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를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16-34
바울과 실라는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결실을 얻은 후, 이제는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소득원을 잃게 된 주인이 전도자를 고발하여 관가에 넘기므로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매질하고 그 발을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일으켜 차꼬와 옥문이 열려지게 하므로 결국 간수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1. 귀신들린 자들 통해 재물을 얻은 사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나 남을 죄 짓게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더 잘살기 위해서는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라면 먼저 귀신을 축출하고 건져내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를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는 도구로 삼는다는 것은 돈을 위해 영혼을 팔아먹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특이한 현상은 그렇게 귀신들린 자가 전도자들을 따라 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고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군대 마귀들린 거라사 거인이 예수님을 먼저 알고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애원했던 일이 있었는가 하면 야고보 장로도,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하였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성결하고 정절을 지키며 절제하는데 귀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7-18).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는 말씀은 바울의 인내에 한계점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로는 귀신들린 여자를 불쌍히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귀신이 나가자 그 여자의 입은 다물어졌고 마음은 새로워져서 귀신의 멍에아래 종살이 하던 여인이 이제는 해방되어 자기 인생을 바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도자들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귀신들린 여자를 통해 수입을 올리던 주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가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는 귀신들린 여종이 고침 받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에게 수입원이 끊어진 것만 문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도자를 고발한 죄목을 보면,
1) 유대인이라는 것
2) 성을 요란하게 하는 자
3) 로마인에게는 받지도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든지 악의 원인은 돈이다. 오오 이 고도의 잔인성이여 저들은 이 여자가 그대로 마귀에 들린 채 돈만 벌게 되기를 원했다." (Chrysostom)
그렇게 전도자들은 죽은 자, 병든 자, 마귀에게 얽매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둠의 권세를 대적하여 싸우는데, 불의한 자들은 자신의 사욕을 위해 진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 밤중에 울려 퍼진 기도와 찬양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22-23절).
뉴욕 맨하탄 거리에 60층 빌딩을 가진 프랭크 우르우즈에겐의 이야기 입니다. 그는 무남독녀를 키웠는데 딸이 난봉꾼에게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낳고 자살해 버리자, 아버지도 그 충격으로 67세에 돌아갔습니다. 수천억의 상속을 받은 일곱 살짜리 외손녀는 자기만 위해주는 환경에서 자라나 시집을 갔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일곱 번째 결혼을 하고 1979년 어느 호텔 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10대 소녀들에게 수천, 수만 평, 수십억의 주식과 부동산을 상속하여 평생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전도자들을 송사하는 무리들이나 옷을 찢어 매로 치고 옥에 가두게 한 상관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였을까요? 전도자들에게 닥치는 고난은 불행이 아닙니다. 사실 전도자들도 인간적인 생각에서라면 할 말이 많겠지요. '하나님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 극하여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었고, 소망 가운데서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절).
여러해 전 성지순례 때 바울을 가두었던 감옥이 무너진 빌립보 성터 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과 몇 평도 되지 않은 감옥에서 전도자들은 찬양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절).
이러한 역사는 사도시대에만 아니라 오늘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스캇 목사는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인도 내부에 야만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짐을 챙긴 후 바이올린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수일 후 한 곳에 다다르자 시퍼런 창을 든 토인들이 몰려와 선교사를 둘러쌌는데, 토인들은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로 창끝을 모두 스캇 목사에게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인식한 스캇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를 부르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저 사람들이 나를 찌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으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일절과 이절을 부르는데도 아무 일이 없어서 이상히 여겨 눈을 떠보니 창끝이 모두 땅으로 쳐져 있었고, 토인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엎드려진 것입니다.
'큰 지진' 이것은 분명 천재지변입니다. 옛날부터 지구상에는 많은 지각변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있던 옥문과 차꼬가 터지는 지진은 자연 발생이 아닌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차꼬와 옥문이 열렸는데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물론 그 지진으로 도성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포와 불안에 빠져들어도 사도들은 기뻤습니다. 이유는 그 지진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손길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도 동일할 것입니다.
성도를 박해하던 원수들은 산과 바위, 언덕 밑으로 들어가면서 어린 양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여도 심판받게 되지만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3. 자결하려는 간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27절).
로마의 법은 너무도 엄격하여 죄수가 도망하면 간수가 대신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을 때 헤롯은 파수꾼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행 12:19).
그 때에 다른 죄수들이 도망하지 않은 일을 기적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일한 옥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 그렇다 할지라도 큰 지진과 심판의 공포에 빠져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절).
신적인 위엄이 넘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쪽이 죄수요, 어느 쪽이 간수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 성도들이 누릴 승리요 영광입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9-10).
4. 생명의 복음
J. T. Smith 목사는 종군 목사들에게 "전쟁에서 3분 후에 죽을 부상병에게 전할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지요. 인생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음성을 듣고 간수는 자결을 하려다 말고 바울과 실라 앞에 와서 부복하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절) 하였습니다. 여기에 '선생들아' 하고 부른 것은 원어에는 '쿠리오이' 즉 "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때에 간수의 입장에서 말한 구원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다만 루스드라에서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허메와 쓰스라 이름 붙여 사도들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던 것과 같이 간수도 이제는 사도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아 구원의 은총을 간구한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절) 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복음이 우리는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도성의 한 간수에게는 반석을 깨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으로, 소멸하는 불같은 말씀으로 들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3-34절).
이제는 공포와 불안이 사라지고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여러분!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가리라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당부 드리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것은 우리가 영생 얻기에 넉넉한 복음입니다. 이 말씀에 간수와 그 집은 회개하고 은혜 충만,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옳습니다. 주의 이름은 어느 때 또 누구든지 구원 얻기에 넉넉한 복음임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고 은혜는 강물같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세계가 변하고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또 영원 무궁히 변함없는 생명의 이 복음이 우리 속에 활화산 되어 폭발하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