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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전도 행적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02

베드로의 전도 행적



행9:32-43



사도행전 9:32부터 11:18까지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요, 사도인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 가이사랴 지방으로 다니면서 복음 사역에 이바지한 전도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점이 많고 비겁하였던 갈릴리의 어부 시몬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성자 시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는 도르가의 선행도 보게 되는데 모두가 성령의 열매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사방으로 두루 다닌 전도자의 발길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2절).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심해지자 사도들 외에는 각 곳으로 흩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때를 깃점으로하여 복음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전도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찾아가야 하며 또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주의 성령이 강권하여 나를 도구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전도의 목표입니다.

1) 전도의 범위는 땅 끝까지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물었을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면 믿음 여하에 따라 역사는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세계를 향해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 믿음의 결실이 맺혀질 때까지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의 씨는 한번 뿌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뿌려진 씨앗이 잘못되어 길거리에 떨어진다면 새들이 쪼아 먹어버립니다. 돌짝밭이라면 즉시 말라버리고, 가시떨기는 결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자들에게라면 복음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요, 모든 생명에 대해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롬1:14).

3)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세상일은 일정한 연령이 되면 퇴직을 하지만 신앙생활이나 전도 사역에는 은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희가 넘으신 어른들은 내 몸 하나 움직이는데도 불편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감사한 일은 성도들이 "목사님은 아프시면 안돼요" 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저는 아직까지 는 아플 겨를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달려갈 길 역시도 내게 할 일이 남아있는 동안은 주님께서 붙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명의식입니다. 모세가 120세가 되도록 산 것이 그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들도 무엇인가 해야 할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또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맹목적인 삶이라면 오래 살아야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행이지요. 그러므로 전도자 바울처럼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애니아를 일으킨 영감의 말씀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행9:32절).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하룻길로 욥바 동방 17km 지점에 있습니다. 그 곳은 팔레스틴 중앙 고지의 비옥한 지대로서 성도들의 집회 장소로 적합하였으며 지금도 '룻' 이라는 작은 촌락이 있습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지 여덟 해라"(33절).

중풍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고생하다 죽게 되는 고질적인 병입니다. "애니아" 그 이름은 "칭찬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그 이름대로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싶어도 육신이 병이 들어 남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는데 곧 그 곳에 도착한 베드로를 통해 그 몸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손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8년 동안 누워있던 자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34절).

세상 것은 배움을 통해 습득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35절).

이와 같은 역사가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도르가의 선행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욥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로서 예루살렘에서 60km 떨어진 거리입니다. 오늘에는 신시가지로 발전하여 이스라엘 최대의 도시인 텔아비브(Tel Aviv)라 합니다.

마침 여기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살고 있었는데 다비다는 히브리 이름이고, 도르가는 헬라 이름으로 수리아 지방에서 많이 불리었던 여성들의 이름입니다. 그렇게 흔한 이름 중에서도 욥바에 사는 도르가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그의 무덤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그가 남긴 믿음의 업적으로 인해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버리고 영국에 협조한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의하였을 때 물레를 돌리는 가난한 인도인 1억 5천만 모두가 잘 살아가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손대대 재산을 남긴 매국자들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1:4) 하였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를 보십시오. 그가 살았을 때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존중을 받았겠습니까?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보배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를 위해서 축재하였다면 무익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업적은 많을수록 더 큰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뽕잎 먹은 누에는 비단을 남기는데 인간이 인간 구실을 못한다면 무엇이라 변명하겠습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기회를 잃지 말고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도르가의 선행이 얼마나 그 이름을 빛나게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절).

이렇게 선행은 살아있을 때에도 영광이요 사후에도 영광입니다.

어찌 보면 성도들이 적은 돈으로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 부자들은 멸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물질보다 믿음의 손길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선행과 구제, 이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십니까? 그것이 곧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주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를 응답해주심을 믿으십니까? 우리 모두 마음껏 기도하여 선한 일에 부요케 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4. 다시 살아난 도르가

도르가가 병들어 죽었을 때 슬퍼하던 자들이 마침 룻다에 베드로가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을 하였는데 그 때에 이들이 베드로를 통해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에서 오게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줄 압니다. 그렇다고 도르가의 구원 문제에 영향이 있기 때문에도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절).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런 일을 의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뇌는 20억이 넘는 세포로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는 10분만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도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다비다는 살아났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42절).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애니아로 인해 룻다의 사람들이 주를 영접하였는가 하면,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일로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초대 교회 전도자들과 같이 어떠한 박해도 개의치 말고 분발하고 경성하여 일어납시다. 주께서 나를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 모두 큰 소리로 화답하고 헌신합시다. 과연 살아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적의 은혜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