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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27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절).

여기에 윗 지방이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말하는 것입니다(행18:23).

바울은 2차, 3차 전도여행 때 특히 에베소에서는 오랜 기간 눈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대 교회사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두고 아리우스(Arius:그리스도의 신성만 주장)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가 신학적인 대립을 하게 되므로 주후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초교파적으로 총회를 열어 아리우스설을 이단으로 배격하고, 아다나시우스 설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는 역사와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다시 그곳에 이르러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혹자는 그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진리를 보십시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8-30).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한의 제자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믿는 자에 따라서 그 믿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1. 이성으로 믿는 믿음

1) 합리성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으로 사고하고, 분별하고 또 판단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이성과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합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진리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타락한 인간 이성이 미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이성에 속한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예수를 분명히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알았습니까?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성의 안목으로 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밖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조건을 제시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0, 42).

이는 골고다에서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원수들의 소리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온들 믿을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려내셨을 때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던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0-21) 하고 책망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육신의 질고와 병마를 고쳐주시는 의사로 알고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찾는 사람, 세속의 왕권을 기대하고 자리를 탐하여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의회를 중심한 보수 세력과 개혁을 주도하는 옐친이 한판 대결을 벌인 끝에 옐친에게 승리가 돌아가자 보수주의를 지지하던 자들이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힘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속의 권세와는 무관한 것은 그것이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선지자로 아는 믿음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3-14).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7:39) 하였습니다.

여러분!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이 시간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도 향기 풍기는 정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으로 믿는 믿음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 가운데 수제자 베드로는 제사장의 뜰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의 영광을 보고도 "나는 갈릴리로 가겠노라"하고 다시 그물을 던진 일은 우리에게 많은 충격을 주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익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의해야 할 일은 거듭난 후에도 육신의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진리를 깨닫는 지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영이므로 은혜를 힘입게 되면 진리의 지식이 새로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하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신앙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지각입니다. 신앙이 병들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시험대에서 알게 되는데 하나님의 시험대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는 잣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칭찬의 시험대

누구든지 칭찬받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을 때에 조심하십시오. 이는 칭찬의 시험대가 시련의 시험대보다 넘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 위주로 일을 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너무 과시하지 마십시오.

"칭찬만 받기 좋아하는 것은 못난이의 짓이나 잘난이도 좋아한다. 그러므로 위정자를 공경만 말고 칭찬도 하여 주라"(도산 안창호).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27:21).

2) 시련의 시험대

시련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유혹은 악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련은 고난으로 닥쳐오고 유혹은 거짓으로 위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욥과 같이 까닭모를 시련이 있습니까? 인내하십시오. 사실 칭찬에는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우나 시련에는 지키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몸에 생긴 종처로 "네가 죽으리니 네 집에 유언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수 있었으나,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는 교만이 들어가서 기도도 하지 않고 국고를 다 드러내 보이므로 모든 보물을 바벨론에 빼앗기는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어떠한 시험이든지 이기면 내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실패에 굴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시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이 올 때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감사는 역경을 극복하는 무기입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의 은혜는 인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대상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서와 같이 망령된 행실을 버리고 야곱과 같이 장자 권과 천상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물론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못한 일로 정죄 받을 이유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신앙상태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성령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그들이 누구를 통해 복음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으나 전도자들이 성령을 제하고 성경을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진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앙상태에 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러한 믿음도 연조에 따라 학습, 세례 또 직분을 받아 교회에서 일꾼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이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땅 끝까지 퍼져나가야 할 복음을 내가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불씨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지금도 역사를 하십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불씨는 에베소로 인화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6-7절) 하였습니다.

진리의 불길은 탕자 어거스틴의 가슴에서 일어나 세속에 물들어 병들었던 고대 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는가 하면 루터와 칼빈의 가슴에 인화되어 빛을 잃고 죽은 교회를 개혁하게 하였고, 요한 웨슬레, D.L 무디, 스펄죤 목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일어나 오늘 기독교 120년사에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불꽃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입니다.

우리 모두 분발하여 성령의 강권적인 손길에 붙잡혀 앞장서서 헌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주의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에 보면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트, 곧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사람이 끼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저항운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평안하기를 바라는 자인데, 그렇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때, 한 저항 운동가가 옆에서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이제 한 해도 소리 없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무르익은 곡식들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능력 받아 본연의 임무에 충성하여 주의 날에 영광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