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과 은혜
덕과 은혜
행 6:1-6
마귀의 계략은 끝이 없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 역사가 일어난 후 한 자리에서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들로 구원받는 숫자가 더해지자 마귀는 제사장들을 충동하여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시험이 먹혀들지 않자 이제는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성물로 시험을 하더니, 다시 구제와 봉사하는 일로 화목을 깨뜨리는 시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원망하는 일이 작은 일이라고 방치하면 그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짐을 나누어지고 마귀의 올무를 물리치기 바랍니다.
1. 크게 늘어난 성도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1절).
"그 때에" 이는 오순절 이후입니다. 또 '제자'라는 용어도 훈련받은 일꾼이 아닌 일반 성도를 두고 지칭한 것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줄 압니다. 이것이 곧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교회가 이룩할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급격히 늘어나는 성도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어떻게 믿음으로 무장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손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 받는 인적 자원을 바로 흡수할 어떠한 조직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조직이라 하는 것은 마치 학생이 늘어나면 이를 수용할 교실과 교사가 있어야 하고, 환자가 늘어나면 병실과 의사가 있어야 함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서울 인구가 천만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입니다. 여기에 주변 위성도시까지 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됩니다. 만일 이렇게 많은 사람을 통제할 법이 없다면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의사 표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선, 후진국을 구별하는 가장 큰 척도는 준법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준법정신은 국민의 기본적인 행동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인데 거기에 다른 도로망과 교통질서가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가 또한 미국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자동차 수출을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늘어난 자동차로 인해 교통지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숫자로 세계 1,2위인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고, 세계 50대 교회 중 거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인데도 우리나라의 문화수준과 사회질서는 어떻습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기독교가 책임을 져야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개척 교회 나가는 것이 짐스럽고, 그래서 큰 교회 뒷자리에서 손님 교인으로 예배만 참석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믿음에서라면 나무랄 수 없겠지만 교회는 난민 수용소가 아닌, 천국 건설에 이바지할 일꾼을 양성하므로 숫자에 연연하기보다 얼마나 알찬 일꾼을 만드느냐에 주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구제와 원망
좋은 일을 하는데 원망을 듣는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하니"(1절).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는 모두 유대인의 혈통입니다. 그러고 보면 초대 교회 성도 역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출발한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라면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요, 히브리파 유대인은 본국에 남아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고의적으로 히브리파 과부들만 구제하고 헬라파 과부들은 외면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늘어난 그 숫자를 사도들이 골고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은 히브리파 과부들은 먹고 마시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굶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사역에 힘쓰리라"(2-4).
이는 사도들의 구제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겨를도 없이 구제만 일삼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은혜 받은 후 자기의 재산을 제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사도들의 발 앞에 다 바쳤으므로 사도들이 그것을 관리했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물질 구제가 귀중할지라도 영혼 구원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구제 사업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의 소리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물론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지엽적인 문제요 더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일곱 집사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절).
여기서 일곱 집사를 세운 이유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a. 성경의 성수
b. 일곱 영의 선물
c. 예루살렘의 일곱 행정 구역
d. 3인의 히브리인, 3인의 이방인, 1인의 개종자
e. 그 당시 약 7천 명 교인의 대표자
f. 7일의 봉사
g. 실제적 필요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보다는 사도들이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정한 기준에 부합되는 숫자를 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줄 압니다. 왜냐 하면 이후 어느 교회에서도 집사의 직분을 세울 때에 일곱이라는 숫자를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봉사할 직분자는 신앙 인격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제비뽑아 세운 집사의 기준을 보면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조직체이므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직분을 세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개중에는 어떤 사람에게 직임을 맡기면 잘할 수 있으리라 권유하지만 그것이 위험한 생각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 직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일생 동안 은혜의 사슬에 매인 바가 되어 그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겼듯이 오늘 우리들도 성령 충만으로 맡은 임무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상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혜는 우리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지혜가 중요합니다. 자연을 개발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면 영적인 세계는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 때문에 이웃 나라 일본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성실성, 근면성은 배워야 할 줄 압니다.
기억하십시오. 주의 은혜가 내게 임하면 단순한 기쁨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요, 주를 위한 헌신과 봉사가 기쁨이요, 죽음도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풍성한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면 남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고 살기도 어려운데, 칭찬 듣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줄 압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칭찬에는 인색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쉽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칭찬을 듣고, 못 듣는 것은 맡은 임무에 충성과 불충성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즐겨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사도들의 임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사역에 힘쓰리라"(4절).
사도들의 직책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계승하는 임무입니다. 교회의 탄생으로 세움 받은 직임은 구약 시대 성직 제도와는 달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직임은 레위 지파와 아론의 계열에서 성직을 맡았으나,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혈통과는 관계없이 성령으로 기름 부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 합당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특히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에도 충만하여 복음 사역과 함께 교회 안에서의 어떠한 일도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리라"고 했을까요? 그것이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누구를 편애해서 구제를 하였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다루기에 무리가 되었듯이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질로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임무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사역이 메마르지 않도록 각기 맡은 임무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모든 지체가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때 몸을 지탱하게 될 뿐 아니라 마음의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원망할 일이 있습니까?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을 감사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위력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는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에 달려있는 줄 압니다.
데이비드 소퍼는 "수감된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감옥은 수도원으로 승화될 것이고 수도자가 불평의 마음을 가질 때 수도원은 감옥으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고 형제를 돌보는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쁨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