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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25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16-34



바울 사도의 일행은 이제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거리는 160km(400리)의 길입니다. 그 곳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어서,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2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관례대로"라는 말씀은 율법적인 의식을 따라 참여했다는 의미가 되겠으나 그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내용은 유대인들같이 율법을 증언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전도자들을 따랐으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을 붙잡으려 하다가 잡지 못하고 그들을 영접했던 야손을 잡아 고발하기를,

1)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2)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선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베뢰아로 가서 그 곳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그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무리들을 충동하여 소동케 하므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아덴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복음은 박해 속에서 전파되었습니다.



1. 철학의 도시 아덴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의 삼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도시 이름은 헬라 여신의 이름을 따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덴은 철학과 문학, 예술의 중심지로 서양 문명 뿐 아니라 세계 문명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또 아덴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비구레오, 스토익파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덴은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에서 볼 때 지적 수준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지식이 부족하여 근심할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22).

그렇게 수준 높은 변론의 광장을 지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했을 때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는 새로운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하였습니다.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들을 진리의 도구로 높이 들어 쓰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2. 우상을 보고 격분한 바울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16절).

나라마다 고유의 퐁속과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요시 하는 것은 곧 그 민족의 정신적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상의 얼이 담긴 풍속과 전통이라 할지라도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면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우리도 살풀이라 하여 무당이 굿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지방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 이름 붙인 장승들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성인의 전당이라 하는 대학교까지 그런 것을 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무슨 우상이냐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것을 신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도는 인구 숫자와 비길 정도로 신이 많은 나라입니다. 매년 수백만이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데 소를 그들의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전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는 국회에서 소를 외국에 수출하자는 제의를 했다가 국회의원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태를 빚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건축한 12사단 포병 연대본부교회 준공 예배시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대장이 부처를 땅에 묻어 버린 일로 한동안 여론에 올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일로 대대장은 군복을 벗게 되었는데 독지가들이 그 믿음을 높이 사서 신학교회 보냈다고 하니 머지않아 기드온과 같은 성직자가 등장하리라 생각됩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이면서 또 신전의 도시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여신의 신전)을 비롯하여 삼만을 헤아리는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덴은 우상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은혜와 영생의 진리를 주셨습니다.



3. 희랍의 철학과 부활의 진리

바울은 우상의 도시 아덴에 들어가서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시장, 거리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우상의 잘못과 철학의 허무를 논하면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또 복음 때문에 당하는 수모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8절).

그 두 학파가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면,

1) 에비구레오 철학

이것은 주전 348년에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학파입니다. 이 학파의 윤리 철학은 인간 쾌락주의입니다.

a. 신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신은 인간을 다스리지 않는다.

b.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사망은 달콤한 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c. 먹으라 그러나 남들과 함께 먹으라 그렇게 해야 더욱 즐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2) 스도이고 철학

주전 336년 구브로에서 출생한 제논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학파입니다. 여기는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을 지식의 기준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18절) 하였습니다.

"이 말쟁이" 이는 새가 곡식알을 쪼아 먹듯이 여기저기서 지식의 조각을 얻어가지고 모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을 인격적으로 멸시하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말은 바울이 아닌 자기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18절).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도 내세는 인정하지만 몸의 부활은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모든 원리를 밝혀주는 것 같으나 들어가면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이 내세를 운운한다는 것은 막연한 말이 될 뿐 영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신과 증거도 제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의 진리는 어떻습니까?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여주시고,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고 소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철학이 인간의 산물이라면 부활의 진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철학은 생명이 없으나 부활의 진리는 영원한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복음

회당이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아레오바고(화성신의 언덕)는 헬라주의 철학의 상징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성지를 순례했을 때 보니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언덕은 아덴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동산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에 의해 닳고 닳은 천연 대리석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절).

그때에 바울이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친들 그것이 잘못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직설적인 표현보다 우회적인 표현이 더 큰 효력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개종할 수 있는 설득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알지 못하는 신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참으로 기이한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섬기는 신을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우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상을 섬길 뿐이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누가 우상 앞에 복 달라고 제물을 드리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우상 행위가 곧 인간 무지에서 나온 소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세계적인 점쟁이 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 세계 각국에서 삼천 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무당과 점쟁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문명이 발달한 구라파나 미국에서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처럼 사람들이 잘못된 곳으로 쉽게 빠져드는지 아십니까? 귀신들은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을 분별없이 용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1-3).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제에 대한 학설입니다.

a) 처음에는 알다가 후에 잊어버린 신

b) 주전 6세기 아레오바고에 큰 질병이 있었는데 구레네인 에피파네스가 와서 구원하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그 때에 빠진 신이 있을까 두려워서 희고 검은 양들을 놓아 양들이 앉는 곳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쌓은 데서 기인되었다고 합니다.

2) 하나님과 우상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 하고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 무지로 인해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쳐 주기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4-25절)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상이 무엇입니까?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29-30).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이 이르기 전에는 어떤 우상의 행위일지라도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해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죄는 여전히 죄가 됩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자행된 죄는 빛 가운데 나올 때에 죄인 줄 깨닫고 회개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에 비추임을 받고도 어둠의 행위를 저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고의적인 죄가 되므로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므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새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강물같이 흐르는 사유의 은혜를 받아 영원토록 주님만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