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16
감히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사무엘이 왕과 백성 앞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 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삼상12:3-4)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인물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는 많은데 과연 인격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교사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주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을 교육한 과정을 살펴보면 지식 교육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교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감히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울의 믿음을 보십시오. 이는 결코 교만해서가 아닙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이렇게 전진하는 믿음 곧 끊임없이 성장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5-16).
안일과 나태, 방심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 바울의 칭찬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2절).
1) 바울을 기억한 일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했습니다. 양이 목자를 등지고 세상과 가까이 한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4:10).
지옥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속히 목사님을 불러 달라.”라는 말을 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문도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병원 응급실에 가서 손을 얹고 기도하는 시간 환자가 정신이 돌아와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남편 강신조 집사님 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지집사는 목사님만 찾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모하는 믿음이 없으면 목사를 찾을 이유가 없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새벽 예배 1부, 2부를 자유롭게 참여할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기 쉬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명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립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2) 유전을 지킨 일로 인해서였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이 지킨 장로의 유전이 아니라 새로운 유전, 곧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지키는 유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유교와 불교가 어느 때부터입니까? 교주의 탄생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천 년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전부터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창조의 근본과 또 영원의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믿는 사람이 국민의 사분의 일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국가에서 어떠한 행사를 가질 때는 우상을 섬기는 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상을 섬기는 풍속이 속히 청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참된 경건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창조의 질서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3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세계나 인간사회 할 것 없이 조화와 질서가 있을 때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이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빛과 어둠, 윗물과 아랫물, 육지와 바다,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인간을 조화롭게 창조하심으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할 줄 모릅니다. 어떤 그림은 제가 보기에는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그려놓은 것 같은데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아는 자의 눈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남녀 간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나 ‘여자가 쓰지 않고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위에 둘지니라”(8-10) 하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천사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우리의 예배를 지키는 수호천사를 뜻합니다.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지금까지 지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남녀의 구별과 질서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15절).
3. 창조의 목적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
남녀의 관계는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오래 사는지 수명을 비교해 보십시오. 통계학 상으로 보면 6-7년을 여자가 더 오래 삽니다. 그런데다 또 부부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4-5년 연상입니다. 그러고 보니 10년은 남자가 빨리 죽는다는 계산입니다. 여성도들에게 당부 드립니다. 나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실 남자를 측은히 여기십시오. 제발 기를 꺾으려 하지 마십시오. 또 남자들은 자기가 빨리 죽을 줄도 모르고 여자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 데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아침마당에 장애를 가진 부인을 둔 젊은 부부가 나와서, 사랑은 “베푸는 것이라” 행복은 “책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 된 꼬마가 10년 위의 색시를 맞아 장가를 갔는데 신랑노릇도 못하면서 색시를 여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어른들이 집을 비운 시간을 틈타 신랑을 덜렁 들어 지붕 위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부모님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얘, 너 왜 지붕에 올라갔느냐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하고 묻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부인이 야단맞을 것 같아서 “색시야,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 하였더니 어머니는 보기가 너무도 불안했던지 “아무거나 따서 속히 내려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꼬마 신랑 하는 말 “색시, 오늘 내가 한마디만 뻥긋했으면 죽을 뻔했지?”했더니 그날부터 자기를 덮어준 꼬마신랑이 고마워 잘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현명한 자는 발밑에서 행복을 키운다”(제임스 오펜하임)는 말이 있습니다.
5여전도회에서 장애인들을 찾아 봉사하는 중에 많은 은혜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입니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할 때에 거기서 맛보는 기쁨일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거기서 누릴 복은 생수와 같아서 갈한 심령을 해갈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합심하여 그리스도 예수만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득히 풍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