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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러 시키는 일

주님만 주님만 2014. 9. 27. 11:13



내가 불러 시키는 일



행13:1-12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이스라엘 민족의 유월절을 대조하여 진리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자연의 운행질서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자 없으므로 이와 같은 비교가 일반 계시적인 면에서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나 성경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이방인의 해방을 특별 계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 받은 출애굽 사건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속의 언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조상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특별 계시의 언약이 없어서 소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인류의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로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12장까지를 일명 베드로 행전이라 한다면 13-28장까지는 바울 행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편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기록된 내용이고, 후편은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신 분들은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이렇게 사명 받은 전도자들로 인해 복음은 만방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복음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이 피신하여 세운 교회로서(행11:19),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행11:27-30).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일 년 간 머무르며 큰 무리를 가르치는 동안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1:25-26).

안디옥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1) 금식하며 기도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절).

여기에 나온 이름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크게 활약했던 인물들은 없으나 그들을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인물들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는 사람 곧 은혜를 힘입은 사람이 주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킨 자들이요 또한 적극적인 믿음으로 진리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순절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은 충직한 청지기들이었습니다. 어떤 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일까요? 안디옥 교회같이 충직하고 믿음이 큰 인물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오늘도 함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대 변혁이 일어날 줄 압니다.

여러분! 분발하고 경성하고 깨어서 기도합시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믿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의 지시에 순응한 교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로 지혜와 능력, 영광이 동등함을 믿습니다. 이는 기독교회의 기본 교리입니다. 물론 이 진리는 받아들이면서도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이단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어떠한 은사나 감화력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불길 같은 은혜가 내게 임하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불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떠나 얼마 동안 해외에 나갔던 사람이 돌아올 때는 가족들에게 줄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격보다 사랑의 선물이므로 모두가 귀중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한 것은 가족들에게 돌아온 그 사람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보다 보혜사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나마나욧에서는 하루 종일 옷을 벗고 예언을 하였으나 성령과는 무관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절).

이렇게 금식하고 기도하던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또 그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3절).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밝게 하실 때에도,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이 은혜가 귀중합니다.

이 은혜의 손길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영광받기를 기뻐하시든지 주의 뜻을 이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혜 있는 총독 서기오 바울

바나바와 사울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중동과 소아시아 중간에 있습니다. 오늘에는 세계적인 선교 조직망을 가지고 있는 예수 전도단이 그 곳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 사는 주민은 헬라인과 터키인으로 그들 사이에 분규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먼저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들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시 섬을 가로질러 100km 떨어진 바보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라 하는 박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이러한 마술사를 좋아하였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7절).

그가 전도자의 말을 듣고자 한 것은 본래부터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술사 바예수와 같은 어떠한 마술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중요합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8절).

엘루마는 아라비아어로 '지혜 있는 자' 라는 뜻이며 '박수'와 같은 의미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로 미혹하여 멸망으로 빠지게 하고 오늘도 진리를 대적합니다. 어둠에 속한 자는 마귀의 말을 믿을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자는 진리에 순응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저주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9절).

여기서부터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순위가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고, 제2차전도 여행 때부터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의 전도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바울은 기독교사에 있어서 기둥 같은 일꾼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이유를 알기가 어려우나 라틴어로 바울은 '작다'(고전 15:9)라는 의미임을 보아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바울은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향해서 저주합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0-11절).

어떻게 생각하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당했던 일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사울은 알지 못해 진리를 대적했다면 박수는 이질적인 존재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도 박수는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엘루마에게 왜 영영 어두워져서 앞을 보지 못하리라 하지 않고 '얼마 동안'이라고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내린 저주로 인해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나타났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2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의 원수와 대적을 심판하므로 더 큰 영광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주의 복음이 신적인 권위로 증거 되어 열매 맺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4. 되돌아간 요한

"살라마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5절).

이 요한은 마가 요한입니다(15:37). 문제는 요한이 전도자로서 본연의 임무를 이행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데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의 타락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복음사역에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심히 다투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행 15:37-41).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왜 되돌아갔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추측이 있습니다.

① 안디옥에서 출발할 때 구브로 전도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② 바나바의 생질로 바나바가 지도적 입장을 잃은 데 대한 불만으로

③ 아직 청소년으로 가족을 못 잊어서

④ 바울이 이방인과 회식하는 자유적 태도에 동조할 수 없어서

⑤ 과격한 전도 여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⑥ 바울이 지병을 앓고 있으므로 이를 두려워해서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주님께 불림을 받은 일꾼이라면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히 10:38).

주의해야 할 것은 내게도 이러한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마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9-11) 하였습니다.

마가는 순간적인 과오를 크게 뉘우치고 그것을 분발의 계기로 삼은 줄 압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우리는 그 일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고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충성 일념으로 주님을 섬긴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도니라"(딤후4:7-8).

우리 모두 주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