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행2:1-13
사도행전에서의 신학과 사역의 중심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오늘도 보혜사 성령을 통해 복음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 때와 기한
세월은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이는 의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이 없으며 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와 기한이라고 하면 성격이 달라집니다. 만물들은 때를 따라 변화를 가져오고, 또 생육과 번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때와 기한을 통해서 생의 의미와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패는 기회 곧 "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2:1) 시간의 개념을 살펴보면,
① 선행된 시간(과거) ② 동시를 가리키는 시간(현재) ③ 다가오는 시간(미래)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오순절이 이미 이르렀다는 것은 두 번째 곧 현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일은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10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이를 밝혀 "열흘 후에 성령이 임하리니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는 주님의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1) 주님을 향하는 믿음의 바른 자세를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를 마친 후, 귀염둥이 아이가 유행하는 독감으로 고생을 하여 목사에게 기도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심방을 가는 길에 "목사님, 우리 아이가 언제 아팠던가 할 정도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저도 기도받을 것을 잘못했어요. 사실 저도 몸이 안 좋거든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광받기를 기뻐하신다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1:7).
이는 제자들이 무관심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역에 이르려고 하기 보다 내가 해야 할 본분을 다하여 그날을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행2:1).
무슨 말씀일까요?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기회가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순절 강림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늘도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은혜 충만, 진리 충만, 능력이 충만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난 징조
징조는 어디까지나 징조일 뿐 징조가 성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징조는 동일한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에 나타난 형상입니다.
1)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절).
성령은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편재성입니다.
요리문답에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신이시니 안 계신 곳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장소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성령이 시공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언제, 어디에, 또 누구에게든지 받을 준비가 되면 얼마든지 역사를 하십니다.
2)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절).
혹자는 이 은혜를 방언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혀가 아닌 타오르는 불꽃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바다와 요단이 물러가며 산들과 작은 산들이 어린양같이 뛰놀던 것같이(시114:4-5) 성령이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 성령의 은사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4절)고 했습니다. 유의할 일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와 성령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방언만이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이므로 바울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가운데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4-7).
그런데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므로 분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하였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보십시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6).
여기서 무엇이 여러 가지이며, 또 무엇이 하나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도 중요하나 하나가 더 중요함은 모든 것이 하나, 즉 주로 말미암아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사라면 주 안에서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유익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다음에는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에서의 유익이며, 또 덕을 세움과 자신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지 말고 은혜의 빚진 자로, 충성된 청지기로 각기 맡은 사명을 따라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복음의 증인들과 구원받은 청중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5절).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 내시의 경건을 받으시고, 백부장 고넬료의 경건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각국에서 모여든 이 무리들에게도 성령으로 증언하는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다(41절)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나타난 성령의 은혜는,
1) 복음을 전하는 입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6-8절).
이 부분에 대한 주석가들의 견해는 "그 때에 듣는 자들의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각국의 방언을 할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성령은 언어 장벽을 능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전도 폭발 훈련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될 줄 압니다 그러나 훈련 받기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묻는다면 복음에 대한 사명감이 새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된 자와 한가한 사람이 받을 상급은 동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분발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모두가 입이 열려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복음을 듣는 귀가 열려졌습니다.
제자들이 각국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들었던 무리들이, 이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듣는 귀가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듣기 위해 히브리 방언을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할렐루야, 아멘과 같은 전문적인 용어는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의 말과 글로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5. 의혹하며 조롱하는 무리들
밭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복된 성도와 거역하는 죄인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역사하는 광경을 접하고도 어떤 사람은 의심하는가 하면 어떤 그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며 복음을 외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자이며, 어떤 사람이 불행한 자입니까? 구원 받을 기회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외면하고 등을 보이는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구원의 은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손길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내게 임하였던가요? 영광스러운 복음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여도 거기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가 임했던 것같이 오늘 이 자리에도 주의 성령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입이 열리고, 듣는 귀가 열리고, 깨닫는 지각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 부르심을 받은 충직한 청지기로서 주의 사역에 충성을 다하여 의의 면류관 받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