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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네 집이 구원 받을 말씀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04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을 말씀



행11:1-18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던지 그 민족 고유의 전통과 풍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통과 풍속이 귀중하다 할지라도 과거의 풍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밝은 내일을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불변의 원칙 속에서 끊임없는 개혁이 지속될 때 우리가 원하는바 진리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1. 할례자들의 힐난

예루살렘 교회가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았다 함을 들었을 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사마리아 여러 촌에서 복음을 증언하게 하였으나(행8:14-25) 가이사랴에서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달랐습니다.

"네가 무할레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절) 하여 할례자들이 비난했습니다.

지구상에 유대인들같이 자존심이 강한 민족은 없을 줄 압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목숨을 잃어도 민족정신은 굴복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문화를 일컬어 체면문화라고 합니다. 체면 때문에 냉수를 먹고도 이 쑤신다는 말까지 합니다. 사실 체면이 무턱대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를 힐난한 것은 그들 자신이 복음과 무관하거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율법주의 사고의식이 예루살렘 교회의 정통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피장 시몬의 집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환상을 접했을 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행 10:14) 하였습니다.

사실 평소에 몸에 익힌 습성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실 줄 압니다. 분명히 고쳐야 할 문제인 줄 알면서도 습관화되면 고치지를 못하지요. 본문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비난이 있을 때 확신에 넘치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변명을 하였으나 후일에 또 이러한 문제로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1-13).

그들이 은혜를 모르거나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 외식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명한 대로 따를지라도 복음과 무관하면 형식이요, 외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키는 어떠한 의식이라도 은혜와 무관하면 외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의 경건이 형식이 아닌 구원에 이르는 믿음 되기를 바랍니다.



2. 베드로의 해명

사실 복음이 아니라면 변명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 진리의 문제이므로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1)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

행11:5-15절까지는 10장에 나오는 사건을 그대로 반복해서 옮겨놓은 말씀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6절에 나오는 '들짐승'이라는 말이 10:12에는 없고, 12절에 '여섯 형제'라는 숫자가 10:23에는 밝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14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올 때부터 그처럼 겸비한 태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말씀 듣는 일에 주의를 기했던 것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아무리 영계가 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초등학교 선생이요, 주님이 들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은 무익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한 것같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령이 베드로만 도구로 삼으셨다거나 또 베드로를 통해서 항상 그러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볼 수 없는 것은 베드로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 그것이 곧 진리의 말씀이요, 영감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내려주신 구원의 복음입니다. 오늘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물세례와 성령 세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도다"(16절).

이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입니다(행1:5).

중요한 것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에서 나온 성례가 아니라 신약 곧 복음시대의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을지라도 세례는 받아야 합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율법을 바로 깨달았다면 율법적인 모든 예식은 헛되지 아니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진리의 원수로 전락된 것같이, 오늘 복음 시대에 시행하는 세례와 성찬예식 역시도 의식으로 그치면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의 복음이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닌 줄을 알았다면 우리도 거듭나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과 함께 성령이 임했던 것같이 우리도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3.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이 지금은 없어졌으므로 '종'이라는 용어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으므로 내가 임금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규정된 법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다만 유의할 것은 의무와 권리는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한 독일 상공회의소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한국은 독일과 달리 돈 봉투가 통하는 나라이며 돈 봉투를 은밀하게 건네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담은 기생집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이렇게 실추시키고도 국민을 위한 공복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윗물 맑기 운동이 일시적인 현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뀔지라도 청문회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 대신, 법질서가 수립되어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그럴 수가 없지요. 과연 주의 신실한 청지기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 뜻을 이루어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범죄하고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멸망 받을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더욱 귀한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그 은혜의 손길은 아무리 장애가 많을지라도 계획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차별도 없습니다. 이방과 선민을 구별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율법 아래서 진정한 의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죄인입니다(롬 3:10).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이라는 장벽이 존재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면 율법은 이스라엘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도 기생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과 같은 믿음이라면 이방 죄인이라 하여 정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차별화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보혈로 구원받는 주님의 은혜는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옳습니다. 땅 끝까지 주의 복음 증언하는 것이 전도자의 임무이요,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두 가지 회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절).

'생명 얻는 회개' 이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과거를 후회하고 새 삶을 다짐하는 자들이 많으나 불행스럽게도 영생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회개가 생명에 이르고 어떤 회개가 이르지 못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근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사람이 근심을 모르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낙원에서 사는 생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낙원이 아니므로 근심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복음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근심이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으로 오는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므로 사유함을 얻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믿음 밖의 근심으로서 밝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심은 아무리 하여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생명을 얻는 회개'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복음에 이르는 회개요, 지난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 받아 새사람이 되는 회개입니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 이 진리가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심같이 오늘 우리와 우리 가정을 구원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