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주는 나의 방패시오
시3:1-8
자식은 너무 못나도 근심이요 지나쳐 은혜를 등져도 문제가 더 됩니다. 본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맨발로 도피하면서 눈물로 간구한 기도입니다.
1. 반역한 아들
백성에게 반역을 당해도 원통한 일인데 자식에게 반역을 당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방탕하는 아들이 힘없는 부모를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는 패륜아가 있는가 하면 고부간의 불화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귀하게 길렀는데 부모가 늙으니 자식이 학대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효도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식사할 때나 새 옷을 입을 때나 학교 등록금을 받을 때도 부모님의 은혜에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14:25).
그런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였으니 그렇게 잘생긴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식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죄의 보응
사실 압살롬은 아비 다윗의 범죄로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다윗이 은밀한 중에 죄를 지었을지라도 죄의 보응은 무서운 것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9-11).
마귀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바보의 천국은 현명한 자의 지옥이라”(T. Fulle)는 말이 있습니다. 죄의 유혹은 화려할지라도 따르는 보응은 가혹함을 알아야 합니다.
“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6:25-28).
3. 다윗의 간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역경이 닥치면 기도하는데 형통할 때에는 감사를 모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허리띠를 풀지 마십시오. 한가할 때 마귀가 역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사유의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아무리 백전백승의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3:1).
이는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또 성전을 지었을 때는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사방에서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4:4).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윗을 조롱하였으나 하나님은 다윗이 흘리는 회개의 눈물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유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내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2-5).
이렇게 다윗을 모반하는 자들이 뒤쫓는데도 불구하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큰 슬픔과 고통에 직면했을 때일수록 은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애써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아무것도 각오하지 마십시오. 그저 내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이십시오.” (폴 틸리히)
4. 압살롬을 위한 아비의 간청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 지휘관들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삼하18:5).
역적 압살롬으로 인해 전쟁에 나가는 군장들에게 당부하는 다윗의 말입니다. 그날의 전쟁은 파죽지세로 압살롬의 군대를 이만 명이나 죽였고 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더 많았습니다.(삼하18:7-8).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을 하다가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요압이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이므로 그날의 전쟁은 끝이 난 것입니다.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들에게 다윗이 무엇을 물었습니까?
“젊은 압살롬은 잘있느냐”(삼하18:29).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아비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려고 했던 역적을 왜 이렇게 슬퍼했을까요? 이것이 자기가 지은 죄 값으로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 기슭에는 반역자 압살롬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5.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시작과 끝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올린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잔잔한 호수처럼 다윗은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3:8).
주의 백성에게 내리는 평화의 기도요 축복의 기도입니다. 사유의 은총을 입은 다윗은 이제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우리 모두 동일한 믿음으로 열국의 제사장 민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높이는 은혜 힘입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참된 자유
요8:31-40
자유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사람이 노예의 멍에를 알지 못하므로 그 멍에를 운명으로 생각합니다. 이 멍에 때문에 인간이 불의에 종살이 하므로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말씀드립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8:31-33).
미물의 곤충 중에 단체 생활을 하는 개미를 보면 기이한 일들을 볼 수 있는데 병정개미가 일개미의 집을 습격하여 일개미들을 죽이고 일개미의 알을 물어와
부화를 시키는데 알에서 부화 된 일개미는 자기들의 부모가 병정개미인 줄 아는 것입니다.
사실 병정개미는 일개미의를 죽인 원수이지만 일개미는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죽을 때까지 병정개미를 위해 노예로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이지요. 인생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해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유는 남의 속박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 또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행동, 권리, 의무 등을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례히 행동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1. 자유의 기준
자유의 기준은 법입니다. 법을 이탈하는 행위는 누구를 막론하고 제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자연의 법
자연의 법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을 거슬려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이 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공기로 호흡을 하는 생물은 육지에서 살는 것입니다. 만유의 인력은 자연의 법입니다. 이 법을 따라 우주 천체가 제 궤도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진리의 법
자연의 법은 창세기 일장에 나오는 창조와 동시에 부여된 질서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연의 법은 피조물과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구가 있고 우주 천체가 있으므로 만유인력이 있고, 지구의 자전이 있으므로 낮과 밤이 있으며 공전이 있으므로 사계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나 태양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유인력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법이 귀중하지만 자연의 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진리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복을 받았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같이 기독교가 왕성한 나라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또 복 받은 영적 토양이라는 증거입니다.
중국의 손문 선생과 장개석 총통은 대만에서 국부로 존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존중받는다 할지라도 인간 이념은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헌법이 많이 변경되었습니다. 지금도 국회에서는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직 영원불변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진정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습니까? 죄악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요한 웨슬리가 복음을 전하던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조지아의 총독이 자신의 배에 있는 하인 한 사람을 채찍질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총독의 술을 훔쳐 먹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웨슬리씨, 그래보았자 소용없소.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총독님, 그 하인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총독께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니면 죄를 결코 짓지 않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위하여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
세상에서 진리를 결박할 법이 있을까요? 없다면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8:33).
과연 그들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며 노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고 평생을 죄 가운데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인간이라면, 더욱 타고난 원죄는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죄에 매여 종살이하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13:20).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주의 종들은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입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그가 엎드려 절을하면서 한 말입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1.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다’라는 말은 ‘은혜를 소홀히 여기다, ‘은혜를 무가치하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오관을 통해 뇌에 전달되는 정보가 일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럴지라도 크게 자극을 받은 일은 쉽게 지워지지 않지요. 다른 것은 쉽게 잊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기분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노인이 배우지도 못한데다 연세가 있어 기억력도 약해지므로 교회에 올 때마다 목사에게 하는 이야기는 “목사님, 제가 이렇게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이제는 기억력도 약해지는데...” 하고 걱정을 하는데 저의 대답도 동일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되는데 예수님은 잊어서 안 됩니다. 그러니 주님만 열심히 찾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열 돈짜리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니다가 어느 날은 누가 떼어갔다고 그렇게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저도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집사님, 그것을 천국창고에 저축하십시오.” 한마디만 했으면 되었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요? 바울은 이 은혜를 힘 입은 이후 세상 것을 배설물같이 포기했습니다. 우리도 바울같이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여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세상 것 때문에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깨닫는 지각이 열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석에서 나눈 떡과 포도주 자체는 누구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떡이요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25).
무슨 말씀일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이 떡과 잔을 받을 때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를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The touch of the Master”라는 영시에 보면 어떤 고물상에 먼지 묻은 바이올린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행인이 $3에 구입하여 먼지를 털고 깨끗하게 손질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아, 잘 있었느냐? 40년 만에 너를 연주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청중을 매혹시키는 연주를 하자 그 바이올린은 $3000 짜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생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주님의 은혜와 진리는 깨닫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은 모양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면 우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대속의 진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데교회와 같이 죽은 교회가 있는가 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교회도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죽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죽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를 기억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와 돌짝 밭, 가시떨기, 옥토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길가나 돌짝 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결실이 없었으나 옥토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마음 밭을 옥토로 만들어야 결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은혜 받을만한 때’ ‘구원의 날’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볼 수 있는 때요, 지각이 열려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를 보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4:29-30).
이것이 은혜의 결실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에서 버스길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고산족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산꼭대기에 우뚝 선 십자가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오봉이라는 선교사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 발견한 것이 매년 한 번씩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잘라 신에게 제사하는 악습이었습니다. 그 일로 오봉 선교사가 깊이 고민을 하다가 말하기를 “오늘 밤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목을 쳐서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날 밤에 흰옷을 입고 흰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불문곡직하고 그의 목을 쳐 죽이고 보니 그들이 그렇게 존경하던 오봉 선교사였습니다. 그 일로 다시는 사람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일이 없어지고 그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선생 될 자격
요3:10-1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1-3).
니고데모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유대인의 선생 곧 지도자로 존중받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진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이는 중생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3:5-7, 10).
중생의 진리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지도자로서는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1. 선생은 사명 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나 각기 임무가 다른 것같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손재주가 특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물질 봉사에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도의 사명이 있는 사람이 있고,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명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기 맡은 임무가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해야 성령의 열매가 맺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지도자 바울과 아볼로를 기억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6, 8).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임무였다면 아볼로는 성경학자로서 물을 주어 가꾸는 임무였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와 교사의 임무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본연의 임무에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2. 진리의 교사는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지식과 영력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내게 맡겨준 영혼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났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의 교육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7-9).
중요한 것은 먼저 영혼의 토양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내가 메시아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물을 달라고 하시고 또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땅을 갈면 밭이 비옥해지듯 자벽은 영혼의 토양을 비옥하게 합니다.
파종하기 전에 농부는 땅을 경작합니다. 자갈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냅니다. 농부는 준비된 땅에서 씨앗이 더 잘 자란다는 것을 압니다.
자백이란 하나님이 오셔서 파종하도록 우리 마음 밭에 모시는 행위입니다.
“아버지, 여기 탐심의 바위가 있습니다.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책감의 나무는 뿌리가 길고 깊습니다. 씨를 뿌리기엔 너무 건조한 땅도 있습니다.”
마음의 토양이 좋아야 하나님의 씨는 더 잘 자라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 밭을 경작하십니다.
땅을 파고 잡초를 뽑아, 열매를 맺도록 준비시킵니다. 자백은 영혼의 밭에 아버지를 모시는 일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3. 예수님의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3:16-17).
가르치는 자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또 주님께서는 맡긴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신 목자이십니다.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8-9).
4. 주 앞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에 충성할 때 은혜가 임하는 것는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지라도 마음이 기뻐지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치지 않는 새 힘, 좌절과 낙망을 모르는 인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모두가 중생의 믿음으로 맡긴 사명 감당하고 주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죄의 보응
창3:22-24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도 생명과와 선악과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악과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즉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의 말대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저주아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15:21-22).
죄의 보응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므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보십시오.
1.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 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6-7).
지금도 지구상에는 의복 없이 원시생활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남녀가 나체로 함께 목욕을 하는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곳이 에덴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미 이 세상은 선악과로 저주 아래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저주 아래 떨어졌다는 것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0-12).
2.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매년 십오만 명 이상의 대표들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입니다. 몽블랑의 경관을 비롯하여 도시 조화도 더 이상의 형태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사회질서도 안정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에덴동산과 비길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마귀가 왕 노릇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계는 거짓과 속임수는 있어도 진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고 영생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간혹 흉악범들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물으면 “큰돈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서 평안히 살고 싶어서였다”는 말도 합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범죄한 인생은 이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라면 저주받은 마귀가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3.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 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6-19).
죄의 보응은 엄하게 내려졌습니다. 에덴에서 축출된 이후에는 고통과 죽음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4:4).
마귀는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망권세 깨뜨리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여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감사할 줄 아는 백성
시50:22_23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감사를 표할 줄 알고 모르는 것이 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성의에도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라 할 것입니다.
1. 범사에 감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너무도 많습니다. 혹시나 돈을 많이 벌면 또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는 조건부 감사로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형통은 복입니다. 그러나 역경을 모르는 형통은 두 가지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1) 타성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신앙이 좋았습니까? 그는 부왕 다윗의 유언을 따라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여 구하지 않은 모든 것을 덤으로 받았고 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는 주변 모든 나라에서 조공을 받았고,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왕들이 예물을 준비하여 솔로몬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은 일천 후궁을 거느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허무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허무에는 지족도, 감사도, 찬양도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타성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허무에 매여 종살이하는 옛 생활을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어느 날 교도소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소개합니다.
“목사님, 몹쓸 사람이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한 달 전에 은혜를 받고 목사님의 설교집 ‘하늘 양식’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염치없는 요구일지라도 사정이 허락되시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사연입니다. 감옥에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은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이 될 때 역경은 감사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역경을 모르면 교만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교만이 들어가면 은혜를 망각하게 됩니다. 또 교만이 들어가면 감사가 사라지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일이 잘되는 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2. 감사의 방법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술로 감사하고, 행위로 감사하고, 정성을 다해 감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 같이 외식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등학교 교감으로 장로로 임직을 받은 저의 생질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 자기 집도 없는 사람이 무리하게 거금을 작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때부터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고, 아내가 운영하는 학원에 아이들이 모여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집도 마련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전국 교수, 교사들 앞에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작은 성공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또 감사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3. 사람에게도 감사
부모의 은혜를 망각하면 불효자가 됩니다. 또 누구에게 물질의 혜택이 있었다면 마땅히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교수라는 직업이 더러운 것입니다. 바른 소리를 안 해도 욕을 먹고 해도 욕을 먹으니 말입니다.” 모두가 감사를 잊어버리고 보복의 감정만 늘어가는 살벌한 세상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분이 끝났다고 하시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삶의 재난과 비극은 도망칠 일이 아닙니다. 자세를 바로 세우고 앉아 있을 때입니다.
코리 텐 붐의 말입니다.
“기차가 터널을 들어가 세상이 캄캄해지면,우리는 뛰어내리지 않는다. 기관사가 충분히 데려다 줄줄 믿고 앉아 있다.”
실망할 일이 생기거든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전히 주관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인내하십시오. 끝나기 전에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
소나 양의 가치는 누가 정할까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치는 누가 정할까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홍포 입은 부자를 존귀한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나사로를 더 귀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기름을 부으려 했을 때, 너무도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것을 알았을까요? 이는 본인도 예측을 못했고 부모도 모른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오직 양을 지키던 다윗을 제하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12).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천국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곳이라면 지옥은 가룟 유다와 같이 은혜를 배신하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세에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2-23) 아 멘
하나님의 주신 기업
삿18:1-6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기업을, 제사장 엘르아살과 함께 열두 지파 대표를 불러 그들로 제비 뽑게 하여 배분해 주었으나, 단 지파는 아직까지 우거할 땅을 확보하지 못하여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자기 온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1. 단 지파의 기업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 편 경계까지라”(수19:40-46).
생각 같아서는 한 지파에 가나안 땅 전부를 다 주어도 만족할 수 없겠으나 가나안 땅은 달리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거기는 진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뉴욕과 같은 고층 빌딩이 없고 홍콩 같은 화려한 도시도 아닙니다. 집시들이 들끓고 있고 훼파된 성전 부지에 오마르 신당이 있으나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영원한 고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기약된 것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2. 기업의 땅은 정복하여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안일한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기업일지라도 여호수아를 통해 그 땅을 정복하여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에1:1-3).
누구의 명령입니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바사 왕 고레스가 내린 조서입니다. 그런데 그때 세스바살 총독을 중심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서 이방인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의 방해로 십팔 년 동안 성전 건축을 중단하자 학개 선지자로 통해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느혜미야를 통해 무너진 성벽을 건축할 때도 여전히 이방인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혜미야는 한 손에 연장을 들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밤과 낮을 공사하여 완성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기 전 마지막 강단에서 외친 말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마틴 루터 킹은 남을 돕는 일에 헌신하려하였고... 누구든 사랑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옥에 갖힌 자는 방문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섬기려 애썼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외침은 영적인 무장을 풀어놓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다른 지파는 자기의 기업을 가꾸고 누리는데 단 지파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라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삿17:18).
우리 모두 개척자의 정신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기도와 축복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삿18:5-7).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 원수는 우리의 먹이로 변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와 또 언제 함께 하시느냐 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삿18:9-10).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님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하여 주님 앞에서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역대상 29:12-14
양치는 목동에서 대왕으로 군림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성전 건축을 그처럼 소원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아 이제 다윗도 아들 솔로몬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우리교회 청사진을 구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 할지라도 최소한 십 년을 잡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육십 대에 접어드니 이렇게 일하다가 내 생을 마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영광 돌리기 위해 태어난 인생, 주님 일 하다가 주님 앞에 선다면 더이상 바랄 것은 없을 줄 압니다. 베틀의 북같이 빨리 가는 세월, 오늘을 값지게 선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비록 아들 대에 이룩될 성전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에게 성전에 필요한 금과 은과 보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하였는데 온 국민이 마음을 같이하여 많은 예물을 하나님 앞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 (29:9)
1. 만유의 주재자
과연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이원론자들은 “태초에 빛과 어둠이 함께 있었고 여기서 영적인 세계와 물적인 세계가 생성되었다”하고 또 “의로운 하나님께서 죄악의 물질을 창조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물질세계의 창조자는 악령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다만 올바른 물질관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타락하므로 만물이 저주 아래 놓였다 할지라도 만물을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엄하게 다스려야 할 요소는 육신의 소욕 곧 정과 욕심입니다. 육체는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므로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졌으므로 거룩한 헌신과 봉사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 재림 때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세세토록 주님을 섬기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원론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둠을 다스리는 권세자가 따로 있고 빛의 세계의 주인이 따로 존재함이 아닌, 오직 주인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는 범죄로 인해 타락한 영물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시16:4)
마귀는 허위와 거짓, 영원히 멸망 받을 것 외에는 어떠한 복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2. 부와 귀는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에서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불신자들도 잘 살아간다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법칙에 따른 보상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혜택을 선, 악의 구분 없이 골고루 허락하셨습니다. 또 과학적인 혜택도 신, 불신 관계없이 고등교육을 사람이 많이 누리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부와 세상의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검소하고 근면하며 절제 있는 생활을 한다면 잘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재벌이 나올 수 있도록 큰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람이 물질 밖에 있는 그 무엇을 찾지 못한다면 물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토마스 필립스)
옳습니다. 어떤 물건은 박물관에서 소장되는데 어떤 것은 쓰레기로 폐기 처분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이완용은 당대에 부귀영화와 세도를 누렸으나 후대에는 매국 자로 욕을 먹고,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이슬로 사라졌으나 민족혼을 되살려주고 있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당연한 진리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부자 되는 사람, 은혜로 부자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취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청지기의 임무에 충성합니다.
패전국으로 일본인과 함께 경제대국이 된 독일인들 역시 검소하기로 정평이 있습니다. 그들은 작업복 차림으로 어떤 자리에도 자연스럽게 출입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지는 상품은 국제시장에서 우수한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진리가 있는 민족은 신앙의 문명 곧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영적인 문명을 발전시키게 되고 우상을 섬기는 민족은 죄악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문명은 발전이 아니라 멸망에 이르게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십시오. 거름을 흡수하여 열매가 풍성하듯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은 물질을 통해 영생의 결실을 얻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3. 크게 함과 강하게 함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12)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6)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당대의 영웅들은 많습니다마는 영원히 존중받을 수 있는 위인은 흔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기념할 수 있는 이름은 어떤 사람이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입니다. 무엇이 세리와 창기를 그처럼 존귀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이며, 진리를 대적하던 죄인 중에 괴수인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15:10)고 하였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로 권좌에서 물러났던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특별 고문이었던 찰스. w. 콜슨은 알라바마 감옥에서 고달픈 나날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 “거듭난 사람” 이라는 책을 썼는데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권세는 그를 욕되게 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귀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또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힘입고 모든 문제 해결 받아 존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
그가 대왕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이와 같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다윗처럼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크게 흥분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게 아이와 같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3-14)
아무리 복된 일일지라도 실천이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윗에게 내린 복을 보십시오. 얼마나 귀중한 은혜입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요,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영원한 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보화를 발견하였습니까? 방치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라” 하였습니다. 건강의 복을 받았습니까? 주님 앞에 머리 숙여 순종하십시오. 남달리 권세를 가졌습니까?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와 같이 기회를 살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청지기 직이 있을 때에열매를 맺으십시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앞장서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껏 봉사하고 선한 일 하고 싶어도 능력이 모자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믿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15)
한정된 기회. 어떠한 삶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는 일이 없이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벧후3:8-14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사도들은 모두가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사도들과 같이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우리도 은혜받아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시간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루를 천 년과 동일할 수 없으며 또 천 년이 하루 같을 수 없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약속
주님의 약속은 영원불변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절).
이 말씀은 멸망 받을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기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다가 죽었듯이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짓는 자들은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오실 때의 광경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10절).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의 징조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24:21).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26-27).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29-30).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그날은 첫 하늘과 첫 땅이 사라지는 날입니다(계21:1). 그날에는 숨겼던 것이 다 밝혀질 것입니다. 그날에 멸망 받는 자들은 애곡으로, 구원 받는 성도들은 찬양으로, 희비가 나누어질 것입니다.
이는 알곡과 쭉정이의 구분이요, 양과 염소의 구분이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구분이요, 충성된 자와 악하고 게으른 자의 구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11절).
취사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4. 성도의 바른 자세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흑암이 깊을수록 밤하늘에 별이 더 빛나는 것같이 소망의 눈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헛된 욕심을 벗어버리십시오. 신앙의 눈을 가진 바울은 모두를 배설물 같이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벨사살이 다니엘에게 베풀고자 하였던 그 많은 하사품과 셋째 치리자의 자리도 사양하였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밤에 바벨론의 역사가 끝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상 낙원이라 칭하는 스위스는 모든 주택마다 핵전쟁을 대비하여 방공호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아 멘
한나의 기도
삼상1:9-18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요, 하나는 브닌나입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으나 한나는 자식이 없으므로 엘가나의 집에는 화평이 없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아들딸을 마음대로 가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8:3-5).
1. 원한 맺힌 여인
“여호와께서 그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6절).
물론 남편의 사랑은 갑절로 받았으나 한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집에 두 여인을 두고 산다는 것이 문제지요. 자식 없는 여인이 남편을 독점하면 자식 있는 여인이 곱게 보아 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더 이상 브닌나의 멸시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회교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므로 능력이 있으면 여러 여자를 둘 수 있는데 그런 남자는 여자들에게 시달려 밤에는 자동차 안에서 잔다는 말도 있습니다.
2. 한나의 서원
만일 한나가 우상이나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밤낮 우상을 찾아서 소원을 빌었을 것입니다. 우상이나 다른 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16:4).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135:15-18).
한나는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찾아 쌓인 원한을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찾은 길이므로 그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고, 울고 울면서 반복되는 간구로 밤을 새웠고 드디어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올렸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0-11).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서원기도입니다. 성경에는 서원하는 기도가 여러 번 있습니다. 서원은 함부로 해서 안 될 것은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서원기도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그런 것은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왔을 때는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열매 맺을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부산 수영로 교회 원로 정필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부흥이 되어 교육관을 건축하는데 성도들에게 서원기도를 시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일억을 헌금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했더니 건축이 다 끝나고 남음이 있었는데 작정한 헌금이 계속 들어 오고 때문이라 했습니다.
한나가 브닌나와 같이 쉽게 자식을 얻었다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극적인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병든 성도가 있습니까? 평범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하십시오. 가난한 자는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결단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또 서원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응답받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마땅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복을 받는지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눅12:42-44).
이보다 더 큰 부자가 있을 수 있으며 이보다 더 복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요셉이 받은 복이요, 다니엘이 받은 복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2-14).
엘리는 한나의 사정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한나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우울증 환자가 되어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찾게 하였고, 또 그로 인해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릴 사무엘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살전5:17).
2)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눅18:1-).
3)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어떠한 문제든지 상달되는 기도로 모두가 해결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가 응답받은 후 올린 기도입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5-18).
주님의 품에 있는 우리에게는 모두가 복이요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의 원한 맺힌 기도, 한나의 서원, 하나님의 응답, 모두가 오늘 우리가 올릴 기도와 응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환난 중에 받는 은혜
고후 1:3-11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고린도를 방문할 의향을 밝혔으나(고전16:5) 길이 막혀 가지 못하므로 두 번째 서신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는 전서에 비해 내용이 많이 부드럽고 또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구제할 것도 호소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
북한에는 김일성 일가를 모두 우상화 시키고 절대 복종을 시키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등장하자 그의 고모부 장성택을 공개처형 시키고 장성택 계열의 사람은 외교관들도 다 불러들였습니다. 지구상에 유일한 족벌 독재가 언제까지 지탱될는지 궁금합니다.
절대복종은 인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야 하고, 그의 걸으신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참된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내 슬픔을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찬372장).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2. 환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은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첫 번째 보낸 편지에는 장성한 사람이 아닌 아이의 양식으로 먹였습니다(고전3:1-2).
아이들의 약점은 분별력이 없으므로 미혹을 받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또 소화기능이 약하여 단단한 음식 곧 십자가의 진수를 소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단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절).
이렇게 성숙한 믿음으로 열매 맺는 은혜가 우리에게도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3. 인내의 은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인내는 외부적으로 닥치는 시련에서 필요하지만 내부적인 시련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6-7).
사실 인내는 고생을 더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하며 또 무엇을 위한 인내이냐 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아니라면 고난은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4.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은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8-9).
바울의 신앙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기에 외부적으로 환난과 박해요 내부적으로는 찌르는 가시로서 주님과 멀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믿음은 어떤 위기에 처할 때뿐만 아니라 형통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5. 마지막 당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절).
사명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충성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는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가 주의 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었던 것같이 기도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2:14-1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절).
이는 믿음의 향기 곧 복음의 향기입니다. 어떤 배우는 무당역을 맡아 무당의 흉내를 내다보니 무당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1. 성도의 향기
성도는 냄새가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성도들 중에는 아직도 주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물론 사업상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사업을 위해 살고 있는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흔히 색깔로 비교하기도 하고 또는 보수와 진보로 구분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상반된 이념을 가졌을지라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진리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소련공산주의 시절 지하교회 지도자였던 게오르기 윈스가 천구백칠십구 년 미국으로 이주해 서 살고 있었는데, 미국 교회에서 어떤 위험이나 약점을 발견하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국에서 나의 주의를 끌었던 가장 큰 위험은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라”고 했습니다. 박해 속에 있는 소련의 교회는 성경의 기초 위에 굳게 서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의 재림도 확실히 믿는데 미국의 일부 교단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지 않고 심지어 비평하는 학자들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소련에서는 신앙과 불신앙, 빛과 어둠 사이에 명백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미국에는 중간 단계 곧 회색지대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이 있을 때에 법궤를 앞세워 승리를 하였으나 엘리 제사장 때에는 법궤를 빼앗기고 참패를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의 그들의 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주저하는 백성들에게 외친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그때 불의 응답을 보고 백성들은 바알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기손 시내로 가서 처단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화를 주의해야 합니다. 모두가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사망에 이르는 냄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절).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의 구원도 되시면서 심판이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1-13).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배역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4-15).
‘이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 무서운 일입니다. 때가 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전도자의 발에 묻었던 먼지가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전도자는 나팔을 분명히 불어야 합니다. 나팔 소리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파수꾼에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무도 분명한 나팔을 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 같이 분명한 복음의 나팔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 나팔을 불어야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3. 생명에 이르는 냄새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16:15).
루디아에게는 바울이 생명의 이르는 냄새가 되었으므로 기회를 잃지 않고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영접하여 은혜 받은 백부장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냄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생명의 냄새가 되어 뭍 영혼을 소생하게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향기가 얼마나 귀한지 보십시오. 이 향기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 향기가 있는 곳에는 마귀가 물러가고 죄악의 아성이 무너집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 되어 온 세상을 밝게 하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주님의 사랑
요13:1-6
본문은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께서 섬김의 도를 몸소 실천에 옮기며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1. 돌아가실 때를 아시는 주님
사람이 죽는 날은 비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실 날을 알지 못해도 징조를 보면 가까움을 알 수 있듯이 인간도 신체적인 변화를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날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가 죽을 날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희망은 그날로부터 사라질 것입니다. 삶의 의욕도, 어떠한 희망이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문제는 실로 중요합니다. 메시아가 아니고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절).
2.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
이것이 선한 목자 주님의 사랑입니다. ‘끝까지’라는 말씀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생을 두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사랑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사별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무슨 말씀일까요? 선한 목자 주님의 죽음은 성도들과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더 좋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4-9).
3. 마귀의 선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2절).
여기서 기억할 것은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그 씨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성령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출입하는 통로입니다. 성령은 영의 통로를 이용하는데 마귀는 육의 통로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끊임없이 물의를 빚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십시오. 그들이 빛을 등지고 멸망 길에서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육신의 통로를 통해 마귀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약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합니다. 유다 같이 물질에 약점이 있는 사람 더욱 기도하십시오.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진리의 보화를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에 어떤 불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뱀의 말을 들은 후에는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와 가까이 하면 구원의 기쁨도, 은혜도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과 번민이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가룟 유다가 주님께 향유 붓는 여인을 보고 어떻게 하였는지 보십시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5-6).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노예로 전락하면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도 모르고 그렇게 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를 무너뜨리고 가정에 들어오면 가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7-8).
4.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주님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4-5).
기억하십시오. 발을 씻기는 일은 특별한 기술을 요하거나 고등교육을 받고 어떤 자격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겸비와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14절).
여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부모는 어린 자식의 발을 씻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사랑일 뿐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릅니다. 단순히 발을 씻어주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봉사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손이 주님의 손길로 변할 때 내가 섬기는 그 손길을 통해 은혜 받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아 멘
이미 목욕한 자
요13:7-20
이미 모욕한 자는 누구일까요? 제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유다가 제외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또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받은 분들이 됩니다.
1. 주님께서 하신 일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13:4-8).
이것이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의 마음도 베드로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이미 목욕을 한자라 할지라도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서 또 죄를 지을 수 있으므로 끊임없이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서1:8-9).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도 씻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후에는 알리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섬김의 도를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같이 다른 진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19-22).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12:16).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이렇게 제자들이 알지 못했을지라도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과 무관한 사람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9절).
우리가 주님과 무관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귀의 노예로 전락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예수만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4.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2-1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대로 본받아야 하고 주님께서 높은 자리를 탐하고 대접 받기를 기뻐하셨다면 우리도 그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섬김의 도를 몸소 실천하시고 그대로 행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6-17).
주님 닮기를 사모하십시오. 주님과 더 가까이 하기를 소원하고 기도하십시오.
E.M 바운즈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룬 사람들 대부분은 일찍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침에 기도하는 일에 투자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날에 하나님을 찾는 일에 별로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침 활동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분은 맨 마지막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고 굶주렸기 때문에 날이 밝기도 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갈망하셨기 때문에 새벽 미명 또는 밤이면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일찍 일어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20절) 아 멘
서로 원망하지 말라
약5:7-11
사람은 인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서로 원망을 삼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인내의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원망의 원인
원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불공평한 처사로 발생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로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는 일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사람에게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집사로 세워 그들로 담당하게 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을 전담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해가 부족하여 원망이 싹트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든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 23-24).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힌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2. 원망을 삼가 조심해야 할 이유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마 20:1-12)
주인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일군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 다음, 다시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고, 제 육시와 제 구시, 제 십일 시까지도 이러한 자들이 있어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늦게 들어온 일군부터 한 데나리온씩 나눠주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자기에게 품삯을 더 많이 줄 줄로 기대하였다가 한 데나리온임을 보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인이 하는 말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3-16).
여기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 연조가 높은 분들, 또 직분을 받아 주의 일에 임하는 분들은 겸손의 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은혜로 받은 복, 얼마나 감사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2:14)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4:9-10).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계시니라”(약5:9)
갑작스런 수재로 재산과 생명이 수몰되어 불행을 겪게 된 이웃을 우리는 외면해서 안 될 줄 압니다.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재난을 극복하므로 새로운 출발의 디딤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수재민들은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적은 성의일지라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청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6-9)
이 환상을 보고 바울은 발길을 마게도냐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 안 됩니다. 날마다 더 깊은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선한 일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더욱 충성하는 성도되어야 하겠습니다.
3.인내로 극복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7-8)
하루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22).
계산하면 사백구십 번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백구십 번을 용서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족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 숫자가 무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중에 태풍과 홍수가 있기도 하고 또 비가 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사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농부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날이 가물어 곡식들이 메말라 들어갈 때 애타는 그 심정, 또 장마로 다 익은 곡식이 썩어갈 때에 겪는 고통도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럴지라도 참고 견디면서 한 알이라도 거두기 위해 곡식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농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이렇게 인내해야 합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계3:10-12).
우리 모두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스스로 선택한 길
요19:1-15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양심 자유, 신앙 자유, 행동이나 직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악용하면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빌라도의 법정에 넘겼으나 빌라도는 심문하여 그를 죽여야 할 죄를 찾지 못했으나 민요가 날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했습니다.
1. 어떤 법으로도 정죄할 수 없는 복음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1-3).
예수님은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항거하거나 사회질서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고 천국 복음을 선포한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죄인 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이 은혜를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유대인의 법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절).
그 법이 모세를 통해 선포된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적용한 율법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10:32-36).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8:28-29).
예수님이 만일 죽음이 두려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3. 침묵하신 주님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8-10).
그런데 주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4-36).
마땅히 저야 할 십자가요 또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면 십자가를 지십시오. 주님의 뜻 이룩한 후에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2)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변명을 하셨다면 허물은 당연히 정죄하던 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4. 스스로 택한 길
“이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요19:14-16).
유대인들이 그처럼 해방과 주권을 기다렸는데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기고 로마의 황제 가이사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후 칠십 년에는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오늘까지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Titus 장군은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들 앞에서 한 말이 있는데, “히브리 인들은 바다에서는 애굽을 이겼으나 육지에서는 내가 이겼다.”고 했습니다.
행동은 자유일지라도 책임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
요9:35-41
하루는 주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서 땅을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여 눈을 뜨게 한 일로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1. 맹인으로 태어나게 된 원인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어떤 사람도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으므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대답하셨을 뿐 아니라 또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율법에는 부모의 죄가 자손 3-4대까지 미친다고 하였습니다(출20:5).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이는 원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으로 태어나게 된 문제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유의할 것은 소경이 자기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간구와 소원이 있었기에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또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오셨으므로 그 일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구원의 복음입니다.
2. 눈을 뜨게 하신 일과 안식일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16절).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1) 가버나움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침(막1:21-26)
2) 시몬의 장모 열병을 고친 일과 많은 병든자, 귀신들린 자를 고침(막29-34).
3. 손 마른 자를 고침(마12:9-13).
4) 18년 동안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자를 고침(눅13:11-17).
5) 고창병 든 자를 고침(눅14:1-4).
6)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침(요5:1-8).
7)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침(본문).
주님께서 일부러 안식일만 찾아다니면서 병든 자를 고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찾아오는 무리들을 더 많이 고쳐주시고 또 복음을 전하는 중에 안식일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율법을 지켜야 하나 율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은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옳을까요? 혹자는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주일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을 잘 지키면 영육이 다 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교권주의의 형포
날 때부터 맹인이 되었던 아들이 눈을 떴다면 이보다 더 기뻐할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 함이러라”(18-22).
유대종교에서는 세 가지 형벌이 있는데 1) 견책 2) 근신 3) 출교입니다.
견책은 7-30일간 계속되며, 근신은 10인회에서 신고를 받아 최소한 40일간 공중 교제가 금지되며 그 후에 다시 30일간 훈계의 시기를 지나야 복귀되고, 출교는 완전히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교된 자는 공중이 모인 자리에 나갈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은 그의 곁에서 2m이상 접근을 금하며 누구도 그와 교제하거나 매매도 못하게 하고 그가 죽으면 그 시체에 돌질을 하고 그를 위해 우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1-3).
이것이 진리를 위장한 비진리, 진리를 대적하는 교권주의 자들의 행위입니다.
4. 눈을 뜨게 된 자가 전한 복음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0-33).
내게 있는 증거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권주의 자들의 형포를 보십시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8-29).
이 말에 무슨 대항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언어폭력으로 축출하였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5. 다시 찾아 주신 주님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5-38).
주님 뵙기를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주님의 은혜로 밝은 천지를 보게 된 그 사람을 어쩌다가 다시 만나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내 사정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는 엎드려 경배드렸습니다.
6. 우리도 맹인인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절).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위선자들이 가슴 치며 통회해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40절).
이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태도가 아니라 비웃고 비방하는 태도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
무서운 말씀입니다. 차라리 맹인이 되었더라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지 않았을 텐데 본다고 하니 구원받을 기회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돌아올 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우리는 어둔 눈이 밝아져서 엎드려 주님께 경배 드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시험을 통하여 받는 은혜
약1:1-4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이는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쓰는 술어이기도 합니다. “종” 곧 노예라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신분입니다.
성경에서 노예가 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첫째, 과중한 부채를 지고 갚지 못했을 때
둘째,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때
셋째, 노예의 자녀로 태어난 일로 인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차피 무엇에든지 매인 신분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어떠한 멍에 아래 있어야 하느냐 입니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멍에라면 이 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불림 받은 멍에 아래서 더욱 충성을 다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시험의 종류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1:2)
시험은 각기 처한 환경과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1) 마귀의 시험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이 마귀의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공해 없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경으로, 잘 가꾸어 놓은 하와이에서는 근심이 없을 줄 압니까?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거기 가서 보낸 말년이 과연 행복했을까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본향 곧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동안은 본분과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5-16).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압니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으로,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으로, 정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이성으로, 물욕이 강한 자에게는 물질로, 명예욕이 강한 자에게는 권력으로 미끼를 던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올무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악한 날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죄 값으로 오는 시험
죄는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와 자범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장성택의 처형으로 극도의 공포분위기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기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므로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복음 통일을 위해서요, 또 동족의 피를 흘리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8-10).
3) 하나님의 시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여기서 우리는 시험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 미혹되는 것은 시험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여 올무에 빠져들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네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을 실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영원히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2. 시험의 필요성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힘든 것은 시험이라 생각됩니다. 시험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학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이 불가피한 것은 시험을 통해 실력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사냥에 능한 포수는 맹수를 만나면 기뻐하는 이유가 사냥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험 때문에 실족하는 자가 되지 말고 인내로 극복하여 더 큰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시험을 통해 누리는 복
인내는 단순히 받은 고통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는 고통은 많이 당하는 것이 불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확실한 목표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라면 고난이 닥칠 때에 인내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기를 원하신다면 인내하십시오. 우리는 욥의 인내와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인내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의 은택을 잊지 말라
시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2).
감사는 특별한 때를 찾아서 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아버지 목사와 아들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늦게 돌아온 아들 목사가 아버지에게 감사의 간증을 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앞으로 달려오기에 그 차를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혔는데 차도, 사람도 많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말입니다.
“얘야, 나도 감사한 일이 있다.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은혜를 깨닫는 지각이 귀중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1-4).
1. 마땅한 감사
감사를 모르는 신앙은 은혜를 망각한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는 예배는 의식에 그치고, 감사가 없는 기도, 감사가 없는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있는 약점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유는 내게 있는 약점이 나를 교만하지 못하도록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찌르는 가시로 나를 낮추신 주님께서 나를 더 귀하게 들어 쓰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마땅히 우리가 감사 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어떠한 장애가 있을지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도 건강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병약해도 주님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도 다른 사람같이 물질이 많으면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2:5).
나도 다른 사람같이 학벌이 있으면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였고 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육체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2. 감사의 방법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은혜를 욕으로 돌리는 일은 마귀의 일이요, 욕을 복으로 바꾸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난 주 시찰 교역자들이 백령도에 다녀왔는데 놀라운 일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육지에 사는 사람들보다 여유 있게 잘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70%에 천주교까지 하면 90%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북 황해도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들이 백령도에 와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는 천팔백육십팔 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평양으로 가서 대동강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많은 결실이 있습니다. 백령도에 있는 중동교회는 백삼십육 년의 역사를 지닌 소래교회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입니다. 지금은 군인교회도 있고 또 동네마다 교회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 누구보다 더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작은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촛불에 감사하는 자 달빛을 주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 햇빛을 주고, 영원한 진리의 빛을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충성된 청지기와 게으른 청지기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불만과 불평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불평, 원망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감사가 넘치고 마귀가 충만하면 원망이 터지는 것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는 천국의 소망이 없었으나 나사로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성군 다윗의 감사를 보십시오.
1)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은혜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을 무엇으로 대속해 주셨습니까? 그리스도 보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2)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은혜
의사에게는 불치병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서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3)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신 은혜
이 땅에는 천재지변뿐만 아니라 인재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며 청춘으로 새롭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 큰 복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농장
요15:1-8
우리나라에 보릿고개가 있을 때에는 농사를 지어도 가족들이 일 년 먹을 양식이 모자랐는데 오늘은 기계 영농에 또 특수 작물을 재배하여 농촌 수입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지난 주간 다녀온 백령도에는 일 년 지은 농사로 삼 년을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팬션에 관광버스도 몇 대씩 가지고 운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육지에는 IMF가 있었으나 거기는 불황을 모르고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1.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가 있는데 본문은 포도원 비유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농장을 개간하여 우량종을 심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농장에 돌 종자 곧 들포도를 내었다고 한탄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1-2).
우리는 열매 없는 포도나무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들 포도를 맺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9-17).
이렇게 이방인은 인간 무지로 심판을 받게 되지만 열매 맺지 못한 자들도 심판에 이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 없는 가지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지요. 주님의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진실한 복이 무엇이며 또 어디로부터 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열매 맺는 비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돌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 열매가 맺을 수 없듯이 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성령의 열매가 맺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은혜로 새사람이 되어 향유를 주님께 드리듯이 오늘도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이러한 고백이 어찌 바울에게만 있어야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정규 신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파송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는 사명감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중국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기자들이 그의 선교의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다만 성령이 나를 들어 쓰시는 일에 충성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은혜의 사슬에 매일 때 성령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
은혜의 단비는 위에서 임하지만 열매는 땅에서 맺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세상 농사는 수확기가 있으나 영적인 농사는 수확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6-17).
그러므로 잎사귀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하자 결실기가 아닐지라도 즉시 말라지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어느 때를 막론하고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 하나님께 돌릴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우리 모두 풍성한 결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눅12:41-48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성경에는 대조적인 예를 들어서 교훈을 많이 합니다. 본문에도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을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청지기의 신분
청지기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임무입니다. 어느 성도와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저는 사모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왜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일일이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모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여 꼭 사모자리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은혜가 아니면 어떤 십자가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매여 살며 또 누구를 위해 사느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참된 자유자 이면서 진리의 멍에 아래 있는 자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자유자인 것 같으나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 있는 노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1-36).
그러므로 바울은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하였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2. 청지기의 자세
1)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북한에는 백두대관의 혈통을 받았다 하여 김일성 혈족을 우상화하여 복종시키고 있는데 세계에서 둘도 없는 그 독재가 얼마나 오래갈지 두고 볼 일입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물주의 자리를 도전하던 마귀의 올무에 빠지면 망령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두로의 교만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큰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였으니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가운데에서 사람일뿐이요 신이 아니라”(겔28:2-9).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누릴 영광을 보십시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5-47).
2)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명과 직분이 있는 자는 그 분야에서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이것은 높은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3-17).
3) 영광을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청지기가 교만할 수 없는 것은 언제든지 주인이 맡긴 임무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자신을 낮추어 겸손했을 때에는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였으나 자기를 위해 승전비를 세우고 불순종했을 때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악신이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며 모든 영광은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3. 신분에 따르는 책임
청지기의 신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꺼꾸러진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부여된 임무입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여기에 바울은 절대 복종하였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5-17).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주 앞에서 충성하십시오. 구원받은 이 생명은 내 것이 아닌 주님의 보혈로 사셨으니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는 모두 복음의 빚진 자, 생명의 빚진 자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아 멘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삼상10:1-8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 기름을 부음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숨은 섭리를 깨닫고 그 뜻 이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사울의 겸손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사무엘에게 갔을 때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사흘 전에 잃었던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하시고 사울은 이스라엘이 찾는 자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삼상9:20).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달리 뇌물을 먹고 재판을 굽게 한 일로 왕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한 말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9:21).
사울의 겸손은 가식이 아닌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할 때 존귀하게 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2. 영감으로 아는 지식
특이한 현상은 사무엘이 당일의 일어나는 일들을 거울 같이 내다보고 사울에게 미리 말씀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진 자라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삼10:2-6).
유월절을 나눌 장소를 위해 제자들이 물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 하였더라”(마26:17-19).
진리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을 가진 자는 당일 뿐 아니라 십 년, 백 년, 천 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우리는 밝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발달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통령도 과학자도 부자도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케네디 대통령이 오스왈드의 총에 죽을 줄 알았다면 달라스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3.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선지자의 예언이 없었다면 사울이 당일에 당하는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가 특별한 의미 없는 일상생활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할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2-3).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이는 선지자 사무엘이 말한 대로 사울에게 하루 동안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조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의미 없이 생을 낭비해서 안 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 후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K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이 아직 믿음이 약해서 마치 순진한 아이들 같습니다. 그러니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목사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갑게 인사하시는데 저의 남편에게는 형식적으로 손만 스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사람 차별하는 교회에 나가기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예. 그래요. 그렇다면 집사님 집중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 다음부터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손을 잡아주었는데 효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목사는 두 손과 하나 뿐인 입으로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니 그것도 걱정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4. 기회를 따라 행하라
이는 기회를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성패는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 먼 곳으로 떠나면서 모두 동일하게 기회를 주었는데 주인이 돌아왔을 때는 달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충성된 청지기는 주인을 기쁘게 하였으나 게으른 청지기는 주인에게 무익하였기에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10:7).
이는 곧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무엇 때문에 구원해 주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을 이룩한 후 의의 면류관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유라굴로 태풍
행27:14-26
년 중 행사를 치르듯이 태풍이 왔는데 금년에는 한 번도 오지 않고 올라오다가 중국으로 또 일본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오면 태평양의 맑은 공기를 순환시켜 준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죄수로 결박 된 전도자 바울
사람이 죄를 지어 결박되었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시상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지만, 수갑을 찬 죄수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매를 맞고 또 법정에서도 당당했던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2. 전도자의 말과 선주의 말
바울은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머나먼 지중해를 거쳐 로마로 향하게 되었는데 풍랑으로 인해 그 길이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성지를 순례했을 때 터키에서 그리스 영토인 밧모섬으로 가는데 대략 조용한 날이었는데도 여섯 시간을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간신히 그레데의 미항이라는 항구에 이르러 여러 날을 머무른 다음 다시 행선하려 할 때에 바울이 권유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행27:10-11).
그때는 오늘과 같이 기상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으므로 경험 법칙에 의해 항해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험법칙이나 기상과학에 의한 것이 아니지만 더 정확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자연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기상과학도 백%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기상통보관이 쓰는 용어는 ‘대체로’ ‘비교적’ ‘가끔’ ‘흐렸다 갰다’ ‘비올 확률이 대략’ 얼마입니다 하는데, 하나님의 영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백부장이 누구의 말을 더 신임하고 따랐느냐 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행27:11).
유의할 것은 그때 누구도 지중해를 항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유라굴로 태풍은 자연현상일 뿐이지만 항해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재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전도자 바울이 있었으므로 유라굴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3. 출항의 결과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13절).
이것이 문제입니다. 근시를 가진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것같이 과학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을 피해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 내려가 깊이 잠들었을지라도 거친 풍랑이 요나의 가는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 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 마져 없어졌더라”(행27:14-20).
불원간 지구 종말의 유라굴로가 닥칠 것입니다.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에 노아의 홍수가 닥쳤듯이 마지막 불의 심판도 그렇게 임하리라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노아 여덟 식구가 살았듯이 마지막 심판 때도 약속을 믿고 깨어 있는 성도들이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구원의 복된 소식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21-22).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암흑과 절망의 유라굴로 태풍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살려내었다면 오늘도 동일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구원의 복된 소식에 귀를 기우리십시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영생의 복음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여호와의 구원
삼상14:1-7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1절).
사실 그때 병력이나 무기로 보면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 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삼상13:5-7).
사울의 곁에는 군사가 육백 명(삼상14:2)이요, 칼이나 창으로 무장 된 자도 없었습니다.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삼상13:22).
1. 할례 없는 자와의 전쟁
요나단에게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의 징표입니다.(창17:10).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구별시킨 이 증표가 있으므로 할례 없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모독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존심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14:21-23).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자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신앙인의 특징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사명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혼자두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위기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기회를 어떠한 행운으로 생각하지만 사명이 있는 자는 십자가의 도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어디서 왔습니까? 십자가로 인해서입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2:27-28).
헨리 나우엔의 ‘고난의 자리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훈련’을 소개합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기쁨은 행복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은 고통의 경험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고난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큰 고뇌를 겪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보다 더 큰 무엇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성인 아시시의 프란시스, 아빌라의 테레사 등 인간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더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고난과 기쁨은 반드시 긴장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의 고통을 집으로 데려갑니다(탕자와 같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 거하는 곳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선물이 있습니다.]
3. 합심하는 마음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7절).
사실 믿음이 아니라면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한 것은 이왕 죽을 목숨 빨리 죽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행동을 같이 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보십시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5-16).
이처럼 합심하여 기도하고 내리는 결단에 구원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
요나단이 세운 믿음의 작전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8-10).
성령이 내게 임하여 무엇을 명하든지 혈육과 타협하지 않고 결단을 내렸던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도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 있어서 안 될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십시오. 어떠한 징조가 내게 임하든지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떠한 문제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요나단과 그의 수종자에게 나타난 표징입니다.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를 대하여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하고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11-12).
하나님의 표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든지 기회를 잃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수에게 내리는 심판이 우군에게는 승리의 표징이 되고, 불의를 따라 내리는 종말적인 심판이 성도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날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보십시오. 누구도 대항하여 싸울 수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13절).
이 승리가 우리의 승리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찬에 임하는 자세
고전11:23-34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3-25).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대속의 은혜를 입어 새사람이 되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성찬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1.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8-20).
초대교회 성찬은 오늘과 달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으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성찬을 나눌 때 발생한 부작용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21절).
그리스도의 희생을 망각한 채 탐욕으로 성찬에 임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성찬의 의의를 바로 알았다면 그렇게 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학습을 받았다든지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 문답과 서약이 있기 전에는 성찬을 삼가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2절).
2. 회개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므로 회개할 일이 없어졌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으므로 반복해서 회개할 이유가 없다고도 합니다. 모두가 잘못된 이단들의 소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혈의 은혜는 만인을 대속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십자가 안에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이미 목욕한 자일지라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없다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 고난과 죽음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1:11-13).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없는 바울이라면 그가 진 십자가가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3. 믿음으로 성찬에 임해야 합니다.
성찬에 대한 견해는 캐도릭의 화체설과 개신교의 기념설 곧 영적 임재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성찬을 나누실 때 그 자리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살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라고 하시고 그 떡과 그 피를 나누어 주셨는데 유다가 구원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의 구원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
2)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유다가 헌금 도둑질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4-6).
유다가 삼년 동안 주님을 따랐고 그 말씀과 행적을 다 보았으나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참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이 믿음으로 영광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4.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육신의 사람이면서 또 영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동안은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시험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중요한 것은 육신의 양식이 영의 양식보다 우선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을 때 말씀과 기도로 성별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5. 주의 살과 피를 범하는 죄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27-30).
주님의 성찬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자기를 살피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울의 죄
삼상15:1-9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월권과 불순종이라는 두 가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불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정한 기일인 이레를 기다려도 길갈에 오지 아니한 일로 마음이 조급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자기가 드림으로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3-14).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왕이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월권하지 않도록 사울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 사정을 다 아시고 또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1-4).
1. 하나님의 명령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1절).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그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여기는 어떠한 선입관념이나 인간적인 생각을 가미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또 무엇이든지 “주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아멘”하고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는지 보십시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눅19:30-34).
사울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2-3).
사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다는 그 말씀에 한없이 감사드려야 하지요.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십니까?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입술로만 아니라 열매 맺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아말렉의 죄악
하나님의 심판은 다양합니다. 노아 때에는 물로, 소돔과 고모라에는 유황불로, 또는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기근과 병마로도 심판을 하십니다. 아말렉에 하나님께서 지금 심판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이 심판 받을 죄악을 보십시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신25:17-19).
아말렉에 이렇게 종말적인 심판을 내리게 한 것은 출애굽의 사건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은 단순한 민족 이동이 아니라 여기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17:16).
아말렉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을 선대한 겐 사람은 심판의 날에 구별시켜주었습니다.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에게서 떠나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6절).
3. 사울의 죄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띠고 출전한 사울이 하나님의 원수에게 어떻게 하였는지 보십시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9절).
하나님의 엄한 명령이 내렸는데도 좋은 것을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죄를 자행하면서도 사울은 자기를 위해 전승 기념비를 세웠는가 하면 사무엘에게는 핑계와 변명에 급급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2, 15).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변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0-11).
주님을 기쁘게 섬기십시오. 나를 선택하사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게 복이 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아 멘
교만의 죄
고전4:6-21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6절).
1. 교만이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지상 교회는 완전할 수 없으나 진리는 완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교회에 여러 가지 시험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1:10-12).
잘 유의해 보십시오. 여기 거론된 인물 곧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중에 진리에서 이탈된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가 주님의 신실한 일꾼이요, 충성된 종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두고 무슨 이유로 분쟁이 일어났을까요? 문제는 지각없는 행동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바울과 게바, 아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들로서 마땅히 존중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이 기뻐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분쟁에 끼어들기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분쟁에는 지도자의 책임이 있을 수 있으나 성장한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4).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는 영적인 귀가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충만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아볼로나 게바를 지지하는 자들이 바울에게 은혜받을 수 있을까요? 어려울 것입니다. 또 바울에게 속한 자라면 아볼로나 게바에게서 은혜받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서 예수님이 다스린다 할지라도 과연 원만한 정치를 할 수 있고, 노사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은 개인보다 당을, 당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어쩐지 모든 것이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본분을 망각해서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1:13).
옳습니다. 교회의 분쟁으로 마귀가 기뻐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2. 교만은 진리에서 탈선하게 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6절).
마귀는 인간을 저주받게 하는 타락한 영물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고,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고, 유대인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8-49).
이것이 마귀의 교만이요 또 미혹된 자들의 교만입니다. 자기 지위를 탈선한 마귀가 받는 심판이 오늘도 교만한 자들에게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딤후3:8).
그러므로 마귀의 교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지위를 지키고 이탈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3. 교만은 은혜를 배역하게 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은혜로 사는 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은혜를 배역하지 마십시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동방의 의인 욥은 그의 아내까지도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아마도 욥은 자기 아내가 그렇게 독한 여자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들까지 다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의 대답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2:1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십니까? 겸손하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50:22).
교만하여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교인들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4:8).
그들은 이미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고 본을 보여야 할 성도들이 교만이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노예로 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실천으로 보인 교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9-11).
이것이 바울의 불행일까요? 진정한 존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아 존귀의 복을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아 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14:1-3
요한복음 십사 장에서 십육 장까지는 주님의 고별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도 합니다. 세상에 근심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심을 떨쳐버리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치는 사람이 OECD국가 중에 일위라고 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근심을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근심이라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1. 근심의 요인
1) 죄값으로 오는 근심
인생에게 근심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일로 인해서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릅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곰과 사자도 싸워 이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가 다 두려워하던 골리앗도 풀맷돌로 꺼꾸러뜨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두려움이 있었습니까?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일로 인해서였습니다. 정욕을 다스려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1:15).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미키 쿠로스는 원래 뉴욕 암흑가의 왕초였습니다. 그는 뉴욕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곧 음란, 방탕, 살인, 방화, 도둑질 등 닥치는 대로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회개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가 남긴 자서전을 보면 그는 “원하는 것 즉 돈, 여자, 술 등 무엇이든지 다 가져 보았으나 여전히 만족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마음이 불안하여 밤마다 침실에는 열쇠고리를 몇 겹으로 하고 베개 밑에는 총탄을 장전한 권총 두 자루를 넣어 두었는데 이는 항상 보복하는 자가 자기를 죽이려 들어올까 불안해서였다” 고 했습니다.
악을 뿌리는 자는 독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2) 생의 문제로 인해서입니다.
우리는 당대에 원시적인 삶에서 시작하여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로 꿈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월남전에 파병될 때만 해도 수세식 변기를 알지 못해 군함을 타고 보니 수세식 변기가 있는데 그것을 세수대로 착각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할 때만 근심이 있었고 오늘에는 없을까요? 지금은 바이러스를 비롯한 각종 질병과 성인병으로 더 심각한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암을 다스릴 수 있다면 이년을 더 살 수 있고, 비만을 다스리면 칠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피난할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피난할 곳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향락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연약함으로 인한 근심입니다.
아이와 노약자는 눈물이 많은데 이는 눈물샘이 많아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은 눈물이 없을까요? 연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2. 하나님의 보장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철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궁극에 가서는 무에 이르지만 믿음은 증거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사실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은 추상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반드시 동사가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막연한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증거 있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사자굴과 풀무불에 들어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증거를 받았던 것같이 믿음의 선진들이 다 증거를 받았던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보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절).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보장을 믿음으로 받은 것같이 선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의 보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보장을 보십시오. 이 영원한 사랑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3-9).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껏 빈 그물만 던지는 제자들을 찾아 주시고,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평강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구원에 이르는 길
딤전4:12-16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딤전4:7-9).
과연 주의 사역에 진력하므로 자신과 또 듣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전도자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12절).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는 나이와 성별에 관계 없이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전도자의 삶이 복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경건을 보십시오. 그는 어릴 때 부모 품을 떠나 하나님의 집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3:19).
복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은 신앙이라면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2-13).
2. 예언으로 받은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귀한 줄 알았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보화가 담겼으면 보화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14절).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남미 사람들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몰랐을 때에는 굴러다니는 돌로 취급을 하였으니 백인들은 그 가치를 알았으므로 값싼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재물이 많은 일로 주님을 등진 청년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지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포기한 바울은 영원히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대단해서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세계적이요 역사적이므로 이 복음으로 인해 세계적이요 역사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일
복음을 위해서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일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식당이 망해가는 5가지 특징
1) 주인이나 종업원 모두 열정이 없다.
2) 확실한 목표가 없다.
3) 자신감이 없다.
4)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5)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로버트 어바인)
약간의 미친 기가 없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고, 흥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대하고 장엄한 연설이 나온 적이 없다. (아리스토 텔레스)
열정은 인생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불꽃이다. 펄펄 끓는 물만이 수증기를 발생시킨다. 수증기가 없이는 증기엔진을 일mm도 움직일 수 없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미지근한 물로 기관차를 움직이려 하는 사람과 같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불가능하고 안 된다는 핑계뿐이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명심하고 복음사역에 전심전력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위해 얼마나 충성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피 흘리신 복음을 땅에 묻어두는 게으른 청지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잘했다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가르치는 은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야3: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는 선생 된 자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 배우는 자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미혹하는 자를 주의해야 합니다. 마귀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택한 자들을 실족시키기 위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절).
또 철저한 사명 의식이 중요한 것은 사명 자에게 책임과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제가 군에서 만기 제대를 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를 건축했는데 성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있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사님, 그때에 내 신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영생 길은 유일합니다. 이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 초대교회와 같이 불타는 사명 자들의 발길을 통해 온 천하에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평화의 소식
눅2:8-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이천 년 전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밤하늘에서 울려 퍼진 천사들의 노래입니다.
1. 하나님의 낮아지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도성인신의 진리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축출된 것이 인간에게 죽음이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것도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2:14).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구주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며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쏟으면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죽음에 던지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슬픔도, 눈물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탄식하셨고(창6:6), 예수님이 탄식하셨고(눅13:34), 성령이 탄식하십니다(롬8:26).
그런데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찬양은 구세주 탄생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생명으로 인해 받으실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의 의미도, 기쁨도 사라질 것입니다. 운명론을 말하는 자도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불신하고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입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영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순종이 귀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요, 순종의 종교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구주이십니다. 오늘 우주 과학이 대기권 밖을 여행하는 세상이 되었으나 과학으로 죄인을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거듭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동에서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사막을 헤매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공자는 “사람은 그런 곳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길을 잘못 들었구나” 하였고 석가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고생을 하는고” 하였고, 마호멧은 “아, 모든 것이 알라신의 뜻이다.” 하였으며 힌두는 “용기를 잃지 마시오. 죽은 다음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테니” 하였는데 예수님은 “형제여, 손을 내밀어라.” 하시며 붙들고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3. 땅에서는 평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이 성탄의 복된 소식은 온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의 복음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1-13).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또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성탄을 맞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화답하는 영광스러운 예배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0-12).
이 복된 소식이 땅끝까지 퍼져서 만민이 구원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교육의 목적
행22:1-3
짐승이 짐승 구실을 위해서는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은 무한한 자원을 개발하고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이십억 이상의 세포가 있다고 하는데 천재 아인슈타인이 18% 활용했다고 하니 일반 사람은 몇% 활용하다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뇌세포가 가장 먼저 부패하게 되므로 염을 할 때 입과 귀와 코를 막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작은 영토에 부존자원도 빈약하므로 대부분 외국 자원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력자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외국 근로자들이 와서 일하고 지금은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적으로는 인적 자원을 개발하여 고급 인력을 키워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자원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일반적인 교육
사람은 교육에 따라 인격이 달라지고 그 인격에 따라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 교육에 모두가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풀리기를 잘해야 합니다. 명문대학을 나와도 잘 못 풀리면 별 볼 일이 없는 사람이 되는가 하면 학벌이 없어도 근면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합니다.
vision은 지도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시력은 있지만 vision이 없는 사람입니다.”(헬렌 켈러)
재일교포 소프트 뱅크 손정의 회장의 말입니다.
“육체는 심장이 멎을 때에 죽지만, 영혼은 꿈을 잃을 때 죽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눈앞만 보기 때문에 멀미를 느낍니다. 시야를 넓히십시오. 그곳은 잔잔한 물결처럼 평온합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오늘을 지켜보고 사업을 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2. 진리의 교육
미국 LA에는 수차례 우주 왕복을 한 비행기가 수명이 다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모든 물건은 용도를 따라서 만들어지는데 어떤 물건이든지 제 용도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로서 폐기 처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의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부여되는데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본분을 저버리면 책임이 따르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2-13).
사람은 평생을 배워야 하지만 어릴 때의 교육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갈 때에든지 누어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오늘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통곡의 벽에서 미간에 이 성경 구절을 붙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 배우는 자세
스승 중에서 스승이 있다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밤에 와서 주님께 중생의 진리를 배우고 새사람이 되었으나 교만한 자들은 주님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8:49).
누가 주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까?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교만이 들어간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삼 년이나 주님의 교훈을 받았고 그 행적을 보았으나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감히 성물을 도둑질 하면서 주님께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등을 적시는 여인을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먹는 자가 마지막 성만찬 자리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으면서도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는 말씀에 “나는 아니지요”(마26:25) 했습니다.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바른 교훈의 효과
우리는 교육의 효과가 어떠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전문분야의 교육은 그 사람의 인격과 직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법률 공부를 전공으로 하면 법조인이 되고 의학공부를 하면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교육을 바로 받으면 영의 눈이 밝아지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4-15).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천국 가는 길은 자동장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입니다. 이는 요3:16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이제 나는 천국의 비행기를 ‘자동장치’로 해 놓고 뒷자석에 앉아 평안히 천국으로 가면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사로잡힌 사람은 언젠가는 큰 환멸을 느껴서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는 자동장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선택은 우리 영혼의 원수들에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동조정 장치에 의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영적 무감각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영적 무감각은 폭군과 같아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A W 토저
안일은 금물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을 더 가까이 하십시오. 모두가 진리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푯대를 향한 전진
빌3:13-16
세상은 끊임없이 변할지라도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갔고 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향방을 잃고 방황하다가 어둠으로 사라져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원한 빛을 남긴 분들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 빛을 발견하고 또 빛을 남긴 한 사람의 발자취입니다.
1.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사람이 급한 일을 당하거나 궁지에 몰리면 사방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도록 뒤에나, 위에 눈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눈이 위에 있으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허영에 들떠 위로만 지향하다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눈이 뒤에 있는 것 역시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데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향방을 어디로 정하느냐 입니다. 추억이 그리워도 뒤를 돌아갈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과거만 정리한 것이 아니라 현실도 초월하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우리들도 허탄한데 뜻을 두지 말고 푯대를 바로 세우고 힘차게 전진하여 영광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2. 뒤를 향하는 자의 불행
자동차에는 후진 기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향을 잡기 위한 것이지 계속 뒤로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울 것이 많다할지라도 과거에 매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애굽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그리워하여 되를 돌아보는 자에게는 위에 있는 천국 길이 막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1서2:15-17).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
1)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아직도 경건생활에 장애가 되는 구습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청산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일이 있습니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 좋은 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물론 좋은 일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땅에서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좋은 일을 했다고 자랑하면 더 큰 일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소망의 별들이 가려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 곧 꿈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늙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이 생기게 하지만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잃으면 영혼에 주름살이 생긴다.” (더글라스 맥아더)
뒤에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더 힘찬 전진을 위한 것입니다.
1) 진리의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푯대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실패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려면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2) 기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룬 사람들 대부분은 일찍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침에 기도하는 일에 투자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날에 하나님을 찾는 일에 별로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침 활동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분은 맨 마지막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목마르고 굶주렸기 때문에 날이 밝기도 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갈망하셨기 때문에 새벽 미명 또는 밤이면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일찍 일어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E.M 바운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숨은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그 밭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같이 우리도 기회를 잃지 말고 진리를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세상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성숙해 가는 교회
엡4:13-15
사람은 날 때부터 이목구비를 다 갖추어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기 위
해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기를 거치는 것입니다. 이같이 성도들의 신앙도 성숙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 아이들의 특징
훌륭한 학자나 성인들도 다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에 맞는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에게도 성인들이 배워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를 천국의 표상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6-17).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아이들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1) 모든 것이 미숙합니다.
신경 반응이 늦기 때문에 주사를 맞을 때에도 빼고 나면 그때에야 ‘으앙’ 하고 소리 내어 울지요. 또 동작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보호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분별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면 입으로 들어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2) 본능적인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유대인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아 때의 즐거움은 입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심지어 공갈 젖꼭지라도 입에 물리면 잘 놀고 잠도 잘 잡니다. 어른 들이 볼 때는 우스운 일이지요. 영적으로 어릴 때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리와 은혜보다 부자 되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건강해지는 복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육신에 속한 것들입니다. 물론 그런 것을 죄악시해야 할 이유가 없을지라도 궁극적인 목적은 십자가의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를 먹고 주님을 찾은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요6:26-27).
3) 선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담의 후예는 옳은 교육은 스승을 두어도 쉽게 배워지지 않는데 나쁜 것은 저절로 익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말과 행실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2. 성장하는 믿음
믿음의 성장은 연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성장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사람이 살았을 때 하루에 세끼를 먹었다면 죽어서도 식사 때마다 그렇게 해야 할 텐데 일 년에 한 끼 먹고 살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육신은 땅에서 취하였기에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육신의 양식을 필요로 하지만 속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2-103).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9-10).
이 진리를 깨닫는 지각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3. 기도로 성장
신앙의 성장은 이목구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확신 곧 믿음의 증거를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어떤 말로 강조해도 부족할 줄 압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또 폐활량이 좋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없이 일어난 역사가 없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무기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논리에 맞추어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응답을 받게 됩니다. 기도는 또 금식을 하면서 올리는 기도, 철야기도도 있습니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글입니다.
[산시성에서 정기적으로 금식 기도하는 중국인 크리스쳔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금식이 주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거룩한 도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금식을 싫어합니다. 금식은 진정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금식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 사역의 가장 큰 방해꾼은 스스로 능력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고작 한 끼의 음식에 의지해야 하는, 그런 약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금식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과 장성한 사람의 믿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역에서 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이 시대 어떤 정치인들이나 과학자들, 경제인들에게 맞기지 아니하시고 복음의 증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 권능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땅끝까지 전하는 증인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사마리아 전도
행8:4-13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이후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어 첫 순교자 스데반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사울은 증인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박해하므로 사도들 외에는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헤어진 동기가 박해로 인해서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박해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은 사람이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오대교리 중에 “불가항력적 은혜”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에는 인간의 항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역사에 복종하므로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1. 사마리아 전도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4km 떨어진 지역으로서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후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갈 때 이방인을 사마리아로 옮겨와 살게 했던 것입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왕하17:24).
그 이후 이스라엘의 남아있던 자들은 이방인과 혼혈족이 되므로 유대인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6-9).
2. 빌립 집사
어떤 사람은 빌립을 열두 제자에 속한 사도 빌립이라 하여 본장은 사도행전 9:31 이후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하지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빌립은 스데반과 함께 일곱 집사에 속한 사람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을 돌아올 때,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행21:8-9).
분명한 것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행6:3).
3.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의 열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불씨가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증언한 복음입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25-33).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이처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역사를 보십시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5-8).
빌립이 언제 병원사업을 하여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자선사업으로 그들에게 이런 기쁨을 주었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유대광야로 내려가서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26-36).
4. 사도들로 인한 중생의 은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14-16).
유의할 것은 병을 고치는 은혜와 중생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축출할 수 있습니다(막16:17).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중생의 은혜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17, 20).
5. 마술사 시몬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9절).
마술의 본 고장은 애굽인데 그 당시 중동에서도 많이 성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칭 큰 자라’하여 마술로 무리들을 미혹하였는데,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0절).
‘자칭 큰 자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기도할 때 시몬이 무슨 말을 했는지 보십시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18-19).
그가 마술로 사람들을 속여 돈을 벌었기 때문에 또 그렇게 하여 돈을 벌기 위해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라”(마10:8).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한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0-23).
하나님의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혜로 사는 몸, 우리 모두 이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뜻
살전5:12-22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1. 너희끼리 화목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
하나가 되는 비결은 서로가 존중하고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조직이든지 하나가 되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폭발적인 믿음으로 선교에 불타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 된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 되기 위해 주님께서 올린 기도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0-21).
2. 모든 사람을 대하여 인내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14절).
어디를 가든지 한가한 사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생을 낭비하는 사람을 통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권계하여 자기의 삶에 충실하고 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14절).
심약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약점을 악용합니다. 왕따는 학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폭력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약점을 악용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요 또 마귀가 기뻐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14절).
사람은 자라면서 철이 들고, 믿음은 성장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인내를 보십시오.
“그들은 나희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 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7-18).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15절).
기억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악하다고 같이 악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무기는 선에 있습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선한 열매를 어느 때에 맺을 수 있습니까? 자연의 세계에서는 계절에 따라 맺게 되지만 성령의 열매는 계절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 열매 맺을 기회를 맞을 때에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복 받을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요12:8).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2).
4. 항상 기뻐하라
영국의 어느 회사는 사원들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신사 마네킹을 만들어 그것을 주먹으로 두들기게 했는데 그 마네킹은 맞을 때마다 비명대신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므로 쌓여진 스트레스가 풀어져서 새로운 의욕을 품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삶의 윤활유입니다. 기쁨은 병들과 환난과 고통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5.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무한한 자원입니다. 그럴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의 탄식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면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온갖 좋은 것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6. 범사에 감사하라
과연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있으면 지각이 열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하나님의 뜻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대학에서 선택과목은 필요를 따라 수강하면 되지만 필수 과목은 수강하여 점수를 얻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진리이지만 그 속에는 값진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실패의 고통에서 감사를 발견할 때 실패는 복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병약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 그 병은 은혜의 샘이 될 줄 믿습니다. 가난의 고통이 있습니까? 은혜를 깨닫는 순간 더 보배로운 믿음의 부자가 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전 수상은 남들 같이 잘생기지 못한 얼굴을 하나님께 감사함은 못생긴 얼굴 때문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범사에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기원합니다. 아 멘
주의 날을 대비하라
눅21:5-24
누구도 알 수 없는 날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죽는 날과 예수님이 오실 재림의 날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후에 받을 심판은 모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죽음이 분명한 것같이 종말적인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도 분명한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질문
본문 말씀은 마24장과 막13장과 함께 복음서에 있는 묵시록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5절).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성전이 아닙니다.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함께 훼파고 스룹바벨이 지은 제이 성전에 이어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BC사십육 년에 걸쳐서 건축한 제삼 성전입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6절).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유형자 필멸”이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잘 지어진 건물이라도 수명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날이 이르면’ 이라고 하신 뜻은 자연적인 수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절).
오늘에 와서 보면 주후 칠십 년 로마의 Titus장군에 의해 무너진 것은 지나간 역사이지만 주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는 예언입니다. 신약성경의 연대를 볼지라도 사도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다 기록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되고 주님께서 만민을 다스릴 세속적인 꿈이 있었으므로 자리다툼까지 하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5-37).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22:24).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아무리 지상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여도 세속의 나라는 천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사상으로 미혹의 역사는 오늘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5:6-7).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2:3-4).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절, 마24:5, 막13:6).
그들은 모두 양의 가죽을 덮어 쓴 이리들입니다.
3. 심판 전에 일어날 징조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9절).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은 소나기가 내릴 징조라면 난리와 소요의 소문은 국지적인 재난입니다.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0-11).
세계 이차전쟁 후 일본이 다시 재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급성장한 경제력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미국 본토에까지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북한도 핵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류 종말을 치닫고 있는 징조들입니다.
4. 환난 중에 베푸시는 은혜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2-13).
그 때에 성도에게 박해가 따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감사할 것은 주님의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 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4-15).”
5. 예루살렘의 멸망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0절).
이 말씀은 주후 칠십 년에 로마에 함락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유의할 것은 그 이후 오늘까지 다시 성전이 복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율법주의자들의 심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멸망이 지구 종말의 모형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일하신 주님의 손길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심판과 종말적인 심판을 동일선상에 두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날이 눈앞에 다가 왔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우리 모두 그날에 부끄럼 당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눅21:29-36
전쟁중에 있는 군인이 전쟁 중에는 무장을 풀 수 없는 것같이 영적인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이유는 원수가 밤에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맥스 루게이도의 응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글을 인용합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한 때 그랬었다.”
“여태 그랬다.”
“앞으로 그럴 것이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편으로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순간, 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고, 내일 다시 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보다 당신께 더 가까우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당신이 잘한다고 커지는 것도 아니요, 당신이 못한다고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편이십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경주를 응원하고 계십니다.]
1.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29절).
무화과나무를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계절적인 변화를 통한 징조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무화과나무에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른 해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32절).
여기에서 우리는 종말적인 해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임박한 심판을 대비하지 아니하고 이천 년 후의 종말을 생각했다면 그것이 올바른 신앙일까요? 그럴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수명이 그렇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당시로서는 예루살렘 멸망이 종말적인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역사적인 심판을 거울삼아 개인적인 심판과 인류 전체에 내리는 종말적 심판을 대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 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22:44-46).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처럼 울부짖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잠잘 수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는 맹세코 저주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고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각자에게 닥칠 심판을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독립된 개체이므로 죄에 대한 심판도 각자에게 있으며, 구원받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렘31:29-30).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4:14).
스스로 삼가지 않으면 세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L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주변에서 정치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하는데 세상 정치는 술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경건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직장 생활도 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술을 안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또 재리의 유혹과 이생의 자랑,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30:7-8).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4.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35절).
종말적인 심판은 순식간에 닥치는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야 할 것은 그 날에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절).
우리 모두 그 날이 영광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