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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노정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19



천국 가는 노정



행14:19-28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일로 온 성이 듣고 기쁨이 충만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 전도자들을 더욱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그 길로 이고니온에 이르러 두 사도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므로,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14:1)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박해 속에서도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이 유대인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이방인에게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참 신이시요, 예수는 구세주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엡2:8).

또 은혜의 역사가 더할수록 마귀의 시험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하면 복음의 역사가 왕성해감에 따라 마귀의 역사도 더해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 아니라면 전도자가 박해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미워하며 박해했을까요? 이는 하나님과 우상,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은 상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하였습니다.



1.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하므로 그곳을 피해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 전도에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디모데의 개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전도로 디모데가 회개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딤전1:2, 18, 딤후1:2, 2:1). 바울이 두 번째 그곳을 방문했을 때(행16:1) 디모데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그 때부터 바울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도의 결실은 귀중합니다. 바울이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

1)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과 같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수제자 베드로를 들어 쓰신 하나님은 바울도 들어 쓰셨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9-10절).

얼마 전 이수익 집사님의 아들이 폐가 나빠진 줄도 모르고 계속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은 청량리 동산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사진을 찍어보니 심각한 증상이라 하여 당장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애타는 마음은 ‘목사님이 한 번만 기도해주시면 내 아들의 병이 낫겠다’는 간절한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즉시 문병하여 기도를 하였는데, 그 때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제 손이 뜨거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그 후 다시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이가 깨끗하게 나아서 담당 의사가 놀랐다고 합니다. 물론 아이도 바로 퇴원을 하였습니다.

2) 허매와 쓰스의 신당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 하고 그들을 위해 즉시 신당에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박해하던 유대인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방 죄인들입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인간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만 생각하여 복음을 외면하는 유대인도 잘못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고 신성만을 주장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전도자를 신격시하여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12-13).

만일 그 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그것을 절제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그들은 사람의 말이 아닌 신의 소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들은 그 말을 듣자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절) 하였습니다.

이렇게 전도자들이 자신을 낮추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힌 일로 권위가 실추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존귀한 일꾼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죽음의 고통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절).

어떤 사람은 싸움을 했다하면 이길 때까지 도시락을 먹으면서 몇날 며칠 계속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독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은 오늘까지도 바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라면 그처럼 열렬하게 유대교를 신봉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했으니 마음 편할 수가 없겠지요. 잘못된 신앙관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도자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이 일로 바울에게 소득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쳤고 또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 내던졌으나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입었던 상처도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지요. 바울은 그처럼 심한 박해를 통해 소망의 눈이 밝아져 현재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장차 받을 영광의 중한 것과 비길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영광과 정비례함을 알았다면 우리도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천국 가는 노정

다시 일어난 바울을 보십시오. 여전히 전도자의 본분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죤 번연은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 때 간수가 말하기를 "네가 오늘이라도 전도를 안 하겠다고 하면 곧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네가 오늘 나를 놓아주면 나는 오늘부터 다시 전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0-22절).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밧모섬에 유배 갔던 사도 요한에게 펼쳐진 하늘나라를 보면 영광스런 보좌와 천군 천사들의 노래 소리에 맞추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나오는데,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 하였습니다.

그 때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이른 말이 중요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하였습니다.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1) 환난을 통과한 자들이요.

2)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도록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았다면, 또한 저주받은 원수들이 우리를 그처럼 미워하는 이유도 알아야 합니다. 방심을 삼가 하십시오. 영생 길은 달리 없으니 힘들어도 가야하고, 괴로워도 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사명을 받았으므로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각기 맡은 임무 따라 충성을 하십시오.

전도자 바울에게 그처럼 고난이 닥쳐와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침이라"(고전9:16)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머나먼 전도 여정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온 전도자들은 그곳을 종착역으로 삼지 않고 2차, 3차, 최후에는 순교의 제물이 될 때까지 주님의 분부를 따라 충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향방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로 살지 않고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천국을 소망삼고 살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허무한 것에 종살이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주를 위해 피 흘리기까지 충성하신 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충성된 손길 위에 복을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바로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합시다.

영광의 면류관 받아쓰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