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고전 7:17-24
얼마 전 황당한 기사를 보았는데 미국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 곁을 몇 년간 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아버지는 어머니로, 어머니는 아버지로 변해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도 없게 되어 ‘아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남자나 여자, 흑인이나 백인 모두가 불만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살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은혜가 임하면 병든 것이 감사로 변할 것이요, 가난한 상태에서 은혜를 받는다면 마찬가지로 지족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7-18).
할례의 문제가 오늘 우리와는 무관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지라도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5) 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16:1-3) 하였습니다.
1. 할례의 유래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증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9-13).
여기서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얻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11) 하였습니다.
또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이삭과 함께 유업을 나눌 수 없었으므로 아브라함에게 쫓아내라 하였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몸에 있는 표시가 우리를 의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2:13) 하였습니다.
2. 할례의 효험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18-19).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갈2:3-4).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 하였습니다.
이처럼 할례뿐만 아니라 성찬과 세례, 또 우리의 올리는 예배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의식에 그친다면 메마르고 건조한 종교의식에 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하였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세리와 창기의 기도를 들으신 이유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용이 결여된 예배라면 의식에 그칠 뿐입니다. 신앙의 연조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예배로 향기를 풍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고 사유의 은총을 맛본 자만이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참된 자유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20-21).
옛날에는 돈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날 때부터 노예의 멍에를 운명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렘2:14)하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으므로 죄악의 멍에 아래 매여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3-24).
문제는 자유자로 생각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매여 종살이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독약-
“어느 날 사탄이 열 개의 병을 들고 한 청년을 찾아와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이 있고 한 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청년이 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유혹하는 사탄의 간청에 넘어가 ‘열병 중에 딱 한 병인데...’ 하며 떨리는 손으로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청년은 돈을 많이 받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이번에는 아홉 개 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안하였고 청년은 그렇게 하여 큰돈을 손에 넣게 되었으나 그때부터 방탕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알콜과 마약중독으로 허물어져 가는 생활 속에서 계속하여 사탄을 불러대어 남은 것을 들이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두려움도 사라져버리고 마지막 남은 두 병을 앞에 두고 ‘돈벼락이냐, 죽음이냐’ 하며 마지막 승부를 거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또 마셨는데 이미 세월은 흘러 청춘은 사라지고 노년이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끝까지 살아나고야 말았어! 이제 어서 돈을 내놔라.” 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어쩔 줄 모르는 노인에게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병을 마시면서 “후후,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지. 그러나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어! 너는 돈이란 종이에 얽매여 살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버렸으니 이제까지 받은 돈의 대가를 지금부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고통과 함께 지불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은 충직한 하인이 될 수 있지만 폭군도 될 수 있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돈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침묵하게 됩니다. 돈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면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늦게야 알게 될 것입니다.
칼 매닝거는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리고 무한한 가능성과 창의력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열등의식, 죄책감, 부정적 의식구조는 내 속에 있는 숨은 보화를 영원히 매장시키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어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절).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멍에 아래 들어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5:13)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건하여 승리한 바울 같이 우리도 주 앞에 서는 날 의의 면류관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