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층 누에서 떨어진 유두고
행20:7-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1절).
바울은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소요 사건으로 그 곳을 떠나 마게도냐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하고,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건너와 일주일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드로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는 밤 깊도록 복음을 전하므로 그 때 삼층 누에서 졸고 있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사고가 발생했으나 바울이 기도하여 죽은 자를 살린 일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12절).
1. 안식 후 첫날(주일)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7절).
이날은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1) 주의 날에 대한 성경적 근거
밧모섬에 유배 갔던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주일 아침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막16:9), 엠마오로 향하는 두 청년과(눅24:13-15)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20:19).
초대 교회도 유대인들 같이 안식일에 모이고(행15:21, 16:13, 18:4) 또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날에도 모였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명백해지고, 교회와 회당이 독립되므로 안식일은 주일로 변경된 것입니다.
2) 초대 교부들이 지킨 주일
익나시우스는 "안식일은 이제 지키지 않고 주의 날에 그들의 생을 새롭게 한다"고 하였고, 고린도의 디오니시어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주의 날을 성일로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사데의 멜리트는 "주의 날에 관한 논문을 썼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내려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입니다. 유의할 문제는 율법의 안식일과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날이라면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3) 안식일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7일에는 안식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휴식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루하루 창조사역을 완성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만족과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아담을 지으신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하시고 여자를 지은 다음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가 안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겼다면 에덴의 안식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었겠으나 불행스럽게도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어 에덴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4) 안식일과 구원 문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주님께서 안식일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흥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는 안식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릴 구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밤중까지 전한 복음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7절).
예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순서는 시간에 맞추어 진행해야 합니다. 설교가 길어도 문제이나 너무 짧아도 그렇지요.
제가 제대를 한 후 중랑천에서 철거민을 상대로 개척을 하였는데, 1년이 되니 교인이 85 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시내 어느 큰 교회에서 여전도회 헌신 예배 요청을 받고 갔는데 원고도 없이 기도만 하고 강단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전도회 회장이 오늘 저녁 특별 강사를 통해 은혜 많이 받으라고 소개를 한 다음 제가 나갔는데 몇 마디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도 합시다" 하고 한 5분 기도를 하고 나서도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은 서론을 하고 기도했겠거니 생각하고, 이제부터 설교를 들으려고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사는 들어가 버렸으니 그게 무슨 망신입니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얼굴 들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하는 얘기가 "예배가 짧아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설교를 조금 더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도 그 곳에 머물러 목회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절).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청지기의 마지막 밤은 주의 양들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한마디라도 더 전하고픈 욕심에서 전하고 또 전하다 보니 시간을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
잠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불면증에 걸리면 절감하게 될 줄 압니다.
섹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헨리 4세는 리쳐드 2세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려 고민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오 잠이여, 자연계의 보모 인자한 잠이여, 내 어쩌다 그대를 놀래어 쫓아버렸는가 그대가 다시는 나의 눈꺼풀을 덮어 눌러 감각을 망각에 젖게 해 주지를 않는구나!
잠이여, 향불을 피우고 달콤한 음악으로 자장가를 부르며 호화한 청기와 밑에 누워있는 귀인의 침실은 마다하고 연기가 자욱한 골방 안 불편한 자리에 누워 모기떼에 뜯기면서도 잠자코 잠이드는가!"
이렇게 수면은 귀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장소와 시간을 가려야지요. 어느 집사님이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있기에 지적했더니 마침 그 시간에 눈이 아파서 감고 있었는데 지적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눈을 감는 것도 조심하고, 옆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물론 눈을 감고 찬송을 부를 때는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는 정신집중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은 유두고와 같이 떨어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9절).
유두고가 삼층 누에서 떨어진 동기는,
1) 창 누에 걸터앉았기 때문이요
2) 깊이 졸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받기 위해서 백척간두에 올라 앉아 모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8절).
공간이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어도 창 누에 걸터앉아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은혜 받는 자리인데 유두고는 떨어졌으니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체구조는 정하고 동하는 가운데서 균형을 이루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창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낮 삼아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낮에 쉬어야 하지요.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밤에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졸며 자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모른다" 하고 주님을 부인할 뿐 아니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하였습니다.
졸고 잠자던 때의 제자들과 깨어 기도하던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비굴하고 부정적이고 살기 위해 도망간 제자들이, 기도로 무장하고 능력 받은 후에는 모두가 변화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던 주님의 기도 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지 않습니까? 깊이 잠든 영의 잠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숱한 사연을 지닌 도성, 여전히 오늘도 말이 없다.
그러나 너만은 알리라.
수만리 길 멀다 않고 네게 담긴 비밀이 알고 파서
찾아 온 길손에게 속 시원히 말해다오.
예루살렘아 너는 알리라 나사렛 예수 전하신 복음을.
예루살렘아 너는 알리라 그의 수난, 영광의 부활, 재림의 약속을.
소리쳐 전해다오. 이 영원한 진리를…]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그러나 졸며 잠자던 유두고에게는 여전히 어둠이었던 것같이 우리도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다를 바가 없을 줄 압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실 생명의 빛이요, 구원의 등불입니다. 이 빛은 온 세상을 밝히기에 넉넉하나 불행스럽게도 빛을 등진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둠일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오늘 우리는 빛의 역군으로서 세례 요한과 같이 이 빛을 증언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다시 살아난 유두고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감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삼층에서 실족하여 떨어져도 골절상을 입게 되는데, 졸다가 떨어져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릴 때에 했던 방법과 동일하다 하겠습니다(왕상17:21, 왕하4:34).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즉각적인 응답과 함께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드러났고, 그 밤은 날이 새도록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유두고 까닭에 오늘도 졸며 잠자는 사람들이 있다면 위로 받으리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자신이 어떤 모델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진리로 무장하여 복음의 역군으로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