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나의 그릇
행9:1-22
사람이 사는 동안 기회 선용은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향방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생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 기회를 잃지 말고 옳은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는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있음을 깨닫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1. 복음을 대적하는 사울
인생에게 있어서 일생 동안에 가장 귀중한 시간이 있다면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1-2절).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교를 위해서는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옥에 가두고 또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마저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당당했던 이유를 살펴보면
1)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줄 앎이요
2) 제사장들의 공문을 몸에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혹자는 사울이 주님 앞에 불림 받은 결정적인 원인이 이렇게 열렬히 박해한 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박해한 행동 대원보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도 앞장서야 옳을 것입니다.
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는 말씀 역시 찬 것을 진리의 원수요 대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더운 것이 은혜라면 찬 것도 은혜요, 더운 것이 진리라면 찬 것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은 죄악이로되 모세의 율법은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박해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을 사수하기 위한다는 명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울의 그 열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은 복음과 위배되는 다른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주의로 전락한 유대인들에게 잘못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걸고 진리를 욕되게 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주님을 만난 사울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중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요,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계시므로 죄인들은 감히 그 영광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를 수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빛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시며(요일1:5), 부활의 영광이시고(고전15:8)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입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4-5절).
이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오에(행 22:6), 또 동행자도 있는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왜 사울에게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개심의 기회를 주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식은 달라도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동일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복음을 전할 때 대상을 가려서 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외면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지요. 다만 사울에게와 같이 직접 음성으로 나타나주기를 기대한다면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그와 같은 방법을 이용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사울에게만 그렇게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섭리하심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인격이 없는 기계라면 생산하는데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성 없는 짐승일 경우에도 달리 취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가 독립적인 인격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사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과 사정을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나를 구원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그 때에 사울은 그처럼 미워하던 원수의 음성을 듣게 되었으므로 그가 과연 진리를 위한다면, "당신이 예수냐? 나와 대결하자! 나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믿는다. 그런데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 누구이기에 내 길을 막느냐?"고 반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주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 엎드러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울은 그 순간이 최후의 심판대가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와 긍휼이 한량없으십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4, 16-18).
얼마나 마음 뜨거워지는 은혜입니까? 이 크신 은혜에 감복되지 아니할 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그 자리에 거꾸러졌고, 그 때부터 그의 인생관, 역사관, 신앙관, 우주관, 모두가 180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변화는 그 개인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세계 인류 앞에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울이 받은 은혜가 오늘 우리도 받는 은혜 되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8-9절)
사울에게 있어서는 그 삼일이 너무도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잃어버린 시력이 문제될 수 없는 것은 그로 인해 영의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육신의 눈으로 진리를 대적하며 살아왔던 잘못을 가슴 치며 통회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식음을 전폐하여 주님의 긍휼을 감사드렸습니다. 이제는 그의 여생을 육신의 눈을 잃고 그대로 산다 해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은 은혜로 사는 목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 마땅할 죄인을 살려주시고 또 진리의 증인 삼으리라는 약속까지 보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먼 후일 그는 그 날을 회상하며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4-15).
이렇게 바울이 암흑 속에서 삼일 동안 받은 변화가 우리의 변화가 되고 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4. 경건한 아나니아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10-12).
이는 아나니아의 경건 생활이 어떠했음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로 인해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기도하여 눈을 뜨게 하는 은혜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로서는 너무도 충격적인 계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라는 그 청년이 기독교를 박해하여 성도들을 죽이고 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옥에 가두기 위해 제사장들의 공문을 받아 그 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 중요한 비밀을 알게 해 주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예정섭리요
2)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을 이유도 없었으려니와 도리어 아나니아를 비롯한 경건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 가두고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로서 그의 생애는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사울을 붙드심으로 이제는 진리의 증인으로서 충성하는 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절).
이는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바울도 장차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일은 고난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아니면 고난을 은혜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받은 사람은 고난도 은혜요,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고난이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에는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하셨습니다(마5:11-12). 복음의 진수가 십자가에 있음을 알았다면 십자가를 회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감수하여 더 큰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5. 증인으로 등장하는 사울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17-20).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사울의 눈을 밝게 한 후에는 그의 행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울은 임금과 이방인과, 유대인들, 그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아나니아의 임무가 중요함은 그를 통해 사울이 눈을 뜨게 된 일이요, 사울이 전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제 사울은 진리를 알지 못할 때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 이상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담대해졌습니다.
사울은 평소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를 대적하던 사울이 진리의 증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이것이 기적의 은혜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22절).
이렇게 확신과 증거가 있는 믿음 앞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에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여러분! 우리도 사울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를 따라서 목숨 걸고 복음 사역에 앞장서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