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
행5:1-11
오순절의 사건으로 탄생된 초대 교회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유대인들로 인한 불같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의 열의는 더욱 더 불타 올라 구원받는 성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3천 명 또 5천 명, 드디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 저주받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외부적인 시험도 주의해야 하지만 내부적인 시험에 더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사도행전 4:32-37까지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교회로 아름다운 헌신과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이라 하는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 은혜가 중요합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결과론이 되겠습니다마는 만일 그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주와는 상관이 없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 헌신하는 사람이 복을 받아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언제든지 또 무엇이든지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 순종하십시오.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헌신하여 성모가 되었고, 바울은 헌신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존귀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열매 맺는 은혜를 힘입기 바랍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쳤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축복과 저주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닌 순전히 물질로 인한 시험이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고 네게 있는 모든 소유를 바쳐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 할 수가 없지요.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없듯이 진리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육신의 양식은 될지라도 영생의 양식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 받을 육신의 생각에서 돌아서서 영의 생각을 따라 생명과 평강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2. 축복과 저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1-2절).
아나니아는 성물을 도둑질하였고 삽비라는 이에 동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물질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물질이라도 취해서 복이 되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욕이 되는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물욕에 치우칠 때 영혼을 잃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만 가져가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2절).
생각해 보면 그런 정도의 결단도 대단하다 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 때 강제 수단을 동원해서 물질을 가져오게 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랬다면 순수하게 믿고 따르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내게 임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거역하거나 소멸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복 받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기억할 것은 생명과 성령의 역사에는 거룩한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28, 38).
하실 때에 마리아의 헌신으로 도성인신의 새 역사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주의 뜻을 거역했거나 마리아의 헌신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차질을 빚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의 영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3-14).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고 나를 통해 영광 받기를 기뻐하실 때에 육신의 생각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무엇 때문에 영광의 문턱에서 어둠으로 떨어졌습니까? 육신의 생각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죄가 무엇입니까? 계명을 범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에서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죄는 성령을 거역하고 소멸하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주님께서 죄인 된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때 기회를 잃지 말고 거룩한 헌신으로 영광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을 속인 죄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너무도 크나큰 충격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 마음속의 사탄을 볼 수 있었으나 아나니아 부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 30에 메시아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악을 행할 때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에게 예고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마귀가 역사할 때는 진리에 대한 분별의식을 마비시키고 육신의 욕구를 충동하여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멸망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에 매여 종살이하는 마귀의 올무를 주의하십시오. 진리의 멍에 아래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4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 관리권이 보장되어 있을 때 선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나라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자가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도 당대에 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성숙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사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인간이라면 남기는 업적이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
사탄의 유혹을 주의하십시오. 그는 땅 값 일부를 바치는 것마저 후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탄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물욕은 다스려야 합니다.
성도 중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얼마 되지 않아 거액의 헌금을 작정하고 절반은 했는데 절반은 하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다가 기회를 얻어 나머지를 한 다음 열 배의 복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대책 없이 요구하시는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께서 내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내가 누릴 영광이요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4. 삽비라가 받은 저주
그처럼 전도자를 박해하고 죽이는 죄는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으나 성물에 관한 죄는 즉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혼이 떠나므로 죽은 아나니아를 젊은 사람들이 장사지내고, 세 시간쯤 후에 그 아내 삽비라가 나타났습니다. 저주의 죽음이라 어느 누구도 동정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던 도르가의 죽음과는 대조가 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8절).
부부가 의논하고 저지른 일이므로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부는 같으니까 산다고는 하지만 축복 대신 저주받을 일까지 같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수넴 여인같이 남편과 가정을 복 받게 하는 현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잠31:10)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망령된 행위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멸망으로 빠지게 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은혜 가운데서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9-10).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으나 이는 각본도 연극도 아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충격 요법이나 고성으로 저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한 번의 회개할 기회도 없이 저주받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지은 죄가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에게요, 저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욕이 이렇게 무서움을 알았다면 마귀의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사탄을 물리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더욱 견고해지는 믿음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이는 신앙의 뿌리가 더욱 깊어짐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생명과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진리에 바로 서서 두려움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은 성물에 대한 경각심을 새롭게 해 주는 교훈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고 나를 통해 영광받기를 기뻐하실 때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결단을 내리십시오. 우리 모두 욕된 것, 없어질 것, 썩어질 것을 하늘에 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
행 5:12-32
하나님은 불의와 죄악을 소탕하고 의와 진리의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탄의 올무에 빠져서 성물을 숨긴 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되자, 그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므로 교회 안에는 자연히 영적인 권위로 질서를 잡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사도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13절).
또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절) 하였습니다.
1. 복음으로 나타난 표적과 기사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절).
전도자의 권위주의는 잘못된 것이나 영적인 권위를 잃는 것은 더 큰 불행입니다. 또한 신비주의는 잘못이지만 성령의 은사를 힘입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초대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과 함께 많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주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들이 신의 위엄과 능력으로 역사할 때는 사람들이 경배의 대상으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기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므로 그들이 받은 은사는 복음을 증언하는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 그림자를 통해서 일어난 역사
그 때 병든 자들은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병 낫기를 갈망하였고 성령은 사도들을 그렇게 들어 쓰셨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5-16).
바울의 손수건을 통해서도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 때 베드로가 ‘나는 그림자를 통해서도 여러분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하고 자신을 과시하므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도 병에서 나음받기를 원하는 믿음에서 일어난 역사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따라 주님은 역사를 하십니다.
지난 월요일 밤에 M집사님 내외가 저희 집을 찾아 왔습니다. 반갑게 맞아 들여 찾아온 용건을 물었더니 부인되는 Y집사님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지금 제가 목사님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전과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하기에 "왜요?" 하니 "목사님, 제 귀를 열어주셔서 잘 듣게 되어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이렇게라도 뵙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어려운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본래 한쪽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한다고 저에게 기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소에는 회사에서 근무할 때 사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또박또박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설교도 잘 들리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2) 모여든 무리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의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으면서도 은혜는 선택적으로 내린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 위해서라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손이 하나님의 손길을 대신할 수는 없지요. 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익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으나 믿는 자에게는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믿음을 가진 자는 작게 역사하고 큰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큰 역사가 일어나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하심이 없다"(막9:23)고 하셨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16절).
여기는 선택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힘입은 치유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은 모든 병에서 고침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시기하는 무리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고, 또 은혜가 많은 곳에 시험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안일과 방심은 금물입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7-18절).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자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을 박해하는 그들을 마귀로 간주할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박해한 이유를 살펴보면 시기함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이 교만으로 전락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니 그들의 마음이 불편했을 것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사도들이 믿는 복음이 그처럼 경계하고 또 축출해야 할 사교 집단이라면 은혜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물러가고 병든 자가 고침 받고 뭇 심령들이 회개하고 은혜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으니 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은혜와 진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도자들을 이처럼 박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있었습니다.
1) 스스로 자고하지 않게 하는 은혜입니다.
사람에게서 신적인 위엄과 능력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평생을 찌르는 가시로 고통 받은 바울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하였습니다.
바울도 사람이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약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몸에 찌르는 가시가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2)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주의 종들을 천사와 같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서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떤 경우에는 너무도 힘이 들어 잠시라도 멍에를 내려놓고 쉬어 갈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환란의 길이요, 박해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그래도 기뻐할 것은 이것이 주님이 받으신 고난이요, 이 길이 주님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 더 큰 은혜를 힘입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19-20절).
베드로가 옥에서 건짐 받은 기적의 체험은 12장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원수들이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매질할 때는 왜 방치해 두셨을까’ 하는 마음은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할 일은 잠시 받는 환란보다 주의 은혜는 너무도 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들고 가난한 것은 자랑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받게 되는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귀중합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한가할 때 능력 받아 역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모두가 불같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받은 은혜입니다.
여러분! 나에게만 왜 이렇게 가혹한 시련이 닥치는가 걱정을 하십니까? 내게 임하는 은혜는 더 귀중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회개를 모르는 원수 무리들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절).
아무리 마음이 강팍하다 할지라도 분명히 옥에 가둔 사람이 다시 성전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했다면 이 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경위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무시해버린 채,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하고 소리쳤던 때가 언제인데 이제는 사도들이 복음전하는 이 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하고 사도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다고 그 혐의를 벗을 수가 있습니까? 오히려 성령을 모독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죄를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기회를 잃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옳은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렇게 엎드러진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과거에 지은 죄를 변명하려 하지 말고 엎드려 회개하여 사유의 은혜를 힘입기 바랍니다.
4. 사도들의 증언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0-31절).
비록 짧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핵심을 다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상의 하나님이라면 유대인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는 눈이 어두워지고 깨닫는 마음이 둔하여져서 눈앞에 펼쳐지는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도 부인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우리는 보고, 듣고, 또 믿고 순종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 땅 끝까지 진리의 증인되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