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난
바울의 고난
고전 4:9-13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온다면 구원받기를 위해서 또는 복 받기를 위해서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는 일반사람들이 자랑하는 부귀와 영화,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네 번이나 결혼을 하고 또 많은 재산은 가졌으나 번민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알콜 중독에 자살로 생을 마쳤는가 하면 문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모파상도 42세에 자살을 시도하고 43세에 정신이상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없는 삶의 전부입니다.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받을 고난의 십자가를 거두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므로 영원한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고난이 주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면 어떠한 믿음의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마땅한지 깊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1. 고난의 원인
천국에는 눈물과 이별,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많은 남녀들이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하고 돌아선다고 합니다. 금고에 구멍을 뚫다가 붙잡힌 자에게 “왜 이런 짓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장사 밑천 마련하여 잘 살아보려고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자는 “외국으로 나가서 멋지게 살고 싶어서”라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평화를 그처럼 열망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도 자살 테러공격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 설립된 UN이 건재하지만 여전히 지구상에 일어나는 전쟁과 분리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 이러한 불행이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선악과로 에덴에서 축출될 때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죄의 보응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스도 밖에서는 세상 어디에서도 참된 평안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고난의 성격
1) 죄 값으로 받는 고난
고난은 한 마디로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행이 내게 미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에 사울의 족속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며 저주하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16:7-8).
그러던 그가 반역자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승리하여 다시 요단을 건너려 했을 때 또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삼하19:19-20).
그때 다윗이 스루야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시므이는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삼하19:23) 하고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질은 죄는 끝까지 올무가 되어 그의 생명을 찾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대를 이은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자 시므이를 불러서 한 말입니다.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왕상2:36) 하였는데 삼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종들이 가드로 도망간 일로 인해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심는 대로 거둔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 받을 자는 복 받을 일을 하고 저주 받을 자는 저주 받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 받을 대열에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모두가 죄에는 무관하고 복 된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애매한 고난
사람이 사는 동안 욥과 같이 까닭 없이 닥치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2:19-20).
뉴욕의 튜윈 빌딩을 충돌하는 비행기 테러 사건을 보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저런 바보 같은 조종사가 있느냐”고 화를 냈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조차 예고 없이 닥친 테러사건을 방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엄마 나 죽을 것 같아. 나 두려워”
“여보, 아이들 잘 부탁해! 사랑해” 라는 마지막 말들을 남기고 순식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경우 각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각기 믿음 여하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일어난 일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것을 자신에게 팔기를 요구하자 나봇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산은 지키기로 서약하였으므로 아합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마음에 근심하여 식사도 거르는 것을 보고 왕후 이세벨은 비류 두 사람을 내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며 돌로 쳐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일이 있었습니다(왕상21:7-16).
이처럼 우리는 때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주님께서 더 큰 위로와 소망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하였습니다.
해비타트(Habitat) 운동의 창시자 밀라드 훌러(Millard Full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으나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고, 또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 린다(Linda)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라는 쪽지를 남긴 채 가출해 버리자 여기서 충격을 받아 모든 재산을 복지 재단에 기증하고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가서 3년 동안 봉사하고 돌아와서 이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지금까지 주택 10만 채를 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일원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무더운 여름에 못질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것도 귀중한 일이요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이 일도 그처럼 보람을 느낀다”고 하여 모두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80세 된 노인이 재산이 많으므로 오래 살고 싶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릴테니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네 재산 전부를 바치겠다고 했으면 2천 년을 살게 해 주었을 텐데 절반만 바치겠다고 했으니 나도 절반을 잘라 천 년을 더 살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부자는 일천 년을 더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이제 내가 천 년을 살게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따지기를 "왜 천년을 더 살게 해 주신다고 하시고 하루 만에 이렇게 부르셨습니까?” 하였더니 “너는 성경을 알지도 못하느냐 성경에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허무에 그치는 것임을 분별했다면 오늘을 후회 없이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선을 위한 고난은 그 자체가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을 위한 고난
주님을 위한 고난은 성도로서 하늘의 상급이 기약된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절) 하였습니다.
사형수들이 인권을 내세우며 자유를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라면 자기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사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것이 더 큰 영광인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10-13) 하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자신은 불행하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기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십자가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도리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안일하게 살지 못함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신앙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십시오.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쓴 바울의 이름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면류관입니다(딤후4:8).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영광임을 알았다면 우리 모두 그날에 받을 상급을 위해 십자가 바로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