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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증언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0:55

최후의 증언



행7:1-10



내게 있어서 오늘 이 시간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이고, 또 무슨 말을 남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말씀은 집사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증언한 최후의 말씀입니다. 이는 사도들을 제외한 집사의 설교로는 유일할 뿐 아니라 또 모든 설교 중에서도 가장 길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1)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요셉에 이르기까지의 족장들의 역사

2) 율법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3)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와 성전에 관한 말씀

4) 마지막 경고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1. 변증의 기회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4)는 거짓 증인들의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냐"(1절)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하던 술책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법정의 판정이 진리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법정에서는 판사, 검사 모두 공정한 입장에서 사실을 밝히고 벌을 내리든지 벌금을 물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판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보십시오. 로마의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10.31 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파문당한 갈릴레오를 359년 만에 복권시킴으로 당시 종교재판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1518년, 마린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면시켰던 잘못도 마땅히 시인해야 옳을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스데반은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거짓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이나 성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었다면 이는 스데반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거짓 증언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를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신 그리스도와 대조 해 본다면 예수님은 변명의 기회에 침묵하셨는데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령의 조명으로 밝혀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는데, 스데반은 조상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경건의 능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들어도 안 될 것입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이귀분 집사님의 남편 되시는 김경길 선생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네. 그러시다면 내일이 주일인데 12:00에 교회로 오시면 함께 예배를 드린 후에 뵈올 수 있겠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주일에 오셨습니다. 단독 면담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내용을 알고 보니 돌아가신 이귀분 집사님 묘비명과 제사상에 대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천국 가신 분은 제사가 필요 없으니 제사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했더니 "그래서 우리 이귀분 집사 상에는 생전에 교회에 가지고 다니던 성경, 찬송을 그려왔습니다."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잘했습니다. 거기에 제물을 차리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이제 김 선생님도 교회에 나와서 이 집사님의 자리를 채우십시오." 하고 헤어졌습니다.

지금부터 13년 전의 일입니다. 사택이 지금 세워진 교회 자리에 있었는데 허물어져가는 구옥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중인데 소낙비가 내려 천정이 무너지는 바람에 자다가 온 식구가 흙탕물을 덮어썼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돌아가신 이귀분 집사님이 교회에 처음 나올 때인데 그 광경을 보고,

"목사님, 제가 얼마를 드리겠으니 사택을 옮기도록 하십시오." 해서 이층집으로 옮겼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숨은 정성이 지금은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으로 변한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확실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때 의의 면류관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율법과 성전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서라면 성전은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이 중요한 것만큼 솔로몬의 성전도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에게만 국한된 진리는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영육이 복을 받고, 성전을 중심하여 주를 섬기면 누구든지 동일하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 받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먼저 유월절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로 인해 장자 재앙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같이, 이방인들도 그와 같이 했을 때, 동일하게 재난을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얻은 육체적인 구원은 영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48절)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계신다는 말씀일까요? 분명히 하나님은 시내산에 강림하셨고, 솔로몬의 성전에 임하셨습니다. 또 솔로몬이 헌당 예배를 드린 후에는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여 감히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를 어떠한 틀 속에 묶어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정된 공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유대 땅에 국한시켜 놓았습니까? 유대인들이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진리대로 복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잘못이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그 긍지와 자부심이 교만으로 전락되어, 진리를 배역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바로 준행하였다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구원의 기쁨을 그들이 먼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을 자랑하던 그들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욕으로 바꾸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책망

집사 스데반이 그를 죽이려는 원수들 앞에서도 담대히 진리를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는 제사장들의 질문에는 상관도 하지 않고, 그 민족이 걸어온 역사를 나열했습니다. 스데반이 증언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율법학자나 제사장일지라도 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증언하는 진리였기 때문에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서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누구를 거슬렸어요? 성령입니다. 조상이 성령을 거슬려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고, 또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심판을 받았다면 오늘도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스데반이 무슨 힘으로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유의하십시오.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곧 생명입니다. 제사장들과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종교 지식은 많았으나 인류의 역사 속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이고 또 복음 전하는 전도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곧 진리의 탈을 쓴 십자가의 원수요, 진리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2-53).

듣기 좋은 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멸망 받을 죄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저는 이 강단에서 사랑이 강물같이 솟아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은 물을 오염시키는 죄악의 요소를 방치하면 그 물은 아무도 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하셨습니다.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고 사유의 은혜 힘입기를 바랍니다.



4. 스데반의 순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4절).

그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의 설교에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엎드러졌던 군중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에 지적되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것이 불치의 증상이 아니라면 주님 앞에 고백하여 사유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받지 못할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회개하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은혜의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드디어 천국은 스데반의 눈에 열려졌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스데반은 그 영광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로서 바라는 최대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자들은 그 영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드러나고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집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절).

이 은혜가 그립지 않습니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확실한 진리의 세계인데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나 영안이 밝아지면 그 영광을 볼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궁금한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 은혜에 어떠한 댓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은혜의 귀중함을 알았다면 그 귀한 보배를 받을 믿음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다음 모든 것을 배설물로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가고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진리를 대적하여 사람을 죽인 자들과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자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순교자의 영광은 그렇게도 귀중합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절).

유대인들이 율법주의로 전락하여 진리를 대적하였다면 로마의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우상신앙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9-60절).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에서 두 가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2)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과연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동일한 최후를 장식하는 장면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처럼 생을 마친 순교자 스데반의 증언은 참된 진리요, 마지막 올린 기도는 원수를 위한 사랑이요, 그의 누릴 영광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 위해 목숨 바쳐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