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베드로의 설교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0:41

베드로의 설교



행2:14-21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아홉 번이나 있습니다(1:16-22, 2:14-36, 3:15-26, 4:8-12, 5:29-32, 8:20-25, 10:34-43, 11:5-7, 15:7-11).

물론 이보다 더 많은 복음 선포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그의 설교가 특별 계시로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설교는 더욱 의미 깊은 내용으로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담대한 믿음의 사람 베드로

전도자 바울의 성격은, 칼날같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반면, 베드로는 혈기 많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칭찬 듣는 일도 있었고 책망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 죽을지언정 떠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다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 앞에 노출된 한 인생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오순절 사건으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기독교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제 그는 심약하고 비굴했던 옛 사람이 아닌, 변화 받은 새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4절).

확신에 넘쳐서 불타는 사명감으로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그 때의 청중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진리를 비방하고 외면하는 그들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만일 전과 같이 단순한 혈기에서라면 만용이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들어 쓰시면 내 입술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손길과 발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을 때, 20일 동안 매일 아침 특별 기도를 받은 K집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놀랄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담당 의사는 제 나이가 50대만 되어도 이런 말을 안할텐데 아직 30대 젊은 나이이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해 왔습니다. 그나마도 이 병은 확실히 치료되는 약이 없으니 입원하여 경과를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음성은 떨리는 목소리였고 눈물에 잠긴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우리 모두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요엘의 예언

사실 그 때에 베드로는 청중들을 위한 설교를 준비해 갔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은혜의 역사를 모르고 술 취한 행동이라 비방하므로 이것은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 요엘을 통해 예언된 것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담대하게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도 매달 첫 주일에 이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이 나를 들어 쓰시기 기뻐할 때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고 했습니다.

비방하며 박해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앞에서 위축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복하고,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할 역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말세의 의미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그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그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6-18).

여기서 유의할 것은 말세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분명히 말세인데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말세 또는 종말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이를 잘못 해석하므로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켜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세에"라는 말은 '끝 날들에'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하는 말세는 메시아가 오시기 직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사2:2; 미4:1).

기독교에서는 이 말세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곧 종말적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외친 세례 요한의 소리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주님께서도 공생애의 시작과 함께 종말적인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사도들도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습니다. 종말적인 복음의 중요성은 종말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곧 종말적인 복음이요, 중생의 복음이 종말적인 복음입니다. 이것이 곧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요, 정과 육이 죽을 때 그리스도로 살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진리와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의 역사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므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비방하던 자들이, 이제는 성령이 역사함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17절).

이는 히브리 표현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의 영을 보내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그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그들은 꿈을 꾸리라"(17절).

모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18절). 이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진 말씀이요, 또 복음과 함께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3) 심판의 징조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9-20절).

이는 마태복음 24:29에 있는 말씀과 연관이 됩니다. 역시 진리적인 안목이 아니고는 깨닫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를 가리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De Wette), 또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현상으로(Holtzmann, 박윤선) 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을 초월하여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발생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영화로운 날" 대신에 "무서운 날"이라 하였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는 불의한 자들의 심판과 성도들의 구원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이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성도들은 부끄러움 당하지 아니하고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의 예언

지금까지 베드로는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을 무리들에게 전한 다음 이제는 조상 다윗의 예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유의할 일은 복음의 정통성입니다. 복음은 뿌리와 줄기, 열매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뿌리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세의 율법 곧 구약입니다.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1:46).

이것이 나다나엘의 잘못된 선입관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다윗이 섬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불신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29-32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면서 예수님을 등진다면 이는 스스로 그들의 역사를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34-35절).

이제 베드로가 성령으로 증언하는 복음은 마지막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전도자의 진실한 소원은 구원의 열매에 있습니다. 동기가 어떻게 되었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무리들이 복되고, 이 말씀을 듣는 모두가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6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널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고 하였으며,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배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았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8절).

얼마나 귀중한 은혜요, 축복의 말씀입니까? 이렇게 주의 복음은 죄인을 공의로 심판하는 것이 아닌 사유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사람 되어서 하늘나라 영광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