격도 환각, 조직 폭력범으로 국가와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탈선하기는 쉬워도 회복은 어렵습니다. 자식들은 나의 분신임을 기억하고 넓은 사랑과 애정으로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가 되지 않고 복을 받는 자녀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마다 내려오는 가훈이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교훈입니다. 성군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더욱 값지게 가꾸어서 사무엘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귀한 자녀들로 양육하여 복을 받는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어버이 주일

 

은혜를 잊지 말라

6:1-4

 

인간으로 태어나서 제일 큰 기쁨은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일이요, 불행은 은혜를 망각하고 배역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은혜는 은혜로 생각하면서 큰 은혜는 망각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은혜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요,

2)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1. 조물주 하나님의 은혜

1) 인간으로 태어난 은혜를 감사드려야 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라일락 향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왜 한 그루의 라일락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탄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종달새의 소리를 즐겨하지만 내가 왜 한 마리의 종달새가 되어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음치로 태어났을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체적인 장애가 있을지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하고, 밝은 천지를 볼 수 없는 맹인 일지라도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며, 병약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보다 더 귀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이렇게 값진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불평과 불만 속에 살고 있다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주여!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2) 자연의 혜택을 누리게 하신 은혜

이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누리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비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환경에 대해서 많이 감사를 해야 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기아에 허덕이며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주도는 세계 십대 관광지에 들어있으며, 백두산 천지는 세계적인 자랑거리요, 금강산과 설악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의 조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름 그대로의 금수강산이요 하나님이 복 주신 동산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크게 감사드리면 더 큰 은혜를 힘입고 깊이 감사드리면 더 깊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60:15-16).

3) 구원의 은혜

이는 구원을 위해 자연을 초월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동일한 진리가 불신자에게는 걸림돌이요, 신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5-16).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일, 곧 그 이름을 믿는 믿음 밖에는 없으나(1:12),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2:8).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단 것이 무엇입니까? 놋 뱀입니다. 그것을 보는 자가 살아났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5-27).

 

2. 부모님의 은혜

엄히 분석하여 창조주는 한 분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두 원인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분이 육신의 부모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계셔서 세상에 태어났고 또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내게 있어 제 이 원인자요, 은혜를 베푼자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효의 도를 모든 계명의 으뜸으로 또 축복의 근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1-3).

이는 신구약을 막론하여 엄하게 강조하고 있는 계명으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부모에게 불효할 때 무서운 형벌과 저주를 명하고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21:15).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9).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7:16).

땅에서 복 받을 효의 도를 잊지 마십시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15:5-9).

 

3. 효의 방법

1)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복 받기를 소원하고 또 이를 기뻐합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3-4).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분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늙고 병들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구해오라고 명하셨는데 천사가 세상에서 가져온 것이 피어나는 꽃 어린 아이 웃음 병든 자식 곁에서 간호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껏 효도하십시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내가 철들어 부모님께 잘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가 될 것입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가이 없어라".

2) 부모님의 교훈을 순종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1:8-9).

부모는 여든이 되어도 예순이 된 자식의 귀가길을 걱정하십니다.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을 들을 때 형제는 시기하지만 기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평생에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부모님께 머리 숙여 공경해야 합니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4:1-5).

3) 부모님의 요구를 응해 드려야 합니다.

사람은 두 번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인과 아이의 특징은 자기를 위주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연약함으로 인해 취하는 보호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이해 못할 일이 있을지라도 부모님을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식이 부모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혈육의 자식이 없었으나 디모데의 헌신을 칭찬하였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22).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부모님의 주머니 사정도 보살펴드리십시오. '노인네가 돈은 무엇에 쓰려고 그럽니까?' 따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효자 가정에 또 효자가 태어나게 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어버이 주일,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는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엎드려 감사드리고 영광을 주님께 돌려 가정마다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네 부모를 공경하라

20:12

 

지난 오 월 일 일 실시한 효도 관광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연중행사로 이런 일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서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날입니다.

 

1. 낳은 은혜를 잊지 맙시다.

물론 자식을 두는 것은 부모의 기대에서요 자식의 소원으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부모는 자식을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것이 불효자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사람으로 대우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무엇이 배은이요 불효인지 아십니까? 탕자같이 부모의 사랑을 등지는 행위입니다. 또한 그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금쪽같이 길렀는데 자식은 부모 귀한 줄 모르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옳을까요?

어느 날인가 교통사고로 입원 중인 분을 문병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팔 남매나 두었으나 두 분만 사시다가 그런 변을 당하여 입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한 분을 교대로 간병하는 일로 자식들이 몸살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어른 간호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한 부모는 여덟 자식을 기르시고 또 자식들이 병들었을 때 그러지를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양육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낳은 정, 기른 정을 한 몸에 다 받고 있으면서 그 큰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불효입니다. 왜 사람들이 부모의 은혜는 당연시하면서 부모의 마음은 그렇게도 알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을 아끼는 사랑마저 뒤지고 싶은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요? 그 사랑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주변에는 병든 부모를 모시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는 청소년들이 있는가 하면 좋은 부모 밑에서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양육의 은혜를 잊어서 안 됩니다. 나의 나 됨이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요 아래로는 부모님의 은혜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효도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불효자에 대한 계율입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리 죽일지니라"(21:15).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21:17).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7:16).

"충신은 효자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뿌리를 존중할 줄 알고 아끼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과 연결됩니다. 기억할 일은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복이 되나 세상을 떠난 후에는 부모 제사가 우상 행위로 전락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실 때 효도하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6:20-21).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23:25).

링컨이 구세 때 그의 어머니 낸시가 눈을 감으면서 남긴 유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아들이 되어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4.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효도는 덕의 으뜸이요, 축복의 근원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1-3).

아직도 부모를 잘못 만나 자신이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복 받을 마음을 가지십시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에는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이제 편히 모셔보려고 하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납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서는 어지럽게 하지 않으며, 동료들끼리는 다투지를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하여 영육 간에 존귀하게 되는 복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5. 효도는 형제지간의 화목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부모님의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형제지간에 화목입니다. 자녀들이 부모 품에 있을 때는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이 한 솥의 밥을 먹고 자랐지만 장성한 후에는 독립하게 됩니다. 한편은 대견스럽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걱정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잘살고 복 받는 자식이 부모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부모의 마음은 고생하는 자식 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내가 죄가 있어 그런 줄로 생각하여 눈물 흘리는 부모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여유 있는 자식이 주는 용돈 들고 고생하는 자식을 찾아가는 부모의 그 마음을 자식들은 알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인데 잘나고 못 나고는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12:16).

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중동의 화약고를 보십시오. 아랍과 유대인 모두가 다 한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형제지간에 분쟁이 그처럼 큰 불행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2:17).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3:1-3).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감사드립시다. 또 연세 높으신 어른들을 내 부모 섬기듯 공경하십시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32). - 아멘 -


맥추 감사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136:1-26

 

본문 말씀은 시105, 107, 108, 135편과 함께 히브리어로 '호두' 곧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감사의 시입니다. 특히 내용에 있어서 135편과 유사점이 많으나 구성에 있어서 독특한 것은 모든 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동일한 후렴구가 쓰이고 있는 점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1)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를 묘사하고

2) 그 인자하심이 지금도 과거와 변함없이 영원하며

3) 그의 인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성도들의 위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1. 위대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이기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수명대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혜택을 동일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무관한 삶이라면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묻게 될 때 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3).

만일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이 없다면 이 땅에는 찬양과 감사로 주님께 돌리는 영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 곧 유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경배드릴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지구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도 인구 숫자에 필적할 정도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멸망 받을 죄악으로서 에덴에서 유혹한 사탄의 계략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술책은 뛰어납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를 죄의 올무에 걸려들게 합니다.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면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되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결국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2. 조물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4).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해와 달의 거리를 누가 측정하였으며, 태양의 연료는 누가 공급하고 있으며, 수많은 별들의 궤도는 누가 정리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누구나 달 표면의 형태를 기억할 줄 압니다. 지표가 온통 분화구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유성들의 충돌로 생겼다고 하니 만일 지구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구는 강보에 쌓인 아이를 보호하듯 공기층으로 보호하고 있으므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대기권에서 불타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오묘한 창조입니까?

우리가 어릴 때는 가을 하늘에 붉은 줄을 지으면서 사라져가는 유성들을 보고 별똥이 떨어진다고 신기하게 생각하였지요. 모두가 신묘막측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 우리는 엎드려 경배드려야 합니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5-9).

 

3.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찬양해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언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에 이집트에도 '꼽틱 교회'라는 기독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우리는 평범하게 읽을지라도 이집트인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 감정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물론 지금도 중동에는 성경과 코란을 두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중동을 배경으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 특별계시 곧 성경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장자를 죽이므로 이스라엘이 해방 받은 이 일은 민족감정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심판이요 또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무엇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9:19-23).

분명한 것은 어느 때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은 악을 멸하고 선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장자가 심판을 받았다면 이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이기에 앞서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기 위해 악을 버리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또한 진리에 속한 자라면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이 마땅합니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 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21).

오늘도 심판받을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4.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또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 주님께 감사드릴 것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중동지역에 사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통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 개입될 성격이 못되겠습니다마는 역사가 증언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때문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그들에게 내린 심판이 아브라함과 어떤 연관이 있었습니까? 도리어 그들이 지은 죄악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엄히 따지면 하나님의 공의 앞에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일반입니다. 여기는 어떤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을 힘입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3-24).

 

5.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8).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열 문둥이 중에 하나만 돌아와서 사례하는 것을 보시고,

"아홉은 어디갔느냐?"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도 감사할 줄 아는 자를 찾으십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영원히 죽어 마땅할 죄인을 주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마땅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저는 지난 목요일 자동차를 타고 어느 기도원을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내린 비로 대형사고가 나서 큰 차, 작은 차 할 것 없이 차들이 종이 구겨지듯 찌그러들었는가 하면, 언덕 밑으로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광경을 목도하고 '다 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일 텐데 그런 사고가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것은 큰 죄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26).

맥추 감사주일, 행여나 이렇게 중대한 절기를 연례 행사로 생각하여 의식에 그치는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물과 함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년 지키라 명하신 절기 중에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는 유월절과 부림절과 같이 구원받은 은혜를 대대로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맥추절과 수장절같이 매년마다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드리기 위한 절기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힘입고 사는 오늘의 은혜를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정성이 담긴 예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벨의 제물로 상달되는 제사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제사와 축복, 제사와 구원 모두가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기뻐하시든지 그 뜻에 어긋남이 없는 향기로운 제물로 영광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은혜와 감사

121:1-8

 

오늘은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한 성령으로 여러 가지 은사가 임하는 것같이, 각 사람에게 시간과 여건에 따라 하나님은 끊임없이 보호하시며 양육하시고 축복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의사가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TV에 중계되는 축구 경기를 보며 쉬고 있는데 응급환자가 생겼으니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차에 올라 급히 시동을 걸자 갑자기 차창 밖에 누군가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나타나서 "차를 후진시키지 말아요. 당장 내려서 뒤를 살펴봐요."하기에 내려서 차 뒤를 보니 두 살짜리 꼬마가 유모차에서 뒷 범퍼에 기댄 채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역사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선택

1) 선택의 은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모두가 선택의 은혜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까 반문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호적을 변경하여 입적하는 것인데 이는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의 허락이 없이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너는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을 성도라 부를 수 있느냐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37-40, 44).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든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다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를 일반 종교와 같이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리를 바로 알기 전에는 믿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나오는 발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 또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불림을 받아 나오는 성도들은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나를 택하여 자녀 삼으신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보호의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또 적자와 같이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라도 나 홀로가 아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차 대전 중 미군 병사 죠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B24 폭격기 편대의 일원으로 특수 임무를 띠고 중부 유럽지역으로 출격하게 되었는데 폭격 목표 지점에 거의 도착했을 때 누군가 자기 어깨를 힘 있게 잡고 "일어나서 비행기 뒤쪽으로 가봐" 하기에 뒤쪽으로 가는 순간 적군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자기 자리로 돌아와 보니 포탄이 자기가 앉아있던 좌석을 뚫고 나가 천정에 3인치나 되는 구멍이 뚫렸더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 버스를 이용하는 분들은 차를 타실 때마다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운전을 하시는 이덕우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주일 날 성도들을 가득 태우고 마지막 코스를 거쳐 육사 입구에 있는 철길 건널목에 이르렀을 때 기차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는데 간수가 건너가라는 수신호를 하여 지나가려고 차를 진행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차가 직진신호에 정지하여 앞을 막고 있어서 우리 차는 철길 중간에 걸린 채 갈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힘 있는 대로 액셀을 밟았는데 분명히 ""하고 소리가 나야할텐데 소리가 없어 눈을 떠보니 자가용도 동시에 출발을 했고, 그 시간에 기차는 쏜살같이 뒤를 스쳐 지나가 기적적으로 사고를 면했다고 합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3-4).

3)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은혜

주님께서 나눠주신 달란트를 묻어두지 마십시오. 또한 잘못 사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취하므로 즉시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12:23).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교만은 금물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드릴 때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내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성도의 본분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의 의도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본연의 임무를 저버릴 때 감사의 열매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잃으면 죄가 됩니다. 농부가 땀 흘리고 수고했는데 결실이 없으면 그 종자를 다시 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일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22-23)

맥추감사 주일,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삼대 절기 곧 유월절과 수장절과 함께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제사와 함께 약속된 축복입니다.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34:23-24).

우리 중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홍포 입은 부자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부자 되기가 싫어서 그럴까요? 이유가 있다면 그는 인생 농사에 실패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렇지 못한 자가 다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열매가 없는 것이라면 사모할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땅 위에서 누리는 천국 생활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이것이 곧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충성을 다짐하여 하늘나라 영광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 아멘 -


감사를 아는 백성

50:22-23

 

일반적으로 선진화된 나라와 후진국의 다른 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감사를 표할 줄 알고 모르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성의에도 "감사합니다" 또는 피차의 잘못인데도 먼저 "미안합니다"하고 용서를 구하는 태도는 보기도 아름답지요.

 

1. 범사에 감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혹시 나도 사업에 성공해서 큰돈을 벌면 감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분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재산이 늘어나는 것에 재미로

충분한 저축이 되면 주의 일을 하리라 하더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3-14).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사람은 주의 재림이 입박했으니 할 수 있는 대로 남의 돈도 많이 빌려서 쓰라는 말도 합니다. 들림을 받고 나면 갚지 않아도 되니까. 무서운 발상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5:23-26).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패자입니까? 홍포 입은 부자같이 자기만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허무에 매여 종살이하는 옛 생활은 청산하십시오. 밝은 세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어둠에 던지지 마십시오. 과연 감사할 일이 없어서 못할까요?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면 만물을 인해서도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고,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더 큰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줄을 믿습니다.

교도소에서 온 한 통의 편지입니다.

"목사님, 몹쓸 사람이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한 달 전에 은혜를 받고 '하늘 양식'이 읽고 싶어서 편지를 띄웁니다. 염치없는 요구일지라도 사정이 허락하시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형제에게"라는 답신과 함께 우송해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복 주심을 감사드리고 영적인 변화로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심을 감사드리시기 소원합니다.

 

2. 감사의 방법

주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감사할 때 심중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또 입술로 감사드리고 행동으로 감사하고 정성으로 감사할 때 풍성한 결실로 믿음의 부자가 될 줄 믿습니다. 바리새인들같이 외식적인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귀한 줄 아신다면 행함과 진실함으로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일반사람들은 성공하면 기뻐하고 실패하면 낙심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성공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불행입니다. 또 문제는 성공 다음에 찾아오는 마음의 공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목표가 있는 동안은 희망을 가지는데, 오른 후에는 회의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하고 돌아서면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음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좌절로 인한 실망, 성취로 인한 공허, 모두가 죄의 흑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과연 인생에게 소망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실패를 디딤돌로 만들어 영생을 선물로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은혜를 힘입었습니까? 열매를 맺읍시다. 주의할 것은 복 받을 일에는 마귀가 결실하지 못하도록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해보십시오. 모든 보화를 천국에 쌓은 다윗은 영원한 부자이지만 자기를 위해 땅에 두고 살았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모두가 헛되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3. 감사의 대상

1) 사람에게 입은 은혜는 사람에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식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면 큰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입었다면 마땅히 감사드리고, 정신적인 은혜를 입었다면 또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을 어떻게 보아야 옳을까요? 은혜를 모르는 세상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모 교수의 푸념입니다.

"목사님, 교수라는 직업이 더러운 것입니다. 바른 소리를 안 해도 욕을 먹고, 해도 욕을 먹으니 말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살벌한 세상, 남의 눈에 티만 보고 허물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의 향기로 세상을 밝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인생이라면 살아야 할 존재 가치를 잃게 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49:12).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49:20).

천국은 어떤 곳이며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은혜를 배역하고 감사를 모르는 자들이 형벌 받는 곳이라면 천국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영광 받으실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대서양을 건너간 청교도들은 처음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복을 받았습니다. 맥추감사절은 성경에서 지키라 명한 삼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23:14-17).

살아계신 주님 앞에 어떠한 감사로 영광을 돌려야 마땅할지 생각하시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예물로 영광돌리시기 기원합니다. - 아멘 -


하나님께 감사하라

1:9-12

 

바울의 서신중에서 바울이 전도하여 세우지 않은 교회에 보낸 편지는 로마서와 골로새서입니다. 그 두 서신에 나타난 공통점이 있다면 교리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주된 교리는 기독론입니다. 본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요(2:10), 만물의 창조주요, 주관자로서(1:16-17)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1:18).

골로새서를 구분한다면 일장과 이장은 그리스도의 신분을 논하는 교리 편이며, 삼 장과 사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을 논하는 실천 편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성도들의 소식을 접하고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기도를 빼지 않았습니다. 이는 믿음과 소망, 사랑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므로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6). 이렇게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은 복음 전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 사명 자의 기도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1:7-8).

바울은 골로새 지역이 에바브라를 통해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 전도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유혹하는 이단의 손길이 미칠 것을 바라보고 선한 목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9).

기도의 중요성에 있어서는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줄 압니다. 모세의 기도 팔이 올라갈 때 여호수아 군대가 승리하였고 기도 팔이 내려올 때 여호수아 군대가 패배한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기도 없이는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명자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모세의 기도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의 임무를 우리는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언할 때마다 말로만 아닌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불림 받은 사명자로서 주의 사역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기도의 내용

1)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위한 기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9).

사람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리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무지하면 자연을 개발하고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남미 브라질의 깊은 숲에서 살아가는 미개인들, 아메리카 인디언들, 아프리카 흑인들을 보면 과연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이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인 문제는 사치에 속할 것입니다. 다만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살다가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광릉내 수목원에 가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생활상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모습이 청소년들에게는 꿈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 그러한 환경에서 살았으니 우리에게는 옛날이 아닌 당대에 있었던 생활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일 초에 수억, 수십억의 회로를 왕래하는 컴퓨터 세상이요, 우주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보시대입니다. 한 마디로 과학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지혜와 지식, 총명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진리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기 위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2) 신앙의 성장과 결실을 위한 기도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성도의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일은 가지가 스스로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주의 품을 이탈하지 마십시오. 내게 있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무엇이든지 기회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K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너무나 어려워서 목사님도 견디다 못해 지방으로 사역지를 옮기셨는데 마침 그 교회 다니는 집사님이 식당을 처분해서 오천만 원을 헌금하여 30평이던 지하 예배실을 지상 120평으로 전세를 얻어 옮기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오천만 원이 아니라 5, 50억이 있어도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은 물질이라도 그것이 믿음으로 선용될 때는 생명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아의 어머니 성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인도 캘커타에 고아원을 짓기 위해 예배를 드릴 때에 한 기자로부터 받은 질문입니다.

"이 고아원을 짓기 위해 어느 정도 예산이 확보되었습니까?"

그때 그는 주머니에서 엽전 세 실링을 보여주면서 "이것 밖에는 없습니다" 하므로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하고 "이 엽전 세 실링이 내게 있을 때는 보잘 것이 없으나 주님이 들어 쓰실 때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는 믿음으로 큰일을 이룩할 수 있었고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직도 쭉정이 농사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경성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알곡 되어 천국 곡간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3) 능력을 힘입기 위한 기도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11).

"그 영광의 힘"

이는 모든 능력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견딤'이라는 헬라어는 '훼포모네' 즉 소망 중에 신앙을 지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로 극복해 나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맹인 '윌리암 문'은 이와 같이 적극적인 믿음으로 자기와 같은 맹인을 위해 점자를 발명하고 오백여 방언을 이용하여 수백만의 맹인에게 성경을 읽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는 맹인으로서 주께 받은 재능을 감사드립니다. 나로 하여금 그 재능을 투자하게 하사 주님께서 오실 때에 높은 이자까지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습니다.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마크로뒤미아' '원수를 갚지 않고 은혜를 배반하는 자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태도'입니다. 그런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큰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

4) 빛 가운데서 성도의 누릴 기업을 위한 기도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2).

죄인 된 우리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큰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로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바울은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심정으로 주님의 손길을 대신하여 택함 받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주님 앞에서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5) 감사의 열매를 맺기 위한 기도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를 찾는다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르시는 양이요, 그는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 되게 만드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연에까지도 아름다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쓰는 일상용어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감사'입니다. 감사같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은 없을 줄 압니다.

교회 사무실에는 권사님들이 들여놓은 동양란 화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구입할 때 "목사님,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시도록 하십시오." 해서 제가 같이 가서 구입을 했는데 화원 주인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란은 부부가 싸움하는 집에는 잘되지 않습니다. 또 시기 많은 딸에게 분가시켜도 안 됩니다. 매일 예쁘다고 말해주어야 잘 자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장사 수단으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해치면 자연은 우리를 해치고, 우리가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면 자연은 우리를 지켜줍니다. 이렇게 말을 못하는 자연도 보호하면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어찌 복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축복과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역경도 은혜요, 환난도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두 천사가 바구니를 하나씩 가지고 세상으로 내려왔는데 한 천사는 성도들이 간구하는 소원을 담기 위해서요, 다른 천사는 감사를 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원의 바구니는 즉시 차서 넘치는데 감사의 바구니는 세상을 다 돌아도 차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과연 진실한 복이 무엇일까요? 아직도 감사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은혜와 진리의 복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적인 것으로는 메울 수 없는 마음의 공백으로 말미암아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릴 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니 어떤 분은 외아들을 잃고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 아들이 죄를 모르고 주님 품에 안겼으니 감사하고,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니 그 은혜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6-17). - 아멘 -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

감사의 은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지각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어떤 아버지와 아들 목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예배를 드린 후 늦게 들어온 아들이 아버지께 감사의 간증을 했습니다. 사연인즉 "집으로 오는 길에 어떤 운전수가 차를 몰고 앞으로 달려오기에 그 차를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혔는데 차도 사람도 많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는 "얘야, 나도 감사한 일이 있다.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런 일은 평소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깨닫는 은혜입니다. 감사가 귀중함은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1. 마땅한 감사

감사를 모르는 신앙은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제사는 형식에 그칠 뿐이며, 감사가 없는 기도나 감사를 모르는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있는 이 약점 때문에 교만할 수 없게 하시는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자기 약점을 망각하고 행동하는 데서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는 지각이 중요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형통할 때는 찬양으로, 곤고할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신앙의 눈이 밝아지면 천지 만물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감사함으로 간구할 때 모든 것을 후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2. 감사의 방법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은혜를 욕으로 돌리는 것은 마귀의 일이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흉악범들을 보십시오. 어디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까? 도리어 마귀의 화신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게 흉악해져 갈까요? 향락과 사치, 타락된 물질문명 곧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밝은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가 있다면 그렇게 막가는 인생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한 마리의 강아지도 주인 앞에서는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넜던 청교도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농사지어 첫 열매로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그 다음에 자기 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진리 위에 터를 닦은 그들의 믿음은 미국을 세계에서 초강국으로 이루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을 알고 있습니다(7:36-47). 죄 많은 여인이요, 불행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된 손길은 지금도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우리 모두 말로만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작은 일에 감사하는 자

하나님은 촛불에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한 진리의 빛을 주십니다.”

충성된 청지기와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충성된 청지기는 달란트의 배분에 상관없이 지족과 감사로 주인의 뜻을 따라 이문을 남겼으나,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지족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죄만 짓는 인생이 들어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진정한 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입니다. 축복의 기준을 정함이 없는 재물에 두지 마십시오. 홍포 입은 부자의 물질이라면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작은 은혜에도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중 어느 때나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일이나 특별히 절기를 통해 열매 맺게 해주신 은혜를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4. 구체적으로 감사드립시다.

1) 죄를 사하여 주신 은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2-3).

삼층천에 올라갔던 바울이 자기를 가리켜,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3)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역시 자신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두 인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곧 두 의지가 함께 하므로 갈등을 빚고 있으나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영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어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저는 생활에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으나 마음의 공백을 메꿀 수가 없어서 말할 수 없이 방황했던 사람입니다." 옳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4:13).

사랑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을 다섯 남편이 채워주지 못했고 또 다른 남자를 정부로 두었으니 대단한 여인이지요. 그런데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그 시로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진리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4:29-30).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 자리에도 병마에 시달려 고생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병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높아질수록 연약해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질병에서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가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의사에게는 불치병이 있으나 주님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8:17).

그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3)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하루에도 교통사고를 비롯하여 인재, 천재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4-5).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내게 있어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따라 은혜를 베푸시고 각자의 사정을 따라 복을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5).

저는 어느 신혼 가정에 갔을 때 결혼식에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예쁘게 나왔는지 평소에 그렇게 예쁜 줄 몰랐는데 좋은 날,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으니 더 예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춘은 인생의 꽃입니다. 그러므로 소년들은 청년을 그리워하고, 노년은 추억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입니까?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쇠잔해가는 청춘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일도 없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소망 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뜻 깊은 추수감사 절기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기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추수감사 주일

 

아브람의 축복

12:1-4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구별 받은 성도입니다. 지금까지 주님 앞에서 받은 은혜를 감사드리며 살아왔습니다. 특별히 감사 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시간은 깊은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므로 영광을 주님께만 드림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유의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지만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은혜를 욕으로 바꾸는 인생에게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받은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아 함께 은혜 받고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1.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2-4).

그때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11:31).

그곳에서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생을 마쳤으며(11:32), 또 아브람은 그의 부친이 죽으매 떠났다고 하였습니다(7:4).

그리고 보면 아브람의 출생(11:26)과 하란을 떠난 후(12:4) 육십 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는데, 이 문제에 대해 루터는 "누군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자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하였고, 칼빈은 데라가 나이 많아 죽음을 얼마 앞두고 고향을 떠나 질병과 피로로 인하여 하란에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야 할 이유에 관해서는 갈대아 우르가 우상의 소굴이므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자도 있으나 그렇다고 목적지 가나안에는 우상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언약입니다. 애굽에서와 같이 갈대아 우르나 하란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아브람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길을 옮기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바로 우리에게도 보장된 영생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람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땅보다 더 귀한 천국의 언약이 보장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아브람에게 약속된 복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크다는 의미는 진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불림을 받았을 B.C 이천 년경에는 시날 땅에서 각 곳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이 이미 나라의 규모를 형성하고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기 위해 국사를 공부하고, 인류의 발자취를 알기 위해 세계 역사를 배웁니다. 어떠한 지식보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지금 있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으므로(3:15), 동일한 무대에서 한정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와 종교, 풍습을 접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상식이나 지식을 더하기 위함이 아닌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5:39).

왜 단군의 역사가 성경이 될 수 없을까요? 여기는 진리적인 기준 곧 하나님의 영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일은 아브람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면 동일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33:12).

2)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명예는 복을 받을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재 폭군의 수명이 짧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칼빈은 자기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슬기 있는 민족으로서 국제사회에서도 선진 대열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비리와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철퇴를 가할지라도 국가 기강에 금이 가서는 안 될 것이요, 국제 사회에서 민족 자존심이 실추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복음으로 통일될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2).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국을 통치할 세속의 권력을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진리의 빛 곧 구원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진리의 등대 되어 빛을 밝히는 안내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여기는 두 가지 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 하신 복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12:2).

그런데 아브람은 오실 메시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2) 복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2-3).

아브람은 이제 원수와 대적들로 인해 걱정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시고 수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또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뜻 깊은 추수감사 주일,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방황하는 우리들을 불러내시고 지극히 존귀한 반열에 세워주셨습니다. 크게 감사하십시오.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우리가 올리는 감사와 찬양의 제사가 주님께 상달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6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 네 번째가 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약속된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 하지 않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당연히 천국에는 의로운 자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1:27).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있는 동안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감사드릴 일은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 복음은 완전한 하늘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대속의 날을 기다리는 땅에 있는 성도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들같이 해야 합니다.

 

1. 주리고 목마른 자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동남아 곳곳에는 오늘도 기아선상에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학교에서 결식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과잉섭취로 성인병에 시달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가난하여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겠으나 지나친 것도 문제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라기는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입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한다면 모두가 조화를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

믿음이 부한 자라면 물질 문제를 초월할 수 있지요. 이는 믿음이 물질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차 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일본 수상 다나까 가꾸에이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수상 주은래에게 과거 침략에 대한 용서를 구했을 때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이렇게 사치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하였을 때 주님의 대답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11:4-6).

 

2. 의를 사모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육신의 공복 상태를 영적으로 받아들이면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아와 갈증은 강렬한 식욕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의에 대한 갈망을 이 기아와 갈증같이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29:13).

낮 예배만 출석하는 성도들은 유의하십시오. 그런 분들은 "목사님, 제가 주일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하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잘못이라서가 아니라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기를 소원해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4:8).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

영이 갈급한 사람들은 저녁에도, 새벽에도 교회를 찾게 되나 이미 배부른 사람이라면 주일을 못 지켜도 무방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의 안목으로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주의 은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임하십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얼마나 간구하였습니까? 흉악한 귀신 들린 자식을 위해 주님께 왔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5:26) 하였을 때 좌절하지 않고 더 매달렸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15:27). 배부른 자라면 부스러기는 오물통에 들어가지요. 그러나 갈급한 영혼에게는 부스러기의 은혜로도 구원받은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두가 배부른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6:12). 저는 뇌성마비로 장애자가 된 송명희 양의 시집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애 소녀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데 건강한 중에서도 감사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하십시오. 오염된 곳에서는 살 수 없기에 맑은 물과 깨끗한 환경 찾아 산으로 들로만 갈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패상이 더 심각함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 열 사람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리라"(18:32) 하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유황불로 심판하셨고,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5:1) 하셨는데,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오염되지 않은 진리의 샘을 찾기가 어려움은 무슨 이유일까요? 복음이 변질 되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세속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멍에를 벗어 버리십시오. 영원히 사는 길은 진리에 있음을 믿으시기 소원합니다.

 

3. 영원한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애타는 자, 거룩한 삶이 그리워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보장해주신 참된 기쁨과 구원의 약속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목마르고 굶주린 자처럼 사모하는 심령들을 위해 예비 된 양식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

세상에서 진리를 등지고 사는 자에게 참된 만족이 있을까요? 젊은 사람들은 이상적인 결혼으로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생활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진학의 꿈을 살리지 못해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명문 대학에 입학한 다음 비관 자살을 합니다.

저는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귀순 용사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한에는 어떠한 불만도 있을 수 없는 세상으로 생각했다면 낙심천만일 것입나더, 그렇다면 새로운 세상은 환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안식 세계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아멘 -


감사의 은혜

100:1-5

 

본문은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진리는 만물 중에도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유대인들이 감사의 예물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성도들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1. 범사에 감사할 은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평소에 그러한 욥의 경건을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셨는데 사탄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9-11).

사탄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의 말에도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신앙이 불같은 시련을 통하여 더 빛나고 있음을 알았다면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2.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는 요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경건 생활에 박해가 따를지라도 불행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은혜로 인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감사의 은혜를 빼앗고자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던진 올무를 보십시오. 불신과 불만을 싹트게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 올무에 걸려들어 멸망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때는 가나안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으나 원망하고 불평할 때는 전진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감사가 없는 삶은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같이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3).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는 어둠이 틈탈 수 없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성도는 모두가 은혜요 복이 될 줄 믿습니다.

 

3.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매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50:23).

땅 위에서 빛을 남긴 성도들의 공통점은 감사입니다. 세상에서 복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부자는 감사의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불행이 없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다가와도 근심할 것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부산 대학 김영길 교수가 그린 '예수님의 재림'이란 그림을 선물했는데 천군천사가 나팔을 불며 주님을 옹위하고, 휴거 받은 성도들과 땅 위에서 변화 받아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도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 기쁨을 말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영광의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과업이 있다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라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순종하므로 만물까지 저주 아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몰몬경에는, "아담이 범법하지 않았으면 에덴동산에 그대로 머물렀으리니 만물이 창조된 형상대로 남았을 것이요... 저들 시조는 또한 자녀를 갖지 못하였을 것임에 무지한 상태에 머물러 비참함을 알지 못함에 기쁨이 없고 죄를 알지 못함에 선을 또한 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아담이 타락한 것은 인간을 낳게 하려 함이요 인간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몰몬경 니파이서 2:22,23,24) 하였습니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1) 타락으로 생육과 번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 타락 전에는 인간이 무지한 상태로 불행과 기쁨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3) 죄를 알지 못하였을 때는 선을 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에게 생육과 번영의 복은 타락 전부터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선악과로 에덴에서의 타락이 없었다면 여인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이 없었을 것이요 지면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인한 행복을 운운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만족은 인간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2:23).

또한 선의 개념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다만 그를 즐거워하는데 있으므로 인간 타락으로 인해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4. 감사와 영광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84:4).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자, 하늘의 영광을 땅에서 누리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노아의 감사제

8:20-22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홍수가 시작되어 사십일 후에 온 지면이 물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7:11-12).

그때 열린 하늘의 창, 곧 윗물에 대한 해석을 보면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물 분자가 대류권 지상 10~18km 위에 광활한 수증기층을 구성하고 있으며 더 높이 성층권에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하였고, 윌터 비즐리(Walter Byzley)"이 수증기층은 200~300마일까지 펼쳐져 있었으며 그 수증기층은 지구 위에 있는 바닷물과 같은 밀도로 압축한다면 오 마일 두께의 물이 될 만한 양이다" 하였습니다.

그렇게 윗물과 아랫물 세계를 구분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라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노아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대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권념하시는 하나님

홍수 일주일 전 곧 이월 십일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칠월 십칠일까지 온 세상을 뒤덮은 물 위에서 표류하던 방주는 드디어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었고, 육지의 물이 걷히고 노아가 땅에 내린 것은 일 년 십칠일이 지난 노아 육백일 년 이월 이십칠 일이었습니다(8:14).

어느 한 지역에 내린 홍수가 아니요 천지가 뒤집혀 졌는데 방향키도, 닻줄도 없는 방주를 누가 안전하게 붙들어 주었을까요?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 또 양식을 준비하였어도 그 많은 동물과 함께 일 년이 지나도록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서울 대공원에 알아보았더니 동물 가족이 398종에 4,000두인데 일 년에 사료가 십사억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방주 안에는 더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8:1).

이는 노아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온 천지가 물로 덮인 가운데서도 노아를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모든 것을 담당해주실 줄 믿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2. 노아의 제사

일 년이 지난 후 첫발을 땅에 내려놓은 노아는 황폐된 세상을 볼 때 말할 수 없이 착잡하였을 것입니다. 반겨줄 친지도 이웃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노아는 먼저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아 제사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21).

땅이 받는 축복과 저주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린 노아의 제사를 보십시오.

1) 믿음으로 올렸고(11:7),

2) 감사의 정성으로 올렸습니다(50:23).

상달되는 제사는 무엇보다 귀중합니다. 형식으로 드리는 제사, 정성이 결여 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지만(1:13-14)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헌금할 기회를 주었으나 믿음이 약해서 외면하고 말았는데 그날 밤 꿈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나에게 무엇을 간구한 일이 있었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 저는 많이 간구했고 또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너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할 때 또 너의 건강과 사업의 번영과 가정의 화평과 앞길의 형통을 위해 구할 때 응답받았는가?"

", 저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셨고 어려울 때마다 저의 목숨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방침을 바꿔야 되겠네. 다시는 나에게 아무것도 간구하지 않기로 하고 나도 너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겠네" 하고 떠나시는 주님을 보고 그 후에 크게 회개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을 섰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하셨을 때 순종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21).

신앙은 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아와 같이 믿음으로 상달되는 제사를 드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날 때부터 악한 인생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21).

타락한 인간은 홍수 이전이나 이후나 근본이 달라진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깨달은 진리요(51:5), 바울이 깨달은 진리입니다(7:17).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하셨습니다.

 

4. 무지개 언약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1-22).

이것이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 세운 무지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해와 달을 두고 언약을 세우지 않으시고 무지개를 통해 세우셨으므로 자연의 조화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하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셨으나 마지막 때에는 불로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로 심판을 내리시는 지구 종말에는 무지개 언약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불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약 곧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야 합니다. 노아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신 것같이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올리는 감사의 제사를 받으시고 지난 죄 사함을 받고 중생의 은총을 힘입기 소원합니다. - 아멘 -


여호와께 감사하라

136:1-26

 

저물어가는 가을 하늘, 우리는 만 가지 은혜와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로 영광 돌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에 비해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그리고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맥추 감사절과 추수 감사절이 있습니다. 이번 감사절을 기해 "감사한 은혜를 깨닫는 대로 기록해 보라"고 말씀드렸는데, 감사할 일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시주하러 온 중이 염불을 한 후 "어머니가 교회 나가면 자식들의 앞길이 막힙니다"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서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감사는 많을수록 더 큰 복이 됩니다. 천국은 영원토록 감사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므로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는 사자굴과 풀무 불도 굴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박해 속에서도 약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그는 아이 같이 흥분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16:34-36).

 

2.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국제법상 특허권을 얻으면 오 년 혹은 그 이상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개발품이 나오면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개발했다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와는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38:4-6).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4-9).

 

3. 죄에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 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24).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의 조상들에게 내리신 은혜를 감사드린 시입니다. 이제 이 거울 앞에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비춰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떠한 감사로 영광 돌려야 마땅한지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시기 소원합니다.

 

4. 온갖 좋은 것으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와이에는 '하가이 인스티튜트'라는 제삼 세계 목회자들 양성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죤 하가이 박사가 이십오 세에 죽은 정신박약아 아들을 기념하여 설립한 것이라 합니다. 감사하는 믿음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공해줍니다. 바울은 일생 동안 찌르는 가시를 몸에 지니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으나 그에게는 항상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왜 감사와 기쁨이 없을까요? 주의 은혜를 깨닫는 지각이 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34:8-10).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26). - 아멘 -


성탄절

 

예루살렘의 소동

2:1-12

 

영광의 성탄을 맞이하여 성도들의 가정마다 풍성한 은혜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크리스 마스는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건으로 그 때 예루살렘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는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수난을 당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13:8).

 

1. 그리스도의 탄생 때 나타난 현상

1) 하늘에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2:14).

이 노래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그리스도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전할 때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이 찬양한 노래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도성 인신을 '예수의 비하" 라 합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축출될 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는데 도성 인신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물러나는 국무위원들에게 "축하합니다"하고 화환을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축하 인사는 영전할 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그로 인해 죄인이 구원받을 길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2) 땅에서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이 평화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누리는 평화가 아닙니다. 지금 세계는 이념 갈등이 무너지면서 종교 갈등과 종족 갈등을 일으켜 피 흘리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한 가난으로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때 나눔 선교회를 통해 구제의 열매를 맺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봉사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복음이 없는 구제라면 내 몸을 불사르는 데 내 준다할지라도 무익 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쓰실 때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참된 평화가 누구에게 미치는지 보십시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에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으로 구원받는 성도들에게 이 평화가 넘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은 구원의 복음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등진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에는 이천 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참된 평화와 구원의 은총을 누리시기 소원합니다.

 

2. 예루살렘의 소동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1-3).

이렇게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으로 인해 조용하던 예루살렘은 비상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성경을 상고하며 메시아를 대망하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헤롯에게 조력하면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4-6).

이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5:2).

이 말씀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의 도구로 전락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동방 박사들의 경배

동방의 박사들은 그 당시 페르시아 또는 아라비아로부터 온 사람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어진 하늘의 징조가 동방에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또 그들의 경건 생활이 어떠했는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동방의 의인 욥의 경건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줄 압니다.

육 세기 페르시아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다른 교회는 파괴하면서 예수의 탄생 교회는 그대로 두었는데 거기는 동방 박사들의 모자이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9).

그 빛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박사들을 인도한 그 빛은 아기 예수 탄생하신 곳에 이르자 멈추었습니다.

앞길이 막막하여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오늘도 진리의 빛은 주님 계신 곳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구주 성탄은 병든 자에게도 소망을 주십니다. 가난한 자도 감사하십시오.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

이 기쁨은 아기 예수를 만난 기쁨이요, 그 앞에 엎드려 경배드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 몰약을 드려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되고 귀중한 은혜입니까? 오늘 우리도 진리의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 귀중한 예물로 경배드리시기 소원합니다.

 

4. 다른 길로 돌아가라

귀신은 영물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비밀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헤롯을 찾아간 일로 그곳에 소동이 일어났으나 돌아갈 때는 다른 길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7-8).

이것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헤롯의 궤략이요, 또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이렇게 헤롯이 박사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12).

헤롯의 속임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거룩한 성탄, 이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께 경배하십시오.

별의 징조는 오늘도 우리를 아기 예수 계신 곳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이 뜻 깊은 성탄절에 보배 합을 열어 주님께 예물 드리고 영광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기쁨의 좋은 소식

2:8-14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그리스도 탄생하신 날을 십이월 이십오 일이 아닌 일월 육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담이 창조 육 일에 지음을 받았으므로 둘째 아담도 당연히 일월 육 일에 탄생하였으리라는 주장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불교에 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 후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 구주 탄생이 분명한 이상 다른 날을 고집부릴 이유나 태양신과 같이 간주하여 우상 운운할 필요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1. 구주 성탄과 역사의 분기점

과거 일본에서 천황을 신으로 숭배했을 때는 일본에서만 쓰는 천황 년대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어떻습니까?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 서력기원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 기원은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2).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하늘의 별이 동방에 있는 박사들에게, 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BCAD라는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어둠의 연속일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어떠한 존재 가치나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력기원은 생명과 구원의 분깃 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개개인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므두셀라같이 수를 누리는데 있을까요? 그 역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데 있을까요? 무지개의 행복일 뿐입니다. 각자 개인의 생애에서도 그리스도가 임할 때 생명과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는 어둠이 빛으로, 사망이 생명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2.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낮아지심

사람이 살면서 초상이 나면 슬퍼하지만 새 생명을 얻으면 기뻐합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밤에도 그 기쁨은 충만하였습니다. 주님의 탄생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주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2:13-14).

어느 날 인도 티벳 고원에서 도를 닦는 중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여덟 살밖에 안 되는 자가 고승들을 향해 "이래라 저래라"하고 말을 놓는데 고승들은 그 앞에서 합장을 하고 공손하게 경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인즉 여덟 살짜리는 22번째 인도 환생하여 본래 나이는 이천 수가 넘는 다고 했습니다.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데 이유는 사람이 죽은 다음 미물의 곤충으로도 다시 올 수 있으니 미물이 혹시 조상일지 모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거미줄에 걸려드는 벌이나 나비, 하루살이를 위해서도 제사를 지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모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살생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물 세계는 약육강식으로 서로 잡아먹고 또 먹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회설을 배격합니다.

다만 전생을 가진 분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근본이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는 기쁨이요, 땅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이는 저주 아래 있는 인간에게 받을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3.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2:10-11).

구세주의 탄생은 마지막 복음이면서 또 영원한 복음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여기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인 동양인이나 서양인을 가릴 것이 없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4:15-16).

내 마음에 흑암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망의 그늘이 내게 있습니까? 구원이 기쁨을 선물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불우한 사람들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2:11-12).

저는 매년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잊을 수 없는 한 가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때는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집이 삼남 일여 네 자녀를 두고 이혼을 했는데 그로 인해 여자는 한강으로 가서 자살을 기도하고, 또 자식은 자식대로 음독자살을 기도하고, 외동딸은 외딴 섬으로 죽으러 가서 남의 집 머슴과 살고 있으니 그 불행이 얼마나 더했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개척하는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가정이 천국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오늘 구주 성탄을 맞이하여 엎드려 경배드리는 성도들 위에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평화의 소식

2:8-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14).

이천 년 전 베들레헴 근교 양치는 목장의 밤하늘에서 메아리친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1. 하나님의 비하

구주 탄생은 말씀이 곧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일로,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비하'라 하여 일단 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성탄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멸망 받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 성자를 희생시킨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2.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로봇 인간이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선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5:13).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또 순종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한마디로 사람이 신을 찾으려는 노력에 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은혜의 종교입니다. 이 생명과 구원의 결정적인 사건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중동에서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막을 헤매다가 길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는 "사람은 그런 곳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길을 잃었구나."

석가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그런 고생을 하는고."

마호멧 "! 모든 것이 알라신의 뜻이외다."

힌두는 "용기를 잃지 마시오, 죽은 다음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테니."

예수님은 "형제여 손을 내밀어라"하시며 붙들어 구원해주셨다고 합니다.

 

3. 땅에서는 평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기억하십시오. 구주 성탄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넉넉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은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8-9).

이제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성탄을 맞아 주님께 경배드리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참 신앙은 행함과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기 합당한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화답하는 영광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이 평화의 소식은 만민에게 전해야 할 복음이라는 것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온 천하에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성탄의 참된 의미

2:8-14

 

며칠 전 어느 관광회사에서 성탄카드를 보냈는데 하필 미륵보살이 찍힌 그림이었습니다. 고마운 마음보다는 왜 그런 그림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크리스마스와 축하 행사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교회보다 상가나 백화점, 호텔이 더 화려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 같으나 목적은 대목장을 보겠다는 계산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판문점을 다녀왔는데, 출발할 때는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보니 군인들의 표정이 밝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동안 TV를 통해 판문점을 많이 보았습니다마는 직접 현장을 보는 것이 의미 깊게 느껴졌습니다. 또 군사 정전 회담장 건물 안에 들어가서 이북 깃발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습니다. 철조망도, 높은 담벽도 아닌 한 건물의 내부가 절반은 북한이요, 절반은 남한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불행입니다. 누구를 위해 분계선이 있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까? 또 그 대가는 어디에서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해 가는데 형제지간에는 그토록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탄절에 남쪽에는 크리스마스 츄리와 캐롤이 울려 퍼지는데 북쪽에는 김일성 찬가만을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신은 김일성이니까 북한에서는 최대의 명절이 김일성의 생일입니다.

그나마도 감사한 일은 평양에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LA 한인교회 박요한 목사의 북한 방문기를 보면 지난 추수감사 주일에 평양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축도를 했는데 담임 교역자의 설교도 추수 감사절의 유래가 대서양을 건너간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고 하면서 열 문둥이 중 돌아온 사마리아 문둥이 사건을 본문으로 한 복음적인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얼어붙은 땅에도 봄은 오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일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아무리 좋은 체제일지라도 감사를 모르면 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인신매매에서 남창 제도까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속에 물들 때 경건은 의식에 그치는 것입니다. 과연 구주 성탄이 있기에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까? 소망을 잃은 군중들의 발길은 무겁기만 하고,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어 점점 더 흉악해져만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천사들의 노래와 같이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크리스마스와 구원 사역

크리스마스는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면서도 인류 개개인의 구원을 현실적으로 이룩하신 진리적인 사건입니다. 진정한 성탄은 기념행사나 불우 이웃에게 옅은 동정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성탄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던 아기 예수님으로만 믿지 말고 내 속에 탄생하신 분으로 모시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는 오병이어로 배부른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가버나움에 이르렀는데 그곳까지 찾았으나 그들이 진리와 무관하였던 것같이 오늘도 그러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6-27).

 

3. 크리스마스와 복음

지금은 전파매체를 통해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 계속 청취할 수 있지만 과연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이 얼마나 있을까요? 종말을 예고하는 심판의 징조가 더해 가는 오늘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였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이 소식은 복음중에 복음입니다. 듣는 자가 복이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안겨주는 은혜의 소식으로 영생의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성탄의 표적

믿음은 증거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

그 아기가 누구입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체험한 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하였습니다.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구유에는 표적이 있었는데 오늘의 교회는 과연 그 표적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임마누엘의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복음이 이르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물러가고 흉악의 결박이 풀려지고 어둠 속에 있던 자가 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역사가 성탄을 맞는 모든 심령과 가정과 사회에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께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립시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임하신 주님께 존귀와 영광 돌리는 은혜를 힘입기 기원합니다. - 아멘 -


그리스도의 탄생

2:8-14

 

구주께서 탄생하신 영광스러운 성탄절, 오늘의 이 기쁨과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므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참된 진리요 은혜의 복이 될 줄 믿습니다.

 

1. 천사의 복음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전하여 준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2:8-14).

천사가 전한 이 복된 소식을 따라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인류의 소망입니다.

어거스틴은 "오 주여! 당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참 평안이 없나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에 번민과 고통이 있습니까?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십시오. 오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하여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은총을 힘입기를 소원합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주님

1)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은 묘사되었어도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2)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3)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3).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사실이 귀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3) 대속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3. 예루살렘의 반응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문을 듣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그곳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심으로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곳이요(왕상8:13), 또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또 부활하시고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14:5).

그런데 주님께서 탄생하신 일로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그들이 어둠에 속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8:47).

 

4. 헤롯의 앞잡이들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2:4-6).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직자들이요 성경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헤롯에게 메시아가 어디서 오시는지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5. 주의 사자의 현몽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박사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고, 요셉에게는 현몽하여 헤롯의 손이 미치기 전에 애굽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은 죽고 천사의 현몽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간 아기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때가 이르러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복된 소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그리스도의 탄생

1:23

 

인간에게는 기쁨 속에서도 슬픔이 있고, 슬픔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신비한 감정이 있습니다. 저는 영광스런 성탄을 맞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성도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1.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도성인신 사건은 기적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복음이 만백성에게 전파되었어도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5).

아무리 태양이 밝아도 맹인에게는 여전히 암흑입니다. 고대 교회의 분쟁사를 보면 대표적으로 아리우스파와 아다나시우스파가 있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가 창조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 곧 말씀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주장하고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도 있었습니다.

헬마스는 "그는 평범한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예수께 임재하여 머무르셨다" 하였고, 데오도터스는 "예수는 성령의 비호로 처녀의 몸에 나셔서 인간 중에서 가장 의로우시며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그 위에 내리시므로 특별한 사명자로 힘을 받으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동일하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였습니다.

도성인신하신 기독교의 진리를 바로 알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줄 믿습니다.

 

2.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0-21).

세계의 종교 분포를 보면 기독교와 회교, 불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그 외에도 나라마다 또 다른 우상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삼층천에 올라갔던 바울은 손수건과 그림자만 비쳐도 병마가 물러가는 희한한 역사가 일어났지만, 그들이 나를 믿으라 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일어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같이 귀중한 보배합을 열어 주님께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은혜의 사건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도성인신의 역사적인 사건이요, 구원의 사건임을 믿는다 할지라도 은혜받지 못하면 영생과 무관함을 알아야 합니다. 도성인신의 사건은 은혜의 사건입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26-28,35).

여러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귀신도 믿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진리의 보혜사 성령이 이 자리에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성령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